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을 기다릴 때, 배석준은 고개를 돌려 김지민을 바라보았다.그의 말투는 순간 낮게 가라앉았다.“지민 씨, 자중하길 바라.”“...”김지민은 마음속에서 깜짝 놀랐다. 아직 자기소개하지 않았는데 배석준은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있는 거지?김지민은 짐짓 침착하고 몸을 곧게 폈고 당황한 시선을 감췄다.“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실례를 했습니다. 제 가정 형편은 아주 평범했지만, 저희 아버지께서는 항상 저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저를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셨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제가 대학교를 졸업하는 그해에 돌아가셨어요. 회장님께서 제 아버지와 많이 닮으셨어요. 그래서 처음 회장님을 뵙게 됐을 때 무척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여 저도 모르게... 죄송합니다.”김지민의 말에 배석준은 배지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배석준은 한숨을 내쉬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도아린은 아침부터 문나연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제작하고 있는 드레스의 작업이 거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어 와서 검사해달라는 것이었다.차는 엠파이어 빌딩의 아래에 세웠고 도아린은 도유준이 가게 밖에서 설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도유준의 두 손에는 거즈가 둘려져 있었고 행동이 불편했지만, 얼굴에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행여나 사람들이 그가 사장이라는 것을 모를까 봐 말이다.그는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느끼고 뒤돌아봤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도아린인가?’중요하지 않다. 모두 A18 번 가게가 도유준의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더는 숨길 필요가 없었다.서둘러서 개업하고 돈을 벌어서 도정국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 얼른 어머니에게 당당한 신분을 부여하려 했다.도씨 가문의 모든 건 그들 것이다.현재 도정국도 무척 기분이 좋았다. 거의 무너져가던 작은 공장이 갑자기 주문을 받은 것이다. 주문 수량도 아주 많았고 이 주문서의 이익은 디저트 가게의 1년 이익과 맞먹었다.도정국이 상대방
도정국은 물러서지 않았다. 도아린의 말대로 공장을 도지현에게 주면 공장이 도유준의 명의로 있다는 게 발각될 것이 아닌가?그리고 도유준이 모르게 주문을 받으면 수를 써서 돈을 자신의 계좌로 넣을 수 있었다.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도아린이 타협했다.“공장을 주지 않겠다면 차용증에 사인해요. 이자율은 시장가격으로 하죠.”“너한테 돈을 빌리는 데 이자까지 줘야 해? 그래... 네 말대로 하자.”도아린은 전화를 끊고 장수현에게 좀 있다가 가지러 갈 테니 차용증을 작성해달라고 했다. “네 아버지는 정말 지독해. 너를 찾을 때마다 다른 일은 없고 돈을 달라고만 하잖아.”곁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문나연은 화가 났다.“도유준 그 양아들은 애지중지하면서 친아들은 병원에 두고 보는 척도 안 하잖아! 맞아, 3년에 한 번씩 하는 스타 대회가 이번 달 말에 진행하기로 했다고 해. 연성에서는 참여자 정원이 세 명이래. 나는 대회에 나가는 것까지 바라지 않고 현장에 가서 볼 수 있기만 해도 만족이야!”문나연은 갑자기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잠깐만 기다려...”스타 대회는 국내에서 제일 수준이 높은 디자인 대회였다. 3등 안에 들면 큰 금액의 상금을 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가서 연수할 기회까지 얻을 수 있다.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두 각 업계에서 최고인 인재들이었고 관중들도 각 업계에서 실력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VIP 입장권도 신분의 상징이었고 뒤에 있는 관중석의 가격은 한 장에 2000만씩 치솟았는데 그것도 구석진 위치였다.도아린은 대회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할 필요는 없지만,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일 기회를 놓치고 싶을 리가 없다.이 업계를 떠난 지 3년이 지났고 그녀는 대회의 구체적인 시간을 잊고 있었다.문나연은 표가 적힌 종이를 가지고 빠르게 돌아왔다.“모건 그룹에서 참가자 한 명을 모집할 수 있어!”문나연은 그녀의 눈을 보며 가볍게 떠보았다.“그 사람이 너한테 말했어?”“나는 모건 그룹의 직원이 아니잖아. 참가 자
도아린이 뒤돌아 나가려 하자 도정국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사인할게!” 도정국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도아린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걸어갔고 도정국은 서둘러 따라가 문을 막아섰다.“지현의 상태가 좀 괜찮아지면 내가 집으로 데려가고 싶어. 그동안 네가 돌봤으니 이제는 아버지인 내가 돌볼 차례야.”‘지현이를 가지고 협박하려는 건가? 절대 안 돼.’“지현이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도유준이나 관리 잘하세요. 그 애가 혹여나 밖에서 말썽이라도 부린다면 저는 뒤처리를 해줄 생각 없어요.”도아린의 단호한 태도에 도정국은 결국 차용증에 서명하고 등기부 등본을 도아린에게 건넸다.도아린이 떠난 후, 도정국은 마음이 텅 빈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자신이 반평생 공들여 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진 듯했다.협력사에서 전화가 걸려와 납품 가능 여부를 묻자 그제야 그는 다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고 즉시 납품 가능하다고 대답했다....모건 그룹에서 우정윤이 서류를 들고 대표실로 들어가 업무 보고를 마친 뒤, 봉투 하나를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대표님, 스타 대회의 참가 신청서입니다.”배건후는 손을 멈추고 금빛으로 도배된 된 봉투를 한 번 쳐다봤다.그는 서랍을 열어 봉투를 안으로 밀어 넣고 서랍을 닫았다.모든 동작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깔끔했다.우정윤은 눈을 깜박이며 짐짓 궁금한 척 물었다.“대표님, 우리 모건 그룹은 주얼리 디자인 부문이 없는데 주최 측에 초대장을 요청하신 건 협력사한테 주기 위한 겁니까?”배건후는 말없이 계약서 한 장을 넘겼다.“우리 디자인팀의 류 과장이 해외에서 상을 많이 받긴 했지만, 건축과 쪽은 모형 준비가 필요하니 대회까지 열흘 정도 남은 지금부터 준비를 시작할까요?”우정윤은 그의 표정을 세심히 관찰하며 말했다.배건후는 서류를 덮어 우정윤 쪽으로 던졌다.“말이 많네. 내년 보너스는 필요 없는 건가?”우정윤은 서운한 얼굴로 말했다.“저는 그저 대표님께서 주최 측과 미리
얼마 지나지 않아, 우정윤은 커피를 다시 타서 가져왔다.배건후가 책상을 두드리자 우정윤은 커피를 내려놓고 바로 나가지 않고 사무실 구석에 서 있었다.손보미는 서러운 마음에 눈가가 붉어졌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건후 씨, 왜 이렇게까지 나를 경계하는 건데?”그녀는 말을 마치고 우정윤을 힐끔 쳐다봤다.우정윤은 없는 사람인 듯 뒤돌아 벽에 마주 섰다.배건후는 어두운 표정으로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무슨 일이야.”“...”손보미는 네일을 거의 뜯을 기세로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건후 씨, 그 블로거가 아직도 나를 공격하고 있어. 계정을 막아도 다른 계정을 만들어 계속 글을 올리고 있어. 네티즌들은 그 사람의 말에 동요하고 있으면서 송 감독님의 새 드라마의 댓글 창까지 가서 반대하는 댓글을 달고 있어. 송 감독님도 어쩔 수 없이 나를 교체해야 한다고 했어. 나는 정말 견딜 수 없었어. 건후 씨, 도와줘...”배건후는 서랍을 열어 서류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던졌다.손보미는 그의 차가운 표정 아래 숨겨진 감정을 읽어내지 못한 채 서류를 집어 들었다.서류를 쥔 그녀의 손이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말도 안 돼... 이건 모두 모함이야! 나를 공격하기 위해 보육원을 모함하고 있는 거야!”손보미는 책상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그녀는 배건후의 팔을 잡으려 했지만, 그의 차가운 눈빛에 겁을 먹고 손을 거두었다.“건후 씨, 한쪽 말만 듣지 마! 보육원에서 모든 아이의 신체와 정신 건강을 다 챙기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의 의도는 선한 마음이잖아. 보육원이 없었더라면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제대로 된 끼니조차 먹지 못했을 거잖아...”“그래?”배건후는 냉랭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보육원의 운영을 중단하게 한 것은 그의 지시였다. 손보미는 그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보육원을 조사하는 것을 막으려 한다고 생각했지만, 배건후는 직접 보육원을 철저히 조사하게 조사했고 몇 년 전의 일까지 다 알아냈다.손보미는 얼굴
한쪽은 살얼음판 같았지만, 한쪽은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도지현은 완전히 의식을 되찾았지만 3년간 혼수상태로 있으면서 영양제로만 버텼기에 근육은 물론 살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기본적인 동작조차도 제대로 해내기 어려운 상태였다.조경자는 도지현에게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면서 영양을 챙겨주었고 그의 재활 운동을 도왔다. 도아린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도지현은 뇌졸중 환자들이 하는 코와 눈을 가리키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누나...”도지현은 자기 코끝을 손으로 누르다가 위로 치켜들었고 검은 눈동자가 중간으로 모이면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되었다.도아린은 그의 모습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렸을 때, 도지현이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도아린이 이렇게 그를 웃겼었다.하지만 매번 도지현은 누나가 제대로 못 한다며 자신이 보여주겠다는 말로 끝이 났었다.조경자도 웃었고 도지현도 따라서 웃었다.“누나, 밥 먹었어? 닭고기 죽이 아직 한 그릇 남았어. 정말 맛있는데 아주머니가 더 못 먹게 하셔.”“너는 지금 많이 먹으면 소화가 안 되잖아. 이건 내가 먹어야겠다.”도아린은 옆에 앉아 죽을 먹기 시작했고 도지현은 고개를 기울여 그녀를 바라봤다.도아린이 거의 다 먹는 것을 보고 도지현은 기습적으로 물음을 던졌다.“매형 혹시 문제 있는 거 아니야?”그 말에 도아린은 먹던 죽을 내뿜고 콜록콜록 기침하며 얼굴이 새빨개졌다.“그게 아니면 왜 3년 동안 나한테 조카 하나도 못 만들어줘?”도지현은 침대 난간을 잡고 팔 힘을 기르는 연습을 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3년 만에 본 도아린은 풋풋하고 어린 티가 사라지고 부드러운 모습 속에 단단함이 배어 있었다.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그는 누나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조경자가 분위기를 풀려고 말했다.“누나가 지현 씨한테 온통 신경을 쏟았잖아요. 이제 지현 씨가 나았으니, 곧 조카도 생기겠죠.”도아린은 결혼 생활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지만, 조경자는 3년 동안 도지현을 돌보며 병문안을 오
“누나는 그런 거 안 좋아해요! 기사식당에서 먹으면 매콤한 중식을 더 먹을 수 있다고 좋아하는 사람인데요.”“도지현!”도지현은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더 말 안 할게요. 누나의 단점을 더 들추면 누나가 화내니까요. 근데 사실 누나가 생활비를 반씩 저한테 나눠준 게 아니면 그렇게 힘들게 살지는 않았을 거예요. 매형, 빨리 누나 데리고 가세요.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나서는 바로 쉬면 안 되니까 운동도 좀 하시고요.”“...”도아린은 그를 힐끗 째려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배건후는 마음속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그는 도아린이 진짜로 뭘 좋아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단지 자신이 그녀가 좋아한다고 생각한 것들뿐이었다.조경자가 돌아오자 도아린은 배건후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주차장에서 도아린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하세요.”배건후는 눈빛이 어두워졌고 차 문을 열었다.“일단 밥부터 먹으러 가자.”“괜찮아요.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도아린의 시선을 따라간 배건후는 멀리 서 있는 일남과 일북 두 명을 발견했다. 한 명은 건물 입구에, 또 한 명은 흰색 포르쉐 옆에 서 있었다.그들은 주위를 경계하며 빠르게 도아린을 쳐다봤다. 굉장히 책임감 있고 프로페셔널한 보디가드들이었다.배건후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담배를 피우고 싶어 담뱃갑을 꺼냈지만, 텅 비어 있어 결국 담뱃갑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어제 육하경이 내게 준 자료, 네가 시킨 거지.”“...”도아린은 그 속에 있는 연관성을 금세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끝까지 확인해볼 거예요.”“이 일은 연관된 범위가 넓어. 그 배후세력은 네가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도아린은 작게 웃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건후 씨 같은 사람도 그들을 보호하려고 나서는 걸 보니, 그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은 건 확실하네요.”배건후는 주먹을 꽉 쥐었다.그는 그녀가 위험에 빠질까 걱정이 돼서 이런 말을 한 건데 그녀는 전혀
도아린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는데 손보미가 배건후에게 먼저 다가가 입을 맞추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피하지 않았다.이후 손보미는 그의 팔짱을 끼고 병동으로 들어갔다.도아린의 마음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고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가자.”그리고 조이서에게 손보미가 도지현을 보러 오면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 병원 밖으로 향했다.“아가씨, 저 차가 길을 막고 있습니다.”일북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도아린은 고개를 들어 도로 한가운데에 주차된 빨간 람보르기니를 보았다.“양보한다고 생각하고 기다리자.”...오늘은 백 교수님의 당직 날이었는데 손보미를 보고 놀라면서 무척 기뻐했다.“무슨 바람이 불어서 대스타가 여기까지 왔어?”“교수님이 보고 싶어서 왔죠.” 손보미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도지현이 깨어났다고 듣고 일정 끝나자마자 달려왔어요. 고마워요. 다음에 식사 한번 대접할게요.”“나한테 고마워할 거 뭐 있어.”백 교수님은 배건후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약간 긴장한 듯한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도지현 씨의 다리를 살펴봤는데 무릎 아래가 손상되어 있었습니다. 적절한 의족을 착용하고 재활을 병행한다면 스스로 걸을 가능성이 있어요.”배건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도지현은 도아린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평생 그를 돌볼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아무리 정성껏 돌본다 해도 그가 독립적인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했다.“백 교수님이 된다고 하시면 될 거야.”손보미는 배건후의 소매를 잡고 애교를 부리며 당겼다.백 교수님은 손보미의 손을 힐끗 보고는 이내 시선을 피했다.“물론 초기에는 재활 운동을 통해 팔과 코어 근육을 강화해야 합니다.”“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건후가 부드럽게 말했다.백 교수님은 안경을 고쳐 쓰고는 따스한 시선을 보냈다. “보미가 국내에서 대표님의 보살핌을 받게 되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보미는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보미가 부탁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최선을
스타 대회는 3년마다 열리고 만약 다음번에... 만약 도아린이 그 대회에 전혀 관심이 없다면?배건후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손보미의 비명이 들려왔다.“내 차 어디 갔어? 분명 여기 주차했는데!”손보미는 병원의 보안팀을 불렀고 차주가 그녀라는 걸 확인한 후 후문으로 안내받았다.후문에는 빨래방과 창고로 사용되는 단층집들이 줄지어 있었다.그리고 그 단층집 지붕 위에, 빨간색 람보르기니가 당당히 올라가 있었다.“내 차가 왜 지붕 위에 있어!”손보미는 화가 나서 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어쨌든 그녀도 공인인지라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저기 올려놓은 사람한테 다시 내려놓으라고 해요!”“친구분께서 차주분이 급한 일이 있어 주차할 시간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차를 긁을까 봐 걱정돼서 특별히 이곳을 선택했다고 하던데요. 차도 자랑할 수 있고 안전도 보장된다고요.”손보미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저는 그런 친구 없어요!”“그럴 리가요? 차를 저기까지 옮기는 비용도 그분이 결제하셨고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도 남겼습니다.”“그 사람이 누구예요!”“성이 도 씨라고 하시던데요.”손보미는 배건후가 비웃는 것을 느꼈지만 고개를 돌려보면 여전히 도도하고 냉랭한 표정이었다.‘도아린! 너랑은 반드시 끝장을 볼 거야!’...다음 날, 도아린은 육하경과 함께 지희를 찾아갔다.그들은 지희를 입양한 보호자의 주소를 알아냈는데 바로 아리산 기슭의 한 마을에 있었다. 그리고 지희와 친해지기 위해 율이도 데리고 갔다.율이는 처음으로 연성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기에 호기심에 들떠 있었다.고속도로 양옆에는 별다른 경치가 없었지만, 율이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봤다.가는 와중에 주현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재벌 부인 한 명이 그녀의 치파오를 마음에 들어 해서 한 벌 주문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요즘 선생님께서 아주 바쁘셔요. 만약 기다릴 수 있다면 제가 한번 여쭤볼게요.”“얼마 정도 기다려야 할까?”“...최소 한 달은 걸릴
서대은은 문에 기대어 서서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손을 들었다.사람의 그림자가 언뜻거리는 순간, 그는 재빨리 상대방의 얼굴을 막으려 했지만 오히려 상대방에게 제압당했다.남자는 잔근육을 가진 몸에 얼굴에는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눈빛은 매서운 독수리처럼 날카로웠다.‘이 사람은 육청아 일당이 아니야!’서대은이 물어보려던 찰나, 상대는 마취약이 묻힌 거즈로 그의 입을 막았다.거의 순식간에 서대은은 의식을 잃고 무너졌다.“함정이야! 빨리 돌아가!”사람들과 빠르게 다시 돌아온 육청아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서대은을 발로 툭툭 찼고 그제야 서대은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물건은요?”서대은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다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그 두 의사가 수상하다더니, 그들이 물건을 가져갔어요!”육청아가 이를 갈며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반드시 찾아내야 해!”사람들은 곧바로 나뉘어 각자 찾아 나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하의 전화가 걸려 왔다.“주변에 없습니다!”논리상으로 그들은 차도 없고 몸을 가누지 못한 사람을 데리고 멀리 갈 수는 없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주위에서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누군가가 도와주고 있는 게 틀림없어!”서대은이 단언했다.“방금 일어난 소동은 그들에게 신호를 보낸 거예요!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어!”육청아의 눈빛이 변하더니 천천히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스캔했다.“아가씨, 우리는 아가씨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배신자는 이놈밖에 없어요!”바깥쪽을 맡고 있던 왕눈이 서대은을 지목하자 서대은은 코웃음 치며 받아쳤다.“난 오늘 처음이라고. 주소도 너희가 급하게 알려준 거고 내가 어떻게 정보를 넘겼다는 거야?!”왕눈은 말문이 막혔지만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우리는 아가씨를 따른 지 오래되었다고! 너만 외부인이야!”“외부인이라고 해서 나를 의심한다고?”서대은도 질세라 육청아를 향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내가 들어오는 게 싫으면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요. 나한테 뒤집어씌우려
서대은이 서둘러 다가갔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그의 눈에는 거센 파도가 일렁였다.수술칼을 사용해 한 번에 그들의 목을 치는 데 자신이 있었지만,사람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었다.게다가 만약 그들이 소리라도 낸다면 그 소년과 함께 도망가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유일한 방법은 지원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이군,’그는 겁먹은 척하며 수술대로 천천히 다가갔다.두 남자는 그저 눈앞의 소년이 가져올 이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전에 유 선생이 몰래 각막을 떼서 팔았잖아. 그러고는 손 씻고 고향에 내려가 별장 짓고 산대.”“손을 씻은 건 알고 있어. 근데 그것도 누릴 복이 있어야 누리지...”“무슨 뜻이야? 혹시 유 선생이...”키 작은 남자가 목을 따는 제스처를 했다.키 큰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대은을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게 아니라면 왜 저거 보고 감시하라고 했겠어? 문지기가 말하길, 유 선생을 청아 누나가 직접 손본 거래!”쭈뼛쭈뼛 다가온 서대은의 눈빛이 잠시 날카로워졌지만 곧 두려움으로 바뀌었다.“시간을 낭비하게 해서 미안해. 손이 계속 떨려서...”키 큰 남자가 다시 메스칼을 서대은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내가 도와줄게!”메스칼이 소년의 배로 향했다. 서대은의 손이 심하게 떨렸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칼끝이 피부에 닿는 순간, 갑자기 밖에서 ‘펑!’ 하는 소리가 났다.누군가가 창문을 뚫고 빠르게 지나가며 약병을 터뜨렸고 코를 찌르는 냄새가 순식간에 퍼졌다.“안 돼!”키 큰 남자가 급히 물러섰다.서대은도 물러서며 빠르게 메스칼을 몸에 숨겼다.“마취약은 아니겠지?”다른 사람들이 입과 코를 막고 있는 모습을 보며 서대은도 급히 옷으로 입을 가렸다.밖에서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려온 후 혼란이 일기 시작했다.“여기도 경찰한테 들킨 거야?”서대은이 놀란 척하며 눈을 크게 떴다.“연성 경찰들이 계속 잠입 수사를 하고 있다던데, 여기도 들킨 거 보면 정말인
경호원이 미간을 찡그리며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자 도아린은 손을 흔들며 그를 안심시켰다.“선생님의 임무는 제 안전을 보호하는 거잖아요?”그리고 자신의 차 키를 그에게 던지며 말했다.“대신 차를 운전해 주세요. 가까이서 보호하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경호원은 운전기사와 눈짓을 주고받은 뒤, 도아린의 차로 향했고 운전기사는 돌아가서 보고하도록 했다.“성함이 어떻게 되시죠?”도아린이 조수석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며 물었다.“주호민입니다. 주 실장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네. 주 실장님, 엠파이어 빌딩에 가 주세요. 육 대표님한테 감사의 뜻으로 뭔가 선물하고 싶어서요.”도아린이 손을 흔들며 그에게 차를 몰라고 했다.주호민은 차를 몰고 엠파이어 빌딩으로 향했고 도아린은 그동안 일북과 연락을 주고받기에 편했다.이전 경험 덕분에 그녀는 그들이 매우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일북에게는 반드시 의심되는 장소를 찾으면 먼저 경찰에 신고하라고 전했다.[사람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안전도 꼭 지켜야 해!]황금연휴가 다가오자 쇼핑몰에는 사람들이 북적였고 주호민은 도아린의 옆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계속 따라갔다.한 명품 매장에 들어간 도아린은 사이즈를 참고하려 주호민에게 대신 입어보라고 했지만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자 도아린은 육하경과 체형이 비슷한 아무 남자에게 다가가 부탁했고 그녀의 미모에 반한 남자가 관심을 보이며 흔쾌히 승낙했다.결국, 이 광경을 지켜본 주호민은 어쩔 수 없이 마네킹 역할을 했다.“이 색은 좀 어두워요. 다른 걸로 한 번 더 입어보세요.”“이 디자인은 너무 화려해요. 육 대표님한테는 잘 안 어울릴 것 같은데, 주 실장님 생각은요?”“이건 너무 올드한 것 같고...”과연 도아린이 진지하게 선물할 옷을 고르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드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이걸로 할게요!”도아린이 손가락을 튕기며 직원에게 말했다.“이거 작은 사이즈로 주세요. 선물 받을 사람이 저 친구와 키는 비슷하지만 어깨
서대은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없이 서 있었다.그러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다시 구역질을 참으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방금 그 사람도 LY의 사람인가요?”“서은 씨 생각에는요?”“그런 것 같은데, 누구인가요? 청룡, 아니면 백호?”육청아가 말을 하려다 멈췄다.“오늘 거래가 무사히 끝나면 그때 알려줄게요.”서대은이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자, 육청아가 그를 살짝 밀며 재촉했다.그제야 그는 한 걸음 내디디며 창고로 향했다.창고 문 앞에 누군가가 지키고 있었다.“휴대폰 내놔.”서대은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끄기 전에 메시지가 성공적으로 전송된 걸 확인한 후 문지기에게 핸드폰을 건넸다.한편, 도아린은 육하경의 차가 계속해서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거의 연성 주변을 한 바퀴 다 돌았지만 그 차는 계속해서 일정 거리만큼 따라오고 있었다.육하경에게 전화를 하려던 그 순간, 도아린의 휴대폰이 진동했다.앱 화면에는 메시지 알림은 없었지만 그녀는 직감으로 알았다.도아린은 급히 카페의 게시판을 열었다.[갓 태어난 지 16일 되는 송아지, 관심 있는 분은 연락해 주세요.]도아린의 심장은 거의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다.‘역시 그런 거야. 잘못을 했다고 그냥 도망갈 서대은이 아니지.’그는 분명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내부로 침투했을 것이다!‘송아지'는 남자를 뜻하고‘16일’은 아마도 피해자의 나이 16세를 뜻했다.전화번호는 일반적인 번호가 아니었고 규칙 없이 나열된 숫자들이었지만 도아린은 단번에 그 숫자가 위도와 경도를 나타내는 위치 정보라는 걸 알아챘다.차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는 아직 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일북에게 전화를 걸 수 없었다.대신 급히 메시지를 복사해서 보냈다. 빠르게 연락할 수 있는 단축어를 설정해 두었지만 서대은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할 방법은 없었다.그녀가 고민하던 중, 일북이 이해하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곧 사람을 데리고 갈게요. 기다려 주세요.]하지만 도아린은 긴장을 놓을 수 없었고 차를 급히
“보스!”육청아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묻어 있었고 온몸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오랫동안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왜... 서대은이 들어오자 직접 온 것일 거야. 만약 오는 거래를 완수하지 못하면 나도 끝장날 텐데.’보스라는 남자는 키가 크고 흰색 롱코트를 걸치고 안에는 검은색 터틀넥을 받쳐 입고 있었다.적갈색의 살짝 웨이브 진 짧은 머리에 얼굴에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서대은에게로 향했고 마치 감마선처럼 그의 내면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서대은은 저도 모르게 등에 소름이 돋았다.눈앞의 남자는 외형만 보면 강재민과 닮아 있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피비린내 나는 살기와 냉혹함은 강재민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보스.”서대은도 따라서 불렀다.남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육청아를 향해 물었다.“물건은?”“창고에 있습니다!”육청아가 공손하게 대답했다.“부하가 지키고 있어서 절대로...”짝!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손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육청아는 얼굴을 감싸 쥐고 두려움과 억울함이 뒤섞인 눈빛을 보냈다.“네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남자는 차가운 냉소를 흘렸다.“앞장서.”“예.”육청아가 남자를 데리고 수술실로 향했다.그들은 ‘물건’의 품질을 보장하기 위해 출고 전에 살균 소독 과정이 필요했다.이미 마른 체형의 그 소년이 깨끗이 씻긴 채 수술대 위에 인사불성으로 누워 있었다.남자는 천천히 다가가 곧 판매될 신선한 장기를 내려다보며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성의를 보이기 위해 오늘의 물건은 네가 직접 진행해.”보스라는 남자의 시선이 갑자기 서대은에게로 향했다.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제가 경험이 없어서요. 물건을 망칠까 봐 걱정됩니다.”“직접 꺼내라는 게 아니야. 옆에서 전 과정을 지켜보라는 거지.”남자는 짧게 말한 뒤돌아서 나갔다.서대은은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숨긴 채 따라 나갔다.그러다 문 앞에서 다시 한번 돌아
일북의 음성 메시지였다.“대신 확인해 줄까요?”육하경이 물었다.“아니요, 괜찮아요!”도아린은 손가락을 스쳐 화면을 꺼버렸다.의사는 육하경의 팔을 맞춘 뒤, 앞으로 이틀 동안 무거운 물건을 들지 말 것과 강한 충격을 피할 것을 당부했다.병원을 나서자 도아린이 간단히 작별을 고했다.“볼 일이 있어 먼저 가볼게요.”육하경의 운전기사는 줄곧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이미 병원 앞에 차를 세워 둔 상태였다.육하경은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멀어져 가는 도아린을 바라보았다.그러나 차에 올라탄 순간, 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따라가.”한편, 오늘은 서대은과 육청아가 처음으로 함께 움직이는 날이었다.지정된 장소에서 대기하던 서대은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주작팀의 대원들이 계속해서 그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그는 도아린을 볼 면목이 없었다.“오른쪽 3시 방향, 목표 인물 확인!”이어폰에서 실시간 보고가 흘러나왔다.“확인 완료!”누군가 응답했다.서대은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3시 방향을 바라보았다.그곳은 작은 문구 방이었다.오늘은 학생들의 개학일이라 학생들이 문구를 사러 몰려들고 있었다.그중, 마르고 키 큰 남학생이 책가방을 메고 문구점을 나섰다.다른 학생들에 비해 그의 가방은 비어 보였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운이 없어 보였다.한 남자가 다가가 길을 물었고 남학생은 조심스럽게 방향을 가리켰다.그러자 그 남자는 감사의 의미로 생수 한 병을 건넸고 남학생은 경계하는 듯했지만병뚜껑이 새것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안심하고 물을 마셨다.2분 후.남학생은 갑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며 쓰러지자 남학생을 부축하던 남자는 그를 서대은이 탄 차량으로 데려갔다.“대상 확보! 바로 이동하겠다.”그 남자는 무전기를 눌러 보고한 뒤 서대은한테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출발하지.”서대은은 담배를 귀에 꽂은 채 차량을 서서히 출발시켰다.“상태는 어떻지?”서대은이 백미러로 뒷좌석을 힐끗 보며 묻자 뒤쪽에 앉아 있
“혹시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닐까요?”도아린이 고개를 돌리며 육하경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그러나 육하경은 몸을 살짝 기울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건후도 알고 있어요. 건후가 전에 아린 씨를 찾아와 강재민과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경고했던 걸 기억하죠? 하지만 아린 씨는 듣지 않았죠. 잘 생각해 보세요. 건후가 당한 그 교통사고, 과연 강재민과 무관하다고 확신할 수 있어요?”쾅쾅쾅!갑자기 차 문이 세게 두드려졌고 도아린이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놀랐다.뒤를 돌아보니 지희가 차 문 옆에 서 있었다.그녀는 허리를 숙여 환하게 웃고 있었다.“그건 돌아가서 다시 얘기하죠.”도아린이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문을 열고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하경 씨도 너 보러 왔어.”지희가 육하경을 흘끔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이젠 하경 씨라고 부르는 건가? 역시 내가 밀고 있는 커플이라 다르네!’지희는 싱긋 웃으며 도아린의 팔짱을 끼었다.“앞으로 도 선생님은 육 대표님과 함께 자주 와주셔야 해요!”육하경은 그런 그녀를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봤다.“두 사람 얘기 나누세요. 저는 보일러가 잘 되고 있는지 확인하러 갈게요. 올해는 꼭 난방 공급을 추진하려고요.”그가 떠나자, 지희는 도아린을 향해 여전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뭘 그렇게 자꾸 웃는 거야?”그러자 지희는 더욱 활짝 웃으며 말했다.“육 대표님이 우리한테 해준 모든 지원들, 전부 도 선생님 이름으로 하신 거예요! 그러니 당연히 그분이 바라는 일이 성사되길 기도해야죠!”도아린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지희와 함께 보육원의 아이들을 보러 갔다.보육원의 아이들 대부분은 유기된 아이들이었다. 특히 선천적 장애가 있는 경우가 많아 일상적인 돌봄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의료 지원도 필요했다.“육 대표님이 아이들을 위해 건강검진을 주선하셨어요. 모든 아이들이 정기적으로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신다고요.”지희의 말에,
육하경이 고개를 살짝 돌려 도아린을 보더니 다시 앞을 응시했다.“아린 씨 생각엔 그 사람이 수상해요?”“건후 씨가 해남에 있을 때, 늘 우정윤도 옆에 있었어요. 배지유한테 모함당했을 때도요. 그런데 우리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직전 그는 갑자기 자취를 감췄죠.”도아린이 느긋하게 좌석에 기대었으나 육하경의 미세한 반응을 놓치지 않고 살폈다.“아린 씨 말대로라면, 우 비서가 건후의 일정을 그쪽에 넘겼을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요?”육하경이 자연스럽게 되물었고 운전대를 쥔 손가락이 가볍게 두 번 튕겨졌다.그건 분명한 만족감의 표현이었고 이 상황을 반기는 듯한 은연중의 반응일 수도 있었다.“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죠.”도아린이 턱을 괴고 신중하게 생각에 잠겼다.그러다 육하경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마치 그의 의견을 묻는 듯 혼잣말처럼 말했다.“모건 그룹의 전속 변호사 남궁유민, 건후 씨와 막연한 사이였던 성대호 그 둘조차 등을 돌려 건후 씨를 궁지로 몰았어요. 그렇다면 건후 씨의 가장 가까운 사람, 늘 함께했던 특별 보좌관인 우정윤의 가치는 더 크지 않을까요?”육하경이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러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자 그도 도아린을 바라보았다.둘의 시선이 맞닿았다.도아린의 눈빛은 마치 맑고 투명한 개울물 같았다. 하지만 너무 투명해서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듣고 보니 일리가 있네요.”그는 피식 웃으며 자조적으로 말했다.“나도 건후와 꽤 친했잖아요. 그런데 나만 그를 배신하지 않은 것 같네요. 이러면 너무 눈에 띄는 건가?”도아린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이 정도까지 말을 꺼낸 상태에서 육하경이 숨기고 싶다면 끝까지 입을 닫을 것이고, 그녀와 더 깊이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솔직할 순간이었다.보육원으로 가는 길에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도아린은 침묵 속에서 생각에 잠겼고 육하경은 이득과 손해를 저울질하는 듯했다.차가 보육원의 대문을 지나 서서히 멈춰 섰다.육하경이 차를 세우고 길게 한숨을 내쉬
도아린이 막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일북의 전화가 걸려 왔다.“아가씨, 우정윤을 찾았습니다.”“어디야?”도아린이 막 자리에 앉으려다 번쩍 일어서며 물었다.“어제 우리가 갔던 그 묘지 근처입니다.”일북의 차 내부에서는 방향 지시등이 켜지는 딸깍딸깍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잠시 후, 그는 덧붙였다.“방금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우정윤이 하얀 승용차에 올라탔습니다. 지금 뒤따라가는 중입니다.”“눈치채지 않게 따라가서 그의 은신처를 확인해. 만약 도망칠 기미가 보이면 그냥 붙잡아!”도아린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이때 비서가 노크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도 대표님, 30분 후에 회의가 있습니다.”도아린이 냉랭하게 되물었다.“그 프로젝트 원래 신 대표님 담당이 아닌가요?”“이미 온천 문제까지 해결해 줬는데 더 개입하면 고위층이 불만을 가질 수도 있어요. 게다가 신 대표님 능력도 뛰어난데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네, 알겠습니다.”비서는 신지훈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그는 가볍게 혀를 찼다.“도움 줄 땐 아주 적극적이더니 이젠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네. 진짜 뒤끝 작렬이군.”그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배건후는 왜 이런 변덕스러운 여자를 건드려서...”신지훈은 직접 도아린을 찾아가 회의 참석을 요청했다.그러나 도아린은 이미 가방을 챙겨 나가려던 참이었다.“도 대표님, 어디 가십니까?”“제가 그래도 신 대표님의 상급자인 걸로 알고 있는데 내 행선지까지 보고해야 하나요?”“그런 뜻은 아닙니다.”“다만 요즘 시국이 어수선해서 도 대표님의 안전이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도아린이 냉정하게 대꾸했다.“병원에 가려고요. 그리고 신 대표님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잘 챙깁니다.”그 말투는 마치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신지훈의 짓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한 듯했다.신지훈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한 채 그녀가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곧이어 한유미가 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