“하느님은 항상 저의 편이었어요. 그 남자는 가정 때문에 수진 씨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죠. 정확하게 말하면 수진 씨가 그 남자를 위해서 그와 헤어짐을 선택한 거죠. 그리고 그녀가 핑곗거리는 바로 저를 잊지 못했다는 이유였어요. 그때 저는 너무 기분 좋았어요. 수진 씨의 대타 애인으로서 수진씨와 함께 연기를 했었죠. 그리고 그 남자는 이 연기를 믿었고 우리가 다시 만난다고 믿었었죠. 그 남자와 헤어지고 수진 씨는 저에게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서, 정확하게 말하면 저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아서 저와 관계를 했었어요.” 계지원은 눈빛이 흐려졌다. 마치 그날밤의 아름다움을 회상하는 듯해 보였다. “저는 수진 씨가 그날 밤을 원하지 않는 걸 알고 있었어요. 어쩌면 수진 씨는 그 남자와 헤어지려고 마음을 먹으려고 저와 관계를 한 것이였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그날 밤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밤이었어요. 이튿날 촬영을 가기 위해서 저는 빨리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떠날 때 수진 씨는 아직도 자고 있었어요. 그녀를 깨우기 싫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쪽지를 남겼어요. 촬영을 마치고 돌아와서 그녀에게 청혼을 하려고 생각했었죠. 그녀가 거절하던 수진 씨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던, 저는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수진씨의 손가락 사이즈에 맞게 결혼 반지를 맞추고 프로포즈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고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촬영장에서 돌아올 때 저는 사고를 당했어요. 차는 절벽에서 떨어졌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거죠.” 예수진의 눈물이 끝내 볼을 타고 떨어졌다. 그녀는 그날 밤 오랫동안 그를 기다렸었다. 사실 그녀는 그날 밤 원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과 계지원이 예전처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계지원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이를 받아들였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왔다. 만약 그녀가 만약 계집원이 그녀를 그토록 사랑하고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하기 위해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 사고를 당해 죽을 뻔한 사실을 알았다면 결코 떠나
“그때부터 수진 씨는 저의 세상에서 사라졌어요. 저도 더 이상 그녀를 찾지 않았고 그녀도 저에게 연락하지 않았죠. 우리가 가장 친밀했을 때 그렇게 타인보다 못한 사이로 된 거죠. 다시 만났을 때는 ‘배우님, 자리에 앉아주세요’ 무대였어요. 그때 그녀가 다시 연예계 돌아온 거죠.” 계지원의 매력적인 음색이 현장을 울렸다.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기쁘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어요. 너무 복잡한 마음을 그녀에게 전달할 방법이 없었어요, 그녀가 싫어할까 봐. 하지만 저는 수진 씨의 매력을 얕잡아 본 거죠. 저는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녀를 보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녀의 생활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나 마음속에는 그녀와 다시 함께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미치는 줄 알았어요. 항상 하느님은 저의 편이라고 생각했어요. 절망의 순간에 저에게 희망을 보게 하니깐요. 그날 하연을 처음 보게 되었어요. 너무너무 귀여운 여자아이였죠. 하연은 수진 씨의 딸이에요. 저는 그때 하연이 저의 딸이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이후에 하연이 아빠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죠. 그래서 수진 씨에게 아이가 있다는 뉴스를 접하자마자 그녀를 찾아갔어요. 수진씨가 연예계의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연예계 진출을 위해서 육씨 가문과 멀어졌고 혼자 연예계 돌아온 거죠. 그래서 저는 수진 씨가 저와 함께한다면 외부에 우리가 결혼을 은밀히 진행했고 하연은 우리 아이라고 속여서 말하면 수진 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조금은 낮아질 거라고 얘기를 했죠. 그녀도 동의했고 그렇게 제가 꿈에도 그리던 그녀를 갖게 되었어요.” 현장의 많은 기자들은 계지원의 말에 감동했다. 화면에서의 악의적인 댓글들도 모두 사라졌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우여곡절이 담긴 사랑 이야기에 오늘 기자회견의 주제도 잊어버렸다. 예수진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가슴에서 느껴지는 아픔과 따스함을 느낄 뿐이었다. “이후의 일들은 여러분들이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수
“저도 응원합니다.” 기자들도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은 사람들에게 찬양받을 만해요. 저는 모든 사람들이 계 감독님과 수진 씨가 한 거짓말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랑은 당신들의 것이에요.”기자들의 말에 계지원은 예수진의 손을 더욱 꼭 붙잡았다.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이 자리에서 국민들 앞에서 수진 씨에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수진 씨 앞에서 긴장해서 입을 열지 못할 때도 있었어요. 이번 사고가 아니었다면 저는 영원히 마음속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계지원은 고개를 돌려 예수진을 바라보았다. 예수진은 눈이 빨개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녀를 계지원은 빤히 바라보았다. 바보, 지금 울고 싶은 사람은 바로 그였다. 그는 정말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는 그녀가 자신 곁에 돌아온 것이 너무나 다행이라고 여겼다. 어느 날 갑자기 잠에서 깨면 지금 이 순간이 꿈으로 되는 건 아닐가.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는 자리에 그녀가 있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한동안 계지원은 숨을 크게 쉴 수도 없을 만큼 조심스럽게 생활했다. 지금의 아름다운 생활을 깰까 봐, 그는 지금 이 모든 게 한순간에 사라질까 봐 너무나 두려웠다. 그는 손을 뻗어 긴 손가락으로 예수진의 볼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지 마요, 너무 마음 아파요.” 예수진도 울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 앞에서 우는 모습을 극도로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없었다. 예전에 묵묵히 상처받았을 계지원만 생각하면 그녀는 마음이 아파 울고 싶었다. 배우로서 그녀는 자신이 이렇듯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모습에 혀를 차고 싶었다. ‘지금 실시간 인기 검색어가 [예수진 기자회견장에서 눈물 쏟아]로 되어 있겠지.’“당신이 좋아하는 거라면 마음대로 해요.” 계지원은 자상하게 말했다. 그때도 예수진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때 계지원이
예수진은 가슴이 너무 아파왔다. 이런 계지원을 어쩌면 좋을까? 그는 왜 이렇게 좋은 사람이란 말인가? 그녀가 예전에 그를 원망했을 때 그는 도대체 어떻게 견뎌 왔을까? 그녀의 눈물이 주루룩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예수진은 정말 눈앞의 남자를 볼 때 가슴이 아려왔다. 지금 당장 자신의 심장이라도 그에게 꺼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지금 당신을 너무 사랑한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사랑할 거라고. “좋아요.” 그녀가 울음을 삼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지원 씨의 아내가 되고 싶어요.” 현장에서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마치 아름다운 로맨스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댓글에도 축하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축하합니다. 진짜 눈물을 쏟았네요. 분명 욕하려고 왔는데 지금은 응원하게 됐네요.] [계지원씨 정말 대단합니다.] 계지원에 대한 댓글은 화면을 가득 채웠다. 계지원은 떨리는 두 손으로 반지를 들어 예수진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사이즈는 딱 맞았다. 예수진은 그때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눈이 나붙기던 그날 계지원이 희망으로 가득 찼을 때 그녀는 그를 떠났었다. 그렇게 한 통의 전화로 그들의 사이는 끝났다. 만약 그녀가 계지원을 조금만 더 믿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계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예수진은 그런 그를 부축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의 눈물을 흘렸다. 예전에 그들은 평생 자신들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처럼 행복한 순간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둘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현장의 박수가 쏟아졌다. 그렇게 한참이나 안고 나서야 계지원은 예수진을 놓아 주었다.그는 단 한 순간이라도 그녀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자신이 품 안에 꽉 껴안아 떠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는 먼저 중요한 일을 해결해야 한다. 둘은 다시 각자의 위치에 섰다. 예수진은 계속 차오르는 눈물을 닦았지만 눈물은 계
하지만 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눈물은 계속 흘러나왔다. 계지원은 한 손으로 예수진의 손을 꽉 잡고 모든 기자에게 말했다. “오늘 수진씨와의 이야기를 대중들에게 알려준 것 외에도 육씨 거문에게 저희 입장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기자들도 한껏 긴장하여 계지원을 바라보았다. 계지원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예전에는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많은 일들을 저는 습관 쪽으로 감추고 살았어요. 저에게 수진 씨 외에는 모든 일들이 중요하지 않았어요. 저는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오랜 시간 그렇게 지내왔어요. 하지만 오늘 저는 확실하게 말하겠습니다. 수진 씨는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녀는 피해자입니다. 당신이 겪었던 치욕을 수진 씨에게 던져놓을 이유가 없습니다. 몇 년 동안 당신이 수진 씨에게 했었던 모든 일들은 당신의 사리사욕입니다. 몇 년 동안 당신을 인내한 것은 우리가 혈연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당신이 가족에게 잘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의 신분을 알고도 주저하지 않고 나를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로써 저를 속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수진 씨를 사랑합니다. 내 목숨보다 수진 씨를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수진 씨에게 상처를 줄 수 없습니다. 그건 당신도 포함입니다. 당신의 협박도 이제는 통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명확하게 알려주겠습니다. 육씨 가문의 도움을 저는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남매 사이의 응어리는 당신의 행동에 달렸습니다. 만약 당신이 수진 씨를 받아들일 수 없고 계속 수진 씨를 괴롭힌다면 나도 수진씨를 보호하기 위해서 당신에게 상처를 줄 겁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다시 한 번 경고하겠습니다. 육씨 어르신이 돌아갔을 때 당신에게 말했었죠. 수진 씨를 괴롭히지 말라고. 수진 씨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저도 지금 비밀을 하나 알려 줄까 합니다. 육씨 어르신이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저
“그럼 예전 일 때문에 당신에게 계속 묶여야 한단 말인가요?” 계지원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수진은 옆에서 흠칫 놀랐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육은숙이 두려웠다. 아까 예수진이 전화를 받으라고 했었지만 육은숙이 계속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녀도 육은숙의 성격을 잘 알았다. 목표에 다 도달하기 전까지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계지원이 받지 않는다면 육은숙은 받을 때까지 전화를 할 것이고 집까지 찾아올 것이다. 계지원이 전화를 받자 예수진은 심지어 마음속으로 준비를 마쳤다. 계지원은 육은숙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육은숙에게 욕을 엄청나게 먹을 것이다. 예수진은 그와 함께 육은숙을 맞서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계지원은 너무도 강하게 나왔다. “묶어둔다고 네가 묶여지니? 우리는 한 가족이야. 계지원, 너랑 나는 육씨 가문의 피가 흐르는 사이야. 예수진은 타인이고.” 육은숙은 화가 나서 흥분하여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에 대한 칭찬만 들어왔고 이렇게 자신을 하찮게 대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기에 육은숙은 계지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계지원에 대한 시간의 투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육씨 가문은 항상 핏줄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건 모든 가문 사람들이 그러했다. 계지원이 육씨 가문 핏줄이 아니었을 때도, 어르신이 데리고 온 사람이기에 가문의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잘 대해주었다. 이건 가풍이었다. 하지만 계지원은 지금 한 여인 때문에 육은숙과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육은숙은 정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타인이 아니에요. 내 아내예요, 누나.” 계지원이 갑자기 육은숙을 불렀다. 예수진은 그가 다른 사람을 부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기억 속에서 그는 어르신을 아빠라고 부른 적이 거의 없었고 육은숙을 누나라고 부른 적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가 누나라고 부르다니... 예수진은 깜짝 놀랐다. “아까 기자회견에서 모든 사실을 말했어요. 협박하는
조용한 공간에서 그들의 숨소리와 심장박동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수진 씨." 계지원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가 갑자기 입을 열자 예수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모습에 계지원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눈빛은 마치 수백만 개의 별들이 반짝이는 느낌이었다. 나이를 먹어도 그는 이렇게 맑은 눈빛을 지니는 매혹적인 남자였다. "나 때문에 놀란 거예요?"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말하니까 깜짝 놀랐잖아요." 예수진이 투덜거렸다. "오늘 기자회견에서 일을 말하는 거예요?" 예수진은 가슴이 떨려왔다. 기자회견에서 계지원이 했던 말만 생각하면... 감정이 복잡해졌다. 예수진은 숨을 한껏 들이쉬고 천천히 말했다. "지원 씨, 나는 정말 당신을 오랫동안 원망해 왔어요. 알아요? 왜 나한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거예요?" 예수진의 눈시울이 순간 붉어졌다. 예전에 억울했던 기억만 생각하면, 계지원이 견뎠을 아픔만 떠올리면 가슴이 아려왔다. "당신이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요. 삼촌과 연애라니, 누가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잠깐 역겨운 게 낫죠. 역겨운 게 당신을 원망하는 것보다 낫죠." 그 정도란 말인가.계지원은 예수진이 그의 핏줄을 알았을 때 결코 역겹지 않았다. 예수진이었기에 괜찮았다. 그저 절망스러움만 느꼈을 뿐이다. "내 출신을 알고 난 후에 말할 기회가 있지 않았어요?" 예수진이 캐물었다. "그때 당신은 하도경과 함께했었잖아요." 옛기억에 그는 가슴이 다시 한번 짓밟혔다."내가 만약 하도경이랑 계속 함께 했다면 나를 평생 가슴에 묻어둘 건가요?" "그래요." 계지원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의 칼날 같은 대답에 예수진은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나를 빼앗아 오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아니요, 당신의 행복에 비하면 나의 감정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장담해요? 나랑 하도경이 함께하면서 반드시 행복할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는데요?" "그의 곁에서 당신은 너무나
둘은 그렇게 한참을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연은 아빠 엄마가 돌아오자 기뻐서 자리에서 일어나 계지원과 포옹하려 했다. 계집원은 지팡이를 내려놓고 하연을 안으려고 했을 때 예수진에 의해 저지당했다. 하연은 불쌍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계지원도 의아했다. 예수진은 진지하게 하연에게 알려줬다. "오늘 아빤 내 거야. 그 누구도 나한테서 빼앗아 갈 수 없어." "왜?" 하연이는 그녀의 말을 듣자 눈시울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 모습은 너무나 불쌍해 보였지만 예수진은 단호했다. "내 아빠야. 그렇게 빼앗아 갈 수 없어." 하연도 진지하게 맞받아쳤다. "그 전에 내 남편이야." "싫어. 아빠 날 버리지 않을 거지?" 하연이 계지원을 올려보았다. 올려다보는 사랑스러운 하연의 모습은 누구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계지원은 마음이 움직였지만 예수진은 그런 하연에게 지지 않았다. 그녀는 계지원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빠..." 뒤에서 하연이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절뚝절뚝 따라 들어가는 계지원의 모습은 조금 불쌍해 보였다. "엄마, 나빠!" 하연이 울먹울먹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방문은 그렇게 매몰차게 닫혔다. 계지원은 다리가 불편했기에 '쿵' 바닥에 주저앉았다. 예수진도 그런 계지원 몸 위에 넘어졌기에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깔린 계지원은 통증이 그대로 얼굴에 쓰여 있었다. "아파요?" "아니요." 예수진이 대답했다. "당신은 안 아파요? 내가 부축해 줄게요." 예수진이 일어났다. 지금 생각하면 아까의 자신의 모습은 너무 경솔했다. 하연은 너무 강력한 상대였기에 자신이 조금만 물러서도 오늘 그와 밤을 보내지 못할거라 생각했다. 한시도 이 남자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힘껏 계지원을 부축하자 그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아픔이 느껴졌고 갑자기 몸을 일으키자 몸도 휘청거렸다. 예수진은 다시 한번 그와 함께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그를 부축하여 침대에 앉았다. "미
이제 송문수도 정신을 차렸으니 하지수는 본인도 원래의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송문수의 사무실이 워낙 커서 둘이 같이 쓴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그녀는 사무실을 옮기는 건 나중으로 미뤄두고 컴퓨터를 켜기 시작했다.하지수가 OA의 서류들을 훑어보려 할 때 송문수의 비서가 마침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는 하지수를 보자마자 놀란 기색을 비추며 인사를 건넸다.“하 대표님, 오셨어요?”“네, 그런데 어떻게 여기 있어요? 송 대표님이랑 같이 회의 참석한 거 아니었어요?”“회의라니요?”“지금 회의 중 아니에요?”“저희 오전 회의 없어요, 오후 3시에 첫 회의에요.”“그럼 송 대표는 어디 갔어요? 거래처랑 계약하러 간 거예요 아니면 현장 나간 거예요?”어디를 가든 대동하던 비서도 없이 혼자 나선 송문수에 하지수는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대표님 오늘 안 나오셨어요.”“아침에 연락 오셔서 개인적인 일 때문에 좀 늦는다고 저한테 오후 회의자료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저는 그거 다 프린트해서 지금 대표님 책상에 올려두려고 들어오는 길이었고요.”제 손에 들린 서류들을 들어 보이며 말하는 비서에 하지수의 미간은 더욱더 찌푸려졌다.집안일은 다 허영지와 하지수가 책임지고 있는데 출근 시간까지 늦춰가며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일이 도대체 뭔지 하지수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알겠어요, 나가서 일 보세요.”“네.”서류를 송문수 책상 위에 올려둔 비서가 인사를 하며 나가자 서류를 보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버린 하지수는 곧바로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내보았다.[문수 씨, 지금 어디야?][나 회사에 있지, 왜 그래?]보낸 지 1초 만에 온 답장이었지만 내용은 역시나 거짓말이었다.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저를 속이는 건가 싶었던 하지수는 오락가락했던 지난날 송문수의 태도를 떠올렸다.생리가 온 그날만 해도 하지 못해서 안달 나 하던 사람이 생리가 끝났다는 데도 저를 피하는 게 안 그래도 이상했는데 하지수는 설마 송문수에게 이제 제가 필
아까는 앉아서도 잘만 자더니 제대로 누우니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아 송문수는 하지수를 기다리며 한참을 뒤척이고 있었다.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보이지 않은 인영에 그는 문을 살짝 열고 문틈 사이로 거실 쪽을 내다보았다.그리고는 하지수가 아직도 거실에서 티비를 보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사실 송문수는 인내심이 없는 게 아니라 하지수가 그녀가 쓰던 방으로 들어가 버릴까 봐 그게 걱정돼서 확인한 것이었다.그 뒤로도 몇 번 더 훔쳐보던 송문수는 마침내 티비를 끄는 하지수에 깜짝 놀라 침대로 달려가 자는 척을 했다.한편 드디어 티비를 끈 하지수는 먼저 본인 방으로 가 세수를 마친 뒤에야 송문수의 방안으로 들어섰다.자고 있는 송문수를 발견한 그녀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천천히 이불을 들추고 그의 곁에 나란히 누웠다.오랜만에 푹 자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는 싶었지만 하지수는 본능적으로 자꾸 송문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그 때문에 자는 척하던 송문수는 온몸이 경직되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하지수랑만 있으면 몸이 멋대로 긴장하는 거라 그건 송문수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그런데 곧이어 제 몸에 닿아오는 부드럽고 따뜻한 하지수의 온기가 느껴지자 송문수는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를 하는구나 싶었다.하지수가 있으니 평범하던 세상도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다음날부터는 송문수도 일 때문에 바빴고 하지수도 아버님의 생일 파티 준비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둘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사실 둘 중에 더 바쁜 건 송문수였다.그래서 하지수도 평소에는 그 얼굴도 자주 볼 수 없었다.항상 밤늦게 귀가하는 송문수는 터덜터덜 들어와 잠든 하지수를 품에 안고 자다가 그녀가 깨어나기도 전에 출근해버렸다.밤에는 분명 온기가 느껴졌는데 일어날 때는 늘 비어있는 옆자리에 하지수는 못내 서운한 감정도 들면서 송문수가 자신을 일부러 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그리고는 하지수가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에게 입을 맞춰왔다.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입맞춤을 이어나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지수의 입술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엄청 부드럽네.”야한 꿈을 꾸는 게 틀림없어 보이는 남자의 행동에 하지수는 화가 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이제 좀 정신 차리나 했더니 꿈속에서까지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런 여자친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문수는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아 헤맸다.“문수 씨, 눈 좀 떠봐.”생리도 끝나지 않은 와중에 이렇게 꿈을 꾸는 남자랑은 하고 싶지 않았던 하지수는 이번에는 그가 깨어나길 바라며 아까보다 좀 더 힘을 주어 흔들었다.“무슨 꿈이 이렇게 진짜 같아?”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리는 몸에 어지러워진 송문수는 그제야 눈을 뜨며 말했다.“그럼 꿈이 아닌가 보지.”“꿈이 아니라고?!”하지수가 짚어줘서야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한 송문수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꿈에 누가 나왔는데 그래?”누가 나오긴, 송문수의 꿈에 나올 사람은 늘 하지수 한 명뿐이었다.전에는 꿈속에서도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게 현실이 되어버려 순간 당황한 것이었다.하지만 송문수는 턱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은 굳이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나 어떻게 잠든 거야?”평소에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성격인데 이상하게 하지수 앞에만 서면... 속마음을 제대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피곤했나 봐.”진실이라는 게 알아서 다 좋은 건 아니었기에 하지수도 모른 척 말을 돌리는 송문수를 따라가 주었다.괜히 끝까지 캐물어서 상처받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서였다.“매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쩌다 쉬는 날도 밖에서 돌아다니기만 했잖아. 얼른 씻고 자, 내일부터 또 출근해야지.”“너는?”하지수의 재촉에 방으로 들어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걸음을 멈
“맛있어.”처음으로 주방에 들어간 남자가 이런 맛을 낸 건 객관적으로 대단한 일이라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토록 바라는 칭찬을 결국 해주었다.사실 이미 사약 같은 맛일 거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꽤나 달달해서 하지수도 놀라웠다.한편 원하던 칭찬을 들은 송문수는 신나서 채널을 돌리며 물었다.“이거 맞지?”“응.”“법률 채널이네?”여자들은 다 예능이나 멜로 드라마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울리지 않게 이런 지루한 채널을 좋아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법 좋아해서 대학 때도 법 배운 거야. 난 이런 거 좋아해.”“그래.”하지수의 말에 그제야 그녀가 변호사였다는 걸 떠올린 송문수였다.그렇게 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변호사라는 직업을 포기했다는 걸 알아차리자 한 번 더 감동받은 송문수는 저도 하지수가 좋아하는 걸 함께 하겠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그녀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나도 같이 봐.”그의 제안이 의외였지만 이렇게 완벽한 판례분석이라면 송문수도 관심 있어 할 것 같아 하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잘 접하지 않던 분야라 처음엔 싫어할 수 있어도 그 속에서 다룬 사건들을 계속 보다 보면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기고 그러면서 법률 지식까지 알게 되니 그거야말로 일거양득일 것이다.역시나 하지수는 법조인답게 바로 프로그램에 빠져들었는데 처음에는 신기해하며 잘 보던 송문수는 시간이 지속될수록 점점 지루해하고 있었다.당장이라도 핸드폰을 꺼내 게임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제가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참고 또 참던 그는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티비에 빨려 들어갈 듯 열중하고 있던 하지수가 정신을 차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송문수는 이미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몸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져 있었고 고개도 반쯤 돌아가 있는 누가 봐도 불편한 자세를 하고도 잘 자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지루하면 지루하다고 말이라도 하지.하지수는 미련한 송문수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담요도 덮어주었다.하지만
송문수를 따라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가지고 갔던 생리대로도 부족했었는데 양까지 많았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생각을 마치고 나니 심심해진 하지수는 자연스레 티비를 켜고 법률 채널을 틀어놓았다.주방에서 돌아치는 송문수는 진작에 잊은 하지수가 전형적인 판례들을 넋 놓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는 마침내 흑설탕물을 다 끓여냈다.맛없는 걸 가져다주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먹어보고 괜찮으면 그때 가져다주라는 소이연의 당부가 있었기에 송문수는 맛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런데 생각보다 괜찮은 맛이어서 그는 용기를 내어 그걸 하지수에게로 들고 갔다.“이게 뭐야?”하지수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친구의 행동에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지만 송문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흑설탕물이야. 뜨거울 때 마셔.”“뭐?”“생리 기간에는 이런 거 마셔야 하는 거 아니었어?”“나 주려고 당신이 직접 만든 거야?”“당연하지, 내가 생리 올 리는 없잖아.”진지하게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려버렸다.어떨 때는 신기하리만치 제 마음을 몰라주다가 또 이렇게 어설픈 모습으로 저를 위해주는 걸 보면 그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송문수는 정말 밉지만 싫어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고마워.”낮에 있었던 그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 살짝 서운했었는데 이렇게 흑설탕물 한번 가져다줬다고 하지수의 화는 또 사르르 풀려버렸다.“어때?”그런데 하지수가 마셔보려고 컵을 든 순간 송문수는 맛을 물으면서 자연스레 채널을 돌려버렸다.한창 판례를 보고 있었는데 또 제 의사는 묻지도 않고 멋대로 채널을 돌려버리는 그의 행동에 하지수는‘사랑이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것과도 같다’라는 가사에 깊은 공감이 가 순간 한숨을 쉬어버렸다.정말 송문수에게는 기대를 품으면 안 되는 것 같았다, 기대하는 족족 그것들이 실망으로 이어지니 말이다.한편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쉰 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황하며 물었다.“맛없어?”“내가 먹어볼 때는 맛있었는데? 너 생리만 아니었으면 내가 다 마
가슴을 졸이며 부둣가에 도착하니 술을 마신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역시나 운전석에 앉아야만 했다.진짜 이런 데이트를 하는 건 자신밖에 없을 것 같아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던 하지수는 집으로 가는 동안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삐진 티를 내고 있었지만 송문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따라부르며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송문수는 오늘이 아주 완벽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집으로 돌아온 하지수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송문수는 그 속도 모르고 또 그녀를 붙잡았다.“왜 오자마자 방에 들어가, 좀 앉아있지.”아직 이른 시간이라 송문수 딴에는 하지수와 함께 티비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나 씻고 싶어.”“나중에 씻어.”“보트 탈 때 몸이 다 젖어버려서 아직도 추워. 나 생리 와서 생리대도 바꿔야 하는 데 그럴 거면 그냥 씻고 싶어.”하지수의 말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여자가 생리 기간일 때는 더욱더 신경 써서 몸을 챙겨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어제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 간만의 데이트라 너무 신난 탓에 그만 까먹어버린 것이다.“먼저 보고 있어, 나 금방 씻고 나올게.”“응.”하지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송문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단톡방에 문자를 보내보았다.[생리 기간에는 어떤 걸 신경 써줘야 하는 거예요?][송문수, 너 생리 기간도 못 참고 하려고 그러는 거야? 짐승 같은 놈.][날 좀 좋은 쪽으로 생각해주면 어디 덧나니? 나 그런 놈 아니거든.][그럼 그건 갑자기 왜 묻는데?][생리 때는 체온 유지에 신경 써줘야 해서 춥게 굴면 안 되고 피곤하지 않게 많이 쉬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술이랑 찬 건 되도록이면 안 먹는 게 좋고요. 하지만 지수 씨 성격이라면 남한테 기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이 정도는 알아서 했을 거예요 이미.]소이연은 이내 송문수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문수 씨는 흑설탕물이나 끓여주세요. 피도 잘 통하게 해주고 생리통 푸는 데에도 효과적이에요. 그리고 흑설탕물은 달달하
하지만 그리 남사스러운 말은 아니라서 하지수는 한마디 더 보탰다.“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입꼬리를 올린 채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려고 일부러 더 너스레를 떨었다.“내가 매력이 넘치는 걸 어떡하겠어.”그 능청스러운 모습에 하지수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하지수, 내가 전에 좀 막살았던 건 인정하는데 그래도 한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하는 사람이야 나. 내가 너랑 잘 만나보겠다고 약속한 이상 절대 너한테 미안할 짓은 안 해.”“응, 알겠어.”하지수는 송문수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다 믿었다, 아니 다 믿고 싶었다.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실망시키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는 바뀔 걸 알기에 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네가 나한테 맞춰주는 만큼 나도 너 실망시키지 않을게.”“알았어.”우쭐대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송문수의 말이라면 늘 이렇게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바로 하지수였다.밥을 다 먹고 난 둘은 해변가를 거닐었는데 붉은 태양이 바다에 걸쳐져 있어 노을이 아주 예쁘게 져 있었다.주변 환경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경치는 봐줄 만해서 하지수의 기분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하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날에 좀 있으면 파도가 더 거세질까 봐 걱정됐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보며 말했다.“문수 씨, 우리 이제 가자.”“가고 싶어?”“응.”“좀 더 있다 가자, 여기 좋잖아.”“좀 있다 보트도 타야 하잖아, 저녁엔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낮에 올 때도 무서웠는데 밤엔 더할 것 같아 하지수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무서워?”송문수는 그런 하지수가 웃긴지 입꼬리를 씰룩이며 물었다.“응. 무서워.”“그럼 가자.”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 송문수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제 의견을 바로 수락해줄 줄 몰랐던 하지수는 어벙벙한 채로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사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도 원래의 그녀였다면 하지 않았겠지만 소이연이 했던 말이 떠올라 한평생 참고 살
“왜 안 먹어?”송문수의 재촉에 하지수는 손으로 게를 잡고 뜯었는데 다른 곳보다는 맛있었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들였던 노력에 비하면 그리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어때? 맛있지?”“맛있어.”하지만 기대에 찬 송문수를 보며 차마 그런 말을 내뱉을 수는 없어 하지수는 웃으며 말했다.“역시 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하지수를 긍정을 듣고서야 드디어 먹기 시작한 송문수는 음식을 집어 먹으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하도경이랑 여기 자주 왔었는데 현경이랑 지원이는 바빠서 같이 몇 번 못 왔었어.”“그랬구나.”“술 마실래?”“나 생리 왔잖아.”영혼 없이 답을 하던 하지수는 신나서 술을 제안하는 송문수에 또 체념한 듯 말했다.반복되는 실망에 기대를 하지 않다 보니 송문수의 무관심이 이젠 원망스럽지도 않았다.“아, 맞다. 그럼 음료수라도 마실래?”“물 줘 그냥.” 그녀의 대답에 송문수는 직원에게 물과 맥주를 부탁했다.지금 술을 마시면 좀 있다 돌아갈 때 운전은 또 하지수의 몫이 되겠지만 오랜만에 신난 송문수를 위해 하지수는 한 번 더 참기로 했다.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한 사람만 계속 참는 건 좋은 연애가 아니라고들 하는데 하지수는 송문수가 기뻐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하지수는 정말 상대방에게 아주 관대한 사람이었다.밥을 먹으면서도 그녀는 간간이 소이연과 예수진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어디에서 데이트하는지 많이 궁금하길래 솔직하게 알려주니 예수진이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진짜 송문수답다, 연애 고자잖아 이건.][지수 씨, 문수 씨한테 거기 별로라고 얘기 못 했어요?][안 했어요, 뭐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아직 서로 알아가는 단계니까 나도 문수 씨가 뭘 좋아하는지는 알아보고 싶어요.][알아가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건 아니죠. 지수 씨, 부부 사이에는 그렇게 내외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사인데 불편한 게 있으면 용기 내서 말해야죠.]소이연의 말에 고개를 들어 본 하지수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거야.”“친구들 말고는 다른 사람 데려간 적도 없는 곳이야. 네 기억에 남을 만한 맛집이니까 기대해.”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또 괜히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영화는 별로여도 식당은 좋은 데로 찾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차가 부둣가에 도착하고 송문수와 함께 차에서 내린 하지수는 울퉁불퉁한 길을 하이힐을 신은 상태로 걷자니 발이 아파왔지만 얼마나 대단한 맛집일까 싶어 애써 참으며 그를 따라 걸었다.그런데 식당은커녕 눈에 보이는 건 보트에 타라고 저를 향해 손짓하는 송문수뿐이어서 하지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바다에서 먹는 거야?”역시나 기대를 하지 말아야 했었던 걸까.송문수는 하지수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그녀를 잡아끌며 보트에 태웠다.곧이어 출발한 보트는 물살 때문에 심하게 휘청였는데 워낙 물을 무서워하던 하지수는 난간을 꽉 붙잡고 몰아치는 파도를 버텨내고 있었다.“와아!”송문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아주 신나 보였지만 하지수는 도저히 소리를 지를 정신이 아니었다.밀려오는 파도에 온몸이 다 젖어버린 그녀는 번진 화장부터 열심히 세팅한 머리까지 지금 걱정투성이였다.데이트한다고 치마까지 꺼내입었는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제 남자 친구 때문에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게다가 생리까지 하고 있는데 여기는 화장실도 하나 없었다.도통 무슨 생각으로 이곳을 데이트코스로 선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라도 서프라이즈가 있을 거라고 본인을 위로하며 하지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하지수가 기대한 서프라이즈는 아니었지만 다른 의미의 놀라움은 끊이지 않았다.파도를 헤치며 달리던 보트는 똑같이 아무것도 없는 해변에 멈춰 섰는데 해변가에 세워진 집으로 가려면 맨발로 거기를 걸어가야 했기에 딱딱한 모래 때문에 하지수는 안 그래도 아픈 발이 더 아파왔다.그래도 아무 말 없이 송문수를 따라갔더니 그 힘든 과정을 거쳐 도착한 곳이 바로 시골 식당이었다.두 사람은 허름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