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이상 도정국이 아린 씨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거예요.”강재민이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했다.“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긴 한데, 내가 속이 좁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어요.”두 사람은 같이 거실로 향했다. 도아린은 강재민이 아직 밥을 먹지 않았다는 걸 알고 주방으로 가서 라면을 끓였다.“도지현은 누가 뭐래도 도정국의 친아들이에요. 만약 도지현이 그 아비와 계속 만나다 나쁜 물이라도 들면 아린 씨만 힘들어지잖아요. 그래서 난 그 두 사람이 만날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려고 한 거고요.”도아린은 옆에서 얼쩡거리는 강재민을 밀어내고 계란말이를 하기 시작했다.“육청아는 만나 봤어요?”도아린의 물음에 강재민은 벽에 기대서 고개를 끄덕였다.“변호사가 만나고 왔어요. 불법 장기 매매는 확정된 죄라고 하더군요. 왜요? 그 여자에게 다른 죄도 더 씌울 생각이에요?”도아린이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웃으며 대답했다.“재민 씨가 방금 말했잖아요, 나한테 할 말 있다고. 그래서 난 육청아와 육씨 가문과 연관된 줄 알았어요.”강재민도 웃으며 도아린 뒤로 가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아린 씨, 육씨 가문을 끌어내릴 생각이에요?”도아린이 팔꿈치로 강재민을 밀어내고 냉장고 앞에서 케첩을 꺼냈다.“재민 씨가 계속해서 모건 그룹을 공격하는데, 육씨 가문을 겨냥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그녀는 냉장고 문을 닫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그 매혹적이고 잘생긴 얼굴을 보며 차분하게 이어 말했다.“당초에 육청아를 곁에 둔 것도 언제든지 육씨 가문을 끌어들이려고 준비한 거겠죠.”냉장고 문이 닫히면서 소리가 작게 났고 강재민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그는 도아린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느긋하게 벽에 기대어 있었다.“통찰력이 정말 대단한데요. 주작의 팀장 자리는 아린 씨가 맡아야 하는데 말이에요. 내가 추천할까요?”도아린은 대답 대신 라면 냄비를 식탁에 올려놓은 후 일북을 불렀다.“얼른 와서 같이 먹어!”강재민은 이 경호원이 도아린과 너무 가깝게 지내는 것 같아
“아가씨...”일북이 설거지를 마치고 나오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손을 맞잡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그가 뭔가 말하려는 듯 멈칫하자 도아린은 이내 자신의 손을 빼며 대답했다.“내 이익에만 해가 되지 않으면 나는 재민 씨를 탓하지 않을 거예요.”강재민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집을 나서는 도아린과 일북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의 미소엔 어느새 확신이 담겨 있었다.두 사람은 차를 타고 슈퍼마켓으로 갔다. 장을 보며 쇼핑 카트를 밀다가 일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소식이 들어왔어요. 신 대표가 우정윤이 전에 약을 사 들고 갔던 그 아파트 단지에 갔다가 한 30분 뒤 다시 나왔다고 해요.”“혼자?”“여자 한 명과 함께요.”“한 비서야?”일북이 고개를 저으며 휴대폰을 꺼내 촬영한 장면을 도아린에게 보여주었다.그 여자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신지훈에게 가려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자세가 조금 어색해 보였다.일북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강재민과 손잡을 생각이에요?”“그렇다기보다 그냥 한 번 시험해 볼 생각이야.”이미 육청아와 육씨 가문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고 육하경도 육씨 가문의 일원이었기에 도아린은 이 사건에서 그가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그 후, 일북은 계속해서 장을 보고 도아린은 택시를 타고 회사로 갔다.신지훈은 그녀가 회사에 도착한 걸 알자마자 곧장 문서를 들고 찾아왔다.“도 대표님. 이 프로젝트에 대해 몇 가지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도아린은 그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하며 휴대폰을 꺼냈다. 겉으로는 뭔가 자료를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청룡이 메시지를 보냈는지 확인하고 있었다.연성의 장기 밀매 조직이 적발되고 육청아가 잡힌 후로 청룡은 더 이상 소식이 없었다.“말씀하세요.”도아린은 휴대폰을 치우고 진지하게 신지훈을 바라보았다.신지훈은 먼저 이 프로젝트의 장단점을 분석한 뒤, 농담처럼 말했다.“그런데 정말 강재민 씨와 프로젝트를 놓고 경쟁할 생각이에요?”“신 대표님,
신지훈이 떠난 후, 도아린은 바로 레드 후드와 드래곤에게 연락을 했다.자신이 청룡과는 연락이 되지 않았지만 그 두 사람은 아마 연락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다음 날, 육청아는 심문 중에 무심코 2년 전의 한 사건을 언급했다.2년 전, 고속도로에서 가교가 무너져 대형 교통사고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당시 사고 책임은 원래 가교 설계가 불합했는데 악천후까지 겹쳐서 일어난 사고라고 결론지어졌었다.하지만 사실 가교가 무너진 주된 원인은 불량 건축 자재 때문이었다.그 당시 자재를 구매하고 승인한 사람은 직위가 정지되었고 사건이 잦아든 후에는 육원 그룹의 고위층에 입성했다.육청아가 바로 그 사건을 덮기 위해 도움을 주고 육원 그룹을 도와 사건을 잠재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었다.“또 불량 자재라니! 너무 우연한 일이 아닌가?”도아린은 커다란 창문 앞에 서서 창밖의 달빛을 바라보며 말했다.일북은 그녀의 뒤에 서서 한참 생각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강재민의 새로운 프로젝트가 중단됐고 배건후의 요양원 개업 전 검수가 불합격이었던 것도 모두 건축 자재와 관련이 있어요! 이 모든 육씨 가문과 관련이 있을까요?”“육씨 가문이라... 그 사람들이 그렇게 큰 욕심을 부릴 것 같지는 않아.”도아린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육씨 가문과 육원 그룹은 주로 호텔, 외식업, 의류 산업 등을 하고 있었고, 건축 사업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단순히 사업 영역을 확장하기 싫어서일까, 아니면 예전에 있었던 일이 까발려지는 게 두려워서일까?”“육하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하경 씨?”도아린은 육하경이야말로 간단한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 사람은 이제 막 세인트존스 호텔을 맡았으니 이전의 육씨 가문의 일과는 상관이 없는 듯해.”하지만 육청아가 다른 건 말하지 않았고 2년 전 사건만 언급한 것은 오히려 육하경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일북이 뭐라 더 말하려던 그 순간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서서히 맞은 편 주민구역으로 들어갔다.
“왜요? 왕진을 가는 것마저도 신 대표님 허락을 받아야 하나요?”도아린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지만 신지훈은 살짝 당황해서 팔에 소름이 돋았다.그는 백미러를 통해 유선미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그럴 리가요...”유선미는 어색하게 웃었다.“저희 진료소에서 한 번 사고가 난 이후로는 더 이상 왕진을 하지 않아서 그래요. 이번에도 특별히 원장님께 허락을 받고 왕진을 한 거라서요. 제가 신 대표님께 크게 신세를 졌었던지라...”“정 그렇다면 저도 무리하게 부탁하지 않을게요. 다만...”도아린은 유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신 대표님께서 아주 중요하게 분이시거든요.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되면 그쪽 진료소가 감당하기는 어려울걸요?”유선미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최선을 다하겠습니다.”“사실은...”신지훈이 막 해명하려는 순간, 도아린의 전화벨이 울렸다.“잠시만요.”도아린은 그의 말을 끊고 전화를 받았다.“도착했어? 그래, 알겠어. 지금 갈게. 좀만 더 앞으로 와.”그녀는 신지훈을 바라보고는 통화를 이어 나갔다....통화를 마친 도아린이 입을 열었다.“운전기사가 데리러 왔다고 하네요. 전 볼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려 했고 신지훈은 어쩔 수 없이 차를 갓길에 세웠다.도아린이 떠난 후, 유 간호사님은 급히 사과했다.“죄송해요, 신 대표님. 아까 순간적으로 당황해 버려서...”신지훈은 백미러를 통해 길가에서 전화를 받는 도아린을 지켜보았다.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신지훈은 입술을 깨물더니 유선미를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리고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기다렸다. 도아린이 이쪽으로 지나가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그의 예상대로 그녀는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차에서 내리자마자 도아린은 반대 방향으로 가버렸다....일북은 건너편 아파트 단지를 주시하고 있었다. 신지훈이 나타나자 검은 옷을 입은 마스크 맨도 모습을 드러냈다. 일북은 몰래 그
창문 여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자 마스크 맨은 이미 창틀에 올라가 있었다. 고민성은 빠르게 앞으로 다가가 그를 붙잡았다.“너 제 정신이야? 상처도 낫지 않았으면서 또 다치려고? 빨리 내려와! 내가 따돌릴 테니까.”마스크 맨이 잠시 생각하더니 허리를 부여잡으며 창문틀에서 내려왔다.“아까 그 장면을 찍어서 지훈이한테 보여즐 걸 그랬네. 진짜 볼만할 텐데...”마스크 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민성도 더 이상 장난치지 않고 그에게 물 한 잔 따라주었다.그가 방을 나섰을 때, 도아린이 앉아 있던 테이블에는 남자만 남아 있었다.“그 여자 지금 자리에 없는데? 화장실이라도 간 건가? 지금이 기회야!”마스크 맨은 마시던 물컵을 내려놓고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향했다.그때, 무대에서 내려오던 누군가가 그와 정면으로 부딪쳤다.“죄송해요!”도아린이 고개를 들었을 때, 시야에 들어온 것은 매서운 남자의 눈이었다. 그녀가 삼3년 동안 수없이 봐왔던 눈이었다. 꿈속에 나올 정도로 말이다.마스크 맨은 모자에 검은색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서 눈만 드러내고 있는 셈이었다.하지만 그와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도아린은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저...”“실례합니다!”고민성이 재빨리 마스크 맨을 뒤로 숨겼다.“제 친구가 급한 일이 있어서요. 앞을 제대로 못 보고 실수로 부딪쳤네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도아린은 터질 듯한 감정을 억누르며 힘겹게 숨을 쉬었다.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신중하게 생각해야 해. 내가 잘못 본 거면 어떡해?’“전 괜찮아요. 오히려 친구분 상태가 안 좋아 보이셔서 걱정되네요.”그녀의 시선이 마스크 맨을 향하자 그는 모자를 깊숙이 더 눌러쓰고는 고개를 숙였다.도아린은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고 그의 눈빛에서 감정을 읽어내는 것도 불가능했다.“괜찮으신 거라면 저희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고민성이 마스크 맨을 돌아보며 팔꿈치를 툭 쳤다.“가자.”마스크 맨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고민성도 그의 뒤
“이건 뭐지?”놀란 듯한 그 남자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이 섞여 있었다.“설마...”2초간의 정적 후, 이어폰에서 날카로운 잡음이 울려 퍼졌다.도아린은 이어폰을 벗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감청 장비가 들킨 것이었다.마스크 맨은 경계심이 매우 강했다.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그의 정체는 거의 드러난 것이나 다름없었다.그날 밤, 도아린은 제대로 자지 못했다. 계속 배건후가 나타나는 꿈을 꾸었다....강재민은 도아린을 기분 좋게 해주려고 직접 아침을 준비했다.사실은 밖에서 사 온 음식을 집에 있는 접시에 옮겨 놓은 것뿐이지만 말이다.도아린이 평소에 쓰던 빨간 앞치마를 두른 강재민은 마치 큰 턱받이를 두른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우유를 들고나와 내려오는 도아린을 보았다.“아침 준비해 놓았어요.”강재민은 우유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더니 그녀의 푸석한 눈가를 보며 말했다.“잠을 못 잔 거예요? 무슨 일 있어요?”그는 앞치마를 벗으며 다가가 도아린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리더니 그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좀 감기 기운이 있어서요. 아침 먹고 좀만 더 잘래요.”“그럼 얼른 먹어요.”강재민은 의자를 당기더니 그녀가 의자에 앉자마자 앞으로 밀어주었다.“국이랑 밥도 가져다줄게요. 반찬도 준비했어요.”“고마워요.”도아린은 숟가락을 들더니 소금 몇 스푼 넣었다.그녀가 계속 소금을 넣고 있는 걸 본 강재민은 급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만!”“네?”도아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피식 웃었다.“소금을 너무 많이 넣었나 봐요. 괜찮아요. 물 좀 넣으면 돼요.”강재민은 앉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린 씨, 대체 무슨 일이에요?”“별일 아니에요.”도아린은 국을 강재민 앞에 밀어주며 말했다.“어제 꿈을 꿨는데 제가 마치 ‘트루먼 쇼’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어요. 제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전부 가짜인 것 같은 꿈이었거든요.”강재민은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리더니 자기 앞에 있던 국을 그녀
고민성은 이렇게 빨리 도아린을 다시 보게 될 줄 몰랐기에 순간적으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어젯밤 친구의 옷에서 발견한 도청기를 떠올린 그는 경계하는 듯한 눈빛으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보증금도 다 냈으니까 이제 가도 되는 거죠?”도아린은 고민성을 신경 쓰지 않고 서대은에게 직접 물었다.서대은이 이렇게 물으면서 고민성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네.”도아린은 그제야 서대은의 시선을 따라 고민성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초췌한 얼굴에는 뭔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어졌다.“고민성 형사님이셔!”서대은이 급히 소개했다.“내 사건을 담당하셨던 분인데 고 형사님이 아니었다면 분명 육청아가 날 끝까지 물고 늘어졌을 거야. 고 형사님께서 내가 무죄라는 증거를 찾아주셨거든.”“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고민성이 고개를 끄덕였다.“고 형사님이라...”도아린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죄송해요. 한눈에 못 알아보지 못했네요. 유니폼을 입으시니까 어젯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신데요?”고민성은 예의상 가볍게 악수를 했다.“안녕하세요, 여사님.”“저를 아가씨가 아니라 여사님이라고 부르신 걸 보니 역시 예리하신가 봐요.”고민성이 순간 멈칫했다.도아린은 겉으로 보면 이제 겨우 스물다섯이나 스물여섯으로 보였기에 보통 이 나이대 여성분은 아가씨라고 부르는 게 정상이었다. 고민성은 그녀가 배건후의 전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사라고 부른 것이었다.“아, 뉴스로 본 적 있거든요. 배건후 대표님의 전처시라고...”“건후 씨랑 뉴스에 가장 많이 나온 사람은 건후 씨 첫사랑분이죠. 3년 동안 결혼 생활을 이어 나갔는데도 아무도 몰랐으니까요. 이혼하자마자 온 세상이 다 알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서대은은 고민성에 대한 도아린의 태도가 불친절하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고민성 역시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급히 분위기를 수습하려 입을 열었다.별 의미 없는 인사말을 주고받은 후, 서대은은 도아린을 따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신지훈의 머리가 순간적으로 띵해 났다.순간, 그는 도아린이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도아린 역시 그의 눈에서 심상치 않은 눈빛을 읽어냈다.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신 대표님이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전 그저 모건 그룹을 제 손에 넣고 싶을 뿐이거든요. 남자는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좋은 거죠. 돈만 있으면 저를 기쁘게 해줄 남자는 얼마든지 생길 테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신 대표님?”신지훈은 지금 도아린이 자신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감정을 쉽게 드러낼 수도 없었다.그는 서류를 꽉 쥐며 담담하게 대답했다.“당연하죠. 남자든 여자든 돈이 있고 권력이 있어야 누군가를 만날 여유도 생기는 거니까요.”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그럼 수고하세요, 신 대표님. 기획안도 빨리 내놓으시고요.”신지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컴퓨터를 켜고 메시지를 보냈다.[너 그거 알아? 아린 씨가 다 알아버린 것 같아! 그런데도 너에 대한 걸 묻지 않고 강 대표님한테서 프로젝트부터 빼앗으라고 하더라... 지금 아린 씨 눈에는 돈밖에 없어. 모건 그룹을 장악하고 나서는 즐기면서 살 생각인 것 같아. 그러게 누가 자꾸 나서래? 가만히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 아냐!]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신지훈은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그는 실눈을 뜨고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약 15분쯤 지나자 신지훈은 담배를 물고 자세를 고쳐 앉더니 다른 사이트에 로그인했다....도아린의 휴대전화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그녀는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때, 한유미가 차를 가져다주려고 사무실로 들어왔고 도아린은 그녀에게 해남행 비행기 표를 예약해달라고 부탁했다.“돌아오는 표도 예매할까요?”그녀는 며칠 동안 머물 건지 간접적으로 물었다.“아니요. 언제 돌아올지는 상황을
진수혁은 찻잔을 들어 살짝 한 모금 마시더니 배건후를 바라보았다. "말해 봐요." "내가 먼저 도아린과 결혼하면, 당신은 유럽 유학 기회를 나에게 넘겨요. 당신이 먼저 변슬기와 결혼하면, 당신이 필요로 하는 칩 기술을 두 손으로 받칠게요."진수혁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찻잔을 쥔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고, 손등에는 핏줄이 돋아났다. 그는 배건후의 깊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매력적인 눈은 도아린을 향할 때면 온통 비위를 맞추고 약한 척하는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매처럼 날카롭게, 거스를 수 없는 공격성을 띠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진수혁은 눈에 띄지 않게 눈썹을 찌푸렸다. 배건후가 그동안 도아린에게 온갖 비위를 맞추는 것을 보고 진수혁은 배건후가 이미 자존심과 투지를 잃고 오직 결혼 생활을 되돌리려고만 한다고 오해했다. 이제야 배건후는 여전히 그 배건후라는 것을 알았다. 전 부인을 되찾고 싶어 하는 것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발전시킬 기회를 포기한 적도 없었다.유럽에는 강연이 하나 있는데, 입문 조건이 주요 재벌 그룹의 실력자 또는 후계자이며, 배건후의 현재 자산으로는 강연을 들을 수 없었다. 진수혁은 그 자격이 있었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유럽으로 가서 칩 기술을 연구하는 천재를 찾고 싶었다. 두 사람은 서로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건후는 굳이 그와 도박을 걸려고 했다. "당신이 이길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알죠." 진수혁이 말했다. "두고 보시죠." 배건후가 말했다. 두 남자는 악수하며 조용히 내기를 정했다. 저녁 식사 때, 진수혁 부부는 주범금도 데려왔고, 내일을 위해 준비했던 몇 가지 요리가 오늘 식탁에 올랐다. 모두 즐겁게 식사했고, 주범금의 기분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녀는 도아린에게 자신이 구매한 전리품을 자랑하기도 했고, 밤늦게서야 떠났다. 진수혁은 도아린을 데려다줄 때 그녀를 불러 세웠다. "유럽에 칩 분야 천재가 있다는 거
변환에 성공하는 순간, 동생은 깨어났고, 시스템은 남자 주인공에게 귀속되었다. 시스템은 남자 주인공에게 도아린의 진심을 얻지 못하면 죽을 것이라고 알렸다.처음에는 남자 주인공이 믿지 않았지만, 도아린과 이혼한 후 자신의 사업 제국이 날마다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도아린의 좋았던 점들을 떠올렸다...도아린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비록 허구의 이야기지만, 이 남자 주인공은 정말 쓰레기네!""나도 그렇게 생각해." 배건후는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도아린의 좋은 점을 떠올린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거야."도아린은 그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빛에는 ‘그러니 당신도 그와 똑같은 부류겠지’라고 쓰여 있었다."나는 아니야." 배건후는 도아린의 손을 잡고 심장 부위에 가져다 댔다. “나는 줄곧 당신만을 사랑했어. 다만 임무 때문에 표현할 수 없었을 뿐이야. 나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에게 줄 수 있어."도아린은 손을 빼서 그의 옷에 쓱 닦았다."당신은 나를 소유하고 싶을 뿐이야. 나를 소유하는 것이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과 같으니까." 그녀는 일어나 테라스로 향했다.배건후는 따라가서 말했다. "우리는 공정하게 할 수 있어! 결혼 전후를 막론하고 모든 자산은 당신 거야!"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나도 당신 거고."라고 덧붙였다.도아린은 깊어가는 가을의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침묵했다.배건후는 말없이 그녀 옆에 서 있었다. 마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주인이‘놀러 가자’라고 한마디만 하면 즉시 꼬리를 흔들며 기뻐할 준비가 된 듯이.한참 후, 도아린은 그를 돌아보았다."당신 우정윤에게 후원한 적 있어?"배건후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후원한 건 독자들이 남자 주인공을 가장 심하게 욕하는 챕터였어.""……" 그리고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도아린은 웃음을 참으며 일부러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 나오
"내가 무슨 바람이 있다고 그래요?"예전에 그녀가 먼저 다가간 건, 배건후랑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서였다.남녀를 불문하고 아이를 낳아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당신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여러 수단을 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랑 없이는 못 산다는 건 아니에요.내가 엄청나게 목마른 사람처럼 말하네요.배건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배건후가 잘못 말했어요. 배건후가 원해요. 당신이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나를 총애해주길 기다릴게요."퉤!도아린은 씹던 멜론을 배건후의 몸에 그대로 뿜어버렸다.가슴을 치며 화도 나고 웃음도 나왔다.두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배건후는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몸을 빼앗긴 게 분명하다.겉모습은 그대로지만, 속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예전의 배건후는 엄격하고 냉정하며 웃음기 하나 없었고,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하면 비웃거나 냉담하게 대하곤 했다. 지금의 배건후는 데릴사위가 되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고, ‘총애’를 받겠다고 자청하기까지 한다.배건후는 몸에 묻은 과일 조각을 닦지 않고 손을 들어 도아린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은지 확인한 후에야 휴지를 꺼내 옷을 닦았다.도아린은 바닥에 떨어진 과일 조각을 치우며 농담처럼 말했다. "배건후, 당신 몸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게 분명해요. 내가 책 속에 살고 있는 건가? 당신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내가 강해져서 당신에게 복수할 거라는 걸 알고 미리 납작 엎드리는 건가?"배건후는 옷을 다 닦고 도아린을 소파로 끌어당겼다."빙의가 아니라 공략이에요.""..."남자는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을 공략해서 당신의 사랑을 얻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어요.""당신 미쳤어요?" 도아린은 그의 등을 찰싹 때렸다."미쳤어요. 당신은 유일한 약이에요."도아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서 온몸을 떨며 웃었다. "그렇게 뻔한 사랑 고백은 우종이 가르쳐준 거죠
"엄마가 당신한테 준대요, 알아서 해요."도아린이 머리를 끄덕였다."그래요. 별장에서 돌아온 후 다시 해결합시다."배건후는 몸을 뒤로 돌리면서 주체 못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아 그런지 어떤 부분은 더 확대되어 크게 보였다."전보다 커졌는데요."이상한 말이 도아린의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다.그녀는 화가나 그를 한 눈 째리고 나가서 물건을 정리하였다.도아린은 변슬기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그녀를 끌고 단추를 찾는다는 핑계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변슬기는 카펫에 엎드려서 핸드폰 보조등을 켜고 소파 밑을 드려다보았다."찾았어요."그녀는 손을 뻗어 단추를 쥐면서 주절주절 말했다."도 선생님, 이제 기회가 되면 제가 저희집의 메인 메뉴인 만두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도아린은 카펫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그녀가 건네 준 단추를 만지면서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제일 좋기는 가게 평생 20% 할인 카드 줘요.""작은 가게라 많이 벌지도 못해요."변슬기가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이 오시면 무조건 20% 할인 해들릴게요."진수혁은 다 썰어 놓은 과일을 가지고 밖으로 나오면서 저둘이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무슨 얘기 하세요?"변슬기가 설명해주려 하자 도아린은 손으로 그녀의 목을 감싸며 말했다."데릴 사위에 대해 얘기를 했어요. 변슬기의 어머니 아버지는 딸 하나 뿐인데, 앞으로 사위가 있다며 처가에 들어왔으면 해요."변슬기는 진수혁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 보았다. 그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진수혁의 기분은 별로 파동이 없어 보였고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에 매우 동의하는 눈치였다."우리집에는 니가 하나뿐인 딸인데.""저는 데릴 사위를 할 생각이 있습니다."진수혁은 도아린한테 손을 닦으라고 뜨거운 손수건을 건네 주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 보았다.슬기는 놀라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도아린과 진수혁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
변슬기는 재빨리 진수혁의 등 뒤로 숨었다.진수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 상황을 파악하고 조용히 말했다.“이것 좀 부엌에 가져다줘.”“네!”변슬기는 배건후가 문 앞에 두고 간 봉투를 잽싸게 집어 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부엌으로 사라졌다.도아린의 셔츠 단추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배건후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주며 조심스럽게 게스트룸으로 이끌었다.“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차에 여벌로 둔 옷 있어.”도아린은 황급히 배건후의 손을 붙잡고 재킷을 벗어 돌려주었다.“일북이 근처에 있을 거야. 전화해. 밖에 추우니까 이거 입고 나가.”그녀가 팔을 들자 셔츠는 더 크게 벌어졌고 새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가 다시 배건후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에 번쩍이는 불꽃이 튀었고 그 불씨는 작지만 매섭고 뜨거웠다.도아린은 급히 몸을 옆으로 돌리고 팔로 가슴을 가렸다. “어서 가.”배건후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도아린은 반사적으로 거부하려 했지만 그는 단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번을 고요히 숨쉬더니 결국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발소리는 집 밖이 아니라 욕실로 향했다.변슬기는 부엌에서 머리를 내밀며 확인하려다 진수혁에게 팔을 붙잡혀 다시 안으로 끌려들어갔다.“생각해봤어? 회사에 남을 거야 아니면 돌아가서 가게를 이을 거야?”변슬기는 고개를 숙이고 포도를 씻었다.자신의 집은 해남에 있는 작은 분식집이었다. 일반 가정에게는 소중한 생계 수단일지 몰라도 재벌가인 진씨 가문 한테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존재였다.부모님은 외동딸인 변슬기가 곁에 있기를 바라며 나중에는 사위를 맞이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진수혁은 진성 그룹의 황태자다. 그에겐 집안도 학벌도 모두 어울리는 배우자가 필요했고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떠나는 순간 진수혁과는 더 이상 인연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계속 머무르면 감정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 뻔했다.한참 후 변슬기는 낮은 목소
“지금 두 분은 어느 정도까지 간 거예요?”집에 도착하자마자 도아린은 본론부터 꺼냈다.그녀는 오빠와 변슬기 사이가 눈에 띄게 가까워진 걸 단번에 눈치챘다.“아...아니에요!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변슬기는 난간에 양손을 올린 채 눈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시작은 안 했어도 뭔가 있었네요?”“크흐흑!”그 말에 변슬기는 자신이 삼킨 침에 갑자기 사레가 들려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고 얼굴은 벌게졌다.변명하려 할수록 기침은 더 거세졌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도아린은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물 한 잔을 건넸다.“너무 걱정 마요. 변슬기 씨 덕분에 우리 집에 큰 도움 됐잖아요. 우리 가족의 은인이에요!”“진짜 아니에요...”변슬기는 눈물까지 닦으며 손을 저었고 표정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그날 밤 나랑 같이 집에 안 갔잖아요. 여기서 잤던 거 아니에요?”“그랬었죠. 그런데요...”그녀는 작아진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아무 일도 없었어요.”도아린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설마 우리 오빠가 그쪽에 문제 있어요?”‘설마 그럴 리가... 아빠는 나이 들었어도 정력이 넘치시던데 오빠도 피는 못 속일 텐데?’변슬기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그날 서로 안기도 했고 키스도 했지만 마지막 순간 진수혁이 스스로 멈췄고 그는 침실을 양보하고 자신은 거실 소파에서 잤다.다음 날 술이 깬 듯한 표정으로 전날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고 변슬기도 굳이 꺼낼 수 없었다.그 후로도 그들의 사이는 은근하게 가까워졌지만 딱히 확실한 정의는 내려지지 않았다.“나중에 내가 오빠한테 물어볼게요.”“안 돼요!”변슬기는 도아린의 팔을 움켜잡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빛으로 말했다.“도 선생님...제 신분이 황태자님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거 잘 알아요. 남자들은 술 먹으면 착각할 수도 있고...다행히 선을 넘지는 않았으니 그냥 없던 일로 해주세요.”도아린은 그녀의 손을 다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하지만 우리 진씨 가문은 책임감 없는
“아!”변슬기는 병아리마냥 진수혁 차로 옮겨졌다.도아린은 웃으며 문을 닫고 조수석에 올라탔다.그녀는 휴대전화로 사진 하나를 골라 일남에게 전송했다.일남은 안전벨트를 하려던 참 알림 소리에 바로 폰을 꺼내 들었다.사진을 본 그는 입꼬리를 실룩이며 말했다.“아가씨 사진 실력이 정도면 필터도 울고 갈 수준인데요.”“정말? 나도 볼래!”송 비서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앉아. 운전해야 해”일남은 그의 머리를 눌러 다시 자리로 돌려보냈다.“시내에선 뒷좌석 안전벨트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야? 연성은 관리가 그렇게 심해? ”송 비서는 투덜대며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일남은 일북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너도 보지 마. 그냥 안 본 셈 쳐.”그 사진은 일남이 일북을 힐끔 바라보는 순간을 캡처한 것이었다.일북은 정면만 똑바로 응시하는 완전 군인 양식이었고 일남은 몰래 보는 범인 양식이었다.하지만 일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시동을 걸어 배건후 차량을 따라갔다.“왜 웃어?”배건후는 도아린이 조수석에서 혼자 피식거리는 걸 보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아무것도 아냐. 그냥 재밌는 사진 하나 건졌어.”도아린은 휴대폰을 집어넣고 밀크티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김지민네 진짜 끝도 없네. 혹시 배 회장님 유골 넘기면서 돈 요구한 거 아냐?”진옥경 고모 장례 때도 남편이 돈부터 요구했었다.다행히 진가에서 능력 있는 변호사를 구해서 사망 후에도 부부 재산을 나눠 가질 수 있었다.배석준 역시 김지민 가족한테는 그냥 은행 통장 같은 존재였고 이제 더는 못 빨아먹으니까 마지막으로 크게 한몫 뜯어내려고 하는 거였다.“2억.”배건후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티슈를 꺼내 도아린에게 건넸다.도아린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방금 마신 밀크티를 뿜을 뻔했고, 그 티슈로 입까지 닦았다.“진짜 줬어?”“아니.”배건후는 새 티슈를 또 건네며 그녀의 티슈 재활용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눈빛엔 오히려 다정함이 가
진수혁은 변슬기의 얼굴이 붉어진 걸 못 봤거나 봤더라도 모른 척했는지 담담히 말했다.“우린 여기서 기다릴게.”도아린은 변슬기 머리 위에 달린 풍선을 가리켰다.“이렇게 눈에 띄는 표시도 있으니까 제가 금방 찾으러 갈게요. 오늘 관광객 많으니까 지금 덜 붐빌 때 구석구석 잘 봐요.”“길 잃으면 전화해.”진수혁은 풍선 끈을 가볍게 당기며 변슬기를 데리고 발걸음을 옮겼다.일북은 도아린 뒤를 바짝 따라가며 주변을 날카롭게 살폈다. 혹시나 누가 해코지할까 혹은 누가 몰래 물건을 훔쳐 갈까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반면 일남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관광에 진심이었다.관광 가이드 옆에 붙어 설명을 듣고는 돌아와서 일북에게 흥분한 얼굴로 그대로 전달했다.“아까 가이드가 그러는데 양평산 대군이 남자인데 얼굴이 여자처럼 생겨서 어떤 후궁이랑 닮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황제가 유독 아껴줬대.”일북은 그런 일남의 말에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을 뿐 시선은 한시도 도아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둘이 가서 마음껏 구경하고 와.”“아가씨...”도아린은 손목에 찬 긴급 호출 시계를 들어 보이면서 웃었다.“무슨 일 생기면 연락할게. 오늘은 놀러 나온 거니까, 일은 잠시 내려놔.”도아린의 반복된 설득에 일북도 결국 잠깐 자유시간을 허락받았다.일남은 일북을 끌고 다니며 계속 얘기했고 도아린은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려던 참이었다.그때 갑자기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오늘 날씨는 참 좋은데 운동복만 입어도 괜찮지만 햇살은 은근히 따가워서 그늘 아래는 금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도아린은 마침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그녀는 잠깐 고개를 들어 양산을 쳐다보고는 옆쪽에 서 있는 송 비서를 바라보았다‘아 맞다! 얘도 있었지. 애매하게 끼어 있는 애 하나 더.’그렇게 해서 도아린은 송 비서와 함께 느긋하게 궁 안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가끔 변슬기를 마주치면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지나쳤다.공왕부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곳이라 여기저기 구경하다 보면 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집에 도착하자 일남은 결국 사실대로 털어놨다.“갈비뼈가 아직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전에 유치장에 있을 때 남궁유민 차가 폭발했잖아요? 그때 도아린 씨를 안고 같이 넘어지면서 또 다쳤거든요. 아까 강재민이랑 싸울 때 그 부위를 건드렸을 수도 있어요...”도아린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고개만 살짝 끄덕이면서 담담하게 대답했다.“응, 알겠어.”일남은 일북을 힐끔 바라봤고 일북은 눈빛으로 먼저 올라가라는 신호를 보냈다.“아가씨, 일부러 숨기려고 한 건 아닙니다.”“알아. 나 안 화났어.”도아린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사실 아까 대충 눈치챘거든.”야밤에 신지훈이 간호사 유선미를 데리고 배건후에게 수액을 놓으러 간 걸 봤다. 그 사람 몸에는 분명히 예전부터 앓고 있던 상처가 남아 있었다.배건후는 약한 척해서 동정을 사려 하지 않았고 도아린 역시 그가 얼마나 진심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주말이 되자 모두 함께 공왕부로 향했다.입구에 도착하고 나서야 도아린은 진범준 부부가 오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부모님은?”“주 대표님이랑 장비 사러 가셨어.”진수혁은 편안한 캐주얼 차림으로 변슬기 손에서 자연스럽게 배낭을 받아 메며 말했다.“출발할 때 들었는데 부모님이 주 대표님이랑 같이 자가 여행 떠나신다고 하더라고.”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고 있는 눈치였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도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배건후는 배석준 회장님 장례 치르러 갔어.”김지민은 아직도 운전기사에게서 보상금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버티고 있었고 끝까지 합의서에는 사인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하지만 배건후는 김지민 동생의 약점을 찾아냈고 오늘 반드시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동생을 감옥에 보낼 거라고 통보했다. 김지민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그 집안의 욕심을 생각하면 그들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분명히 배건후에게 또 뭘 요구하려고 들 것이다.하지만 배건후는 배석준처럼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