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 얼른 내려와서 구해야지. 내려와.”“이다 하루코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온다연도 똑같이 될 거야.”사실 온다연은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 의식이 별로 없었고 김원도가 하는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그러나 유강후가 나은별을 위해 자신을 버렸다는 것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김원도는 온다연을 절벽에 가장 가까운 나무판 위에 던지고선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사납게 웃었다.“넌 잘못한 게 없으니까 죽이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유강후가 직접 보내줬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잖아?”온다연은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볼 뿐 대답할 힘이 없었다.“운명이니까 받아드려. 탓하려던 유강후를 사랑하게 된 너 자신을 탓해.”“유강후 마음속에서 넌 나은별보다 못한 존재야. 나은별이 얼마나 독한 여자인지 알지? 그렇게 많은 사고를 쳐도 유강후는 지금도 나은별을 구하려고 애를 쓰잖아. 멍청하기는.”“날 망가뜨리면 모든 걸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나 본데 틀렸어. 오늘부터 유강후는 매일 지옥에서 살아야 하거든.”“네가 죽는 모습을 보여줄 거야. 얼마나 비참하고 처참한 방법으로 죽는지 유강후에게 보여줄 거라고.”“유강후는 나보다 백배, 천배 더 고통스럽게 살았으면 좋겠어.”“원망하지 마. 네가 눈이 멀어서 잘못된 사람이랑 사랑에 빠진거니까 날 탓하면 안 돼.”“이제 끝인가? 죽어서 이다 하루코 만나게 되면 꼭 얘기해줘.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하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말하는 사이에 헬기 몇 대가 착륙했다.김원도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고 밧줄을 꺼내 온다연을 정자 기둥에 묶은 뒤 가장 가까운 선박에 올라탔다.강한 바다 바람 탓에 파도는 온다연의 뒤편의 절벽에 부딪쳤다.마치 죽음을 재촉하는듯한 파도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시간이 촉박한 탓에 김원도는 밧줄을 너무 세게 묶지 않았고 온다연이 몇 번 발버둥 치자 밧줄이 풀려 바닥에 떨어졌다.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가던 온다연은 더 이상 자신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눈앞이 어두워져 그 어떤 것도 보
한 달 후.초여름의 바람은 달콤함을 실어 산 전체를 꽃밭으로 물들였다.신국 진씨 가문의 정문이 활짝 열리자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천천히 들어섰다.차가 멈춰서자 집사가 달려와 문을 열고선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지훈 씨, 환영합니다.”염지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렸다.훤칠한 키와 다부진 몸매에 맞춤 정장까지 더해지니 멋짐은 배가 되었다.우산을 펴고 뒷좌석의 문을 연 염지훈은 차에서 졸고 있는 작은 형체의 누군가를 사랑스럽게 바라봤다.“깼어? 도착했어.”눈을 뜬 온다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하늘색 원피스는 그녀의 잘록한 허리와 긴 다리를 부각했고 하얀 피부는 오늘따라 더 눈부시게 빛났다.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을 같은 계열의 다이아몬드 클립으로 묶자 어깨선과 가녀린 피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다만 너무 야위어 얼굴에 병색이 역력했다.온다연을 본 집사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지훈 씨, 이분은...”염지훈은 손을 저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집사님 생각이 맞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도 계획이 있으니 당분간은 알리지 말아주세요.”집사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울먹였다.“지훈 씨는 정말 진씨 가문의 은인입니다. 어느덧 20년이 지났네요. 그동안 단 하루도 마음 편히 보낸 적이 없습니다. 사모님은 3년 동안 회장님과의 만남을 거부했고 회장님도 처자를 그리워하며 건강이 나날이 나빠지고 있습니다.”염지훈은 웃으며 답했다.“이제 웃는 날만 가득할 겁니다.”그는 손을 뻗어 온다연의 이마를 만지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벌써 3일이나 열이 안 났네. 지난달에 비하면 엄청 좋아진거야.”염지훈이 허리를 굽혀 안으려고 하자 온다연은 단칼에 거절했다.“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이 저택에는 커다란 장미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정원 곳곳에 꽃이 피어 마치 그림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한 달간 병원에만 있던 온다연은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에 빠져들었고 마음이 편안해진 듯
염지훈은 온다연의 앙증맞은 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반드시 좋아질 거야. 의사 선생님도 재활만 잘하면 몇 년 안에 나을 거라고 하셨잖아.”온다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집사의 인솔하에 그들은 긴 복도를 지나 넓은 거실로 들어섰다.홀 중앙에는 키 큰 남자가 그들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개량한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대부분 백발이었다.남자가 등을 돌리고 있어 나이를 가능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강한 포스가 고스란히 느껴졌다.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그 사람이 자꾸만 떠올랐고 동시에 기세가 꺾였다.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사람은 여전히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가슴 깊은 곳에서 전해진 고통에 숨이 막혀왔지만 애써 호흡을 가다듬으며 평정심을 유지했다.이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간이 부었구나? 내가 안 만난다고 여러 번 말했잖아. 이제는 하다못해 네 엄마를 들먹이며 날 협박해? 눈에 뵈는 게 없어?”염지훈이 웃으며 답했다.“그럴 리가요. 제가 어떻게 감히 협박하겠습니까. 전 그저 선물을 전해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을 가져왔으니 반드시 좋아하실 겁니다.”남자는 콧방귀를 뀌더니 손에 든 염주를 가볍게 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건방지구나.”염지훈은 온다연의 손을 잡고 남자에게 다가갔다.“단언컨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이 틀림없을 겁니다. 이 선물이 있다면 사모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건 시간 문제겠죠.”남자는 흠칫하더니 더욱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답했다.“감히 나한테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염지훈은 여전히 웃기만 했다.“일단 돌아서서 한번 살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직접 두 눈으로 보셔야지 그 감동이 배가 될 겁니다.”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알겠네. 자네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받아들이지.”염지훈은 온다연을 자신의 앞으로 내세웠다.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온다연은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러자 염지훈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없이 그녀의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온다연의 얼굴을 보고선 단호하게 말했다.“필요 없어. 얘는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과 차원이 달라. 내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 나 진수현의 딸이 맞아.”그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온다연의 믿을 수 없다는 듯 귀를 의심했다.염지훈이 예전에 지나가는 말로 신국 진씨 가문이 온다연의 본가일지도 모른다고 언급했었다. 그때는 그저 염지훈이 그녀를 신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고 여겼다.진씨 가문은 신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이니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자신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온다연은 생각하지 않았다.그 시각 눈시울이 붉어진 진수현은 온다연을 끌어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가야, 너의 이름은 온다연이 아니라 진유나야. 나 진수현의 딸이지. 유전자 검사를 안 해도 난 너를 한눈에 알아봤어. 네 엄마 젊은 시절과 똑 닮았거든.”온다연은 자리에 얼어붙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갑작스러운 친부모의 등장에 혼란스러웠고 슬퍼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눈앞에 있는 남자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더더욱 몰랐다.온다연이 자신의 딸이라고 확신한 진수현은 감격에 겨워하며 온다연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가자. 엄마한테 인사하러 가야지.”온다연은 고개를 돌려 염지훈을 바라봤다. 그러자 염지훈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다연아, 친아버지 맞아. 내가 유전자 검사해 봤어.”온다연은 나지막하게 물었다.“그걸 왜 이제야 얘기해줘요?”염지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미리 얘기해주고 싶었는데 너도 오늘 봤다시피 진씨 가문은 외부인을 절대 집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아. 내가 회장님의 머리카락을 얻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수현은 곧바로 염지훈을 째려봤다.“너 이 자식. 감히 내 머리카락으로 몰래 검사를 해? 건방지네.”염지훈은 웃으며 답했다.“절 만나주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저희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지난 몇 년
이때 사복을 입은 스님이 그들을 막았다.“만남을 거부할 겁니다. 그만 돌아가십시오.”진수현이 입을 열었다.“딸을 찾았다고 전해주세요. 이번에는 정말입니다.”스님은 온다연을 힐끗 보고선 한숨을 내쉬고 걸음을 옮겼다.멀지 않은 절 안, 청등고불 아래 흰옷을 입은 한 아담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갓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수수한 옷만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감추지 못했다.여인은 눈을 감고 슬픔을 담은 채 조용히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소희야, 수행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지 말라고 했잖아.”소희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회장님이 또 오셨습니다. 흰머리가 전보다 더욱 많아지셨는데 얼굴이라도 한번 비추시는 게 어떨까요? 솔직히 힘들어 보입니다.”여인은 여전히 눈을 감은채 나지막이 말했다.“그 사람과의 연은 이미 끝났어. 이번 생에는 다시 만날 일 없을 거야.”소희는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벌써 3년입니다. 3년 동안 회장님은 거의 매일 밤 이곳을 지키고 있어요. 오 집사님의 말에 따르면 최근에 건강이 많이 악화하였다고 합니다. 한 달 내내...”여인은 대답도 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염불을 외웠다.“오늘도 젊은 여자분과 함께 오셨는데 생김새나 분위기가 사모님의 젊은 시절과 매우 닮았습니다. 한번 가보시겠어요? 정말 아가씨가 돌아왔을 수도 있잖아요.”여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그녀의 두 눈은 온다연과 똑같았고 사람을 바라보는 특유의 분위기마저 매우 흡사했다.여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어젯밤에 꿈꿨어. 스님이 나타났는데 우리는 환생하는 날에 서로를 다시 만날거라고 하셨어. 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단호하게 얘기해야겠어.”말을 마친 후 천천히 문밖으로 나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산기슭에 있는 작은 문으로 그녀가 나왔다.
눈앞의 나타난 온다연은 외모뿐만 아니라 분위기나 행동까지 그녀와 매우 닮아있었다.그동안 친자확인서를 들고 와서 딸이라며 주장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안심은 매번 부인했다.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온다연을 달랐다.안심은 그녀에게서 친근감과 핏줄로 이어진 일종의 구속감을 느꼈다.온다연을 본 순간, 그녀는 어렸을 때 자신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리던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피가 솟구치는 것 같았고, 수년 동안 견뎌온 험난한 세월과 고난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듯한 개운함이 찾아왔다.어느새 눈물이 앞을 가렸고 안심은 감격에 겨워하며 온다연의 팔을 붙잡더니 손목 안쪽의 점을 찾았다.아니나 다를까 온다연의 손목 안쪽에는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진주알 크기의 반점이 있었다.그 점을 바라보던 안심은 떨리는 손으로 팔을 걷었고 그녀에게도 동일한 위치에 똑같은 반점이 있었다.당연히 온다연도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꿈같은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온다연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엄마...”안심은 그녀를 덥석 껴안고 통곡하기 시작했다.“유나야, 내 딸...”20년 전 그날 아침, 진유나는 진수현의 품에 안겨서 외출한 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사람들 모두 죽었을 거라고 얘기했지만 안심은 받아들이지 않고 미친 듯이 모든 곳을 찾아다녔다. 너무 울어서 눈이 시리고 목이 쉬었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백발이 늘어났음에도 딸의 소식은 여전히 들려오지 않았다.안심은 이생에서 다시는 자신의 아이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단념하며 지금껏 살아왔다. 더 이상 ‘엄마’라는 호칭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라진 아이가 기적처럼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이 세상에는 정말 기적이 있었다.안심은 온다연을 꽉 끌어안고 절대 놓지 않았다.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진 진수현은 곧바로 다가가 그들을 안으며 한 손으로 안심을 꼭 붙잡았다.동남아 일대를 주름잡던 전설의 진수현이 오늘날 눈을 붉히며 가족 상봉을 했다.“우리의 딸이 돌
안심은 눈물을 펑펑 흘렸고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방금 진씨 가문의 주치의가 온다연을 진찰했는데 아주 기초적인 검사만으로도 온다연의 건강이 많이 안 좋다는 걸 알게 되었다.신체 장기는 이미 말려들어 갔고 복부에는 수술 흔적도 남아있었는데 흉터로 봤을 때 부상이 매우 심했음을 알 수 있었다.긴 수술 자국은 복부부터 가슴까지 이어졌다.진찰 결과를 들은 진수현은 그 자리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자신의 딸이 그동안 학대를 당했다며 확신했다.게다가 사랑하는 아내가 슬피 우는 것을 보고 가슴이 미어졌다.수십 년 만에 만난 딸을 만났는데 온몸에 부상이 가득한 것도 모자라 극도로 우울한 상태인 걸 보고선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고 싶었다.그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제 돌아왔으니까 다 좋아질 거야.”그 후 안심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방에서 나왔다.염지훈은 서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진수현은 싸늘한 표정으로 온다연의 과거에 대해 물었다.염지훈은 말을 머뭇거리다가 결국 온다연이 양부모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고 이미 세상을 떠서 되갚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유씨 가문과 유강후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염지훈은 온다연이 유강후를 잊길 바랐고 그를 떠올리는 것조차도 싫었다.며칠 동안의 심리치료와 최면요법이 효과가 있는 듯 온다연은 발작하는 시간이 현저히 줄었고 잠자는 동안 악몽을 꾸는 횟수도 많이 줄었다.가장 중요한 건 더 이상 한밤중에 울면서 유강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진씨 가문의 실력과 진수현의 성깔을 놓고 봤을 때 모든 걸 알게 되면 유씨 가문과 싸울 게 뻔하다. 쌍방 모두 이득을 볼 수 없는 상황인데 자칫하다 온다연의 은신처가 드러날 수도 있으니 염지훈은 이를 원치 않았다.인정하기 싫지만 유강후는 능력도 있고 노련함도 있는 사람이기에 온다연이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죽을 때까지 싸우며 그녀를 빼앗아 가려고 할 것이다.염지훈은 태연하게 말했다.
3년 후.H 국 경원 시청 옆의 한옥 안.4월의 바람에 붉은 장미가 흔들리자 정원은 더없이 아름다웠다.그러나 이토록 아름다운 정원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강현미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정원 가득 뒤덮은 우울함을 느끼고선 고개를 가로저으며 꽃방으로 향했다.아니나 다를까 그의 아들은 넋을 잃은 채로 온다연의 그림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분명히 4월이다. 따뜻한 날씨와 따스한 햇볕이 유리를 통해 그의 몸을 비추고 있었지만 인간의 온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는 생명이 없는 차가운 조각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강현미는 아들의 관자놀이에 생긴 흰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서른 살도 안 된 청년이 하루아침에 늙어버릴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온다연이 바다에 추락한 후, 수천 척의 선박과 수만 명의 어부들이 6개월 동안 주변 해역을 수색했다.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주변 해역을 샅샅이 수색하는 것도 모자라 해류를 따라 다른 나라 경계에서도 찾았다.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겨울이 되자 수색대는 더 이상 못 하겠다며 선언했다. 비로소 온다연의 생존 가능성은 불가능해졌고 어쩌면 시신이 바다에 가라앉아 물고기 떼의 먹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그날 밤 유강후는 온다연이 바다에 빠진 자리에 밤새도록 서 있었다.다음 날 아침 비서가 찾아왔을 때 하룻밤 사이에 머리의 3분의 1이 백발로 변했다.그해 겨울, 유강후는 병원을 떠나지 못했다.협심증과 객혈이 겨울 내내 그를 괴롭혔다.봄이 시작될 무렵 의사는 그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사후 준비를 시작하라고 전했다. 동시에 강씨 가문의 어르신이 M 국에서 달려왔다.유강후의 상태를 본 그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한심한 놈.”그 후 곧장 남양 시로 달려가 젊은 여의사를 모셔 왔다.한의학 고수인 여의사는 유강후의 상태를 보고 검은 알약 한 병을 꺼내 매일 복용하라고 한 후 보름 동안 그곳에 머물며 매일 침을 놓았다.게다가 유강후를 위해 직접 약천수를 가져오
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세월의 흔적이 느껴져서 그런지 독특한 분위기가 아주 멋있네요. 북아메리카에 이런 집이 많지 않을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마음에 들면 이곳으로 이사 올까요? 여기랑 연결되어 있는 별장도 샀어요. 나중에 뚫어서 유나 씨가 좋아하는 취향에 맞게 인테리어 해도 좋아요.”온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괜찮아요. 이런 곳은 아직 낯설어서요. 저는 강씨 가문 저택이 더 좋아요.”그녀는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일이 마무리되면 H국으로 갈까요? 한번 가보고 싶어요. 어쩌면 기억을 조금이라도 되찾을 수 있잖아요.”유강후는 말없이 걷다가 별장 입구에 이르러서야 입을 열었다.“도착했네요.”문밖에는 승용차 두 대가 주차되었고 두 명의 경호원이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임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동현. 얼른 내려와. 올라가면 안 된다고 했지?”말이 끝나는 동시에 하얗고 작은 아이가 온다연에게 달려왔다.그는 온다연을 보자마자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누나, 안녕하세요.”임동현은 귀여운 피카츄가 그려진 옷을 입고 있었고 흰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특히나 맑고 생기 넘치는 눈은 임혜린을 똑 닮았다.온다연은 한눈에 임혜린의 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그녀는 몸을 숙여 아이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네가 동현이구나?”임동현은 피카츄 인형을 안은 채 또박또박 말했다.“맞아요. 누나 너무 예뻐요. TV에 나오는 사람보다 훨씬 더 예뻐요.”온다연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보드라운 얼굴을 쓰다듬었다.“말을 엄청 잘하네?”이때 임혜린이 다가왔다.“왔어?”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면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어찌나 체력이 넘치는지 나 어릴 때랑 판박이라니까?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조용하게 앉아 있는 법부터 가르쳐. 그렇지 않으면 다리가 아플 정도로 뛰어다녀야 해.”임혜린은 유강후를 힐끗 보고선 퉁명스럽게 말했다.“여기 정말 안전하죠?
온다연은 유강후를 째려보고선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그러나 몇 미터 달리지도 못하고 곧바로 유강후에게 품에 잡혔다.“왜 뛰어요?”섹시하고 매력적인 허스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온다연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거 놔요.”유강후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 들어 올려 옆에 있는 긴 의자에 앉힌 뒤 돌아섰다.“올라와요. 업어줄게요.”온다연은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당장이라도 업히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지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괜히 투덜거렸다.“걸어갈 거예요.”온다연이 질투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린 유강후는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업고 가면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얼른 업혀요.”자신의 질투심을 들켰다는 생각에 온다연은 얼굴을 붉히며 돌아섰다.“걸어가도 되다니까요? 여자들이 쳐다보게 혼자 걸어요. 어차피 강후 씨도 그런 걸 즐기잖아요.”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돌아서서 그녀의 작은 얼굴을 꼬집었다.“질투하는 거예요?”온다연은 입을 삐죽였다.“아니거든요?”그러자 유강후는 손을 뻗어 그녀의 다리를 감싸며 안아 올렸다.온다연은 그의 품에 안긴 채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비틀었다.“얼른 놔요.”유강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돌변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옆에서 사람들의 작은 비명과 한숨 소리가 들렸지만 유강후는 멈추지 않았다.어느새 얼굴이 터질 듯 빨갛게 달아오른 온다연은 계속 유강후를 밀어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거의 숨쉬기 힘들 정도가 되고서야 유강후는 비로소 손을 뗐다.온다연은 얼굴이 붉어지고 입술마저 부어올랐다.“미쳤어요?”유강후는 그녀의 붉은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러면 사람들이 유나 씨가 내 아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온다연은 얼굴이 더 빨개진 채로 말을 더듬었다.“아내라뇨? 우린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유강후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질투쟁이.”
직원은 백인 여성이었는데 온다연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채로 쭈뼛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죄송해요.”온다연은 따지기 귀찮은 듯 물건을 챙긴 후 유강후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유강후의 눈에는 웃음이 가득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뒤따라오던 이권이 참다못해 온다연이 전화하는 틈을 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도련님, 참지 말고 그냥 웃으세요.”이권은 방금 온다연이 내뱉은 소유욕 넘치는 말이 얼마나 큰 효과를 불러올지 잘 알고 있었다.유강후와 오랜 시간 일한 사람들은 앞으로 며칠 동안 무탈하게 지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아니나 다를까 유강후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요즘 다들 일을 너무 잘하니까 마음이 놓여. 이번 달 월급은 두 배야.”이권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유강후가 물었다.“너도 다연이가 한 말을 들었지? 무슨 뜻일까? 질투하는 걸까? 다른 사람이 날 가로챌까 봐 걱정하고 있는 게 맞지?”유강후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부드러움이 가득했다.이권은 웃으며 그의 말에 답했다.“맞습니다. 도련님을 향한 다연 씨의 애정이 더욱 깊어진 것 같습니다. 많이 좋아하네요.”유강후의 눈가에 떠오른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더니 마치 온다연을 잡아먹을 듯 애정 어린 부드러운 눈길도 뚫어져라 바라봤다.“권아, 솔직하게 말해봐. 나 정도면 잘생긴 편이지?”“도련님이 못생겼다면 이 세상에는 잘생긴 남자가 없을 겁니다.”유강후는 올리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네. 앞으로 다연이 선물을 준비할 때 예쁘게 생긴 거로 골라.”말은 이렇게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약간의 자부심을 느꼈다.한편으로는 자신이 잘생긴 걸 천만다행으로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외모를 중요시하는 온다연의 관심을 받는 건 거의 불가능했으니까.이때 통화를 마친 온다연이 다가왔고 이상해진 분위기를 보고선 미간을 찌푸렸다.“왜요?”이권은 웃으며 답했다.“아무것도 아닙니다. 유나 씨가 예쁘게 생긴 걸 좋아한다는
“신경 꺼요.”임혜린은 여전히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내가 낳은 아들이고 한이준이랑 전혀 상관없는 아이예요. 그래서 도와줄 거예요? 말 거예요?”유강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임혜린은 코웃음을 쳤다.“싫다는 뜻이죠?”곧이어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다연아, 실은 너한테도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친구가 있어. 이름은 주...”“임혜린!”유강후는 그녀의 말을 가로채며 표정이 어두워졌다.“다연이 친구인 걸 봐서 이번 한 번은 도와줄게. 하지만 다연을 속이려고 없는 얘기를 만들어낸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임혜린은 비웃었다.“그쪽이랑 실랑이할 시간 없으니까 얼른 이쪽으로 사람 보내요. 그리고 집은 인적 드문 곳으로 알아봐 줘요. 아들이랑 한동안 조용히 살고 싶어요. 지금 당장 알아봐 줘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말했다.“조금 있으면 데리러 갈 거야. 성당 근처에 별장 한 채가 있는데 당분간은 거기서 지내.”“내가 그쪽을 어떻게 믿어요. 그 별장 근처에 한이준이 살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다연아...”임혜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는 전화를 끊었다.그러자 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렸다.“친구? 저한테도 그런 친구가 있었어요?”유강후는 마음속으로 임혜린을 수백 번 욕했지만 표정은 오히려 담담했다.“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딱 봐도 도와주길 바라서 지어낸 얘기잖아요.”온다연은 임혜린이 걱정되어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혜린한테 정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가봐야겠어요.”유강후는 단호하게 말했다.“너무 늦었어요. 오 집사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오늘은 이만 들어가요. 어차피 내일 성당 근처 별장으로 이사 올 텐테 뭘 걱정해요. 내일 일찍 만나러 가요.”온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안 돼요. 지금 마음이 심란할 거예요. 친구도 별로 없을 텐데 저라도 가봐야죠.”유강후는 온다연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았다. 하는 수 없이 이권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당장 임혜린 모자를 데리러 갈 사람을 준비하라고 명
유강후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잡더니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용서하기 어려운 일은 어떤 거죠?”온다연은 단호하게 말했다.“나은별 씨와 정말 그런 사이였다면...”온다연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잡더니 질투 나는 듯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친구라는 사실만으로도 괴로워요. 만약 두 사람이 예전에 사랑하던 사이라면 다시는 강후 씨를 만나지 않을 거예요.”유강후는 순종적이고 부드러운 온다연의 모습에 가슴이 간지러워져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다.“그게 다예요?”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둘 사이의 오해였다면 며칠은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나은별 씨와 사랑하던 사이라면...”“쳇.”온다연은 대뜸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고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여전히 분노의 기색이 엿보였다.“일단 그 여자를 때려눕힌 다음 강후 씨를 던져버릴 거예요.”말이 끝나자마자 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잡고 격렬하게 키스했다.차 안의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자 운전 기사는 조용히 칸막이를 내렸다.그렇게 두 사람 모두 감정이 북받쳤고 한참 후에야 흥분을 가라앉혔다.온다연은 유강후의 가슴에 기대어 거친 숨을 내쉬며 그의 심장 박동을 듣고 있었다.그녀의 가는 허리를 잡고 있던 유강후는 마치 온 세상을 움켜쥔 듯 꼭 껴안고 놓지 않았다두 사람은 서로의 숨소리와 심장박동을 조용히 느꼈다. 마치 이 세상에 그들만 남은 것처럼 말이다.한참 후 온다연이 속삭였다.“정말 신경 안 쓸 거예요?”“그래도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잖아요. 같이 지낸 정이 있을텐데...”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온다연의 허리를 세게 꼬집었다.“그 사람 얘기는 앞으로 꺼내지 마요. 재수 없으니까.”강씨 가문 저택에 다다를 무렵 온다연의 핸드폰이 울렸다.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임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이사 갈 거야. 강후 씨한테 이사를 도와줄 사람이 있는지 물어봐 줘.”“지금 살고 있는 곳이 좋다며? 이웃들도 친절하고
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차에 올라탔다.온다연은 걱정스러운 듯 창밖을 내다보며 조용히 말했다.“경호원을 많이 데려왔던데 혜린한테 무슨 짓을 저지르는 건 아니겠죠?”유강후는 그녀를 무릎에 앉히더니 얼굴에 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나지막이 말했다.“아닐 거예요. 이준이가 혜린 씨를 엄청 오랫동안 찾았거든요. 함께 보내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리고 혜린 씨도 손이 매워 보이던데 아마 이준이가 많이 맞을걸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온다연은 그의 목에 팔을 감싸더니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불만스럽게 말했다.“나은별이라는 사람 너무 짜증 나요. 윤희 언니보다 훨씬 더요. 강후 씨의 친구만 아니었다면...”온다연은 부드러운 손으로 유강후의 목을 쿡쿡 찔렀다.“기회를 줄 테니까 우리가 예전에 어땠는지 솔직하게 전부 다 말해봐요. 풀 수 있는 오해라면 저도 따지지 않을게요.”온다연은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마요. 언젠가 강후 씨가 거짓말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엄청 화가 날 것 같아요.”개의치 않는다는 말은 거짓말이다.3년 전에 나은별과 자신을 바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매우 힘들었다.물론 그사이에 오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어떤 오해가 있더라도 이러한 행동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3년 전에 정말 나은별 씨와 나를 맞바꿨어요?”유강후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온다연의 작은 손을 잡더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나은별이 하는 말을 다 믿어요?”온다연은 입을 삐죽이며 기분 언짢은 티를 냈다.“만약 제가 지훈 씨와 강후 씨를 맞바꾼다면 어때요?”유강후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상황이 복잡한 건 맞지만, 결코 나은별이랑 바꾼 적은 없어요.”온다연은 마음이 괴로운 듯 답답함을 느꼈다.“그런데 혜린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해줬거든요.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너무 아팠어요. 분명 진짜일 거예요.”유강후는 심호흡을 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듣고 싶어요? 그럼 절대 화
한이준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임혜린의 다리까지 묶었다.화가 나서 정신을 잃을뻔한 임혜린은 입을 벌려 한이준의 어깨를 세게 깨물었다.곧 피가 스며 나왔지만 한이준은 통증을 못 느끼는 것처럼 임혜린이 자신을 물도록 내버려두었다.곧이어 그는 차에 도착했다.한이준은 막무가내로 임혜린을 차에 밀어 넣고 옆에 앉았다.임혜린은 넥타이로 묶인 채 몸부림쳤고 어느새 손목이 빨갛게 부어올랐다.빨개진 손목을 본 한이준은 한숨을 내쉬었다.“임혜린, 성깔은 아직도 여전하구나? 조금만 물러서는 것도 안 돼?”이때 차에 시동이 걸렸고 한이준은 넥타이를 풀기 위해 손을 뻗었다.손이 자유로워진 임혜린은 가장 먼저 그의 뺨을 때렸다.“이준 씨는 처음부터 끝까진 나쁜 사람이었어요. 평생 외롭게 살길 바라요.”그러더니 재빨리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한이준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차 멈춰.”다행히 방금 출발한 덕분에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임혜린은 관성에 이끌려 몇 걸음 달리며 안정을 되찾은 후 빠르게 육교로 올라갔다.한이준이 달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다리 위에 있었다.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임혜린, 좋은 말로 할 때 돌아와.”‘차에서 뛰어내리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외진 곳이라 차가 많지 않아서 망정이지 임혜린의 행동은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다름없었다.임혜린은 뒤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반대편으로 달려가 곧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경호원이 뒤따라오며 물었다.“대표님, 쫓아갈까요?”한이준은 어두운 눈빛으로 임혜린이 사라진 방향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집 주소는 아직이야?”“알아낸 바로는 한인타운의 재송 아파트에 거주 중인 것 같습니다. 나름 고급 단지입니다.”“그리고?”경호원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현재 도우미 두 명과 함께 단독 주택에 살고 있습니다. 주말에는 동생인 임동규 씨와 시간을 보내고 현재 조사된 바에 따르면 남자 친구는 없는 걸로 보입니다. 다만 경제적 조건과 사회적 지위가 좋은 남자들에게 끝없이 구애를
툭하는 소리와 함께 임혜린의 핸드폰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다행히 고장 나지 않았고 ‘내 사랑’이라는 사람의 전화는 여전히 수신으로 표시되었다.한이준은 너무 화가 나서 핸드폰을 발로 찼고 핸드폰은 벽에 부딪히며 화면이 깨졌다.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임혜린은 한이준을 노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왜 남의 핸드폰을 발로 차요? 미쳤어요?”한이준은 거친 숨을 내쉬며 이를 악물었다.“임혜린, 그동안 남자를 얼마나 만났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혜린은 그의 뺨을 내리쳤다.“내가 남자를 만나든 말든 그쪽이랑 뭔 상관이냐고요. 미친 X. 꼴도 복 싫으니까 얼른 나가요.”이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화면이 깨져 받을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위에는 ‘내 사랑’이라는 세글자가 떠올랐다.임혜린은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고 더 이상 한이준과 이곳에서 실랑이를 벌이며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그녀는 한이준을 밀치고 밖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밖에는 수많은 경호원이 대기하고 있었다.문에 다다르자 임혜린은 캐비닛에 있는 도자기를 쥐더니 벽을 향해 세게 던졌다. 그러자 도자기는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났고 그녀의 손에는 날카로운 파편이 들려있었다.임혜린은 그 손을 흔들며 경호원들을 위협했다.“경고하는데 막지 마요. 그러다가 다치면 책임 못 져요.”얼굴이 하얗게 질린 경호원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한이준을 바라봤다.“대표님...”한이준은 잔뜩 어두워진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임혜린, 내가 얘기 좀 하자고 말했잖아. 계속 이러면 나도 세게 나올 수밖에 없어.”임혜린은 싸늘하게 말했다.“할 말 없어요.”그러고선 한이준을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경호원들은 임혜린이 손에 쥔 도자기 조각이 두려운 듯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마음이 조급해진 임혜린은 재빨리 앞으로 걸어가며 소리쳤다.“길 막지 말고 비켜요.”이때 경호원이 나타나 임혜린의 손에서 도자기 조각을 낚아채더니 재빨리 그녀를 잡았다.임혜린은 화가 나서 큰소리로
한이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혜린아, 예전에는 내가 잘못했어. 그때 화가 나서 정신을 잃었고 내 마음을 제대로 돌볼 여유가 없었어. 이제는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아. 그러니까 제발 기회를 줘.”임혜린의 그의 손을 뿌리치고 차갑게 말했다.“무슨 기회요? 우리 엄마가 죽어가고 있을 때는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날 믿지 않는 이준 씨 때문에 약을 못 챙겨서 우리 엄마가 죽음을 맞이했어요. 그때 기회를 줄 순 없었어요?”임혜린은 그를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한씨 가문의 도우미로 일하면서 월급을 받았던 건 사실이에요. 10년 동안 이준 씨를 챙겨줬죠. 잘했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우리 엄마가 엄청 고생한 건 제가 알아요. 더 이상 과거에 대해 언급하지 말아요.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더더욱. 이준 씨는 그럴 자격 없잖아요?”“이준 씨가 준 케이크는 정말 먹어본 것 중에 가장 맛있는 케이크였어요. 저한테 남겨준 줄 알았는데, 사실은 다른 사람이 먹지 않아서 버리려고 했다는 걸 몰랐어요.”“만약 그게 이준 씨가 버리려던 케이크인 걸 알았다면 절대 먹지 않았을 거예요.”“우리 이제 성인이잖아요. 서로에 대한 체면 정도는 지켜주자고요.”모든 단어와 문장이 한이준에 대한 원망이었다.한이준은 손을 떨며 임혜린을 잡았다.“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했어. 나 때려. 혜린아, 마음이 풀릴 때까지 마음껏 때려.”임혜린은 흠잡을데 없이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정말요?”그녀는 손을 들어 한이준의 뺨을 내리쳤고 잘생긴 얼굴에는 곧바로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생겼다.그는 얼굴을 만지며 나지막이 물었다.“이제 화가 풀렸어?”임혜린은 차갑게 웃었다.“뭘 풀어요?”“아직도 화가 안 풀린다면 다시 사과할게.”“좋아요. 그럼 사과하세요. 바라던 참이니까.”그러자 한이준은 눈을 반짝였다.“사과를 받아주는 거야? 이제 날 용서했다는 뜻이지?”임혜린은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이 나왔다.“사과를 받으면 꼭 용서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