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가 포크를 들며 입술을 깨물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얼굴엔 미세한 기대감이 어렸다.강현은 아무 말 없이 스테이크를 신아의 접시로 옮겼다. “네가 좋으면 됐지, 걔가 뭔 상관이야.” 표정엔 감정이 거의 없었고, 목소리는 냉담했다.신아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 감정은 곧 감춰졌다. ‘이젠 확실히 내 쪽으로 기운 거 맞지...?’ 두 사람은 와인 잔을 부딪쳤고, 투명한 소리가 짧게 울렸다.“내일 내 쇼케이스가 있잖아. 런웨이 앞자리 티켓 줄게. 와 줄 거지?” 신아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지만, 남자는 대답
“왜 그래, 강현아...” 신아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강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 팔은 오래 가지 못했다.강현은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신아의 손을 떼어내며,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방금은 내가... 선을 넘었어. 편히 쉬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현은 침대에서 일어나 황급히 옷을 추슬렀다. 그러고는 거의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강현아! 강현아!” 신아가 곧 따라 일어나 그를 쫓았지만,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자 남자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빈 복도를 멍하니 바라보던
“계속 찾아. 설마 살아있는 사람 하나가 갑자기 사라지겠어?” 강현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눈빛엔 피로와 짜증, 그리고 짙은 불안이 얽혀 있었다.창호는 벌써 별별 방법을 다 써봤다. 윤슬의 지인, 학원 수강 기록, 심지어 택배 수령 주소까지 다 뒤졌지만 흔적 하나 없었다. 심지어 전화도 수십 통 걸었다.물론 계속 꺼져 있던 핸드폰이 아침엔 잠시 켜지긴 했지만, 전화를 받진 않았다.‘진짜... 이러다 잘리는 거 아냐?’ 창호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강현의 눈빛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었기에, 창호는 자기 인생도
“찾았습니다, 대표님.” 창호가 핸드폰을 확인한 뒤 말했다. “금하구 성훈병원 3층 316호 병실입니다. 댁에서 제일 가까운 병원이에요.”“기사님, 빨리 좀 가주세요.” 강현은 날카롭게 말했다. 남자의 턱선은 굳어 있었고, 손등엔 핏줄이 도드라졌다.한동안 조용했던 강현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네가 직접 전화했어?” 창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사모님이 처음으로 전화를 받으셔서요. 제가 급한 서류 핑계를 대서...”쿵!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의 주먹이 조수석 등받
316호 병실 바깥.간호사와 병실 아주머니들이 강현을 병실 밖으로 밀어내자, 윤슬의 시야에서 그의 얼굴이 사라졌다. 그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꼬리뼈 깊숙이 파고드는 통증은 마치 찢어지는 듯했고, 그 고통이 결국 눈물샘을 터뜨렸다. ‘버텨야지... 아프다고 울면, 또 약한 줄 알 거야...’ 하지만 윤슬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물은 속절없이 베개 위로 떨어졌고, 어깨가 조용히 흔들렸다.병실 안은 조용해졌다. 오직 여자의 흐느낌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옆자리 아주머니들이 조심
‘말하면 뭐 해? 다 변명처럼 들릴 텐데.’ 몇 초간 정적이 흐른 뒤, 강현은 조용히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 윤슬은 여전히 엎드려 있었다. 병원복은 살짝 들려 있었고, 약이 발린 허리 아래가 붉게 부어 있었다. 강현은 무의식중에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 발끝에 시선이 멈췄다. 윤슬의 발등... 붉게 익은 피부 위, 몇 개의 물집이 터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저렇게까지 된 거였어?’ 강현은 다시 그녀의 얼굴을 봤다. 여자의 눈은 감겨 있었다.그리고 베개를 단단히 움
316호 병실, 늦은 오후.“네가 칼을 일부러 신아한테 들이민 거, 내가 똑똑히 봤어.” 강현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그 안에 미세한 흔들림이 묻어 있었다.윤슬은 차분히 그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그럼 한신아는 많이 다쳤어?” 강현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그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신아가 상처를 보여주던 장면이었다.화장솜으로 한 번 닦으면 지워질 수준의 붉은 자국.반창고 하나마저 붙일 수 없는 지경이었다.“나더러 자작극이라고 했지? 진짜 자작극은 누가 더 잘하는지 알아?”윤슬
차 안에 있는 강현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소윤슬... 그럴 거면 직접 얘기하지. 왜 이 비서 통해서 말하냐고?!” 강현이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손끝엔 여전히 분노가 남아 있었다.‘내가 뭐가 모자라서 비서를 중간에 세워야 해? 내가 왜 전화 한 통, 문자 하나 못 보내야 하냐고!’ ‘도망은 자기가 쳐놓고, 왜 내가 죄인처럼 중간 사람을 통해서 말을 전해 들어야 하는데?’ 조수석의 창호는 말없이 창밖만 바라봤다. 이미 머릿속은 텅 비었다.‘대표님 분노 게이지, 오늘도 풀 충전이네...’ ‘아니, 전달 방식이
‘대표님... 분명 사모님을 신경 쓰시잖아. 그런데 왜 또 한신아 씨랑 같이 있고, 집에까지 들이신 거야... 대체 무슨 생각이지?’ 창호는 강현의 이중적인 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영양식을 주문해 뒀지만, 한 가지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그것은 바로 부씨 가문에서 보낸 거라고만 할 뿐, 강현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은 것.‘괜히 부 대표님 이름 꺼냈다가는 사모님이 통째로 버릴 수도 있으니까.’ 창호는 그런 불안함에 말끝을 흐렸다. 병원.윤슬은 조용히 병실 식탁에 놓인 영양식을 한 숟갈 떠먹었다. ‘
신아는 슬그머니 웃으며 자기 매니저 향해 말했다. “짐은 저쪽 방으로 옮겨주세요. 옷장은 그 안쪽에 있을 거예요.” 비록 안방은 아니지만, 윤슬을 그 방에서 내쫓은 것만으로도 꽤 만족스러웠다. ‘어차피 소윤슬은 이제 이 집 사람이 아니니까.’ 그때, 강현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윤슬의 방에서 뭔가를 정리하는 모습이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강현이 조용히 물었고, 신아는 웃으며 말했다. “매니저가 내 짐 정리 좀 도와주는 거야. 방이 좀 좁아서.” 그
“국 어때? 맛있지?” 신아가 다시 한번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사실, 이건 신아가 직접 끓인 게 아니고, 단골 레스토랑에 부탁해 포장해 온 국이었다. ‘이 정도면 강현이 입맛쯤은 잡을 수 있겠지.’ “맛있어. 신아 음식 솜씨 좋은데?” 강현은 숟가락을 들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기름기 많고, 국물도 진해서 금방 물릴 맛이네... 딱 공장에서 뽑아낸 듯한 맛.’ 이런 국과 반대로, 윤슬이 끓여준 국은 언제나 깔끔했다. 입에 부담 없고, 먹고 나면 속도 편했다.
비록 실시간 검색어는 빠르게 내려갔지만, 부씨 가문의 본가엔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부태기 회장의 전화가 걸려 왔다. 강현은 출근길 운전 중이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귀가 얼얼해질 정도의 고성이 쏟아졌다. [윤슬이 그 아이, 그렇게 좋은 애를 두고 네가 사람 새X냐?! 2년 동안 그 애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지, 진심으로 살핀 적은 있냐?]‘2년의 진심?’ 강현은 핸들을 꼭 쥐며 입술을 다물었다. ‘매일 집밥 차려줬다는 거? 빨래는 세탁기, 청소는 로봇이 했고... 내가 소윤슬을 먹여 살
강현은 신아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신아의 어깨끈이 흘러내렸다. 강현의 눈에 들어온 건, 옅게 드러난 쇄골 아래로 이어진 아찔한 여자의 곡선이며, 거기엔 분명 어젯밤 자신이 남긴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신아가 입고 있는 그 옷도... 너무나 익숙했다. 바로 윤슬의 옷이었다. ‘마치 소윤슬 앞에서 바람피우는 기분이야.’ 강현은 손끝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고, 급히 시선을 돌려버렸다. “강현아... 내 왼손 좀 잡아줄래? 세수 좀 하고 싶어서...” 신아가 고개를 살짝
그 생각에 닿자, 윤슬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때 그냥 찢어서 태워버릴걸... 왜 그걸 고이 모셔놨냐고, 내가.’ 하지만 곧, 그 일기장이 서랍 안에 자물쇠로 잠겨 있다는 게 떠올랐다. ‘다행히... 신아가 열 순 없겠지.’ 마음을 다시 다잡고 핸드폰을 끄려던 순간, 새로운 푸시 알림 하나가 화면 위로 튀어 올랐다. 제목은 눈에 띄게 굵은 글씨로 떠 있었다. [최고의 명문가인 부씨 가문의 황태자,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런웨이에 깜짝 등장!!] 윤슬의 시선이 제목에서 멈췄다. ‘부씨 가문의 황태자라면
“그럼 어떡해... 내 신분증도 다 가방에 있는데, 다른 호텔도 못 가...” 신아가 망연하게 말했다. “우리 집으로 가자.” 강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신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좀... 나 때문에 또 윤슬이랑 싸우는 건 싫어...” “소윤슬이 뭔 상관이야. 그 집은 내 집이야. 누굴 들이든 내 마음이지.” 강현의 말투엔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신아는 그 말을 듣고, 아직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얼굴로 머뭇거리다가, 결국 강현이 이끄는 대로 따라나섰다. 엘
“오늘 밤 쇼와 관련해서 손실 생긴다면, 직접 제 비서 이창호 씨에게 연락해 주십시오.”강현이 단호하게 말했다.박승무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이래서 난 부강현 대표 스타일이 좋아. 칼같이, 시원시원하게.’그는 바로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손해는 전혀 없습니다. 원래 저희는 돌발상황을 감안해야 하기도 하고요.신아 씨만 회복된다면, 쇼 무대는 언제든 그대로 열려 있을 겁니다.”강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명함을 건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신아를 부축하려 다가갔다.하지만 신아는 또다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고, 강현은
질투심이 미친 듯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신아는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결심했다.병실 안.윤슬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강현이 마지막에 했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은행 앱을 열었다.새로 도착한 알림 하나. 강현이 보낸 송금 메시지였다.3천만 원. 메모엔 ‘수술비’라고 적혀 있었다.윤슬은 망설임도 없이 바로 다시 돌려줬다. ‘지금 안 돌려주면, 나중에 이혼할 때 다시 토해내라고 하겠지. 부강현은 그런 놈이니까.’...패션쇼장 1열.강현은 윤슬이 송금을 거절한 걸 확인하고 메시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