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유강후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한번 나은별의 손을 짓밟았다.고통에 나은별은 비명을 질렀다.“아! 아파! 내 손!”유강후는 급히 온다연을 끌어내며 단호하게 말했다.“그만해!”그의 눈은 짙은 분노로 어두워져 있었다.“오늘 일은 내가 CCTV 확인할 거야. 하지만 네가 너무 지나친 것도 사실이야!”온다연은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CCTV? 아저씨, 여기 CCTV가 있어요? 아까 관리인이 뭐라고 했더라? 아직 설치 중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이렇게 나은별 씨 편들 거면 차라리 저 여자랑 결혼하지 그래요!”유강후는 즉시 관리인을 향해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왜 아직 CCTV 설치가 안 끝난 거지?”그러자 관리인은 몸을 떨며 대답했다.“어제 설치 도중 문제가 생겨서 내일 다시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결혼식 전에 완료하면 될 줄 알고... 그런데 이런 일이...”“당장 정리하고 떠나.”유강후는 차갑게 말했다.“이 집엔 제대로 일하지 못하는 사람 필요 없어.”온다연은 냉소적으로 말했다.“뭐예요, 저 여자가 아프다고 하니까 하인한테 분풀이하는 거예요?”그녀의 목소리에는 강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아저씨랑 나은별 씨 정말 닮았다. 남을 짓밟는 모습이 똑같아요.”이 말에 유강후의 이마에는 핏줄이 튀어나왔다.그래도 겨우겨우 화를 삼키며 그는 온다연의 손을 잡으려 했다.“그만하자. 얘기는 안으로 들어가서 하자.”하지만 온다연은 몇 걸음 물러서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손 치워요! 저 여자를 만진 더러운 손으로 나 건드리지 마요. 역겨우니까!”유강후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온다연은 피식 코웃음 쳤다.“내가 무슨 소리 하는지 몰라요? 방금 두 사람이 생사를 함께하는 듯한 모습, 정말 감동적이더라고요. 차라리 며칠 뒤에 저 여자랑 결혼해요.”결국 유강후의 분노가 폭발했다.“닥쳐! 온다연, 내가 정말 너를 너무 오냐오냐했나 보다!”온다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표정이 굳어지더니 유강후는 온다연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그러나 그녀는 이를 피하며 차갑게 쏘아보았다.“왜요? 저 여자랑 관련된 일이면 물러서야 하는 거예요? 뭐든 내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근데 고작 내가 저 여자를 몇 번 밟았다고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아저씨, 정말 구역질 나게 만드네요.”유강후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고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무거운 입을 열었다.“온다연, 네가 말한 것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철저히 조사할 거야. 하지만 우리 곧 결혼하잖아. 결혼 후에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면 안 될까?”하지만 온다연은 이미 그에게 마지막 남은 인내마저 잃은 듯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필요 없어요. 설령 진실이 밝혀진다 해도 아저씨는 날 믿지 않을 테니까. 아저씨의 사랑은 편애받을 사람에게나 주라고요.”지친 듯 낮은 목소리였다.“아저씨, 우린 끝이에요.”말을 마치며 그녀는 옷 주머니에서 한 서류를 꺼냈다.“난 아저씨랑 결혼 안 할 거예요.”얼굴이 크게 일그러지더니 유강후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온다연,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온다연은 그의 화난 모습에 심장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여기까지 오게 된 상황에서 그가 온다연을 깊이 사랑하는 듯 가장하는 모습이 역겹기만 했다.“아저씨, 우리 이혼해요.”이혼이라는 두 글자는 가벼운 울림이었지만 유강후의 귀에는 마치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큰 충격을 받았는지 그는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운 듯 보였다.그러다 곧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뭐라고 했어?”온다연은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이혼하자고요. 만약 이 혼인신고서가 진짜라면 이혼해요. 가짜라면 그만둬도 되고요.”유강후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온다연, 이 혼인신고서가 가짜라고 의심하는 거야?”온다연은 비웃으며 말했다.“내가 믿을 만한 게 있긴 해요?”“아저씨가 구청에 갈 리는 없겠죠. 상관없어요. 다른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방법은
유강후는 천천히 나은별 앞으로 걸어가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했다.“다연이 성격으로는 절대 남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지 않아.”나은별은 눈을 감았다.“강후 씨는 이미 속으로 나한테 사형 선고를 내렸어. 이해해.”유강후의 표정은 싸늘했고 차갑게 목소리를 낮췄다.“나은별, 네가 날 구해준 건 사실이고 내가 너에게 빚진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그게 네가 내 주변 사람들을 함부로 해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야. 네가 정말 그런 짓을 했다면 난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나은별은 고개를 숙이고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강후 씨, 온다연 하나 때문에 유씨 가문과도 연을 끊으려 하고 이제 그 여자 때문에 몇 세대를 이어온 가문과 다툴 생각이야?”유강후는 차갑게 대꾸했다.“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잠시 멈칫하더니 그는 이어서 말했다.“네 나이도 이제 적지 않아. 곧 서른이잖아. 경운시의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마음에 안 든다면 내가 해외에서라도 찾아줄 수 있어!”이 말에 나은별은 고개를 번쩍 들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날 해외로 시집보내겠다는 거야?”유강후의 눈은 냉혹한 빛으로 번쩍였다.“네가 온다연에게 다시 다가가면 정말 해외로 보낼 수도 있어. 기억해둬. 난 말한 건 반드시 지킨다는 거.”“다연이는 내 최후의 선이야. 네가 다연이에게 손을 대지 않았길 진심으로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그는 돌아서서 멀리서 다가오는 검은 벤츠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소이섭도 같이 갈 수 있어. 아프리카는 이섭이 같은 의료 인재가 아주 필요하니까.”나은별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우릴 아프리카로 보내겠다는 거야?”직접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차가운 눈빛은 이 말이 진심임을 드러냈다.그러자 나은별의 눈에 증오가 스쳤다.“강후 씨, 난 강후 씨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그때, 소이섭이 차에서 급히 내려 나은별의 상태를 확인했다.입안의 피는 구강 손상 때문이었지만 손가락은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고 골절이 의심스러웠다.
앉자마자 야구 모자를 쓴 소년이 급히 뛰어 들어왔다.온다연을 보자마자 그는 마스크를 벗으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누나, 드디어 날 만나주셨네요!”그러면서 온다연의 손을 잡으려 했다.하지만 온다연은 그의 손길을 피하며 테이블을 가리켰다.“네가 좋아하는 커피랑 디저트 시켜뒀어.”테이블 위의 카페라떼와 나폴레옹 케이크를 본 주희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누나 제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도 기억하네요!”온다연은 구월이를 품에 안고 익숙한 거리 풍경을 아련하게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이번이 너랑 마지막으로 함께 먹는 자리야.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네가 직접 주문해.”이 말에 주희가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누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마지막이라니요?”온다연은 시선을 돌려 주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떠날 거야. 네게 부탁 하나 하고 싶어서.”주희의 예쁜 눈동자에 슬픔이 번졌다.“누나, 어디 가려고요?”온다연은 담담히 말했다.“구월이를 네가 좀 돌봐줬으면 해. 내가 떠나면 이 아이는 주인 없이 외롭게 될 거야.”그녀의 말은 진지했다.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한참 동안 멍하니 있던 주희의 눈에 서서히 눈물이 고였다.“누나, 혹시 내가 너무 귀찮게 굴어서 떠나는 거예요?”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너 때문이 아니야.”“그럼 유강후가 누나한테 못되게 굴어서죠?!”그는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그 자식이 누나한테 못되게 굴다니 내가 당장 가서 죽여버릴 거예요!”“주희야!”온다연은 목소리를 높이며 단호히 말했다.“철 좀 들어야 하지 않겠어? 난 단순히 떠나는 거야.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고.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래? 대체 언제 어른 될래?”주희는 조용해졌다. 눈을 내리깐 채 한껏 주눅 든 표정이었다.뒤이어 온다연은 구월이를 그의 품에 안겨주며 말했다.“너 고양이 좋아하잖아. 그래서 너한테 부탁하려는 거야. 내가 다시 올 기회가 생기면 데리러 올게.”주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구월이의 털을 쓰다듬었다.온
그 아이가 친자식이든 아니든 온다연은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며 아껴왔다.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고 있었다.만약 유강후와의 얽히고설킨 인연이 없었다면 아마 그 아이를 진짜 친자식처럼 키웠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제 그녀는 떠나야 했다.가슴 한구석이 허전하고 아픈 감정이 다시 밀려왔다.온다연은 얼굴을 감싸 쥐고 속삭이듯 말했다.“차라리 아저씨를 몰랐더라면 좋았을 텐데.”밤바람이 그녀의 말을 순식간에 흩어놓았다.그러나 기억 속에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그날 이후 얼마나 많은 밤을 유강후는 이 말을 떠올리며 가슴을 도려내는 고통을 느꼈는지 모른다.유강후는 그녀를 안아 올려 차로 걸음을 재촉했다.한옥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온다연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이 곁에서 밤을 지새웠다.다음 날, 그녀는 직접 백화점에 가서 아이 옷과 신발을 한가득 샀다.이번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을 샀고 따라온 차에 다 실리지 않아 몇 대의 차를 더 불러야 했다.그 물건들을 정리하던 장화연은 옷과 신발들이 아이가 여섯, 일곱 살이 넘을 때까지 충분히 입을 수 있을 정도로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묘한 느낌이 들었다.마치 온다연이 모르는 사이에 그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온다연의 행동은 너무나 평범했고 오히려 그녀를 ‘화연 씨’라고 부르며 더욱 예의를 차렸다.그날 점심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부탁하며 깨끗이 비우기까지 했다.오후에는 커다란 붓꽃 다발을 사람들에게 시켜 거실과 화실에 꽂아두었다.온다연이 정성껏 꽃줄기를 다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장화연은 자신의 생각이 지나친 것 같다고 느꼈다.저녁에 온다연은 장화연에게 한 폭의 그림을 선물했다.그림 속 장화연은 커다란 붓꽃 다발을 품에 안고 꽃밭에 서 있었고 멀리서 군복을 입은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를 향해 있었고 그 안에 애틋한 사랑이 흐르고 있었다.그 그림을 보고 장화연은 넋을 잃었다.평소 단 한 번도 실수하지
“몇 킬로그램의 강력한 폭약이라면 산 하나쯤 날려버릴 수 있겠죠!”“김원도는 이미 사모님에게 대역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정체가 들통나면 그 사람은 즉시 인질을 죽이고 폭약을 터뜨릴 겁니다!”“그곳 근처에 일반 주민도 있습니다. 폭발을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온다연은 서재 문 앞에서 30분 넘게 서 있었다.그러나 안에서는 여전히 뚜렷한 대책이 나오지 않았다.더는 들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아이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서재 안에서는 진시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가겠습니다. 이번엔 분장을 더 완벽하게 하고 인체 모형 가면까지 쓰면 절대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그러나 로운이 그녀를 제지했다.“안 돼. 이번 상황은 이전과 달라. 김원도는 이미 너의 정체를 알고 있어. 만약 들통나면 너와 나은별 씨까지 위험에 빠질 거라고.”진시현이 강하게 말했다.“저 지금 사모님 흉내 내면 90%는 비슷하게 보일 수 있어요! 머리도 사모님처럼 자르고 평소 입던 옷 입고 말만 아끼면 절대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로운이 더 말하려는 순간, 유강후가 입을 열었다.“여기, 다연이 옷을 가져와서 진시현한테 입혀.”곧 옷이 준비되었고 진시현은 온다연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그녀의 모습을 본 모두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진시현은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기 위해 그동안 온다연의 말투와 행동까지도 철저히 연습해왔다.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이지만 온다연이라고 착각할 만큼 흡사했다.결국 진시현이 온다연으로 변장해 나은별을 구출하기로 했다.진시현은 일류 저격수였고 신체 능력도 뛰어났다.만약 그녀가 김원도와 안에서 한 시간만 버텨준다면 함께 투입되는 폭탄 해체 전문가가 위험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었다.이것이 모두가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이었다.시간이 촉박했기에 계획은 이렇게 결정되었다.마무리로 유강후가 진시현에게 말했다.“내일 출발할 때 슬픈 척 연기 좀 해줘. 더 많이 울고 나한테 너를 나은별과
H 국, 동남아시아, 유럽, 북미, 사막, 초원, 바다...온다연이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다가올 좋은 날들을 생각하니 유강후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그는 아이 곁에서 잠든 온다연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아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늦었으니 아이는 혼자 재우고 우리도 쉬자.”온다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저항하지도 않았다.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잠겨 그날 밤 아무 말 없이 밤을 보냈다.다음 날 아침 온다연이 눈을 떴을 때, 유강후는 이미 집을 떠난 상태였다.그녀는 마당에 있던 경호원들과 하인들이 절반 이상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에게 장화연이 다가와 말했다.“김원도 쪽 문제는 거의 해결됐습니다. 경호원들과 하인의 대부분은 영운산 별장으로 이동했어요. 사모님께서는 오늘부로 자유롭게 다니셔도 됩니다. 학교에 가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가실 수 있어요. 더 이상 경호원이 따라다니지 않을 겁니다.”온다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오랜만에 학교에 가보고 싶네요.”“화연 씨, 아침 준비는 하지 않아도 돼요. 학교 식당에서 먹을 거니까.”그렇게 그녀는 한옥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온다연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자 장화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제야 모든 것이 조금씩 평온해지는 듯했다.그러나 온다연이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회색 SUV 한 대가 그녀 앞에 급히 멈춰 섰고 차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손 하나가 튀어나와 그녀를 강제로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온다연은 깜짝 놀랐지만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낯선 향기가 코를 찔렀다.그리고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차 안에 있던 남자 중 한 명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손을 뻗으려 하자 다른 남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그를 저지했다.“시간 지체해서 들키기라도 하면 너도 나도 끝장이야! 얼른 넘기자!”이 말에 그는 아쉬운 듯 손을 거둬들이며 온다연을 힐끔거렸다.“유강후의 여자라 그런지 진짜 예쁘긴 예쁘네. 평생 이렇게 예
온다연은 자신을 끌고 가는 사람들을 따돌리고 유강후에게 달려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묻고 싶었다.‘나은별을 위해서 날 희생하는 거야? 나은별이 그렇게 중요해?’그러나 두 걸음을 떼자마자 창고의 문이 열렸고 나은별은 묶인 채로 끌려 나왔다.그녀는 피투성이 된 얼굴로 온다연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나은별과 김원도는 서로 손을 잡은 관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완전히 미쳐버린 김원도가 그녀의 얼굴을 망쳤고 추악하고 더러운 남자 몇 명을 불러 성폭행하는 것도 모자라 대량의 사진과 영상을 찍었다.그 사진과 영상들은 나씨 가문을 무너뜨리고, 나은별을 망치고, 영원히 쥐 죽은 듯 숨어서 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당장이라도 김원도를 산산조각 내고 싶었지만 그것보다도 온다연에 대한 증오가 훨씬 컸다.온다연만 없었다면 지금처럼 비참하지 않을 것이고 유강후와 진작에 결혼하여 강씨 가문과 유씨 가문의 사모님 노릇을 하며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온다연이 끌려왔다는 것이다.‘쓸모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일 처리를 잘하네. 나중에 보상이라도 줘야겠어.’더 중요한 건 유강후가 아직도 온다연을 알아보지 못했다.‘절대 온다연이라는걸 알게 해서는 안돼.’유강후가 직접 온다연을 내놓는다면 모든 일이 완벽하다. 설령 나중에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한들 모든 책임을 김원도에게 돌리면 그만이니까.게다가 온다연의 성격상 이 일을 통해 유강후에 대한 모든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나은별의 입가에는 어느새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유강후와 온다연의 관계는 오늘부로 완전히 끝났다.김원도도 절대로 온다연을 놓아주지 않을 테니 온다연의 결말은 그녀보다 10배, 100배 더 비참하다.‘그러게 왜 강후 씨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이런 사단을 만들어. 넌 그 대가를 치러야지.’나은별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온다연과 바꿔치기하고 싶었다.그녀는 목청껏 유강후를 향해 울부짖었다.“강후 씨, 살려줘. 이 사람들이 내 얼굴을 그었어.”“강후 씨, 제발 나 좀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
“다연이가 전에 겪은 고통... 똑같이... 아니 그보다 수천 배로 돌려줘야 해.”“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유하령이 비명을 질렀다.“아빠가 죽었어요! 아빠가 모든 죄를 짊어졌잖아요. 제발...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마요!”하지만 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람이 죄를 씻고 싶어 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때 너희가 법을 피해 가며 사람을 괴롭혔지. 좋아. 지금 잘됐네. 정신병자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여도 법의 심판을 안 받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벌을 받는 것도... 네 업보지.”유하령은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지만 유강후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데리고 가. 하지만 일단 죽이지는 마.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네! 대표님!”그는 더는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사하던 곳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까둔 귤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얼른 먹어요. 입술이 다 터졌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물은 마셔야죠.”그녀는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 그의 손에 건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귤 한 조각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유하령...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온다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거네요. 하지만 제가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아니요. 아저씨가 있으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유강후는 그녀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가슴 가득 퍼지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다연아... 유민준 걔는...”“전 걔랑은 끝났어요.”온다연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유민준이
온다연은 처음부터 유하령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유씨 집안이 다 무너지든 모두가 죽든 솔직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유강후가 저렇게 무너져 있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죄여들 듯 아팠다.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사람이니 상처도 받고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에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조금씩 물러서기로 했다.후회가 되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그 순간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다시는 네가 상처 안 받게 할게. 여기 바람이 좀 세네. 안으로 들어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장 비서가 따뜻한 팥죽과 집밥 느낌의 반찬들을 함께 보냈다. 팥죽이 양이 많지 않아서 온다연은 근처 음식점에 연락해 직접 빚은 만두를 더 주문했고 따뜻한 반찬도 한 상 가득 더 보냈다. 그리고 따라온 경호원들과 비서진도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었다.밥을 먹던 도중 누군가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와 유강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는 온다연을 향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너희끼리 먼저 먹고 있어.”온다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여기 있어. 잠깐이면 돼. 금방 올게.”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를 들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까놔. 돌아와서 같이 먹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 이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대표님, 정말 그냥 놔두실 겁니까? 설마... 진짜 용서해 줄 생각은 아니시죠?”유강후의 목
그때 유하령이 옆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아. 아빠가 죽었어.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요!”그 소리에 유재성이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유강후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유하령 당장 끌어내. 간호사, 의사 불러요. 빨리!”유재성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네 큰형… 가서... 빨리 가서 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서...”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엔 이미 숨이 멎은 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있었다. 의료진이 마지막 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상태였다.유민준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복도와 방 안 바닥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유강후가 다가서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자성 씨는 휴게실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한 상태였고 발견 당시엔 이미 호흡이 없는 상태였습니다.”유강후는 멍하니 굳은 채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강후라고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랴.어찌 됐든 자기 형이었고 어릴 땐 정말 서로 우애가 좋았다.진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유하령을 감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그 뒤로 천천히 멀어졌고 결국엔 남이 되어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해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자성이 이런 방식으로 끝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는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료진이 유자성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유민준이 그의 옷깃을 잡고 울부짖었다.“작은아빠... 이게 진짜예요? 아빠 진짜... 진짜 죽은 거예요? 작은아빠, 아빠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돌렸고 차갑게 말했다.“민준아, 네가 아직 남자로 살고 싶다면... 아버지 장례 제대로 치러. 네가 맡은 회사 두
유재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유자성을 보지 않았다.유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식의 손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유하령과 유민준을 멈춰 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문 앞에 무릎 꿇고 있어. 절대 일어서지 마. 그래야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실 수 있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는 진짜 끝장이야. 예전에 너희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다 너희를 죽도록 밟고도 남을 사람들이야.”유하령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자성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특히 너, 유하령. 또 사고 치면... 바로 해외로 보내버릴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오늘 이 사단... 절반은 네가 만든 거야.”유하령은 울먹이며 애원했다.“아빠...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쫓겨나는 건 싫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자성은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났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다 감췄고... 결국 오늘 이런 꼴이 났네. 다 내 책임이니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하령아, 성질 좀 고쳐. 앞으로 사람 대할 땐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 나쁜 생각 갖지 말고 받은 호의엔 반드시 보답해야 해. 부모 말고는 조건 없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유하령과 유민준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과 절망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의 눈앞에서 유자성은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여기 그대로 있어. 할아버지가 용서 안 하신다고 해도... 일어나지 마라. 난 짐 좀 챙기고 금방 올게.”그는 마지막으로 두 자식을 깊게 바라보고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30분쯤 지났을까.복도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졌다.“사람이 자살했어요!”“피가... 피가 너무 많아!”“빨리 응급실로!”“늦었어요... 이미 숨이...”“유 회장님 장남이라잖아! 큰일 났어!”...유하령과 유
“제발... 제발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재산은 하나도 원하지 않아요. 단 한 푼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그냥 본가에 남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아들로 남게만 해 주세요...”하지만 유재성은 눈을 감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그만 가. 네 자식들 데리고 이 집을 나가. 네 호적은 이미 본가에서 정리하라고 지시했어. 앞으로 넌 유씨 가문의 자손이 아니야. 너희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나 유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유자성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깊이 숙여 유재성을 향해 세 번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평생 아버지의 아들이라 믿어왔습니다. 그게 제 자랑이었어요... 제가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니... 본가에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럴 만큼 제가 큰 죄를 지은 거겠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겠죠.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령이랑 민준이... 애들까지 함께 쫓아내진 말아 주세요. 애들은 아직 젊고 앞길이 먼 아이들이에요. 본가에서 내쳐진다는 건 그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될 겁니다. 사람들 눈에 짓밟히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야 해요.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다 제 책임이에요. 제가 잘못 키웠습니다. 전부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유재성은 싸늘하게 대답했다.“너랑 나... 부자지간 인연은 여기까지야.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만하고 그냥 가.”그제야 유하령의 표정이 무너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거짓말이죠? 우리 속이시는 거죠?”유민준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지만 아무 말 없이 유재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할아버지... 전 그동안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벌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제발...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제대로 살겠습니다.”그는 진심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철도 들었으며 맡은 두 회사 역
유자성은 입술을 달달 떨며 중얼거렸다.“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전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저 재산 같은 거 원하지 않아요. 한 푼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본가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그러나 유재성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젠 됐어. 나는 너한테 줄 것도 빚진 것도 없어. 나도 오래 못 살아. 죽기 전까진... 더 이상 너희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의 얼굴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고 그는 입술을 떨며 되뇌었다.“아버지...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그의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그 친자확인서는 진짜였고 유재성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그는 어릴 적부터 유재성 곁에서 자라났다.젓가락을 처음 쥐는 법, 글씨를 쓰는 법, 첫 출근 날의 마음가짐까지... 모든 것을 유재성이 직접 가르쳐줬다.그는 누구보다 유재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그래서 그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친자확인서는 진짜였어. 아버지가 나를 본가에서 내치려는 것도 진심이네. 그렇다면 나는 진짜... 본가 사람이 아니겠네.’그가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씨와 신처럼 떠받들었던 아버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본가의 명예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모든 것과 그가 수없이 입 밖으로 칭찬했던 동생 유강후조차... 결국 단 한 번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그 모든 건 그의 친부모가 목숨으로 대신한 빚이었고 남이 던져준 은혜에 불과했다.오만하고 자존심 강했던 유자성... 태어나서 한 번도 고개 숙여본 적 없는 본가의 장남이 알고 보니 그저 남의 집에서 얹혀살던 양자에 불과했다.그 진실은 마치 뾰족한 바늘처럼 그의 모든 꿈과 자존심을 찢어버렸다.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세상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고 지금 이 순간조차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두 번이나 사정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호복을 가다듬은 뒤 안으로 들어가 손에 쥔 약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아버님께 이 약을 드려요.”유강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다연아...”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고 싶은 말은 집에 가서 해요. 난 원래 그렇게 대인배 아닌 사람이에요. 날 해쳤던 사람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분은 당신 아버지잖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물러서 줄 수 있어요. 아저씨, 제 마음 저버리지 마요.”그 말에 유강후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까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춘 채 약 하나를 꺼내 유재성의 입에 넣어주었다.약을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재성은 숨이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후야, 이게 무슨 약이냐?”유강후가 답했다.“곽 박사님이 다연이 몸조리하라고 주신 거예요. 다 먹지 않고 열 알 남겨뒀는데 혹시 몰라서요. 솔직히 저도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해가 되진 않으니까요.”유재성의 눈빛이 반짝였다.“곽혜진? 그 여의사 말이야?”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때 유하령은 온다연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너 지금 내 할아버지한테 무슨 약 먹인 거야? 우리 할아버지 몸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따위가 내놓은 천한 약 따위 함부로 먹이면 안 된다고!”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친자확인서를 집어 들었다. 대충 읽어본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너... 너희 아버지가 유 회장님 친아들이 아니야?”유하령이 반박하기도 전에 온다연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와, 오늘 진짜 운수 대통이네.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유하령은 절규하듯 외쳤다.“그건 거짓말이야. 전부 조작이야. 우리 아빠가 본가 사람이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이건 다 네 계략이야. 온다연, 왜 날 이렇게까지 망치려고 해?”온다연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하령, 넌 늘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 무
“네 아들 유민준... 그동안 무슨 사고들을 쳐왔는지 너도 잘 알겠지. 그나마 요 몇 년 좀 나아졌다 싶어서 내가 본가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두 회사를 맡긴 거야. 그 애 실력으로 그 두 회사 꾸려나가는 것도 벅찰 거야.”“그리고 네 딸 유하령은 어떤 인간인지 너 스스로 모르겠어? 예전 그 일들을 진짜 네 능력으로 덮은 줄 알아?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한 사람은 현미와 강후야. 그 은혜 때문에 내 결혼을 망쳤고 내 딸을 희생시켰어. 다른 누구든 나를 원망해도 돼. 다 괜찮아.하지만 너, 유자성. 너만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자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버지, 아버지가 결혼생활 망친 걸 제 탓으로 돌리실 순 없죠. 그리고 제 어머니도 죄 없는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강현미도 그 자리에 있었을 리 없었겠죠.”그 말에 유재성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내가 평생 키워온 놈이 고작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었다니...”그는 분노 섞인 시선으로 유자성, 유민준, 유하령을 차례로 훑어보며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지금 여기서 내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강후야, 책상 위에 있는 다른 서류봉투를 저놈한테 줘라.”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 서류봉투를 유자성에게 던졌다.유자성은 그 안에 또 다른 유언장이 들어 있을 줄 알고 펼쳤지만 그 안엔 뜻밖에도 친자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그는 확인서의 이름과 결과를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옆에 있던 유하령도 깜짝 놀라 확인서를 낚아채더니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니에요. 이건 조작이에요. 전부 다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려고 짠 계략이잖아요!”“분명 온다연이야! 그 여자... 분명 삼촌한테 뭔가 시킨 거야. 나를 망하게 하려고 다 내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 거라고!”“닥쳐!”유강후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