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큰누나가 도아린처럼 단단한 의지가 있어 어머니의 결정을 거부하고 불행한 결혼에서 제때 벗어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아니면 최소한 자신한테 도움을 청했다면 그렇게 비참하게 죽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누나의 비극적인 죽음을 두고 어머니는 그게 운명이고 누나의 팔자라고 말했다.멍청하고 어리석다!방우진은 멍하니 도아린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가 유리 칸막이를 두드리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훔쳤는데 언제부터 눈물을 흘렸는지 얼굴이 젖어있었다.“알려줄게. 하지만 손에 넣을 수 있을지는 장담 못 해.”도아린은 연성 교도소를 나설 때,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육하경이 하얀 카이엔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는 황급히 담배를 버리고 불을 끄고는 곧장 그녀에게 다가왔다.“돌아왔으면 연락이라도 하지 그래요!”“연락 안 해도 알고 있잖아요.”육하경의 부드러운 미소가 잠시 굳었다.“보육원에서 대머리와 빡빡이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어요. 근데 느낌이 이상해요. 보육원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을 잡은 게 이제 시작일 수도 있어요.”“...”도아린은 말없이 침묵했다.첫째, 남궁유민과 손보미의 사건이 얽혀 있다면, 육하경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없으니까 아직 확실하지 않은 일은 말할 수 없었다. 둘째, 육하경이 그녀의 자수 문양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집안 사업을 이어받은 게 우연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율이는 잘 있어요?”“율이요?”육하경이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율이는 아린 씨가 데려간 거 아니었어요?”“내가... 율이를 데려갔다고요?”도아린도 순간 얼어붙었다. 분명 율이를 데리고 해남으로 가자고 했었지만, 일이 많아서 깜빡 잊고 있었다. 그녀는 율이가 여전히 지수와 함께 새 보육원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육하경은 그녀에게 차에 타라고 했다. 연성은 해남보다 기온이 낮았
“일 보러 가요. 혼자 갈게요.” 도아린이 안전벨트를 풀고 내릴 준비를 하자, 갑자기 차가 움직였다. “안 돼요! 이런 곳에 어떻게 혼자 갈 수 있어요!”육하경은 계속해서 차를 몰았다. 방우진이 준 주소는 오래된 골목이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성의 옛 주민들로, 몇 세대가 한 집에서 좁은 공간을 함께 쓰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보내는 정책이 있었지만 거기가 시내가 아니어서 의료나 학교에 불편하다며 여러 가지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육하경은 겨우 차를 주차할 자리를 찾고 도아린과 함께 약 30분 정도 걸었다. 주소가 있어도 도아린은 몇 명의 주민에게 물어야 방우진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방우진의 집은 골목 맨 안쪽에 있었고 몇몇 주민들은 집 앞에 임시로 부엌을 설치해 놓아서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통로가 좁았고 외부인이라면 그곳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안혜진은 도아린을 보고 반사적으로 문을 닫으려 했다. 육하경이 재빨리 문을 막았다. “방우진이 우리에게 물건을 가지고 가라고 했어요.”“그럴 리 없어요!” 안혜진이 눈을 붉히며 말했다. “우진이는 아무도 안 보려고 하는데 당신은 더더욱 만났을 리가 없어요!”도아린을 보는 그녀의 시선에서는 분노와 원망이 섞여 있었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아들이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방우진이 요즘 자꾸 방연주 씨를 꿈에서 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한테 방연주 씨의 유품을 가지고 가서 태우라고 했어요.”도아린이 차분하게 말했다. 안혜진의 눈빛이 흔들렸고 눈꺼풀이 거칠게 떨렸다. 아들이 도아린과 만났지만, 엄마인 자신을 만나지 않았단 말인가?아직도 자신이 했던 결정을 원망하는 건가? 지금도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남편이 병이 들어 큰돈이 필요했고 상대방이 준 돈으로 치료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몸을 팔아서까지 아버지의 장례를
방우진의 잠자리 공간은 옛 기차의 침대처럼 좁았다. 그가 마른 체형이라서 다행이지, 아니면 뒤척이다 벽에 부딪힐 정도였다.도아린은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벽에 붙은 많은 기차 포스터를 보며 더 안쪽으로 기어갔다. 침대 머리맡에서 결국 직사각형 모양의 과자 상자를 발견했다.상자 안에는 새것과 오래된 것들이 섞인 열쇠고리와 ‘한 병 더'라고 적힌 맥주 뚜껑, 그리고 부속품들이 빠진 자동차들이 있었다.도아린은 모든 물건을 침대 위에 쏟아 놓고 두 번 뒤적였지만, USB는 찾을 수 없었다. 방우진의 말처럼 알려줘도 그녀는 찾지 못했다.공기가 덥고 습해서 조금만 지났는데도 도아린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땀이 계속 흘렀다.그녀는 땀을 한 번 닦아 눈에 들어가지 않게 하고는 다시 한번 자세히 찾기 시작했다.“어떻게 됐어요? 찾았어요?”육하경이 아래에서 물었다.“찾고 있어요.”도아린은 대답하며 물건을 하나씩 다시 점검하고 있었고 결국 변형된 자동차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그녀는 그것을 흔들어 보고는 배터리 칸을 열었고 그 안에 작은 USB가 있었다.도아린은 미소를 지으며 USB를 몸에 숨긴 후, 물건을 철제 상자에 다시 넣고 천천히 내려갔다.안혜진은 도아린이 상자를 안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뭘 가진 거예요?”“방우진이 말했어요. 이 안의 작은 것들은 모두 방연주 씨가 자신에게 모아준 것들이라고요. 나에게 공원으로 갖고 가서 태우라고 했어요.”도아린은 상자를 열어 안혜진에게 보였다.안혜진은 입술을 깨물었고 굳이 그럴 필요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아들이 원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값어치 없는 물건들이었다.밖으로 나가자 도아린은 빛에 눈이 시려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다 갑자기 물건이 쑥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내가 들어줄게요.” 육하경이 철제 상자를 받아들였다.도아린은 거부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잠시만요...” 안혜진이 그녀를 불렀다. “우진이는 안에서 잘 지내나요?”도아린은 모호한 대답을 했
“무슨 일이에요?”강재민이 소리를 듣고 물었다.“물건이 떨어졌어요.”도아린은 담담하게 말했다.“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강재민은 더 할 얘기가 있었지만, 도아린은 전화를 끊었다.“조심해요. 혹시 물건이 틈새에 끼면 운전할 때 위험할 수 있어요.”도아린은 물건을 주워주며 말했다.USB를 미리 챙겨둔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그게 어디에 끼었으면 정말 헛수고가 될 뻔했다.이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 도아린은 본능적으로 육하경의 손을 쳐다보았다. 그는 물건을 하나하나 주울 때마다 빠르게 그것을 돌려서 확인하고 있었다.그는 도아린이 가져온 물건에 이상이 없는지 점검하고 있었다.도아린은 눈빛이 어두워졌고 아무것도 모른 척 말했다. “제 쪽은 다 주웠어요. 하경 씨 쪽도 잘 확인해 보세요.”“죄송해요. 손이 미끄러져서 다 뒤집혔어요.”육하경은 마지막 물건을 주운 후, 상자를 도아린에게 건넸다. “뭐 빠진 거 없나 확인해 보세요.”도아린은 철제 상자를 흔들어 소리를 내며 살폈다.“저도 얼마나 들어있는지 몰라요. 그냥 형식적인 일을 할 뿐이에요. 설마 제가 정말 태울 거로 생각했어요?”“그럼 방우진의 집에 가서...”도아린은 입술을 다물고 육하경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육하경은 그녀가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걸 보고 더는 묻지 않고 차를 운전해 떠났다.도아린은 육하경의 의견에 따라 세인트존스 호텔에서 휴식을 취했다.그렇게 방을 정리하던 중, 레스토랑 부서의 매니저가 육하경을 찾아와 그가 결정할 주문서가 있다고 얘기했다.육하경이 나간 후, 도아린은 방을 나와 인터넷 카페로 향해서 개인실을 잡았다.USB에서 재생된 영상은 정확히 말하면 완전한 버전은 아니었고 배지유가 남자와 방에 들어가는 장면은 없었다. 영상은 배지유가 남자의 벨트를 급하게 풀어내는 장면으로 시작했다.배지유의 가방은 대충 바닥에 던져져 있었고 빨간색 물건 하나가 가방 입구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그 빨간색 물건은 곧 던져져 있는 옷들에 의해
도아린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강재민 씨랑 약속했어요. 지내다가 서로 맞지 않으면 질질 끌지 말고 좋게 헤어지자고.”육하경은 생선 살을 도아린에게 집어주고 걱정 어린 눈으로 말했다.“강재민의 말은 믿을게 못돼요. 내가 그 사람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건후의 프로젝트를 빼앗으려는 걸 보면 알 수 있어요. 그 사람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을 사람이에요. 그와 얽힌다면 나중에 헤어지려고 해도 쉽지 않을 거예요.”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육하경은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며 소유욕을 억누르려 애썼다. 그리고 이내 다정한 미소로 도아린을 바라봤고 마치 그는 태어날 때부터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혹시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요?”도아린이 웃으며 물었다.그녀의 핑크빛 입술이 매운 음식 때문에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 더 유혹적이었다.육하경은 고개를 살짝 돌려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좀 직설적으로 말할게요. 아린 씨를 차별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요.”“괜찮아요, 말씀하세요.”“강재민이 아린 씨를 쫓아다니는 건 아마 건후에게 복수하려고 그런 거예요. 진심으로 아린 씨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 사람은 아린 씨와 결혼할 리 없어요. 그는 그럴 맘도 없거니와 강씨 어르신 같은 고리타분한 사람이 이혼녀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리가 없죠.”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강씨 어르신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분이죠.”육하경이 잠시 멈칫하다 다시 말을 이었다. “아린 씨가 완전히 강씨 가문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나는 아린 씨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소문을 퍼뜨리는거고...”도아린이 이해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자 육하경이 급히 설명했다.“진짜로 아린 씨가 불임이라는 뜻은 아니에요... 다만 건후랑 결혼한 지 3년이 되어도 아이가 안 생겼으니까, 그걸로 강씨 가문을 거절할
“아린 씨, 내 제안을 한번 고려해 봐요...”육하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아린은 이미 방을 나섰다. 그녀의 뒷모습은 결연해 보였고 그 이야기를 더는 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발밑에 떨어진 물건을 내려다보며 육하경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온화하고 고상해 보이던 남자의 눈빛에는 갈등이 서렸고 마치 처음 결정을 내리던 순간처럼 고뇌하는 표정이 가득했다.도아린은 방에 들어와 문에 기대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가짜 결혼으로 강재민을 포기하게 만든다고?’웃기네!강재민이 그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이라면 강태식은 벌써 그를 뜯어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육하경의 제안은 도아린에게 또 다른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했다.도아린은 가방을 소파에 던진 후,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욕실로 향했다.그 사이, 핸드폰이 울렸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고 머리를 말리고 나오자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둘째 오빠, 진경수였다.“오빠, 나 방금...” “배건후 그놈이 너를 그렇게 괴롭혔는데 왜 우리한테 말 안 했어!”진경수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도아린의 귀를 아프게 했다.도아린은 핸드폰을 멀리 두고 진경수가 분노를 다 풀 때까지 기다린 후, 차분히 웃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인터넷 안 봤어?”“아니요, 오늘은 좀 바빴어요.”목뒤에 젖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도아린이 말했다.“게다가 난 그 사람과 이미 이혼했으니 이제 아무 상관이 없는 거죠.”“너는 상관없을지 몰라도 나는 상관있어! 진씨 가문과도 상관있다고!”전화 너머로 진경수가 이 탁자를 쾅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놈은 네가 친정이 없다고 업신여기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조항에 사인하라고 협박한 거잖아!”그 말에 도아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그녀는 진경수가 말하는 게 어떤 일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남궁유민은 그 영상을 공개해서 배건후가 진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복수 대상이 되게 하자고 했었다.‘뭔가 대단하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거라니..’도아린이 물 한 잔 따라 마신 후 담담하게 말했다.“지
하지만 도아린을 비난하는 댓글도 많았다.그녀가 그런 조건을 받아들였으니 본질적으로 탐욕적인 사람이라며 비난하는 댓글이 이어졌고 일부 사람들은 애초에 이혼할 생각도 없이 그저 이득을 얻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떠들어댔다.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그런 집을 나갔을 것이라며 ‘효도를 가장한 위선’이라는 비판도 쏟아졌다.배건후를 비난하는 댓글이 가장 많은 공감을 받았지만 도아린을 향한 비난도 적지 않았다.그러나 도아린은 그런 댓글에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댓글 창을 닫고 영상을 확대하여 남궁유민과 장수현을 자세히 살폈다.장수현이 배건후가 약속을 어길 경우에 대한 조항을 추가하자 남궁유민은 넥타이를 살짝 매만졌다.그 장면을 본 도아린은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뒤 다시 그 부분을 돌려보았다.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영상통화를 하던 그날이 다시 떠올랐다.그날 남궁유민은 여러 번 목 주위를 매만졌다.처음에는 어이없는 이혼 계약서에 말문이 막혀서 습관적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다시 영상을 보니 뭔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남궁유민이 목 주위를 만질 때마다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특정 부위를 스쳤고 붉은 자국이 어렴풋이 보였다.마치 모기에 물린 것처럼 보이는 그 자국이 계속해서 신경 쓰였다.모든 조항을 맞춰본 후, 남궁유민은 장수현에게 팩스를 보냈고 두 사람은 내용 확인 후 서명했다.하지만 영상이 끝날 때까지 남궁유민의 손은 다시 화면에 등장하지 않았다.도아린은 남궁유민이 배유지의 그 동영상 속 남자와 동일 인물인지 확실히 확인하고 싶었다.이제는 직접 만나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도아린이 영상을 끄자 알고리즘이 배건후 관련 또 다른 영상을 추천했다.쿵, 쿵, 쿵.“아린 씨, 시간 좀 내줄 수 있어요?”문밖에서 육하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아린은 휴대폰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이제 쉬려고요. 무슨 일이에요?”“서빙 직원이 방을 정리하다가 이걸 발견했대요.”육하경은 USB 하나를 꺼내 보이며 물었
백그라운드에 있는 기록을 본 도아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친구인 줄 알았는데...”육하경은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는 이 USB를 열어보았다!오늘 연성에 온 사실을 도아린은 진경수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하지만 육하경은 마치 그녀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기다리고 있었다!그가 USB를 확인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도아린은 저도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이렇게 또 친구를 잃은 건가? 아니면... 육하경도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위해 일하고 있는 걸까?”도아린은 창가로 다가갔다.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머리가 맑아지는 듯했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육하경도 결국 육씨 가문의 사람이었다.세인트존스를 관리하는 사람이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그곳은 여전히 육씨 가문의 소유였다.육청아는 육민재와 친척 관계였고, LY에서 일하는 그녀가 육씨 가문과 얼마나 연관이 있는지, 혹은 육청아가 육씨 가문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고 또 무엇을 요구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다음 날.육하경이 도아린과 함께 조식을 먹으려고 방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그리고 이내 도아린이 어젯밤 퇴실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그는 마치 손에 쥐고 있던 모래가 손가락 틈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더욱 꽉 잡으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놓쳐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도아린이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어. 앞으로 더 이상 일을 맡기지 마. 너희들을 도울 수 없을 것 같아.”전화를 끊은 후, 육하경은 사무실로 돌아갔다.그날 하루 종일 그의 기분은 가라앉아 있었고 비서도 업무 보고를 하러 올 때마다 그의 눈치를 살폈다.한편, 도아린은 진수혁이 선물한 집에서 푹 자고 일어났다. 간단히 점심을 먹은 후, 그녀는 보육원으로 향했다.이제 ‘천사 보육원’은 ‘별님의 집’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지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실내 포름알데히드 농도가 기준치에 맞는지 점검하고 있었다.창밖에서 도아린을 발견한 지희가 급히 뛰어나왔다.“도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