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이 사라진 것을 알자마자 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며 소리쳤다.“다 아빠 때문이에요! 아빠가 겁만 안 줬으면 도망가지 않았을 거라고요!”유강후도 속이 타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네가 울고불고 소란만 피우지 않았으면 달아났겠어?”아이는 그 말에 더욱 화가 나서 갑판에 주저앉아 버릇없이 울며 떼를 썼다.“내가 찾았단 말이에요! 아빠가 못 찾은 걸 내가 찾았는데 아빠가 겁줘서 도망가게 했잖아요! 아빠가 책임요! 돌려달라고요!”“모두 엄마가 있는데 나만 없었어요! 겨우 찾았는데 아빠가 또 놓쳐버렸잖아요! 아바가 무능해서 그런 거예요!”유강후는 그녀를 쫓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아이가 계속 소란을 피워 참을 수가 없었다.하여 화를 억누르며 으름장을 놓았다.“지금 찾으러 갈 거야. 너는 여기 위층에 가서 기다려! 네가 울어서 도망간 거니까 못 찾으면 너 바다에 던져버릴 줄 알아!”이 말을 들은 아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나도 같이 갈래요!”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넌 따라오면 발목만 잡을 뿐이야!”아이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맨날 사진만 들여다보고도 못 알아봤으면서! 내가 먼저 찾지 않았으면 또 놓쳤을 것 아니에요?! 근데 내가 발목을 잡는다고요? 이렇게 멍청해서 어떻게 돈을 번 건지 모르겠네요!”둘은 서로의 핑계를 대며 초조하게 온다연을 찾아 나섰다.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마치 이 세상에서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이었다.그도 그럴 것이 그 시각 온다연은 이미 진씨 가문 헬리콥터를 타고 진씨 가문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그날 크루즈에는 많은 손님들이 있었고 크고 작은 헬리콥터들이 이착륙을 반복하고 있었다.진씨 가문의 헬리콥터는 그중 하나로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았다.온다연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질 듯한 기분으로 벽에 기대며 숨을 골랐다.가슴이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멀리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거대한 크루
바닷바람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 방 안 가득 시원함이 가득 찼다.공기에는 안심이 준비해준 라벤더 아로마의 은은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온다연은 안심과 진수현을 떠올렸다. 그들은 온다연을 특별히 아껴주며 사랑으로 감싸주었다.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듯이 노력했다.‘이런 부모님이 곁에 있는 이상 과거의 기억을 잃었다면 잃은 대로 괜찮지 않을까...’이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서서히 잠에 들었다.꿈속에서 그녀는 전통 스타일로 꾸며진 정원에 살고 있었다.마치 설날처럼 느껴졌고 창밖에는 하늘 가득 불꽃놀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손에는 커다란 봉투를 들고 있었다.그리고 키가 큰 남자가 그녀를 품에 안으며 낮고 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다연아, 너는 내 거야. 그리고 너는 오직 나만의 것이야.”“말해 봐. 내가 누구인지.”그 남자의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몸을 떨리게 했고 부끄러움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그러나 남자는 온다연을 놓아주지 않았고 그녀를 더욱 부끄럽게 만드는 행동을 했다.결국 그녀는 숨죽인 채로 나지막이 속삭였다.“당신은... 내 남자예요...”꿈속에서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부끄러워했지만 남자의 끊임없는 스킨쉽을 이겨낼 수 없었다.그의 손길 아래 온다연은 마치 물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렸다.그러나 어느 순간 꿈의 장면이 바뀌었다.모든 것이 사라지고 눈송이가 휘날리는 추운 풍경으로 바뀌었다.얼음장 같은 바람이 살을 에는 듯했고 하늘은 잿빛으로 흐려 있었다.그녀는 복도의 입구에 서 있었고 복도 끝에는 작은 아이가 서 있었다.그 아이는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고 추운 겨울에도 맨발이었다. 작은 발은 어느새 새빨갛게 얼어있었다.아이의 손에는 더 작은 아이의 손이 잡혀 있었다.더 작은 아이는 온다연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그 아이 뒤에 숨었다.그리고 작은 머리만 빼꼼히 내밀어 그녀를 쳐다보았다.온다연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곧 마치 무엇에 이끌리듯 그녀는 그들에게 다가갔다.그녀를 본 작은 아이는 이내 눈
매우 두려운 듯 작은 아이는 말을 하다 멈추고는 옆에 있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그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아이는 용기를 내어 다시 말했다.“나, 나도 그냥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어요...”눈이 시큰해지며 온다연의 가슴은 무겁게 내려앉았다.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돌덩이가 얹힌 듯 답답하고 아팠다.두 아이를 품에 꼭 안자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내가 엄마야. 너희는 모두 내 아이들이야...”그때,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연아!”동시에 두 아이가 갑자기 사라졌다.그녀의 품은 텅 비어 있었고 남은 건 온 하늘을 덮은 눈송이뿐이었다.온다연은 다급히 소리쳤다.“아가야, 어디 있어? 아가야!”그녀의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메아리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다연아, 일어나!”“다연아!”놀란 온다연이 벌떡 깨어났다.눈앞에는 염지훈의 커다란 얼굴이 보였다.그가 그녀의 이마를 만지며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열은 없는데 땀이 많이 났네.”온다연은 아직 꿈속에 머물러 있는 듯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땀이 젖은 머리카락이 하얀 피부에 들러붙어 그녀의 흑발과 백옥 같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염지훈은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 없다는 듯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 고개를 숙였다.그러나 온다연은 본능적으로 그의 행동을 피했다.그러자 염지훈의 눈에 순간적으로 어두운 빛이 스쳤다.3년이 지났지만 온다연은 여전히 염지훈의 스킨쉽을 거부하고 있었다.‘기억은 희미해졌다고 하지만... 왜 여전히 날 거부하는 거지?’그는 속으로 생각했다.‘그래도 괜찮아. 이제 곧 약혼식을 올릴 거야. 그 이후엔 다연이도 더 이상 나를 거부할 이유가 없겠지.’“또 악몽 꿨어?”그는 손에 든 휴지로 그녀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물었다.“요즘은 한동안 악몽 안 꿨잖아.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온다연은 염지훈의 손길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들어왔어요?
염지훈은 온다연의 손을 가볍게 잡고 그녀의 부드럽고 섬세한 손가락을 천천히 어루만졌다.“내일이면 북아메리카로 떠나야 해.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어서 말이야. 이번엔 한 달 정도 걸릴 것 같아.”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돌아오면 더 강한 힘을 가질 거야. 그래야 다연이를 아내로 맞을 수 있으니까.”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일이 잘 마무리되면 빨리 돌아오고요.”염지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나 걱정해 주는 거야? 혼자 가는 게 불안한 거지?”온다연은 조용히 ‘네’ 하고 대답했다.곧 약혼식을 앞두고 있었기에 온다연은 염지훈을 걱정하는 건 의무이자 책임처럼 느껴졌다.염지훈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상담은 계속 받아야 해. 내가 없더라도 게으름 피우면 안 돼. 누군가 확인하러 갈 거니까.”“그리고 긴장을 풀게 해주는 최면 치료도 빠뜨리면 안 돼.”과거의 기억을 잊게 하기 위해 최면을 선택했던 건 매우 힘든 결정이었다.당시 온다연은 심각한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고 자신을 부정하며 누구도 믿지 못했다.심리 치료사는 몇 번의 철저한 검사를 거쳤고 매번 나온 결론은 명확했다.그녀가 과거의 기억에 계속 빠져 있다면 자신을 더욱 심하게 해치거나 새로운 인격이 생겨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지금 생각해보면 과거를 잊게 한 건 매우 올바른 선택이었다.현재의 온다연은 새로운 정체성에 완벽히 적응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안정된 상태였다.게다가 그녀는 관심 있는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었다.온다연의 그림은 국제무대에서 여러 차례 금상을 받으며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신비로운 천재 소녀 화가로 불리고 있었다.금융 분야에서도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이런 온다연만이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었고 과거의 슬픔 속에서 울고 있는 존재로 남지 않을 수 있었다.최면 이야기가 나오자 온다연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
그 시각, 크루즈에서는 손님들이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지만 유강후는 여전히 찾고자 하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온다연은 마치 배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결국 두 부자는 지친 모습으로 갑판에 앉아 멀어지는 헬리콥터를 바라보았다.작은 아이는 화가 나서 콧김을 내뿜으며 말했다.“정말 쓸모없네요! 내가 간신히 찾아냈는데 아빠가 금방 놓쳐버렸잖아요.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조차 못 찾다니... 창피한 줄 알아요!”“차라리 집에 돌아가서 농사나 지어요! 진짜 너무 화나요!”유강후는 온몸에서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며 헬리콥터를 가만히 응시했다.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때 이권이 다가와 오늘의 손님 명단을 전부 유강후에게 건넸다.“도련님, 모든 명단은 여기 있습니다. 남성 손님은 전부 제외했고 사모님 연령과 체격에 맞는 여성 손님은 총 101명입니다.”유강후는 일어나 몇 걸음 걸어 난간으로 다가가 멀리 보이는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았다.저곳이 바로 대진 그룹의 정원이라는 소문이 들리는 곳이었는데 진수현이 그의 부인 안심을 위해 조성한 사유 정원이었다.그곳에서 본 안심은 온다연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근데 왜 다연이가 딸이 아닌 거지? 분명 어딘가 잘못된 점이 있을 거야.’유강후는 저 멀리 반짝이는 불빛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조사할 필요 없어. 오늘 배에 탑승한 진씨 가문의 명단을 불러봐.”이권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시에 따라 진씨 가문의 명단을 읽기 시작했다.하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진수현은 진씨 가문 사람들을 너무 철저히 보호하고 있었다.유강후는 이곳에 온 지도 오래되었고 신국의 다른 가문 정보는 대부분 손에 넣었지만 진씨 가문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는 전혀 얻지 못했다.진씨 가문의 실종된 딸을 찾았다는 소식만 있었을 뿐 그녀의 사진조차 본 적이 없었다.그러나 온다연이 오늘 밤 이곳에 나타난 건 분명했다.그녀는 이 재벌가의 딸일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주먹을 꽉 쥐더니 아이의 눈가가 붉어졌다.“역시 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아요! 이제는 내 분유까지 줄이겠다고요?”아이의 똑똑함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였지만 기본적으로 아직 어린아이였다.특히 우유에 대한 집착이 심해 매일 밤 200mL를 마셔야만 잠이 들곤 했다.유강후가 분유를 끊겠다는 말에 아이는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울음을 터뜨렸다.아이가 울며 상심해 하는 모습을 보자 유강후는 마음이 약해졌다.어렸을 때부터 손수 키운 아이였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그저 친자식 같았다.특히 지난 3년 동안 둘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기에 보통의 부자 관계보다 훨씬 더 가까웠다.그는 아이를 안아 의자에 앉히고 하인이 건네준 우유를 받아 아이 앞에 내밀었다.“마셔요, 작은 도련님.”아이는 한동안 거짓 울음을 흘리다 결국 우유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이내 아이는 우유병을 받아 들고 크게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말했다.“아빠는 사랑에 빠져서 많은 걸 제대로 못 보고 있어요.”그러고는 얼굴을 약간 들리더니 당돌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 보석 가짜예요. 근데도 그 사람은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그걸 차고 있었어요.게다가 값비싼 장신구들과 함께 말이에요. 그건 그 보석이 엄청나게 중요한 물건이라는 뜻이죠. 평소 절대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것... 이해돼요?”“지금 분명 미친 듯이 찾고 있을 거예요!”“하지만 배로 찾아오진 않았어요. 그건 아빠를 두려워한다는 뜻이죠!”유강후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만족감을 내비쳤다.‘쪼끄만 녀석이 또 조금 더 똑똑해졌군. 잘 키워낸다면 양씨 가문은 앞으로도 걱정이 없겠어.’“혼수 얘기는 무슨 뜻이야?”아이는 손에 든 우유병을 흔들며 말했다.“아빠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했어요. 혼수는 크루즈 전부와 이 넓은 바다라고 했고요. 나랑 약속했어요. 그 약속은 깨지 않을 거예요!”유강후의 마음 한편이 찢어지는 듯했다.이 정도 재산이 뭐가 대단하겠는가.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준다고 해도 그녀가 받지 않을까 봐 두려
눈앞의 남자는 압도적인 기운을 풍겼다.깊고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끝없는 심연을 품고 있는 듯했고 온다연은 그 시선에 빠져드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그녀는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가장 소중한 그 보석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이 고통은 이 남자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그래서 크루즈로 다시 와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도 망설임 없이 헬리콥터를 준비하게 했다.온다연은 한 걸음씩 그의 쪽으로 다가갔다.낮의 밝은 빛 속에서 남자의 모습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고급 맞춤 수트가 그를 더욱 고귀하게 보이게 했고 뚜렷한 이목구비는 마치 신이 빚어낸 최고의 작품 같았다.단순히 앉아 있을 뿐이었지만 그는 마치 온 세상을 발아래 둔 듯한 위압감을 풍겼다.온다연은 심장이 떨리는 걸 느끼며 그를 바라봤다.무섭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그녀가 본 남자 중 가장 잘생긴 사람이었다.그때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온다연과 시선을 마주쳤다.그의 차갑고 깊은 눈빛이 그녀를 꿰뚫는 순간, 온다연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숨이 막힐 것 같았다.남자와 가까워질수록 온다연은 더 답답함을 느꼈다.그리고 그가 왜 그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 눈빛은 마치 자신을 작은 사냥감으로 보는 것 같았는데 거대한 맹수처럼 그가 언제든 달려들어 삼켜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어젯밤 온다연은 인터넷을 뒤져 이 남자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 했으나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오아시스 그룹이 세계 해양 자원 개발의 선두 기업이라는 사실과 수많은 크루즈와 원양 항로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 정도뿐이었다.막대한 자산 규모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그들의 대표, 즉 이 남자에 대한 정보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온다연은 그의 책상 앞까지 가지 못하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녕하세요. 물건을 찾으러 왔습니다.”유강후는 그녀를 가만히
곧 온다연은 가방에서 한 장의 수표를 꺼내더니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이건 M 국 은행의 국제 수표입니다. 보상이 필요하다면 금액은 원하는 대로 적으세요.”그 커다란 액면의 국제 수표를 본 순간, 유강후는 그녀가 진수현의 딸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이런 수표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수천억 원 이상의 자산을 가진 대기업의 최고 인사들뿐이었다.‘역시 그랬구나.’오랜 시간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지만 단서 하나 찾을 수 없었던 이유가 명확해졌다.‘다연이가 진수현의 딸이었다니!’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정말 날 기억하지 못하겠어?”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온다연의 모든 행동은 방어적이었다.그것도 완전히 낯선 사람을 대할 때 보이는 방어였다.유강후는 확신했다. 온다연은 정말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가슴이 누군가 칼로 깊게 도려낸 듯 아팠지만 그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억누르며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겁주지 말아야 해.’하지만 손에 쥔 펜을 너무 세게 잡아 펜이 약간 휘어질 정도였다.“다연아, 나 유강후야.”“유강후. 설마 너 정말 날 기억 못 한다는 거야?”‘유강후?’이 세 글자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온다연의 의식을 깊게 파고들었다.‘유강후!’그 이름이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하지만 이름과 관련된 무언가를 떠올리려고 하면 머릿속이 터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그 어떤 통증보다도 극심했다.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내장까지 꼬이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휘감았다.온다연은 고통스러운 듯 신음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그러자 유강후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그는 바로 그녀에게 달려가 안으며 외쳤다.“다연아!”익숙하고 차가운 스노우 우디향과 담배의 은은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그러나 그 순간, 온다연의 두통은 더욱 심해졌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너무 아파요!”“아파!”“건드리지 마요! 저리 가
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세월의 흔적이 느껴져서 그런지 독특한 분위기가 아주 멋있네요. 북아메리카에 이런 집이 많지 않을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마음에 들면 이곳으로 이사 올까요? 여기랑 연결되어 있는 별장도 샀어요. 나중에 뚫어서 유나 씨가 좋아하는 취향에 맞게 인테리어 해도 좋아요.”온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괜찮아요. 이런 곳은 아직 낯설어서요. 저는 강씨 가문 저택이 더 좋아요.”그녀는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일이 마무리되면 H국으로 갈까요? 한번 가보고 싶어요. 어쩌면 기억을 조금이라도 되찾을 수 있잖아요.”유강후는 말없이 걷다가 별장 입구에 이르러서야 입을 열었다.“도착했네요.”문밖에는 승용차 두 대가 주차되었고 두 명의 경호원이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임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동현. 얼른 내려와. 올라가면 안 된다고 했지?”말이 끝나는 동시에 하얗고 작은 아이가 온다연에게 달려왔다.그는 온다연을 보자마자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누나, 안녕하세요.”임동현은 귀여운 피카츄가 그려진 옷을 입고 있었고 흰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특히나 맑고 생기 넘치는 눈은 임혜린을 똑 닮았다.온다연은 한눈에 임혜린의 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그녀는 몸을 숙여 아이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네가 동현이구나?”임동현은 피카츄 인형을 안은 채 또박또박 말했다.“맞아요. 누나 너무 예뻐요. TV에 나오는 사람보다 훨씬 더 예뻐요.”온다연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보드라운 얼굴을 쓰다듬었다.“말을 엄청 잘하네?”이때 임혜린이 다가왔다.“왔어?”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면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어찌나 체력이 넘치는지 나 어릴 때랑 판박이라니까?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조용하게 앉아 있는 법부터 가르쳐. 그렇지 않으면 다리가 아플 정도로 뛰어다녀야 해.”임혜린은 유강후를 힐끗 보고선 퉁명스럽게 말했다.“여기 정말 안전하죠?
온다연은 유강후를 째려보고선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그러나 몇 미터 달리지도 못하고 곧바로 유강후에게 품에 잡혔다.“왜 뛰어요?”섹시하고 매력적인 허스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온다연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거 놔요.”유강후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 들어 올려 옆에 있는 긴 의자에 앉힌 뒤 돌아섰다.“올라와요. 업어줄게요.”온다연은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당장이라도 업히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지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괜히 투덜거렸다.“걸어갈 거예요.”온다연이 질투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린 유강후는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업고 가면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얼른 업혀요.”자신의 질투심을 들켰다는 생각에 온다연은 얼굴을 붉히며 돌아섰다.“걸어가도 되다니까요? 여자들이 쳐다보게 혼자 걸어요. 어차피 강후 씨도 그런 걸 즐기잖아요.”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돌아서서 그녀의 작은 얼굴을 꼬집었다.“질투하는 거예요?”온다연은 입을 삐죽였다.“아니거든요?”그러자 유강후는 손을 뻗어 그녀의 다리를 감싸며 안아 올렸다.온다연은 그의 품에 안긴 채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비틀었다.“얼른 놔요.”유강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돌변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옆에서 사람들의 작은 비명과 한숨 소리가 들렸지만 유강후는 멈추지 않았다.어느새 얼굴이 터질 듯 빨갛게 달아오른 온다연은 계속 유강후를 밀어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거의 숨쉬기 힘들 정도가 되고서야 유강후는 비로소 손을 뗐다.온다연은 얼굴이 붉어지고 입술마저 부어올랐다.“미쳤어요?”유강후는 그녀의 붉은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러면 사람들이 유나 씨가 내 아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온다연은 얼굴이 더 빨개진 채로 말을 더듬었다.“아내라뇨? 우린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유강후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질투쟁이.”
직원은 백인 여성이었는데 온다연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채로 쭈뼛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죄송해요.”온다연은 따지기 귀찮은 듯 물건을 챙긴 후 유강후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유강후의 눈에는 웃음이 가득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뒤따라오던 이권이 참다못해 온다연이 전화하는 틈을 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도련님, 참지 말고 그냥 웃으세요.”이권은 방금 온다연이 내뱉은 소유욕 넘치는 말이 얼마나 큰 효과를 불러올지 잘 알고 있었다.유강후와 오랜 시간 일한 사람들은 앞으로 며칠 동안 무탈하게 지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아니나 다를까 유강후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요즘 다들 일을 너무 잘하니까 마음이 놓여. 이번 달 월급은 두 배야.”이권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유강후가 물었다.“너도 다연이가 한 말을 들었지? 무슨 뜻일까? 질투하는 걸까? 다른 사람이 날 가로챌까 봐 걱정하고 있는 게 맞지?”유강후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부드러움이 가득했다.이권은 웃으며 그의 말에 답했다.“맞습니다. 도련님을 향한 다연 씨의 애정이 더욱 깊어진 것 같습니다. 많이 좋아하네요.”유강후의 눈가에 떠오른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더니 마치 온다연을 잡아먹을 듯 애정 어린 부드러운 눈길도 뚫어져라 바라봤다.“권아, 솔직하게 말해봐. 나 정도면 잘생긴 편이지?”“도련님이 못생겼다면 이 세상에는 잘생긴 남자가 없을 겁니다.”유강후는 올리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네. 앞으로 다연이 선물을 준비할 때 예쁘게 생긴 거로 골라.”말은 이렇게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약간의 자부심을 느꼈다.한편으로는 자신이 잘생긴 걸 천만다행으로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외모를 중요시하는 온다연의 관심을 받는 건 거의 불가능했으니까.이때 통화를 마친 온다연이 다가왔고 이상해진 분위기를 보고선 미간을 찌푸렸다.“왜요?”이권은 웃으며 답했다.“아무것도 아닙니다. 유나 씨가 예쁘게 생긴 걸 좋아한다는
“신경 꺼요.”임혜린은 여전히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내가 낳은 아들이고 한이준이랑 전혀 상관없는 아이예요. 그래서 도와줄 거예요? 말 거예요?”유강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임혜린은 코웃음을 쳤다.“싫다는 뜻이죠?”곧이어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다연아, 실은 너한테도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친구가 있어. 이름은 주...”“임혜린!”유강후는 그녀의 말을 가로채며 표정이 어두워졌다.“다연이 친구인 걸 봐서 이번 한 번은 도와줄게. 하지만 다연을 속이려고 없는 얘기를 만들어낸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임혜린은 비웃었다.“그쪽이랑 실랑이할 시간 없으니까 얼른 이쪽으로 사람 보내요. 그리고 집은 인적 드문 곳으로 알아봐 줘요. 아들이랑 한동안 조용히 살고 싶어요. 지금 당장 알아봐 줘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말했다.“조금 있으면 데리러 갈 거야. 성당 근처에 별장 한 채가 있는데 당분간은 거기서 지내.”“내가 그쪽을 어떻게 믿어요. 그 별장 근처에 한이준이 살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다연아...”임혜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는 전화를 끊었다.그러자 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렸다.“친구? 저한테도 그런 친구가 있었어요?”유강후는 마음속으로 임혜린을 수백 번 욕했지만 표정은 오히려 담담했다.“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딱 봐도 도와주길 바라서 지어낸 얘기잖아요.”온다연은 임혜린이 걱정되어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혜린한테 정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가봐야겠어요.”유강후는 단호하게 말했다.“너무 늦었어요. 오 집사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오늘은 이만 들어가요. 어차피 내일 성당 근처 별장으로 이사 올 텐테 뭘 걱정해요. 내일 일찍 만나러 가요.”온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안 돼요. 지금 마음이 심란할 거예요. 친구도 별로 없을 텐데 저라도 가봐야죠.”유강후는 온다연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았다. 하는 수 없이 이권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당장 임혜린 모자를 데리러 갈 사람을 준비하라고 명
유강후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잡더니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용서하기 어려운 일은 어떤 거죠?”온다연은 단호하게 말했다.“나은별 씨와 정말 그런 사이였다면...”온다연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잡더니 질투 나는 듯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친구라는 사실만으로도 괴로워요. 만약 두 사람이 예전에 사랑하던 사이라면 다시는 강후 씨를 만나지 않을 거예요.”유강후는 순종적이고 부드러운 온다연의 모습에 가슴이 간지러워져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다.“그게 다예요?”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둘 사이의 오해였다면 며칠은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나은별 씨와 사랑하던 사이라면...”“쳇.”온다연은 대뜸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고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여전히 분노의 기색이 엿보였다.“일단 그 여자를 때려눕힌 다음 강후 씨를 던져버릴 거예요.”말이 끝나자마자 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잡고 격렬하게 키스했다.차 안의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자 운전 기사는 조용히 칸막이를 내렸다.그렇게 두 사람 모두 감정이 북받쳤고 한참 후에야 흥분을 가라앉혔다.온다연은 유강후의 가슴에 기대어 거친 숨을 내쉬며 그의 심장 박동을 듣고 있었다.그녀의 가는 허리를 잡고 있던 유강후는 마치 온 세상을 움켜쥔 듯 꼭 껴안고 놓지 않았다두 사람은 서로의 숨소리와 심장박동을 조용히 느꼈다. 마치 이 세상에 그들만 남은 것처럼 말이다.한참 후 온다연이 속삭였다.“정말 신경 안 쓸 거예요?”“그래도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잖아요. 같이 지낸 정이 있을텐데...”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온다연의 허리를 세게 꼬집었다.“그 사람 얘기는 앞으로 꺼내지 마요. 재수 없으니까.”강씨 가문 저택에 다다를 무렵 온다연의 핸드폰이 울렸다.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임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이사 갈 거야. 강후 씨한테 이사를 도와줄 사람이 있는지 물어봐 줘.”“지금 살고 있는 곳이 좋다며? 이웃들도 친절하고
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차에 올라탔다.온다연은 걱정스러운 듯 창밖을 내다보며 조용히 말했다.“경호원을 많이 데려왔던데 혜린한테 무슨 짓을 저지르는 건 아니겠죠?”유강후는 그녀를 무릎에 앉히더니 얼굴에 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나지막이 말했다.“아닐 거예요. 이준이가 혜린 씨를 엄청 오랫동안 찾았거든요. 함께 보내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리고 혜린 씨도 손이 매워 보이던데 아마 이준이가 많이 맞을걸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온다연은 그의 목에 팔을 감싸더니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불만스럽게 말했다.“나은별이라는 사람 너무 짜증 나요. 윤희 언니보다 훨씬 더요. 강후 씨의 친구만 아니었다면...”온다연은 부드러운 손으로 유강후의 목을 쿡쿡 찔렀다.“기회를 줄 테니까 우리가 예전에 어땠는지 솔직하게 전부 다 말해봐요. 풀 수 있는 오해라면 저도 따지지 않을게요.”온다연은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마요. 언젠가 강후 씨가 거짓말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엄청 화가 날 것 같아요.”개의치 않는다는 말은 거짓말이다.3년 전에 나은별과 자신을 바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매우 힘들었다.물론 그사이에 오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어떤 오해가 있더라도 이러한 행동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3년 전에 정말 나은별 씨와 나를 맞바꿨어요?”유강후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온다연의 작은 손을 잡더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나은별이 하는 말을 다 믿어요?”온다연은 입을 삐죽이며 기분 언짢은 티를 냈다.“만약 제가 지훈 씨와 강후 씨를 맞바꾼다면 어때요?”유강후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상황이 복잡한 건 맞지만, 결코 나은별이랑 바꾼 적은 없어요.”온다연은 마음이 괴로운 듯 답답함을 느꼈다.“그런데 혜린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해줬거든요.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너무 아팠어요. 분명 진짜일 거예요.”유강후는 심호흡을 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듣고 싶어요? 그럼 절대 화
한이준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임혜린의 다리까지 묶었다.화가 나서 정신을 잃을뻔한 임혜린은 입을 벌려 한이준의 어깨를 세게 깨물었다.곧 피가 스며 나왔지만 한이준은 통증을 못 느끼는 것처럼 임혜린이 자신을 물도록 내버려두었다.곧이어 그는 차에 도착했다.한이준은 막무가내로 임혜린을 차에 밀어 넣고 옆에 앉았다.임혜린은 넥타이로 묶인 채 몸부림쳤고 어느새 손목이 빨갛게 부어올랐다.빨개진 손목을 본 한이준은 한숨을 내쉬었다.“임혜린, 성깔은 아직도 여전하구나? 조금만 물러서는 것도 안 돼?”이때 차에 시동이 걸렸고 한이준은 넥타이를 풀기 위해 손을 뻗었다.손이 자유로워진 임혜린은 가장 먼저 그의 뺨을 때렸다.“이준 씨는 처음부터 끝까진 나쁜 사람이었어요. 평생 외롭게 살길 바라요.”그러더니 재빨리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한이준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차 멈춰.”다행히 방금 출발한 덕분에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임혜린은 관성에 이끌려 몇 걸음 달리며 안정을 되찾은 후 빠르게 육교로 올라갔다.한이준이 달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다리 위에 있었다.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임혜린, 좋은 말로 할 때 돌아와.”‘차에서 뛰어내리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외진 곳이라 차가 많지 않아서 망정이지 임혜린의 행동은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다름없었다.임혜린은 뒤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반대편으로 달려가 곧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경호원이 뒤따라오며 물었다.“대표님, 쫓아갈까요?”한이준은 어두운 눈빛으로 임혜린이 사라진 방향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집 주소는 아직이야?”“알아낸 바로는 한인타운의 재송 아파트에 거주 중인 것 같습니다. 나름 고급 단지입니다.”“그리고?”경호원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현재 도우미 두 명과 함께 단독 주택에 살고 있습니다. 주말에는 동생인 임동규 씨와 시간을 보내고 현재 조사된 바에 따르면 남자 친구는 없는 걸로 보입니다. 다만 경제적 조건과 사회적 지위가 좋은 남자들에게 끝없이 구애를
툭하는 소리와 함께 임혜린의 핸드폰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다행히 고장 나지 않았고 ‘내 사랑’이라는 사람의 전화는 여전히 수신으로 표시되었다.한이준은 너무 화가 나서 핸드폰을 발로 찼고 핸드폰은 벽에 부딪히며 화면이 깨졌다.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임혜린은 한이준을 노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왜 남의 핸드폰을 발로 차요? 미쳤어요?”한이준은 거친 숨을 내쉬며 이를 악물었다.“임혜린, 그동안 남자를 얼마나 만났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혜린은 그의 뺨을 내리쳤다.“내가 남자를 만나든 말든 그쪽이랑 뭔 상관이냐고요. 미친 X. 꼴도 복 싫으니까 얼른 나가요.”이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화면이 깨져 받을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위에는 ‘내 사랑’이라는 세글자가 떠올랐다.임혜린은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고 더 이상 한이준과 이곳에서 실랑이를 벌이며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그녀는 한이준을 밀치고 밖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밖에는 수많은 경호원이 대기하고 있었다.문에 다다르자 임혜린은 캐비닛에 있는 도자기를 쥐더니 벽을 향해 세게 던졌다. 그러자 도자기는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났고 그녀의 손에는 날카로운 파편이 들려있었다.임혜린은 그 손을 흔들며 경호원들을 위협했다.“경고하는데 막지 마요. 그러다가 다치면 책임 못 져요.”얼굴이 하얗게 질린 경호원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한이준을 바라봤다.“대표님...”한이준은 잔뜩 어두워진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임혜린, 내가 얘기 좀 하자고 말했잖아. 계속 이러면 나도 세게 나올 수밖에 없어.”임혜린은 싸늘하게 말했다.“할 말 없어요.”그러고선 한이준을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경호원들은 임혜린이 손에 쥔 도자기 조각이 두려운 듯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마음이 조급해진 임혜린은 재빨리 앞으로 걸어가며 소리쳤다.“길 막지 말고 비켜요.”이때 경호원이 나타나 임혜린의 손에서 도자기 조각을 낚아채더니 재빨리 그녀를 잡았다.임혜린은 화가 나서 큰소리로
한이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혜린아, 예전에는 내가 잘못했어. 그때 화가 나서 정신을 잃었고 내 마음을 제대로 돌볼 여유가 없었어. 이제는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아. 그러니까 제발 기회를 줘.”임혜린의 그의 손을 뿌리치고 차갑게 말했다.“무슨 기회요? 우리 엄마가 죽어가고 있을 때는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날 믿지 않는 이준 씨 때문에 약을 못 챙겨서 우리 엄마가 죽음을 맞이했어요. 그때 기회를 줄 순 없었어요?”임혜린은 그를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한씨 가문의 도우미로 일하면서 월급을 받았던 건 사실이에요. 10년 동안 이준 씨를 챙겨줬죠. 잘했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우리 엄마가 엄청 고생한 건 제가 알아요. 더 이상 과거에 대해 언급하지 말아요.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더더욱. 이준 씨는 그럴 자격 없잖아요?”“이준 씨가 준 케이크는 정말 먹어본 것 중에 가장 맛있는 케이크였어요. 저한테 남겨준 줄 알았는데, 사실은 다른 사람이 먹지 않아서 버리려고 했다는 걸 몰랐어요.”“만약 그게 이준 씨가 버리려던 케이크인 걸 알았다면 절대 먹지 않았을 거예요.”“우리 이제 성인이잖아요. 서로에 대한 체면 정도는 지켜주자고요.”모든 단어와 문장이 한이준에 대한 원망이었다.한이준은 손을 떨며 임혜린을 잡았다.“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했어. 나 때려. 혜린아, 마음이 풀릴 때까지 마음껏 때려.”임혜린은 흠잡을데 없이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정말요?”그녀는 손을 들어 한이준의 뺨을 내리쳤고 잘생긴 얼굴에는 곧바로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생겼다.그는 얼굴을 만지며 나지막이 물었다.“이제 화가 풀렸어?”임혜린은 차갑게 웃었다.“뭘 풀어요?”“아직도 화가 안 풀린다면 다시 사과할게.”“좋아요. 그럼 사과하세요. 바라던 참이니까.”그러자 한이준은 눈을 반짝였다.“사과를 받아주는 거야? 이제 날 용서했다는 뜻이지?”임혜린은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이 나왔다.“사과를 받으면 꼭 용서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