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는 천천히 나은별 앞으로 걸어가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했다.“다연이 성격으로는 절대 남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지 않아.”나은별은 눈을 감았다.“강후 씨는 이미 속으로 나한테 사형 선고를 내렸어. 이해해.”유강후의 표정은 싸늘했고 차갑게 목소리를 낮췄다.“나은별, 네가 날 구해준 건 사실이고 내가 너에게 빚진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그게 네가 내 주변 사람들을 함부로 해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야. 네가 정말 그런 짓을 했다면 난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나은별은 고개를 숙이고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강후 씨, 온다연 하나 때문에 유씨 가문과도 연을 끊으려 하고 이제 그 여자 때문에 몇 세대를 이어온 가문과 다툴 생각이야?”유강후는 차갑게 대꾸했다.“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잠시 멈칫하더니 그는 이어서 말했다.“네 나이도 이제 적지 않아. 곧 서른이잖아. 경운시의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마음에 안 든다면 내가 해외에서라도 찾아줄 수 있어!”이 말에 나은별은 고개를 번쩍 들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날 해외로 시집보내겠다는 거야?”유강후의 눈은 냉혹한 빛으로 번쩍였다.“네가 온다연에게 다시 다가가면 정말 해외로 보낼 수도 있어. 기억해둬. 난 말한 건 반드시 지킨다는 거.”“다연이는 내 최후의 선이야. 네가 다연이에게 손을 대지 않았길 진심으로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그는 돌아서서 멀리서 다가오는 검은 벤츠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소이섭도 같이 갈 수 있어. 아프리카는 이섭이 같은 의료 인재가 아주 필요하니까.”나은별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우릴 아프리카로 보내겠다는 거야?”직접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차가운 눈빛은 이 말이 진심임을 드러냈다.그러자 나은별의 눈에 증오가 스쳤다.“강후 씨, 난 강후 씨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그때, 소이섭이 차에서 급히 내려 나은별의 상태를 확인했다.입안의 피는 구강 손상 때문이었지만 손가락은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고 골절이 의심스러웠다.
앉자마자 야구 모자를 쓴 소년이 급히 뛰어 들어왔다.온다연을 보자마자 그는 마스크를 벗으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누나, 드디어 날 만나주셨네요!”그러면서 온다연의 손을 잡으려 했다.하지만 온다연은 그의 손길을 피하며 테이블을 가리켰다.“네가 좋아하는 커피랑 디저트 시켜뒀어.”테이블 위의 카페라떼와 나폴레옹 케이크를 본 주희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누나 제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도 기억하네요!”온다연은 구월이를 품에 안고 익숙한 거리 풍경을 아련하게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이번이 너랑 마지막으로 함께 먹는 자리야.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네가 직접 주문해.”이 말에 주희가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누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마지막이라니요?”온다연은 시선을 돌려 주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떠날 거야. 네게 부탁 하나 하고 싶어서.”주희의 예쁜 눈동자에 슬픔이 번졌다.“누나, 어디 가려고요?”온다연은 담담히 말했다.“구월이를 네가 좀 돌봐줬으면 해. 내가 떠나면 이 아이는 주인 없이 외롭게 될 거야.”그녀의 말은 진지했다.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한참 동안 멍하니 있던 주희의 눈에 서서히 눈물이 고였다.“누나, 혹시 내가 너무 귀찮게 굴어서 떠나는 거예요?”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너 때문이 아니야.”“그럼 유강후가 누나한테 못되게 굴어서죠?!”그는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그 자식이 누나한테 못되게 굴다니 내가 당장 가서 죽여버릴 거예요!”“주희야!”온다연은 목소리를 높이며 단호히 말했다.“철 좀 들어야 하지 않겠어? 난 단순히 떠나는 거야.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고.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래? 대체 언제 어른 될래?”주희는 조용해졌다. 눈을 내리깐 채 한껏 주눅 든 표정이었다.뒤이어 온다연은 구월이를 그의 품에 안겨주며 말했다.“너 고양이 좋아하잖아. 그래서 너한테 부탁하려는 거야. 내가 다시 올 기회가 생기면 데리러 올게.”주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구월이의 털을 쓰다듬었다.온
그 아이가 친자식이든 아니든 온다연은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며 아껴왔다.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고 있었다.만약 유강후와의 얽히고설킨 인연이 없었다면 아마 그 아이를 진짜 친자식처럼 키웠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제 그녀는 떠나야 했다.가슴 한구석이 허전하고 아픈 감정이 다시 밀려왔다.온다연은 얼굴을 감싸 쥐고 속삭이듯 말했다.“차라리 아저씨를 몰랐더라면 좋았을 텐데.”밤바람이 그녀의 말을 순식간에 흩어놓았다.그러나 기억 속에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그날 이후 얼마나 많은 밤을 유강후는 이 말을 떠올리며 가슴을 도려내는 고통을 느꼈는지 모른다.유강후는 그녀를 안아 올려 차로 걸음을 재촉했다.한옥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온다연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이 곁에서 밤을 지새웠다.다음 날, 그녀는 직접 백화점에 가서 아이 옷과 신발을 한가득 샀다.이번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을 샀고 따라온 차에 다 실리지 않아 몇 대의 차를 더 불러야 했다.그 물건들을 정리하던 장화연은 옷과 신발들이 아이가 여섯, 일곱 살이 넘을 때까지 충분히 입을 수 있을 정도로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묘한 느낌이 들었다.마치 온다연이 모르는 사이에 그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온다연의 행동은 너무나 평범했고 오히려 그녀를 ‘화연 씨’라고 부르며 더욱 예의를 차렸다.그날 점심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부탁하며 깨끗이 비우기까지 했다.오후에는 커다란 붓꽃 다발을 사람들에게 시켜 거실과 화실에 꽂아두었다.온다연이 정성껏 꽃줄기를 다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장화연은 자신의 생각이 지나친 것 같다고 느꼈다.저녁에 온다연은 장화연에게 한 폭의 그림을 선물했다.그림 속 장화연은 커다란 붓꽃 다발을 품에 안고 꽃밭에 서 있었고 멀리서 군복을 입은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를 향해 있었고 그 안에 애틋한 사랑이 흐르고 있었다.그 그림을 보고 장화연은 넋을 잃었다.평소 단 한 번도 실수하지
“몇 킬로그램의 강력한 폭약이라면 산 하나쯤 날려버릴 수 있겠죠!”“김원도는 이미 사모님에게 대역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정체가 들통나면 그 사람은 즉시 인질을 죽이고 폭약을 터뜨릴 겁니다!”“그곳 근처에 일반 주민도 있습니다. 폭발을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온다연은 서재 문 앞에서 30분 넘게 서 있었다.그러나 안에서는 여전히 뚜렷한 대책이 나오지 않았다.더는 들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아이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서재 안에서는 진시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가겠습니다. 이번엔 분장을 더 완벽하게 하고 인체 모형 가면까지 쓰면 절대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그러나 로운이 그녀를 제지했다.“안 돼. 이번 상황은 이전과 달라. 김원도는 이미 너의 정체를 알고 있어. 만약 들통나면 너와 나은별 씨까지 위험에 빠질 거라고.”진시현이 강하게 말했다.“저 지금 사모님 흉내 내면 90%는 비슷하게 보일 수 있어요! 머리도 사모님처럼 자르고 평소 입던 옷 입고 말만 아끼면 절대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로운이 더 말하려는 순간, 유강후가 입을 열었다.“여기, 다연이 옷을 가져와서 진시현한테 입혀.”곧 옷이 준비되었고 진시현은 온다연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그녀의 모습을 본 모두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진시현은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기 위해 그동안 온다연의 말투와 행동까지도 철저히 연습해왔다.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이지만 온다연이라고 착각할 만큼 흡사했다.결국 진시현이 온다연으로 변장해 나은별을 구출하기로 했다.진시현은 일류 저격수였고 신체 능력도 뛰어났다.만약 그녀가 김원도와 안에서 한 시간만 버텨준다면 함께 투입되는 폭탄 해체 전문가가 위험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었다.이것이 모두가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이었다.시간이 촉박했기에 계획은 이렇게 결정되었다.마무리로 유강후가 진시현에게 말했다.“내일 출발할 때 슬픈 척 연기 좀 해줘. 더 많이 울고 나한테 너를 나은별과
H 국, 동남아시아, 유럽, 북미, 사막, 초원, 바다...온다연이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다가올 좋은 날들을 생각하니 유강후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그는 아이 곁에서 잠든 온다연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아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늦었으니 아이는 혼자 재우고 우리도 쉬자.”온다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저항하지도 않았다.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잠겨 그날 밤 아무 말 없이 밤을 보냈다.다음 날 아침 온다연이 눈을 떴을 때, 유강후는 이미 집을 떠난 상태였다.그녀는 마당에 있던 경호원들과 하인들이 절반 이상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에게 장화연이 다가와 말했다.“김원도 쪽 문제는 거의 해결됐습니다. 경호원들과 하인의 대부분은 영운산 별장으로 이동했어요. 사모님께서는 오늘부로 자유롭게 다니셔도 됩니다. 학교에 가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가실 수 있어요. 더 이상 경호원이 따라다니지 않을 겁니다.”온다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오랜만에 학교에 가보고 싶네요.”“화연 씨, 아침 준비는 하지 않아도 돼요. 학교 식당에서 먹을 거니까.”그렇게 그녀는 한옥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온다연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자 장화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제야 모든 것이 조금씩 평온해지는 듯했다.그러나 온다연이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회색 SUV 한 대가 그녀 앞에 급히 멈춰 섰고 차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손 하나가 튀어나와 그녀를 강제로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온다연은 깜짝 놀랐지만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낯선 향기가 코를 찔렀다.그리고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차 안에 있던 남자 중 한 명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손을 뻗으려 하자 다른 남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그를 저지했다.“시간 지체해서 들키기라도 하면 너도 나도 끝장이야! 얼른 넘기자!”이 말에 그는 아쉬운 듯 손을 거둬들이며 온다연을 힐끔거렸다.“유강후의 여자라 그런지 진짜 예쁘긴 예쁘네. 평생 이렇게 예
온다연은 자신을 끌고 가는 사람들을 따돌리고 유강후에게 달려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묻고 싶었다.‘나은별을 위해서 날 희생하는 거야? 나은별이 그렇게 중요해?’그러나 두 걸음을 떼자마자 창고의 문이 열렸고 나은별은 묶인 채로 끌려 나왔다.그녀는 피투성이 된 얼굴로 온다연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나은별과 김원도는 서로 손을 잡은 관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완전히 미쳐버린 김원도가 그녀의 얼굴을 망쳤고 추악하고 더러운 남자 몇 명을 불러 성폭행하는 것도 모자라 대량의 사진과 영상을 찍었다.그 사진과 영상들은 나씨 가문을 무너뜨리고, 나은별을 망치고, 영원히 쥐 죽은 듯 숨어서 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당장이라도 김원도를 산산조각 내고 싶었지만 그것보다도 온다연에 대한 증오가 훨씬 컸다.온다연만 없었다면 지금처럼 비참하지 않을 것이고 유강후와 진작에 결혼하여 강씨 가문과 유씨 가문의 사모님 노릇을 하며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온다연이 끌려왔다는 것이다.‘쓸모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일 처리를 잘하네. 나중에 보상이라도 줘야겠어.’더 중요한 건 유강후가 아직도 온다연을 알아보지 못했다.‘절대 온다연이라는걸 알게 해서는 안돼.’유강후가 직접 온다연을 내놓는다면 모든 일이 완벽하다. 설령 나중에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한들 모든 책임을 김원도에게 돌리면 그만이니까.게다가 온다연의 성격상 이 일을 통해 유강후에 대한 모든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나은별의 입가에는 어느새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유강후와 온다연의 관계는 오늘부로 완전히 끝났다.김원도도 절대로 온다연을 놓아주지 않을 테니 온다연의 결말은 그녀보다 10배, 100배 더 비참하다.‘그러게 왜 강후 씨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이런 사단을 만들어. 넌 그 대가를 치러야지.’나은별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온다연과 바꿔치기하고 싶었다.그녀는 목청껏 유강후를 향해 울부짖었다.“강후 씨, 살려줘. 이 사람들이 내 얼굴을 그었어.”“강후 씨, 제발 나 좀
온다연은 곧바로 바닥에 쓰러졌고 동시에 그녀의 얼굴도 금방 부어올랐다.귀에서는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예전에 괴롭힘당했을 때 맞았던 것과는 수준이 아예 달랐고 어찌나 힘이 센지 귀가 잘못된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심지어 귀에서 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오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화가 풀리지 않았던 남자는 온다연의 입을 막고 있는 테이프를 뜯어내며 욕설을 퍼부었다.“맘껏 소리쳐. 어차피 널 구하러 오는 사람은 없을 거야. 버려진 주제에 도망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이게 너의 운명이야. 넌 평생 버림받을 운명이라고. 알아?”온다연의 귀에서는 여전히 윙윙 소리가 났고 절망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그녀는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몰랐다. 남들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언제 어디서나 온다연이 가장 비참했다.너무도 억울했다.남자는 몇 마디 욕을 하고는 온다연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심상치 않은 상황에 온다연은 오늘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밀려왔다.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그녀는 남자를 뿌리치며 필사적으로 뒤로 달려갔으나 도망칠 방법은 없었고 곧바로 그들에게 잡혀 왔다.온다연은 절망에 빠져 비명을 질렀다.“유강후!”“넌 평생 지옥에서 살 거야. 내가 저주할 거라고!”이때 유강후가 고개를 돌렸다.‘이 목소리는 다연이다.’곧이어 그들에게 발길질을 당한 온다연이 바닥을 구르며 안으로 들어왔고 그녀의 동선을 따라 뒤에는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뼛속 깊은 곳의 두려움이 터진 유강후는 공포에 질려 온몸을 떨며 미친 듯이 달려갔다.“다연아.”그제야 사람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돌리더니 유강후를 보며 비웃었다.“설마 약속을 어기는 건 아니지? 설마 모든 일이 네 뜻대로 될 거라고 생각했어? 자기가 무슨 대단한 사람인 줄 아네.”곧이어 그는 손짓했다.“문 닫아.”세상이 두 조각으로 갈라진 듯 무거운 철문이 쾅 닫혔고 마치 영원히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점점 커졌다.유강후는 미친 듯이 앞
“주변 10km 이내의 모든 출구를 봉쇄해.”“송지원한테 저격수 500명 더 필요하다고 연락하고 교차로에 배치해. 수상한 사람이 보이면 그게 누가됐든 절대 놓쳐셔는 안 돼.”“드나드는 모든 차량, 모든 인원을 하나도 빠짐없이 샅샅이 수색하고.”“일단 반경 10km부터 시작해서 점차 범위를 넓혀가는 거야.”유강후가 말을 마치자마자 창고 건물 위 스피커에서 김원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강후, 이건 예상 못 했지? 네가 아무리 잘 숨겨도 금방 찾아낸다니까? 넌 나한테 상대가 안 돼.”“하하하. 이렇게 멍청할 줄은 몰랐어. 제일 사랑하는 여자를 나은별 그 쓰레기랑 교체하다니. 그것도 자기 손으로 직접.”“이다 하루코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네 여자는 그것보다 천배 만배 더 비참하게 죽을 거야.”“내가 겪었던 고통은 너한테 백배로 돌려줄 테니까 각오해.”“하하하. 병X.”순식간에 표정이 굳은 유강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터뜨려. 당장 터뜨리라고.”이때 나은별이 나서서 그를 붙잡았다.“일단 진정해. 이권 씨의 말을 듣자. 여긴 일반인이 많은 지역이라서 너무 위험해. 폭탄이 터지면 아무도 감당하지 못한다니까? 나중에 그 책임을 누가 질 건데? 강씨 가문이랑 유씨 가문이 힘을 합쳐도 감당하지 못할 사이즈잖아.”유강후는 눈빛이 돌변하더니 망설임 없이 그녀의 목을 졸랐다.“나은별,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경고하는데 또다시 날 귀찮게 하면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 나씨 가문도 마찬가지고.”“꺼져.”그는 나은별을 사납게 밀치고선 땅에 떨어진 폭탄을 주워 들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이때 밖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달려왔다.“대표님, 뒤쪽 산에 헬기 몇 대가 이륙했다고 합니다. 저희가 준비한 건 아니니 김원도가 틀림없습니다.”유강후는 돌아서서 말했다.“쫓아.”김원도가 온다연을 데리고 간 게 틀림없다.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유강후는 짧은 시간에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이곳에서 헬기로 4시간 떨어진 거리 안의 모든 항구를 봉쇄한 후 선박을
유강후는 흠칫하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왜 그렇게 생각해?”그러자 이권이 답했다.“솔직히 돌봐달라고 얘기했을때 충분히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잖아요. 싫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간병인을 보냈어도 되는데 직접 오겠다고 하는 걸 보면 본능적으로 도련님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입니다.”유강후는 그제야 기분이 조금 풀렸으나 여전히 동국 왕자가 신경 쓰였다.‘세기말 감성도 아니고 뭔 왕자야. 어이가 없네. 다연이한테 딴마음 품으면 죽여버릴 거야.’곰곰이 생각하던 유강후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집사가 방금 얘기한 동국 왕자, 설마 연씨 가문 후계가 중 한 명이야?”이권이 답했다.“연시온 씨입니다.”유강후는 여전히 쌀쌀맞았다.“그 사람이었구나. 유능한 건 맞는데 연씨 가문에는 후계자가 될 후보가 너무 많아서 아마 순위에도 못 들 거야. 가서 경고해. 다연이한테 치근덕거리면 연씨 가문의 후계자에서 제명해 버린다고.”“아시다시피 말레이시아 해상 유전 개발업체는 현재 저희와 연씨 가문과 협력하고 있습니다. 연씨 가문에서는 차기 후계자로 연시온 씨를 지명했고 이번 유전 개발 관련한 모든 사항도 전적으로 그분이 책임지고 있습니다.”이권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신국의 사업과 투자보다 훨씬 큰 유전이기에 그래서 당분간은 미움을 사지 않는 게 좋을듯합니다.”앞이 안 보일 뿐 유강후의 예리한 통찰력은 변함없었다.“잠깐만, 이건 처음부터 다연이를 위해서 준비한 프로젝트였잖아. 그럼 앞으로 다연이가 연시온이랑 컨택한다는 말이야? 내가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했지?”“연시온에게 다른 일거리를 던져줘. 그럼 연씨 가문에서 어쩔 수 없이 프로젝트 담당자를 바꿀 거야. 이런 사소한 일에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아.”이권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연씨 가문의 세력도 만만치 않거든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답했다.“로운한테 맡겨. 정 안 되면 연씨 가문의 주식을 우리가 먹어 치우고 내가 직접 하면 되잖아.”“말레이시아
“이 집사님, 저희 대표님이 지금 앞이 안 보여서 많이 예민해요. 말이 거칠어도 너그럽게 양해해 주세요.”이권은 두툼한 가죽 가방을 꺼내 집사에게 건넸다.이를 본 집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아이고, 전 이런 거 못 받습니다. 강 대표님한테 그 어떤 불만도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이권은 가방을 강제로 그의 손에 쥐여주며 태연하게 말했다.“실은 이 집사님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집사는 여전히 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돕겠습니다.”“일단 이것부터 받으시죠. 큰 부탁을 하려는 건 아닌데 부담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이 집사님한테는 쉬운 일입니다.”“어떤 부탁을 하시려는 거죠? 최대한 돕겠습니다.”이권은 병실 문을 힐끗 쳐다보고선 나지막이 말했다.“알다시피 저희 대표님이 최근에 실명해서 기분이 안 좋은 편이에요. 다름이 아니라 유나 씨에 관련한 일인데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제가 봤을 땐 저희 대표님이 유나 씨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거든요.”집사는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보였다.사실 진유나는 너무 아름다워서 그녀를 보는 사람마다 사랑에 빠지곤 했다. 그러니 오아시스 그룹의 대표를 사로잡는 것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유나 씨가 동국 왕자랑 저녁을 먹는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기분이 언짢아졌거든요. 어떻게 보면 집사님도 저랑 같은 일을 하는 입장이라 충분히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저희 같은 사람이 중간에서 비위를 맞추는 게 제일 힘들잖아요.”“그래서 말인데, 유나 씨에 대해서 뭔가를 알려줄 수는 없을까요?”집사는 기겁했다.“안 됩니다. 회장님이 알게 되면 전 죽은 목숨입니다.”그러자 이권이 차분하게 타일렀다.“대표님은 이성으로 유나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 진씨 가문에 대한 정보는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단지 유나 씨가 연애할 생각은 있는지, 아니면 결혼 계획은 있는지에 대해 궁금한 거예요.”“만약 두 분이 잘된다면 이 집사님은 분명
온다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선 손에 시계 상자를 든 채 쏜살같이 달아났다.진씨 가문 저택의 접대실.진수현은 동국에서 온 귀한 손님들과 함께 내년 협력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동국은 작은 크기에 비해 해상 자원이 풍부해서 가장 중요한 국제 항로와 해협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했다.진씨 가문과는 오랜 세월 협력해 왔고 매우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늘 온 사람은 동국의 미래 황실 후계자인 연시온이다. 그는 대범하고 유능하기로 소문이 자자했기에 진수현도 가문의 후계자를 그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다.안으로 들어선 온다연은 메인석에 앉아 있는 진수현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뭇사람들을 보았다.그녀가 들어서자 진수현은 흐뭇한 얼굴로 손짓했다.“여긴 내 딸이자 미래 진씨 가문의 후계자가 될 진유나예요. 인사들 나눠요.”연시온은 온다연을 보자마자 두 눈이 반짝였다.온다연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 하나 걸치지 않았다. 심지어 화장도 안 했는데 그 얼굴과 분위기는 미인대회 우승자보다 더 아름다웠다.특히 그녀의 하얀 피부는 뒤로 넘긴 검은 머리카락과 대조되어 유난히 더 반짝였다.연시온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진씨 가문에서 후계자를 찾았다는 얘기는 이미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진수현 부부에게 꽁꽁 감춰져 그동안 아무도 후계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한때 동남아 일대에서는 남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얼굴이 훼손되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라는 루머가 돌았다.그러나 현실은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매료시키는 미모의 여인이었다.안심의 복제판인 수준이다.외모로만 따졌을 땐 안심이 훨씬 더 뛰어났지만 진유나에게서는 소유하고 싶다는 치명적인 매력이 느껴졌다.단언컨대 승부심이 강한 남자라면 이런 여자에게 승부욕을 느끼기 마련이다.온다연은 연시온의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웠지만 예의상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협상이 절반 이상 진행된 때에 온다연이 더해지면서 예정보다 시간이 더
온다연은 불순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한 대 치고 싶었다.욕실로 가서 찬물로 샤워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침실을 나서자 마침 집사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강 대표님이 보낸 선물입니다. 사과의 의미로 보냈다는데 한번 열어보시죠.”온다연은 곧바로 다가가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 들어있는 건 뜻밖에도 해바라기 유화였다.A4용지보다 작은 크기의 이 유화는 거장 모비크가 전성기 시절에 그린 걸작으로, 예전에 자가드 경매에서 160억의 고가에 낙찰됐다.이 그림은 모비크가 자신의 딸과 아들을 위해 그린 그림으로 원래는 두 개가 있었다. 하지만 그중 하나가 불에 타버렸고 남은 하나가 유일무이한 작품이 되면서 그 가치는 헤아릴 수 없는 정도였다.온다연은 줄곧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해바라기를 꼽았다. 게다가 그녀의 우상인 모비크의 작품이니 보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결국 그녀는 거절하지 않고 그의 선물을 받았다.입을 맞춘 거에 대해 뺨을 때렸으니 그 일은 정리된 셈이었다. 하지만 본인 때문에 눈을 다쳤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조금 들었고 선물까지 받았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온다연은 잠시 고민한 후 걸음을 옮기더니 진수현의 수집실로 걸어가 값비싼 골동품 시계 하나를 골랐다.그녀가 시계 상자를 들고나오는 것을 보고, 안심은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그 시계는 안심이 진수현에게 준 선물이었고 그들 부부의 사랑을 입증하는 증표나 다름없었다. 진수현한테 그 시계는 대대로 물려줄 가치가 있는 소중한 물건이었기에 미래 사위에게 선물하려고 지금껏 아껴뒀다.염지훈도 이 시계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고 진수현에게 여러 번 암시했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했다. 사실 진수현은 매번 온다연에게 물었는데 그때마다 온다연은 명확한 거절 의사를 밝혔다.그러던 그녀가 예상치 못하게 스스로 이 시계를 꺼냈다.안심의 시선을 눈치챈 온다연은 어설프게 시계 상자를 뒤로 숨기더니 태연한 척하며 입을 열었다.“강 대표님이 비싼 그림을 선물
온다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에요. 두 번밖에 못 봤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요.”안심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 정도면 괜찮지. 배경 좋고 잘생긴 데다가 능력까지 뛰어나니 여자들이 딱 좋아하는 스타일이잖아. 하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는 건 양날의 검이야.”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그런 남자에게 사랑을 받은 경험이 있다면 여자로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온다연의 얼굴을 더 빨개졌고 민망하게 괜히 언성을 높였다.“엄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전 좋아하지 않는다니까요?”안심은 부드럽게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엄마도 여자라서 다 알아. 하지만 강 대표는 너무 깊이 감추고 있어. 네 아빠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얻기 힘들어.”“우리가 알아낸 건 사랑하던 애인이 세상을 떠났고 그에게는 아이가 있다는 거야.”“다연아, 새엄마가 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네가 워낙 성격이 여려서 네 아빠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어.”순간 가슴이 미어진 온다연은 침대 시트에 머리를 파묻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그만해요. 전 그 사람 안 좋아해요.”안심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침대 머리맡에 있는 작은 빗을 가져와 온다연의 머리를 조금씩 빗겨주었다.온다연의 머릿결은 매우 좋았고 안심은 저도 모르게 젊었을 때가 떠올랐다.“우리 다연이는 예쁘고 착하니까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남자한테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정말 강 대표한테 마음이 가는 거면 엄마가 아빠한테 얘기해 볼게.”“다만, 그러기 전에 강 대표의 생각도 알아야겠지? 만약 아직도 옛 연인을 그리워한다면 엄마도 널 말릴 거야. 우리 딸은 온전한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니까.”사뭇 진지한 안심의 반응에 온다연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엄마,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절 구해준 건 맞지만 아직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안심은 그녀의 눈을 쳐다봤다.“정말?”그러자 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정말이에요. 그리
예전의 기억만 떠올리면 느껴지는 행복에 안심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짓게 되었고 온다연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온화하게 말했다.“우리 딸, 지훈이가 생각난 거야? 북아메리카 쪽에서 아주 순조롭게 일 진행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한 달 뒤면 돌아올 거야. 곧 올 거란다.”온다연은 꾸물꾸물 일어나더니 안심의 다리를 베면서 작게 물었다.“엄마, 저는 꼭 염지훈 씨랑 결혼해야 하는 거예요?”안심은 딸이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몰랐다.“어릴 때부터 약속한 거잖니. 그리고 몇 년 동안 지훈이가 널 계속 보살펴 주고 있기도 했고 내가 보기엔 두 사람 어느 정도 서로에게 감정이 있었던 같던데. 아니었니? 그건 왜 갑자기 물어보는 거니?”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깐 채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만지작거렸다.머릿속에 온통 유강후와 키스했던 장면이 떠올라 얼굴이 더 붉게 물들어버렸다.“별건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그녀는 재벌 가문이라면 정략결혼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호의호식하면서 자랐으니 당연히 어른이 되면 가문의 미래와 그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염지훈과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염지훈 어머니의 가문은 신국에서도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비록 진씨 가문보다는 못했지만 염지훈은 3년 동안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내며 신국의 젊은 세대 중 단연 독보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 점으로 가문의 부족함을 충분히 메울 수 있었다.제일 중요한 것은 그녀의 부모님이 염지훈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이다.그녀가 바꿔치기 되어 어딘가로 사라진 후에도 그녀의 부모님은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았기에 그녀는 진수현과 안심의 외동딸이 되었다. 앞으로 진씨 가문을 이어받아야 할 사람도 그녀였기에 염지훈은 최고의 강력한 조력자였다.하지만 정말로 이대로 염지훈과 결혼해도 되는 것일까?그녀는 나직하게 말했다.“염지훈 씨는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안심은 멍 때리는 딸을 보더니 무언가 눈치챈 듯 웃으며 말했다.“다연이는 지훈이가 싫어?”온다연은
온다연은 유강후는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고 어느새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모두 성인이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라면...”말을 마치기도 전에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버린 그녀는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리곤 얼른 일어나 도망치듯 나가버렸다.그녀는 지금 신분이 달랐기에 당연히 막아서는 사람이 없었고 병원 밖에는 진씨 가문의 경호원과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빠르게 차에 올라탄 그녀는 여전히 얼굴이 빨간 상태였고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집으로 가요. 빨리요!”진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고 나서도 그녀의 빨간 얼굴은 식을 줄을 몰랐다.마침 집에 있었던 안심은 자신의 딸이 허둥지둥 방으로 올라가는 모습에 걱정되어 따라 올라갔다. 온다연이 지내고 있는 방은 2층에 있었고 전통 느낌이 물씬 나는 아늑한 방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엔 아주 예쁘게 손질된 야자나무가 있었고 그 나무 주위로 빨간 장미가 예쁘게 피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은은한 장미 향이 정원에 가득 퍼지고 있었다.비록 화려한 인테리어는 아니었지만 전통 느낌이 나는 인테리어였고 벽은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밝고 활기가 느껴지는 색으로 칠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전부 온다연이 그간 받았던 상과 작품이 걸려 있었고 다른 한쪽 벽에는 아주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도자기 같은 것은 당연히 있었고 소파에 대충 내려놓은 작은 부채도 전부 유명한 장인이 만든 것이었으니 진수현 부부가 딸을 얼마나 아끼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문을 열자 안심은 침대에 엎드려 누워있는 온다연을 보게 되었다.그녀의 각도에선 마침 온다연의 빨개진 두 귀가 보였다. 늘 온순하고 얌전했던 온다연은 예의를 저버리는 일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지만 병원에 다녀온 뒤로 들어올 때부터 허둥지둥하더니 목소리에서도 떨림이 느껴져 안심은 다소 걱정되기 시작했다.안심은 가까이 다가가 딸의 침대에 앉아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러니? 안 좋은 일이라도 있은 거니?”온다연은 자기 얼굴을 만졌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설마 지금 날 그 사람으로 착각한 건가?'자신에게 놀란 온다연은 그를 밀어내곤 이내 그의 뺨을 때려버렸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놀라면서도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변태예요?”화가 난 상태로 때린 것이라 손아귀엔 힘이 꽤나 들어갔고 유강후의 입가는 터져 피가 새어 나왔다.유강후는 입가에 흐른 피를 만지며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괜찮아, 때리라고 해. 잊어도 상관없어. 내 눈앞에만 있으면 돼.'‘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하기보다 지금이 더 좋으니까. 이걸로 이미 충분해.'‘내가 너무 성급했던 거야. 그러니 다 내 잘못인 거야.'아침에 찾아온 상담사가 이미 그에게 말을 해줬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온다연이 천천히 그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라고. 그 후에 다시 천천히 기억을 되찾게 하는 것이라고.만약 갑자기 모든 걸 떠올리게 한다면 온다연은 버티지 못할 것이고 겨우 다시 쌓아 올린 심리적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져 가볍게는 심한 우울증에 걸릴 수 있고 심하면 자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던지라 그는 당연히 의사의 말에 협조해야 했다.죽음의 문턱까지 갔지만 그녀가 살아만 있다면 그는 뭐든 참을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었다. 방금은 그저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에 가슴이 너무도 아파 참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유강후는 담담하게 말했다.“방금은 충동이었어요. 미안해요, 유나 씨. 뺨 한 대로 부족한 것 같다면 더 때려도 돼요.”온다연은 너무도 심란했다. 염지훈과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그와는 그저 이마만 맞대봤을 뿐이다. 아무리 참을 수 없다고 해도 손만 잡은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녀를 안았을 뿐만 아니라 허벅지에 앉혀 키스하지 않았는가.“오아시스 그룹의 대표님이라는 사람이 여자를 처음 보는 건가요?”유강후는 동문서답했다.“유나 씨는 정말로 아무런 느낌도 없는 건가요?”예전에 아주 행복했을 때 온다연은 항상 먼저 그에게 달려와 키스를 했었고 더 행복했
온다연의 기억은 억지로 지워졌기에 3년 동안 점차 과거의 인연과 일들을 잊게 되었고 과거의 고통도 잊게 된 것이다.하지만 이런 최면은 부작용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예전에 익숙했던 사람과 일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머리가 엄청 아플 것. 중요한 기억일수록 그에 따른 고통은 더 심했다.어쩐지 그녀가 어제 자신을 보았을 때 고통스러워하며 혼절했던 것이 이해가 갔다. 그런데 이번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니 분명 무언가가 떠오른 것이다.공기 중에 피어오르는 계화 향기에 유강후는 바로 아침 메뉴에 계화 디저트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손을 뻗어 계화 디저트를 찾으려고 했지만 실수록 뜨거운 계화 디저트를 쏟게 되었고 전부 그의 손등에 쏟아져 버렸다.그는 언성을 높였다.“오늘 아침은 누가 가져온 거지?”이권은 소리를 듣고 바로 달려 들어왔지만 오자마자 눈물 흘리는 온다연과 화가 난 유강후를 맞이하게 되었고 다급하게 대답해 주었다.“아침은 저희 쪽 주방장이 만든 겁니다. 여기서 만든 음식인데 혹시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주방장은 저희가 경원시에서 데리고 온 주방장입니다.”유강후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계화 디저트를 만들라고 했지?”이권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주방장은 장 집사님이 준 식단대로 만든 겁니다. 전부 사모... 즐겨 드시는 음식입니다.”유강후의 목소리엔 서늘함만 남았다.“앞으로 이 디저트는 만들지 말라고 해. 당장 가져가!”이권은 하는 수 없이 사람을 불러 계화 디저트를 버렸다. 가기 전 그는 화상을 입은 유강후의 손등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도련님, 손등이...”유강후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했다.“신경 쓰지 말고 나가!”말을 마친 그는 테이블을 만지며 천천히 온다연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손끝에 닿은 눈물에 유강후는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조금 전 뜨거운 물에 뎄을 때는 별다른 감각이 없었지만 온다연의 눈물을 만지니 너무도 아팠다.그는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