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지? 저 사람 누구지? 왜 보자마자 이렇게 괴로운 거야? 가슴이 너무 아파.’극심한 통증 속에 온다연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어떤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다.역시 이런 여름날과 비슷한 계단 끝이었다.빛 속에 서 있던 고귀하고 우아한 흰옷의 소년, 너무도 아름다워 그녀의 마음에 수많은 열등감과 동경을 불러일으켰던 그 모습.‘누구지? 왜 내 머릿속에 있는 사람이랑 이렇게 닮은 거지? 왜 내 머릿속에 이런 장면들이 떠오르는 걸까?’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생각할수록 머리가 더욱 심하게 아팠다.심지어 통증은 가슴을 갈가리 찢는 듯한 고통으로 번져갔다.그러나 이런 장소에서 그녀는 소리칠 수도 없었다.진수현은 딸의 이상한 모습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그녀를 안아 옆에 마련된 휴게실로 데려갔다.온다연의 창백한 얼굴과 땀범벅이 된 모습을 본 안심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하여 땀을 닦아주며 그녀는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그냥 돌아갈까? 이런 연회 안 가도 돼.”뜨거운 물을 조금 마시고 나서야 온다연의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그러나 방금 떠오른 장면들을 더는 떠올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녀는 안심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저 괜찮아요, 엄마. 이번 연회는 정말 중요한 자리예요. 안 갈 순 없어요.”진수현도 몹시 안타까워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갑자기 머리가 아팠던 거니? 거의 2년 동안 이런 적 없었는데... 혹시 또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거야?”한동안 그의 마음속에는 후회가 몰려왔다.염지훈의 말을 믿고 딸의 과거를 철저히 조사하지 않은 자신을 자책한 것이다.염지훈은 온다연이 과거에 행복하지 못했다고 했고 그녀가 스스로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한다며 과거를 들추면 더 큰 고통을 안길 것이라고 조언했었다.진수현도 딸이 힘든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하길 바라지 않았기에 대충 알아보는 선에서 그쳤다.딸의 양부모는 이미 사망했고 그녀가 살던 동네의 이웃도 모두 떠난 상태
진수현은 유강후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유강후의 배경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나이에 이런 성과를 이룬 건 실로 보기 드문 일이었다.자신의 젊은 시절과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였다.잔을 살짝 흔들며 진수현은 미소 지었다.“유 대표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혹시 결혼은 하셨습니까?”유강후의 시선이 안심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고 그 눈빛에 어두운 기운이 스쳤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혼은 했지만 지금은 부인이 절 떠나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시는 절 보려 하지 않네요.”이 말에 진수현이 피식 웃었다.“젊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더 많은 관용을 기대하죠. 유 대표님처럼 뛰어나신 분이라면 사모님도 틀림없이 대단한 분일 겁니다.”유강후는 다시 한번 안심을 바라봤지만 침묵하며 답하지 않고 대신 잔을 들어 와인을 살짝 흔들었다.“진 대표님은 잃어버렸던 따님을 찾으셨다고 하던데... 정말 축하드립니다.”진수현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유 대표님 소식이 정말 빠르시네요. 그런 일까지 알고 계시다니.”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곁에 서 있던 안윤희에게 잠시 시선을 돌렸다.“혹시 이분이 대표님의 따님이신가요?”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 실망감이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이 젊은 여자는 진수현의 곁에 서 있었고 안심과도 매우 친밀해 보였다.‘이 사람이 진 대표의 딸인가?’하지만 그녀는 온다연이 아니었다.‘다연이 소식이 또 끊겨버렸네.’그는 속으로 울분을 삼켰다.‘왜 그렇게 매정할까? 왜 나한테 조금의 희망조차 남겨주지 않는 걸까?’진수현은 유강후의 물음에 미소만 지으며 잔을 들어 올렸고 직접적으로 부정하거나 긍정하지 않았다.그는 자기 딸의 정체를 굳이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필요 없는 오해라면 그냥 내버려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진수현의 태도에 유강후의 마음속에서 간신히 피어오르던 작은 희망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고 말았다.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듯한 고통이 다시 찾아왔고 목구멍에는 쇳내가 가득 차올랐다.그는 억지로 고통
온다연이 부드러운 아이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넌 누구네 아기야? 이름이 뭐니?”아이의 목소리는 귀여운 아기 말투로 답했다.“난 엄마의 아기예요, 엄마.”그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에 온다연의 마음이 마치 녹아내린 설탕처럼 따뜻해지고 부드러워졌다.그녀는 아이의 통통한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난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는데?”그러자 작은 아이는 갑자기 입을 삐죽거리며 슬픈 얼굴이 됐다.“근데 난 내 엄마인 것 같은데...”그러다 문득 눈을 반짝이더니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결혼 안 했다니 잘됐네요! 우리 아빠 혼자예요. 아빠 아내가 아빠를 버렸거든요. 아빠랑 결혼하면 그쪽은 내 엄마가 되는 거예요!”온다연은 눈이 휘어질 정도로 크게 웃었다.‘대체 누구 집 아이지? 정말 너무 사랑스럽네.’그리고 어쩐지 어디선가 본 듯도 했다.“너희 아빠는 누구셔? 왜 아내가 그분을 버렸는데?”온다연이 웃으며 묻자 아이도 같이 웃으며 허리를 한껏 꼿꼿이 세우고 뒤를 가리켰다.“우리 아빠는 성이 강씨이고 저 안에서 술 마시고 있어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엄마가 떠난 거예요.”아이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근데 걱정하지 마요! 우리 아빠는 잘생겼어요. 나처럼요! 그리고 아빠랑 결혼하면 내가 아빠 술 못 마시게 할게요. 아빠가 반드시 잘해줄 거예요!”“그래서 이제 엄마가 돼 줄 거예요?”온다연은 점점 더 환하게 웃었다.아이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그녀는 아이의 볼을 다시 한번 꼬집으며 일부러 장난스럽게 대답했다.“좋아. 그런데 난 혼수 많이 받을 거야.”입술이 삐죽 나왔지만 아이는 곧 당당하게 말했다.“아빠 돈 많아요! 원하는 대로 말만 해요!”온다연은 웃으며 주변을 가리켰다.“그럼 여기 있는 모든 크루즈랑 이 바다를 다 달라고 해. 그걸 혼수로 주면 내가 너희 엄마 해줄게.”아이는 눈빛을 반짝이더니 그녀의 손가락을 꼭 잡았다.“직접 말한 거예요?! 약속이니까 꼭 지켜야
다만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차가웠다. 마치 사람을 천 리 밖으로 밀어내는 듯한 냉정함과 거리감이 느껴졌다.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눈을 보는 순간 온다연의 가슴이 다시 답답하게 조여왔다.게다가 남자가 점점 다가오자 그의 강렬한 존재감에 압도당해 숨이 막힐 것 같았다.온다연은 황급히 아이를 내려놓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꼬마야, 가족 왔으니까 난 먼저 갈게.”하지만 아이는 그녀의 다리를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유강후는 자신의 아들이 낯선 여자아이의 다리를 붙잡고 놓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아이는 사실 평소에 낯을 많이 가려서 자신과 장화연 외에는 누구에게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그런데 지금은 낯선 여자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으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그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한 번 더 바라봤다.그러나 보이는 건 고개를 숙인 채 옆모습만 드러난 평범한 얼굴이었다.특별할 것 없이 평범해 보였지만 그녀는 유강후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그가 한 걸음 다가가면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결국 난간 근처까지 물러난 뒤, 그녀는 아이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고는 도망치듯 달아났다.그러자 아이는 눈에 금세 눈물이 고여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엄마!”그녀는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아이를 돌아봤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달아났다.하지만 그 짧은 순간,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유강후는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순간, 그의 가슴이 어딘가에 세게 부딪힌 듯했다.그녀의 눈. 그 눈은 온다연의 눈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조명이 밝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 속에는 깊고 따뜻한, 샘물이 고인 듯한 투명함과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잠시 멍하니 있다가 유강후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다연은 온몸이 경직되어 그의 손을 필사적으로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이내 두려움에 온다연의 몸은 떨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유강후가 너무도 두려웠다.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온다연이 사라진 것을 알자마자 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며 소리쳤다.“다 아빠 때문이에요! 아빠가 겁만 안 줬으면 도망가지 않았을 거라고요!”유강후도 속이 타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네가 울고불고 소란만 피우지 않았으면 달아났겠어?”아이는 그 말에 더욱 화가 나서 갑판에 주저앉아 버릇없이 울며 떼를 썼다.“내가 찾았단 말이에요! 아빠가 못 찾은 걸 내가 찾았는데 아빠가 겁줘서 도망가게 했잖아요! 아빠가 책임요! 돌려달라고요!”“모두 엄마가 있는데 나만 없었어요! 겨우 찾았는데 아빠가 또 놓쳐버렸잖아요! 아바가 무능해서 그런 거예요!”유강후는 그녀를 쫓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아이가 계속 소란을 피워 참을 수가 없었다.하여 화를 억누르며 으름장을 놓았다.“지금 찾으러 갈 거야. 너는 여기 위층에 가서 기다려! 네가 울어서 도망간 거니까 못 찾으면 너 바다에 던져버릴 줄 알아!”이 말을 들은 아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나도 같이 갈래요!”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넌 따라오면 발목만 잡을 뿐이야!”아이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맨날 사진만 들여다보고도 못 알아봤으면서! 내가 먼저 찾지 않았으면 또 놓쳤을 것 아니에요?! 근데 내가 발목을 잡는다고요? 이렇게 멍청해서 어떻게 돈을 번 건지 모르겠네요!”둘은 서로의 핑계를 대며 초조하게 온다연을 찾아 나섰다.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마치 이 세상에서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이었다.그도 그럴 것이 그 시각 온다연은 이미 진씨 가문 헬리콥터를 타고 진씨 가문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그날 크루즈에는 많은 손님들이 있었고 크고 작은 헬리콥터들이 이착륙을 반복하고 있었다.진씨 가문의 헬리콥터는 그중 하나로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았다.온다연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질 듯한 기분으로 벽에 기대며 숨을 골랐다.가슴이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멀리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거대한 크루
바닷바람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 방 안 가득 시원함이 가득 찼다.공기에는 안심이 준비해준 라벤더 아로마의 은은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온다연은 안심과 진수현을 떠올렸다. 그들은 온다연을 특별히 아껴주며 사랑으로 감싸주었다.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듯이 노력했다.‘이런 부모님이 곁에 있는 이상 과거의 기억을 잃었다면 잃은 대로 괜찮지 않을까...’이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서서히 잠에 들었다.꿈속에서 그녀는 전통 스타일로 꾸며진 정원에 살고 있었다.마치 설날처럼 느껴졌고 창밖에는 하늘 가득 불꽃놀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손에는 커다란 봉투를 들고 있었다.그리고 키가 큰 남자가 그녀를 품에 안으며 낮고 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다연아, 너는 내 거야. 그리고 너는 오직 나만의 것이야.”“말해 봐. 내가 누구인지.”그 남자의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몸을 떨리게 했고 부끄러움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그러나 남자는 온다연을 놓아주지 않았고 그녀를 더욱 부끄럽게 만드는 행동을 했다.결국 그녀는 숨죽인 채로 나지막이 속삭였다.“당신은... 내 남자예요...”꿈속에서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부끄러워했지만 남자의 끊임없는 스킨쉽을 이겨낼 수 없었다.그의 손길 아래 온다연은 마치 물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렸다.그러나 어느 순간 꿈의 장면이 바뀌었다.모든 것이 사라지고 눈송이가 휘날리는 추운 풍경으로 바뀌었다.얼음장 같은 바람이 살을 에는 듯했고 하늘은 잿빛으로 흐려 있었다.그녀는 복도의 입구에 서 있었고 복도 끝에는 작은 아이가 서 있었다.그 아이는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고 추운 겨울에도 맨발이었다. 작은 발은 어느새 새빨갛게 얼어있었다.아이의 손에는 더 작은 아이의 손이 잡혀 있었다.더 작은 아이는 온다연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그 아이 뒤에 숨었다.그리고 작은 머리만 빼꼼히 내밀어 그녀를 쳐다보았다.온다연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곧 마치 무엇에 이끌리듯 그녀는 그들에게 다가갔다.그녀를 본 작은 아이는 이내 눈
매우 두려운 듯 작은 아이는 말을 하다 멈추고는 옆에 있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그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아이는 용기를 내어 다시 말했다.“나, 나도 그냥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어요...”눈이 시큰해지며 온다연의 가슴은 무겁게 내려앉았다.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돌덩이가 얹힌 듯 답답하고 아팠다.두 아이를 품에 꼭 안자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내가 엄마야. 너희는 모두 내 아이들이야...”그때,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연아!”동시에 두 아이가 갑자기 사라졌다.그녀의 품은 텅 비어 있었고 남은 건 온 하늘을 덮은 눈송이뿐이었다.온다연은 다급히 소리쳤다.“아가야, 어디 있어? 아가야!”그녀의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메아리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다연아, 일어나!”“다연아!”놀란 온다연이 벌떡 깨어났다.눈앞에는 염지훈의 커다란 얼굴이 보였다.그가 그녀의 이마를 만지며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열은 없는데 땀이 많이 났네.”온다연은 아직 꿈속에 머물러 있는 듯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땀이 젖은 머리카락이 하얀 피부에 들러붙어 그녀의 흑발과 백옥 같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염지훈은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 없다는 듯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 고개를 숙였다.그러나 온다연은 본능적으로 그의 행동을 피했다.그러자 염지훈의 눈에 순간적으로 어두운 빛이 스쳤다.3년이 지났지만 온다연은 여전히 염지훈의 스킨쉽을 거부하고 있었다.‘기억은 희미해졌다고 하지만... 왜 여전히 날 거부하는 거지?’그는 속으로 생각했다.‘그래도 괜찮아. 이제 곧 약혼식을 올릴 거야. 그 이후엔 다연이도 더 이상 나를 거부할 이유가 없겠지.’“또 악몽 꿨어?”그는 손에 든 휴지로 그녀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물었다.“요즘은 한동안 악몽 안 꿨잖아.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온다연은 염지훈의 손길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들어왔어요?
염지훈은 온다연의 손을 가볍게 잡고 그녀의 부드럽고 섬세한 손가락을 천천히 어루만졌다.“내일이면 북아메리카로 떠나야 해.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어서 말이야. 이번엔 한 달 정도 걸릴 것 같아.”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돌아오면 더 강한 힘을 가질 거야. 그래야 다연이를 아내로 맞을 수 있으니까.”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일이 잘 마무리되면 빨리 돌아오고요.”염지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나 걱정해 주는 거야? 혼자 가는 게 불안한 거지?”온다연은 조용히 ‘네’ 하고 대답했다.곧 약혼식을 앞두고 있었기에 온다연은 염지훈을 걱정하는 건 의무이자 책임처럼 느껴졌다.염지훈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상담은 계속 받아야 해. 내가 없더라도 게으름 피우면 안 돼. 누군가 확인하러 갈 거니까.”“그리고 긴장을 풀게 해주는 최면 치료도 빠뜨리면 안 돼.”과거의 기억을 잊게 하기 위해 최면을 선택했던 건 매우 힘든 결정이었다.당시 온다연은 심각한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고 자신을 부정하며 누구도 믿지 못했다.심리 치료사는 몇 번의 철저한 검사를 거쳤고 매번 나온 결론은 명확했다.그녀가 과거의 기억에 계속 빠져 있다면 자신을 더욱 심하게 해치거나 새로운 인격이 생겨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지금 생각해보면 과거를 잊게 한 건 매우 올바른 선택이었다.현재의 온다연은 새로운 정체성에 완벽히 적응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안정된 상태였다.게다가 그녀는 관심 있는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었다.온다연의 그림은 국제무대에서 여러 차례 금상을 받으며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신비로운 천재 소녀 화가로 불리고 있었다.금융 분야에서도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이런 온다연만이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었고 과거의 슬픔 속에서 울고 있는 존재로 남지 않을 수 있었다.최면 이야기가 나오자 온다연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
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세월의 흔적이 느껴져서 그런지 독특한 분위기가 아주 멋있네요. 북아메리카에 이런 집이 많지 않을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마음에 들면 이곳으로 이사 올까요? 여기랑 연결되어 있는 별장도 샀어요. 나중에 뚫어서 유나 씨가 좋아하는 취향에 맞게 인테리어 해도 좋아요.”온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괜찮아요. 이런 곳은 아직 낯설어서요. 저는 강씨 가문 저택이 더 좋아요.”그녀는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일이 마무리되면 H국으로 갈까요? 한번 가보고 싶어요. 어쩌면 기억을 조금이라도 되찾을 수 있잖아요.”유강후는 말없이 걷다가 별장 입구에 이르러서야 입을 열었다.“도착했네요.”문밖에는 승용차 두 대가 주차되었고 두 명의 경호원이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임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동현. 얼른 내려와. 올라가면 안 된다고 했지?”말이 끝나는 동시에 하얗고 작은 아이가 온다연에게 달려왔다.그는 온다연을 보자마자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누나, 안녕하세요.”임동현은 귀여운 피카츄가 그려진 옷을 입고 있었고 흰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특히나 맑고 생기 넘치는 눈은 임혜린을 똑 닮았다.온다연은 한눈에 임혜린의 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그녀는 몸을 숙여 아이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네가 동현이구나?”임동현은 피카츄 인형을 안은 채 또박또박 말했다.“맞아요. 누나 너무 예뻐요. TV에 나오는 사람보다 훨씬 더 예뻐요.”온다연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보드라운 얼굴을 쓰다듬었다.“말을 엄청 잘하네?”이때 임혜린이 다가왔다.“왔어?”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면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어찌나 체력이 넘치는지 나 어릴 때랑 판박이라니까?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조용하게 앉아 있는 법부터 가르쳐. 그렇지 않으면 다리가 아플 정도로 뛰어다녀야 해.”임혜린은 유강후를 힐끗 보고선 퉁명스럽게 말했다.“여기 정말 안전하죠?
온다연은 유강후를 째려보고선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그러나 몇 미터 달리지도 못하고 곧바로 유강후에게 품에 잡혔다.“왜 뛰어요?”섹시하고 매력적인 허스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온다연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거 놔요.”유강후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 들어 올려 옆에 있는 긴 의자에 앉힌 뒤 돌아섰다.“올라와요. 업어줄게요.”온다연은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당장이라도 업히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지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괜히 투덜거렸다.“걸어갈 거예요.”온다연이 질투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린 유강후는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업고 가면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얼른 업혀요.”자신의 질투심을 들켰다는 생각에 온다연은 얼굴을 붉히며 돌아섰다.“걸어가도 되다니까요? 여자들이 쳐다보게 혼자 걸어요. 어차피 강후 씨도 그런 걸 즐기잖아요.”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돌아서서 그녀의 작은 얼굴을 꼬집었다.“질투하는 거예요?”온다연은 입을 삐죽였다.“아니거든요?”그러자 유강후는 손을 뻗어 그녀의 다리를 감싸며 안아 올렸다.온다연은 그의 품에 안긴 채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비틀었다.“얼른 놔요.”유강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돌변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옆에서 사람들의 작은 비명과 한숨 소리가 들렸지만 유강후는 멈추지 않았다.어느새 얼굴이 터질 듯 빨갛게 달아오른 온다연은 계속 유강후를 밀어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거의 숨쉬기 힘들 정도가 되고서야 유강후는 비로소 손을 뗐다.온다연은 얼굴이 붉어지고 입술마저 부어올랐다.“미쳤어요?”유강후는 그녀의 붉은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러면 사람들이 유나 씨가 내 아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온다연은 얼굴이 더 빨개진 채로 말을 더듬었다.“아내라뇨? 우린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유강후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질투쟁이.”
직원은 백인 여성이었는데 온다연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채로 쭈뼛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죄송해요.”온다연은 따지기 귀찮은 듯 물건을 챙긴 후 유강후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유강후의 눈에는 웃음이 가득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뒤따라오던 이권이 참다못해 온다연이 전화하는 틈을 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도련님, 참지 말고 그냥 웃으세요.”이권은 방금 온다연이 내뱉은 소유욕 넘치는 말이 얼마나 큰 효과를 불러올지 잘 알고 있었다.유강후와 오랜 시간 일한 사람들은 앞으로 며칠 동안 무탈하게 지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아니나 다를까 유강후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요즘 다들 일을 너무 잘하니까 마음이 놓여. 이번 달 월급은 두 배야.”이권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유강후가 물었다.“너도 다연이가 한 말을 들었지? 무슨 뜻일까? 질투하는 걸까? 다른 사람이 날 가로챌까 봐 걱정하고 있는 게 맞지?”유강후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부드러움이 가득했다.이권은 웃으며 그의 말에 답했다.“맞습니다. 도련님을 향한 다연 씨의 애정이 더욱 깊어진 것 같습니다. 많이 좋아하네요.”유강후의 눈가에 떠오른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더니 마치 온다연을 잡아먹을 듯 애정 어린 부드러운 눈길도 뚫어져라 바라봤다.“권아, 솔직하게 말해봐. 나 정도면 잘생긴 편이지?”“도련님이 못생겼다면 이 세상에는 잘생긴 남자가 없을 겁니다.”유강후는 올리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네. 앞으로 다연이 선물을 준비할 때 예쁘게 생긴 거로 골라.”말은 이렇게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약간의 자부심을 느꼈다.한편으로는 자신이 잘생긴 걸 천만다행으로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외모를 중요시하는 온다연의 관심을 받는 건 거의 불가능했으니까.이때 통화를 마친 온다연이 다가왔고 이상해진 분위기를 보고선 미간을 찌푸렸다.“왜요?”이권은 웃으며 답했다.“아무것도 아닙니다. 유나 씨가 예쁘게 생긴 걸 좋아한다는
“신경 꺼요.”임혜린은 여전히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내가 낳은 아들이고 한이준이랑 전혀 상관없는 아이예요. 그래서 도와줄 거예요? 말 거예요?”유강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임혜린은 코웃음을 쳤다.“싫다는 뜻이죠?”곧이어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다연아, 실은 너한테도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친구가 있어. 이름은 주...”“임혜린!”유강후는 그녀의 말을 가로채며 표정이 어두워졌다.“다연이 친구인 걸 봐서 이번 한 번은 도와줄게. 하지만 다연을 속이려고 없는 얘기를 만들어낸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임혜린은 비웃었다.“그쪽이랑 실랑이할 시간 없으니까 얼른 이쪽으로 사람 보내요. 그리고 집은 인적 드문 곳으로 알아봐 줘요. 아들이랑 한동안 조용히 살고 싶어요. 지금 당장 알아봐 줘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말했다.“조금 있으면 데리러 갈 거야. 성당 근처에 별장 한 채가 있는데 당분간은 거기서 지내.”“내가 그쪽을 어떻게 믿어요. 그 별장 근처에 한이준이 살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다연아...”임혜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는 전화를 끊었다.그러자 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렸다.“친구? 저한테도 그런 친구가 있었어요?”유강후는 마음속으로 임혜린을 수백 번 욕했지만 표정은 오히려 담담했다.“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딱 봐도 도와주길 바라서 지어낸 얘기잖아요.”온다연은 임혜린이 걱정되어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혜린한테 정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가봐야겠어요.”유강후는 단호하게 말했다.“너무 늦었어요. 오 집사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오늘은 이만 들어가요. 어차피 내일 성당 근처 별장으로 이사 올 텐테 뭘 걱정해요. 내일 일찍 만나러 가요.”온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안 돼요. 지금 마음이 심란할 거예요. 친구도 별로 없을 텐데 저라도 가봐야죠.”유강후는 온다연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았다. 하는 수 없이 이권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당장 임혜린 모자를 데리러 갈 사람을 준비하라고 명
유강후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잡더니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용서하기 어려운 일은 어떤 거죠?”온다연은 단호하게 말했다.“나은별 씨와 정말 그런 사이였다면...”온다연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잡더니 질투 나는 듯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친구라는 사실만으로도 괴로워요. 만약 두 사람이 예전에 사랑하던 사이라면 다시는 강후 씨를 만나지 않을 거예요.”유강후는 순종적이고 부드러운 온다연의 모습에 가슴이 간지러워져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다.“그게 다예요?”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둘 사이의 오해였다면 며칠은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나은별 씨와 사랑하던 사이라면...”“쳇.”온다연은 대뜸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고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여전히 분노의 기색이 엿보였다.“일단 그 여자를 때려눕힌 다음 강후 씨를 던져버릴 거예요.”말이 끝나자마자 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잡고 격렬하게 키스했다.차 안의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자 운전 기사는 조용히 칸막이를 내렸다.그렇게 두 사람 모두 감정이 북받쳤고 한참 후에야 흥분을 가라앉혔다.온다연은 유강후의 가슴에 기대어 거친 숨을 내쉬며 그의 심장 박동을 듣고 있었다.그녀의 가는 허리를 잡고 있던 유강후는 마치 온 세상을 움켜쥔 듯 꼭 껴안고 놓지 않았다두 사람은 서로의 숨소리와 심장박동을 조용히 느꼈다. 마치 이 세상에 그들만 남은 것처럼 말이다.한참 후 온다연이 속삭였다.“정말 신경 안 쓸 거예요?”“그래도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잖아요. 같이 지낸 정이 있을텐데...”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온다연의 허리를 세게 꼬집었다.“그 사람 얘기는 앞으로 꺼내지 마요. 재수 없으니까.”강씨 가문 저택에 다다를 무렵 온다연의 핸드폰이 울렸다.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임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이사 갈 거야. 강후 씨한테 이사를 도와줄 사람이 있는지 물어봐 줘.”“지금 살고 있는 곳이 좋다며? 이웃들도 친절하고
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차에 올라탔다.온다연은 걱정스러운 듯 창밖을 내다보며 조용히 말했다.“경호원을 많이 데려왔던데 혜린한테 무슨 짓을 저지르는 건 아니겠죠?”유강후는 그녀를 무릎에 앉히더니 얼굴에 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나지막이 말했다.“아닐 거예요. 이준이가 혜린 씨를 엄청 오랫동안 찾았거든요. 함께 보내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리고 혜린 씨도 손이 매워 보이던데 아마 이준이가 많이 맞을걸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온다연은 그의 목에 팔을 감싸더니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불만스럽게 말했다.“나은별이라는 사람 너무 짜증 나요. 윤희 언니보다 훨씬 더요. 강후 씨의 친구만 아니었다면...”온다연은 부드러운 손으로 유강후의 목을 쿡쿡 찔렀다.“기회를 줄 테니까 우리가 예전에 어땠는지 솔직하게 전부 다 말해봐요. 풀 수 있는 오해라면 저도 따지지 않을게요.”온다연은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마요. 언젠가 강후 씨가 거짓말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엄청 화가 날 것 같아요.”개의치 않는다는 말은 거짓말이다.3년 전에 나은별과 자신을 바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매우 힘들었다.물론 그사이에 오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어떤 오해가 있더라도 이러한 행동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3년 전에 정말 나은별 씨와 나를 맞바꿨어요?”유강후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온다연의 작은 손을 잡더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나은별이 하는 말을 다 믿어요?”온다연은 입을 삐죽이며 기분 언짢은 티를 냈다.“만약 제가 지훈 씨와 강후 씨를 맞바꾼다면 어때요?”유강후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상황이 복잡한 건 맞지만, 결코 나은별이랑 바꾼 적은 없어요.”온다연은 마음이 괴로운 듯 답답함을 느꼈다.“그런데 혜린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해줬거든요.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너무 아팠어요. 분명 진짜일 거예요.”유강후는 심호흡을 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듣고 싶어요? 그럼 절대 화
한이준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임혜린의 다리까지 묶었다.화가 나서 정신을 잃을뻔한 임혜린은 입을 벌려 한이준의 어깨를 세게 깨물었다.곧 피가 스며 나왔지만 한이준은 통증을 못 느끼는 것처럼 임혜린이 자신을 물도록 내버려두었다.곧이어 그는 차에 도착했다.한이준은 막무가내로 임혜린을 차에 밀어 넣고 옆에 앉았다.임혜린은 넥타이로 묶인 채 몸부림쳤고 어느새 손목이 빨갛게 부어올랐다.빨개진 손목을 본 한이준은 한숨을 내쉬었다.“임혜린, 성깔은 아직도 여전하구나? 조금만 물러서는 것도 안 돼?”이때 차에 시동이 걸렸고 한이준은 넥타이를 풀기 위해 손을 뻗었다.손이 자유로워진 임혜린은 가장 먼저 그의 뺨을 때렸다.“이준 씨는 처음부터 끝까진 나쁜 사람이었어요. 평생 외롭게 살길 바라요.”그러더니 재빨리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한이준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차 멈춰.”다행히 방금 출발한 덕분에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임혜린은 관성에 이끌려 몇 걸음 달리며 안정을 되찾은 후 빠르게 육교로 올라갔다.한이준이 달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다리 위에 있었다.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임혜린, 좋은 말로 할 때 돌아와.”‘차에서 뛰어내리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외진 곳이라 차가 많지 않아서 망정이지 임혜린의 행동은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다름없었다.임혜린은 뒤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반대편으로 달려가 곧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경호원이 뒤따라오며 물었다.“대표님, 쫓아갈까요?”한이준은 어두운 눈빛으로 임혜린이 사라진 방향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집 주소는 아직이야?”“알아낸 바로는 한인타운의 재송 아파트에 거주 중인 것 같습니다. 나름 고급 단지입니다.”“그리고?”경호원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현재 도우미 두 명과 함께 단독 주택에 살고 있습니다. 주말에는 동생인 임동규 씨와 시간을 보내고 현재 조사된 바에 따르면 남자 친구는 없는 걸로 보입니다. 다만 경제적 조건과 사회적 지위가 좋은 남자들에게 끝없이 구애를
툭하는 소리와 함께 임혜린의 핸드폰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다행히 고장 나지 않았고 ‘내 사랑’이라는 사람의 전화는 여전히 수신으로 표시되었다.한이준은 너무 화가 나서 핸드폰을 발로 찼고 핸드폰은 벽에 부딪히며 화면이 깨졌다.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임혜린은 한이준을 노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왜 남의 핸드폰을 발로 차요? 미쳤어요?”한이준은 거친 숨을 내쉬며 이를 악물었다.“임혜린, 그동안 남자를 얼마나 만났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혜린은 그의 뺨을 내리쳤다.“내가 남자를 만나든 말든 그쪽이랑 뭔 상관이냐고요. 미친 X. 꼴도 복 싫으니까 얼른 나가요.”이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화면이 깨져 받을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위에는 ‘내 사랑’이라는 세글자가 떠올랐다.임혜린은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고 더 이상 한이준과 이곳에서 실랑이를 벌이며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그녀는 한이준을 밀치고 밖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밖에는 수많은 경호원이 대기하고 있었다.문에 다다르자 임혜린은 캐비닛에 있는 도자기를 쥐더니 벽을 향해 세게 던졌다. 그러자 도자기는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났고 그녀의 손에는 날카로운 파편이 들려있었다.임혜린은 그 손을 흔들며 경호원들을 위협했다.“경고하는데 막지 마요. 그러다가 다치면 책임 못 져요.”얼굴이 하얗게 질린 경호원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한이준을 바라봤다.“대표님...”한이준은 잔뜩 어두워진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임혜린, 내가 얘기 좀 하자고 말했잖아. 계속 이러면 나도 세게 나올 수밖에 없어.”임혜린은 싸늘하게 말했다.“할 말 없어요.”그러고선 한이준을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경호원들은 임혜린이 손에 쥔 도자기 조각이 두려운 듯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마음이 조급해진 임혜린은 재빨리 앞으로 걸어가며 소리쳤다.“길 막지 말고 비켜요.”이때 경호원이 나타나 임혜린의 손에서 도자기 조각을 낚아채더니 재빨리 그녀를 잡았다.임혜린은 화가 나서 큰소리로
한이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혜린아, 예전에는 내가 잘못했어. 그때 화가 나서 정신을 잃었고 내 마음을 제대로 돌볼 여유가 없었어. 이제는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아. 그러니까 제발 기회를 줘.”임혜린의 그의 손을 뿌리치고 차갑게 말했다.“무슨 기회요? 우리 엄마가 죽어가고 있을 때는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날 믿지 않는 이준 씨 때문에 약을 못 챙겨서 우리 엄마가 죽음을 맞이했어요. 그때 기회를 줄 순 없었어요?”임혜린은 그를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한씨 가문의 도우미로 일하면서 월급을 받았던 건 사실이에요. 10년 동안 이준 씨를 챙겨줬죠. 잘했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우리 엄마가 엄청 고생한 건 제가 알아요. 더 이상 과거에 대해 언급하지 말아요.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더더욱. 이준 씨는 그럴 자격 없잖아요?”“이준 씨가 준 케이크는 정말 먹어본 것 중에 가장 맛있는 케이크였어요. 저한테 남겨준 줄 알았는데, 사실은 다른 사람이 먹지 않아서 버리려고 했다는 걸 몰랐어요.”“만약 그게 이준 씨가 버리려던 케이크인 걸 알았다면 절대 먹지 않았을 거예요.”“우리 이제 성인이잖아요. 서로에 대한 체면 정도는 지켜주자고요.”모든 단어와 문장이 한이준에 대한 원망이었다.한이준은 손을 떨며 임혜린을 잡았다.“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했어. 나 때려. 혜린아, 마음이 풀릴 때까지 마음껏 때려.”임혜린은 흠잡을데 없이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정말요?”그녀는 손을 들어 한이준의 뺨을 내리쳤고 잘생긴 얼굴에는 곧바로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생겼다.그는 얼굴을 만지며 나지막이 물었다.“이제 화가 풀렸어?”임혜린은 차갑게 웃었다.“뭘 풀어요?”“아직도 화가 안 풀린다면 다시 사과할게.”“좋아요. 그럼 사과하세요. 바라던 참이니까.”그러자 한이준은 눈을 반짝였다.“사과를 받아주는 거야? 이제 날 용서했다는 뜻이지?”임혜린은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이 나왔다.“사과를 받으면 꼭 용서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