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치자마자 문밖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곽혜진, 말 한마디도 없이 여긴 왜 왔어. 신약 개발이라니?”순간 얼어붙은 곽혜진은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환한 웃음을 지었다.“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평범한 실험이에요.”입구에는 30대로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분위기를 뿜어내며 곽혜진을 노려봤는데 눈에 담긴 분노는 금방이라도 그녀를 불사를 정도였다.남자의 옆에는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곽혜진을 보자마자 ‘엄마’라고 부르며 달려가더니 그녀의 다리를 껴안았다.어르신은 손님이 찾아온 걸 보고선 황급히 마음을 다잡고 침착하게 말했다.“염 대표님이 오셨군요. 손자가 많이 아파서 제가 혜진이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너무 탓하진 마세요.”곽혜진의 남편인 염동식은 이 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고 부유한 재벌 중 한 명이다. 심지어 그의 손아귀에 있는 산업은 강씨 가문과 맞먹는다고 할 수 있다.염동식은 어르신을 보자마자 분노를 감추더니 곧바로 다가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유강후의 소식을 들은 그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떠올랐다.“다음 달 신국에서 비즈니스 서밋이 열립니다. 아시아 전역에서 명망 있는 기업인들이 참석하는 자리죠. 그곳에서 유 대표님을 만나면 서부 지역 개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이럴 줄은...”그는 침대에 누워있는 유강후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유 대표님과 사모님의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이런 상황이 발생할줄은 정말 몰랐네요.”염동식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저희 쪽 인원이 최근에 동남아 기밀을 수집했는데 그중 하나가 사모님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려고요. 원래는 부하 동생을 시켜서 전해드리려고 했는데 이왕 온 김에 직접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그 말이 끝나는 동시에 유강후가 눈을 떴다.“대표님, 말씀하시죠.”그러자 염동식은 피식 웃었다.“자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다행이네요.”“신국의 진씨 가문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3
유강후는 봉투를 열었고 그 안에는 사진 한 장이 담겨있었다.사진을 꺼내 살펴본 그는 곧바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몰래 찍은 것 같은 사진 속에는 남자가 있었는데 모르는 얼굴이어서 염동식이 언급했던 진수현일 거라고 추측했다.그런데 사진 속 여성은 온다연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나이는 30대처럼 보였기에 온다연일 리가 없지만 생김새나 분위기조차 매우 닮았다.유강후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누구지?’‘왜 다연이랑 이렇게 닮은 거지?’수많은 의문이 떠오른 그때 염동식의 전화가 걸려 왔다.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염동식이 먼저 말을 꺼냈다.“사진 속의 남자는 진수현, 그 옆에 있는 여자는 아내인 안심이에요. 사모님이랑 매우 닮았죠?”“3년 전, 사모님이 실종된 시기와 진씨 가문이 딸을 찾은 시기가 매우 일치합니다. 정말 우연일까요?”유강후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대표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요.”염동식이 답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한밤중에 치료해달라고 제 와이프한테 연락이나 하지 마세요.”“아참, 흰머리가 많이 나셨던데 제가 부하를 시켜서 몸에 좋은 물건들 보내드릴게요. 마지막 흰머리 한 올까지 깨끗하게 사라질 겁니다.”“그리고 어르신한테 얘기 좀 해주세요. 제 와이프한테 후원 좀 하지 말라고요. 괜히 이상한 실험만 하고 있잖아요.”유강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염동식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유강후는 손에 사진을 든 채 로운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로운은 진수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진수현 씨는 거의 20년 동안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단한 인물인 건 틀림없습니다. 원래 진씨 가문은 보잘것없는 존재였는데 그분의 통솔하에 불과 2, 3년 만에 신국에서 손꼽히는 최고의 가문으로 성장했습니다.”“그 후 아주 짦은 시간에 거대한 상업 제국을 건설하여 동남아시아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20년 전에 갑자기 사라졌고
한 달 전, 신국 근처 공해에서 대량의 신에너지 광물이 발견되었다. 자원이 부족한 신국에게 이는 마치 거대한 노다지를 발견한 것과 같았다.하지만 곧 강력한 자본이 개입하면서 결국 채굴권은 H 국의 오아시스 그룹과 신국의 진씨 가문에게 돌아갔다.오아시스 그룹이 70%의 지분을 차지하며 주도권을 잡았고 진씨 가문은 상대적으로 약간 뒤처진 위치에 머물렀다.석양빛이 번지는 저녁, 온다연은 저택의 난간에 기대어 멀리 보이는 십여 척의 대형 크루즈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크루즈선들은 그제부터 그곳에 정박해 있었고 움직이지도, 항구에 접안하지도 않았다.크루즈선끼리는 대형 강철판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마치 바다 위에 웅장한 궁전을 세운 듯한 모습이었다.거대한 규모와 웅장함은 단연 압도적이었다.마치 광장처럼 넓은 갑판 위로는 헬리콥터가 끊임없이 이착륙했고 멀리서 비행기 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왔다.집사 주원의 말에 따르면 저 크루즈선들은 모두 한 대단한 인물을 보호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했다.그 인물은 이번 진씨 가문의 협력 파트너로 북아메리카 대형 재벌의 수장이자 H 국과 같은 초강대국의 고위 정치 가문을 배경으로 둔 권력자라고 한다.오아시스 그룹과 같은 대규모 사업체를 여러 개 거느리고 있으며 그의 권력과 재력은 나라와 맞먹을 정도라고 한다.아직 상륙하지 않았지만 그를 보기 위해 주변의 여러 소국의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이 빈번히 왕래하고 있었다.그 크루즈선을 멍하니 바라보자 온다연은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마치 그곳에 자신이 찾고자 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지난 3년 동안 그녀는 신국 생활에 완전히 적응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끝없는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었다.심지어 가문의 후계자임에도 불구하고 가업을 경영하기보다는 배후에서 조종하는 역할만 하고 싶다는 무리한 요구까지도 아버지는 너그럽게 받아주었다.그녀는 분명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일이란 없었다.예전의 기억
온다연은 난간 옆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석양이 완전히 사라질 때쯤, 집사가 다가왔다.“사모님께서 드레스 갈아입으시고 준비하시라고 전하셨습니다. 곧 저녁 연회가 시작되니 출발해야 합니다.”그제야 온다연은 정신을 차렸다.드레스를 갈아입고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늘 그렇듯 그녀만을 위한 전용 메이크업을 시작했다.이 메이크업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가려버려 단지 청순한 정도로 보이게 만들었다.사실 이 메이크업은 아버지 진수현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그녀를 철저히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의뢰한 것이었다.특히 이 메이크업은 특수 재료로 만들어져 쉽게 지울 수 없고 최대 3개월 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덕분에 지금까지 누구도 그녀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그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진수현의 딸이나 진씨 가문의 금융 천재 소녀와 연결 지으려 하지 않았다.과거에 누군가 진씨 가문의 금융 천재 소녀가 노트북으로 일하는 모습을 몰래 촬영한 적이 있었는데 사진 속의 그녀는 마치 요정처럼 세상에 내려온 듯한 아름다움을 뽐냈다.그 모습은 젊은 시절의 안심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그러나 그 사진은 즉시 삭제되었고 촬영한 사람도 어떻게 사라졌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그 결과 많은 이들이 온다연의 사촌 언니이자 안심의 조카인 안윤희를 진수현의 딸로 착각했다.안윤희는 안심과 약간 닮은 데다 비록 외모가 조금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꽤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온다연이 보석을 착용할 때 집사가 그녀의 목에 걸린 호박석 펜던트를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온다연은 이를 막았다.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 펜던트를 한순간도 떼어놓을 수 없었다. 펜던트를 떼어낼 때마다 심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오늘처럼 중요한 연회에 인공 보석을 착용하고 가는 건 진씨 가문의 명예에 걸맞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펜던트를 떼어내어 다이아몬드 팔찌와 함께 손목에 착용했다. 이로 인해 펜던트는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온다연이 펜던트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모습을 본 안
온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심은 눈에 가득 애정을 담아 말했다.“아무리 바빠도 다음 달 약혼식은 미루면 안 돼. 우리 딸의 일이 가장 중요한 거야.”그러자 얼굴이 붉어지며 온다연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엄마, 그런 얘기 그만 좀 하세요.”안심은 웃으며 말했다.“지훈 씨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네 아버지 젊었을 때와 닮았어. 나도 네 아빠도 그 사람이 아주 마음에 든단다. 너를 그 사람에게 맡겨야 우리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진수현이 방으로 들어오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마음에 들긴? 난 마음에 안 들어! 내 딸은 평생 시집 못 가!”이를 들은 안심이 그를 매섭게 쳐다보았다.“그딴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오늘 밤엔 거실 소파에서 혼자 잘 줄 알아요!”당황한 진수현은 급히 변명했다.“여보, 그러지 마. 우리 딸 듣고 있잖아.”안심은 남편을 쳐다보지도 않고 온다연의 손을 잡아끌며 방을 나섰다.조금 뒤, 진씨 가문의 전용 헬리콥터가 크루즈의 갑판 위에 부드럽게 착륙했다.헬리콥터에서 내리자 온다연은 크루즈의 거대한 규모에 잠시 넋을 잃었다.각 크루즈선은 마치 하나의 작은 도시처럼 넓고 평탄했고 열여덟 척의 크루즈가 연결된 모습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다.육지와 다를 바 없는 규모였다.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화려한 복장을 입고 있었고 특히 여성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게 꾸민 모습이었다.그들 사이에서 은밀한 속삭임이 들려왔다.“오아시스 그룹 사람들이야. 이번 해양 프로젝트의 최대 주주라지.”“들리는 말로는 겨우 서른 초반인데 아직도 미혼이래.”“근데 그 사람 얼굴을 본 적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대.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혀 모르겠네.”“어떻게 생겼든 오아시스 그룹의 대표라잖아. 들은 바로는 화운 그룹과 제경 그룹도 그 사람 소유래.”“세상에... 그럼 진씨 가문도 저 사람보다 못한 거네.”“진씨 가문이 동남아시아에서 강하지만 이쪽에서는 오아시스 그룹 쪽이 더 강해. 단지 영향권이 다른 거지, 서로 비교할
‘왜 이렇게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지? 저 사람 누구지? 왜 보자마자 이렇게 괴로운 거야? 가슴이 너무 아파.’극심한 통증 속에 온다연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어떤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다.역시 이런 여름날과 비슷한 계단 끝이었다.빛 속에 서 있던 고귀하고 우아한 흰옷의 소년, 너무도 아름다워 그녀의 마음에 수많은 열등감과 동경을 불러일으켰던 그 모습.‘누구지? 왜 내 머릿속에 있는 사람이랑 이렇게 닮은 거지? 왜 내 머릿속에 이런 장면들이 떠오르는 걸까?’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생각할수록 머리가 더욱 심하게 아팠다.심지어 통증은 가슴을 갈가리 찢는 듯한 고통으로 번져갔다.그러나 이런 장소에서 그녀는 소리칠 수도 없었다.진수현은 딸의 이상한 모습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그녀를 안아 옆에 마련된 휴게실로 데려갔다.온다연의 창백한 얼굴과 땀범벅이 된 모습을 본 안심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하여 땀을 닦아주며 그녀는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그냥 돌아갈까? 이런 연회 안 가도 돼.”뜨거운 물을 조금 마시고 나서야 온다연의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그러나 방금 떠오른 장면들을 더는 떠올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녀는 안심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저 괜찮아요, 엄마. 이번 연회는 정말 중요한 자리예요. 안 갈 순 없어요.”진수현도 몹시 안타까워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갑자기 머리가 아팠던 거니? 거의 2년 동안 이런 적 없었는데... 혹시 또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거야?”한동안 그의 마음속에는 후회가 몰려왔다.염지훈의 말을 믿고 딸의 과거를 철저히 조사하지 않은 자신을 자책한 것이다.염지훈은 온다연이 과거에 행복하지 못했다고 했고 그녀가 스스로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한다며 과거를 들추면 더 큰 고통을 안길 것이라고 조언했었다.진수현도 딸이 힘든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하길 바라지 않았기에 대충 알아보는 선에서 그쳤다.딸의 양부모는 이미 사망했고 그녀가 살던 동네의 이웃도 모두 떠난 상태
진수현은 유강후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유강후의 배경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나이에 이런 성과를 이룬 건 실로 보기 드문 일이었다.자신의 젊은 시절과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였다.잔을 살짝 흔들며 진수현은 미소 지었다.“유 대표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혹시 결혼은 하셨습니까?”유강후의 시선이 안심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고 그 눈빛에 어두운 기운이 스쳤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혼은 했지만 지금은 부인이 절 떠나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시는 절 보려 하지 않네요.”이 말에 진수현이 피식 웃었다.“젊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더 많은 관용을 기대하죠. 유 대표님처럼 뛰어나신 분이라면 사모님도 틀림없이 대단한 분일 겁니다.”유강후는 다시 한번 안심을 바라봤지만 침묵하며 답하지 않고 대신 잔을 들어 와인을 살짝 흔들었다.“진 대표님은 잃어버렸던 따님을 찾으셨다고 하던데... 정말 축하드립니다.”진수현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유 대표님 소식이 정말 빠르시네요. 그런 일까지 알고 계시다니.”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곁에 서 있던 안윤희에게 잠시 시선을 돌렸다.“혹시 이분이 대표님의 따님이신가요?”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 실망감이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이 젊은 여자는 진수현의 곁에 서 있었고 안심과도 매우 친밀해 보였다.‘이 사람이 진 대표의 딸인가?’하지만 그녀는 온다연이 아니었다.‘다연이 소식이 또 끊겨버렸네.’그는 속으로 울분을 삼켰다.‘왜 그렇게 매정할까? 왜 나한테 조금의 희망조차 남겨주지 않는 걸까?’진수현은 유강후의 물음에 미소만 지으며 잔을 들어 올렸고 직접적으로 부정하거나 긍정하지 않았다.그는 자기 딸의 정체를 굳이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필요 없는 오해라면 그냥 내버려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진수현의 태도에 유강후의 마음속에서 간신히 피어오르던 작은 희망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고 말았다.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듯한 고통이 다시 찾아왔고 목구멍에는 쇳내가 가득 차올랐다.그는 억지로 고통
온다연이 부드러운 아이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넌 누구네 아기야? 이름이 뭐니?”아이의 목소리는 귀여운 아기 말투로 답했다.“난 엄마의 아기예요, 엄마.”그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에 온다연의 마음이 마치 녹아내린 설탕처럼 따뜻해지고 부드러워졌다.그녀는 아이의 통통한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난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는데?”그러자 작은 아이는 갑자기 입을 삐죽거리며 슬픈 얼굴이 됐다.“근데 난 내 엄마인 것 같은데...”그러다 문득 눈을 반짝이더니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결혼 안 했다니 잘됐네요! 우리 아빠 혼자예요. 아빠 아내가 아빠를 버렸거든요. 아빠랑 결혼하면 그쪽은 내 엄마가 되는 거예요!”온다연은 눈이 휘어질 정도로 크게 웃었다.‘대체 누구 집 아이지? 정말 너무 사랑스럽네.’그리고 어쩐지 어디선가 본 듯도 했다.“너희 아빠는 누구셔? 왜 아내가 그분을 버렸는데?”온다연이 웃으며 묻자 아이도 같이 웃으며 허리를 한껏 꼿꼿이 세우고 뒤를 가리켰다.“우리 아빠는 성이 강씨이고 저 안에서 술 마시고 있어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엄마가 떠난 거예요.”아이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근데 걱정하지 마요! 우리 아빠는 잘생겼어요. 나처럼요! 그리고 아빠랑 결혼하면 내가 아빠 술 못 마시게 할게요. 아빠가 반드시 잘해줄 거예요!”“그래서 이제 엄마가 돼 줄 거예요?”온다연은 점점 더 환하게 웃었다.아이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그녀는 아이의 볼을 다시 한번 꼬집으며 일부러 장난스럽게 대답했다.“좋아. 그런데 난 혼수 많이 받을 거야.”입술이 삐죽 나왔지만 아이는 곧 당당하게 말했다.“아빠 돈 많아요! 원하는 대로 말만 해요!”온다연은 웃으며 주변을 가리켰다.“그럼 여기 있는 모든 크루즈랑 이 바다를 다 달라고 해. 그걸 혼수로 주면 내가 너희 엄마 해줄게.”아이는 눈빛을 반짝이더니 그녀의 손가락을 꼭 잡았다.“직접 말한 거예요?! 약속이니까 꼭 지켜야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
“다연이가 전에 겪은 고통... 똑같이... 아니 그보다 수천 배로 돌려줘야 해.”“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유하령이 비명을 질렀다.“아빠가 죽었어요! 아빠가 모든 죄를 짊어졌잖아요. 제발...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마요!”하지만 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람이 죄를 씻고 싶어 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때 너희가 법을 피해 가며 사람을 괴롭혔지. 좋아. 지금 잘됐네. 정신병자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여도 법의 심판을 안 받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벌을 받는 것도... 네 업보지.”유하령은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지만 유강후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데리고 가. 하지만 일단 죽이지는 마.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네! 대표님!”그는 더는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사하던 곳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까둔 귤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얼른 먹어요. 입술이 다 터졌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물은 마셔야죠.”그녀는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 그의 손에 건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귤 한 조각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유하령...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온다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거네요. 하지만 제가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아니요. 아저씨가 있으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유강후는 그녀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가슴 가득 퍼지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다연아... 유민준 걔는...”“전 걔랑은 끝났어요.”온다연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유민준이
온다연은 처음부터 유하령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유씨 집안이 다 무너지든 모두가 죽든 솔직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유강후가 저렇게 무너져 있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죄여들 듯 아팠다.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사람이니 상처도 받고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에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조금씩 물러서기로 했다.후회가 되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그 순간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다시는 네가 상처 안 받게 할게. 여기 바람이 좀 세네. 안으로 들어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장 비서가 따뜻한 팥죽과 집밥 느낌의 반찬들을 함께 보냈다. 팥죽이 양이 많지 않아서 온다연은 근처 음식점에 연락해 직접 빚은 만두를 더 주문했고 따뜻한 반찬도 한 상 가득 더 보냈다. 그리고 따라온 경호원들과 비서진도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었다.밥을 먹던 도중 누군가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와 유강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는 온다연을 향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너희끼리 먼저 먹고 있어.”온다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여기 있어. 잠깐이면 돼. 금방 올게.”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를 들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까놔. 돌아와서 같이 먹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 이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대표님, 정말 그냥 놔두실 겁니까? 설마... 진짜 용서해 줄 생각은 아니시죠?”유강후의 목
그때 유하령이 옆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아. 아빠가 죽었어.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요!”그 소리에 유재성이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유강후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유하령 당장 끌어내. 간호사, 의사 불러요. 빨리!”유재성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네 큰형… 가서... 빨리 가서 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서...”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엔 이미 숨이 멎은 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있었다. 의료진이 마지막 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상태였다.유민준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복도와 방 안 바닥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유강후가 다가서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자성 씨는 휴게실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한 상태였고 발견 당시엔 이미 호흡이 없는 상태였습니다.”유강후는 멍하니 굳은 채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강후라고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랴.어찌 됐든 자기 형이었고 어릴 땐 정말 서로 우애가 좋았다.진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유하령을 감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그 뒤로 천천히 멀어졌고 결국엔 남이 되어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해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자성이 이런 방식으로 끝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는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료진이 유자성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유민준이 그의 옷깃을 잡고 울부짖었다.“작은아빠... 이게 진짜예요? 아빠 진짜... 진짜 죽은 거예요? 작은아빠, 아빠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돌렸고 차갑게 말했다.“민준아, 네가 아직 남자로 살고 싶다면... 아버지 장례 제대로 치러. 네가 맡은 회사 두
유재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유자성을 보지 않았다.유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식의 손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유하령과 유민준을 멈춰 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문 앞에 무릎 꿇고 있어. 절대 일어서지 마. 그래야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실 수 있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는 진짜 끝장이야. 예전에 너희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다 너희를 죽도록 밟고도 남을 사람들이야.”유하령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자성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특히 너, 유하령. 또 사고 치면... 바로 해외로 보내버릴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오늘 이 사단... 절반은 네가 만든 거야.”유하령은 울먹이며 애원했다.“아빠...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쫓겨나는 건 싫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자성은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났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다 감췄고... 결국 오늘 이런 꼴이 났네. 다 내 책임이니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하령아, 성질 좀 고쳐. 앞으로 사람 대할 땐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 나쁜 생각 갖지 말고 받은 호의엔 반드시 보답해야 해. 부모 말고는 조건 없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유하령과 유민준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과 절망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의 눈앞에서 유자성은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여기 그대로 있어. 할아버지가 용서 안 하신다고 해도... 일어나지 마라. 난 짐 좀 챙기고 금방 올게.”그는 마지막으로 두 자식을 깊게 바라보고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30분쯤 지났을까.복도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졌다.“사람이 자살했어요!”“피가... 피가 너무 많아!”“빨리 응급실로!”“늦었어요... 이미 숨이...”“유 회장님 장남이라잖아! 큰일 났어!”...유하령과 유
“제발... 제발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재산은 하나도 원하지 않아요. 단 한 푼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그냥 본가에 남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아들로 남게만 해 주세요...”하지만 유재성은 눈을 감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그만 가. 네 자식들 데리고 이 집을 나가. 네 호적은 이미 본가에서 정리하라고 지시했어. 앞으로 넌 유씨 가문의 자손이 아니야. 너희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나 유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유자성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깊이 숙여 유재성을 향해 세 번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평생 아버지의 아들이라 믿어왔습니다. 그게 제 자랑이었어요... 제가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니... 본가에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럴 만큼 제가 큰 죄를 지은 거겠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겠죠.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령이랑 민준이... 애들까지 함께 쫓아내진 말아 주세요. 애들은 아직 젊고 앞길이 먼 아이들이에요. 본가에서 내쳐진다는 건 그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될 겁니다. 사람들 눈에 짓밟히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야 해요.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다 제 책임이에요. 제가 잘못 키웠습니다. 전부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유재성은 싸늘하게 대답했다.“너랑 나... 부자지간 인연은 여기까지야.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만하고 그냥 가.”그제야 유하령의 표정이 무너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거짓말이죠? 우리 속이시는 거죠?”유민준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지만 아무 말 없이 유재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할아버지... 전 그동안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벌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제발...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제대로 살겠습니다.”그는 진심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철도 들었으며 맡은 두 회사 역
유자성은 입술을 달달 떨며 중얼거렸다.“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전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저 재산 같은 거 원하지 않아요. 한 푼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본가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그러나 유재성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젠 됐어. 나는 너한테 줄 것도 빚진 것도 없어. 나도 오래 못 살아. 죽기 전까진... 더 이상 너희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의 얼굴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고 그는 입술을 떨며 되뇌었다.“아버지...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그의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그 친자확인서는 진짜였고 유재성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그는 어릴 적부터 유재성 곁에서 자라났다.젓가락을 처음 쥐는 법, 글씨를 쓰는 법, 첫 출근 날의 마음가짐까지... 모든 것을 유재성이 직접 가르쳐줬다.그는 누구보다 유재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그래서 그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친자확인서는 진짜였어. 아버지가 나를 본가에서 내치려는 것도 진심이네. 그렇다면 나는 진짜... 본가 사람이 아니겠네.’그가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씨와 신처럼 떠받들었던 아버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본가의 명예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모든 것과 그가 수없이 입 밖으로 칭찬했던 동생 유강후조차... 결국 단 한 번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그 모든 건 그의 친부모가 목숨으로 대신한 빚이었고 남이 던져준 은혜에 불과했다.오만하고 자존심 강했던 유자성... 태어나서 한 번도 고개 숙여본 적 없는 본가의 장남이 알고 보니 그저 남의 집에서 얹혀살던 양자에 불과했다.그 진실은 마치 뾰족한 바늘처럼 그의 모든 꿈과 자존심을 찢어버렸다.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세상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고 지금 이 순간조차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두 번이나 사정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호복을 가다듬은 뒤 안으로 들어가 손에 쥔 약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아버님께 이 약을 드려요.”유강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다연아...”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고 싶은 말은 집에 가서 해요. 난 원래 그렇게 대인배 아닌 사람이에요. 날 해쳤던 사람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분은 당신 아버지잖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물러서 줄 수 있어요. 아저씨, 제 마음 저버리지 마요.”그 말에 유강후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까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춘 채 약 하나를 꺼내 유재성의 입에 넣어주었다.약을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재성은 숨이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후야, 이게 무슨 약이냐?”유강후가 답했다.“곽 박사님이 다연이 몸조리하라고 주신 거예요. 다 먹지 않고 열 알 남겨뒀는데 혹시 몰라서요. 솔직히 저도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해가 되진 않으니까요.”유재성의 눈빛이 반짝였다.“곽혜진? 그 여의사 말이야?”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때 유하령은 온다연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너 지금 내 할아버지한테 무슨 약 먹인 거야? 우리 할아버지 몸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따위가 내놓은 천한 약 따위 함부로 먹이면 안 된다고!”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친자확인서를 집어 들었다. 대충 읽어본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너... 너희 아버지가 유 회장님 친아들이 아니야?”유하령이 반박하기도 전에 온다연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와, 오늘 진짜 운수 대통이네.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유하령은 절규하듯 외쳤다.“그건 거짓말이야. 전부 조작이야. 우리 아빠가 본가 사람이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이건 다 네 계략이야. 온다연, 왜 날 이렇게까지 망치려고 해?”온다연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하령, 넌 늘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 무
“네 아들 유민준... 그동안 무슨 사고들을 쳐왔는지 너도 잘 알겠지. 그나마 요 몇 년 좀 나아졌다 싶어서 내가 본가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두 회사를 맡긴 거야. 그 애 실력으로 그 두 회사 꾸려나가는 것도 벅찰 거야.”“그리고 네 딸 유하령은 어떤 인간인지 너 스스로 모르겠어? 예전 그 일들을 진짜 네 능력으로 덮은 줄 알아?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한 사람은 현미와 강후야. 그 은혜 때문에 내 결혼을 망쳤고 내 딸을 희생시켰어. 다른 누구든 나를 원망해도 돼. 다 괜찮아.하지만 너, 유자성. 너만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자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버지, 아버지가 결혼생활 망친 걸 제 탓으로 돌리실 순 없죠. 그리고 제 어머니도 죄 없는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강현미도 그 자리에 있었을 리 없었겠죠.”그 말에 유재성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내가 평생 키워온 놈이 고작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었다니...”그는 분노 섞인 시선으로 유자성, 유민준, 유하령을 차례로 훑어보며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지금 여기서 내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강후야, 책상 위에 있는 다른 서류봉투를 저놈한테 줘라.”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 서류봉투를 유자성에게 던졌다.유자성은 그 안에 또 다른 유언장이 들어 있을 줄 알고 펼쳤지만 그 안엔 뜻밖에도 친자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그는 확인서의 이름과 결과를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옆에 있던 유하령도 깜짝 놀라 확인서를 낚아채더니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니에요. 이건 조작이에요. 전부 다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려고 짠 계략이잖아요!”“분명 온다연이야! 그 여자... 분명 삼촌한테 뭔가 시킨 거야. 나를 망하게 하려고 다 내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 거라고!”“닥쳐!”유강후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