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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화

Author: 영하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밤 11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윤슬은 거실에 불을 켜지 않았다.

켜봐야 의미도 없었다.

‘어차피 오늘도 안 들어올 거잖아. 신아랑 어디선가, 또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서랍에서 조용히 구급상자를 꺼내 들고, 아픈 몸을 이끌어 자신의 방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결혼한 지 2년.

그 이름 아래 있었지만, 실상은 서류만 공유하는 관계였다.

강현은 단 한 번도 윤슬을 ‘아내’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주방은 공유했어도, 침실은 철저히 분리됐다.

안방은 언제나 윤슬의 금지구역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지. 그 방에 억지로 들어갔다면... 지금쯤 더 구역질 났을 거야.’

윤슬은 소독약을 꺼내 팔꿈치와 발등을 조심스럽게 닦았다.

이젠 홀로 상처 부위에 약을 바르는 것도 익숙해졌다.

약통은 힘이 없어 책상에 그대로 두고, 파자마로 갈아입은 윤슬은 조심스레 침대에 누우려 했다.

그러나 허리를 숙이는 순간, 꼬리뼈에서 퍼지는 찌릿한 통증에 숨이 멈췄다.

“하...”

작게 새어 나온 숨소리를 참으며 최대한 움직임을 줄여 몸을 눕혔다.

눈을 감자, 생각이 밀려왔다.

‘이젠 그만 생각하자. 너무 지쳐서 더는 감정도 없어. 그냥 자자.’

윤슬은 그렇게 조용히 잠에 들었다.

한편, 그 시각 호텔 앞에 멈춰 선 차 안.

“강현아, 방까지... 데려다줄래?”

조수석에 앉은 신아는 말끝을 흐리며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강현은 그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계기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남자의 시선은 차량 디스플레이 위, 연속으로 찍힌 부재중 전화 기록에 고정돼 있었다.

벌써 스무 통.

하지만 그 번호로 건 전화는 한 번도 연결되지 않았다.

‘대체 왜 안 받는 거야. 핸드폰은... 분명히 들고 있었잖아.’

신아는 강현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가다가, 디스플레이에 찍힌 번호를 보고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에게도 익숙한 번호였다.

신아가 오늘 보낸 그 메시지의 상대 번호와, 디스플레이에 떠 있는 번호가 정확히 일치했으니 말이다.

신아는 말없이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 함을 열었다.

[미안해, 윤슬아. 강현이가 날 데려다주느라 또 널 두고 갔네. 나랑 조금 더 있어 줘야 할 것 같은데... 괜찮지?]

번호 뒷자리까지 확인했다.

진짜 똑같았다.

‘역시... 그 전화, 소윤슬한테 걸고 있었던 거구나.’

신아의 손끝이 핸드폰 위에서 천천히 굳었다.

표정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서늘한 무언가가 조용히 일어나고 있었다.

신아는 말없이 이를 꽉 깨물었다.

눈빛은 잠깐 흔들렸고, 그 안에 스치는 질투는 감춰지지 않았다.

호텔 도착을 알리는 안내음이 울리고, 차가 부드럽게 멈췄다.

신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말했다.

“강현아, 우리... 2년 만에 다시 만났잖아. 방까지... 데려다줄 수 있어?”

말끝을 흐리며, 손을 슬며시 강현의 손등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 손끝이 조용히 셔츠 소매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쯤이면... 눈치챘겠지? 예전에도, 지금도 넌 내 사람이니까.’

강현은 신아의 손길을 느끼며 잠시 시선을 그 손에 두었다.

그러다 아무 말 없이 손을 빼냈다.

이윽고 문을 열고 나가, 신아 쪽으로 돌아와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먼저 올라가. 난 소윤슬을 좀 찾아봐야 할 것 같아. 전화를 계속 안 받아서.”

신아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남자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윤슬이랑... 사랑의 감정이라도... 생긴 거야?”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물이 맺히는 게 보일 정도로.

“내가 발목을 아파할 때도, 넌 계속 전화만 붙잡고 윤슬이한테 연락하더라? 그 정도면, 걱정 이상의 감정인 거 아니야?”

강현은 고개를 젓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리 없어. 난 그런 여자한테 마음 줄 생각 없어.”

“그럼 왜 계속 찾는 건데?”

“혹시 윤슬이가 할아버지께 뭐라도 말하면, 괜히 너한테 피해 갈까 봐서 그래. 난 그게 싫단 말이야.”

강현은 본인이 한 말이 꽤 타당성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니까 신아도 이해할 거야.’

신아는 그 말을 듣자 금세 입꼬리를 올렸다.

애써 눌렀던 감정이 조금 풀린 듯, 가볍게 웃었다.

“역시... 아직도 날 생각해 주는구나.”

그녀는 한발 다가서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증명해줘. 나... 뽀뽀해 줘야 믿을 것 같아.”

강현은 말을 잃은 채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신아는 이미 두 팔을 그의 목에 감고 있었다.

그리고 키스하려던 찰나, 강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신아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것뿐이었다.

신아는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곧장 입술을 향해 다가갔지만, 강현은 고개를 옆으로 피했다.

“강현아... 지금... 뭐 하는 거야?”

신아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그런 거절은, 차마 무시할 수 없는 거리감이었다.

“너 아직도 날 미워해? 내가 떠난 거... 그 이유는 너도 알잖아.”

“그땐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네 할아버지가...”

신아의 설명은 강현의 말에 끊겼다.

“여기 호텔 앞이야. 혹시 누가 보면... 네 이미지에 안 좋을 수도 있어.”

강현은 목소리를 낮췄고, 조심스레 그녀의 팔을 풀어냈다.

신아는 그 자리에 멈춰선 채 손끝을 꽉 쥐었다.

‘거절이야. 그것도 분명한 거절. 예전 같으면... 이런 핑계도 대지 않았을 텐데.’

신아의 시선은 점차 멀어져가는 강현의 그림자를 향했다.

‘설마... 정말로 소윤슬이야?’

‘그 여자에게, 진심이 생긴 거야?’

오래 참아왔던 불안이 신아의 마음에 서서히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강현은 차에 올라탔다. 조수석 쪽 창밖에 서 있는 신아가 눈물에 젖은 얼굴로 힘겹게 웃고 있었다.

“내일 점심에 보자. 오늘 많이 힘들었을 텐데, 이제 들어가서 푹 쉬어.”

강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신아는 애써 눈물을 닦으며, 늘 그렇듯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응, 내일 봐. 운전 조심하고... 사랑해.”

‘사랑해.’

그 익숙한 말이 공기처럼 흘렀지만, 이번만큼은 강현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예전엔 하루에도 몇 번씩 말했었지. 날 사랑한다고...’

‘근데 지금은... 왜 저렇게 힘들어하는 거지?’

‘2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길었던 걸까?’

백미러에서 점점 작아지는 신아의 모습.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신아의 눈빛엔 집요한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

여자의 손끝이 무의식중에 쥐어졌고, 속으로 천천히 중얼거렸다.

‘돌려놔야 해. 다시, 원래 자리로. 부강현은 내 사람이니까.’

...

강현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또다시 그 번호를 눌렀다.

“안 받는다고?”

답답한 마음에 액셀러레이터를 깊이 밟았다.

속도는 점점 올라갔고, 계기판의 숫자가 빨갛게 변했다.

‘대체 왜 안 받아? 이 시간이면 집에 있을 시간인데.’

그가 병원 근처를 한 바퀴 돌았을 때도 윤슬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집으로 돌아갔다는 거겠지.’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강현은 거의 뛰듯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도착하자마자 지문을 대고 문을 열었다.

텅-

집 안은 깜깜했다.

오직 정적만이 그를 반겼다.

‘불이... 꺼져 있어?’

순간, 강현은 어딘가 낯선 기분에 휩싸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늦게 들어와도, 항상 거실 불은 켜져 있었고, 윤슬은 늘 소파에 앉아 강현이 들어오는 소리를 기다렸다.

강현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그 ‘당연함’이 무너져 있었다.

‘안 들어온 건가...? 아니야, 신발이 있잖아.’

현관 옆 바닥에 놓인 구두 한 켤레.

강현은 한눈에 알아봤다.

윤슬이 신는 플랫슈즈.

그 옆엔 실내화가 한 짝이 비어 있었다.

‘들어오긴 했는데... 왜 불은 안 켜놓은 거지’

‘내 전화는 왜 안 받아?’

그의 마음 한쪽이 거칠게 들끓었다.

구두도 제대로 벗지 않은 채 곧장 안방으로 향했다.

손잡이를 돌렸지만, 잠겨 있었다.

“소윤슬!”

노크가 아니라, 거의 문을 두드리는 수준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전화도 안 받고, 불도 안 켜놓고... 사모님 노릇 2년 했다고 이젠 내가 누군지도 까먹은 거야?”

강현의 목소리는 점점 격해졌다.

‘무시하는 거야? 지금 나를, 일부러 무시하는 거잖아.’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 도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강현이 모르는 사이, 윤슬은 그 어둠 속에서 조용히, 하지만 완전히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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