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가희는 정말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잘못한 건 없어...” 육가희는 여전히 자신을 위하여 변명했다. 그녀는 하도경의 뒷모습을 보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내가 한 모든 건 다 예수진이 나한테 빚진 거예요. 그리고 지금 모든 사람들은 나에게 미안해야 해요.” 그녀는 정말 그들이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도경은 그녀의 절규를 듣지 못한 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육가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다. 그녀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녀는 오늘 일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계지원이 병실을 나온 후 병원이 한 끝자리에서 이후에 일을 준비했다. 하도경은 조용히 그에게 다가와 아무런 말 없이 기다려주었다. 약 30분 쯤 흘렀다. 계지원은 그제서 전화를 끊고 하도경을 바라보았다. 둘은 그렇게 한참이나 마주 보았고 하도경이 입을 먼저 열었다. “미안해요. 저 때문에 수진 씨가 그렇게 됐어요.” 계지원이 고개를 저었다. 하도경과 관련된 된 일은 아니었다. 육가희가 질투에 눈이 멀어 벌인 일이었다.계지원은 육가희가 모든 걸 알아차리고 천천히 변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걱정 말아요. 내가 해결해요. 수진 씨를 절 때 혼자 두지 않아요.” 계지원은 별다른 말 없이 약속했다. 그의 모습에 하도경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조금 씁쓸했다. 하도경은 계지원에게 담배를 한 대 건네주었다. 계집원은 머뭇거렸지만 결국 받아들었다. 둘은 흡연구역으로 간 후 담배를 피웠다.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하도경이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참 이상하네요.” 계지원이 그의 말의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이 수진 씨를 잘 보호해 줘서 수진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고 수진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또 당신이 능력이 너무 강하지 않아서 내가 이를 빌미로 수진씨에게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도경은 말을 하며 담배를 피웠다. 지금 하도경이 느끼는 감정
계지원은 다시 예수진의 병실로 돌아왔다. 예수진은 자신의 뉴스를 아직도 찾아보고 있었다. 화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계지원에게 달린 댓글을 보았을 때 자신을 욕하는 댓글보다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계지원이 병실로 들어오자 예수진이 화가 나 얼굴이 빨개진 모습을 보게 되었다.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누구와 싸울 듯 싶었다. 그녀의 모습의 그는 웃음이 터졌다. 그때 예수진이 그를 발견했다. 웃음이 나오는 그의 모습에 예수진은 할 말을 잃었다. “계지원 씨, 웃을 기분이에요? 우리 지금 끝장났다고요.” “괜찮아요. 끝장나도 당신은 먹여 살릴 수 있어요.” 계지원은 그런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듯 웃었다. “해결 방법은 찾았어요?” 예수진이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는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돈이 필요했던가? 그랬다. 그녀는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녀는 명예와 돈을 둘 다 원했다. 정말 욕심이 끝도 없었다. “계획이 있지만 효과가 어떨지는 모르겠어요. 내일 오후 2시에 기자회견을 열 생각이예요.” 계집원은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기자회견에서는 뭐라고 말할 거에요? 사과 할 건가요? 내가 나서 줄까요? 대본은 있나요? 울어야 하나요?” 예수진은 흥분해서 이것저것 물었다. 계지원은 그녀의 모습에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내일 예쁘게 꾸며서 나오면 돼요.” “예쁘게 꾸미라고요?” 예수진은 더욱 어이가 없었다. “불쌍하게 보여야 하지 않나요? 동정표를 얻기 위해서?” “그럴 필요 없어요.” 계지원은 또박또박 말했다. “내 옆에서 당신은 당당해지면 돼요. 그 누구에게도 잘 보일 필요 없어요.” 예수진은 가슴이 쿵쾅거렸다. 분명히 많은 걱정이 있었지만, 분명히 자신이 타락할 거라 생각했지만, 왠지 모르게 계지원의 말에 그녀는 감동했다. 그와 함께라면 지옥 속으로 걸어가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튿날. 예수진은 검사를 한 뒤 이상이
예수진은 계지원의 담담한 모습을 보며 물었다. “육은숙이 무섭지 않아요?” 계지원이 그녀에게 반문했다. “무서워요?” 예수는 고개를 저으며 담담히 말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다 보여요.” “그러니까 내가 왜 무서워 해야 되는 거죠?” 계집원이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의 말은 마치 예수진이 신경 쓰면 그도 같이 신경을 쓰고 그녀가 괜찮으면 그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계지원은 몇 년 동안 육씨 가문에게 의지하지 않았던가? 지금 육씨 가문은 이미 비즈니스에서 영향력을 끼치지 않지만 여전히 자본력이 상당하기에 밉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계지원의 능력도 상당했기에 가문에서 그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지만 그녀는 계집원이 배은망덕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육씨 가문에게 빚진 거 없어요.” 계지원은 예수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그녀의 생각을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예수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계지원이 자신 때문에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육씨 가문과 계지원은 인연이 있으니 말이다. 그녀는 계지원이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았으면 했다. 오전 11시 그들은 장안시에 도착했다. 계지원은 메이크업 전문가를 불러 예수진을 꾸미게 했다. 그녀는 정말 그가 무슨 일을 벌리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때 그녀가 화려하게 꾸미고 나온다면 더욱 민심을 잃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지원을 무조건적으로 믿었다. 안되면 둘이 같이 욕을 먹으면 그만이다. 예수진은 마음이 단단했기에 욕을 먹는 건 무섭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계지원이 예수진과 함께 기자회견장 현장에 도착했다. 둘은 화려하게 꾸민 모습이었다. 그들의 모습에 현장의 모든 기자들은 감탄했다. 그리고 기자회견장은 라이브로 방송되었기에 수많은 네티즌들이 현장을 보고 있었다. 둘의 화려한 모습이 네티즌들의 댓글은 쉴 새 없이 달렸다. [이게 무슨
계지원의 시선은 분명히 앞의 기자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는 예수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에서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순간 예수진은 갑자기 긴장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계지원이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었다기보다, 그가 이 일을 잘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기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계지원과 함께라면 아무리 큰일이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다시 계지원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또다시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 그렇게 많은 상처를 받았음에도 그를 다시 사랑하지 않기로 맹세했음에도 다시 그에게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녀는 어쩌면 평생 그의 곁을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가 만약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운명이 기구함을 탓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진은 지금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도 계지원의 손을 꽉 잡았다. 그를 믿는다고 행동으로서 그에게 알려주었다. 계지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천천히 그는 입을 열었다. “여러분 조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때문에 저와 수진 씨가 입을 열 수가 없어요.” 계지원의 말에 현장은 조용해졌다. “오늘 저와 수진 씨가 이곳에 나타난 건 지금 저희와 관련해 떠돌고 있는 여론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목하는 문제에 관련해서 제가 하나하나 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대답하기 전에 저와 수진씨 결혼에 대해 설명할 것입니다. 그러니 조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계지원이 말에 현장은 물 뿌린 듯 더욱 조용해졌다. 일부 기자들이 흥분하여 입을 열려고 했지만 계지원과 예수진이 말하기를 기다리며 꾹 참았다. 계지원은 심호흡하며 입을 열었다. “어제 나온 뉴스는 진짜입니다.” 현장은 다시 한 번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기자들이 말을 하려고 했지만 계지원은 입을 열며 기자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예수진도 계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슴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그가 자신에게 많은 일들을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점점 긴장되었다. 그녀는 계지원이 자신에게 숨기는 일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계지원은 다시 고개를 돌려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도 신경질적이던 기자들은 지금 이 순간 긴장되었는지 숨소리 때문에 계지원이 말하지 않을까 봐 숨도 쉬지 못했다. 계지원은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모든 분들이 알다시피 저는 육씨 가문의 입양아입니다. 그리고 육씨 어르신이 입양한 아이입니다. 사실상...” 계지원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비밀은 오랫동안 감추었다. 처음에는 육씨 어르신과 그의 모친만 알고 있었고 그 후에 계원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똑똑한 육현경이 알아챘고 마지막엔 육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국민들이 알게 될 것이다. 계지원은 차분하게 말했다. “사실상 저는 육씨 어르신이의 사생아입니다.” “뭐라고?!”현장의 기자들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예수진도 그 순간 경악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계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 번도 계지원이 육씨 어르신의 입양아가 아닌 친자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육씨 가문에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은 육씨 가문이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도 계지원이 육씨 어르신의 친 아들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그녀야말로 육씨 가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예전에 계집원을 육씨 가문의 개라고 비옷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정말 후회막급했다. “여러분들은 의아할 것입니다. 제가 왜 자신이 신분을 폭로하는지? 이미 이 비밀은 30여 년간 지켜졌고 대외에 알릴 필요는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뉴스로 다른 뉴스를 가리려고 하는 건 아니니 걱정마십시오. 저희 신분의 비밀이 저와 수진씨 감정이 싹트게 된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계지원은 차분하게 말
기자회견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쇼킹한 뉴스에 모든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계지원이 육씨 어르신의 사생아라는 것도 모자라, 예수진이 육씨 가문의 아가씨가 아니라니.”“왜 예전에 아무도 예수진의 신분을 폭로한 사람이 없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예수진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이상해. 한 사람이 연예계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는 게. 육씨 가문이 한 짓이 아닐까?” “예수진이 육씨 가문 대문 앞에 나타났다는 뉴스를 보도 한 적 있었어. 그리고 계지원과 문서아가 연애를 한다는 뉴스도 사라졌었지? 그러고 보니 계지원이 문서아와 연애했었다는 것도 조금 이상해.” “너무 복잡해. 이건 아마 연예계에서 가장 큰 뉴스거리일 것이야.” 기자들은 저마다 수군대기 시작했고 많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오늘 계지원이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대중들과 기자들은 아마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지금 댓글도 불이 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댓글은 [...] 이었다. “여러분 너무 급해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계지원이 입을 열자 현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실 예전에도 저와 수진 씨는 서로를 좋아했어요. 저는 수진 씨가 저를 왜 좋아했었는지 모르지만요. 저는 그때 육씨 가문에서 너무 소심하고 내성적이었어요. 제가 수진씨를 처음 봤을 때 수진 씨는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어요. 피부는 하얗고 얼굴은 너무 아름다워서 인형 같았어요. 그런 그녀가 저를 보며 웃었을 때 마치 하늘의 별같이 반짝반짝 거렸어요. 저는 그때 어머니를 금방 여의었기에 수진 씨에게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육씨 가문에 계속 남고 싶어졌어요.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은 그곳에 남고 싶다는 생각이 그때 생겼어요. 그래서 육씨 가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안간힘을 썼어요. 육씨 가문에서 어느 순간 쫓겨나게 될까 봐. 하지만 육씨 가문에 있으면 있을수록 그들에게서 본받을 점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육현경
그 순간 예수진은 칼에 찔리듯 가슴이 아파왔다. 그녀는 항상 계지원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육씨 가문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그녀에게 잘 대해준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육씨 가문에게 잘 보여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것이라고 여겼다. 한 번도 자신과 함께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그는 원래 내성적이고 쑥스러움이 많았던 아이었다니... 한 번도 계지원이 자신을 거절한 것이 그들 사이의 혈연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도 그녀에게 이 사실을 알린 적이 없었다. 그녀가 상처를 입는 것이 두려워서였을까? 그가 원망스럽다기보다 그들 사이의 사랑이 가여웠다. “저도 어르신을 의심한 적이 있었어요. 어르신이 저와 수진 씨를 갈라놓으려고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육씨의 양자이기에 수진 씨와 함께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었죠. 그래서 저는 몰래 어르신과 친자 검사를 하게 됐어요. 한 번 두 번 하면 할수록 절망했어요. 제가 어르신이 친자임을 믿게 된 거죠. 게다가 저는 수진 씨의 삼촌이 삼촌이었다는 걸요.” 예수진의 마음이 아파왔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계지원이 친자 검사를 하는 화면이 떠올랐다. 그가 친자 검사 결과지를 받아 들고 혼자 아파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의 그녀는 그를 세상 나쁜 쓰레기라고 생각했었다. “수진 씨에게 말할 수 없었어요, 저와 그녀가 혈연관계라는 사실을. 제 인생을 잡아먹을 수도 있는 아픔이었기에 수진 씨에게 저와 같은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수진씨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말했었죠. 가문 사람이기에 잘 대해 준 것뿐이라고 얘기했었죠.”예수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울게 될까 봐 무서웠다. 계지원은 정말 바보였다. 모든 사실을 혼자 감당하다니. 그녀가 얼마나 오랜 시간 그를 원망했었는지 그는 알기나 할까? 몇 번이나 그를 죽이고 싶었는지 그는 알기나 할까? 그가 만약 사실을
“이게 바로 예수진씨가 연예계 생활을 오래 했지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절대 누구에게도 자신이 육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밝히지 않은 이유에요. 그녀가 신분을 폭로하면 가문에서 그녀더러 연예계를 떠나라고 할 테니... 그래서 수진 씨가 육현경씨와의 사이와 저와의 관계가 폭로되었을 때 수진 씨의 연예계 생활을 지키기 위하여 저는 문서아씨와 함께하기로 했어요.” 예수진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계지원을 바라보았다. 모든 기자들도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계지원이 문서아와 함께한 것은 예수진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아니, 계원이 한 모든 일들은 다 예수진을 위한 일이었다. “평생 수진씨와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 큰 전환점이 생겼어요. 그건 바로 수진 씨가 육은숙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죠. 그러니까 저랑 수진 씨는 혈연관계가 없는 사이었어요. 저는 그때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수진씨 아픔보다 너무 기뻤어요. 이건 하늘이 저에게 주는 가장 큰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했어요. 저와 수진 씨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수진 씨 존재는 육은숙에게 너무나 큰 타격으로 되었기에 수진 씨를 연예계에서 퇴출시키려고 많은 일들을 벌렸어요. 저는 육은숙이 수진씨에게 한 모든 일들과 제가 수진씨를 선택했을 때 육씨 가문이 저에게할 짓을 두려워하진 않았어요. 단지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어르신과 한 달 정도 아무 일도 벌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죠. 어르신은 제가 충동적으로 일을 벌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 달 동안 냉정을 되찾기를 바랬죠. 하지만 그 한 달이 또 한 번 저와 수진 씨를 갈라놓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예수진은 옆에서 계지원의 말을 들으며 침묵했다. 하지만 가슴이 너무나 아파왔다. 그는 계지원을 항상 원망했었다. 항상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에게 너무도 많은 일들을 해주었고, 보이지 않는 것에서 묵묵히 많은 일들을 인내했었다. 그녀는 이 순간 그들의 결혼
이제 송문수도 정신을 차렸으니 하지수는 본인도 원래의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송문수의 사무실이 워낙 커서 둘이 같이 쓴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그녀는 사무실을 옮기는 건 나중으로 미뤄두고 컴퓨터를 켜기 시작했다.하지수가 OA의 서류들을 훑어보려 할 때 송문수의 비서가 마침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는 하지수를 보자마자 놀란 기색을 비추며 인사를 건넸다.“하 대표님, 오셨어요?”“네, 그런데 어떻게 여기 있어요? 송 대표님이랑 같이 회의 참석한 거 아니었어요?”“회의라니요?”“지금 회의 중 아니에요?”“저희 오전 회의 없어요, 오후 3시에 첫 회의에요.”“그럼 송 대표는 어디 갔어요? 거래처랑 계약하러 간 거예요 아니면 현장 나간 거예요?”어디를 가든 대동하던 비서도 없이 혼자 나선 송문수에 하지수는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대표님 오늘 안 나오셨어요.”“아침에 연락 오셔서 개인적인 일 때문에 좀 늦는다고 저한테 오후 회의자료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저는 그거 다 프린트해서 지금 대표님 책상에 올려두려고 들어오는 길이었고요.”제 손에 들린 서류들을 들어 보이며 말하는 비서에 하지수의 미간은 더욱더 찌푸려졌다.집안일은 다 허영지와 하지수가 책임지고 있는데 출근 시간까지 늦춰가며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일이 도대체 뭔지 하지수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알겠어요, 나가서 일 보세요.”“네.”서류를 송문수 책상 위에 올려둔 비서가 인사를 하며 나가자 서류를 보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버린 하지수는 곧바로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내보았다.[문수 씨, 지금 어디야?][나 회사에 있지, 왜 그래?]보낸 지 1초 만에 온 답장이었지만 내용은 역시나 거짓말이었다.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저를 속이는 건가 싶었던 하지수는 오락가락했던 지난날 송문수의 태도를 떠올렸다.생리가 온 그날만 해도 하지 못해서 안달 나 하던 사람이 생리가 끝났다는 데도 저를 피하는 게 안 그래도 이상했는데 하지수는 설마 송문수에게 이제 제가 필
아까는 앉아서도 잘만 자더니 제대로 누우니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아 송문수는 하지수를 기다리며 한참을 뒤척이고 있었다.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보이지 않은 인영에 그는 문을 살짝 열고 문틈 사이로 거실 쪽을 내다보았다.그리고는 하지수가 아직도 거실에서 티비를 보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사실 송문수는 인내심이 없는 게 아니라 하지수가 그녀가 쓰던 방으로 들어가 버릴까 봐 그게 걱정돼서 확인한 것이었다.그 뒤로도 몇 번 더 훔쳐보던 송문수는 마침내 티비를 끄는 하지수에 깜짝 놀라 침대로 달려가 자는 척을 했다.한편 드디어 티비를 끈 하지수는 먼저 본인 방으로 가 세수를 마친 뒤에야 송문수의 방안으로 들어섰다.자고 있는 송문수를 발견한 그녀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천천히 이불을 들추고 그의 곁에 나란히 누웠다.오랜만에 푹 자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는 싶었지만 하지수는 본능적으로 자꾸 송문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그 때문에 자는 척하던 송문수는 온몸이 경직되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하지수랑만 있으면 몸이 멋대로 긴장하는 거라 그건 송문수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그런데 곧이어 제 몸에 닿아오는 부드럽고 따뜻한 하지수의 온기가 느껴지자 송문수는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를 하는구나 싶었다.하지수가 있으니 평범하던 세상도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다음날부터는 송문수도 일 때문에 바빴고 하지수도 아버님의 생일 파티 준비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둘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사실 둘 중에 더 바쁜 건 송문수였다.그래서 하지수도 평소에는 그 얼굴도 자주 볼 수 없었다.항상 밤늦게 귀가하는 송문수는 터덜터덜 들어와 잠든 하지수를 품에 안고 자다가 그녀가 깨어나기도 전에 출근해버렸다.밤에는 분명 온기가 느껴졌는데 일어날 때는 늘 비어있는 옆자리에 하지수는 못내 서운한 감정도 들면서 송문수가 자신을 일부러 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그리고는 하지수가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에게 입을 맞춰왔다.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입맞춤을 이어나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지수의 입술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엄청 부드럽네.”야한 꿈을 꾸는 게 틀림없어 보이는 남자의 행동에 하지수는 화가 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이제 좀 정신 차리나 했더니 꿈속에서까지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런 여자친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문수는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아 헤맸다.“문수 씨, 눈 좀 떠봐.”생리도 끝나지 않은 와중에 이렇게 꿈을 꾸는 남자랑은 하고 싶지 않았던 하지수는 이번에는 그가 깨어나길 바라며 아까보다 좀 더 힘을 주어 흔들었다.“무슨 꿈이 이렇게 진짜 같아?”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리는 몸에 어지러워진 송문수는 그제야 눈을 뜨며 말했다.“그럼 꿈이 아닌가 보지.”“꿈이 아니라고?!”하지수가 짚어줘서야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한 송문수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꿈에 누가 나왔는데 그래?”누가 나오긴, 송문수의 꿈에 나올 사람은 늘 하지수 한 명뿐이었다.전에는 꿈속에서도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게 현실이 되어버려 순간 당황한 것이었다.하지만 송문수는 턱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은 굳이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나 어떻게 잠든 거야?”평소에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성격인데 이상하게 하지수 앞에만 서면... 속마음을 제대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피곤했나 봐.”진실이라는 게 알아서 다 좋은 건 아니었기에 하지수도 모른 척 말을 돌리는 송문수를 따라가 주었다.괜히 끝까지 캐물어서 상처받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서였다.“매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쩌다 쉬는 날도 밖에서 돌아다니기만 했잖아. 얼른 씻고 자, 내일부터 또 출근해야지.”“너는?”하지수의 재촉에 방으로 들어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걸음을 멈
“맛있어.”처음으로 주방에 들어간 남자가 이런 맛을 낸 건 객관적으로 대단한 일이라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토록 바라는 칭찬을 결국 해주었다.사실 이미 사약 같은 맛일 거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꽤나 달달해서 하지수도 놀라웠다.한편 원하던 칭찬을 들은 송문수는 신나서 채널을 돌리며 물었다.“이거 맞지?”“응.”“법률 채널이네?”여자들은 다 예능이나 멜로 드라마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울리지 않게 이런 지루한 채널을 좋아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법 좋아해서 대학 때도 법 배운 거야. 난 이런 거 좋아해.”“그래.”하지수의 말에 그제야 그녀가 변호사였다는 걸 떠올린 송문수였다.그렇게 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변호사라는 직업을 포기했다는 걸 알아차리자 한 번 더 감동받은 송문수는 저도 하지수가 좋아하는 걸 함께 하겠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그녀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나도 같이 봐.”그의 제안이 의외였지만 이렇게 완벽한 판례분석이라면 송문수도 관심 있어 할 것 같아 하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잘 접하지 않던 분야라 처음엔 싫어할 수 있어도 그 속에서 다룬 사건들을 계속 보다 보면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기고 그러면서 법률 지식까지 알게 되니 그거야말로 일거양득일 것이다.역시나 하지수는 법조인답게 바로 프로그램에 빠져들었는데 처음에는 신기해하며 잘 보던 송문수는 시간이 지속될수록 점점 지루해하고 있었다.당장이라도 핸드폰을 꺼내 게임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제가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참고 또 참던 그는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티비에 빨려 들어갈 듯 열중하고 있던 하지수가 정신을 차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송문수는 이미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몸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져 있었고 고개도 반쯤 돌아가 있는 누가 봐도 불편한 자세를 하고도 잘 자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지루하면 지루하다고 말이라도 하지.하지수는 미련한 송문수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담요도 덮어주었다.하지만
송문수를 따라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가지고 갔던 생리대로도 부족했었는데 양까지 많았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생각을 마치고 나니 심심해진 하지수는 자연스레 티비를 켜고 법률 채널을 틀어놓았다.주방에서 돌아치는 송문수는 진작에 잊은 하지수가 전형적인 판례들을 넋 놓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는 마침내 흑설탕물을 다 끓여냈다.맛없는 걸 가져다주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먹어보고 괜찮으면 그때 가져다주라는 소이연의 당부가 있었기에 송문수는 맛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런데 생각보다 괜찮은 맛이어서 그는 용기를 내어 그걸 하지수에게로 들고 갔다.“이게 뭐야?”하지수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친구의 행동에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지만 송문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흑설탕물이야. 뜨거울 때 마셔.”“뭐?”“생리 기간에는 이런 거 마셔야 하는 거 아니었어?”“나 주려고 당신이 직접 만든 거야?”“당연하지, 내가 생리 올 리는 없잖아.”진지하게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려버렸다.어떨 때는 신기하리만치 제 마음을 몰라주다가 또 이렇게 어설픈 모습으로 저를 위해주는 걸 보면 그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송문수는 정말 밉지만 싫어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고마워.”낮에 있었던 그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 살짝 서운했었는데 이렇게 흑설탕물 한번 가져다줬다고 하지수의 화는 또 사르르 풀려버렸다.“어때?”그런데 하지수가 마셔보려고 컵을 든 순간 송문수는 맛을 물으면서 자연스레 채널을 돌려버렸다.한창 판례를 보고 있었는데 또 제 의사는 묻지도 않고 멋대로 채널을 돌려버리는 그의 행동에 하지수는‘사랑이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것과도 같다’라는 가사에 깊은 공감이 가 순간 한숨을 쉬어버렸다.정말 송문수에게는 기대를 품으면 안 되는 것 같았다, 기대하는 족족 그것들이 실망으로 이어지니 말이다.한편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쉰 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황하며 물었다.“맛없어?”“내가 먹어볼 때는 맛있었는데? 너 생리만 아니었으면 내가 다 마
가슴을 졸이며 부둣가에 도착하니 술을 마신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역시나 운전석에 앉아야만 했다.진짜 이런 데이트를 하는 건 자신밖에 없을 것 같아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던 하지수는 집으로 가는 동안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삐진 티를 내고 있었지만 송문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따라부르며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송문수는 오늘이 아주 완벽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집으로 돌아온 하지수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송문수는 그 속도 모르고 또 그녀를 붙잡았다.“왜 오자마자 방에 들어가, 좀 앉아있지.”아직 이른 시간이라 송문수 딴에는 하지수와 함께 티비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나 씻고 싶어.”“나중에 씻어.”“보트 탈 때 몸이 다 젖어버려서 아직도 추워. 나 생리 와서 생리대도 바꿔야 하는 데 그럴 거면 그냥 씻고 싶어.”하지수의 말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여자가 생리 기간일 때는 더욱더 신경 써서 몸을 챙겨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어제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 간만의 데이트라 너무 신난 탓에 그만 까먹어버린 것이다.“먼저 보고 있어, 나 금방 씻고 나올게.”“응.”하지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송문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단톡방에 문자를 보내보았다.[생리 기간에는 어떤 걸 신경 써줘야 하는 거예요?][송문수, 너 생리 기간도 못 참고 하려고 그러는 거야? 짐승 같은 놈.][날 좀 좋은 쪽으로 생각해주면 어디 덧나니? 나 그런 놈 아니거든.][그럼 그건 갑자기 왜 묻는데?][생리 때는 체온 유지에 신경 써줘야 해서 춥게 굴면 안 되고 피곤하지 않게 많이 쉬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술이랑 찬 건 되도록이면 안 먹는 게 좋고요. 하지만 지수 씨 성격이라면 남한테 기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이 정도는 알아서 했을 거예요 이미.]소이연은 이내 송문수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문수 씨는 흑설탕물이나 끓여주세요. 피도 잘 통하게 해주고 생리통 푸는 데에도 효과적이에요. 그리고 흑설탕물은 달달하
하지만 그리 남사스러운 말은 아니라서 하지수는 한마디 더 보탰다.“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입꼬리를 올린 채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려고 일부러 더 너스레를 떨었다.“내가 매력이 넘치는 걸 어떡하겠어.”그 능청스러운 모습에 하지수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하지수, 내가 전에 좀 막살았던 건 인정하는데 그래도 한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하는 사람이야 나. 내가 너랑 잘 만나보겠다고 약속한 이상 절대 너한테 미안할 짓은 안 해.”“응, 알겠어.”하지수는 송문수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다 믿었다, 아니 다 믿고 싶었다.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실망시키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는 바뀔 걸 알기에 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네가 나한테 맞춰주는 만큼 나도 너 실망시키지 않을게.”“알았어.”우쭐대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송문수의 말이라면 늘 이렇게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바로 하지수였다.밥을 다 먹고 난 둘은 해변가를 거닐었는데 붉은 태양이 바다에 걸쳐져 있어 노을이 아주 예쁘게 져 있었다.주변 환경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경치는 봐줄 만해서 하지수의 기분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하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날에 좀 있으면 파도가 더 거세질까 봐 걱정됐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보며 말했다.“문수 씨, 우리 이제 가자.”“가고 싶어?”“응.”“좀 더 있다 가자, 여기 좋잖아.”“좀 있다 보트도 타야 하잖아, 저녁엔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낮에 올 때도 무서웠는데 밤엔 더할 것 같아 하지수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무서워?”송문수는 그런 하지수가 웃긴지 입꼬리를 씰룩이며 물었다.“응. 무서워.”“그럼 가자.”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 송문수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제 의견을 바로 수락해줄 줄 몰랐던 하지수는 어벙벙한 채로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사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도 원래의 그녀였다면 하지 않았겠지만 소이연이 했던 말이 떠올라 한평생 참고 살
“왜 안 먹어?”송문수의 재촉에 하지수는 손으로 게를 잡고 뜯었는데 다른 곳보다는 맛있었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들였던 노력에 비하면 그리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어때? 맛있지?”“맛있어.”하지만 기대에 찬 송문수를 보며 차마 그런 말을 내뱉을 수는 없어 하지수는 웃으며 말했다.“역시 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하지수를 긍정을 듣고서야 드디어 먹기 시작한 송문수는 음식을 집어 먹으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하도경이랑 여기 자주 왔었는데 현경이랑 지원이는 바빠서 같이 몇 번 못 왔었어.”“그랬구나.”“술 마실래?”“나 생리 왔잖아.”영혼 없이 답을 하던 하지수는 신나서 술을 제안하는 송문수에 또 체념한 듯 말했다.반복되는 실망에 기대를 하지 않다 보니 송문수의 무관심이 이젠 원망스럽지도 않았다.“아, 맞다. 그럼 음료수라도 마실래?”“물 줘 그냥.” 그녀의 대답에 송문수는 직원에게 물과 맥주를 부탁했다.지금 술을 마시면 좀 있다 돌아갈 때 운전은 또 하지수의 몫이 되겠지만 오랜만에 신난 송문수를 위해 하지수는 한 번 더 참기로 했다.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한 사람만 계속 참는 건 좋은 연애가 아니라고들 하는데 하지수는 송문수가 기뻐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하지수는 정말 상대방에게 아주 관대한 사람이었다.밥을 먹으면서도 그녀는 간간이 소이연과 예수진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어디에서 데이트하는지 많이 궁금하길래 솔직하게 알려주니 예수진이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진짜 송문수답다, 연애 고자잖아 이건.][지수 씨, 문수 씨한테 거기 별로라고 얘기 못 했어요?][안 했어요, 뭐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아직 서로 알아가는 단계니까 나도 문수 씨가 뭘 좋아하는지는 알아보고 싶어요.][알아가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건 아니죠. 지수 씨, 부부 사이에는 그렇게 내외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사인데 불편한 게 있으면 용기 내서 말해야죠.]소이연의 말에 고개를 들어 본 하지수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거야.”“친구들 말고는 다른 사람 데려간 적도 없는 곳이야. 네 기억에 남을 만한 맛집이니까 기대해.”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또 괜히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영화는 별로여도 식당은 좋은 데로 찾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차가 부둣가에 도착하고 송문수와 함께 차에서 내린 하지수는 울퉁불퉁한 길을 하이힐을 신은 상태로 걷자니 발이 아파왔지만 얼마나 대단한 맛집일까 싶어 애써 참으며 그를 따라 걸었다.그런데 식당은커녕 눈에 보이는 건 보트에 타라고 저를 향해 손짓하는 송문수뿐이어서 하지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바다에서 먹는 거야?”역시나 기대를 하지 말아야 했었던 걸까.송문수는 하지수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그녀를 잡아끌며 보트에 태웠다.곧이어 출발한 보트는 물살 때문에 심하게 휘청였는데 워낙 물을 무서워하던 하지수는 난간을 꽉 붙잡고 몰아치는 파도를 버텨내고 있었다.“와아!”송문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아주 신나 보였지만 하지수는 도저히 소리를 지를 정신이 아니었다.밀려오는 파도에 온몸이 다 젖어버린 그녀는 번진 화장부터 열심히 세팅한 머리까지 지금 걱정투성이였다.데이트한다고 치마까지 꺼내입었는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제 남자 친구 때문에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게다가 생리까지 하고 있는데 여기는 화장실도 하나 없었다.도통 무슨 생각으로 이곳을 데이트코스로 선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라도 서프라이즈가 있을 거라고 본인을 위로하며 하지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하지수가 기대한 서프라이즈는 아니었지만 다른 의미의 놀라움은 끊이지 않았다.파도를 헤치며 달리던 보트는 똑같이 아무것도 없는 해변에 멈춰 섰는데 해변가에 세워진 집으로 가려면 맨발로 거기를 걸어가야 했기에 딱딱한 모래 때문에 하지수는 안 그래도 아픈 발이 더 아파왔다.그래도 아무 말 없이 송문수를 따라갔더니 그 힘든 과정을 거쳐 도착한 곳이 바로 시골 식당이었다.두 사람은 허름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