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하는 충격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그녀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대표님...”예전에도 유강후는 그녀에게 살갑게 대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예의는 지켰었다. 그런데 이번에는...날카로운 한기가 서려 있는 눈빛으로 유강후는 위에서 아래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마치 보잘것없는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누가 내 방에 들어가라고 허락했죠?”임청하는 고통을 꾹 참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강 대표님께서 예전에 쓰시던 물건들을 넣어두라고 하셔서 전 그저...”“그저 뭔데요?”유강후는 차갑게 말했다.“그쪽이 어머니의 비서가 되었다고 해서 강씨 가문에 남을 수 있고 안주인 자리라도 넘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임청하는 얼굴이 창백해졌다.“아니에요. 저는 오로지 강 대표님 곁에서 일을 돕고 싶었을 뿐, 다른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유강후가 쌀쌀하게 말했다.“청하 씨, 내가 그쪽을 도와줬다고 기회가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요. 주제 파악해야죠. 난 청하 씨를 성공시킬 수도 있고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어요.”얼음장처럼 차가운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임청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이 저지른 일의 심각성을 깨달았다.“대표님,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단지 강 대표님의 지시대로 했을 뿐이에요.”유강후는 마치 죽은 사람을 보듯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냉혹하게 말했다. “그쪽이 다연이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면 내 죽은 누나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착각하지 말아요. 청하 씨는 그들과 하나도 안 닮았어요. 그 얼굴에 맞은 필러가 티가 안 나는 것 같아요?”임청하는 모욕감에 눈물을 쏟았다.“대표님, 전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모욕을 주시는 거예요?”유강후는 차갑게 말했다.“내 앞에서 불쌍한 척 그만둬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섬뜩하게 말했다.“난 여자를 때리진 않아요. 하지만 죽이지 않는다는 말은 안 했어요.”임청하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
“이렇게 하시면 저는 막다른 길에 놓이게 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란 말씀이세요! 전 아무도 유혹하지 않았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유강후는 그녀를 무시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잠자리에 들었던 강현미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 나왔다.“무슨 일이냐?”유강후는 그녀를 거실 소파에 앉히고 차분하게 말했다.“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머니. 저녁에 너무 소란스러워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잠시 뵈러 왔습니다.”강현미는 문 쪽을 흘끗 보았다. 임청하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저 아이를 해고했어?”유강후는 도우미가 따라 준 찻물을 받아 강현미의 앞에 가져갔다.“어머니, 차 드세요.”강현미는 차를 받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넌 나이가 들더니 성질도 커지는구나. 이젠 내 안뜰 사람도 가만 안 두겠다는 거야?”유강후: “어머니는 몸만 잘 추스르세요. 이런 사소한 일은 신경 쓰지 마시고요. 내일 더 좋은 사람을 구해 드릴게요.”강현미는 아무 말 없이 탁자 위의 담배를 집어 들고 불을 붙이려 했다. 유강후는 그녀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으며 차갑게 말했다.“어머니 곁에 있는 사람들은 어머니가 담배 피우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어요?”강현미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임청하가 울면서 뛰어 들어왔다.“강 대표님, 제발 유 대표님 좀 타일러 주세요. 제발 절 업계에서 매장시키지 않게 해달라고요!”강현미의 손이 멈칫하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청하를 매장시키려고?”유강후는 차갑게 말했다.“작년에 이미 나가라고 했는데, 무슨 수를 썼는지 할아버지께 가서 말씀드렸더군요. 그것만으로도 강씨 가문에 더 이상 둘 수 없어요.”그때, 임청하는 이미 강현미 앞까지 달려왔다.그녀는 털썩 무릎을 꿇고 애처롭게 울며 말했다.“강 대표님, 제발 저를 내쫓지 마세요. 저는 이곳에 아무런 연고도 없으니 여기밖에 갈 곳이 없어요. 그런데 유 대표님께서 절 매장시키시면 전 죽을 수밖에 없어요.”유강후는 단호하게 말했다.“내 말 안 들려
강현미가 말했다.“가. 지금은 내 아들이 강씨 가문을 관리하고 있으니 아들이 어떤 집사를 보내든 난 그대로 따를 거야. 널 위해 빌어줄 생각 없어.”이 말에 임청하의 마지막 희망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의 눈에 한 줄기 증오가 스치더니 울면서 땅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곧 집사장은 사람들을 시켜 임청하의 짐을 챙겨 쫓아냈다.저택 대문에 이르렀을 때, 집사장이 그녀를 따라왔다.그는 수표를 내밀며 조용히 말했다.“강 대표님이 주는 거야. 백만 달러야. 아껴 쓰면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다.”임청하는 수표를 받았지만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집사장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후 돌아섰다.임청하는 그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수표를 천천히 주머니에 넣었다.겨우 백만 달러? 거지 취급하는 건가?3년 동안 강씨 가문에서 천국을 경험했는데 어떻게 다시 진흙탕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저택을 보며 그녀의 눈은 차갑게 빛났다.확실히 그녀는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되기를 꿈꿨다.그 자리를 원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아마 이 저택에 있는 모든 여자들의 바람일 것이다.북미 최고의 재벌로 한 나라의 경제를 좌우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대기업인데 어떤 여자가 그 자리에 오르고 싶지 않겠는가?하지만 왜 모두가 바라는 걸, 오직 그녀만 꿈꾸면 안 된단 말인가?꿈꾸기는커녕, 일자리까지 잃고 앞으로 살아갈 길조차 막막해졌다.‘강현미, 유강후. 너희가 이토록 잔인하게 굴었으니 나도 독하게 나갈 수밖에!’저택 안 강현미의 처소에서.유강후는 곽혜진이 준 두 병의 약을 가져오게 했다“곽 박사가 처방한 약입니다. 어머니의 병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했어요.”강현미는 약병을 집어 들고 살펴본 후 다시 내려놓았다.“그 아이도 아까 그 얘길 하더구나. 네가 직접 부탁한 거야?”유강후가 말했다.“구하기 힘든 약이니 싫더라도 드셔야 해
유강후가 말했다.“이 약의 약재는 매우 특별해요. H 국에서 새롭게 발견된 신종 생물의 피가 포함되어 있거든요. 그 생물은 치유와 재생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H 국에서 30년 넘게 연구한 끝에 단 한 번만 발견되었다고 해요.”강현미가 물었다.“물고기 같기도 하고 용 같기도 하다는 그 생물 말이니?”유강후: “어머니도 아세요?”강현미: “북아메리카 정부에서 해룡의 피를 얻으려고 혈안이 됐었지. 하지만 H 국 정부가 한 방울도 내주지 않았잖아. 그래서 결국 곽 박사에게 눈독 들이게 된 거야. 지금 암시장에서 그녀의 피는 1밀리리터당 1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고 해. 곽 박사의 피가 해룡의 피와 유사한 성분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구나.”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염동식이 그녀를 그렇게 철통 보안하는 거였군요.”강현미는 약병을 꼼꼼히 살펴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이거면 몇 년은 더 살 수 있겠네.”말을 마친 그녀는 피곤하다며 유강후를 돌려보냈다.자신의 본채로 돌아온 유강후가 미처 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오진숙이 마중 나왔다.“도련님, 진유나 씨가 다락방을 발견하고는 꼭 올라가야겠다고 하네요.”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렸다.“말리지 않았어?”오진숙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어찌 감히 말리겠어요? 도련님께서 이 집에서는 누구도 그분을 제약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잖아요.”그 다락방에는 유연서가 생전에 사용했던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유강후는 그것들을 매우 소중히 여겨 매주 한 번 청소하는 것 외에는 누구도 올라가지 못하게 했다.그런데 지금 진유나가 올라갔으니 유강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오진숙은 유강후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자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유강후는 침실로 걸어가면서 말했다.“내가 가져온 요리책을 이쪽 작은 주방에 전달하고 매일 그 책에 적힌 대로 요리를 만들도록 해. 앞으로는 식사하러 홀로 오라고 따로 부를 필요 없어.”오진숙은 황급히 대답했다.“알겠습니
그녀의 반쯤 마른 머리카락이 나른하게 등 뒤로 흐르며 목덜미에 달라붙어 하얀 피부가 더욱 돋보였다.유강후는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온다연을 뒤에서 껴안았다.“머리 왜 안 말렸어?”온다연은 손을 멈추고 차갑게 말했다.“아저씨랑 무슨 상관인데요?”유강후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고 일부러 말했다.“왜 상관이 없어? 내 아내인데. 당신 몸에 붙어 있는 건 다 내 거야. 머리카락도 포함해서.”온다연은 조금 전에 본 사진들과 일기장 속 글귀들이 떠올라 마음이 시큰해졌다. 그래서 스스로를 다독였다.‘연서라는 아이는 그의 어린 시절의 친구일 뿐 이제는 다 커서 다른 사람과 결혼했을지도 몰라. 그러니 과거의 일로 괜히 질투할 것 없어.’하지만 그렇게 차가운 그가 어린 시절 연서라는 여자아이를 업고 개울을 건너고 손을 잡고 함께 학교에 가고 함께 웃는 모습을 떠올리자 온다연의 마음은 온갖 질투로 가득 차 견딜 수 없이 쓰라렸다.생각이 거듭될수록 눈시울이 붉어진 온다연은 억지로 슬픔을 참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아저씨는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여자아이 손을 잡고 다니더니 커서는 제 어릴 적 사진을 몰래 찍고...”유강후는 온다연이 질투하는 것을 알아챘지만 일부러 놀려주고 싶었다.“이상해? 난 사진 속 여자아이를 계속 좋아했어. 나랑 동갑인데 어릴 땐 매일 붙어 다녔거든. 그러니 손잡고 다니는 게 그렇게 이상하진 않잖아?”“계... 계속 좋아했다고요?”온다연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그 사람, 아저씨 소꿉친구예요?”유강후는 일부러 대답했다.“그렇다고 할 수 있지.”온다연은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나쁜 자식,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서 왜 나를 흔들었던 거야! 진작 알았으면 이런 끔찍한 곳에 오지도 않았을 텐데. 정말 나쁜 놈이야. 소꿉친구가 있으면서 나한테 양다리 걸치다니.’“좋아하는 사람 있으면서 왜 저한테 접근한 거예요?”말하면서 그녀는 그를 밀어내려고 버둥거렸지만 유강후는 그녀
친누나?무슨 친누나?온다연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발로 찼다. 화가 나서 꽤 세게 찬 발차기는 유강후의 아랫배에 퍽 하고 꽂혔다. 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몸은 작은데 성깔은 보통이 아니네.”그는 온다연의 발목을 붙잡으며 낮게 경고했다.“또 차면 진짜 다리 묶어 버린다.”온다연은 속에서 불이 끓었지만 손발이 묶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분을 참지 못한 그녀는 그의 목덜미를 꽉 물었다. 꽤 세게 물었는지 금세 피가 배어 나왔다.유강후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려 목의 굵은 혈관을 드러내 보이며 도발했다.“물려면 제대로 물어. 여길 끊어 버리라고.”온다연도 정말로 화가 났는지 그의 말대로 혈관에 이를 박아 넣었다. 유강후는 눈을 감고 그녀가 마음껏 화풀이하도록 가만히 있었다.하지만 온다연은 끝내 세게 물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한심함과 마음 약함에 서러움이 복받쳐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눈물범벅이 된 온다연의 얼굴을 본 유강후는 자신이 장난이 지나쳤음을 깨달았다. 그는 황급히 그녀를 놓아주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온다연은 그 틈을 타 몇 번 발길질하고 뛰어내렸지만 유강후는 순식간에 그녀를 다시 붙잡았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고 달랬다.“착하지, 울지 마. 사진 속 아이는 내 친누나라고 했잖아.”온다연은 흐느끼며 말했다.“거짓말쟁이! 무슨 친누나? 난 들어본 적도 없어요!”유강후는 한숨을 쉬며 나지막이 설명했다.“쌍둥이 누나라고. 알겠어?”온다연은 잠시 멍해지더니 더욱 화를 냈다.“아저씨는 어떻게 쌍둥이 누나 같은 거짓말까지 할 수 있어요! 나는 강씨 가문에 딸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고 아저씨에게 형제자매가 있다는 말은 더더욱 들어본 적 없어요. 아저씨는 강씨 가문의 외아들이고 유일한 후계자잖아요!”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거짓말? 정말 내 쌍둥이 누나야. 이름은 유연서이고. 다만...”그의 눈빛에 슬픈 그림자가 드리웠다.“열 살 때 세상을 떠났어. 벌써 21년 전 일이
유강후가 말했다.“네가 뽀뽀해 주면 괜찮아질 거야.”온다연은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부드러운 입술로 상처에 살짝 입을 맞췄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아까 네가 다쳤던 곳을 차서 여기가 더 아파.”온다연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다 나았다면서요! 많이 아파요? 어디 보여줘 봐요!”말하면서 그녀는 유강후의 잠옷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매끄러운 잠옷은 단추가 풀리자마자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온다연은 그의 배를 꼼꼼히 살폈다. 상처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옅어져 있었지만 탄탄한 복근이 시선을 빼앗았다.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복근을 몇 번 눌러 보았다. 느낌이 좋았다.손을 떼기 아쉬워 근육의 결을 따라 아래로 더듬어 내려갔고 눈길은 자연스럽게 위로 향했다.온다연의 손이 위험한 곳으로 향하려는 순간,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숨결이 약간 거칠어졌다.“여기서 하겠다는 거야?”온다연은 그제야 그의 잠옷이 바닥에 떨어져 있고 그가 검은색 팬티만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의 아랫도리가 부풀어 오른 것이 눈에 띄어 온다연의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그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아... 아니에요! 그냥 상처만 살펴본 거예요! 얼른 옷 입으세요!”유강후는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책상에 손을 짚고 그녀를 자신의 가슴팍에 가두었다.“네가 벗겼으니 네 손으로 다시 입혀.”그의 큰 그림자가 온다연을 완전히 덮었다. 샤워 후의 은은한 박하 향이 온다연의 코끝을 간질이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향기가 너무 좋았다...다락방은 작았고 유연서의 유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온다연은 마치 다른 사람의 공간에서 숨어서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런데 지금은 유강후가 바싹 다가와 숨소리가 들릴 정도이니 그녀는 긴장됐다.“여기서는 안 돼요...”유강후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온다연의 귀에 속삭였다.“내가 언제 여기서 한다고 했어?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유강후는 그녀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었다.“내가 며칠 동안 얼마나 참았는지 알아? 매일 창문을 넘어 들어가야 했을 뿐만 아니라 작은 소리조차 내면 안 됐다고!”그의 숨결이 거칠어졌다.“다연아, 내 인생에 이렇게까지 참고 비굴하게 굴었던 적은 없었어. 네가 내 모든 기준을 무너뜨린 거야. 그런데 오늘 드디어 진 씨 가문에서 나왔으니... 다연아, 오늘 밤에는 네 목소리를 듣고 싶어...”그의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했으며 듣는 사람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온다연은 귀가 간지러운 듯 몸을 움찔거렸고 온몸은 불이 붙는 것처럼 뜨거워졌다.그녀는 반사적으로 거절했다.“안 돼요. 싫어요. 난... 내 처소로 갈래요...”유강후는 온다연의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췄다.“그건 안되지. 오늘 밤은 내가 수십 년 동안 살아온 이곳에서 다연이와 함께...”그의 손이 그녀의 실크 잠옷 안으로 들어가 말랑한 허리를 감싸 쥐었다. 그는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다연아, 너 알아? 난 몇 년 동안 이 방에서 너를 어떤 자세로 가질지 수없이 상상해 왔어...”온다연은 낮게 신음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만... 그만 해요. 부끄러워요...”유강후는 온다연을 가슴에 밀착시키고 나지막이 말했다. “현관문부터 침실, 그리고 이 다락방까지... 난 수도 없이 상상했어. 다연아, 내 모든 상상을 이루어줘...”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온다연의 몸은 떨렸고 마치 최음제라도 먹은 듯 흥분되었다.“그만 해요...”유강후는 멈추지 않았다.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목을 타고 내려가자 온다연은 몸을 움츠렸다. 이성의 끈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안돼요. 여기선 안돼요... 여긴 누나의 사진이 있잖아요. 아저씨, 난 여기서 못해요...”유강후는 낮게 속삭였다.“그럼 내려가자. 아래층에서는 할 수 있잖아...”온다연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그럼 도우미랑 집사더러 다 나가 있으라고 해요...”곧 집사는 모두 밖으로 나가라는 지시가 담긴 인터폰을
연회가 끝났을 때는 이미 새벽에 가까웠다.유강후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소파에서 잠든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다가가 몸을 굽히려는 순간 온다연이 눈을 떴다.“끝났어요?”유강후는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입맞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왜 방에 가서 자지 않았어요?”그에게서 은은한 술 냄새가 풍기자, 온다연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를 밀어냈다.“술 드셨잖아요.”유강후는 분명 몇 잔 마셨고, 약간 취해 있었다. 그는 술기운에 그녀의 가냘픈 허리를 강하게 잡고 다시 입을 맞췄다.“저를 싫다고 밀어내는 거예요? 유나 씨...”온다연은 고개를 홱 돌리며 두 손으로 그를 막았다.“제가 가서 해장국 끓여올게요.”유강후는 코웃음을 치며 한 손으로 그녀를 마치 작은 고양이를 들듯 번쩍 들어 욕실로 데려갔다.얼마 후, 집사가 해장국을 준비하고 문을 두드리려던 찰나 욕실 안에서 민망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집사는 급히 발길을 돌렸다.‘대표님과 유나 씨의 관계가 정말 좋은가 보네...’집사는 지금 이 흐름대로라면 이 집에 작은 도련님이 생기는 것도 그리 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얼른 어르신께 넌지시 알려드리고 미리 아기방 준비를 해야 할지 상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다음 날, 정오가 가까워서야 온다연은 겨우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온몸이 마치 차에 치인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어젯밤의 일이 떠오르자,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강 대표님은 진짜 너무해. 그제도 폭풍 같은 시간이었는데... 어제는 더 심했어. 술기운에 밤새 몇 번이고 나를 덮쳤어...’어젯밤의 부끄러운 장면들이 떠오르자, 온다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저주하듯 말했다.“진짜 말도 안 돼요. 쉬지도 않고 밤새...”‘참! 어젯밤에도 콘돔을 안 꼈던 것 같은데...’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침대에 다시 쓰러졌다. 유강후는 원래 이런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녀에게 늘 다정하고 세심하게 대해주었는데, 최근 몇 번은
‘다연이가 과거를 잊은 후 새롭게 시작하는 거니까 새로운 여자로 봐도 되겠지...’염지훈이 비꼬는 듯한 웃음과 함께 도발적으로 말했다.“그래서 이렇게 초대도 받지 못한 자리에 왔습니다. 미래 그룹 총수의 새 부인이 얼마나 미인인지 직접 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미스코리아를 나갈만한 미인인가요?”유강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냉기가 서려 있었다.“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몸이 안 좋아서 이미 잠자리에 들었어. 조만간 내가 아내를 데리고 직접 염 대표님의 회사를 방문하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그의 눈빛이 순간 묘한 빛을 띠며 덧붙였다.“가까운 시일 내에 볼 수 있을 테니 그때 어떤 사람인지 직접 확인하면 되잖아.”염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옛날엔 다연이에게 목숨까지 바칠 것처럼 굴더니, 겨우 3년 만에 새 여자와 결혼했다는 거네요? 결국 그때도 전부 연극이었다는 거잖아요.”유강후의 손이 서서히 주먹으로 쥐어지며 목소리가 낮아졌다.“듣기로는 아직도 다연이를 찾고 있다던데, 몇 년을 찾아 헤맸다던데 무슨 소식이라도 있어?”염지훈은 잠시 흥분한 듯 쏘아붙였다.“소식이 있다고 해도 너 같은 놈에게는 절대 한마디도 해주지 않아! 넌 온다연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가질 자격이 없어! 설령 다연이가 살아 있다 해도 널 절대 만나주지 않을 거야. 넌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차갑게 물었다.“그렇다면 소식을 듣긴 한 것처럼 보이네?”염지훈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비웃었다.“없다고 했잖아!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거야!”유강후는 듣자마자 단호하게 말했다.“염 대표님, 온다연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중요하지 않죠. 중요한 건 온다연은 내 아내라는 겁니다. 온다연은 저와 법적으로 결혼했고 우리에겐 함께 키우는 아이도 있어요. 설령 온다연이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그녀의 묘비엔 우리 가문의 성씨가 새겨질 거고 염 대표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걸 명심하세요.”염지훈의 얼굴이 굳어지며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네까짓
온다연은 유강후 앞에서 한 바퀴 돌며 웃었다.“이 치파오 정말 예쁘죠?”달빛처럼 은은한 화이트 톤의 개량식 치파오는 그녀가 착용한 옥 장신구와 완벽하게 어우러져 온다연 특유의 소녀다운 맑음과 온화한 매력을 한껏 살려 주었다.유강후는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정말 예뻐요. 이제 만찬이 시작될 시간이네요. 가시죠.”세 사람은 곧 연회장에 도착했다.연회장에는 이미 손님들이 대부분 자리를 잡고 있었고 온다연과 유강후는 단연코 오늘 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그리고 두 사람과 함께 등장한 임혜린 역시 자연스럽게 시선을 끌었다.특히 온다연과 임혜린이 입은 중식 개량식 치파오는 우아하면서도 여성적인 매력을 뽐내 주변의 여성들을 사로잡았다. 그 자리에서 임혜린의 작업실은 수많은 주문을 받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연회가 약 3분의 1쯤 진행되었을 때, 집사가 급히 유강후에게 다가와 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유강후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더니, 별안간 온다연을 번쩍 안아 올리고 곧장 휴게실로 향했다.임혜린과 즐겁게 대화 중이던 온다연은 느닷없이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어 올려지자,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사람들 앞에서 이러면 어떡해요? 손님들도 있는데...”유강후는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임혜린 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함께 하시죠. 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운전기사가 대기 중이니 편히 돌아가세요.”그의 말은 명백한 작별 통보였다.임혜린은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마침 피곤했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 아이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순순히 온다연과 인사를 나눈 후 자리를 떠났다.온다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유강후를 바라보았다.“왜 갑자기 혜린이를 내보낸 거예요? 한창 재밌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단 말이에요. 조금 전 그 행동은 좀 무례했어요!”유강후는 그녀의 작은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디자이너님의 비서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이가 아프다길래 제가 먼저 보내 드린 거예요.”온다연은 조금
임혜린은 멀지 않은 곳에서 서류를 보는 척하며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유강후를 흘깃 보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온다연의 귀에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몇 마디를 속삭였다.온다연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찡그렸고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유강후는 그 모습을 보고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해 즉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곧 임혜린의 휴대폰에 낯선 계정으로부터 친구 추가 요청이 들어왔다. 귀여운 곰돌이 그림이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된 계정은 다소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였다.임혜린은 유강후를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휴대폰을 옆으로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계속 온다연과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한번 친구 추가 요청을 보냈다. 이번에는 자신의 이름까지 기재해 뒀지만 곧 [상대방이 친구 추가를 거부했습니다] 라는 메시지를 받았다.유강후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임혜린이 자신에게 등을 돌린 채 몰래 중지를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유강후는 다시 친구 추가 요청을 보내며 새로운 메모를 남겼다.[한이준은 아들이 두 살인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역시나 임혜린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친구 추가 요청을 수락했다.곧바로 유강후가 메시지를 보냈다.[임혜린, 내 아내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임혜린은 코웃음을 치며 바로 답장을 보냈다.[유강후 씨의 아내가 누구죠? 나은별인가요?]유강후는 속으로 임혜린을 몇 번이고 죽이고 싶었지만, 온다연이 있는 자리라 꾹 참았다. 그는 즉석에서 임혜린과 온다연이 대화하는 사진을 찍어 보냈다.[이건 또 무슨 장난이죠?][내 아내 앞에서 한 마디라도 실수하면 이 사진은 곧바로 한이준의 휴대폰으로 전송될 거란걸 알아둬.]임혜린은 바로 반응했다.[그럴 배짱이 있나요?]곧 유강후는 한이준과의 대화 일부를 캡처해 그녀에게 보냈다. 임혜린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바로 취소
임혜린은 온다연을 힘껏 안아준 뒤 천천히 풀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어쨌든 네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예전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지도 몰라. 기억한다고 해도 고통만 더할 뿐이니까...”그녀는 온다연의 손을 잡고 꼼꼼히 훑어본 뒤 미소를 지었다.“예전보다 살도 좀 올랐고 더 예뻐졌네. 그런데 강 대표님은 어떻게 널 찾은 거야?”유강후는 온다연을 끌어당기며 차갑게 말했다.“그건 혜린 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온다연은 비록 과거를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임혜린에게는 왠지 모를 친근함과 믿음이 느껴졌다. 그녀는 유강후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혜린 씨는 제 예전 친구예요. 물어보고 싶은 게 아직 많단 말이에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유나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일단 옷부터 골라요. 저녁 만찬에 가야 하니까요.”네 명의 디자이너들은 각자 자신들의 야심작이라 할 만한 고급 맞춤 의상들을 대거 가져왔고 임혜린은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의 고급 라인 옷들을 준비해 왔다.온다연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은 것은 임혜린이 가져온 개량식 치파오였다. 소녀다운 색감과 디자인이 돋보였고 청초하고 우아하면서도 젊음이 느껴졌다.특히 모든 소재가 H국 전통 방식의 순수 핸드메이드 원단으로 제작되어 가벼우면서도 부드러워 마치 시 한 편을 몸에 두른 듯한 감각을 주었다.온다연은 한 벌 한 벌을 애지중지하며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녀는 임혜린이 준비한 이번 시즌뿐만 아니라 다음 시즌의 신상품들까지 모두 예약했다.물론 이것이 온다연의 사적인 친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만큼 치파오의 청순하고도 낭만적인 디자인이 여느 소녀라도 빠질 만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다른 디자이너들의 작품도 적지 않은 호응을 얻었다. 비록 임혜린의 작품만큼 돋보이지는 않았지만, 온다연은 그들이 가져온 몇몇 신상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그 브랜드들에 대해 좋은 인상을 느끼게 되어 다음 시즌의
임혜린은 빠르게 감정을 정리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두 사람은 똑같이 역겹네요. 하지만 한이준이 와도 난 두렵지 않아요. 이제 한이준에게 빚진 돈도 없으니 날 어쩌지 못할 거예요. 왕이라도 된 줄 아는 건가요? 법 위에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네요.”유강후는 차갑게 응수했다.“정말 그럴까? 만약 두 살짜리 아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네?”임혜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유강후! 뒷조사라도 한 거야?”유강후는 나지막하게 말했다.“임혜린, 난 지금은 너랑 말싸움할 시간 없어. 그리고 다연이는 과거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해. 난 다연이가 그때의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걸 원치 않아. 진유나로 살면서 단지 작은 오해로 인해 잠시 헤어졌던 것만 알면 된다고! 그러니 쓸데없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마.”그때 온다연이 다가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임혜린을 바라보았다.“저... 분명히 아는 분인 것 같아요. 그런데 왜인지 떠올려보려고 하면 머리가 아프네요.”온다연을 보던 임혜린의 눈가가 붉어졌다.그녀는 몇 년 전 온다연이 유강후에 의해 나은별과의 거래로 희생당해 비극적인 일을 겪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임혜린은 분노로 칼을 들고 유강후의 집을 몇 번이나 찾아가 그를 해치려 했다.임혜린에게 유강후는 깊이 증오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며칠 전 강씨 가문으로부터 디자이너로 초대를 받은 후, 유강후가 새 연인을 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온다연이 겪었던 고통이 떠나지 않았다.오늘 이 자리에 온 것도 유강후를 사람들 앞에서 망신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녀의 가장 소중했던 친구를 파멸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임혜린은 온다연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진실을 그의 새로운 부인에게 폭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부인이 바로 온다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임혜린은 온다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맞아! 우리는 대학 동창이자 단짝이었어. 모든 걸 터
저택의 대형 홀은 작은 카펫에서부터 소파, 벽화, 시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고급 골동품이었다.평소 명품을 많이 접하는 디자이너들조차도 함부로 만지지 못하고 혹시라도 고가의 골동품을 파손해 소송에 휘말릴까 걱정했다.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골동품이 아니라 이 옷들의 주인에게 쏠려 있었다. 이번에 가져온 옷들이 강씨 가문의 미래 안주인을 위한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강씨 가문의 안주인은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화교 여성들 사이에서 패션을 선도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를 고객으로 잡는다는 것은 곧 서양의 아시아계 여성 패션 시장을 장악하는 것과 같았다.모든 디자이너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강씨 가문은 예의 바르게 최고급 얼그레이 티를 준비해 대접하며 약 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미래 그룹의 총수와 그의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키가 크고 잘생긴 동양 남성, 그리고 그의 등에 업힌 작고 귀여운 소녀였다.온다연은 안에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그의 등에서 내려오려 했으나, 유강후는 내려주는 것을 거부하고 소파까지 걸어가고 나서야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마치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인 듯 애지중지하는 모습이었다.하지만 디자이너들은 작은 소녀가 유강후의 부인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그의 여동생 정도로 여겼다.그런데 소녀가 그들 앞으로 불려 와 옷을 고르기 시작하자, 디자이너들은 비로소 그녀를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가까이에서 보니 그녀는 마치 그림에서 나온 듯한 정교한 미모를 자랑하는 동양 미인이었다. 피부는 하얗고 매끄럽고 만지면 촉촉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디자이너들은 이런 동양 미인은 처음 보는지 잠깐 넋을 잃었다.그때 화장실에 갔던 디자이너 중 한 명이 돌아와 그녀를 보더니 갑자기 소리쳤다.“다연아!”그 소리에 모든 사람들의 정신이 돌아왔다.그 디자이너는 온다연에게 달려가 그녀를 껴안고 울면서 말했다.“너 아직 살아 있었구나! 정말 살아 있었어! 다연
온다연은 고개를 들며 눈에 잠시 놀라움이 스쳤다.“어떻게 아셨어요?”유강후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여기는 북아메리카예요. 제가 알고 싶으면 알아내지 못할 게 없죠.”그는 천천히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살짝 흔들리는 눈빛을 숨기려는 듯 말을 이었다.“유나 씨가 계속 염지훈 씨에게 미안해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더라고요. 그럴 필요 없어요. 염지훈 씨는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이미 다른 여자분과 함께하고 있었어요.”온다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걸 그렇게 자세히 어떻게 아셨어요?”유강후는 가볍게 기침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여기 소문 빨라요. 화교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졌거든요.”온다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유강후가 덧붙였다.“어쨌든 그 사람은 유나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깊고 헌신적인 타입은 아니에요. 그러니 심리적으로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이런 건 저한테 맡기면 돼요.”온다연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 문제를 명확히 짚어내지는 못했다. 염지훈을 변호하고 싶었으나 눈앞의 질투심 많은 유강후가 화낼까 봐 조심스러웠다.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염지훈 씨가 어떤 사람이든, 지난 몇 년간 제 곁에서 많은 도움을 준 건 사실이에요. 혼담도 양쪽 부모님이 동의한 거라, 파혼하더라도 서로 체면도 명분도 지킬 수 있도록 신중히 상의해야 해요.”하지만 유강후의 생각은 달랐다.염지훈은 온다연이 법적으로 유강후의 아내였던 시절에 그녀를 데리고 도망친 사람이었다. 그로서 그건 아내를 빼앗긴 것과 다름없었다.게다가 염지훈은 H국에서 온다연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이름까지 바꿔 그녀를 진씨 가문으로 돌려보냈다.3년 동안 유강후는 그녀가 세상에 없는 줄로만 알고 하루하루를 죽은 듯 살아왔고,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버티게 한 유일한 감정은 복수였다.유강후의 성격을 생각하면 첫날부터 염지훈을 철저히 무너뜨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비를 베풀었다고 볼 수 있었다. 유일하게 목
저택은 고목들이 하늘을 가릴 만큼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고 곳곳에 자리한 중식 건축물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면서도 철저한 관리 덕분에 오히려 그 고풍스러움이 더욱 돋보였다.진씨 가문도 화교였기 때문에 진유나로 살고 있는 온다연은 이런 것들에 나름 익숙했다.강씨 가문의 저택은 수집품과 골동품이 넘쳐났고 그야말로 대형 박물관을 열어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역사 교과서에서나 봤을 법한 유물들까지 눈에 띄었다.“대단하네요. 강 대표님 댁은 정말 박물관 같아요.”온다연의 감탄에 유강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일제강점기 때 저희 가문이 북아메리카로 이주해 그곳에서 기반을 다졌어요. 이후 저희 가문의 어른이신 강양호 선생께서 H국으로 돌아가 최초로 비행사가 되셨죠.”“당시에 최초로 비행기를 조종하셨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당시 고국의 발전을 돕기 위해 귀국했지만 시대적 한계로 결국 북아메리카에 머무르셨습니다. 외조모님도 유명한 외교관으로 북아메리카와 H국의 협력에 크게 이바지하셨고 나중에는 조국의 미래를 위해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셨어요.”온다연은 그 이야기에 숙연해졌다. ‘이런 분들이 계셨기에 강씨 가문이 오늘날의 위치에 오른 거구나.’“외조모님은 지금 어떻게 지내세요?" 온다연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물었다.유강후는 그녀를 안정적으로 업고 걷다가 잠시 대답을 미뤘다. 그녀가 입에 가져다주는 과일 주스를 한 모금 마신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너무 시고 달아서 별로예요.”온다연은 그의 불평을 무시하고 다시 입에 주스를 가져다 대며 한 모금 더 마시게 했다.“아직 답 안 하셨어요. 외조모님은요?”유강후는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돌아가셨어요. 생전 경원시에 내게 몇 채의 집을 남기셨고 제가 H국에서 자리 잡기를 바라셨거든요. 제 아이도 그곳에서 교육받고 뿌리를 내리길 원하셨어요. 그래서 우리 결혼식도 H국에서 한 번 더 올리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온다연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저도 사실 돌아가 보고 싶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