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은 살얼음판 같았지만, 한쪽은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도지현은 완전히 의식을 되찾았지만 3년간 혼수상태로 있으면서 영양제로만 버텼기에 근육은 물론 살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기본적인 동작조차도 제대로 해내기 어려운 상태였다.조경자는 도지현에게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면서 영양을 챙겨주었고 그의 재활 운동을 도왔다. 도아린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도지현은 뇌졸중 환자들이 하는 코와 눈을 가리키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누나...”도지현은 자기 코끝을 손으로 누르다가 위로 치켜들었고 검은 눈동자가 중간으로 모이면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되었다.도아린은 그의 모습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렸을 때, 도지현이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도아린이 이렇게 그를 웃겼었다.하지만 매번 도지현은 누나가 제대로 못 한다며 자신이 보여주겠다는 말로 끝이 났었다.조경자도 웃었고 도지현도 따라서 웃었다.“누나, 밥 먹었어? 닭고기 죽이 아직 한 그릇 남았어. 정말 맛있는데 아주머니가 더 못 먹게 하셔.”“너는 지금 많이 먹으면 소화가 안 되잖아. 이건 내가 먹어야겠다.”도아린은 옆에 앉아 죽을 먹기 시작했고 도지현은 고개를 기울여 그녀를 바라봤다.도아린이 거의 다 먹는 것을 보고 도지현은 기습적으로 물음을 던졌다.“매형 혹시 문제 있는 거 아니야?”그 말에 도아린은 먹던 죽을 내뿜고 콜록콜록 기침하며 얼굴이 새빨개졌다.“그게 아니면 왜 3년 동안 나한테 조카 하나도 못 만들어줘?”도지현은 침대 난간을 잡고 팔 힘을 기르는 연습을 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3년 만에 본 도아린은 풋풋하고 어린 티가 사라지고 부드러운 모습 속에 단단함이 배어 있었다.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그는 누나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조경자가 분위기를 풀려고 말했다.“누나가 지현 씨한테 온통 신경을 쏟았잖아요. 이제 지현 씨가 나았으니, 곧 조카도 생기겠죠.”도아린은 결혼 생활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지만, 조경자는 3년 동안 도지현을 돌보며 병문안을 오
“누나는 그런 거 안 좋아해요! 기사식당에서 먹으면 매콤한 중식을 더 먹을 수 있다고 좋아하는 사람인데요.”“도지현!”도지현은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더 말 안 할게요. 누나의 단점을 더 들추면 누나가 화내니까요. 근데 사실 누나가 생활비를 반씩 저한테 나눠준 게 아니면 그렇게 힘들게 살지는 않았을 거예요. 매형, 빨리 누나 데리고 가세요.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나서는 바로 쉬면 안 되니까 운동도 좀 하시고요.”“...”도아린은 그를 힐끗 째려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배건후는 마음속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그는 도아린이 진짜로 뭘 좋아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단지 자신이 그녀가 좋아한다고 생각한 것들뿐이었다.조경자가 돌아오자 도아린은 배건후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주차장에서 도아린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하세요.”배건후는 눈빛이 어두워졌고 차 문을 열었다.“일단 밥부터 먹으러 가자.”“괜찮아요.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도아린의 시선을 따라간 배건후는 멀리 서 있는 일남과 일북 두 명을 발견했다. 한 명은 건물 입구에, 또 한 명은 흰색 포르쉐 옆에 서 있었다.그들은 주위를 경계하며 빠르게 도아린을 쳐다봤다. 굉장히 책임감 있고 프로페셔널한 보디가드들이었다.배건후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담배를 피우고 싶어 담뱃갑을 꺼냈지만, 텅 비어 있어 결국 담뱃갑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어제 육하경이 내게 준 자료, 네가 시킨 거지.”“...”도아린은 그 속에 있는 연관성을 금세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끝까지 확인해볼 거예요.”“이 일은 연관된 범위가 넓어. 그 배후세력은 네가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도아린은 작게 웃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건후 씨 같은 사람도 그들을 보호하려고 나서는 걸 보니, 그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은 건 확실하네요.”배건후는 주먹을 꽉 쥐었다.그는 그녀가 위험에 빠질까 걱정이 돼서 이런 말을 한 건데 그녀는 전혀
도아린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는데 손보미가 배건후에게 먼저 다가가 입을 맞추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피하지 않았다.이후 손보미는 그의 팔짱을 끼고 병동으로 들어갔다.도아린의 마음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고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가자.”그리고 조이서에게 손보미가 도지현을 보러 오면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 병원 밖으로 향했다.“아가씨, 저 차가 길을 막고 있습니다.”일북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도아린은 고개를 들어 도로 한가운데에 주차된 빨간 람보르기니를 보았다.“양보한다고 생각하고 기다리자.”...오늘은 백 교수님의 당직 날이었는데 손보미를 보고 놀라면서 무척 기뻐했다.“무슨 바람이 불어서 대스타가 여기까지 왔어?”“교수님이 보고 싶어서 왔죠.” 손보미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도지현이 깨어났다고 듣고 일정 끝나자마자 달려왔어요. 고마워요. 다음에 식사 한번 대접할게요.”“나한테 고마워할 거 뭐 있어.”백 교수님은 배건후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약간 긴장한 듯한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도지현 씨의 다리를 살펴봤는데 무릎 아래가 손상되어 있었습니다. 적절한 의족을 착용하고 재활을 병행한다면 스스로 걸을 가능성이 있어요.”배건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도지현은 도아린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평생 그를 돌볼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아무리 정성껏 돌본다 해도 그가 독립적인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했다.“백 교수님이 된다고 하시면 될 거야.”손보미는 배건후의 소매를 잡고 애교를 부리며 당겼다.백 교수님은 손보미의 손을 힐끗 보고는 이내 시선을 피했다.“물론 초기에는 재활 운동을 통해 팔과 코어 근육을 강화해야 합니다.”“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건후가 부드럽게 말했다.백 교수님은 안경을 고쳐 쓰고는 따스한 시선을 보냈다. “보미가 국내에서 대표님의 보살핌을 받게 되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보미는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보미가 부탁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최선을
스타 대회는 3년마다 열리고 만약 다음번에... 만약 도아린이 그 대회에 전혀 관심이 없다면?배건후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손보미의 비명이 들려왔다.“내 차 어디 갔어? 분명 여기 주차했는데!”손보미는 병원의 보안팀을 불렀고 차주가 그녀라는 걸 확인한 후 후문으로 안내받았다.후문에는 빨래방과 창고로 사용되는 단층집들이 줄지어 있었다.그리고 그 단층집 지붕 위에, 빨간색 람보르기니가 당당히 올라가 있었다.“내 차가 왜 지붕 위에 있어!”손보미는 화가 나서 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어쨌든 그녀도 공인인지라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저기 올려놓은 사람한테 다시 내려놓으라고 해요!”“친구분께서 차주분이 급한 일이 있어 주차할 시간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차를 긁을까 봐 걱정돼서 특별히 이곳을 선택했다고 하던데요. 차도 자랑할 수 있고 안전도 보장된다고요.”손보미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저는 그런 친구 없어요!”“그럴 리가요? 차를 저기까지 옮기는 비용도 그분이 결제하셨고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도 남겼습니다.”“그 사람이 누구예요!”“성이 도 씨라고 하시던데요.”손보미는 배건후가 비웃는 것을 느꼈지만 고개를 돌려보면 여전히 도도하고 냉랭한 표정이었다.‘도아린! 너랑은 반드시 끝장을 볼 거야!’...다음 날, 도아린은 육하경과 함께 지희를 찾아갔다.그들은 지희를 입양한 보호자의 주소를 알아냈는데 바로 아리산 기슭의 한 마을에 있었다. 그리고 지희와 친해지기 위해 율이도 데리고 갔다.율이는 처음으로 연성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기에 호기심에 들떠 있었다.고속도로 양옆에는 별다른 경치가 없었지만, 율이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봤다.가는 와중에 주현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재벌 부인 한 명이 그녀의 치파오를 마음에 들어 해서 한 벌 주문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요즘 선생님께서 아주 바쁘셔요. 만약 기다릴 수 있다면 제가 한번 여쭤볼게요.”“얼마 정도 기다려야 할까?”“...최소 한 달은 걸릴
손보미의 매니저가 먼저 김지민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지민 언니!”그녀는 김지민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바라보았다. 안에 어떤 드레스가 들어있는지는 모르지만, 포장만 봐도 최고급 드레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다음 주 자선 만찬에 입으실 드레스인가요?”“맞아. 근데 넌 다른 가게를 알아보는 게 좋을 거야. 여기 드레스는 못 살 테니까.”그녀는 도발적으로 손보미를 쳐다보았다.“아, 왜요?”매니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손보미는 김지민을 보고는 놀라지 않았지만, 그녀 옆에 있는 남자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녀의 시선은 두 사람을 번갈아 훑었고 눈에는 빠르게 질투가 차올랐다가 이내 비웃음으로 바뀌었다.“회장님께서는 지유의 드레스를 골라주신 거예요? 지민은 지유랑 별로 안 친해서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를 텐데. 제가 지유랑 친하니까 제가 도와드릴게요.”배석준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주현정의 생일 파티에서 배지유는 손보미를 주빈석에 앉히려다 많은 사람의 심기를 건드렸고 집에 돌아가서는 도아린과 다투기까지 했다.반면에 그녀는 배지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감히 어떻게 친하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배지유가 그녀에게 베풀었던 호의가 아까웠다.“됐어.”배석준은 싸늘하게 손보미를 지나치며 말했다.“우리 딸은 너 같은 친구가 필요 없어.”“...”손보미는 돌아서서 김지민을 노려보며 말했다.“너 회장님한테 뭐라고 말한 거야?”“맞혀 봐.”김지민은 그녀에게 거만한 눈빛을 던지고 배석준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멀어져가는 차를 보며 손보미는 분노로 눈이 충혈되었다.‘천한 것! 감히 내 위에 올라서려고 하다니!’...도아린 일행은 오후에 아리산 마을에 도착했다.좀 더 편하게 묵기 위해 그들은 큰 민박집을 선택했다.비수기인 덕분에 그들은 마당 하나를 통째로 빌릴 수 있었고 돈을 아끼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주인은 매우 친절했다.주인은 깨끗한 침구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풍성한 저녁 식사까지 준비해 주었다.율이
“그들도 지희 언니를 찾으러 온 걸까요?”도아린은 육하경과 일남, 일북을 불렀다. 일이 좀 꼬였다. 만약 그들도 지희를 찾으러 왔다면, 그들이 조사하는 방향이 맞다는 뜻이다.하지만 도아린과 육하경은 모두 원장을 만난 적이 있었기에 마주치게 되면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그들이 대책을 논의하는 동안 창가에 있던 일북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주인이 저들과 한패입니다.”민박 주인은 옆집 마당으로 가서 대머리 남자에게 휴대폰을 건네주고, 이것저것 가리키며 CCTV 화면을 설명하는 듯했다.대머리 남자는 갑자기 도아린의 방을 쳐다보았는데, 마치 커튼을 뚫고 그녀를 보는 것 같았다.도아린은 불쾌감을 느끼며 서둘러 커튼을 내렸다.잠시 후, 민박 주인이 그들을 데리고 문을 두드렸다.“손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옆방 손님께서 노래하려고 하는데 노래방 기계가 이쪽 창고에 있어서요.”일남이 내려가 문을 열자 대머리 남자가 갑자기 뛰어 들어와 일남과 몸싸움을 시작했다.“아가씨를 보호해!”빡빡이 남자와 민박 주인은 문 옆에 있던 몽둥이를 들고 위층으로 돌진했다.방 안에 있던 일북은 소리를 듣고 재빨리 문 앞을 막아섰다.“이 집은 불법 민박이에요. 아가씨 어서 도망치세요!”빡빡이가 일북을 막는 사이, 민박 주인이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쾅 하는 소리가 났다.민박 주인은 열린 창문과 펄럭이는 커튼을 보고 밖을 향해 소리쳤다.“그 여자가 창문으로 도망갔어!”“사람 불러! 아이고”대머리는 발에 차여 바닥에 나뒹굴었고 비명을 지르며 다시 일어나 일남과 몸싸움을 이어갔다.민박 주인이 전화를 걸자 근처 마을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왔다. 절반은 횃불을 들고 뒷산으로 달려갔고 나머지 절반은 무기를 들고 싸움에 가담했다.일남과 일북은 인원에서 밀려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워졌고 동네 사람들도 그들을 죽일 생각은 없고 그저 쫓아내려는 것 같았다.싸움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침대 밑에 숨은 도아린은 율이의 입을 꽉 막았다.율이는 겁에 질려 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
그 사람은 몸을 피했다.몽둥이는 문에 부딪혔고 충격으로 도아린은 손목이 저렸다.곧 몽둥이는 그 사람에게 빼앗겼다.그는 몸을 숙여 도아린의 손을 잡고 힘껏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나야!”“...”도아린은 눈앞의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건후 씨?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여기는 이야기할 곳이 아니야. 나랑 가자...”“잠시만요!”도아린은 쪼그리고 앉아 율이를 끌어냈다.율이는 겁에 질려 다리가 풀려 있었다. 배건후는 한 손으로는 율이를 안아 들고 한 손으로는 도아린의 손을 잡고 민박집을 나섰다.남자의 손은 넓고 따뜻했고 단단히 잡아주는 손길에 도아린의 불안한 마음은 점차 진정되었다.모퉁이를 돌자, 그는 마을 사람의 집 문을 열었다.“안 돼요. 여기 사람들은 모두 한패예요.”도아린은 율이를 품에 안고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여기는 내 사람이야.”그는 말을 마치고 바로 두 사람을 안으로 끌어당겨 문을 닫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에서는 우정윤이 불안한 듯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는 배건후가 돌아오는 것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대표님, 방금 무슨 일이... 사모님? 여기서 뭐 하세요?”우정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들이... 사모님을 찾는 건 아니겠죠?”“빙고.”율이는 배건후와 도아린을 번갈아 보더니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우정윤은 서둘러 율이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달랬다.배건후는 도아린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 그의 얼굴은 몹시 어두웠고 눈빛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만 같았다.도아린은 그제야 배건후가 양복이 아닌 이곳 마을 사람들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그는 얼굴에 먼지를 묻혀 변장했지만 잘생긴 외모는 감출 수 없었다.도아린은 물컵을 든 손을 덜덜 떨었다.배건후는 그녀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이제야 무서운 줄을 알겠어?”“...”도아린은 입술을 깨물고 아무
“있다가 사람 시켜서 보내 줄게.”“안 갈래요.”도아린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조사하는 방향이 맞았어요. 이 마을 전체가 공모하여 인신매매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난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배건후는 차갑게 그녀를 쳐다보더니 한참 후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너 혼자서?”도아린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맞섰다.“건후 씨는 이미 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죠? 보육원에 큰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거잖아요.”“내가 모른 척했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도아린이 막 말하려는 순간, 문밖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고 안에서 고양이가 대답하듯 울었다. 곧이어 발소리가 들렸다.아까 그 사람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지금은 문발을 걷고 들어왔다. 그제야 도아린은 그의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그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다. 분장한 게 아니라 바로 이 마을 주민이었다.“산골짜기로 굴러떨어진 사람이 있다고 들었어요. 마을 사람들은 다 돌아갔으니 떠나시려면 지금 가셔야 해요.”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도아린이 일어섰다.“산골짜기가 깊어요? 위험하지는 않아요? 지금 당장 구조대를 부를게요...”그녀가 번호를 누르기도 전에 배건후는 휴대폰을 가져갔다.담담한 눈빛으로 배건후는 차분하게 말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구조대는 올 수 없어. 설사 온다고 하더라도, 마을 사람들이 구조하게 놔둘 것 같아?”도아린은 화를 내며 말했다.“하경 씨는 나 대신 사람들을 따돌리러 간 거예요. 난 그를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남자는 턱에 굳은 선을 그리며 한참 후에야 문자를 보냈다.그는 마을 주민에게 손전등이랑 밧줄을 준비하라고 시킨 후 도아린을 쳐다보았다.“내가 사람을 찾을 테니 넌 그들과 같이 돌아가.”그는 옆방을 가리키고는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도아린은 재빨리 그의 팔을 잡았다.“나도 갈게요.”“가서 괜히 더 혼란스럽게 만들려고?”“...”배건후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화를 내려다 참았다.“가기
도아린은 변슬기를 데리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배지유가 자신을 일부러 모욕하려고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이곳에 유명 스타들이 모여 있다는 걸 알게 됐다.스크린에서만 보던 유명인들을 실제로 보니 변슬기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두 눈으로는 전부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그녀는 다소 어색하게 셔츠를 만지작거렸다.아버지가 친구를 만나러 가니 단정하게 차려입으라고 당부했지만, 변슬기는 또 소개팅 자리일 거로 생각하며 일부러 평소 입던 옷을 입고 왔다.그녀는 상대가 아버지의 돈이 아니라 자신의 평범한 모습을 좋아하길 바랐다.그러나 여기에서 음료를 나르는 여직원들조차 자신보다 더 격식 있게 차려입은 것을 보고 당황했다.“도 선생님, 저 이러고 있으니까 너무 볼품없는 거 아니에요?”도아린은 그녀의 셔츠 뒷면에 약간의 땀 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제가 여분의 드레스를 준비해 놨어요. 갈아입어도 좋아요.”변슬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일단 아빠 친구를 만나고 나서 생각할게요.”멀리서 변우빈이 그녀를 보고 약간의 타박 섞인 눈빛을 보였지만, 곧 미안하다는 듯 설명했다.“우리 딸은 성격이 참 고집스러워.”그는 변슬기에게 손짓했고 딸이 곁에 앉자 말했다.“내가 단정하게 입고 오라고 했잖아. 그런데 일하는 옷을 입고 오면 어떡하니.”변슬기는 당황스러워 목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들었는데, 그 순간 주현정이 보이자 긴장한 표정으로 도아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큰일 났다!’문 앞에서 배지유와 다툰 것도 모자라 이번엔 배지유의 엄마까지 만나게 됐다.지난번처럼 자신에게 온화하게 대해줄 리가 없을 것이다.“...네 딸이구나?”주현정은 마치 이해했다는 듯 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지난번에 봤을 때 어쩐지 낯이 익다 했어.”변슬기는 몰래 아버지의 옷자락을 꽉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분 배지유 엄마예요.”변우빈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웃으며 소개했다.“이분은 주현정
배지유가 휠체어를 돌리자마자 누군가와 부딪힐 뻔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 배지유?”“변슬기?” 배지유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너 여기서 아르바이트하는 거야? 이 시간에 오다니, 연회가 거의 끝나가잖아.”변슬기는 공유 자전거를 타고 와서 온몸에 땀범벅이었고 앞머리가 하얀 이마에 붙어 있었다.그녀는 손으로 머리를 정리하며 숨을 고르면서도 자신감 있게 말했다.“아니야, 난 사람을 찾으러 온 거야.”이어지는 장면이 바로 도아린이 목격한 것이다.배지유는 휠체어를 움직여 변슬기의 주위를 맴돌면서 눈에 비웃음이 가득했다.“너희 집은 이번 생은 물론이고, 전생에도 이런 호화로운 사람들을 본 적 없을걸? 여기를 시장으로 착각한 거야? 아무나 데려와서 ‘내 삼촌, 내 이모’라고 하면 통할 것 같아? 여기는 모두 톱스타들이야! 너 콘서트 한 번이라도 가본 적 있어?”배지유는 입을 가리며 더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생활비 벌려고 아르바이트까지 해야 하는 주제에 무슨 돈으로 콘서트를 본다는 거야! 연예인을 만나고 싶어? 기숙사로 돌아가서 기다려. 누굴 보고 싶은지 댓글 남기면 내가 대신 사진 찍어줄게.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돈을 안 받아. 대신 너는 우리 기숙사의 1년 치 청소를 맡고 내 빨래도 다 해야 해. 속옷과 양말도 손빨래로!”변슬기는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난 연예인 보러 온 게 아니야.”“올해 최고의 억지상은 바로 너네!” 배지유는 엄지를 세우며 비웃었다.“여긴 다 연예인들뿐이야. 네가 누굴 찾는다고 하면, 내가 직원한테 말해서 불러줄게.”변슬기는 그녀를 무시하고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그러자 배지유의 눈빛이 갑자기 험악해지며 휠체어를 몰아 변슬기에게 돌진했다.거의 부딪힐 뻔한 순간, 휠체어가 갑자기 멈췄다.화가 난 배지유가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가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할 정도로 매혹적인 도아린의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네가 왜...” 도아린은 왜 자신과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건가?
주현정은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았기에 그저 화났다는 의미일 것이다.그러니 그녀의 기분만 풀어주면 도아린이 그 자리를 넘보는 건 불가능해질 것이다.“현정아, 사람은 성인이 아니니 누군들 실수하지 않겠어?” 배석준은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내가 증명해 보일게. 나와 지유야말로 네 뒤를 든든히 지켜줄 사람이라는 걸 말이야!”그는 배지유를 찾아 그녀를 데리고 주현정을 만나러 가려고 했다.세 식구가 언론 앞에 함께 나타나기만 하면 이혼 소문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도아린 같은 외부인은 배씨 가문의 재산에 끼어들 수 없게 될 것이다.하지만 그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배지유가 사라진 후였다.“엄마, 화내지 마세요.” 도아린이 다정하게 위로했다.“배 대표님은 함부로 결단을 내리지 못할 거예요.”“차라리 저 사람이 결단을 내렸으면 좋겠네.”주현정은 도아린과 함께 인파를 지나갔다.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는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그는 다소 어색하게 무릎을 문지르며 이따금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주현정을 본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내가 방해되지는 않았어?”“그 말은 내가 해야 할 말인 것 같은데.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내 연회에 와줘서 고마워.”주현정은 도아린의 손을 잡고 다가갔다. 세 사람은 원형 소파에 앉았다.“이쪽은 내 딸 도아린이야. 이분은 변우빈이라고 하고 내 가장 친한 친구야. 아저씨라고 불러.”“아저씨, 안녕하세요.” 도아린은 무심코 상대방을 살펴봤다.변우빈은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배석준와 비슷한 체격이었지만 조금 말랐다. 그의 얼굴과 손에는 노동으로 살아온 사람이 가진 강인함이 배어 있었다.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변우빈은 계속 주현정의 눈을 바라봤고 주현정의 미소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이 담겨있었다.“네 딸도 데리고 온다고 하지 않았어?”주현정이 뒤를 돌아보며 묻
석 대표는 멈칫하더니 그제야 앞에 휠체어 하나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요란하게 치장한 여자가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이분은...”그는 주현정이 이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첫 반응은 배석준이 다른 여자를 찾았다는 것이었다. 배석준의 새로운 연인은 주현정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석 대표님, 짓궂으십니다. 방금까지도 저희 딸을 카메오로 요청한다고 하셨으면서...”배석준은 말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발견했다.그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배지유를 보고 있었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비교하는 사람도 있었다.배지유는 엄청 민감해서 의식적으로 치마를 잡았는데 그들이 자신의 얼굴만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제야 천천히 손을 떼었다.“배 대표님 따님이 몇 명이세요?”석 대표가 물었다.“... 한 명입니다.”석 대표는 웃어 보이고는 볼 일이 있다면서 자리를 떴고 그가 떠나자 다른 사람들도 흩어졌다.“아빠! 저 사람들 무슨 뜻이에요?”“...”배석준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영문을 알게 되었다.배지유는 휠체어에 앉아있어 시선이 막혔지만, 배석준은 멀지 않은 곳에서 도아린을 데리고 인사를 나누는 주현정을 보았다.그들이 칭찬하는 사람은 배지유가 아니라 도아린이었다.“지유야, 여기서 아빠를 기대려. 아빠가 가서 엄마를 찾아볼게.”그는 배지유가 충격을 받을까 봐 그 자리에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하고는 빠르게 걸어갔다.“주현정! 당신 지금 지유는 병원에 내버려 두고 도아린을 데리고 연회에 참가하고 있어? 당신 같은 엄마가 어디 있어?”손님들은 배석준의 표정이 안 좋은 것을 보고 자리를 피했고 주현정의 얼굴에 있던 웃음도 점차 사라졌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고 대답했다.“지유는 당신 같은 아빠만 있으면 돼요.”배석준은 목소리를 깔고 물었다.“앞서 당신은 외부인 하나 때문에 나랑 이혼하려고 했고 이제는 이혼 얘기를 하지 않으니 각종 방법으로 우리를 치욕스럽게 하고 있어. 당신이 다시 JS 픽처스를 운영하게 되었는데도 나한테 얘기
JS 픽처스의 고위인사는 배석준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배 대표님, 또 해외로 가신 줄 알았습니다.”“현정이의 몸이 나아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좀 더 머물다가 가려고 합니다.”배석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평소에 연회에 거의 참가하지 않는 연예인들이 참석한 것을 보고 주현정이 JS 픽처스에서 지위가 여전히 굳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들은 각종 이유를 찾아 함께 공식 석상에 나타나기를 거부했지만, 약속이나 한 듯 카메라 앞에서는 활짝 웃었다. 그들은 모두 주현정 덕분에 잘 되었기에 체면은 반드시 살려주어야 했다.“크흠.”배지유는 배석준에게 자신을 소개하라고 헛기침을 했다.“아, 우리 딸이 마침 해남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어서 데리고 왔습니다.”배석준을 둘러싼 고위인사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주현정은 배지유가 연예계의 나쁜 물을 먹을까 봐 현역일 적에 절대 배지유를 데리고 활동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위인사들도 그저 주현정에게 딸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본 적은 없었다.반응이 빠른 누군가가 술잔을 들며 공손하게 말했다.“따님은 주 대표님과 배 대표님의 우수한 점을 다 닮으셔서 단정하고 청초하십니다. 우리가 올해 새로 영입한 신인보다 예쁘신 것 같습니다.”“맞아요. 해남대학교의 대학원을 다닌다고 하시니 예쁘시고 학식도 많으시네요. 지금 업계에서는 이렇게 완벽한 인재를 제일 좋아합니다!”배지유는 칭찬을 듣고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그녀는 두 손으로 팔걸이를 잡고 살짝 몸을 앞으로 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발을 삐끗해서 일어서서 인사를 올리지 못하겠네요.”“별말씀을요. 발을 삐끗하면 잘 치료해야 해요. 젊고 예쁘신데 후유증을 남기면 안 되죠.”좋은 마음으로 한 말이지만 배지유의 마음속에서는 저주로 들렸다.그녀는 발 한쪽을 다친 게 아니라 다리 하나를 잃었다. 나머지 생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배석준은 배지유의 성격을 알기에 그녀가 난리를 피울까 봐 얼른 다른 곳으로
주현정은 말투가 가라앉았고 표정이 엄숙했다.“남자의 내연녀로 이십몇 년을 있다가 아이까지 낳았는데도 결혼을 하지 못했으니 어른이 화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있나. 도아린의 양아버지는 양어머니의 혼수를 가로챈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위협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딸의 효도를 받을 자격 없어!”현장에는 여자 연예인들도 많았다.같은 딸의 마음으로 이렇게 심란한 일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효도를 할 수 있겠는가?그들은 도아린이 매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도아린이 양어머니를 위해 복수를 했다고 여겼다.강홍련은 주위 사람들이 모두 도아린의 편을 드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은 견딜 수 있지만 방금 자신의 말이 강씨 가문에게 영향을 줄까 봐 두려웠다.그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도아린은 단호한 눈빛으로 목소리를 높였다.“강씨 어르신은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복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강씨 어르신께서 좋은 마음으로 당신을 받아주었는데 당신은 밖에서 어르신의 명성이나 흐리고 다니면 안 되죠. 농부와 뱀의 이야기를 재희 씨도 들어봤을 거로 생각해요.”도아린은 강씨 어르신의 편에 섰는데 강재희는 반박할 수 없었다.여론에서 아버지의 대회에 흑막이 있다는 일로 들끓던 것이 금방 사그라들었는데 강홍련 저 멍청이 때문에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다.주현정은 도아린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할 수 없었다.“도아린은 제 딸이고 JS 픽처스의 후계자예요. 강씨 가문에서 이렇게 제 딸을 치욕스럽게 하다니, 저희 협력은 앞으로 계속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재희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녀는 도아린이 연회에 참가한 것은 단지 주현정과 예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주현정이 도아린을 딸로 삼고 JS 픽처스의 후계자로 생각한다는 것은 예상치 못했다.만약 도아린과 모순이 격화된다면 앞으로의 협력에는 장애가 생길 것이다.“강홍련 씨, 사과해요!”강홍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재희는 지금 자신을
도아린의 표정은 아주 평온했다.진열대에 있는 다이아몬드의 빛이 꺾이어 그녀의 눈동자를 비춰 유독 눈부셨다.강홍련은 그녀의 앞으로 가서 섰다.강홍련은 도아린보다 머리 하나쯤 작아서 고개를 들어 도아린을 바라보았는데 도도한 척하는 모습이 광대 같았다.“네가 JS 픽처스에게 ‘봉황의 시대’를 광고하도록 넘겼는데 강씨 가문의 고급 주얼리들은 모두 JS 픽처스의 연예인들이 광고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했어. ‘봉황의 시대’와 JS 픽처스의 연예인이 동시에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당연하게 ‘봉황의 시대’가 강씨 가문의 것으로 생각하게 될 테지.”이게 바로 연예인을 찾아 광고하는 이유였다.예를 들어 어떤 톱스타가 운동화의 모델이 되었다면 그가 나타났을 때 팬들은 어떤 브랜드의 신발을 신었는지 알게 된다. 따로 브랜드를 찾아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도아린은 도덕과 재능을 겸비한다는 말로 강씨 가문에게 치욕을 안겨주었지만 결국은 강씨 가문이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이다.“강씨 가문에서 이득을 보는 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도아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나는 강씨 가문의 사촌이야!”강홍련은 불쑥 얘기했다.“강씨 가문에서 손보미를 밀어준다면 배건후와 결혼할 수 있어. 강씨 가문에서 안씨 가문을 지지한다면 내 아들은 안씨 가문의 딸과 결혼할 수 있는 거야!”“그래서요.”강홍련은 도아린이 모른 척할 줄 몰랐고 그녀의 코에 대고 얘기했다.“그래서 나한테 잘하라고. 그러면 강씨 가문에서는 네가 해남에서 살아나갈 기회라도 줄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의 대회 성적을 조작하는 것은 물론 너를 디자인 업계에서 쫓아내는 것도 일이 아니지. 내 삼촌 강태식은 이 바닥을 꽉 잡고 있어. 내 삼촌이 뭐라고 하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 거야. 너의 ‘봉황의 시대’도 잘난 척할 거 없어. 언론에서 만들어준 것뿐이야. 만약 삼촌의 학생들이 다 그게 별로라고 얘기한다면 너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질 거야!”많은 손님이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강홍련의 지나친 말에 시선을 두
“아빠가 방법을 대서 가볼게. 너는 오지 마.”배석준은 배지유가 걱정되었다. 지난번에 배지유가 밖으로 나갔다 왔을 때도 돌아와서 다리가 아파 잠이 들지 못했다.배지유는 붉어진 눈으로 애원했다.“제 친구들은 제가 아직 안에 갇혀있는 줄 알아요! 아빠랑 제가 함께 엄마의 연회에 간다면 매체에서는 저희 세 식구의 화목한 모습을 찍게 될 것이고 소문들은 자연스레 사그라질 거예요!”배석준은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딸의 명성은 도아린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돌이킬 방법을 계속 찾지 않는다면 배지유가 해남대학교로 돌아갔을 때 반드시 동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조롱당할 것이다.“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메이크업과 코디를 해줄게.”배석준이 데리고 온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김지민이었다.김지민은 연예계를 잘 아는 사람이라 참석하는 연예인들이 무슨 브랜드를 입었는지 알아냈다. 배지유는 똑같은 옷을 입으면 안 됐고 다리의 흉터를 가릴 수 있으면서 예쁘고 매력적이어야 했다.이 부분에서 김지민은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배지유는 만족스럽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그녀의 치마를 들지 않는 이상 그녀가 다리 하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물어보면 발을 삐끗해서 휠체어를 탔다고 하면 될 것이다.이런 장소에 김지민은 절대 나타나서는 안 되므로 부녀가 떠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연회장의 중심에는 도아린이 검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고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는 현장에 있는 연예인들의 시선을 끌었다.이 여자의 아름다움이 너무 지나쳤다.연예계의 스타들은 자주 레드카펫을 밟고 시상식에 참가하므로 어떻게 분위기를 휘어잡는지를 잘 알고 자신이 어느 각도에서 가장 예쁘게 찍히는지도 알고 있었다.도아린은 처음 보는 얼굴이고 업계에 대해 영향력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다 자신감이 넘쳤다.그녀가 스크린 앞으로 가서 사인할 때 스크린에는 ‘봉황의 시대’의
도아린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그녀의 덤덤한 눈빛은 ‘라윤주’의 이름을 듣고 초점을 잃었다.“뭐라고요?”“...”육하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다가 육하경이 말을 이었다.“향 주머니로 화를 면한 것은 우연이에요. 정말 저를 도왔던 것은 세인트존스 호텔의 책임자가 되게 만들었던 것이죠.”육하경은 입꼬리를 올려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어르신들을 3일이나 괴롭혀서야 알아냈어요. LY에서 저를 후임자로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육하경의 학업은 각 부분에서 다 뛰어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육씨 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실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빽빽이 필요했다.육민재를 예로 들어보면 능력은 가장 뛰어나지 않을지는 몰라도 맏아들의 장손 혈통을 이어받아 어렸을 때부터 최고로 좋은 자원과 경험을 쌓을 기회들을 누리고 있었다. 이변이 없다면 그는 육씨 가문의 후계자일 것이다.다른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려면 모든 게 알맞게 부합되어야 한다.육하경은 모든 것을 통찰하고 있었고 육씨 가문의 산업에 기대를 두지 않아 오랜 시간 밖에서 떠돌며 공부를 했고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었다.세인트존스 호텔의 관리 권한이 그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는 기쁘기도 놀랍기도 했다.놀란 마음으로 육하경은 전임자를 찾아갔고 온갖 방법을 다 써서야 LY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육씨 가문 뿐만 아니라 많은 명문가가 LY와 관계가 있었고 그들은 인재를 추천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을 도와주었기에 자연스레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육하경은 그때 손에 향 주머니를 들고 있었는데 전임자가 이상해하며 무늬를 찍어서 물어보았는데 그것은 ‘추천서’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하경 씨가 말하는 그 이야기에도 관심 없습니다.”도아린은 책을 육하경에게 돌려주고는 차 문을 열었다.“도아린 씨!”육하경은 그녀를 잡고 싶었지만, 손을 허공에 멈추고 결국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육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