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뭐지?”놀란 듯한 그 남자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이 섞여 있었다.“설마...”2초간의 정적 후, 이어폰에서 날카로운 잡음이 울려 퍼졌다.도아린은 이어폰을 벗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감청 장비가 들킨 것이었다.마스크 맨은 경계심이 매우 강했다.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그의 정체는 거의 드러난 것이나 다름없었다.그날 밤, 도아린은 제대로 자지 못했다. 계속 배건후가 나타나는 꿈을 꾸었다....강재민은 도아린을 기분 좋게 해주려고 직접 아침을 준비했다.사실은 밖에서 사 온 음식을 집에 있는 접시에 옮겨 놓은 것뿐이지만 말이다.도아린이 평소에 쓰던 빨간 앞치마를 두른 강재민은 마치 큰 턱받이를 두른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우유를 들고나와 내려오는 도아린을 보았다.“아침 준비해 놓았어요.”강재민은 우유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더니 그녀의 푸석한 눈가를 보며 말했다.“잠을 못 잔 거예요? 무슨 일 있어요?”그는 앞치마를 벗으며 다가가 도아린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리더니 그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좀 감기 기운이 있어서요. 아침 먹고 좀만 더 잘래요.”“그럼 얼른 먹어요.”강재민은 의자를 당기더니 그녀가 의자에 앉자마자 앞으로 밀어주었다.“국이랑 밥도 가져다줄게요. 반찬도 준비했어요.”“고마워요.”도아린은 숟가락을 들더니 소금 몇 스푼 넣었다.그녀가 계속 소금을 넣고 있는 걸 본 강재민은 급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만!”“네?”도아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피식 웃었다.“소금을 너무 많이 넣었나 봐요. 괜찮아요. 물 좀 넣으면 돼요.”강재민은 앉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린 씨, 대체 무슨 일이에요?”“별일 아니에요.”도아린은 국을 강재민 앞에 밀어주며 말했다.“어제 꿈을 꿨는데 제가 마치 ‘트루먼 쇼’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어요. 제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전부 가짜인 것 같은 꿈이었거든요.”강재민은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리더니 자기 앞에 있던 국을 그녀
고민성은 이렇게 빨리 도아린을 다시 보게 될 줄 몰랐기에 순간적으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어젯밤 친구의 옷에서 발견한 도청기를 떠올린 그는 경계하는 듯한 눈빛으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보증금도 다 냈으니까 이제 가도 되는 거죠?”도아린은 고민성을 신경 쓰지 않고 서대은에게 직접 물었다.서대은이 이렇게 물으면서 고민성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네.”도아린은 그제야 서대은의 시선을 따라 고민성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초췌한 얼굴에는 뭔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어졌다.“고민성 형사님이셔!”서대은이 급히 소개했다.“내 사건을 담당하셨던 분인데 고 형사님이 아니었다면 분명 육청아가 날 끝까지 물고 늘어졌을 거야. 고 형사님께서 내가 무죄라는 증거를 찾아주셨거든.”“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고민성이 고개를 끄덕였다.“고 형사님이라...”도아린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죄송해요. 한눈에 못 알아보지 못했네요. 유니폼을 입으시니까 어젯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신데요?”고민성은 예의상 가볍게 악수를 했다.“안녕하세요, 여사님.”“저를 아가씨가 아니라 여사님이라고 부르신 걸 보니 역시 예리하신가 봐요.”고민성이 순간 멈칫했다.도아린은 겉으로 보면 이제 겨우 스물다섯이나 스물여섯으로 보였기에 보통 이 나이대 여성분은 아가씨라고 부르는 게 정상이었다. 고민성은 그녀가 배건후의 전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사라고 부른 것이었다.“아, 뉴스로 본 적 있거든요. 배건후 대표님의 전처시라고...”“건후 씨랑 뉴스에 가장 많이 나온 사람은 건후 씨 첫사랑분이죠. 3년 동안 결혼 생활을 이어 나갔는데도 아무도 몰랐으니까요. 이혼하자마자 온 세상이 다 알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서대은은 고민성에 대한 도아린의 태도가 불친절하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고민성 역시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급히 분위기를 수습하려 입을 열었다.별 의미 없는 인사말을 주고받은 후, 서대은은 도아린을 따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신지훈의 머리가 순간적으로 띵해 났다.순간, 그는 도아린이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도아린 역시 그의 눈에서 심상치 않은 눈빛을 읽어냈다.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신 대표님이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전 그저 모건 그룹을 제 손에 넣고 싶을 뿐이거든요. 남자는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좋은 거죠. 돈만 있으면 저를 기쁘게 해줄 남자는 얼마든지 생길 테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신 대표님?”신지훈은 지금 도아린이 자신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감정을 쉽게 드러낼 수도 없었다.그는 서류를 꽉 쥐며 담담하게 대답했다.“당연하죠. 남자든 여자든 돈이 있고 권력이 있어야 누군가를 만날 여유도 생기는 거니까요.”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그럼 수고하세요, 신 대표님. 기획안도 빨리 내놓으시고요.”신지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컴퓨터를 켜고 메시지를 보냈다.[너 그거 알아? 아린 씨가 다 알아버린 것 같아! 그런데도 너에 대한 걸 묻지 않고 강 대표님한테서 프로젝트부터 빼앗으라고 하더라... 지금 아린 씨 눈에는 돈밖에 없어. 모건 그룹을 장악하고 나서는 즐기면서 살 생각인 것 같아. 그러게 누가 자꾸 나서래? 가만히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 아냐!]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신지훈은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그는 실눈을 뜨고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약 15분쯤 지나자 신지훈은 담배를 물고 자세를 고쳐 앉더니 다른 사이트에 로그인했다....도아린의 휴대전화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그녀는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때, 한유미가 차를 가져다주려고 사무실로 들어왔고 도아린은 그녀에게 해남행 비행기 표를 예약해달라고 부탁했다.“돌아오는 표도 예매할까요?”그녀는 며칠 동안 머물 건지 간접적으로 물었다.“아니요. 언제 돌아올지는 상황을
두 번째 건강검진 보고서에는 서우민의 것만 있었다. 그의 심각한 신장병이 사라졌다는 것이다.“이... 이건...”우정윤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불길한 예감은 마음속에서 점점 커져만 갔다.도아린은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고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우 비서님 똑똑한 분이시잖아요. 모를 리 없겠죠? 서우민 씨의 신장병이 나은 건 건강한 신장을 이식받았기 때문이에요. 회사에서 정기적으로 직원들을 위해 건강검진을 진행하잖아요. 그 건강검진 보고서를 본 적 없다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우정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순간, 그의 눈빛에는 극도의 공포가 서렸다.전에 느껴본 적 있는 건 같은 익숙한 분위기에 그는 더더욱 두려워났다.“도 대표님, 이거... 설, 설마...”우정윤은 말을 더듬거리면서도 끝내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주 대표님께서 우 비서님을 믿으시니까 건후 씨 장례식에 대한 걸 전적으로 맡기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아닙니다. 저는 절대 그런 적 없어요!”우정윤은 다급하게 변명했다.“정말 아닙니다! 저는 그저...”우정윤은 건강검진 보고서를 꽉 움켜쥐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도아린도 그를 다그치지 않았다.우정윤이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면 그가 모든 죗값을 치러야만 했다.그래서 굳이 재촉할 필요도 없었다. 더 이상 물러설 길이 없다는 걸 그가 깨닫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실토할 터였으니 말이다.도아린은 다시 태블릿으로 시선을 돌렸다. 청룡이 보낸 메시지 내용은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였다.그녀는 천천히 청룡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희는 더 이상 그쪽이 필요 없어요. 알아서 잘 처신하세요.]이전의 모든 채팅 내용을 삭제한 다흐, 삭제하고 나서야 소프트웨어에서 로그아웃했다.그녀가 떠날 준비를 하자 우정윤은 절망스러운 듯한 말투로 말했다.“도 대표님, 말하겠습니다! 전부 말할게요...”“이제 듣고 싶지 않아요.”도아린은 태블릿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우 비
도아린이 차에 타자마자 신지훈한테서 전화가 왔다.“모레 자선행사 있는데 전에는 주 대표님께서 모건 그룹 대표로 참석하셨거든요. 혹시 가기 싫으사면...”“갈 거예요.”“간다고요?”“신 대표님은 제가 안 갔으면 좋겠어요?”“그럴 리가요.”신지훈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그럼 한 비서한테 미리 준비하라고 할게요. 저도 같이 갈까요?”도아린은 일북에게 신경 쓰지 말고 운전하라는 신호를 주면서 말했다.“괜찮아요. 제 파트너랑 갈 거예요.”신지훈이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물었다.“그럼 경매 물품은 어떡하실래요? 준비해 드릴까요?”“필요 없어요.”전화를 끊은 도아린은 또 강재민한테 전화를 걸었다.“어디예요?”“명도 레스토랑이요.”명도 레스토랑은 강재민이 운영하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육하경과 경쟁하겠다는 의도로 만들었지만 그 덕분에 요즘 젊은 커플들은 호텔에서 하는 결혼식보다 야외에서 하는 스몰 웨딩을 선호하게 되었다. 식사도 뷔페 스타일의 서양식으로 바뀌었는데 인기가 꽤 많았다.“위치 보내줘요. 지금 갈게요.”도아린이 먼저 연락하는 건 오랜만이었기에 강재민이 기분 좋게 위치를 보냈고 밀크티를 손에 든 채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서 내리자 강재민이 양산을 펴서 그녀 머리 위를 가려주었다.날씨는 덥지 않았지만 자외선이 강했기 때문이었다.“잘 꾸며놨네요.”도아린은 밀크티를 받아 들고 강재민과 함께 레스토랑을 둘러보았다.직원들은 사장이 직접 양산을 씌워주는 걸 보고 도아린이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래서 그녀한테 깍듯하게 대했다.강재민이 웨딩홀로 도아린을 데려가면서 말했다.“우리 결혼식은 제가 직접 디자인할게요. 어떤 꽃 좋아해요?”“음... 돈만 있으면 아무 꽃이나 막 사도 되잖아요.”강재민이 피식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그럼 명도 레스토랑을 아린 씨 이름으로 넘길까요?”도아린이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면서 타피오카를 오물오물 씹었다.“그럴 필요는 없어요. 갖고 싶으면 제가 제 방식으로 가질 거거든요.”
“가시죠.”강재민이 신사적으로 인사를 하며 도아린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려갔다.마침, 육하경도 도착한 참이었다.오늘 강재민과 기싸움을 하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는 겉으로라도 화목해 보이려고 리무진을 준비했다.도아린이 먼저 차에 탔고 하얀색 정장을 입은 육하경은 강재민과 나란히 도아린의 맞은편에 앉았다.그녀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한 사람은 온화하고 우아해 보였고 다른 한 사람은 매력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기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막 연회장에 도착했을 때, 도아린은 신지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도 대표님, 저도 파트너 요청을 받았어요. 제 친구도 파티 행사에 참석한다면서 함께 가자고 하더라고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저를 찾아주세요.”“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순간, 도아린의 목소리가 겹쳤고 신지훈은 뒤를 돌아보았다. 강재민이 그녀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나오는 것이었다.육하경도 같은 차에서 내리더니 도아린의 옆에 섰다.두 남자가 한 명은 왼쪽, 다른 한 명은 오른쪽에 서 있었다. 한 명은 하얀 수트, 다른 한 명은 검은색 수트를 입고 있었다. 마치 여왕님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기사들인듯했다.신지훈은 전화를 끊고 도아린 곁으로 다가갔다.“도 대표님, 정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계시네요.”도아린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 모르겠네요. 파트너 두 분을 데리고 참석한 제가 너무 경솔하다는 건가요, 아니면 두 회사를 운영하는 제가 멋있어 보인다는 건가요?”신지훈은 머쓱한 표정으로 코를 만지작거리더니 불편한 미소를 지었다.다른 남자들도 아내와 비서를 동시에 데려오는 경우가 있었지만 다들 속으로만 안 좋게 생각할 뿐,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설령 말하더라도 그들을 성공한 남자라고 칭할 뿐이었다. 가정도 화목하고 사업도 잘되는 사람이라면서 말이다.하지만 도아린처럼 여자가 두 남자를 데려오는 사람은 처
“강 대표님!”어떤 기업가가 먼저 강재민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그 옆에 있는 여자도 도아린의 존재를 무시하고 강재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손명준과 손채은 모녀였다.“강 대표님, 조금 있다가 저와 함께 춤을 출 수 있으실까요?”강재민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며 그녀의 의사를 물었다.그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도아린에게 주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아린 씨, 안 된다고 하세요!’사실 강재민도 춤은 도아린과 출 생각이었다. 그가 다른 여자와 춤을 춰버리면 기회는 육하경에게 가는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도아린은 그와 눈을 마주쳤지만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강재민의 시선을 따라 도아린을 쳐다본 손채은은 곧바로 경멸의 표정을 지었다.“누군가 했네... 도아린 씨 아니세요?”여자는 비웃으며 냉소적인 말을 했다.“강 대표님, 해남에서 오셔서 연성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시나 본데요. 도아린 씨 말이에요. 한때 배건후 씨한테 들이댔던 여자예요. 가망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포기하셨나봐요. 타깃을 바꾸신 건가요?”“방금 돌아오셔서 소식이 좀 늦을 수 있겠네요.”육하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도아린 대표님은 지금 모건 그룹과 JS 픽처스의 대표직을 맡고 있어요. 제가 아린 씨의 눈에 들었다니 저한테는 인생에서 가장 큰 영광이죠.”손채은은 이 말을 듣고 밀도 안 된다는 듯 억울한 표정으로 반박했다.“배건후 씨한테 차이지 않았어요? 어떻게 도아린 씨가 모건 그룹 대표일 수 있죠?”강재민은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자신에게 인사를 건넨 기업가를 바라보았다.“손 대표님, 정말 복이 많으시네요. 저런 귀여운 따님이 있으셔서요.”말을 마친 후, 두 사람은 도아린을 감싸고 행사장으로 들어갔다.손명준은 분노에 찬 표정으로 딸을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널 데려온 건 인맥을 쌓으라는 거지 내 사업을 망치라는 게 아니야!”“아빠, 도아린 씨 말이에요. 전에는 저한테서 배건후 씨를 빼앗아 가더니 이번에는
손채은은 강재민에게 춤을 신청하면서도 거절당할까 봐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강재민에게 춤을 신청한 것부터 이미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공개적으로 거절당하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터였다.“강 대표님, 도아린 씨가 먼저 다른 사람이랑 춤을 추겠다고 대표님을 여기 남겨두고 갔잖아요. 전 도와드리려고 온 거예요.”“필요 없어요.”“그치만... 그치만...”손채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봤다.“이렇게 거절당하면 제가 체면을 못 차리잖아요.”“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손채은은 이를 악물며 손톱이 부러질 듯 주먹을 꽉 쥐었다. 강재민 앞에서 무너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그러자 음악이 또 바뀌었다.여자들이 한 바퀴 돌며 파트너의 품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강재민은 정확한 타이밍에 도아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육하경을 향해 도발적인 눈빛을 보냈다.손채은은 화가 난 듯 발을 쾅 구르며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빠르게 걸어갔다. 걷는 속도가 빨라지면 다른 사람들의 조롱 섞인 수군거림이 들리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젠장! 도아린... 정말 괘씸한 년이야!’손채은은 와인 잔을 들고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비워냈다.“왜 그렇게 화가 나 계세요?”낯선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한 남자가 우아한 미소를 띠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쪽은...”“신지훈이라고 해요.”“신 대표님이세요?”손채은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고 신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춤을 추고 싶으세요?”“당연하죠!”그는 손채은의 손을 잡고 춤을 추러 나섰다.그들이 춤을 추는 사이, 신지훈은 자연스럽게 도아린 옆을 스쳐 지나가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그녀는 무덤덤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신 대표님, 브로치가 독특하시네요.”손채은이 손을 뻗으려 하자 신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집사람이 준 겁니다. 아내가 소유욕이 워낙 강해서 남이 자기 물건을 건
진수혁은 찻잔을 들어 살짝 한 모금 마시더니 배건후를 바라보았다. "말해 봐요." "내가 먼저 도아린과 결혼하면, 당신은 유럽 유학 기회를 나에게 넘겨요. 당신이 먼저 변슬기와 결혼하면, 당신이 필요로 하는 칩 기술을 두 손으로 받칠게요."진수혁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찻잔을 쥔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고, 손등에는 핏줄이 돋아났다. 그는 배건후의 깊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매력적인 눈은 도아린을 향할 때면 온통 비위를 맞추고 약한 척하는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매처럼 날카롭게, 거스를 수 없는 공격성을 띠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진수혁은 눈에 띄지 않게 눈썹을 찌푸렸다. 배건후가 그동안 도아린에게 온갖 비위를 맞추는 것을 보고 진수혁은 배건후가 이미 자존심과 투지를 잃고 오직 결혼 생활을 되돌리려고만 한다고 오해했다. 이제야 배건후는 여전히 그 배건후라는 것을 알았다. 전 부인을 되찾고 싶어 하는 것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발전시킬 기회를 포기한 적도 없었다.유럽에는 강연이 하나 있는데, 입문 조건이 주요 재벌 그룹의 실력자 또는 후계자이며, 배건후의 현재 자산으로는 강연을 들을 수 없었다. 진수혁은 그 자격이 있었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유럽으로 가서 칩 기술을 연구하는 천재를 찾고 싶었다. 두 사람은 서로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건후는 굳이 그와 도박을 걸려고 했다. "당신이 이길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알죠." 진수혁이 말했다. "두고 보시죠." 배건후가 말했다. 두 남자는 악수하며 조용히 내기를 정했다. 저녁 식사 때, 진수혁 부부는 주범금도 데려왔고, 내일을 위해 준비했던 몇 가지 요리가 오늘 식탁에 올랐다. 모두 즐겁게 식사했고, 주범금의 기분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녀는 도아린에게 자신이 구매한 전리품을 자랑하기도 했고, 밤늦게서야 떠났다. 진수혁은 도아린을 데려다줄 때 그녀를 불러 세웠다. "유럽에 칩 분야 천재가 있다는 거
변환에 성공하는 순간, 동생은 깨어났고, 시스템은 남자 주인공에게 귀속되었다. 시스템은 남자 주인공에게 도아린의 진심을 얻지 못하면 죽을 것이라고 알렸다.처음에는 남자 주인공이 믿지 않았지만, 도아린과 이혼한 후 자신의 사업 제국이 날마다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도아린의 좋았던 점들을 떠올렸다...도아린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비록 허구의 이야기지만, 이 남자 주인공은 정말 쓰레기네!""나도 그렇게 생각해." 배건후는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도아린의 좋은 점을 떠올린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거야."도아린은 그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빛에는 ‘그러니 당신도 그와 똑같은 부류겠지’라고 쓰여 있었다."나는 아니야." 배건후는 도아린의 손을 잡고 심장 부위에 가져다 댔다. “나는 줄곧 당신만을 사랑했어. 다만 임무 때문에 표현할 수 없었을 뿐이야. 나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에게 줄 수 있어."도아린은 손을 빼서 그의 옷에 쓱 닦았다."당신은 나를 소유하고 싶을 뿐이야. 나를 소유하는 것이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과 같으니까." 그녀는 일어나 테라스로 향했다.배건후는 따라가서 말했다. "우리는 공정하게 할 수 있어! 결혼 전후를 막론하고 모든 자산은 당신 거야!"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나도 당신 거고."라고 덧붙였다.도아린은 깊어가는 가을의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침묵했다.배건후는 말없이 그녀 옆에 서 있었다. 마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주인이‘놀러 가자’라고 한마디만 하면 즉시 꼬리를 흔들며 기뻐할 준비가 된 듯이.한참 후, 도아린은 그를 돌아보았다."당신 우정윤에게 후원한 적 있어?"배건후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후원한 건 독자들이 남자 주인공을 가장 심하게 욕하는 챕터였어.""……" 그리고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도아린은 웃음을 참으며 일부러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 나오
"내가 무슨 바람이 있다고 그래요?"예전에 그녀가 먼저 다가간 건, 배건후랑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서였다.남녀를 불문하고 아이를 낳아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당신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여러 수단을 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랑 없이는 못 산다는 건 아니에요.내가 엄청나게 목마른 사람처럼 말하네요.배건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배건후가 잘못 말했어요. 배건후가 원해요. 당신이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나를 총애해주길 기다릴게요."퉤!도아린은 씹던 멜론을 배건후의 몸에 그대로 뿜어버렸다.가슴을 치며 화도 나고 웃음도 나왔다.두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배건후는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몸을 빼앗긴 게 분명하다.겉모습은 그대로지만, 속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예전의 배건후는 엄격하고 냉정하며 웃음기 하나 없었고,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하면 비웃거나 냉담하게 대하곤 했다. 지금의 배건후는 데릴사위가 되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고, ‘총애’를 받겠다고 자청하기까지 한다.배건후는 몸에 묻은 과일 조각을 닦지 않고 손을 들어 도아린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은지 확인한 후에야 휴지를 꺼내 옷을 닦았다.도아린은 바닥에 떨어진 과일 조각을 치우며 농담처럼 말했다. "배건후, 당신 몸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게 분명해요. 내가 책 속에 살고 있는 건가? 당신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내가 강해져서 당신에게 복수할 거라는 걸 알고 미리 납작 엎드리는 건가?"배건후는 옷을 다 닦고 도아린을 소파로 끌어당겼다."빙의가 아니라 공략이에요.""..."남자는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을 공략해서 당신의 사랑을 얻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어요.""당신 미쳤어요?" 도아린은 그의 등을 찰싹 때렸다."미쳤어요. 당신은 유일한 약이에요."도아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서 온몸을 떨며 웃었다. "그렇게 뻔한 사랑 고백은 우종이 가르쳐준 거죠
"엄마가 당신한테 준대요, 알아서 해요."도아린이 머리를 끄덕였다."그래요. 별장에서 돌아온 후 다시 해결합시다."배건후는 몸을 뒤로 돌리면서 주체 못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아 그런지 어떤 부분은 더 확대되어 크게 보였다."전보다 커졌는데요."이상한 말이 도아린의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다.그녀는 화가나 그를 한 눈 째리고 나가서 물건을 정리하였다.도아린은 변슬기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그녀를 끌고 단추를 찾는다는 핑계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변슬기는 카펫에 엎드려서 핸드폰 보조등을 켜고 소파 밑을 드려다보았다."찾았어요."그녀는 손을 뻗어 단추를 쥐면서 주절주절 말했다."도 선생님, 이제 기회가 되면 제가 저희집의 메인 메뉴인 만두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도아린은 카펫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그녀가 건네 준 단추를 만지면서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제일 좋기는 가게 평생 20% 할인 카드 줘요.""작은 가게라 많이 벌지도 못해요."변슬기가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이 오시면 무조건 20% 할인 해들릴게요."진수혁은 다 썰어 놓은 과일을 가지고 밖으로 나오면서 저둘이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무슨 얘기 하세요?"변슬기가 설명해주려 하자 도아린은 손으로 그녀의 목을 감싸며 말했다."데릴 사위에 대해 얘기를 했어요. 변슬기의 어머니 아버지는 딸 하나 뿐인데, 앞으로 사위가 있다며 처가에 들어왔으면 해요."변슬기는 진수혁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 보았다. 그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진수혁의 기분은 별로 파동이 없어 보였고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에 매우 동의하는 눈치였다."우리집에는 니가 하나뿐인 딸인데.""저는 데릴 사위를 할 생각이 있습니다."진수혁은 도아린한테 손을 닦으라고 뜨거운 손수건을 건네 주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 보았다.슬기는 놀라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도아린과 진수혁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
변슬기는 재빨리 진수혁의 등 뒤로 숨었다.진수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 상황을 파악하고 조용히 말했다.“이것 좀 부엌에 가져다줘.”“네!”변슬기는 배건후가 문 앞에 두고 간 봉투를 잽싸게 집어 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부엌으로 사라졌다.도아린의 셔츠 단추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배건후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주며 조심스럽게 게스트룸으로 이끌었다.“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차에 여벌로 둔 옷 있어.”도아린은 황급히 배건후의 손을 붙잡고 재킷을 벗어 돌려주었다.“일북이 근처에 있을 거야. 전화해. 밖에 추우니까 이거 입고 나가.”그녀가 팔을 들자 셔츠는 더 크게 벌어졌고 새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가 다시 배건후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에 번쩍이는 불꽃이 튀었고 그 불씨는 작지만 매섭고 뜨거웠다.도아린은 급히 몸을 옆으로 돌리고 팔로 가슴을 가렸다. “어서 가.”배건후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도아린은 반사적으로 거부하려 했지만 그는 단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번을 고요히 숨쉬더니 결국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발소리는 집 밖이 아니라 욕실로 향했다.변슬기는 부엌에서 머리를 내밀며 확인하려다 진수혁에게 팔을 붙잡혀 다시 안으로 끌려들어갔다.“생각해봤어? 회사에 남을 거야 아니면 돌아가서 가게를 이을 거야?”변슬기는 고개를 숙이고 포도를 씻었다.자신의 집은 해남에 있는 작은 분식집이었다. 일반 가정에게는 소중한 생계 수단일지 몰라도 재벌가인 진씨 가문 한테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존재였다.부모님은 외동딸인 변슬기가 곁에 있기를 바라며 나중에는 사위를 맞이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진수혁은 진성 그룹의 황태자다. 그에겐 집안도 학벌도 모두 어울리는 배우자가 필요했고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떠나는 순간 진수혁과는 더 이상 인연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계속 머무르면 감정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 뻔했다.한참 후 변슬기는 낮은 목소
“지금 두 분은 어느 정도까지 간 거예요?”집에 도착하자마자 도아린은 본론부터 꺼냈다.그녀는 오빠와 변슬기 사이가 눈에 띄게 가까워진 걸 단번에 눈치챘다.“아...아니에요!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변슬기는 난간에 양손을 올린 채 눈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시작은 안 했어도 뭔가 있었네요?”“크흐흑!”그 말에 변슬기는 자신이 삼킨 침에 갑자기 사레가 들려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고 얼굴은 벌게졌다.변명하려 할수록 기침은 더 거세졌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도아린은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물 한 잔을 건넸다.“너무 걱정 마요. 변슬기 씨 덕분에 우리 집에 큰 도움 됐잖아요. 우리 가족의 은인이에요!”“진짜 아니에요...”변슬기는 눈물까지 닦으며 손을 저었고 표정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그날 밤 나랑 같이 집에 안 갔잖아요. 여기서 잤던 거 아니에요?”“그랬었죠. 그런데요...”그녀는 작아진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아무 일도 없었어요.”도아린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설마 우리 오빠가 그쪽에 문제 있어요?”‘설마 그럴 리가... 아빠는 나이 들었어도 정력이 넘치시던데 오빠도 피는 못 속일 텐데?’변슬기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그날 서로 안기도 했고 키스도 했지만 마지막 순간 진수혁이 스스로 멈췄고 그는 침실을 양보하고 자신은 거실 소파에서 잤다.다음 날 술이 깬 듯한 표정으로 전날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고 변슬기도 굳이 꺼낼 수 없었다.그 후로도 그들의 사이는 은근하게 가까워졌지만 딱히 확실한 정의는 내려지지 않았다.“나중에 내가 오빠한테 물어볼게요.”“안 돼요!”변슬기는 도아린의 팔을 움켜잡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빛으로 말했다.“도 선생님...제 신분이 황태자님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거 잘 알아요. 남자들은 술 먹으면 착각할 수도 있고...다행히 선을 넘지는 않았으니 그냥 없던 일로 해주세요.”도아린은 그녀의 손을 다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하지만 우리 진씨 가문은 책임감 없는
“아!”변슬기는 병아리마냥 진수혁 차로 옮겨졌다.도아린은 웃으며 문을 닫고 조수석에 올라탔다.그녀는 휴대전화로 사진 하나를 골라 일남에게 전송했다.일남은 안전벨트를 하려던 참 알림 소리에 바로 폰을 꺼내 들었다.사진을 본 그는 입꼬리를 실룩이며 말했다.“아가씨 사진 실력이 정도면 필터도 울고 갈 수준인데요.”“정말? 나도 볼래!”송 비서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앉아. 운전해야 해”일남은 그의 머리를 눌러 다시 자리로 돌려보냈다.“시내에선 뒷좌석 안전벨트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야? 연성은 관리가 그렇게 심해? ”송 비서는 투덜대며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일남은 일북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너도 보지 마. 그냥 안 본 셈 쳐.”그 사진은 일남이 일북을 힐끔 바라보는 순간을 캡처한 것이었다.일북은 정면만 똑바로 응시하는 완전 군인 양식이었고 일남은 몰래 보는 범인 양식이었다.하지만 일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시동을 걸어 배건후 차량을 따라갔다.“왜 웃어?”배건후는 도아린이 조수석에서 혼자 피식거리는 걸 보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아무것도 아냐. 그냥 재밌는 사진 하나 건졌어.”도아린은 휴대폰을 집어넣고 밀크티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김지민네 진짜 끝도 없네. 혹시 배 회장님 유골 넘기면서 돈 요구한 거 아냐?”진옥경 고모 장례 때도 남편이 돈부터 요구했었다.다행히 진가에서 능력 있는 변호사를 구해서 사망 후에도 부부 재산을 나눠 가질 수 있었다.배석준 역시 김지민 가족한테는 그냥 은행 통장 같은 존재였고 이제 더는 못 빨아먹으니까 마지막으로 크게 한몫 뜯어내려고 하는 거였다.“2억.”배건후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티슈를 꺼내 도아린에게 건넸다.도아린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방금 마신 밀크티를 뿜을 뻔했고, 그 티슈로 입까지 닦았다.“진짜 줬어?”“아니.”배건후는 새 티슈를 또 건네며 그녀의 티슈 재활용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눈빛엔 오히려 다정함이 가
진수혁은 변슬기의 얼굴이 붉어진 걸 못 봤거나 봤더라도 모른 척했는지 담담히 말했다.“우린 여기서 기다릴게.”도아린은 변슬기 머리 위에 달린 풍선을 가리켰다.“이렇게 눈에 띄는 표시도 있으니까 제가 금방 찾으러 갈게요. 오늘 관광객 많으니까 지금 덜 붐빌 때 구석구석 잘 봐요.”“길 잃으면 전화해.”진수혁은 풍선 끈을 가볍게 당기며 변슬기를 데리고 발걸음을 옮겼다.일북은 도아린 뒤를 바짝 따라가며 주변을 날카롭게 살폈다. 혹시나 누가 해코지할까 혹은 누가 몰래 물건을 훔쳐 갈까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반면 일남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관광에 진심이었다.관광 가이드 옆에 붙어 설명을 듣고는 돌아와서 일북에게 흥분한 얼굴로 그대로 전달했다.“아까 가이드가 그러는데 양평산 대군이 남자인데 얼굴이 여자처럼 생겨서 어떤 후궁이랑 닮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황제가 유독 아껴줬대.”일북은 그런 일남의 말에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을 뿐 시선은 한시도 도아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둘이 가서 마음껏 구경하고 와.”“아가씨...”도아린은 손목에 찬 긴급 호출 시계를 들어 보이면서 웃었다.“무슨 일 생기면 연락할게. 오늘은 놀러 나온 거니까, 일은 잠시 내려놔.”도아린의 반복된 설득에 일북도 결국 잠깐 자유시간을 허락받았다.일남은 일북을 끌고 다니며 계속 얘기했고 도아린은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려던 참이었다.그때 갑자기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오늘 날씨는 참 좋은데 운동복만 입어도 괜찮지만 햇살은 은근히 따가워서 그늘 아래는 금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도아린은 마침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그녀는 잠깐 고개를 들어 양산을 쳐다보고는 옆쪽에 서 있는 송 비서를 바라보았다‘아 맞다! 얘도 있었지. 애매하게 끼어 있는 애 하나 더.’그렇게 해서 도아린은 송 비서와 함께 느긋하게 궁 안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가끔 변슬기를 마주치면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지나쳤다.공왕부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곳이라 여기저기 구경하다 보면 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집에 도착하자 일남은 결국 사실대로 털어놨다.“갈비뼈가 아직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전에 유치장에 있을 때 남궁유민 차가 폭발했잖아요? 그때 도아린 씨를 안고 같이 넘어지면서 또 다쳤거든요. 아까 강재민이랑 싸울 때 그 부위를 건드렸을 수도 있어요...”도아린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고개만 살짝 끄덕이면서 담담하게 대답했다.“응, 알겠어.”일남은 일북을 힐끔 바라봤고 일북은 눈빛으로 먼저 올라가라는 신호를 보냈다.“아가씨, 일부러 숨기려고 한 건 아닙니다.”“알아. 나 안 화났어.”도아린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사실 아까 대충 눈치챘거든.”야밤에 신지훈이 간호사 유선미를 데리고 배건후에게 수액을 놓으러 간 걸 봤다. 그 사람 몸에는 분명히 예전부터 앓고 있던 상처가 남아 있었다.배건후는 약한 척해서 동정을 사려 하지 않았고 도아린 역시 그가 얼마나 진심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주말이 되자 모두 함께 공왕부로 향했다.입구에 도착하고 나서야 도아린은 진범준 부부가 오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부모님은?”“주 대표님이랑 장비 사러 가셨어.”진수혁은 편안한 캐주얼 차림으로 변슬기 손에서 자연스럽게 배낭을 받아 메며 말했다.“출발할 때 들었는데 부모님이 주 대표님이랑 같이 자가 여행 떠나신다고 하더라고.”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고 있는 눈치였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도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배건후는 배석준 회장님 장례 치르러 갔어.”김지민은 아직도 운전기사에게서 보상금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버티고 있었고 끝까지 합의서에는 사인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하지만 배건후는 김지민 동생의 약점을 찾아냈고 오늘 반드시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동생을 감옥에 보낼 거라고 통보했다. 김지민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그 집안의 욕심을 생각하면 그들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분명히 배건후에게 또 뭘 요구하려고 들 것이다.하지만 배건후는 배석준처럼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