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실 문 앞. 물기 묻은 강현의 셔츠는 몸에 들러붙어 있었고, 얼굴엔 물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신아는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괜찮아? 윤슬이는...?”강현은 턱을 굳게 다물고 씹어 삼키듯 대답했다.“괜찮아,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남자의 목소리엔 거칠게 눌러 담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신아는 조심스레 욕실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내가 가서...”그러자 강현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잡아당기며 문을 노려봤다.“가지 마. 저 미친X, 또 물 쏠 수도 있어.”“아까도, 날 보자마자 욕하고 물을
‘그래, 이 방엔 소운슬의 냄새가 없네. 역시 이 남자... 나만 생각한 거야.’그녀는 조용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입술이 닿았고, 손끝은 그의 목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강현의 목젖이 살짝 움직였지만,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그리고 신아를 안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이럴 땐... 예전 같았으면, 날 품 안으로 끌어당겼을 텐데...’신아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약간의 불안이 가슴 어딘가에 맺혔다.강현의 눈앞엔 지금 신아가 있었지만, 머릿속엔 다른 누군가가 떠올라 있었다. ‘왜 하필, 소윤슬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지.’강
병원에 도착하자, 의사는 윤슬의 발을 보더니 표정을 굳혔다. 물집은 이미 다 터져 있었고, 피부는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이렇게 되도록 놔두면 안 되죠. 감염되면 진짜 위험해요. 몸 좀 아끼세요, 환자분.”윤슬은 고개를 숙였다. 말없이, 그저 피투성이가 된 자기 발등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낄 마음이 없는 게 아니야.’‘누군가, 날 그렇게 두지 않기로 작정했을 뿐이니까.’의사는 다시 진료를 이어갔다. 윤슬의 허리 아래쪽, 꼬리뼈 주변까지 퍼진 멍 자국에 눈길이 머물렀지만, 팔에도 자잘한 상처들이 있었다.
‘사실 내가 빼앗는 게 아니라, 원래 내 것이었지만 말이야.’ 그 말에 강현의 눈빛이 더 매서워졌다.“처음부터 소윤슬이 다 빼앗은 거였잖아! 네가... 네가 내 옆에 있어야 했어.” “신아야, 내 아내 자리도, 집도, 모든 게 다... 네 것이었어야 했어!”남자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속에 쌓인 감정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신아는 고개를 숙인 채 손끝을 움켜쥐었다.입술은 떨리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아주 작게, 확실하게 웃고 있었다.‘그래... 이제 거의 다 왔어. 소윤슬은 그 집에서 곧 사라질 거야.’ ‘소윤슬이 더
쾅!강현은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리고 거실로 나가 주방 한가운데 놓인 음식들을 바라봤는데, 퇴근길에 들러 직접 사 온 반찬들이었다. 그 순간, 그는 갑자기 모든 게 우습게 느껴졌다. ‘내가 이걸 왜...’ 이어서 입꼬리가 비틀었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강현은 그대로 도시락들을 들고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핸드폰을 꺼내 윤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하지만 여전히 신호만 갈 뿐, 받질 않았다. 강현은 헛웃음을 지으며 화면을 내려다보다
신아가 포크를 들며 입술을 깨물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얼굴엔 미세한 기대감이 어렸다.강현은 아무 말 없이 스테이크를 신아의 접시로 옮겼다. “네가 좋으면 됐지, 걔가 뭔 상관이야.” 표정엔 감정이 거의 없었고, 목소리는 냉담했다.신아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 감정은 곧 감춰졌다. ‘이젠 확실히 내 쪽으로 기운 거 맞지...?’ 두 사람은 와인 잔을 부딪쳤고, 투명한 소리가 짧게 울렸다.“내일 내 쇼케이스가 있잖아. 런웨이 앞자리 티켓 줄게. 와 줄 거지?” 신아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지만, 남자는 대답
“왜 그래, 강현아...” 신아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강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 팔은 오래 가지 못했다.강현은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신아의 손을 떼어내며,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방금은 내가... 선을 넘었어. 편히 쉬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현은 침대에서 일어나 황급히 옷을 추슬렀다. 그러고는 거의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강현아! 강현아!” 신아가 곧 따라 일어나 그를 쫓았지만,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자 남자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빈 복도를 멍하니 바라보던
“계속 찾아. 설마 살아있는 사람 하나가 갑자기 사라지겠어?” 강현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눈빛엔 피로와 짜증, 그리고 짙은 불안이 얽혀 있었다.창호는 벌써 별별 방법을 다 써봤다. 윤슬의 지인, 학원 수강 기록, 심지어 택배 수령 주소까지 다 뒤졌지만 흔적 하나 없었다. 심지어 전화도 수십 통 걸었다.물론 계속 꺼져 있던 핸드폰이 아침엔 잠시 켜지긴 했지만, 전화를 받진 않았다.‘진짜... 이러다 잘리는 거 아냐?’ 창호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강현의 눈빛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었기에, 창호는 자기 인생도
‘대표님... 분명 사모님을 신경 쓰시잖아. 그런데 왜 또 한신아 씨랑 같이 있고, 집에까지 들이신 거야... 대체 무슨 생각이지?’ 창호는 강현의 이중적인 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영양식을 주문해 뒀지만, 한 가지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그것은 바로 부씨 가문에서 보낸 거라고만 할 뿐, 강현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은 것.‘괜히 부 대표님 이름 꺼냈다가는 사모님이 통째로 버릴 수도 있으니까.’ 창호는 그런 불안함에 말끝을 흐렸다. 병원.윤슬은 조용히 병실 식탁에 놓인 영양식을 한 숟갈 떠먹었다. ‘
신아는 슬그머니 웃으며 자기 매니저 향해 말했다. “짐은 저쪽 방으로 옮겨주세요. 옷장은 그 안쪽에 있을 거예요.” 비록 안방은 아니지만, 윤슬을 그 방에서 내쫓은 것만으로도 꽤 만족스러웠다. ‘어차피 소윤슬은 이제 이 집 사람이 아니니까.’ 그때, 강현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윤슬의 방에서 뭔가를 정리하는 모습이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강현이 조용히 물었고, 신아는 웃으며 말했다. “매니저가 내 짐 정리 좀 도와주는 거야. 방이 좀 좁아서.” 그
“국 어때? 맛있지?” 신아가 다시 한번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사실, 이건 신아가 직접 끓인 게 아니고, 단골 레스토랑에 부탁해 포장해 온 국이었다. ‘이 정도면 강현이 입맛쯤은 잡을 수 있겠지.’ “맛있어. 신아 음식 솜씨 좋은데?” 강현은 숟가락을 들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기름기 많고, 국물도 진해서 금방 물릴 맛이네... 딱 공장에서 뽑아낸 듯한 맛.’ 이런 국과 반대로, 윤슬이 끓여준 국은 언제나 깔끔했다. 입에 부담 없고, 먹고 나면 속도 편했다.
비록 실시간 검색어는 빠르게 내려갔지만, 부씨 가문의 본가엔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부태기 회장의 전화가 걸려 왔다. 강현은 출근길 운전 중이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귀가 얼얼해질 정도의 고성이 쏟아졌다. [윤슬이 그 아이, 그렇게 좋은 애를 두고 네가 사람 새X냐?! 2년 동안 그 애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지, 진심으로 살핀 적은 있냐?]‘2년의 진심?’ 강현은 핸들을 꼭 쥐며 입술을 다물었다. ‘매일 집밥 차려줬다는 거? 빨래는 세탁기, 청소는 로봇이 했고... 내가 소윤슬을 먹여 살
강현은 신아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신아의 어깨끈이 흘러내렸다. 강현의 눈에 들어온 건, 옅게 드러난 쇄골 아래로 이어진 아찔한 여자의 곡선이며, 거기엔 분명 어젯밤 자신이 남긴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신아가 입고 있는 그 옷도... 너무나 익숙했다. 바로 윤슬의 옷이었다. ‘마치 소윤슬 앞에서 바람피우는 기분이야.’ 강현은 손끝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고, 급히 시선을 돌려버렸다. “강현아... 내 왼손 좀 잡아줄래? 세수 좀 하고 싶어서...” 신아가 고개를 살짝
그 생각에 닿자, 윤슬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때 그냥 찢어서 태워버릴걸... 왜 그걸 고이 모셔놨냐고, 내가.’ 하지만 곧, 그 일기장이 서랍 안에 자물쇠로 잠겨 있다는 게 떠올랐다. ‘다행히... 신아가 열 순 없겠지.’ 마음을 다시 다잡고 핸드폰을 끄려던 순간, 새로운 푸시 알림 하나가 화면 위로 튀어 올랐다. 제목은 눈에 띄게 굵은 글씨로 떠 있었다. [최고의 명문가인 부씨 가문의 황태자,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런웨이에 깜짝 등장!!] 윤슬의 시선이 제목에서 멈췄다. ‘부씨 가문의 황태자라면
“그럼 어떡해... 내 신분증도 다 가방에 있는데, 다른 호텔도 못 가...” 신아가 망연하게 말했다. “우리 집으로 가자.” 강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신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좀... 나 때문에 또 윤슬이랑 싸우는 건 싫어...” “소윤슬이 뭔 상관이야. 그 집은 내 집이야. 누굴 들이든 내 마음이지.” 강현의 말투엔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신아는 그 말을 듣고, 아직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얼굴로 머뭇거리다가, 결국 강현이 이끄는 대로 따라나섰다. 엘
“오늘 밤 쇼와 관련해서 손실 생긴다면, 직접 제 비서 이창호 씨에게 연락해 주십시오.”강현이 단호하게 말했다.박승무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이래서 난 부강현 대표 스타일이 좋아. 칼같이, 시원시원하게.’그는 바로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손해는 전혀 없습니다. 원래 저희는 돌발상황을 감안해야 하기도 하고요.신아 씨만 회복된다면, 쇼 무대는 언제든 그대로 열려 있을 겁니다.”강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명함을 건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신아를 부축하려 다가갔다.하지만 신아는 또다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고, 강현은
질투심이 미친 듯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신아는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결심했다.병실 안.윤슬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강현이 마지막에 했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은행 앱을 열었다.새로 도착한 알림 하나. 강현이 보낸 송금 메시지였다.3천만 원. 메모엔 ‘수술비’라고 적혀 있었다.윤슬은 망설임도 없이 바로 다시 돌려줬다. ‘지금 안 돌려주면, 나중에 이혼할 때 다시 토해내라고 하겠지. 부강현은 그런 놈이니까.’...패션쇼장 1열.강현은 윤슬이 송금을 거절한 걸 확인하고 메시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