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진 씨! 저예요. 저 도아린이에요!”도아린은 문 앞에 서서 두 손을 들고 아무런 무기를 갖고 오지 않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도지현은 안혜진에게 잡힌 채 구석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에 바지에 오줌을 쌌다.그는 일부러 괜찮은 척 덤덤한 표정으로 있었지만, 도아린의 얼굴을 보자 순간적으로 감정을 참지 못했다. 그러나 도아린이 걱정할까 봐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저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요. 저도 이러려던 게 아니에요!”안혜진은 울면서 소리쳤고 이미 이성이 반쯤 나가 있는 상태였다.“혜진 씨, 지현이가 혜진 씨가 만든 죽을 아주 좋아해요. 힘든 일이 있으면 저한테 얘기해요. 지현이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상태가 아직 좋지 않아요...”도아린은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두 걸음 정도 이동하자 안혜진은 미친 듯이 과도를 휘둘렀다.“오지 말아요! 오지 말라고요!”“알겠어요. 안 갈게요. 진정하세요!”도아린은 바로 멈추었다. 그녀는 창문 쪽을 바라보았는데 맞은편의 빌딩에 창문이 열려있는 곳에서 반짝이는 점이 스쳐 지나간 것을 보았다. 아마 저격수일 것이다.안혜진과 도지현은 사각지대에 있어서 도아린은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안혜진이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전에 도지현을 진심으로 보살펴주었기에 도아린은 그녀가 목숨을 잃는 건 원하지 않았다.도아린은 무릎을 꿇고 안혜진과 시선을 마주했다.“혜진 씨,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저한테 얘기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반드시 도울 겁니다.”안혜진은 울면서 얘기를 시작했지만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자신은 좋은 의도였고 딸을 불구덩이로 밀어버릴 생각은 없었는데 운명의 장난이라고 얘기하다가 또 자신이 편애하여 하느님이 자신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라고 자신은 목숨을 내놓아서 속죄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결국, 도지현이 그녀에게 귀띔을 해주었다.“아주머니, 먼저 아들 얘기부터 하시죠.”안혜진은 흐느끼며 울음을 멈추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혜진 씨, 다 제 잘못입
“네. 약속할게요.”도아린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는 저린 다리를 두드리면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제 동생을 놓아주세요. 동생의 다리는 무리하면 안 됩니다.”안혜진은 몸을 일으키려다가 갑자기 과도로 도아린을 가리켰다.“오지 말아요! 저한테도 합의서를 주세요!”그녀의 눈에는 경계가 가득했고 도아린을 가리키는 게 소용이 없자 다시 도지현에게 칼을 댔다. 도아린은 침대 곁으로 가서 멈춰서서 가방에서 볼펜과 종이를 꺼내 들고 허리를 굽힌 채 간이테이블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안혜진은 그녀가 무엇을 쓰는지 안 보이지만 도지현을 놓아줄 수도 없어서 까치발을 들고 목을 쭉 빼 들고 쳐다보았다.안혜진은 몸을 앞으로 기대다가 창밖에서 비추는 눈이 부신 빛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도지현을 끌고 다시 구석으로 숨었다.“나를 속였어! 나를 속였단 말이야! 맞은 편에 경찰이 있잖아. 당신은 날 죽일 생각이었어!”안혜진은 다시 이성을 놓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과도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도아린은 볼펜을 놓고 병실 문 앞으로 가서 밖에 대고 말했다.“맞은 편에 있는 사람들을 철수하세요.”경찰은 망설이다가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안혜진은 소리를 지르면서 밖에서 얘기하는 지령을 못 들었고 도지현은 일어서지 못해 그녀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팔이 또 칼에 긁혔다.“그만 해요!”도아린은 호통을 쳐서 그녀의 울음소리를 멈추었고 작성한 합의서를 들어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제 동생을 놔줘요!”안혜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보았지만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뭔가 생각난 듯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당신, 당신이 경찰한테 전화해!”“제가 그렇게 경찰을 함부로 부릴 수 있는 사람으로 보여요?”도아린은 문 앞으로 가서 현장에 있는 경찰 책임자를 불러 자신이 쓴 서류를 보여주었다. 그는 열심히 보고는 안혜진에게 말했다.“이 합의서는 유효합니다. 이 사건을 맡은 경찰서에 전해주겠습니다.”안혜진은 순간 힘이 풀렸다. 그녀가 허리를 숙이려던 때 도아린이 소리를 질
도아린은 눈앞이 까매지면서 단단한 품속으로 안겼고 코끝에서는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비수는 남자의 팔을 찔렀고 남자는 작게 신음을 내고는 뒤돌아 안혜진을 걷어찼다.“아!”안혜진은 넘어졌고 경찰들은 그녀를 제압하고는 그녀의 몸에 다른 흉기가 더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경찰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도아린은 그제야 곁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배건후였다. 배건후도 돌아왔을 줄은 몰랐다.안혜진한테 이런 일을 저지르게 부추기게 한 사람을 생각하면 배건후가 돌아올 것도 예상 밖의 일은 아닌듯싶었다.“건후 씨! 당신 다쳤어!”손보미는 도아린을 밀어내고 배건후의 팔을 잡고는 마음 아파했다.“세상에, 피가 이렇게나 많이 흘렀어!”진경수가 도아린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그녀를 보고 웃어 보이고는 배건후에게 말했다.“가서 상처를 치료하세요. 저희는 경찰서에 가야 해서요.”“도아린, 당신 너무한 거 아니야? 건후 씨가 다쳤는데 어떻게 걱정하는 말 한마디도 없어! 이렇게 다른 남자랑 시시덕거리기나 하고 말이야!”손보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노려보았다.도아린이 비웃으며 말했다.“건후 씨는 당신이랑 다정하게 다닐 수 있으면서 나는 남자랑 시시덕거리면 안 되나?”말을 마친 그녀는 다정하게 진경수의 손을 잡았다.“우리 가요.”손보미는 두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그녀는 진경수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입었다는 것을 보아냈고 진경수는 외모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배건후보다 못한 점이 없었다.‘왜! 왜 도아린은 계속 좋은 남자를 꼬드길 수 있는 거야!”손보미는 따라가서 진경수의 앞을 막았다.“저 여자의 외모에 속지 말아요. 저 여자는 남편이 있는 여자예요. 저 여자랑 함께 있으면 당신은 평판이 나빠질 거예요!”“사돈 남 말 하시네. 그쪽은 아내가 있는 남자랑 붙어 다니면서 평판이 나빠지는 게 두렵지 않으세요? 아, 그쪽은 두렵지 않겠네요. 더 낮아질 평판도 없잖아요.”진경수는 도아린과 함께 차에 올랐다.“...”손보미는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래졌
“대호 씨, 제 동생이 다친 건 당신 책임으로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은 돈을 한 번도 가진 적이 없고 여자애들을 한 번도 괴롭힌 적이 없이 깨끗한 게 좋을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당신도 저기 들어가서 방우진과 함께 벌을 받게 할 거예요.”성대호는 퍼뜩 고개를 들었고 놀란 표정을 한 얼굴에서는 분노도 느껴졌다.성대호는 물론 비즈니스 업계에서 고위층의 사람들 아무나 데리고 와도 깨끗한 사람이 없었다.특히 성대호와 배건후의 관계가 이렇게나 좋은데 배건후와 가까이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대호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성대호가 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아도 앞에 내미는 사람들이 많았다.그리고 여자 문제에서는 성대호 본인도 여자친구를 몇 명이나 사귀었는지 셀 수가 없다. 모두 그의 돈을 보고 접근한 여자들인데 각자 필요한 것만 얻는 것이지 어떻게 괴롭혔다고 할 수 있겠는가?“아린 씨, 동생의 간병인을 고를 때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건 당신이에요. 이제 와 사고가 생겼으니 다른 사람한테 떠넘기려는 거예요?”“대호 씨가 혜진 씨한테 이렇게 하라고 부추긴 거잖아요?”도아린의 예쁜 얼굴이 엄숙해졌고 무척 공격적이었다.“...”성대호의 시선은 신속하게 배건후에게로 옮겨졌다.‘언제 말한 거야? 나를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려는 거야?’“온종일 고생했어. 돌아가서 쉬어.”배건후는 앞으로 가서 도아린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도아린은 빠르게 피했다.“건후 씨, 오늘 나 대신에 칼을 맞아줘서 고마워요. 치료비는 입금할게요. 내일 아침 8시에 구청으로 가서 이혼 절차를 진행하길 부탁해요.”육하경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성대호는 차가운 비웃음을 터뜨렸다.“아린 씨, 허구한 날 이혼을 입에 올리고 있으면 재밌어요? 정말 이혼하고 싶다면 지유의 합의서를 쓸 때 왜 이 요구를 제기하지 않았어요?”그는 배건후의 얼굴이 굳은 것을 눈치채지 못했고 육하경이 말리는 것도 무시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아린 씨가 지유를 용서한 것도 건후와 다시 잘해보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배건후의 칼 같은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손보미를 위해 대역 자리를 얻으려고 할 때 성대호는 이미 도아린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고? 그렇다면 말을 했어야지!배건후의 시선에서 질책하는 의미가 너무 짙었던지라 묻지 않았어도 성대호가 스스로 대답했다.“내가 말했더라도 너는 빼앗아서 손보미한테 줬을 거잖아. 말을 했든 안 했든 똑같아! 네가 손보미와 다시 잘해볼 생각이라면 도아린이 먼저 이혼하겠다는 건 좋은 일이잖아.”“너는 말이 너무 많아.”육하경은 성대호를 밀었고 성대호는 불쾌하다는 듯 그를 째려보았다.“건후가 도아린이랑 이혼하더라도 너는 저 여자를 갖지 못해. 서로 친구인데 앞으로 만나면 얼마나 어색하겠어!”배건후의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은 빠르게 육하경을 훑었고 육하경은 담담하게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내일 구청에 데려다줄게.”그래, 잘하는 짓이다! 모두 그가 이혼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만 같았다.“아!”배건후가 뒤로 돌았을 때 누군가가 부딪혀와서 그는 무의식 간에 상대방을 부축했다.“건후 씨, 왜 나를 안 기다려줘...”손보미가 돈을 지급하고 돌아왔을 때는 사람이 다 떠났기에 경찰서에 와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상처가 감염되면 열이 날 수 있다고 의사가 얘기했어. 이 약들은...”배건후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고 손보미는 빠르게 따라갔다.“건후 씨가 팔을 다쳤으니 내가 운전할게.”배건후는 그녀의 손에서 약을 건네받아 조수석에 던지고는 펑 하고 차 문을 닫았다.“...”차를 후진해서 나가려는데 손보미가 다시 앞을 막아섰다.“건후 씨, 팔에 상처가 있는데 운전하는 건 너무 위험해. 내가...”차는 빠르게 움직여서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봤어?”성대호는 계단에 서서 가소롭다는 듯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가질 수 없는 것들이 항상 최고인 거야. 손보미가 돌아서니 이제는 건후가 아쉬워하지 않잖아.”육하경은 그의 손에서 담배를 뺏어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다시 돌려주었다. 그는 담배를 두 모금 피고는 말했다.“너는 건후가
에이트 맨션에서는 배건후가 팔뚝에 둘렀던 거즈를 뜯었고 한 마디 정도 되는 상처에서는 아직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배건후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두 모금 세게 빨아들였다.그는 상처를 잡았다. 신음을 내며 맨정신에 상처를 벌렸다.원래도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하게 질렸고 구레나룻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피가 흐르고 엉망이 된 상처를 보고 만족스럽게 손을 거두었다.배건후는 천천히 담배를 피우며 고통을 삼켰고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버린 다음 일어나서 욕실로 갔다.이튿날, 도아린은 구청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도록 배건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설마 안 나오려는 건 아니겠지.”진경수는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도아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배건후는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데 어제 자신이 그렇게까지 말한 마당에 약속을 어기지는 않았을 것이다.쓸데없는 손보미의 일에 발목이 잡혔을 수도 있다.“5분만 더 기다려요.”배건후가 안 온다면 회사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어떻게 됐든 오늘 꼭 이혼해야 했다.3분 뒤, 배건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고 도아린은 전화를 받아서 재촉했다.“건후 씨, 당신 지각했어요.”“사모님, 대표님께서 병원에 실려 가셨어요!”우정윤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건후는 워커홀릭이었는데 휴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 오늘 회사에도 나오지 않았다. 우정윤은 배건후가 전화를 받지 않자 집으로 그를 찾으러 갔다. 차는 문 앞에 세워져 있었고 벨을 아무리 눌러도 문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그는 경비실에 가서 비상열쇠를 가지려고 했는데 마침 가정부가 도착했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누워있는 배건후가 보였다.고열로 인해 정신을 잃었다. 도아린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배건후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미간을 찌푸린 채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다.우정윤은 서럽게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고 있었다.“아린 씨가 티파니 주얼리를 대표해서 대회에 나간다고 했을 때도 대표님은 바쁜 와중에도 유명한 디자이너의 디자인을 가
그윽한 눈동자의 시선이 요동쳤고 예전처럼 날카롭지 않았다.배건후는 손을 움직여 링거팩이 부딪치는 소리를 냈고 우정윤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대표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의사가 열이 더 내려가지 않다가는 머리가 잘못될 수 있다고 얘기하셨습니다.”“...”배건후는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바보인 척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몇 시야?”배건후는 고열 때문에 목이 말라버려서 침을 몇 번 삼키고야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우정윤은 우는 얼굴로 대답했다.“거의 10시입니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어요.”배건후는 손으로 주삿바늘을 빼려고 했고 우정윤은 당황해서 그를 제지했다.“빼면 안 됩니다! 대표님이 혈관이 가늘어 간호사가 세 번이나 찔렀습니다. 반드시 수액을 다 맞아야 합니다.”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도아린은 마음이 약해져야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정윤은 알고 있었다. 의사는 배건후의 상처가 벌어진 게 외부 작용에 의해서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본인을 괴롭히는 이유가 구청에 가기 싫은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우정윤은 대표님을 위해 좋은 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그게 잘 먹히지는 않는 모양이었다.“그럼 우리는 가서 다른 일을 볼까?”진경수는 두 사람의 뜻을 진작에 알아차리고 도아린에게 눈치를 줬다.도아린은 핸드폰을 꺼냈다.“그럼 오후 두 시로 예약하죠. 그때 봐요.”“사모님, 사모님!”우정윤은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대표님, 도지현 씨를 다치게 한 것은 성 팀장님인데 사모님께서는 지금 대표님 탓으로 생각하고 있나 봅니다.”배건후의 눈빛은 다시금 날카로워졌고 주삿바늘을 빼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우정윤이 아무리 말려도 배건후는 회사로 갔다.여섯 명의 비서가 일제히 한 줄로 서서 고개를 숙이고 상사의 억압적인 시선을 받고 있었다.핸드폰을 책상에 던지며 나는 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너희들 다 누구 사람이야. 먼저 인정하는 사람은 퇴직 증명서를 받을 수 있어.”그에게 까
그들은 회장님을 두려워했고 그렇게 큰 작용을 할 건 아니라서 그저 모건 그룹의 근황을 유출하면 됐었다.우정윤은 배건후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배석준은 권력을 내려놓은 듯 보였지만 배건후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쳐보고 있었다. 요즘 프로젝트에 연달아 문제가 생긴 것에 그가 참여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는 것이다.가족에게 배신당하고 아내에게 버려진 대표님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쌌다.자백하는 시간이 끝나고 비서팀에는 아무 일 없이 깨끗한 두 명의 베테랑을 빼고는 모두 해고되었다.비서팀이 대대적으로 인사를 바꾸니 회사 고위층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모건 그룹의 세상이 바뀌려고 그러나?...도정국은 약속한 시각에 납품했지만, 불량품이 절반이 넘었다. 상대방은 계약 위반이라고 고소했고 세 배가 되는 위약금을 지급하라고 했다.도정국은 레스토랑을 예약해서 상대방을 초대했고 배건후의 장인어른이라는 신분을 내세워 상대방이 물러서게 만들 예정이었다.“재료들은 아직 수출하지 않았으니 손실도 없잖습니까.”도정국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보상으로 모건 그룹과 협력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요. 어때요?”“어떻게 도와줄 건데요?”상대방은 의아해했다.“모건 그룹과 협력하는 조건은 아주 까다롭습니다.”“저는 배건후의 장인어른이에요. 장인어른의 체면은 세워줄 겁니다.”상대방은 망설이다가 말했다.“그렇다면 이따가 저희 사장님과 얼굴 보고 얘기하세요.”도정국은 무척 만족스러웠고 다리까지 꼬았다. 인맥이 있으면 바보가 될 일은 없다.이럴 줄 알았으면 납품해서 품질검사를 할 때 배건후를 들먹일 걸 그랬다. 그렇다면 불량품이 많아도 받아줬을지도 모른다.돈을 버는 좋은 기회는 놓쳤지만, 지금은 돈을 배상하지 않는 게 목표였다.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상대방은 얼른 일어나 문을 열고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사장님, 오셨습니까?”도정국은 일어나지 않았고 심지어 그의 시선에서는 무시하는 경향까지 있었다.모건 그룹과 협력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