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혜의 행동은 재민을 조금이나마 안심시켰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소희 탓에 진욱은 조작할 틈이 생기지 않았고 날마다 멍청하게 기다리는 것 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시간이 점점 흘러가자 진욱은 어쩔 수 없이 박미란을 찾아갔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았고 진욱은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핸드폰 스크린에 보이는 이름을 보고 진욱은 입술을 깨물고 눌렀다.“여보세요?”“저예요.”진욱의 목소리를 알아듣자 미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왜, 무슨 일이 있어?”“무슨 일이 있다뇨? 제가 지금 얼마나 급한지 알아요? 지금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고요.”미란이 전화를 받자 진욱은 흥분하며 물었다.“지금 재민이네 엄마 쪽에서 엄청 신경 써서 지켜보고 있어서 손 쓸 틈이 없어요. 이대로 가다간 타이밍을 놓칠 거예요.”진욱은 한숨을 쉬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미란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걱정하지 마, 내가 약속을 한 이상 꼭 지키는 법이야. 요 며칠 그냥 안심하고 있어, 유전자 검사 쪽의 내가 처리할 테니까. 나사 빠진 사람처럼 다니지 마, 다른 사람들이 괜히 눈치 차리겠어.”미란은 매우 불만스럽게 말했다.“근데 시간이 없어요. 비록 약속은 했지만 얼른 손을 써야죠. 계속 이렇게 놔두면 곧 끝장날 거예요.”“됐어, 됐어. 이 일은 나한테 맡겨. 넌 그냥 앉아서 떠먹여 주는 거 받아먹으면 돼. 그리고 별일 없으면 연락하지 마.”미란은 고개를 들어 오늘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가을이 다가와서 그런지 오늘의 밤하늘은 유독 검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 들어간 것처럼 사람들의 공포를 자아냈다.30분 후, 빨간색 벤츠 한 대가 어느 동네 아래에 세워졌다.미란은 마스크를 쓰고 하이힐 한 쌍을 신고 한가롭게 어느 주민의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잠시 후 문 안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한 중년 남자가 문을 열면서 이상하다는 듯이 미란을 쳐다보았다. 입을 열어 물어보려는 찰나 미란은 이미 집에
“재민 씨, 됐어요, 그만 해요.”윤아는 앞으로 나가 재민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윤아는 재민이 자기를 위해 소혜랑 오랫동안 기 싸움을 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재민의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윤아의 말은 그대로 들었다. 윤아는 재민이 더 이상 말하지 않은 것을 보자 진욱의 앞으로 갔다.“얘기 좀 하고 싶어요.”윤아는 지금 무슨 심정으로 앞에 있는 남자를 마주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 ‘이런 사람이랑 관계를 가졌다니, 정말 부끄러워.”“그래요, 나도 그러려고 했어요.”진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윤아는 고개를 돌려 재민을 보면서 말했다.“이 사람이랑 먼저 얘기하고 있을 테니까 먼저 가봐요.”재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윤아를 바라보았다.진욱이랑 윤아는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앉았다. 두 사람이 다 앉은 후 윤아는 먼저 입을 열었다.“아이를 줄 일은 없을 거예요.”진욱은 윤아를 보고 눈썹을 치켜세웠고 윤아는 고개를 들어 진욱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윤아에겐 도망칠 길이 없었다.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앞에 놓인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그때 그 일은 그냥 사고였어요.”윤아의 마음속엔 이미 계획이 다 섰다.“하지만 우리에겐 아이가 생겼잖아요.”윤아는 눈썹을 찌푸렸고 진욱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을 일단 먼저 다 했다.“아이는 여태껏 내가 키웠으니 줄 일은 더더욱 없을 거예요.”진욱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아이를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제 핏줄인데요.”은찬이랑 상관된 일이라면 윤아는 항상 조급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아이는 여태껏 계속 내 옆에 있었고 내가 돌봤어요. 아이랑 친하지도 않고 더군다나 나랑 은찬이 서로의 생활 습관도 이미 다 적응했는데 내 옆에서 은찬이랑 뺏어가서 은찬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사실 진욱이 은찬이를 잘 돌볼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은 둘째로 윤아는 진욱의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머리를 재민의 가슴에 기댄 윤아는 그의 힘찬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안심했다.“자, 먼저 들어가서 좀 쉬어요. 전 회사 일을 좀 처리해야 해요.”재민은 윤아의 등을 두드렸다.윤아는 재민을 놓아주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말했다.“어서 가요, 회사 일을 지체하면 안 되죠.”재민은 아쉬워하며 윤아를 몇번보고는 외투를 들고 떠났다.재민이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소혜가 왔다.“어머님.”윤아는 소혜를 보자 금세 어색해지고 긴장했다.소혜는 윤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집사를 찾기 시작했다.“집사, 이리 와봐.”“사모님, 무슨 일이세요?” 집사도 덩달아 긴장되었다. 소혜가 올때 마다 꼭 무슨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이 여자랑 이 여자 아들 짐을 다 싸서 쫓아 내보내요. 멀리 가면 갈수록 좋아요.”소혜는 윤아랑 은찬이가 자기의 아들 옆에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집사는 난처한 듯이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사모님, 도련님께 먼저 알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윤아 씨가 도련님의 사람이잖아요.”집사는 재민이 윤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윤아를 쫓아내면 끝장나는 것은 자기뿐임을 집사는 잘 알고 있었다.“내가 바본 줄 알아?”소혜는 화가 났다.“재민이 알면 이 여자를 내보낼 것 같아? 재민의 사람이라고? 이 여자가 낳은 자식이 재민의 핏줄도 아닌데 뭣 때문에 재민의 사람이야?”유전자 결과가 나오고 은찬이가 진욱의 아이라는 것을 알고 소혜는 더더욱 화가 났다.‘그때 진욱의 자식이 아니라고 변명하면서 유전자 검사를 하지 못해 안달이더니 아무런 변화도 없잖아? 지금까지 뻔뻔스럽게 내 아들의 집에 살고 있다니, 어떻게 이렇게 염치없는 여자가 다 있어?’소혜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아들이 나간 것을 알자마자 바로 와서 윤아를 쫓아내려고 했다.“사모님, 이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도련님 성격을 잘 아시잖아요.”집사는 여전히 감히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소혜는 이 말을
아무것도 없이 둘 뿐만 남았다.윤아는 은찬이의 손을 꼭 쥐고 무작정 거리를 걸었다. 쫓겨난 윤아는 갈 곳도 살 곳도 없었다.윤아는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고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은찬이는 갑자기 윤아의 손을 잡아당겼고 눈치챈 윤아는 몸을 숙여 작은 소리로 물었다.“왜 그래?”은찬이는 잠시 침묵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말투에는 숨길 수 없는 두려움과 걱정이 숨어 있었다.“엄마, 아빠 우리를 버린 거야?”어쩔 줄 모르면서도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찬이는 윤아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윤아는 은찬이의 머리를 어루만졌다.“괜찮아요! 제가 엄마를 지켜드릴게요!”은찬이는 다급히 말을 돌렸고 작은 주먹을 힘껏 흔들었다.이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한 윤아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은찬이의 손을 잡고 부드럽지만 믿음이 가는 말투로 말했다.“아니, 아빠는 우리는 버리지 않을 거야.”그 말이 끝나자 은찬이는 은근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등을 곧게 펴고 말했다.“저도 같은 생각이에요!”간단한 짧은 대화였지만 윤아는 순간 방향을 잡았다. 윤아는 재민을 믿기로 결정했다.‘난 집 없이 떠도는 사람이 아니야. 재민이가 있는 곳이 내 집이야. 난 열심히 재민이가 오기를 기다리면 돼.’윤아는 은찬이를 데리고 쉬지 않고 걸었지만 더 이상 사방을 돌아다니지 않았다.“엄마, 우리 어디 가요?”은찬이는 고개를 들어 윤아를 바라보았다.“호텔. 아빠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은찬이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시곗바늘이 째깍째깍 돌아갔고 조용하던 사무실에서 넋을 잃고 있던 재민은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로 인해 깜짝 놀라게 되었다. 문밖을 보지도 않고 재민은 입을 열었다.“들어와.”문이 열리자 비서는 서류를 들고 들어와 책상 위에 올려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재민은 고개를 숙이고 약간 시큼한 관자놀이를 비비며 책상 위에 두꺼운 자료 보자 짜증이 났지만 곧 윤아를 떠올렸다.재민은
재민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앞에 있는 검사 결과를 봤다.‘정말 이렇다면, 그럼 은찬이가 내 아이란 소리야……?’그러다가 재민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은찬이는 5살인데 난 5년 전에 윤아를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관계를 가지고 아이가 생기겠어?’그러다가 뭔가가 떠오른 재민은 흠칫하더니 여태껏 해본 적이 없던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재민이 일부로 그쪽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검사 결과가 놓여있는 이상 그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은찬이는 내 아이였어! 근데 도대체 언제 윤아랑 만났던 거지?’재민은 문득 5년 전에 한 낯선 여자랑 하룻밤을 보낸 일이 생각났다.‘설마…… 그날에 생긴 일인가?’윤아도 실수로 한 남자랑 관계를 가졌다.‘설마 돌고 돌아서 결국엔 그 남자가 나란 얘기야?’옆에 있던 진혁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재민이 말하지 않았으니 진혁이 먼저 말할 순 없었다.하지만 재민의 표정 변화를 보자 진혁은 자기가 모르는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 일이 은찬이랑 관계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고민하다가 진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물었다.“재민아, 너 뭐 생각난 거 맞지?”재민의 얼굴은 유난히 진지했고 고개를 돌려 진혁을 바라봤다.“이 아이…… 내 아일지도 몰라.”재민은 애써 침착하려고 했지만 이 말을 꺼내기 여간 어렵지 않았다.재민도 자기랑 윤아의 연이 이렇게 깊을 줄이야 상상하지 못했고 이 사실을 알기 전부터 재민은 은찬이만 보면 이상하게 친근감을 느꼈다.재민은 드디어 그 친근감이 도대체 어떻게 왔는지 알게 되었다.재민의 말을 들은 후, 진혁도 마찬가지로 비할 데 없이 놀랐다. 어느 정도 마음속으로 추측하고 있었지만 미리 심리적으로 준비를 해도 재민의 말을 들으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근데, 전에 두 사람 아예 모르고 지낸 거 아냐?”진혁은 진지한 표정으로 재민을 바라보며 말했다.재민의 표정도 똑같이 심각했고 마치 어떤 추억에 빠진 것 같았다. “전에 윤아가 말했는데 은찬이가 실수로 생긴 아이라고
한편 윤아는 은찬이를 데리고 한 호텔에 도착해 방을 잡았다.“엄마, 앞으로 우리 여기에서 살아요?”은찬이는 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윤아는 웃으며 말했다.“아니, 아빠가 우리를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윤아는 아이 앞에서 서운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은찬이는 입을 삐죽 내밀며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근데 할머니 우리를 쫓아냈는데 돌아갈 수 있어요?”이 질문은 윤아를 멈칫하게 했다.윤아도 사실 돌아갈 수 있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은찬이를 위로하기 위해 말했다.“당연하지, 아빠는 우리를 버리지 않아, 너도 잘 알잖아.”“근데 할머니는 왜 우리를 내쫓아요? 아빠는 왜 말리지 않았어요?”은찬이는 이미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은 적이 있었다. 지난번에 일은 은찬이의 가슴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윤아는 은찬이의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이 일은 아빠한테 맡기자. 아빠를 믿어야지, 그지?”은찬이는 고개를 끄덕였다.“자, 짐 좀 풀고 밥 먹은 후 잠깐 자자.”“네.”은찬이는 웃으며 자신의 물건을 정리하러 갔다.윤아는 은찬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지금 윤아 은찬 모자는 정말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이렇게 큰 도시에 두 사람을 받아줄 곳은 없었다.윤아는 은찬이의 일로 이미 정신이 없었는데 소혜한테 쫓겨나니 더 이상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윤아랑 은찬이의 핸드폰이 모두 빼앗겼기 때문에 외부와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윤아는 은찬이를 데리고 있었기에 아무 데나 함부로 가지 못했다. 만에 하나 나쁜 사람을 만나면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기에 우선 호텔에 숨어있는 것을 선택했다.윤아는 룸서비스를 시켜 점심을 먹은 후 텔레비전을 잠시 보다가 잠에 들었다.다시 깨어나 보니 오후 두세 시가 거의 되었다.갑자기 방의 초인종이 울리자 윤아는 기뻐했다.‘설마 재민 씨가 집에 돌아와서 나랑 은찬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곳에 찾아온 건 아니겠지?’“아빠예요?”은찬이가 제일 먼저 생각한 것도
권재민은 화가 났다. 어떻게 이렇게 긴박한 상황에서 강윤아가 납치되었단 말인가?“알아봐요, 빨리 알아봐요, 꼭 잡아줘요.”재민은 CCTV에서 은찬을 기절시킨 사람을 보면서 열불이 날 것 같았다.윤기태는 온 마음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네.”곧이어 기태는 급히 차를 몰아 조사를 하러 떠났다.윤아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지 이제 하루가 지났다. 그 약의 약효는 정말 세다.윤아가 금방 깨어났을 때 온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았다.그녀는 누군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눈을 뜨려고 했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뜰 수가 없었다.그래서 먼저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은 후 다시 눈을 떴다.주위 환경이 또렷하게 보이자 윤아는 자신이 화물선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리고 은찬은 지금 그녀의 곁에 누워 있다.윤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은찬아, 은찬?”은찬은 미간을 찌푸리고 속눈썹을 몇 번 가볍게 떨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눈앞에 있는 사람이 엄마인 것을 안 은찬이 감격에 겨워 말했다.“엄마.”윤아는 은찬을 품에 안고 그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엄마 여기 있어.”윤아는 은찬이가 무사한 것을 보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이전에 윤아는 자신이 쓰러졌을 때 다시는 은찬을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은찬이가 아직 자신의 곁에 있다.“엄마한테 어디가 아픈지 보여줄래?”윤아는 은찬의 손을 들어 좌우를 둘러보며 한 바퀴 돌기도 했다.은찬이가 자기 목을 움직이더니 까닥하는 소리가 났다.“어머?”“엄마, 목이 아파요.” 은찬은 자신이 그 서비스 직원 때문에 다친 곳을 가리켰다.윤아가 얼른 살펴보니 그곳이 이미 파랗게 멍들었다. 은찬의 뽀얀 피부에 이렇게 눈에 띄는 멍 자국을 보니 마음이 아파 났다.“엄마가 호호 불어줄게, 괜찮아.” 윤아는 은찬의 상처를 불어 주었다.“엄마가 불면 안 아파요.” 은찬은 윤아를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 아파도 꾹 참았다.윤아는 아이를 이대로 둘 수 없어 연고를 사러 가려고 했다.“엄마랑 연고
분위기가 너무 긴장된 탓인지 은찬의 표정도 무거워졌다.강윤아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간에 은찬이가 항상 즐겁게 지내길 바랐고, 은찬이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윤아는 은찬에게 급히 위로를 건네며 말했다. “은찬아, 두려워하지 마.”은찬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윤아가 그렇게 말하니 고개를 끄덕였다.윤아의 곁에 서 있는 은찬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 이 시점에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활발했던 은찬이가 이런 상태가 되자 윤아는 마음이 아팠다.“은찬아.” 윤아는 은찬 앞에 쪼그려 앉아 진지하게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엄마가 반드시 아빠와 연락할 방법을 찾을 거야. 그러니 너도 걱정하지 마, 알았지?”“알았어요, 엄마.” 은찬도 진지하게 윤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윤아는 은찬의 순한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윤아는 왜 자신이 항상 위험에 처하게 되는지, 그리고 자꾸 은찬까지 연루되는지 몰라 답답해 났다.가끔 그녀는 모든 고통을 혼자서 감당하고 싶다고 생각했다.“꼭 엄마 뒤를 따라야 해. 절대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 알겠지?” 윤아는 매우 단호하게 은찬에게 당부했다.물론 윤아도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이곳이 워낙 위험하기에 은찬을 놓아둘 수 없었다.은찬을 계속 자신의 곁에 두는 것만이 그녀가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그래서 윤아와 은찬은 어쩔 수 없이 배 위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이곳은 그들에게 완전히 낯선 곳이었고, 선장의 태도와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에 경솔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배 위에서는 먹을 것이 전혀 없다.게다가 윤아는 낯선 환경에 너무 뚜렷하게 노출될까 봐 매일 사람들이 다 먹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식당에 가서 남은 음식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았다.그래서 요즘 윤아와 은찬은 하루 한 끼밖에 먹지 못한다. 음식도 매우 형편없었다.이런 상황은 그들 두 사람에게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그러나 필경 이미 이런 지경에 이르렀기에 적응하
강윤아라는 말에 권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윤아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힘든 일을 많이 겪었고 늘 다른 사람의 타깃이 되었어요. 재민이가 너무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 그녀를 연루시킨 거죠.”“재아 씨가 지금 걱정해도 소용없어요, 재아 씨부터 잘 챙겨요.”윌은 재아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자, 재아 씨 기분 전환하러 갔다가 나중에 우리 집에 가요.”그 말을 들은 권재아는 얼굴이 빨개졌다.“얼굴이 왜 빨개지는 거예요? 내가 옆에 있었으면 재아 씨가 좀 더 편하게 잠들 거예요.”윌은 웃으며 농담했다.재아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 된 채 그를 한 대 때렸지만 거절하지 않았다.날이 저물자 바다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고 이따금 파도가 아련하게 일기도 했다. 해변의 모래사장에는 간간이 등불이 있는데, 등불은 그다지 밝지 않고 군데군데 있어서 밤하늘의 별과 서로 잘 어울렸다.재아는 부드러운 모래를 밟으며 앞으로 한 걸음씩 폴짝폴짝 뛰어갔다. 귓가에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아득하고도 고요했다.윌은 재아의 뒤에서 몇 걸음 걷다가 재아가 전혀 알아채지 못하자 성큼성큼 몇 걸음 앞으로 나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으로 감쌌다.재아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두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했다.“손잡고 싶은 거면 얘기하지 그랬어요.”재아의 표정이 너무 도도해서 윌은 눈살을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긁었다.“그러게 누가 재아 씨더러 아무것도 모르래요?”술도 밥도 배불리 먹었으나 그 뒤로 딴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재아는 윌 덕분에 배불리 먹었고 지금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윌의 손을 잡고 있자니 따뜻한 손바닥에서 전해오는 힘에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꼈다.백사장을 따라 한참을 걸은 후에야 마침내 윌이 말한 그 ‘재미있는 곳’에 이르렀다.재아는 어두컴컴한 불빛 속 나무 밑에 숨어 있는 해먹에 하마터면 눈살을 찌푸릴 뻔했다.“여기가 재밌는 곳이에요?”“재미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올 거잖아요?”윌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올라탄
회의가 끝난 후, 권재아는 권현우가 그녀를 쉽게 보지 못하게 하려고 여전히 당당하게 걸어 나갔지만, 사무실로 돌아온 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조하고 어쩔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재아는 매우 낭패한 모습이었다.재아는 권재민에게 이 일을 알리려 문자를 보냈지만, 그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재아는 윤기태에게도 이 일을 말했다. 기태도 분노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재아가 풀이 죽은 모습을 보며 화가 났지만 재아를 먼저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이런 결과는 대표님도 원하지 않겠지만, 정말 방법이 없잖아요. 자책하지 마세요, 권재민 대표님이 돌아오시면 분명히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재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태의 위로가 전혀 소용이 없었고 재아는 여전히 괴로웠다.재아의 이런 모습을 본 기태는 더는 방해하지 않고 그녀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늦은 시간, 재아는 여전히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무실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권재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만 했다.갑자기 넓은 손이 재아 앞에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재아는 화를 내려다가 윌임을 발견했다. 순간 화가 난 얼굴이 미리 설정된 듯 활짝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아, 윌,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귀국하지 않았어요? 돌아왔으면 나한테 말해주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내가 공항으로 데리러 갔을 텐데.”윌은 재아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풀고 책상을 돌아 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러는 내내 눈빛은 재아에게서 떠나지 않았다.“보고 싶어서 돌아왔어요. 알려줬으면 어떻게 서프라이즈를 해줬겠어요. 왜 이렇게 피곤한 얼굴이죠? 날 봤을 땐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어요.”윌이 그녀 앞에 서자 재아는 윌의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살짝 윌의 몸에 기대며 풀이 죽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윌은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 보여 더는 강요하지 않고 빨리 나가자고 재촉했다.“주차장에서 오래 기다렸는데도 안 내려와서 야근하는 거 아닌가
권재민은 강윤아의 움직임을 추적한 뒤 곧바로 현진성과 합류해 구출 계획을 논의하고 애스릭이 숨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려 했다.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변장하고 다가갔다. 애스릭은 분명 그들을 경계할 것이고, 외딴 섬에서의 일을 겪었으니 애스릭의 경계와 의심이 더 강해지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만반의 계획을 세워야만 윤아를 구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같은 시간, 국내에 있던 김소혜와 서만옥은 출국할 예정이었다.그날 기슭에 도착한 후 재민은 아이를 안배하고 나서 소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혜는 발신자가 실종된 지 오래된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보고 매우 흥분했다.“재민아, 드디어 엄마한테 전화했구나. 그동안 네가 나한테 전화 안 해서 우리도 방해할 엄두가 안 났는데 너는 지금 어때? 윤아는 행방불명이야? 윤아를 구해낸 거 아니었어?”소혜는 재민의 전화가 희소식을 전하러 걸려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재민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민의 전화를 받은 후 마음이 매우 흥분되고 기뻤기 때문이기도 했다.재민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소혜의 이렇게 흥분한 말투를 들으며 차마 그녀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박해서 아이를 돌볼 가족이 있어야 했다. 비록 의사가 있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다.그는 이를 악물고 실정을 소혜에게 말했다.“엄마, 내 말 좀 들어봐요. 마음을 다잡고 들어요, 일이 이렇게 됐어요…… 엄마가얘기한 거랑 상황이 좀 달라요. 윤아가 처음에 구출되긴 했는데 다시 잡혀갔어요. 그동안 연락이 없었던 건 내가 계속 그 사람의 경계에 잠복해있었기 때문이에요.”재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혜가 말을 끊었다.“뭐? 구출되긴 했는데 또 잡혀갔다는 건 뭐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엄마, 내 말끝까지 들어봐요.”재민이 이마를 어루만졌다.“이 일은 당분간 자세히 말하기 어려워요. 제가 윤아를 데려가고 나서 자세히 말해줄게요.”
고승혁 교수가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에 애스릭은 더 심하게 때렸다. 거의 몇 시간마다 가서 괴롭혔는데 매번 때리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말로 욕했지만 고승혁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강윤아는 고승혁 교수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약간의 상처가 생기는 것을 보고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사실, 애스릭이 매번 고승혁 교수를 데려갈 때마다 그가 입을 열어 경험을 전수해주도록 했을 뿐 매번 그를 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승혁 교수는 돌아올 때마다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얻어맞았다.고승혁 교수는 베티를 치료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배신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원망스러웠다.“고승혁 교수님, 저 때문에 교수님이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협조하고 절 그냥 내버려 둬요.”“괜찮아요,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욕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요. 나는 견딜 수 있어요. 나는 오히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까지인 보고 싶어요. 언젠가 내가 정말 견딜 수 없게 되면 자연히 그들에게 항복할 거예요. 그때 가서 윤아 씨가 나를 원망하지 말아주세요.”고승혁 교수는 손을 내저으며 개의치 않는 듯 윤아를 향해 농담까지 했다.“교수님은 이미 내 목숨을 구해줬고 내 아이를 지켜줬어요. 이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교수님에게 감사해요. 교수님이 앞으로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윤아는 고승혁 교수의 이런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정말 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이건 내 인생 경험의 일부일 뿐이에요.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에요. 굴복해 연명할 수 있지만 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고승혁 교수는 윤아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그녀를 안심시켰다.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우리가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교수님의 연구원에 많이 투자할게요.”“그럼 먼저 윤아 씨에게 감사해야겠어요.”“고승혁 교수님, 우리는 함께 목숨 걸고 싸운 사이이니 그냥 저를 윤아라고 부르세요, 윤아 씨는 너무 서먹서먹해요.”윤아가 고승혁을
메리는 인큐베이터 옆에 있는 의사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그를 한 번 쿡 찌르며 낮은 소리로 주의를 시키었다.“존, 사람들이 묻고 있잖아요.”“네?”존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권재민은 옆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물었다.“내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어요.”“아기는 지금 상태가 안정돼 있고 아까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놀라지 않았어요. 달이 차지 않아 태어났기 때문에 면역력이 좋지 않아 인큐베이터에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존은 마침내 반응을 보였고 무서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재민은 가볍게 알았다고 대답하고 고개를 숙이고 인큐베이터 안의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생명이 정말 완강하다고 느꼈다.강윤아에게 그렇게 많은 위험이 닥쳤는데도 이 아이는 이렇게 안전하고 무사하게 태어났고, 게다가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앞으로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눈앞의 작은 아이가 이렇게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건강할 수 있다면, 아이의 엄마 윤아는 분명 더 완강할 것이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윤아는 아슬아슬하게 돌아왔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재민은 보면 볼수록 더 반가웠고 윤아가 출산할 때 옆에 없었지만 수술실 밖에 있었으니 좀 멀지만 어떻게 보면 윤아 옆에 있은 셈이다. 다음번에는, 다음번에는 윤아 옆에 꼭 있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재민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 현진성과 한기현도 옆으로 다가가서 아기를 바라보았다.“윤아 씨를 많이 닮아서 참 예뻐. 앞으로 윤아 씨처럼 예쁘게 자랄 거야.”기현은 한참을 쳐다보았다.옆에 있던 진성은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윤아 씨와 닮은 줄 알아요? 갓난아이는 이목구비도 다 비슷비슷하고 쭈글쭈글한 모습이 늙은이 같다는 생각만 들어요. 게다가 머리카락이나 눈썹도 다 나지 않았잖아요.”“진성 씨…… 왜 그래요? 분명 윤아 씨를 닮았잖아요?”핀잔을 들은 기현은 얼굴이 빨개졌다.“재민아. 진성 씨 봐, 너의 아이가
한기현은 다시 권재민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이 숨은 곳을 알려줬지만 강윤아가 끌려갔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재민은 재빨리 이곳으로 달려와 둘러보았으나 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심스러운 얼굴로 기현과 현진성을 힐끗 쳐다보았다.“기현아, 현진성 씨, 윤아 씨는요? 윤아 씨가 왜 여기에 없죠?”두 사람은 안절부절못했다. 평소 대단한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재민 앞에서 감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기현은 슬며시 진성을 쳐다보고 몰래 진성을 쿡 찔렀다. 진성은 방심하다 밀려났고 뒤를 돌아보며 기현을 노려보았지만 기현은 고개를 숙이고 더는 두 사람을 쳐다보지 않았다.“묻고 있잖아요! 윤아 씨는요? 내 아내 어디 갔어요? 당신들 윤아 씨를 어디로 데려갔어요?”재민은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소리쳤다.진성은 미안한 표정으로 재민을 바라보며 재민에게 그가 떠난 후의 일을 대충 말했다.“권재민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윤아 씨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애스릭에게 빼앗겼어요. 제가 부주의했어요. 그 방에 숨으면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애스릭이 이렇게 교활하게 두 가지 계략을 쓸 줄은 몰랐어요.”“권재민 대표님, 지금 저를 때리고 욕해도 저 할 말이 없어요.”이 말을 들은 재민은 온몸에 살기가 피어올랐고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진성을 노려보며 허리에서 총을 꺼내려 했다. 기현이 황급히 그런 재민을 말렸다.“재민아, 일단 흥분하지 마, 방법이 있을 거야. 같은 편이니 우릴 도울 수 있어. 게다가 인터폴이야. 너 인터폴을 죽이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만, 윤아 씨부터 찾아야지. 지금 우리는 진성 씨가 필요해.”기현은 재민의 허리춤의 총을 쥔 손을 힘껏 눌렀다.진성도 황급히 위로했다.“권재민 대표님,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밖에 비도 오고 바람도 심해서 빨리 갈 수 없으니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예요.”“게다가, 우리 배에는 위치추적 장치가 있어요. 아주 은밀한 곳에 두었으니, 그들은 분명히 찾을 수 없
한기현은 사람과 함께 현진성의 사람들을 따라 수술실의 암도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길을 따라가다가 애스릭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기현은 그들 모두가 깨끗이 떠난 줄 알고 있었는데 애스릭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사람을 남겨 그들을 몰살시킬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다.기현의 눈에 갑자기 핏빛이 솟구쳐오르더니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맨주먹으로 몇 사랑을 해치웠다.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독살스러운 모습까지 보여 상대방을 놀라게 했다.그 사람들은 애스릭을 보낸 후 매우 내키지 않았다. 한바탕 뒤지고 나서 도망갈 계획이었는데, 결국 절반 정도 뒤지다가 기현 일행을 만났다. 특히 기현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듯 보였다.그들은 원래 기현 일당과 대충 싸우려고 일부러 그들을 놓아주려 했는데 기현이 달려들어 그들 몇 사람을 쓰러 눕히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기현 일행과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기현이 상대방의 생각을 알면 지금쯤 후회해 죽을지도 모른다. 몇 분 동안 아무렇게나 싸우면 될 일을 이렇게 충동적으로 또 한 번 미뤘다.몇 분 동안 싸운 후, 쌍방은 모두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기현의 왼팔이 그 무리의 두목을 누르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총을 쥐고 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있어 쌍방이 모두 시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기현은 그들의 타협을 기다렸고, 그 사람은 반격의 기회를 기다렸다.이 팀장은 원래 타협하려 했지만, 지금 이 지경에 이르니 승리욕이 자극되었고 지금은 고개를 숙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머리를 숙이면 부하들이 그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라도 그는 승부를 내려고 했다.이때 폭발음이 드디어 또렷하게 들렸고 그 사람은 이때 갑자기 손을 썼다.기현은 그가 성급히 달려들 것을 예상한 듯 손을 빼 권총을 내던지고 날쌔게 상대방의 손을 잡아 그의 등 뒤로 돌렸다. 두 발은 날렵하게 그의 허리와 배를 걷어찼고 곧 사납게 그의 몸을 비틀어 앞을 가
현진성은 애스릭의 부하들이 베티를 데려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애스릭이 아직도 단념하지 않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애스릭이 베티를 포기하거나 그들과 함께 죽으려고 이 보이지 않는 장치를 작동시켰다고 생각했다.애스릭이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베티를 데려가서 부활을 꿈꾸고 있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애스릭은 고승혁 교수와 강윤아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진성은 갑자기 눈꺼풀이 미친 듯이 뛰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윤아와 고승혁 교수가 숨어 있던 방에서 총소리가 났다.그는 급히 아까의 그 방으로 돌아갔다. 들어가 보니 그가 배치한 사람 중 몇 명은 상처를 입었고, 또 몇 명은 이미 의식을 잃었으며 그중 한 명은 이미 죽었는데 의사였다. 그 의사는 아기의 인큐베이터를 필사적으로 안고 있었다.진성은 그 의사의 시체를 땅에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 사람의 손이 인큐베이터 가장자리를 필사적으로 잡고 있어서 아주 많은 힘을 써서야 그 손을 쪼갰다. 진성은 겨우 옆 깨끗한 곳으로 메고 가서 그를 살며시 내려놓았다.의사를 내려놓은 진성은 돌아서서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를 살펴보았다. 아기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매우 달콤하게 자고 있었기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모두가 엎드려 있어서 진성은 한동안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하나 뒤집어 보았다. 애스릭의 사람들이 그냥 들어와서 그들을 다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고승혁 교수를 데려갔을 줄은 몰랐다.진성은 갑자기 윤아가 떠올랐다. 총소리가 그렇게 컸으니 윤아가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 리 없다. 진성은 급히 모퉁이의 병상 옆으로 달려갔다.이불 속이 울퉁불퉁했다. 그는 처음에는 고승혁 교수 등이 윤아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고 생각했지만 열어보니 안에 베개가 있었다. 진성은 멍해졌다.“이 방은 밀폐되어 있는데 그들은 어디에 잡혀간 거지? 게다가 방금 내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으니 문으로 나갔을 리가 없어.”진성은 조급했다.갑자기
고승혁 교수는 숨을 헐떡이며 말하고는 바다 위를 바라보았다. 바다 위에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애스릭이 그 배에 있었고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고승혁 교수는 깜짝 놀라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현진성은 그에게 대답할 방법이 없어서 그를 붙잡고 비밀 통로로 갔다.권재민도 급히 한기현에게 연락해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그러나 신호를 받자마자 재민은 기현 쪽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기현아, 무슨 일이야?”재민은 노심초사하여 급히 물었다.“방금 그 사람들이 들이닥쳐 시스템을 파괴했어. 최선을 다해 구조했으니 지금은 30분 정도 지연될 수 있어.”“시스템 복구가 시급한데 지금 그들과 싸우는 중이라……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어.”기현은 시스템 감시실에서 애스릭의 부하들과 싸우며 관제탑에 다시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권재민과 이쪽의 상태를 보고했다.보고하는 과정에서 재민은 기현의 끙끙거리는 소리까지 듣고는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기아현, 너는 어때? 버틸 수 있겠어? 시스템 쪽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지금은 복구할 방법이 없어. 이젠 네가 나설 차례야. 우리가 살아나갈 수 있는 시간은 안 남았어요, 재민아.”“상대편은 사람이 너무 많은데 우리 사람은 이 몇 명밖에 없어. 버티기 힘들 것 같아, 재민아, 빨리 와.”기현이 헐떡이며 소리쳤다.재민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급했지만 윤아가 이쪽에 있었기에 결정하기 어려웠다. 윤아가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매우 걱정했다.진성은 재민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내 부하들이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습격당했고, 그자들이 통제실의 시스템을 파괴했대요. 지금 우리 부하들이 그들과 싸우고 있는데 기현이도 그들에게 얽매여 시스템을 고칠 기회가 전혀 없어요…… 나는 윤아 씨가 마음에 걸려요.”재민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가요, 여기 내가 있을게요. 기지 안에 내 사람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