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윤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그러고 보니 언니한테 손자가 생겨났어요.”“무슨 뜻이야? 왜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권지윤은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이내 웃으며 말을 이었다.“보아하니 재민이가 언니한테는 말도 못 했네요. 걔가 요즘 여자한테 정신이 홀려서 아주 그 여자한테 딸린 애까지 애지중지하고 있어요. 쯧쯧…… 고모인 나마저도 재민이 앞에서는 그 불여우를 당해내지 못한다니까요.”김소혜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심오한 빛을 번뜩이더니 “그래? 라는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뱉었다. 하지만 섬뜩한 목소리와 싸늘한 눈빛을 찬찬히 관찰하면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알 수 있었다.김소혜가 자기가 원하던 반응을 보이자 권지윤은 속으로 씩 웃으며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살까지 붙여가며 그간 있었던 불만을 토로했다.때문에 김소혜가 집에 도착했을 때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섬뜩하게 변해있었다.“사…… 사모님.”문을 열어준 메이드가 김소혜를 보며 깜짝 놀라자 권지윤이 고개를 까닥이며 물었다.“그 여자는?”메이드는 순간 등골이 오싹하고 정수리에서부터 소름이 쫙 돋았다.“도…… 도련님과 함께 도심으로 놀러 갔습니다.”“놀러 갔다고?”김소혜는 싸늘하게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곧 자기가 원하는 일이 터질 거라는 기대에 권지윤은 그 뒤를 바싹 따라붙으며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도착한 김소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방안 배치에 순간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옷장 옆에 흰색 꽃이 조각되어 있는 화장대가 놓여 있었고, 옷방에는 온통 여성 의류와 아동용품들이 들어있었다.김소혜는 숨을 들이쉬며 이를 갈았다.“오호라…… 아주 제대로 들러붙어 살고 있네!”권지윤은 고개를 기웃거리며 옷방 안을 흘겨보더니 입을 삐죽거리며 비아냥거렸다.“이 옷들 모두 유명 브랜드인 것 같은데. 우리 조카가 참 아껴주나 보네.”김소혜는 주먹을 꽉 쥐며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집사!
권지윤은 정신을 번쩍 차리며 다급히 연극 티켓을 숨겼다. 그 동작에 송해나는 씩 웃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일이 있어서 먼저 갔어. 얼른 앉아 봐, 너 정호 씨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송해나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는 얼굴로 권지윤을 훑어봤다.“왜요? 고모님 혹시 윤정호한테 관심 있어요?”송해나의 말에 권지윤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유정호의 칭찬을 늘여놓았다. 그 순간 송해나는 권지윤이 단단히 걸려들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권지윤은 평소 고상하고 도도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연하 연예인을 좋아하고 있다. 그런 취향을 맞추기 위해 윤정호를 불러 권지윤을 공략하고 있는데 그게 실패할 리가!윤정호의 연락처를 받아 든 권지윤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송해나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런 권지윤이 떠나가자 송해나는 입가에 냉소를 지으며 다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윤정호가 복잡한 눈빛으로 송해나를 바라봤다.“오늘 잘했어. 걸려든 것 같아.”송해나의 칭찬에 윤정호의 눈에는 실망감이 스쳐 지나가더니 이윽고 퇴폐적인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나한테 다른 할 말은 없어?”“윤정호, 네가 그렇게 물어봐도 내 대답은 똑같아. 나한테 환상 같은 거 품지 마. 너도 내가 뭘 원하는지 알잖아. 이번에 만약 성공하면 약속대로 마땅한 보상을 줄게.”“내가 너 거절하지 못한다는 거 알고 이러는 거지? 그런데 진짜 제대로 생각한 거 맞아?”윤정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여전히 단념하지 않은 듯 물었다.이에 송해나는 눈을 살짝 접어 미소 지었다.“난 내가 뭔 짓하는지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넌 네가 해야 할 일이나 제대로 해. 나랑 약속했잖아.”“그래, 최선을 다할게.”그제야 송해나는 마음을 놓으며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눈빛으로 윤정호를 바라봤다.…….며칠 뒤, 은찬은 뛰어난 활약으로 결승전에 성공적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 결과를 들은 순간 은찬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엄마, 이것
여자애는 어리둥절했지만 옥패의 가치를 몰랐기에 태연하게 받아 들었다.“그래, 알았어. 우리 빨리 커서 영원히 같이 있자.”사뭇 진지한 얼굴로 약속하는 여자애의 모습에 은찬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라 우물쭈물하며 말도 하지 못했다.그 시각 어른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에 두 아이가 서로 증표를 주고받은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러다가 강아네 가족이 떠난 뒤, 여자애는 잔뜩 신이 나서 옥패를 꺼내 들고 부모님께 자랑했다.“엄마, 아빠, 이거 은찬이가 저한테 선물로 줬어요. 예쁘죠?”여자애의 부모님은 옥패를 보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한눈에 봐도 귀해 보이는 물건이라 돌려주려고 했지만 딸이 너무 마음에 들어하고 좋아하니 차마 돌려주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렇게 한참을 생각한 여자애의 아버지가 끝내 입을 열었다.“관둬요. 그쪽 집안도 잘 사는 것 같은데 줄 만한 물건이니 줬겠죠. 다음번에 더 좋은 거로 주면 괜찮을 거예요.”…….여자애와 헤어지고 나서야 은찬은 자기가 우승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다시 인지했다. 2등밖에 하지 못했다는 상실감에 빠져 차에 앉고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은찬을 보자 강윤아는 이내 말을 걸었다.“은찬아? 왜 그래? 기분 안 좋아?”은찬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큰 눈을 깜빡이더니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시합에서 2등 했다고 기분 안 좋은 거야?”역시 아버지만큼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고, 권재민은 곧바로 은찬의 생각을 꿰뚫었다.그 말에 은찬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고 자기의 오동통한 손을 바라봤다.“은찬아.”강윤아는 은찬의 포동포동한 볼을 들어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은찬이는 이미 충분히 훌륭해. 엄마는 은찬이가 자랑스러워.”“맞아. 물론 2등이지만 전국에서 난다긴다하는 선수들이 다 모인 시합에서 2등이 얼마나 대단한데. 칭찬해. 잘했어.”권재민도 은찬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그러다가 말랑말랑한 은찬의 등을 살짝 꼬집으며 속으로 역시 아이들 피부는 부드럽
강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눈에 드러난 정서를 숨겼다.“김 집사,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한 톤 높아진 권재민의 목소리에 옆에 있던 강윤아마저 흠칫 놀랐다.그때 헐레벌떡 달려온 김 집사가 텅 빈 옷방을 보고 난색을 보였다.“얼른 말해요. 이게 대체 어떻게된 일이죠? 은찬이 옷은 다 어디 갔습니까?”“그게…….”집사는 권재민의 눈을 피하며 대답하지 못했다.“얼른 말해요!”끝내 폭발한 권재민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심지어 언제나 평온하던 눈에 감출 수 없는 분노가 기승을 부렸다.모든 걸 함구하라는 사모님의 명령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던 집사는 흠칫 놀랐다. 저택에서 오래 일해와 권재민의 불같은 성격을 당연히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숨겼다간 자기마저 화를 면하지 못한다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은찬이의 물건은 모두 창고에 있습니다. 강윤아 씨의 물건도 마찬가지고요.”집사는 목을 한껏 움츠리며 벌벌 떨었다.그 말에 권재민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어머니가 그러라고 했어요?”“네.”집사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조심스럽게 닦았다.“당장 가서 물건 모두 원래 자리에 돌려놔요. 만약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어떤 결과가 있을지 알 거라고 믿어요.”분명 가벼운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네.”“안 가고 뭐 해요?”굽신거리며 허리를 굽히는 집사를 싸늘하게 훑어본 권재민은 발로 문을 세게 걷어찼다.…….그 시각, 권지윤은 김소혜를 데리고 송해나가 준비한 파티 장소로 향했다.송해나가 자기한테 했던 말만 떠올리면 권지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심지어 자연스럽게 그때의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고모님, 제가 어머님과 고모님을 위해 특별히 파티를 준비했으니 꼭 나와주세요. 여기가 파티 장소예요.”송해나는 말하면서 레스토랑 주소가 적힌 카드를 내밀었다.“해나야, 이런 거 준비할 필요 없어. 우리 환영 파티 같은 거 필요 없어. 언니도 아마 이런 거 안 좋아할 거야.”
세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그렇게 웃음이 떠나지 않는 식사가 끝나자 세 사람은 함께 레스토랑을 나왔다.“어머님, 제가 모셔다드릴게요.”헤어질 때가 되자 송해나는 얼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김소혜의 팔짱을 끼며 제안했다.그 제안에 김소혜는 거절하지 않았다. 날도 어둑어둑해지고 있고 혼자 택시를 타고 가는 것보다야 송해나가 데려다주는 게 훨씬 편했으니까.자기가 원하는 대로 김소혜를 저택 앞까지 데려다준 송해나는 만족한 듯 손을 흔들었다.“어머님, 들어가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이왕 왔는데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고 가.”“어머님께서 초대하신다면야 저야 감사하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김소혜의 요청에 송해나는 얼른 안전벨트를 풀었다. 안 그래도 이건 송해나가 속으로 바라던 거였으니까.“실례라니. 그렇게 내외할 거 없다. 나는 오히려 네가 자주 와서 내 말동무나 해줬으면 좋겠는데. 혼자 있으려니 심심하더라고.”김소혜는 송해나를 끌고 저택으로 들어갔다.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거실에 앉아 있는 은찬과 강윤아를 보자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그러다 옆에 있는 권재민에게 시선을 돌리는 순간 이내 다시 환한 표정을 지었다.“재민아,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니? 엄마한테 소개 안 해줘?”권재민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거리낌 없이 강윤아를 자기 앞으로 끌어오며 소개하기 시작했다.“이 사람은 강윤아예요. 윤아 씨, 앞에 계신 분은 제 어머니예요.”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권재민과 달리 강윤아는 잔뜩 긴장한 듯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권재민이 정식으로 소개까지 한 마당에 예의 없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기에 얼른 미소를 지으며 김소혜를 바라봤다.“어머님, 안녕하세요. 강윤아라고 합니다.”김소혜는 싸늘한 눈빛으로 강윤아를 흘겨보더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보고 싶지도 않다는 듯 눈길을 피하는 바람에 강윤아만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그 모습에 권재민은 눈살을 찌푸리며 강윤아에게 눈빛을 보냈다.“윤아 씨, 어머니 드
김소혜는 바닥에 놓여 있던 종이 상자를 발로 뻥 차서 날려버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래층의 강윤아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송해나를 무작정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너무 세게 팔을 잡아당긴 탓에 송해나의 팔은 빨갛게 자국이 남았고 그녀는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송해나는 화가 잔뜩 나 있는 김소혜를 보며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가 다시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물었다.“어머님, 왜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 설마 윤아 씨 때문인가요?”김소혜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너는 저 불여시 같은 애가 눈에 거슬리지도 않니?”그 말에 송해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윤아 씨와 재민이는 무슨 사이인 걸까요? 설마…….”그녀의 말에 김소혜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재벌가에 시집와서 신세 고치려는 사람인 거지. 감히 우리 가문을 넘보다니, 어이가 없어서 원.“김소혜의 말에 송해나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생글생글 미소를 지었다.……아래층 거실에서.“우리 어머니가 안 좋은 말이라도 했나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강윤아가 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니에요. 어머니가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거라는건…… 이미 예상했던걸요.”권재민이 긴 팔을 뻗어 강윤아의 어깨를 감쌌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우리 분가해서 사는 건 어때요?”강윤아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러면 어머님은 더 화가 나실 거예요.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천천히 해요, 우리. 어머님도 언젠간 저를 받아들이시겠죠.”권재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살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그는 강윤아가 힘든 게 싫었다. 시집살이란 원래 힘든 일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어, 그냥 강윤아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 어머님도 강윤아를 마음에 들어 할 게 분명했으니.두 사람은 이러저러한 말을 주고받다가 권재민이 집사를 불러 위층의 방을 정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
권재민은 자신의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잔뜩 수줍어하는 강윤아를 곁눈질로 바라보다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의 허리를 휙 감쌌다.“가요, 결혼하러.”듣기 좋은 목소리가 강윤아의 귓가에 울렸다.혼인 신고 절차는 간단했다. 신분증, 신고서만 있으면 되었다.강윤아는 혼인 신고하는 내내 얼굴을 붉힌 채로 가만히 있었고 권재민이 그녀를 리더해 모든 절차를 끝냈다.드디어 둘의 이름이 적힌 혼인 신고서를 발급받고 강윤아는 그제야 현실이 피부에 와닿았다…….‘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결혼…….'“건물 안 공기가 별로 좋지 않네요. 밖에서 기다릴래요?”강윤아의 멍한 표정에 권재민이 다정하게 물었다.그에 강윤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여기에서 기다릴 게요.”괜찮다는 강윤아의 말에 권재민도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모든 등기를 마치고 둘은 시청 옆에 있는 무인 사진관으로 향했다.짧은 사진 촬영을 마치고 인쇄된 사진을 받아 쥔 강윤아는 한껏 서운한 표정이었다.“거봐요. 사진 찍는 내내 굳은 표정이더니, 증명사진보다 더 딱딱하게 나왔잖아요.”강윤아가 사진을 휙 권재민에게 건네며 말했다.권재민이 눈을 가늘게 뜨며 사진을 확인했다.“저는 마음에 드는데요. 표정이 조금 굳었을 뿐이지 다른 건 완벽하잖아요. 이 이목구비 좀 봐봐요. A시에서 이보다 더 잘생긴 사람 찾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 여기 이 여자분 말이에요, 눈동자는 반짝반짝한데 볼살이 포동포동하니…….”진지한 표정으로 사진을 들여다보는 권재민의 모습에 강윤아는 갑자기 욱해 그를 향해 발길질했다.‘뭐가 포동포동하다는 거야? 귀엽기만 하는구먼!'그러나 발길질하려던 발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몸 전체가 뒤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대로 넘어지려나 싶어 두 눈을 꼭 감았는데 권재민이 안전하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자꾸 내 품으로 쓰러지는 걸 보니 노린 건가요?”권재민이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당장 뭐라고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강윤아는 자신의 볼이 점점 붉어지는 게 느
송해나가 떠나고 박미란과 강수아 두 사람 모두 아주 신나 보였다.“딸, 봤지? 이번에야말로 강윤아를 완벽히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아. 봐봐, 악독한 사람은 항상 미움을 받게 되어있어.”박미란은 탁자 위로 산더미처럼 쌓인 화장품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자신과 송해나가 손을 잡고 박윤아를 깔아뭉갤 생각을 하니 기분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흥.”강수아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강윤아 생각만 해도 속이 메슥거렸다.“잘 사는 꼴 절대 못 봐. 절대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이번엔 송해나 같은 좋은 사람도 만났고 느낌이 좋아.”박미란은 벌써 미래를 상상했는지 입꼬리를 내리지 못했다.“고승현처럼 쓸모없는 사람은 빨리 버려야 해.”강수아는 명품 가방을 집어 들고 거실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자신을 비췄다.전에 소주헌과의 일 때문에 고씨 가문에 버림을 받았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이젠 송씨 가문과 같은 강대한 가문과 손을 잡게 되었는데.더구나 오늘 송해나가 온 목적은 아주 분명했다. 바로 강윤아를 끌어내리려는 것이었다.쌍방의 목적이 같다면 그들은 같은 배를 탈 수 있었다.‘이번에는 느낌이 좋아.’“우리 송씨 가문의 힘을 빌려서 제대로 한번 해봐요!”박미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해나같이 손이 큰 사람이 하는 일이면 무조건 완벽할 게 분명했다.“이미 같은 배를 탔다면 우리도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어요? 아니면 그쪽의 신임을 어떻게 얻겠어요.”강수아가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했다.“이미 좋은 수가 생각이 난거지? 빨리 엄마한테 말해봐 봐.”박미란은 자신의 총명한 딸이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낸 걸 알아차리고 강수아를 재촉했다.“기다려 봐요, 이번에는 강윤아에게 제대로 한 방을 먹일 테니.”강수아가 미소를 지으며 슬며시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이튿날.강수아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어젯밤에 생각해 낸 대로 그녀는 바로 움직였다.그녀는 어제 송해나가 선물한 고급 원피스를 입고 공을 들여 메이크업을 한 뒤 소주헌을 만나러 갔다.예전의
강윤아라는 말에 권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윤아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힘든 일을 많이 겪었고 늘 다른 사람의 타깃이 되었어요. 재민이가 너무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 그녀를 연루시킨 거죠.”“재아 씨가 지금 걱정해도 소용없어요, 재아 씨부터 잘 챙겨요.”윌은 재아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자, 재아 씨 기분 전환하러 갔다가 나중에 우리 집에 가요.”그 말을 들은 권재아는 얼굴이 빨개졌다.“얼굴이 왜 빨개지는 거예요? 내가 옆에 있었으면 재아 씨가 좀 더 편하게 잠들 거예요.”윌은 웃으며 농담했다.재아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 된 채 그를 한 대 때렸지만 거절하지 않았다.날이 저물자 바다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고 이따금 파도가 아련하게 일기도 했다. 해변의 모래사장에는 간간이 등불이 있는데, 등불은 그다지 밝지 않고 군데군데 있어서 밤하늘의 별과 서로 잘 어울렸다.재아는 부드러운 모래를 밟으며 앞으로 한 걸음씩 폴짝폴짝 뛰어갔다. 귓가에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아득하고도 고요했다.윌은 재아의 뒤에서 몇 걸음 걷다가 재아가 전혀 알아채지 못하자 성큼성큼 몇 걸음 앞으로 나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으로 감쌌다.재아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두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했다.“손잡고 싶은 거면 얘기하지 그랬어요.”재아의 표정이 너무 도도해서 윌은 눈살을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긁었다.“그러게 누가 재아 씨더러 아무것도 모르래요?”술도 밥도 배불리 먹었으나 그 뒤로 딴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재아는 윌 덕분에 배불리 먹었고 지금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윌의 손을 잡고 있자니 따뜻한 손바닥에서 전해오는 힘에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꼈다.백사장을 따라 한참을 걸은 후에야 마침내 윌이 말한 그 ‘재미있는 곳’에 이르렀다.재아는 어두컴컴한 불빛 속 나무 밑에 숨어 있는 해먹에 하마터면 눈살을 찌푸릴 뻔했다.“여기가 재밌는 곳이에요?”“재미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올 거잖아요?”윌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올라탄
회의가 끝난 후, 권재아는 권현우가 그녀를 쉽게 보지 못하게 하려고 여전히 당당하게 걸어 나갔지만, 사무실로 돌아온 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조하고 어쩔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재아는 매우 낭패한 모습이었다.재아는 권재민에게 이 일을 알리려 문자를 보냈지만, 그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재아는 윤기태에게도 이 일을 말했다. 기태도 분노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재아가 풀이 죽은 모습을 보며 화가 났지만 재아를 먼저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이런 결과는 대표님도 원하지 않겠지만, 정말 방법이 없잖아요. 자책하지 마세요, 권재민 대표님이 돌아오시면 분명히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재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태의 위로가 전혀 소용이 없었고 재아는 여전히 괴로웠다.재아의 이런 모습을 본 기태는 더는 방해하지 않고 그녀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늦은 시간, 재아는 여전히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무실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권재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만 했다.갑자기 넓은 손이 재아 앞에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재아는 화를 내려다가 윌임을 발견했다. 순간 화가 난 얼굴이 미리 설정된 듯 활짝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아, 윌,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귀국하지 않았어요? 돌아왔으면 나한테 말해주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내가 공항으로 데리러 갔을 텐데.”윌은 재아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풀고 책상을 돌아 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러는 내내 눈빛은 재아에게서 떠나지 않았다.“보고 싶어서 돌아왔어요. 알려줬으면 어떻게 서프라이즈를 해줬겠어요. 왜 이렇게 피곤한 얼굴이죠? 날 봤을 땐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어요.”윌이 그녀 앞에 서자 재아는 윌의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살짝 윌의 몸에 기대며 풀이 죽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윌은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 보여 더는 강요하지 않고 빨리 나가자고 재촉했다.“주차장에서 오래 기다렸는데도 안 내려와서 야근하는 거 아닌가
권재민은 강윤아의 움직임을 추적한 뒤 곧바로 현진성과 합류해 구출 계획을 논의하고 애스릭이 숨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려 했다.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변장하고 다가갔다. 애스릭은 분명 그들을 경계할 것이고, 외딴 섬에서의 일을 겪었으니 애스릭의 경계와 의심이 더 강해지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만반의 계획을 세워야만 윤아를 구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같은 시간, 국내에 있던 김소혜와 서만옥은 출국할 예정이었다.그날 기슭에 도착한 후 재민은 아이를 안배하고 나서 소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혜는 발신자가 실종된 지 오래된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보고 매우 흥분했다.“재민아, 드디어 엄마한테 전화했구나. 그동안 네가 나한테 전화 안 해서 우리도 방해할 엄두가 안 났는데 너는 지금 어때? 윤아는 행방불명이야? 윤아를 구해낸 거 아니었어?”소혜는 재민의 전화가 희소식을 전하러 걸려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재민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민의 전화를 받은 후 마음이 매우 흥분되고 기뻤기 때문이기도 했다.재민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소혜의 이렇게 흥분한 말투를 들으며 차마 그녀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박해서 아이를 돌볼 가족이 있어야 했다. 비록 의사가 있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다.그는 이를 악물고 실정을 소혜에게 말했다.“엄마, 내 말 좀 들어봐요. 마음을 다잡고 들어요, 일이 이렇게 됐어요…… 엄마가얘기한 거랑 상황이 좀 달라요. 윤아가 처음에 구출되긴 했는데 다시 잡혀갔어요. 그동안 연락이 없었던 건 내가 계속 그 사람의 경계에 잠복해있었기 때문이에요.”재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혜가 말을 끊었다.“뭐? 구출되긴 했는데 또 잡혀갔다는 건 뭐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엄마, 내 말끝까지 들어봐요.”재민이 이마를 어루만졌다.“이 일은 당분간 자세히 말하기 어려워요. 제가 윤아를 데려가고 나서 자세히 말해줄게요.”
고승혁 교수가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에 애스릭은 더 심하게 때렸다. 거의 몇 시간마다 가서 괴롭혔는데 매번 때리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말로 욕했지만 고승혁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강윤아는 고승혁 교수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약간의 상처가 생기는 것을 보고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사실, 애스릭이 매번 고승혁 교수를 데려갈 때마다 그가 입을 열어 경험을 전수해주도록 했을 뿐 매번 그를 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승혁 교수는 돌아올 때마다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얻어맞았다.고승혁 교수는 베티를 치료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배신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원망스러웠다.“고승혁 교수님, 저 때문에 교수님이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협조하고 절 그냥 내버려 둬요.”“괜찮아요,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욕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요. 나는 견딜 수 있어요. 나는 오히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까지인 보고 싶어요. 언젠가 내가 정말 견딜 수 없게 되면 자연히 그들에게 항복할 거예요. 그때 가서 윤아 씨가 나를 원망하지 말아주세요.”고승혁 교수는 손을 내저으며 개의치 않는 듯 윤아를 향해 농담까지 했다.“교수님은 이미 내 목숨을 구해줬고 내 아이를 지켜줬어요. 이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교수님에게 감사해요. 교수님이 앞으로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윤아는 고승혁 교수의 이런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정말 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이건 내 인생 경험의 일부일 뿐이에요.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에요. 굴복해 연명할 수 있지만 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고승혁 교수는 윤아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그녀를 안심시켰다.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우리가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교수님의 연구원에 많이 투자할게요.”“그럼 먼저 윤아 씨에게 감사해야겠어요.”“고승혁 교수님, 우리는 함께 목숨 걸고 싸운 사이이니 그냥 저를 윤아라고 부르세요, 윤아 씨는 너무 서먹서먹해요.”윤아가 고승혁을
메리는 인큐베이터 옆에 있는 의사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그를 한 번 쿡 찌르며 낮은 소리로 주의를 시키었다.“존, 사람들이 묻고 있잖아요.”“네?”존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권재민은 옆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물었다.“내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어요.”“아기는 지금 상태가 안정돼 있고 아까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놀라지 않았어요. 달이 차지 않아 태어났기 때문에 면역력이 좋지 않아 인큐베이터에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존은 마침내 반응을 보였고 무서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재민은 가볍게 알았다고 대답하고 고개를 숙이고 인큐베이터 안의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생명이 정말 완강하다고 느꼈다.강윤아에게 그렇게 많은 위험이 닥쳤는데도 이 아이는 이렇게 안전하고 무사하게 태어났고, 게다가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앞으로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눈앞의 작은 아이가 이렇게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건강할 수 있다면, 아이의 엄마 윤아는 분명 더 완강할 것이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윤아는 아슬아슬하게 돌아왔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재민은 보면 볼수록 더 반가웠고 윤아가 출산할 때 옆에 없었지만 수술실 밖에 있었으니 좀 멀지만 어떻게 보면 윤아 옆에 있은 셈이다. 다음번에는, 다음번에는 윤아 옆에 꼭 있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재민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 현진성과 한기현도 옆으로 다가가서 아기를 바라보았다.“윤아 씨를 많이 닮아서 참 예뻐. 앞으로 윤아 씨처럼 예쁘게 자랄 거야.”기현은 한참을 쳐다보았다.옆에 있던 진성은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윤아 씨와 닮은 줄 알아요? 갓난아이는 이목구비도 다 비슷비슷하고 쭈글쭈글한 모습이 늙은이 같다는 생각만 들어요. 게다가 머리카락이나 눈썹도 다 나지 않았잖아요.”“진성 씨…… 왜 그래요? 분명 윤아 씨를 닮았잖아요?”핀잔을 들은 기현은 얼굴이 빨개졌다.“재민아. 진성 씨 봐, 너의 아이가
한기현은 다시 권재민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이 숨은 곳을 알려줬지만 강윤아가 끌려갔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재민은 재빨리 이곳으로 달려와 둘러보았으나 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심스러운 얼굴로 기현과 현진성을 힐끗 쳐다보았다.“기현아, 현진성 씨, 윤아 씨는요? 윤아 씨가 왜 여기에 없죠?”두 사람은 안절부절못했다. 평소 대단한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재민 앞에서 감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기현은 슬며시 진성을 쳐다보고 몰래 진성을 쿡 찔렀다. 진성은 방심하다 밀려났고 뒤를 돌아보며 기현을 노려보았지만 기현은 고개를 숙이고 더는 두 사람을 쳐다보지 않았다.“묻고 있잖아요! 윤아 씨는요? 내 아내 어디 갔어요? 당신들 윤아 씨를 어디로 데려갔어요?”재민은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소리쳤다.진성은 미안한 표정으로 재민을 바라보며 재민에게 그가 떠난 후의 일을 대충 말했다.“권재민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윤아 씨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애스릭에게 빼앗겼어요. 제가 부주의했어요. 그 방에 숨으면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애스릭이 이렇게 교활하게 두 가지 계략을 쓸 줄은 몰랐어요.”“권재민 대표님, 지금 저를 때리고 욕해도 저 할 말이 없어요.”이 말을 들은 재민은 온몸에 살기가 피어올랐고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진성을 노려보며 허리에서 총을 꺼내려 했다. 기현이 황급히 그런 재민을 말렸다.“재민아, 일단 흥분하지 마, 방법이 있을 거야. 같은 편이니 우릴 도울 수 있어. 게다가 인터폴이야. 너 인터폴을 죽이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만, 윤아 씨부터 찾아야지. 지금 우리는 진성 씨가 필요해.”기현은 재민의 허리춤의 총을 쥔 손을 힘껏 눌렀다.진성도 황급히 위로했다.“권재민 대표님,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밖에 비도 오고 바람도 심해서 빨리 갈 수 없으니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예요.”“게다가, 우리 배에는 위치추적 장치가 있어요. 아주 은밀한 곳에 두었으니, 그들은 분명히 찾을 수 없
한기현은 사람과 함께 현진성의 사람들을 따라 수술실의 암도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길을 따라가다가 애스릭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기현은 그들 모두가 깨끗이 떠난 줄 알고 있었는데 애스릭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사람을 남겨 그들을 몰살시킬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다.기현의 눈에 갑자기 핏빛이 솟구쳐오르더니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맨주먹으로 몇 사랑을 해치웠다.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독살스러운 모습까지 보여 상대방을 놀라게 했다.그 사람들은 애스릭을 보낸 후 매우 내키지 않았다. 한바탕 뒤지고 나서 도망갈 계획이었는데, 결국 절반 정도 뒤지다가 기현 일행을 만났다. 특히 기현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듯 보였다.그들은 원래 기현 일당과 대충 싸우려고 일부러 그들을 놓아주려 했는데 기현이 달려들어 그들 몇 사람을 쓰러 눕히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기현 일행과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기현이 상대방의 생각을 알면 지금쯤 후회해 죽을지도 모른다. 몇 분 동안 아무렇게나 싸우면 될 일을 이렇게 충동적으로 또 한 번 미뤘다.몇 분 동안 싸운 후, 쌍방은 모두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기현의 왼팔이 그 무리의 두목을 누르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총을 쥐고 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있어 쌍방이 모두 시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기현은 그들의 타협을 기다렸고, 그 사람은 반격의 기회를 기다렸다.이 팀장은 원래 타협하려 했지만, 지금 이 지경에 이르니 승리욕이 자극되었고 지금은 고개를 숙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머리를 숙이면 부하들이 그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라도 그는 승부를 내려고 했다.이때 폭발음이 드디어 또렷하게 들렸고 그 사람은 이때 갑자기 손을 썼다.기현은 그가 성급히 달려들 것을 예상한 듯 손을 빼 권총을 내던지고 날쌔게 상대방의 손을 잡아 그의 등 뒤로 돌렸다. 두 발은 날렵하게 그의 허리와 배를 걷어찼고 곧 사납게 그의 몸을 비틀어 앞을 가
현진성은 애스릭의 부하들이 베티를 데려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애스릭이 아직도 단념하지 않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애스릭이 베티를 포기하거나 그들과 함께 죽으려고 이 보이지 않는 장치를 작동시켰다고 생각했다.애스릭이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베티를 데려가서 부활을 꿈꾸고 있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애스릭은 고승혁 교수와 강윤아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진성은 갑자기 눈꺼풀이 미친 듯이 뛰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윤아와 고승혁 교수가 숨어 있던 방에서 총소리가 났다.그는 급히 아까의 그 방으로 돌아갔다. 들어가 보니 그가 배치한 사람 중 몇 명은 상처를 입었고, 또 몇 명은 이미 의식을 잃었으며 그중 한 명은 이미 죽었는데 의사였다. 그 의사는 아기의 인큐베이터를 필사적으로 안고 있었다.진성은 그 의사의 시체를 땅에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 사람의 손이 인큐베이터 가장자리를 필사적으로 잡고 있어서 아주 많은 힘을 써서야 그 손을 쪼갰다. 진성은 겨우 옆 깨끗한 곳으로 메고 가서 그를 살며시 내려놓았다.의사를 내려놓은 진성은 돌아서서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를 살펴보았다. 아기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매우 달콤하게 자고 있었기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모두가 엎드려 있어서 진성은 한동안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하나 뒤집어 보았다. 애스릭의 사람들이 그냥 들어와서 그들을 다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고승혁 교수를 데려갔을 줄은 몰랐다.진성은 갑자기 윤아가 떠올랐다. 총소리가 그렇게 컸으니 윤아가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 리 없다. 진성은 급히 모퉁이의 병상 옆으로 달려갔다.이불 속이 울퉁불퉁했다. 그는 처음에는 고승혁 교수 등이 윤아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고 생각했지만 열어보니 안에 베개가 있었다. 진성은 멍해졌다.“이 방은 밀폐되어 있는데 그들은 어디에 잡혀간 거지? 게다가 방금 내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으니 문으로 나갔을 리가 없어.”진성은 조급했다.갑자기
고승혁 교수는 숨을 헐떡이며 말하고는 바다 위를 바라보았다. 바다 위에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애스릭이 그 배에 있었고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고승혁 교수는 깜짝 놀라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현진성은 그에게 대답할 방법이 없어서 그를 붙잡고 비밀 통로로 갔다.권재민도 급히 한기현에게 연락해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그러나 신호를 받자마자 재민은 기현 쪽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기현아, 무슨 일이야?”재민은 노심초사하여 급히 물었다.“방금 그 사람들이 들이닥쳐 시스템을 파괴했어. 최선을 다해 구조했으니 지금은 30분 정도 지연될 수 있어.”“시스템 복구가 시급한데 지금 그들과 싸우는 중이라……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어.”기현은 시스템 감시실에서 애스릭의 부하들과 싸우며 관제탑에 다시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권재민과 이쪽의 상태를 보고했다.보고하는 과정에서 재민은 기현의 끙끙거리는 소리까지 듣고는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기아현, 너는 어때? 버틸 수 있겠어? 시스템 쪽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지금은 복구할 방법이 없어. 이젠 네가 나설 차례야. 우리가 살아나갈 수 있는 시간은 안 남았어요, 재민아.”“상대편은 사람이 너무 많은데 우리 사람은 이 몇 명밖에 없어. 버티기 힘들 것 같아, 재민아, 빨리 와.”기현이 헐떡이며 소리쳤다.재민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급했지만 윤아가 이쪽에 있었기에 결정하기 어려웠다. 윤아가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매우 걱정했다.진성은 재민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내 부하들이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습격당했고, 그자들이 통제실의 시스템을 파괴했대요. 지금 우리 부하들이 그들과 싸우고 있는데 기현이도 그들에게 얽매여 시스템을 고칠 기회가 전혀 없어요…… 나는 윤아 씨가 마음에 걸려요.”재민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가요, 여기 내가 있을게요. 기지 안에 내 사람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