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명준은 손채은을 데리고 형식적으로 사과만 하면 이후의 협력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도아린이 갑자기 세게 대응하는 것이었다.게다가 두 파트너까지 직접 나서서 손명준의 앞길마저 막아버렸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손명준이 이 상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한 상태로 서 있을 때, 손채은이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강 대표님, 도아린 씨는 이미 건후 씨한테 버려진 여자예요. 그래도 상관없으신 건가요?”강재민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주변 공기도 얼어붙는 듯했고 구경하던 손님들은 하나둘씩 물러나며 손씨 가문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다.손명준도 상황을 알아차리곤 손채은을 향해 세게 뺨을 때렸다.“짝!”손채은의 얼굴이 옆으로 휘청였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아빠, 왜 때려요! 도아린 씨 진짜 쓰레기 맞다니까요? 예전에는 건후 씨를 붙잡고 늘어지더니... 연성에서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입 닥쳐!”손명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손채은이 지금의 분위기를 전혀 읽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다.“싫어요! 끝까지 말할 거예요.”손채은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강재민을 바라봤다.“강 대표님은 해남에서 오셔서 소문을 잘 모를 수 있어요. 전 강 대표님께서 도아린 씨한테 속을까 봐 사실대로 말하는 거예요.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다들 알고 있을 거예요.”“뭘 안다는 거죠?”그때, 신지훈이 사람들 속에서 걸어 나왔다.손채은은 구세주를 본 듯이 달려갔다.“신 대표님, 모건 그룹에서 일하고 계시잖아요. 강 대표님 체면을 세워준다고 도아린 씨 같은 여자를 회사에 들이시면 안 된다고요! 건후 씨는 도아린 씨를 싫어하거든요.”신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손채은 씨, 해외에 나가 있다가 얼마 전에 귀국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었군요.”그 말에 손채은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전 해외에 나간 적이 없는데요?”신지훈은 도아린을 향해 살짝 고개
일을 크게 만들지 않고 가볍게 넘기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을 키워야만 주변 사람들의 진짜 반응을 볼 수 있었다.그러면 신지훈은 배건후의 대변인이었기에 당연히 나서서 해명할 것이었다. 단순히 해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이미지를 세탁하려고 할 터였다.하지만 도아린은 그 수를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도아린이 강재민을 바라보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강재민이 손을 한 번 들어 올리자 경호원이 다가왔다.“이 두 분이 파티 분위기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내보내 주시겠어요?”파티 책임자가 소식을 받고 급히 달려왔다.그는 손명준과 손채은 부녀를 내쫓았을 뿐만 아니라 도아린에게 경매장에 있는 가장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신지훈은 도아린을 안심시키듯 미소를 보였지만 돌아온 건 그녀의 비웃음뿐이었다.도아린이 경매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신지훈은 손가락으로 브로치를 문질렀다.“나서긴 했는데 확실히 거절당했네.”여론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뜨자 구경꾼들도 하나둘씩 흩어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얽히고 얽힌 배건후와 도아린의 감정사에 대해서 작은 목소리로 수군대는 사람들이 있었다.경매가 시작될 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경매장 안으로 들어갔다.한편, 손명준과 손채은 부녀는 강제로 쫓겨났다.손채은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돌아가 따지려 했지만 손명준이 그녀를 거칠게 밀어붙였다.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멍청한 년... 네 눈에는 안 보여? 다들 도아린 씨를 감싸고 있는 게? 무슨 생각으로 덤빈 거야?”손채은은 무릎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왜 내 마음에 든 남자들은 전부 도아린 편만 드는 거야! 결혼까지 했다가 이혼한 여자인데 어디가 그렇게 좋다고...”손명준이 거칠게 손채은을 끌어올렸다.“만약 회사에 영향이라도 끼치게 되면 박 대표님이랑 결혼이나 해!”“절대 싫어요! 그 돼지 같은 남자랑 결혼하기 싫다고요.”손채은은 그렇게 손명준에 의해
하지만 도아린은 육하경을 보지 않고 구현성을 따라 뒤를 돌아봤다.신지훈이 도아린에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4억.”구현성이 계속해서 가격을 올렸다.“5억이요.”신지훈도 지지 않고 구현성이 부르는 가격보다 조금 더 높은 가격을 불렀다.구현성 옆에 앉아 있던 피부색이 까만 남자가 초조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신지훈에게 다가가더니 귓속말로 뭐라 말했다.그 말을 듣고도 신지훈은 ‘내 알 바 아니다’는 표정으로 계속 가격을 올렸다.그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분노를 가득 안고 다시 구현성에게로 돌아갔다.가격은 9억까지 뛰었고 신지훈은 10억까지 올렸다.구현성이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으며 육하경을 슬쩍 돌아봤다.하지만 육하경은 그의 시선을 피하더니 도아린에게 다음 경매품을 보여주었다.“이건 마음에 들어요?”그가 보여준 것은 비취 팔찌였다.순간, 도아린의 눈이 움찔거렸다.조금 전에 경매 목록을 봤을 때는 없었던 물건이었기에 경매 도중에 급하게 추가된 것 같았다.그 비취 팔찌는 그녀가 생일 때 배건후에게 요구했던 것이었다.‘이혼하고 나서는 에이트 맨션 금고에 보관해 뒀는데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제 신혼집...”도아린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 집도 하경 씨 손에 있어요?”육하경이 난처한 듯 입술을 꾹 눌렀다.“미안해요. 당시 건후가 비싼 가격에 사겠다고 해서요. 혹시나 두 사람이 다시 잘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양보했어요.”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육하경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왜요? 이 팔찌랑 무슨 연관이라도 있나요?”“아니요.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요.”육하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물었다.“이 팔찌는요? 마음에 들어요?”“20억이요!”그때 강재민이 갑자기 번호표를 들었다.도아린과 육하경이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옥 접시의 경매를 진행되는 중이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육하경이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강재민이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며 그를 힐끗 쳐
만약 작전이 거의 마무리 단계가 되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로 상관하지 않고 뛰어들어 그들을 떼어놓고 싶었을 것이다.그들에게 그건 단순한 고급 모조 제품일 뿐, 전혀 수집 가치가 없기에 강재민이 방해하지 않으면 구현성과 경쟁할 사람은 없었다.강재민은 경매품에 관심이 없었고 그저 도아린의 환심을 사기 위해 경매 가격을 강제로 40여억 원으로 올렸다.하지만 그 경매품은 구현성에게는 다른 의미가 있었고 경매 진행자의 세 번의 확인 후 입찰은 확정되었다.구현성은 그 작은 옥 접시를 입찰한 후, 기진맥진해 비틀거리며 수속하러 백스테이지에 향했다.다음은 비취 팔찌 경매가 이어졌다.이 팔찌는 품질이 뛰어나지만 별다른 유래가 없었다. 사회자는 좋은 가격을 얻으려고, 또 기부자에게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로맨틱한 동화 이야기를 꺼냈다.“전해지는 전설에 따르면 이 자주색 비취 팔찌를 가지고 있으면 운명적인 사랑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원래 내 팔찌가 아니었더라면 나도 저 이야기에 혹했을지도 몰라요.”도아린이 저도 모르게 코웃음 쳤다.“맘에 들어요?”육하경이 부드럽게 물었다.“그럴 리가요.”도아린이 단호하게 말했다.“그저 나를 얽매이는 물건일 뿐.”예전에 단순했던 도아린은 배건후가 자신에 대한 감정을 확인하고 싶었고 그래서 그 비싼 가격의 비취 팔찌를 샀었다.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다르게 배건후는 쓴소리 한번 없이 그녀가 원하는 건 모두 들어주었다.‘그래서 뭐? 그렇다고 건후 씨가 나한테 얼마나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었는데. 여전히 손보미와 애매모호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잖아.’게다가 동생 배지유가 못된 짓을 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일방적으로 참으라고만 했다.‘그러니까, 남자가 아무리 많은 돈을 쓴다고 해도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될 수 없어.’싸늘한 도아린의 눈빛을 읽고 육하경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강재민은 무대 위를 지켜보며 긴 다리를 꼬고 편안히 앉아 있었다.워낙 아름다운 비취 팔찌에 그 감동적인
경매장에서 손채은이 도아린을 도발하고 자극했던 일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도아린은 가정 먼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비록 도아린의 그날 일정을 강재민과 육하경이 증언할 수 있었지만 손명준은 여전히 도아린을 범인으로 확신하고 있었다.“그 여자가 채은이를 해친 게 틀림없어요. 직접 손을 댄 건 아니지만 충분히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할 수 있잖아요!”손명준은 밤새 머리가 하얗게 변했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고통스러워했다.“우리 딸은 단지 그 여자를 질투해서 몇 마디 심한 말을 했을 뿐인데 도아린은 너무 잔인하게 우리 딸을...”“손 사장님. 아직은 도아린 씨가 범죄와 연관됐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없습니다.”경찰이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다.손명준은 눈시울을 붉히면서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사건을 맡은 경찰은 사건 기록을 고민성에게 전달했다.“처음엔 장기 밀매 사건으로 생각했어요. 우리가 너무 주시하는 바람에 시체를 아무렇게나 버린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부검 결과 피해자의 내장은 모두 적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눈과 혀까지 제거된 걸로 보입니다. 분명히 개인감정이 담긴 범행입니다!”고민성은 사건 기록을 넘기며 한 번 훑어본 후, 그 옆에 있던 마스크를 쓴 남자에게 건넸다.남자는 야구 모자에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검은 양가죽 장갑을 끼고 사건 기록을 천천히 살펴봤다.“그럼 지금 이 사건을 어떤 팀에 넘길 생각이야?”고민성이 후배의 시선을 가로막으며 물었다.후배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그걸 여쭤보려고 위해 찾아왔습니다.”“그럼 우선 파일 놓고 가봐.”“그 말씀은...”고민성은 손을 흔들어 후배를 내보내고 눈앞의 남자가 현장 사진을 끝까지 살펴보기를 기다렸다.“어떻게 생각해?”남자는 기록을 내려놓고 차분하게 말했다.“장기 적출한 수법은 매우 전문적이야. 감정적인 범행이 아니란 말이지. 눈과 혀를 제거한 건 의도적으로 조사 방향을 흐리려는 전략일 수 있어. 아마도 도아린에게 혐의를 돌리려고 한 것 같아.”“그래서... 그 여자를
“그러니까 내 말은, 손채은의 죽음도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어제 자선 행사에서 아린 씨랑 그런 일이 있자마자 그날 밤에 바로 죽임을 당했잖아요. 분명히 아린 씨한테 누명을 덧씌우려고 그런 걸 거예요. 혹시 의심되는 사람이 있어요?”도아린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의심되는 사람?’한 명 있었다.처음에는 단지 의심에 불과했지만 손채은이 죽고 나서 오히려 확신이 들었다.“육청아요.”도아린은 이제 아무도 믿지 않았고 강재민과 손을 잡는다고 해도 여전히 그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육청아는 잡혀 들어갔지만 그 여자의 부하들은 여전히 밖에 있어요. 아마 경찰들의 수사를 방해하기 위한 수작이 아닌가 싶어요.”강재민이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말했다.“혹시 나도 의심하는 거예요?”“육청아는 재민 씨 부하였죠. 재민 씨를 건너뛰고 그런 일을 혼자 할 수도 없지 않나 해서요. LY의 네 명의 팀장 중에 누가 육청아와 손을 잡고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요?”강재민은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육청아와의 관계를 떼어낼 수 없었다.주작 자리에는 서대은이 있었고 그는 도아린을 돕기 위해 일부러 육청아네 조직에 들어갔다가 같이 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제외되었다.청룡은 LY의 오래된 멤버라서 신인한테 조종당할 리가 없었다.백호는 새로 임명된 사람이지만 LY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고 권력도 가장 적었다.유일한 가능성은 육청아가 강재민의 명령을 따랐다는 가설이었다. 그러니 은신처가 드러나자 강재민은 어쩔 수 없이 육청아를 내보내서 책임을 지게 했을 것이다.육청아는 잡혔지만 강재민은 여전히 장기 거래를 관리하고 육청아가 구속된 동안에도 범죄를 계속할 수 있었다는 게 도아린의 생각이었다.“아린 씨, 정말 저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육청아를 LY에 데려온 사람은 재민 씨예요. 그러니 그 여자를 지원해 주는 사람은 LY의 멤버가 틀림없어요.”강재민은 짜증을 내며 담배를 꺼내 물고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운전대를 두드리다가 갑자기 한
“읍...”커튼 뒤에 있던 남자는 도아린을 뒤에서 안은 채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남자는 창문 유리에 모습이 비치지 않게 피하면서 그녀의 귀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야!”도아린은 그 목소리에 굳어버렸다. 그녀가 너무 잘 아는 목소리였고 남자의 목소리에는 억누를 수 없는 고통과 씁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그녀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자 남자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이거 놓을게. 소리 지르지 마. 우리 얘기 좀 해.”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남자는 그녀를 침대 옆으로 밀어 앉힌 후, 그녀 앞에 섰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 그는 여전히 야구모자와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그 마스크 뒤로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만약 배건후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두 사람이 어떻게 다시 재회할지 도아린은 수없이 상상해 봤다. 그러다 매번 자신의 그 터무니없는 생각을 접어두기로 했다.오늘처럼 경찰이 보호하고 있는 상황에서 배건후가 살아서 그녀의 집에 침입할 줄은 도아린은 꿈에도 몰랐다.‘그이와 고 형사의 관계를 보면, 사실 이렇게 들어오는 게 더 쉬웠을지도 모르지.’배건후는 한동안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녀의 눈에서는 놀라움, 분노, 기쁨 따위는 보이지 않았고 집에 침입한 낯선 사람에 대한 질문조차 없었다.방 안에는 그저 조용한, 죽은 듯한 고요함만이 느껴졌다.도아린의 그 공허한 눈빛을 마주한 배건후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고통스럽게 말했다.“아린아, 내가 나중에 다 얘기...”“그럴 필요 없어요.”도아린이 바로 말을 끊었다.“할 말 있으면 간단히 해요. 나도 할 일이 있으니까.”도아린의 차가운 말투는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그건 자초한 일이니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한 걸음 더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그는 예전보다 많이 야위어 있었고 목젖이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손채은의 죽음은 모방범이 한 게 아니야.”배건후는 잠시 멈추고, 말을 이어갔다.“범죄 수법이 아주 능숙해
도아린의 긴 속눈썹은 젖어 있었고 불안에 떨고 있었다.“손채은에게 손댄 사람, 분명 당신을 위해 나선 거야. 그러니까 당신이 한 게 아니면 분명 당신 주변 사람이 한 짓이야.”배건후는 한숨을 내쉬다 그녀가 더 이상 듣지 않고 도망갈까 봐 빠르게 말했다.“이틀 동안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마. 이제 작전이 거의 끝날 거야. 다 끝나면 내가 다 말해줄게.”층 아래에서 차 경적이 울렸다.배건후는 도아린의 손을 꽉 잡고 다시 한번 경고했다.“아무도 믿지 마!”말을 마친 후, 모자를 눌러쓴 채로 돌아서서 떠났다.“건후 씨!”도아린이 목이 메여 그를 불렀다.그녀의 목소리에 배건후는 등을 돌린 채 멈춰 섰다.“당신이 왜 이런 일을 벌이는지 모르겠지만 모건 그룹은 이제 내 손에 들어왔고 절대 당신한테 돌려주지 않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도아린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나는 당신한테 빚진 거 없어요! 그러니까 당신 부모님은 당신이 돌봐요!”배건후가 갑자기 되돌아섰다.도아린은 그가 미쳐서 다시 자신에게 키스할까 봐 급히 뒤로 물러섰다.그런데 배건후는 침대 머리맡에 숨겨 놓았던 인형을 꺼내 들었다.“이건 내 거야.”그는 인형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창문으로 뛰어내렸다.도아린이 창문에 다가갔을 때, 남자의 모습은 이미 어두운 밤 속으로 사라졌고 잠시 후, 문 앞에 멈춰 있던 차가 떠났다.“정말 미쳤군!”다시 서재로 돌아온 도아린은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배건후는 사고 전보다 훨씬 말라 있었고 마스크를 썼지만 그의 거친 수염이 아프게 느껴졌다.한때 잘생기고 매력적이던 남자는 아마도 고단하고 지친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윙윙.휴대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 서대은의 메시지였다.도아린은 급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들의 채팅 프로그램에 접속했다.[어때? 소식이 있어?][보스! 보스가 준 계정과 비밀번호로 라윤주의 권한을 사용하고 있거든? 강재민 이전에 현무 직책을 담당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라윤주가 실종됐다는 명목으로 더 이상 조직의 임무를 받
진수혁은 찻잔을 들어 살짝 한 모금 마시더니 배건후를 바라보았다. "말해 봐요." "내가 먼저 도아린과 결혼하면, 당신은 유럽 유학 기회를 나에게 넘겨요. 당신이 먼저 변슬기와 결혼하면, 당신이 필요로 하는 칩 기술을 두 손으로 받칠게요."진수혁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찻잔을 쥔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고, 손등에는 핏줄이 돋아났다. 그는 배건후의 깊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매력적인 눈은 도아린을 향할 때면 온통 비위를 맞추고 약한 척하는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매처럼 날카롭게, 거스를 수 없는 공격성을 띠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진수혁은 눈에 띄지 않게 눈썹을 찌푸렸다. 배건후가 그동안 도아린에게 온갖 비위를 맞추는 것을 보고 진수혁은 배건후가 이미 자존심과 투지를 잃고 오직 결혼 생활을 되돌리려고만 한다고 오해했다. 이제야 배건후는 여전히 그 배건후라는 것을 알았다. 전 부인을 되찾고 싶어 하는 것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발전시킬 기회를 포기한 적도 없었다.유럽에는 강연이 하나 있는데, 입문 조건이 주요 재벌 그룹의 실력자 또는 후계자이며, 배건후의 현재 자산으로는 강연을 들을 수 없었다. 진수혁은 그 자격이 있었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유럽으로 가서 칩 기술을 연구하는 천재를 찾고 싶었다. 두 사람은 서로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건후는 굳이 그와 도박을 걸려고 했다. "당신이 이길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알죠." 진수혁이 말했다. "두고 보시죠." 배건후가 말했다. 두 남자는 악수하며 조용히 내기를 정했다. 저녁 식사 때, 진수혁 부부는 주범금도 데려왔고, 내일을 위해 준비했던 몇 가지 요리가 오늘 식탁에 올랐다. 모두 즐겁게 식사했고, 주범금의 기분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녀는 도아린에게 자신이 구매한 전리품을 자랑하기도 했고, 밤늦게서야 떠났다. 진수혁은 도아린을 데려다줄 때 그녀를 불러 세웠다. "유럽에 칩 분야 천재가 있다는 거
변환에 성공하는 순간, 동생은 깨어났고, 시스템은 남자 주인공에게 귀속되었다. 시스템은 남자 주인공에게 도아린의 진심을 얻지 못하면 죽을 것이라고 알렸다.처음에는 남자 주인공이 믿지 않았지만, 도아린과 이혼한 후 자신의 사업 제국이 날마다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도아린의 좋았던 점들을 떠올렸다...도아린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비록 허구의 이야기지만, 이 남자 주인공은 정말 쓰레기네!""나도 그렇게 생각해." 배건후는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도아린의 좋은 점을 떠올린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거야."도아린은 그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빛에는 ‘그러니 당신도 그와 똑같은 부류겠지’라고 쓰여 있었다."나는 아니야." 배건후는 도아린의 손을 잡고 심장 부위에 가져다 댔다. “나는 줄곧 당신만을 사랑했어. 다만 임무 때문에 표현할 수 없었을 뿐이야. 나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에게 줄 수 있어."도아린은 손을 빼서 그의 옷에 쓱 닦았다."당신은 나를 소유하고 싶을 뿐이야. 나를 소유하는 것이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과 같으니까." 그녀는 일어나 테라스로 향했다.배건후는 따라가서 말했다. "우리는 공정하게 할 수 있어! 결혼 전후를 막론하고 모든 자산은 당신 거야!"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나도 당신 거고."라고 덧붙였다.도아린은 깊어가는 가을의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침묵했다.배건후는 말없이 그녀 옆에 서 있었다. 마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주인이‘놀러 가자’라고 한마디만 하면 즉시 꼬리를 흔들며 기뻐할 준비가 된 듯이.한참 후, 도아린은 그를 돌아보았다."당신 우정윤에게 후원한 적 있어?"배건후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후원한 건 독자들이 남자 주인공을 가장 심하게 욕하는 챕터였어.""……" 그리고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도아린은 웃음을 참으며 일부러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 나오
"내가 무슨 바람이 있다고 그래요?"예전에 그녀가 먼저 다가간 건, 배건후랑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서였다.남녀를 불문하고 아이를 낳아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당신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여러 수단을 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랑 없이는 못 산다는 건 아니에요.내가 엄청나게 목마른 사람처럼 말하네요.배건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배건후가 잘못 말했어요. 배건후가 원해요. 당신이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나를 총애해주길 기다릴게요."퉤!도아린은 씹던 멜론을 배건후의 몸에 그대로 뿜어버렸다.가슴을 치며 화도 나고 웃음도 나왔다.두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배건후는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몸을 빼앗긴 게 분명하다.겉모습은 그대로지만, 속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예전의 배건후는 엄격하고 냉정하며 웃음기 하나 없었고,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하면 비웃거나 냉담하게 대하곤 했다. 지금의 배건후는 데릴사위가 되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고, ‘총애’를 받겠다고 자청하기까지 한다.배건후는 몸에 묻은 과일 조각을 닦지 않고 손을 들어 도아린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은지 확인한 후에야 휴지를 꺼내 옷을 닦았다.도아린은 바닥에 떨어진 과일 조각을 치우며 농담처럼 말했다. "배건후, 당신 몸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게 분명해요. 내가 책 속에 살고 있는 건가? 당신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내가 강해져서 당신에게 복수할 거라는 걸 알고 미리 납작 엎드리는 건가?"배건후는 옷을 다 닦고 도아린을 소파로 끌어당겼다."빙의가 아니라 공략이에요.""..."남자는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을 공략해서 당신의 사랑을 얻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어요.""당신 미쳤어요?" 도아린은 그의 등을 찰싹 때렸다."미쳤어요. 당신은 유일한 약이에요."도아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서 온몸을 떨며 웃었다. "그렇게 뻔한 사랑 고백은 우종이 가르쳐준 거죠
"엄마가 당신한테 준대요, 알아서 해요."도아린이 머리를 끄덕였다."그래요. 별장에서 돌아온 후 다시 해결합시다."배건후는 몸을 뒤로 돌리면서 주체 못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아 그런지 어떤 부분은 더 확대되어 크게 보였다."전보다 커졌는데요."이상한 말이 도아린의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다.그녀는 화가나 그를 한 눈 째리고 나가서 물건을 정리하였다.도아린은 변슬기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그녀를 끌고 단추를 찾는다는 핑계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변슬기는 카펫에 엎드려서 핸드폰 보조등을 켜고 소파 밑을 드려다보았다."찾았어요."그녀는 손을 뻗어 단추를 쥐면서 주절주절 말했다."도 선생님, 이제 기회가 되면 제가 저희집의 메인 메뉴인 만두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도아린은 카펫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그녀가 건네 준 단추를 만지면서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제일 좋기는 가게 평생 20% 할인 카드 줘요.""작은 가게라 많이 벌지도 못해요."변슬기가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이 오시면 무조건 20% 할인 해들릴게요."진수혁은 다 썰어 놓은 과일을 가지고 밖으로 나오면서 저둘이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무슨 얘기 하세요?"변슬기가 설명해주려 하자 도아린은 손으로 그녀의 목을 감싸며 말했다."데릴 사위에 대해 얘기를 했어요. 변슬기의 어머니 아버지는 딸 하나 뿐인데, 앞으로 사위가 있다며 처가에 들어왔으면 해요."변슬기는 진수혁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 보았다. 그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진수혁의 기분은 별로 파동이 없어 보였고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에 매우 동의하는 눈치였다."우리집에는 니가 하나뿐인 딸인데.""저는 데릴 사위를 할 생각이 있습니다."진수혁은 도아린한테 손을 닦으라고 뜨거운 손수건을 건네 주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 보았다.슬기는 놀라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도아린과 진수혁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
변슬기는 재빨리 진수혁의 등 뒤로 숨었다.진수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 상황을 파악하고 조용히 말했다.“이것 좀 부엌에 가져다줘.”“네!”변슬기는 배건후가 문 앞에 두고 간 봉투를 잽싸게 집어 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부엌으로 사라졌다.도아린의 셔츠 단추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배건후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주며 조심스럽게 게스트룸으로 이끌었다.“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차에 여벌로 둔 옷 있어.”도아린은 황급히 배건후의 손을 붙잡고 재킷을 벗어 돌려주었다.“일북이 근처에 있을 거야. 전화해. 밖에 추우니까 이거 입고 나가.”그녀가 팔을 들자 셔츠는 더 크게 벌어졌고 새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가 다시 배건후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에 번쩍이는 불꽃이 튀었고 그 불씨는 작지만 매섭고 뜨거웠다.도아린은 급히 몸을 옆으로 돌리고 팔로 가슴을 가렸다. “어서 가.”배건후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도아린은 반사적으로 거부하려 했지만 그는 단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번을 고요히 숨쉬더니 결국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발소리는 집 밖이 아니라 욕실로 향했다.변슬기는 부엌에서 머리를 내밀며 확인하려다 진수혁에게 팔을 붙잡혀 다시 안으로 끌려들어갔다.“생각해봤어? 회사에 남을 거야 아니면 돌아가서 가게를 이을 거야?”변슬기는 고개를 숙이고 포도를 씻었다.자신의 집은 해남에 있는 작은 분식집이었다. 일반 가정에게는 소중한 생계 수단일지 몰라도 재벌가인 진씨 가문 한테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존재였다.부모님은 외동딸인 변슬기가 곁에 있기를 바라며 나중에는 사위를 맞이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진수혁은 진성 그룹의 황태자다. 그에겐 집안도 학벌도 모두 어울리는 배우자가 필요했고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떠나는 순간 진수혁과는 더 이상 인연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계속 머무르면 감정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 뻔했다.한참 후 변슬기는 낮은 목소
“지금 두 분은 어느 정도까지 간 거예요?”집에 도착하자마자 도아린은 본론부터 꺼냈다.그녀는 오빠와 변슬기 사이가 눈에 띄게 가까워진 걸 단번에 눈치챘다.“아...아니에요!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변슬기는 난간에 양손을 올린 채 눈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시작은 안 했어도 뭔가 있었네요?”“크흐흑!”그 말에 변슬기는 자신이 삼킨 침에 갑자기 사레가 들려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고 얼굴은 벌게졌다.변명하려 할수록 기침은 더 거세졌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도아린은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물 한 잔을 건넸다.“너무 걱정 마요. 변슬기 씨 덕분에 우리 집에 큰 도움 됐잖아요. 우리 가족의 은인이에요!”“진짜 아니에요...”변슬기는 눈물까지 닦으며 손을 저었고 표정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그날 밤 나랑 같이 집에 안 갔잖아요. 여기서 잤던 거 아니에요?”“그랬었죠. 그런데요...”그녀는 작아진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아무 일도 없었어요.”도아린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설마 우리 오빠가 그쪽에 문제 있어요?”‘설마 그럴 리가... 아빠는 나이 들었어도 정력이 넘치시던데 오빠도 피는 못 속일 텐데?’변슬기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그날 서로 안기도 했고 키스도 했지만 마지막 순간 진수혁이 스스로 멈췄고 그는 침실을 양보하고 자신은 거실 소파에서 잤다.다음 날 술이 깬 듯한 표정으로 전날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고 변슬기도 굳이 꺼낼 수 없었다.그 후로도 그들의 사이는 은근하게 가까워졌지만 딱히 확실한 정의는 내려지지 않았다.“나중에 내가 오빠한테 물어볼게요.”“안 돼요!”변슬기는 도아린의 팔을 움켜잡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빛으로 말했다.“도 선생님...제 신분이 황태자님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거 잘 알아요. 남자들은 술 먹으면 착각할 수도 있고...다행히 선을 넘지는 않았으니 그냥 없던 일로 해주세요.”도아린은 그녀의 손을 다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하지만 우리 진씨 가문은 책임감 없는
“아!”변슬기는 병아리마냥 진수혁 차로 옮겨졌다.도아린은 웃으며 문을 닫고 조수석에 올라탔다.그녀는 휴대전화로 사진 하나를 골라 일남에게 전송했다.일남은 안전벨트를 하려던 참 알림 소리에 바로 폰을 꺼내 들었다.사진을 본 그는 입꼬리를 실룩이며 말했다.“아가씨 사진 실력이 정도면 필터도 울고 갈 수준인데요.”“정말? 나도 볼래!”송 비서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앉아. 운전해야 해”일남은 그의 머리를 눌러 다시 자리로 돌려보냈다.“시내에선 뒷좌석 안전벨트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야? 연성은 관리가 그렇게 심해? ”송 비서는 투덜대며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일남은 일북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너도 보지 마. 그냥 안 본 셈 쳐.”그 사진은 일남이 일북을 힐끔 바라보는 순간을 캡처한 것이었다.일북은 정면만 똑바로 응시하는 완전 군인 양식이었고 일남은 몰래 보는 범인 양식이었다.하지만 일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시동을 걸어 배건후 차량을 따라갔다.“왜 웃어?”배건후는 도아린이 조수석에서 혼자 피식거리는 걸 보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아무것도 아냐. 그냥 재밌는 사진 하나 건졌어.”도아린은 휴대폰을 집어넣고 밀크티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김지민네 진짜 끝도 없네. 혹시 배 회장님 유골 넘기면서 돈 요구한 거 아냐?”진옥경 고모 장례 때도 남편이 돈부터 요구했었다.다행히 진가에서 능력 있는 변호사를 구해서 사망 후에도 부부 재산을 나눠 가질 수 있었다.배석준 역시 김지민 가족한테는 그냥 은행 통장 같은 존재였고 이제 더는 못 빨아먹으니까 마지막으로 크게 한몫 뜯어내려고 하는 거였다.“2억.”배건후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티슈를 꺼내 도아린에게 건넸다.도아린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방금 마신 밀크티를 뿜을 뻔했고, 그 티슈로 입까지 닦았다.“진짜 줬어?”“아니.”배건후는 새 티슈를 또 건네며 그녀의 티슈 재활용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눈빛엔 오히려 다정함이 가
진수혁은 변슬기의 얼굴이 붉어진 걸 못 봤거나 봤더라도 모른 척했는지 담담히 말했다.“우린 여기서 기다릴게.”도아린은 변슬기 머리 위에 달린 풍선을 가리켰다.“이렇게 눈에 띄는 표시도 있으니까 제가 금방 찾으러 갈게요. 오늘 관광객 많으니까 지금 덜 붐빌 때 구석구석 잘 봐요.”“길 잃으면 전화해.”진수혁은 풍선 끈을 가볍게 당기며 변슬기를 데리고 발걸음을 옮겼다.일북은 도아린 뒤를 바짝 따라가며 주변을 날카롭게 살폈다. 혹시나 누가 해코지할까 혹은 누가 몰래 물건을 훔쳐 갈까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반면 일남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관광에 진심이었다.관광 가이드 옆에 붙어 설명을 듣고는 돌아와서 일북에게 흥분한 얼굴로 그대로 전달했다.“아까 가이드가 그러는데 양평산 대군이 남자인데 얼굴이 여자처럼 생겨서 어떤 후궁이랑 닮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황제가 유독 아껴줬대.”일북은 그런 일남의 말에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을 뿐 시선은 한시도 도아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둘이 가서 마음껏 구경하고 와.”“아가씨...”도아린은 손목에 찬 긴급 호출 시계를 들어 보이면서 웃었다.“무슨 일 생기면 연락할게. 오늘은 놀러 나온 거니까, 일은 잠시 내려놔.”도아린의 반복된 설득에 일북도 결국 잠깐 자유시간을 허락받았다.일남은 일북을 끌고 다니며 계속 얘기했고 도아린은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려던 참이었다.그때 갑자기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오늘 날씨는 참 좋은데 운동복만 입어도 괜찮지만 햇살은 은근히 따가워서 그늘 아래는 금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도아린은 마침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그녀는 잠깐 고개를 들어 양산을 쳐다보고는 옆쪽에 서 있는 송 비서를 바라보았다‘아 맞다! 얘도 있었지. 애매하게 끼어 있는 애 하나 더.’그렇게 해서 도아린은 송 비서와 함께 느긋하게 궁 안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가끔 변슬기를 마주치면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지나쳤다.공왕부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곳이라 여기저기 구경하다 보면 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집에 도착하자 일남은 결국 사실대로 털어놨다.“갈비뼈가 아직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전에 유치장에 있을 때 남궁유민 차가 폭발했잖아요? 그때 도아린 씨를 안고 같이 넘어지면서 또 다쳤거든요. 아까 강재민이랑 싸울 때 그 부위를 건드렸을 수도 있어요...”도아린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고개만 살짝 끄덕이면서 담담하게 대답했다.“응, 알겠어.”일남은 일북을 힐끔 바라봤고 일북은 눈빛으로 먼저 올라가라는 신호를 보냈다.“아가씨, 일부러 숨기려고 한 건 아닙니다.”“알아. 나 안 화났어.”도아린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사실 아까 대충 눈치챘거든.”야밤에 신지훈이 간호사 유선미를 데리고 배건후에게 수액을 놓으러 간 걸 봤다. 그 사람 몸에는 분명히 예전부터 앓고 있던 상처가 남아 있었다.배건후는 약한 척해서 동정을 사려 하지 않았고 도아린 역시 그가 얼마나 진심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주말이 되자 모두 함께 공왕부로 향했다.입구에 도착하고 나서야 도아린은 진범준 부부가 오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부모님은?”“주 대표님이랑 장비 사러 가셨어.”진수혁은 편안한 캐주얼 차림으로 변슬기 손에서 자연스럽게 배낭을 받아 메며 말했다.“출발할 때 들었는데 부모님이 주 대표님이랑 같이 자가 여행 떠나신다고 하더라고.”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고 있는 눈치였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도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배건후는 배석준 회장님 장례 치르러 갔어.”김지민은 아직도 운전기사에게서 보상금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버티고 있었고 끝까지 합의서에는 사인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하지만 배건후는 김지민 동생의 약점을 찾아냈고 오늘 반드시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동생을 감옥에 보낼 거라고 통보했다. 김지민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그 집안의 욕심을 생각하면 그들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분명히 배건후에게 또 뭘 요구하려고 들 것이다.하지만 배건후는 배석준처럼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