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눈물은 계속 흘러나왔다. 계지원은 한 손으로 예수진의 손을 꽉 잡고 모든 기자에게 말했다. “오늘 수진씨와의 이야기를 대중들에게 알려준 것 외에도 육씨 거문에게 저희 입장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기자들도 한껏 긴장하여 계지원을 바라보았다. 계지원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예전에는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많은 일들을 저는 습관 쪽으로 감추고 살았어요. 저에게 수진 씨 외에는 모든 일들이 중요하지 않았어요. 저는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오랜 시간 그렇게 지내왔어요. 하지만 오늘 저는 확실하게 말하겠습니다. 수진 씨는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녀는 피해자입니다. 당신이 겪었던 치욕을 수진 씨에게 던져놓을 이유가 없습니다. 몇 년 동안 당신이 수진 씨에게 했었던 모든 일들은 당신의 사리사욕입니다. 몇 년 동안 당신을 인내한 것은 우리가 혈연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당신이 가족에게 잘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의 신분을 알고도 주저하지 않고 나를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로써 저를 속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수진 씨를 사랑합니다. 내 목숨보다 수진 씨를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수진 씨에게 상처를 줄 수 없습니다. 그건 당신도 포함입니다. 당신의 협박도 이제는 통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명확하게 알려주겠습니다. 육씨 가문의 도움을 저는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남매 사이의 응어리는 당신의 행동에 달렸습니다. 만약 당신이 수진 씨를 받아들일 수 없고 계속 수진 씨를 괴롭힌다면 나도 수진씨를 보호하기 위해서 당신에게 상처를 줄 겁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다시 한 번 경고하겠습니다. 육씨 어르신이 돌아갔을 때 당신에게 말했었죠. 수진 씨를 괴롭히지 말라고. 수진 씨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저도 지금 비밀을 하나 알려 줄까 합니다. 육씨 어르신이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저
“그럼 예전 일 때문에 당신에게 계속 묶여야 한단 말인가요?” 계지원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수진은 옆에서 흠칫 놀랐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육은숙이 두려웠다. 아까 예수진이 전화를 받으라고 했었지만 육은숙이 계속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녀도 육은숙의 성격을 잘 알았다. 목표에 다 도달하기 전까지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계지원이 받지 않는다면 육은숙은 받을 때까지 전화를 할 것이고 집까지 찾아올 것이다. 계지원이 전화를 받자 예수진은 심지어 마음속으로 준비를 마쳤다. 계지원은 육은숙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육은숙에게 욕을 엄청나게 먹을 것이다. 예수진은 그와 함께 육은숙을 맞서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계지원은 너무도 강하게 나왔다. “묶어둔다고 네가 묶여지니? 우리는 한 가족이야. 계지원, 너랑 나는 육씨 가문의 피가 흐르는 사이야. 예수진은 타인이고.” 육은숙은 화가 나서 흥분하여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에 대한 칭찬만 들어왔고 이렇게 자신을 하찮게 대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기에 육은숙은 계지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계지원에 대한 시간의 투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육씨 가문은 항상 핏줄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건 모든 가문 사람들이 그러했다. 계지원이 육씨 가문 핏줄이 아니었을 때도, 어르신이 데리고 온 사람이기에 가문의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잘 대해주었다. 이건 가풍이었다. 하지만 계지원은 지금 한 여인 때문에 육은숙과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육은숙은 정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타인이 아니에요. 내 아내예요, 누나.” 계지원이 갑자기 육은숙을 불렀다. 예수진은 그가 다른 사람을 부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기억 속에서 그는 어르신을 아빠라고 부른 적이 거의 없었고 육은숙을 누나라고 부른 적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가 누나라고 부르다니... 예수진은 깜짝 놀랐다. “아까 기자회견에서 모든 사실을 말했어요. 협박하는
조용한 공간에서 그들의 숨소리와 심장박동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수진 씨." 계지원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가 갑자기 입을 열자 예수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모습에 계지원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눈빛은 마치 수백만 개의 별들이 반짝이는 느낌이었다. 나이를 먹어도 그는 이렇게 맑은 눈빛을 지니는 매혹적인 남자였다. "나 때문에 놀란 거예요?"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말하니까 깜짝 놀랐잖아요." 예수진이 투덜거렸다. "오늘 기자회견에서 일을 말하는 거예요?" 예수진은 가슴이 떨려왔다. 기자회견에서 계지원이 했던 말만 생각하면... 감정이 복잡해졌다. 예수진은 숨을 한껏 들이쉬고 천천히 말했다. "지원 씨, 나는 정말 당신을 오랫동안 원망해 왔어요. 알아요? 왜 나한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거예요?" 예수진의 눈시울이 순간 붉어졌다. 예전에 억울했던 기억만 생각하면, 계지원이 견뎠을 아픔만 떠올리면 가슴이 아려왔다. "당신이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요. 삼촌과 연애라니, 누가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잠깐 역겨운 게 낫죠. 역겨운 게 당신을 원망하는 것보다 낫죠." 그 정도란 말인가.계지원은 예수진이 그의 핏줄을 알았을 때 결코 역겹지 않았다. 예수진이었기에 괜찮았다. 그저 절망스러움만 느꼈을 뿐이다. "내 출신을 알고 난 후에 말할 기회가 있지 않았어요?" 예수진이 캐물었다. "그때 당신은 하도경과 함께했었잖아요." 옛기억에 그는 가슴이 다시 한번 짓밟혔다."내가 만약 하도경이랑 계속 함께 했다면 나를 평생 가슴에 묻어둘 건가요?" "그래요." 계지원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의 칼날 같은 대답에 예수진은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나를 빼앗아 오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아니요, 당신의 행복에 비하면 나의 감정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장담해요? 나랑 하도경이 함께하면서 반드시 행복할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는데요?" "그의 곁에서 당신은 너무나
둘은 그렇게 한참을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연은 아빠 엄마가 돌아오자 기뻐서 자리에서 일어나 계지원과 포옹하려 했다. 계집원은 지팡이를 내려놓고 하연을 안으려고 했을 때 예수진에 의해 저지당했다. 하연은 불쌍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계지원도 의아했다. 예수진은 진지하게 하연에게 알려줬다. "오늘 아빤 내 거야. 그 누구도 나한테서 빼앗아 갈 수 없어." "왜?" 하연이는 그녀의 말을 듣자 눈시울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 모습은 너무나 불쌍해 보였지만 예수진은 단호했다. "내 아빠야. 그렇게 빼앗아 갈 수 없어." 하연도 진지하게 맞받아쳤다. "그 전에 내 남편이야." "싫어. 아빠 날 버리지 않을 거지?" 하연이 계지원을 올려보았다. 올려다보는 사랑스러운 하연의 모습은 누구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계지원은 마음이 움직였지만 예수진은 그런 하연에게 지지 않았다. 그녀는 계지원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빠..." 뒤에서 하연이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절뚝절뚝 따라 들어가는 계지원의 모습은 조금 불쌍해 보였다. "엄마, 나빠!" 하연이 울먹울먹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방문은 그렇게 매몰차게 닫혔다. 계지원은 다리가 불편했기에 '쿵' 바닥에 주저앉았다. 예수진도 그런 계지원 몸 위에 넘어졌기에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깔린 계지원은 통증이 그대로 얼굴에 쓰여 있었다. "아파요?" "아니요." 예수진이 대답했다. "당신은 안 아파요? 내가 부축해 줄게요." 예수진이 일어났다. 지금 생각하면 아까의 자신의 모습은 너무 경솔했다. 하연은 너무 강력한 상대였기에 자신이 조금만 물러서도 오늘 그와 밤을 보내지 못할거라 생각했다. 한시도 이 남자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힘껏 계지원을 부축하자 그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아픔이 느껴졌고 갑자기 몸을 일으키자 몸도 휘청거렸다. 예수진은 다시 한번 그와 함께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그를 부축하여 침대에 앉았다. "미
뜨거웠던 분위기는 그렇게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예수진은 사랑의 적수를 낳은 것이다. 계지원은 하연의 부름에 몸을 일으키려 했다. "가지 마요." 예수진은 그런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하연이가 왜 부르는지 가서 보려고요." "하연은 당신을 빼앗고 싶은 거예요." 계지원은 그런 예수진 때문에 웃음을 터뜨렸다. "딸에게 질투하는 거예요?" "맞아요. 질투해요. 나도 아직 만족하지 못했는데 하연에게 왜 넘겨줘요. 이렇게 어렵게 응머리를 풀게 됐는데... 나는 지금 당신이랑 함께하고 싶어요." 계지원은 할 말을 잃었으나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너무나 따스했다. 그는 예수진의 어렸을 때 모습이 떠올랐다.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예수진은 그에게 멀고도 차가운 존재였다. 그가 얼마나 예수진을 그리워했는지 하나님만이 알 것이다. 그의 마음이 서서히 예수진에게 기울어 갔을 때였다. "아빠..." 문 앞에서 하연이 또 불렀다. "착하지? 아빠가 조금 있다가 갈게." "안 돼요." 예수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수진 씨." "내가 가요." 계지원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하윤이와 잘 얘기해 볼게요." 예수진은 말을 마치고 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하연의 불쌍한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하연은 기뻐 고개를 들었지만 엄마를 보게 되자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빠를 찾으러 왔어." "아빠는 지금 엄마랑 할 일이 있어." "무슨 일?" "어른들의 일." "동생을 낳는 일?" 하연은 순진한 표정으로 두 눈을 반짝반짝 그렸다. 예수진은 순간 멍해졌다. 3살짜리 아이가 벌써 안다고? "맞아?" 하연이 캐물었다. "아마도..." 예수진이 비밀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하연이 마치 어른처럼 입을 열었다. "만약 엄마랑 아빠가 나에게 함께 놀 수 있는 동생을 낳는다면, 나는 아빠한테 더 이상 매달리지 않을 거야." 예수진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하연이 벌써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예수진과 계지원은 그렇게 방에서 하루 종일 붙어있다가 아침에 울리는 알람 때문에 깨었다. 밖에서 그들 관련하여 어떤 뉴스가 나오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기자회견장의 분위기는 좋았지만 지금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건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농구팀'을 만드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전에 예능 녹화에 설정해 둔 알람을 예수진이 까먹고 끄지 않아 울린 것이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온몸이 쑤신 그녀는 눈을 감고 핸드폰을 더듬거렸다. 핸드폰을 찾으려 침대를 더듬거렸다. 알람 소리에 깬 계지원이 몸을 일으켜려 했을 때 예수진이 이미 핸드폰을 낚아챘다. 그녀가 눈을 지그시 뜨자 여러 개 부재중 전화가 들어온 것을 발견했다. 가장 최근의 부재중 전화는 소이연이 걸어온 것이다. 소이연은 일반적으로 이른 아침 그녀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녀의 늦잠을 자는 습관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계지원도 그녀의 반응을 알아채고 잠긴 목소리로 긴장하여 물었다. "왜 그래요?" "이연이 나한테 몇 번이나 전화했어요." 예수진은 말을 하면서 소이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계지원이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있었다. 소이연은 그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예수진이 전화를 받지 않자 그에게 건 것이다. 그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연이 전화를 안 받아요." 예수진이 계지원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니겠죠? 최근 도쿄에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나는 몰라요." "이연 씨 일이 아닐지도 몰라요." 계지원이 얼굴은 더욱 진지해졌다. "어쩌면 육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몰라요." 계지원을 답과 함께 육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육가희에게서도 수십 개의 부재중 전화가 걸려 왔다. 예수진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하지만 또 왠지 모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삼촌,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예
예수진은 계지원을 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금 피곤해서 눈을 뜰 수도 없을 지경이고 몸도 많이 힘들었지만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그와 함께 가고 싶었다. 계지원은 예수진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집에서 휴식해도 돼요." "당신과 함께 할 거예요." 예수진은 강경하게 대답했다. "육씨 가문의 일이에요. 당신이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계지원이 진지하게 말했다. "걱정 마요. 아무리 큰일이 생겨도 다시 돌아올게요.""당신이 육은숙에게 협박받는 것을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이 나를 혼자 둘까 봐 걱정하는 것도 아니에요. 당신이 나를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했는데 그럴 리가 없죠." 예수진은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아내로서 당신의 슬픔을 나누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계집원은 머뭇거렸다. 그는 예수진이 육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어떠한 억울함도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우리는 부부에요. 당신의 일은 곧 나의 일이기도 해요. 육씨 사람들은 비록 나랑 사이가 좋진 않지만 당신이랑은 핏줄이기에 당신을 위해서 받아들일 수 있어요."계지원은 놀랍다는 듯 예수진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아마 육씨 가문과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아량이 이렇게 깊다니... "나도 보살은 아니예요. 나는 그저..."예수진은 계지원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불행보다 당신이 나에게 주는 행복이 더 커요. 그래서 그들이 뭘 하든 나는 상관없어요."예수진은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따뜻함을 담았다. 그도 예수진이 이런 말을 하기란 쉽지 않음을 잘 알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감동했다. "가요, 시간 낭비하지 말고." 예수진이 계지원을 재촉했다. 사실 계지원은 이미 준비를 마쳤다. 둘이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그는 이미 옷을 빠르게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은 후 세수를 할 시간도 없이 예수진은 계지원과 함께 방을 나갔다. 문밖에는 가희가 그들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육가희는 계지원을 본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물었다. "삼촌, 왜 이렇게 잔인해요? 지금 엄마가 응급실에 실려 가니 만족스러운 거예요?"예수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육가희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린 것이다. 하지만 육은숙이 지금 수술대에서 있는 모습을 생각하여 그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계지원은 생각과 다르게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네 엄마가 응급실에 실려 간 건 나랑 아무런 관련이 없어. 만약 너랑 네 엄마가 수진 씨에게 악의적으로 굴지 않았다면 오늘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거야." "내가..." 육가희는 반박하려고 했지만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참 후에서야 입을 열었다. "하지만 삼촌은 잘 알고 있었잖아요. 엄마는 이런 충격을 견딜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걸." "수진 씨는 마음이 단단해서 너랑 네 엄마가 그렇게 괴롭힌 거니? 육가희, 네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잖아. 지금 일어난 모든 일들은 우리의 정당방위라는걸." 육가희는 계지원의 말에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반박할 자격도 없었기에 협박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죽어야 삼촌은 마음이 편안할 건가요?""내가 한 모든 것에 대해 나는 후회가 없어."계지원은 또박또박 말했다. 이건 육가희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의 진심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그는 육은숙에게 철저한 복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인정했다. 하지만 그가 온 건 절대로 그의 행동을 후회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인도주의로 가족으로서 할 바를 다 하기 위해서지, 결코 참회해서가 아니었다. 육가희는 눈시울이 붉어져 눈물이 그렁그렁 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계지원도 더 이상 아무런 위로를 건네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예수진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앉아서 기다려요." "네." 예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육가희는 그렇게 옆에서 예수진과 계지원의 달달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원망과 질투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