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온다연의 눈에는 흐릿한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몇 걸음 달리자마자 바닥에 넘어졌고 다시 일어나 쫓아가려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쓰러졌다.유강후는 이런 온다연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만해. 준휘는 이미 죽었어!”온다연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외쳤다.“놔! 유강후, 이건 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만든 결과라고!”“당신이 사람들한테 막으라고 했잖아!”“다 당신 때문이야!”“놓으라고!”곧 유강후는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맞아. 내 잘못 있어. 내가 정확히 지시하지 않아서 아래 사람들이 내가 준휘를 싫어한다고 오해했고 그것 때문에 응급처치 타이밍을 놓쳤어.”“하지만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나는 그 애가 죽길 원한 게 아니라고!”“너희 아버지조차도 살릴 의도가 없었던 적은 없어!”“온다연, 정신 좀 차려!”하지만 온다연은 이미 감정이 폭발해 그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유강후, 당신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당신의 말 한마디, 심지어 한 문장부호조차 믿지 않아!”“꺼져, 밖에 당신이 좋아하는 여자들 많잖아. 나한테 집착하지 마. 이제 당신한테 마음 줄 일은 없어!”“비켜!”그녀는 울면서 소리쳤고 목소리는 이미 쉰 상태였다.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계속 울다 보니 유강후는 온다연의 눈이 더 나빠질까 두려워 그녀의 손발을 제압했다.그리고 의사에게 신호를 보내 진정제를 주사하도록 지시했다.차가운 약물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자 온다연은 울면서 비명을 질렀다.“유강후, 또 나한테 뭐 주사했어?”“날 뭐로 보는 거야? 아이 낳는 기계? 아니면 애완동물?”“이렇게 대하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증오할지 알아?”“놓으라고!”“준휘야... 누나가 정말 미안해...”...결국 두 번의 진정제를 맞은 뒤 온다연은 힘을 잃고 깊은 잠에 빠졌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인평 병원의 큰 병실 안이었다.의사가 다른 약물도 주사했는지 눈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차는 장례식장 방향으로 빠르게 달렸다.온다연은 창밖으로 보이는 복잡한 도심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이 공허함으로 물들었다.이 도시에서 21년을 살며 거의 떠나본 적이 없었지만 이곳은 그녀를 키워준 곳이자 동시에 끝없는 고통을 안겨준 곳이었다.이토록 화려한 곳에서 왜 이렇게 많은 악이 생겨나는 걸까?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연약한 이들에게 손을 뻗어 상처를 주는 걸까?그들의 삶과 생명을 조종하며 병적인 만족감을 얻는 걸까?그녀는 어릴 적부터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모든 걸 가지며 시작하고 또 누군가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결국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하지만 설마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악마 중 하나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제 유강후는 그녀가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그녀의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온준휘의 생명을 끊었다.악귀들과 다를 바 없었다.아니, 어쩌면 더 끔찍했다!그 사람들은 온다연에게 직접적인 상처를 주었고 그들의 악은 망설임이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증오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 있었다.그러나 유강후가 준 것은 그녀의 뼛속까지 각인되게 만들 철저히 계획된 고통과 기만이었다.그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온다연은 무심코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입꼬리가 비틀리며 냉소가 흘러나왔다.‘그 사람이 좋아했던 게 이 얼굴이지. 그 여자의 얼굴이 이랬으니 내 얼굴도 비슷해서 끌렸던 거겠지. 취향이 정말 변함없네. 이 얼굴이 망가진다면 그 사람은 어떤 태도를 보일까? 여전히 다정한 척하며 날 기쁘게 하려고 애쓸까?’그때 뒤따라오던 경호원이 전화를 받더니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동교 묘지로 바로 가세요.”묘지에 도착하자 유강후가 검은 정장을 입고 어머니 묘비 앞에 서 있는게 보였다.그의 뒤에는 경호원 두 명이 각각 유골함을 들고 있었다.온다연이 다가오자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기분은 좀 나아졌어? 오늘 눈은 좀 보여?”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머니의
“그만해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으니까.”온다연은 그의 말을 한마디도 더 듣고 싶지 않았다.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피로감이 몰려왔다.‘어떻게 해야 내 아이를 찾고 이 악마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그녀는 자신의 나약함을 이토록 증오했던 적이 없었다.유강후의 강압적인 통제 아래 그녀는 자신의 아이조차 지킬 수 없었다.아이는 이미 그의 손에 넘어갔고 온다연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완전히 맞서 싸울 용기도 없었다.‘무엇을 카드로 삼아야 아이를 되찾을 수 있을까?’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 있을 아이를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때,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무튼 지금 상황은 이런데 넌 원하는 게 뭐야? 어떻게 해야 네 화가 풀릴 수 있을지 말해줘. 계속 이렇게 버티면 나도 힘들어.”온다연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그 얼굴은 그녀가 본 얼굴 중 가장 잘생긴 얼굴이었다.하지만 이 얼굴의 주인은 심장이 없었다.아니, 심장은 있었다.그저 온다연을 위한 심장이 아니었을 뿐이다.‘이 모든 게 내 잘못이야.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내가 멍청하게 믿고 따라갔으니까.’“사람 목숨은 아저씨한테 중요하지 않죠? 왜냐하면 고통받는 건 아저씨 자신이 아니니까!”유강후는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온다연의 영혼까지 꿰뚫으려는 듯 말이다.“온다연,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그런 말 하면 나도 괴로워.”그러나 온다연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말했다.“괴롭다고요? 아저씨는 쉽게 유씨 가문 사람들을 용서하잖아요. 근데 다른 사람에게는 왜 그렇게 무자비해요?”유하령의 다리가 부러지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유강후는 그녀에게 치명타를 가하지 않았고 그녀를 비호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곧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목을 붙잡고 낮게 말했다.“다연아, 유자성의 뒤에는 우리 아버지가 있어. 아버지는 내가 형과 대립하는 거로 몇 번이나 병원에 실려 갔어. 내가 직접 손
온다연은 체구가 작고 연약해 보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반면 유강후는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에다 차가운 표정까지 더해지니 교통경찰은 두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상황을 믿게 되었다.교통경찰은 곧바로 말했다.“혹시 신분증 좀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유강후는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저희는 부부입니다. 지금 말다툼 중이니 제발 끼어들지 말아 주세요.”그러자 온다연은 바로 외쳤다.“아니에요! 저 이 사람 몰라요. 경찰관님, 저 도와주세요!”이 말을 끝내자마자 온다연은 힘껏 유강후의 손을 뿌리치고 바로 차에서 내려 몇 걸음 만에 계단으로 뛰어올랐다.유강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경찰이 제지했다.“일단 검문에 협조해 주시죠!”이미 육교 위로 올라가고 있는 온다연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더니 유강후는 경찰을 매몰차게 밀치며 말했다.“비켜!”이 말에 경찰들도 얼굴빛이 바뀌며 강경하게 그를 붙잡았다.“신분증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경찰서로 모셔야겠습니다!”이때 뒤따라온 경호원들이 황급히 차에서 내려와 경찰에게 신분증을 건넸다.“죄송합니다. 여기 신분증입니다!”경찰은 신분증을 꼼꼼히 확인한 후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되돌려주며 말했다.“다음부터는 주차나 정차를 신중히 하세요.”하지만 그사이 온다연은 이미 육교 중간에 서 있었다.유강후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따라가. 놓치지 말고!”그러나 이곳은 번화가였고 따라잡기란 쉽지 않았다.경호원이 뒤쫓아 갔을 때, 온다연은 이미 맞은편 쇼핑몰로 들어가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두 시간 후, 온다연은 시 외곽의 한 영상 제작소 대형 세트장에 나타났다.그녀의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은 임정아는 화가 나서 들고 있던 밀크티를 바닥에 던져버렸다.“그 사람, 인간도 아니에요!”“다연 씨 아들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다니... 다연 씨를 뭘로 본 거예요?”“전화했을 때부터 안 좋은 일이 생긴 줄 알았어요. 그래도 이건 너무 지나치잖아요!”
그러다 임정아는 갑작스레 두려움에 사로잡혀 비명을 질렀다.“다연 씨!”그 순간, 온다연의 입에서 선혈이 쏟아졌고 얼굴은 유령처럼 새하얘졌다.임정아는 다급히 다가가며 말했다.“뭐가 이렇게 급해요! 그냥 가능성을 말한 거지 사실이라고 한 건 아니잖아요!”창백한 얼굴을 한 채 뒤이어 온다연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정아 씨, 함부로 말하지 마요. 내 아이는 살아 있어요. 그저 다른 사람에게 있을 뿐이지...”눈앞이 깜깜해져 휘청거리더니 온다연의 몸은 이내 균형을 잃고 쓰러질 듯 흔들렸다.“내가 데려올 거예요. 반드시...”이 말을 끝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임정아는 깜짝 놀라 외쳤다.“여기! 빨리 119 좀 불러줘요!”그러자 임정아의 매니저가 급히 들어와 온다연을 부축하며 바깥으로 옮겼다.이때, 옆에서 구경하던 여배우 한 명이 온다연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어머, 이 사람 내 그 싸구려 동생이 말하던 여자친구 아니야? 왜 쓰러졌지?”그러면서 바로 전화를 걸었다.“염지훈, 네가 찾아다니던 여자친구...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정보비는 2억, 한 푼도 깎지 마!”...온다연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방은 깨끗하고 밝았으며 침대 머리맡에는 백합꽃이 꽂혀 있었다.창가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말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고 잘생긴 얼굴엔 약간의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온다연이 깨어난 것을 보자 그는 본래의 태도를 되찾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약간 헝클어진 앞머리가 그의 매력을 더 돋보이게 했다.“깼네?”염지훈은 다가와 뜨거운 물을 따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물 좀 마셔.”온다연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지훈 씨가 왜 여기 있어요?”염지훈은 살짝 비웃는 듯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네 지도교수가 그러더라. 휴학했다면서. 잘 다니던 학교를 왜 갑자기 휴학한 거야? 혹시 유강후가 널 가둬뒀어?”유강후의 이름이 언급되자 온다연의
“짝!”다음 순간, 강렬한 뺨 소리가 울리며 온다연의 손바닥이 염지훈의 얼굴에 꽂혔다.거의 모든 힘을 쏟아 때린 탓에 염지훈의 머리가 옆으로 살짝 돌아갔다.입가에서는 피가 흘렀다.염지훈은 손으로 상처를 닦으며 혀를 차고 말했다.“꽤 달콤하네.”분노가 차오른 온다연은 펄쩍 날뛰며 욕설을 내뱉었다.“진짜 미쳤어요? 내가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사람 말 못 알아들어요?”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로 화장실로 뛰어갔다.그러고는 입술이 닳도록 씻은 뒤에야 다시 나왔다.그러자 염지훈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단지 한 번 스친 것뿐인데 그렇게 날 싫어할 필요 있어?”온다연은 문을 가리키며 낮게 소리쳤다.“나가요!”염지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온다연, 그 사람은 네가 그렇게 할 가치가 없어.”“뒷말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알려주는 거야. 그 사람이 한 짓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고.”온다연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그건 나와 그 사람의 문제지 지훈 씨가 상관할 일 아니에요.”염지훈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온다연은 다시 문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외쳤다.“나가요. 보고 싶지 않으니까. 염지훈 씨,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유강후 씨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염지훈 씨를 좋아할 일은 없어요.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마찬가지로요.”순간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염지훈의 눈빛은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내가 그렇게 한심해 보여?”온다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듯 말했다.“나가라니까요. 내 말 안 들려요?”“온다연!”갑자기 염지훈은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잡았다.“나랑 같이 가자. 내가 너를 이 도시에서 데리고 나갈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줄게. 유강후, 그놈 곁에...”끝내 그는 말을 멈췄다.온다연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어쨌든 그놈은 자격이 없어.”이번에 온다연은 그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그녀는 눈을 내리깔
경호원들은 두 사람이 마주 선 모습에서 싸움이 일어날 것을 직감했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문 앞에 서 있었다.유강후는 낮게 포효했다.“나가! 이건 우리 두 사람 일이야. 너희들은 끼어들지 마!”염지훈은 비웃으며 말했다.“의외로 남자답게 행동할 때도 있네요.”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손목시계를 풀어 바닥에 던지고 손목을 한 번 돌렸다.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않고 조금씩 풀어냈다.오랜만에 이런 싸움에 대한 충동을 느꼈다.오늘 이 방 안에서 유강후와 염지훈 중 한 사람은 반드시 쓰러질 것이었다.그리고 그 사람은 절대 유강후 자신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염지훈이 반응할 틈도 없이 유강후는 표범처럼 그에게 덤벼들었다.염지훈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강렬한 펀치를 한 대 맞고도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문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경호원들은 방 안에서 두 명의 권위 높은 남자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며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아무도 싸움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한참 뒤, 유강후가 간신히 우위를 점했다.그는 입가의 피를 닦고 일어서며 염지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어이, 내가 이미 경고했지. 다연이는 네가 넘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다시 다연이한테 다가가기만 하면 내가 죽여버릴 거야!”염지훈은 피를 뱉어내며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오늘 겨우 이겼다고 승리한 줄 알아요? 웃기지 마요. 그쪽은 다연이 옆에 설 자격이 없으니까. 그쪽이 하는 사랑은 결국 다연이를 가두는 감옥을 만드는 것이었으니까.”“학교에 보내면서도 다연이가 금융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자 모든 금융 수업을 끊어버린 것. 다연이의 그림을 대가들이 감탄했을 때, 그 대가들의 전시 제안을 막아버린 것. 이런 것들은 다연이에게조차 숨긴 게 바로 그쪽이에요.”“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다연이의 날개를 꺾고 깃털을 뽑아버리며 그쪽 곁에만 묶어두려 한 거죠. 개인 소유물로 만들기 위해서.”“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은별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고 나은별의 집안에 대
염지훈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유씨 가문에서 지내온 세월 동안, 다연이는 매일같이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왔어요. 그게 다 당신 덕분이고요. 유강후 씨, 무슨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요. 그때 다연이를 괴롭힌 사람들을 모두 제거했다고 한들, 당신이야말로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으니까!”그는 피 섞인 침을 뱉으며 냉소적으로 덧붙였다.“열세 살이던 해에, 심미진이 다연이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했던 걸 당신이 막았잖아요. 강제로 다연이를 남게 했었죠. 그런데 남게 한 다음엔 뭘 했죠? 방치하고 대놓고 유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해서 더 큰 괴롭힘을 받게 만들었잖아요!”“유강후 씨, 당신은 자격이 없어요!”그는 천천히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조롱이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그리고 사실 알고 있었잖아요. 온준용이 다연이의 친부가 아니라는 걸. 하지만 당신은 그걸 이용해서 다연이를 자기 곁에 가두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다연이가 그렇게 아름다운 건 다연이의 유전자가 특별하기 때문이겠죠. 다연이의 친부모를 찾아주면, 그 사람들이 다연이의 편에 서서 다연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까 봐, 그래서 다연이가 당신의 통제에서 벗어날까 봐 두려웠던 거잖아요!”그러자 눈빛이 싸늘해지며 유강후가 말했다.“염지훈, 오늘 여기서 죽고 싶은 거야? 입 닥쳐!”하지만 염지훈은 비웃음을 터뜨렸다.“뭐예요, 내가 당신 약점 건드리니까 심장이 떨려요? 겁나요?”“유강후 씨, 정말 잘도 계획했네요. 하지만 그 아름다운 꿈은 곧 끝나게 될 겁니다.”“그리고 난 당신과 달라요. 나는 다연이를 데려가서 당신 곁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할 겁니다!”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단호히 말했다.“난 다연이를 존중해 줄 거예요. 자유를 줄 거고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응원할 거예요.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보며 새로운 삶을 탐험하도록 도와줄 겁니다. 당신처럼 병적으로 다연이를 가둬두는 짓은 하지 않고요.”그 순간, 차가운 무언가가 그의 머리에 닿았다.유강후는
안윤희는 눈가가 붉어진 채 무언가 말하려다 문득 들어오는 유강후를 바라보았다.유강후는 잠을 제대로 못 잔 듯 피로가 얼굴에 드러났지만 강렬한 분위기와 또렷한 외모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그는 방 안에 있는 안윤희를 힐끗 바라봤고 단 한 번의 시선만으로도 안윤희의 온몸에 서늘한 전율이 퍼졌다.그의 눈빛은 차갑고 어두웠으며, 마치 독을 품은 칼날처럼 사람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안윤희는 자신이 수많은 남자를 만나봤다고 자부했지만 이렇게 무서운 눈빛을 가진 이는 유강후가 유일했다.안윤희의 마음이 급격히 흔들렸고 유강후가 뭔가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그러나 이내 스스로를 다독였다. 모든 일을 빈틈없이 처리했으며 관련된 사람들은 이미 모두 사라졌으니 불안할 필요가 없었다.죽은 사람은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 법이다.안윤희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머리를 매만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강 대표님, 안녕하세요.”유강후는 더 이상 안윤희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곧장 온다연 앞으로 다가가 작은 약병을 건네며 말했다.“이건 곽 의사가 방금 보내준 약이야. 먹어봐.”그의 목소리에는 특유의 부드러움과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마치 세상에 수많은 아름다움이 있어도 그의 눈에는 온다연만이 유일하게 특별한 존재인 듯했다온다연은 병을 받아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특이한 향이 풍겼고 어딘가 피 냄새와도 비슷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온다연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유강후는 병을 다시 가져가 약을 꺼내 직접 하나 삼켰다.“봐, 문제없어. 이 약 총 20알이야. 곽 의사가 그러는데, 재료가 워낙 귀해서 자기한테도 40알밖에 없었대. 그중 절반을 나한테 준 거거든. 이거 먹으면 건강 진짜 좋아질 거야. 어쩌면 앞으로 약 안 먹어도 될지도 몰라.”그가 말을 마치자 진수현은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말했다.“약이 20알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하나를 먹었다고? 대체 무슨 생각이야?”유강후는 아무 대꾸 없이 옆에 있던 곶감을 집어 온다연의 입가로
“너도 명색에 안씨 가문의 큰딸이야. 가문이 조금 어려운 상황이라지만, 여전히 명문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좋은 물건이 부족할 리도 없는데 왜 이러는 거니...”안심은 말을 멈추고 온다연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다연아, 그저 한 세트의 장신구일 뿐이야. 너무 기분 상하지 말고, 엄마가 더 좋은 걸로 새로 준비해 줄게.”온다연은 안윤희 눈에 잠깐 스친 뚜렷한 분노를 보고는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배은망덕하다는 말이 딱 적합했다.“엄마, 더 큰 금고를 하나 마련해 주세요. 귀중한 물건들은 거기 보관하고 제가 직접 관리할게요.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어요.”안심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 물건은 네가 직접 챙기는 게 맞지.”안윤희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이건 분명 안윤희를 경계하려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안윤희는 개의치 않았다. 고작 몇 개의 장신구일 뿐이었고 갚지 못할 정도의 거금도 아니었다. 대진 그룹의 부대표가 된다면 더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그때가 되면 아무것도 모르는 온다연은 바보처럼 자신의 손에 놀아나게 되어 있을 것이다.안윤희의 눈에 스친 냉소는 온다연도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지난 3년간 아버지 진수현 곁에서 많은 것을 배운 온다연은 속으로 생각했다.회사 관리를 원하지 않는 것과 관리 능력이 없는 건 엄연히 다른 거라고.비록 회사를 직접 관리하는 것을 선호하지는 않았지만 가족의 사업을 결코 남의 손에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온다연은 진수현을 바라보며 결심한 듯 말했다.“아빠, 이제 제 신분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대진 그룹을 정식으로 이어받아 앞길을 열어가고 싶습니다.”온다연의 말에 안윤희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안윤희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둘러 말했다.“다연아, 아직 몸이 좋지 않잖아. 건강을 회복한 뒤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아. 회사 일은 우리한테 맡겨도 되잖아.”온다연은 안윤희의 말을 무시한 채 진수현을 향해 말했다.“아빠, 언제까지 아빠 뒤에만 숨을 수는 없어요. 이
안씨 가문도 명문가이긴 하지만 겉만 번지르르할 뿐 이미 속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만약 진씨 가문이 뒤에서 받쳐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안윤희는 제대로 된 옷 한 벌도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게다가 예전에 온다연에게서 가져간 물건 중 상당수는 이미 팔아버려 이제 와서 돌려줄 수도 없었다.그때 밖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안윤희의 눈빛이 잠시 차갑게 빛나더니 곧바로 울음을 터뜨렸다.“다연아, 이러지 마. 예전에 네가 선물로 줬던 물건들을 이제 와서 돌려달라니, 말이 돼? 난 우리를 자매처럼 생각했는데, 네가 이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일 줄은 몰랐어...”온다연은 아무 말 없이 안윤희를 차갑게 바라보았고 그녀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깊어졌다.잠시 후, 진씨 부부가 방으로 들어왔다.안심은 안윤희가 온다연의 병상 앞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곤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온다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윤희가 먼저 말했다.“이모, 다연이가 제가 예전에 받았던 장신구들을 다 돌려달라고 해요. 그런데 제가 뭘 받았는지 기억도 잘 안 나고, 일부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줬어요... 어젯밤에 제가 다연이를 제대로 따라다니지 않고 혼자 둔 걸로 저를 원망하고 있어요. 하지만 저도 제 일이 있었는데 말이에요...”안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안심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온다연을 바라보며 물었다.“다연아, 정말 그런 거야?”온다연은 상체를 일으키며 안윤희를 차갑게 쳐다봤다. 보면 볼수록 짜증이 치밀었다.“언니, 연기 그만해. 그동안 언니가 내 물건 가져간 건 전부 언니 멋대로였잖아. 빌린다고 말했지만, 내가 준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리고 어제 언니가 가져간 건 내가 결혼식 때 쓰려고 준비해 둔 장신구였어. 한 번도 착용하지 않은 건데, 그냥 가져가더라. 난 허락한 적이 없었는데. 아니면 진씨 가문 물건은 언니가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뜻이야?”온다연의 말투에는 서늘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언제부터 진씨 가문이 안씨 가문과 한 식구가 됐는데?”
그때 유강후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화면에 표시된 번호를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몇 분 후, 안윤희가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안윤희는 연한 하늘색 발목 길이 드레스를 입고 하얀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고 있어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그러나 침대 위에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온다연의 모습이 훨씬 더 사람들의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안윤희의 마음속에 묘한 질투심이 피어올랐다.안윤희는 방 안을 둘러보고는 유강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안윤희는 장미꽃을 창가에 올려놓으며 말했다.“다연아, 몸은 좀 괜찮아졌어?”하지만 온다연은 원래부터 백장미를 싫어했다. 온다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안윤희를 쏘아보며 물었다.“왜 왔어?”안윤희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깨어났다고 해서 와봤어. 그런데 아직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혹시 누가 진씨 가문을 노리기라도 했어?”온다연은 이번 일에 안윤희가 직접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내가 깨어난 게 언니랑 무슨 상관인데? 어젯밤에 일어난 일은 언니가 더 잘 알지 않아?”안윤희는 순간 당황했다.온순했던 온다연이 요즘은 마치 가시가 돋은 듯 상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다연아, 혹시 어제 내가 목걸이를 빌려 간 것 때문에 아직도 화난 거야?”안윤희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어제 급해서 미처 말 못 했을 뿐이야. 그리고 우리 사이에 이런 일은 예전에도 많았잖아.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거야?”온다연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빌린 거라고? 그럼 어제 가져간 장신구 다시 돌려줄래? 내가 다시 쓸 일은 없겠지만, 그건 어머니가 내 혼수를 위해 준비해 주신 거라 남에게 줄 수는 없어.”안윤희는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돌려달라고 요구하다니, 감히!원래 그 장신구는 안윤희,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온다연이 중간에
온다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제가 자리를 떠난 후, 모퉁이에 있는 빈방에 잠깐 머물렀어요. 그때 웨이터가 와서 음료랑 디저트를 좀 가져다줬길래 조금 먹었어요. 그리고...”그녀는 유강후를 힐끔 쳐다보고는 귀끝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그리고 창가에 앉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했어요.”그때 유강후는 연시온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단연 돋보였다. 그 자리에 있던 여자 게스트들은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온다연은 속으로 유강후가 더 잘생겼다고 생각했다.온다연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창가에 잠깐 기대서 달을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서 잠들어 버렸죠. 깨어보니 냉동창고 안이었고 정말 추웠어요...”온다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순간을 떠올리기만 해도 지옥에 다녀온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유강후의 눈에 차가운 기운이 스쳤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모든 CCTV를 확인했지만, 2층의 녹화는 누군가에 의해 삭제됐어. 그리고 음료를 가져다준 웨이터는 오늘 아침 유람선 아래에서 발견됐는데, 이미 죽어 있더군.”유람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 다 확인했지만 범인은 치밀하게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심지어 웨이터의 지문도 발견되지 않았고 그의 죽음으로 모든 단서가 끊겨버리고 말았다.온다연을 해치려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닌 듯했다.지난번의 뱀 사건도 아마 그 사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치밀하고 독한 사람의 짓이 분명했다.그 사람이 하루라도 살아 있는 한, 온다연은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네 사촌 안윤희의 관계는 어때?”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언니와 관련된 일인가요?”사실 온다연은 안윤희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안윤희가 어머니의 조카이자 안씨 가문의 큰 아가씨라는 이유로 지난 3년 동안 그럭저럭 무난하게 지내왔다.그런데 최근 들어 안윤희의 행동이 달라지기 시작했다.여러
“꿈에서 제가 얼어붙을 듯한 방에 갇혀 있었어요. 너무 추워서 거의 죽을 뻔했는데 대표님이 나타나 저를 구해 주셨어요. 그리고 낯선 남자와 할머니가 저를 때리려 했는데 정말 무섭고 무자비했어요.”온다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유강후를 쳐다봤다.“강 대표님은 대체 제게 어떤 사람이었나요? 왜 제 꿈에 자꾸 대표님이 나오는 거죠? 그것도 전부 나쁜 일들에서만요.”유강후는 속이 쓰린 듯 온다연을 한참 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네 남편이었다고 하면 믿을래?”온다연은 얼굴이 순간 빨개지더니 곧장 베개를 들어 유강후를 향해 던지며 화를 냈다.“정말 너무 싫어요! 그런 농담 하나도 안 웃기거든요!”유강후는 아침에 안심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마음이 서서히 무거워졌다.그는 온다연을 배신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가 입은 상처 대부분이 자신과 얽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유하령은 감옥에 갔고 유자성은 척박한 사막으로 발령이 났으며 강혜숙은 분노 끝에 중풍에 걸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온다연이 받은 상처가 치유될 리 없었다.그리고 자신 또한 유씨 가문의 사람이었으며 그들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어떻게 해야 온다연이 과거의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어쩌면 온다연의 기억 상실은 하늘이 준 새로운 기회일지도 몰랐다.유강후는 떨어진 베개를 주워 온다연의 등 뒤에 놓으며 낮게 말했다.“농담이었어. 하지만 우리가 전에 알던 사이였던 건 사실이야. 사실을 난 예전에 당신 팬이었거든.”그는 온다연의 침대 옆에 앉아 과거를 떠올리며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처음 너를 알게 됐을 때, 너는 아직 어린 소녀였어. 나는 너보다 여덟 살이나 많았지. 너에게 다가갈 수 없어서 마음을 억누르며 매일 네가 빨리 성인이 되기만을 기다렸어.”온다연은 그의 말을 듣고 멍해졌다.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고 목까지 붉게 물들었다.온다연은 말을 더듬으며 겨우 말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유강후는 온다연의 얼굴에 흐트러진
유강후는 침묵했다.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온다연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사람들은 시간이 상처를 치유한다고 말하지만, 유강후는 시간이 모든 진실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어떤 일이 닥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하지만 단 한 가지, 온다연을 절대 놓을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안심은 유강후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더는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기로 했다.“다연이가 깨어났어요. 한 번 가서 봐주세요. 강 대표님이 준 약 효과가 대단했나 봐요. 꾸준히 복용하면 건강이 훨씬 좋아질 것 같아요.”잠시 말을 멈췄던 안심이 다시 입을 열었다.“다연이 일에 관해서만큼은 제가 쉽게 넘어갈 수 없어요. 지금 강 대표님이 다연이를 만나는 걸 허락하는 건, 강 대표님이 다연이를 진심으로 아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거에 다연이를 상처 준 적이 있다면, 제 딸이 그런 사람과 함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유강후는 눈에 깊은 어둠을 띤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진 사모님, 진 씨 부부에 관한 이야기를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두 분께도 젊은 시절이 열렬히 사랑했던 순간들이 있었다고요. 결국 두 분은 함께하시게 됐잖아요. 저와 다연이 사이에 오해가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 평생을 바쳐 다연이에게 보상할 겁니다. 저는 절대 다연이를 놓지 않을 겁니다.”말을 마친 유강후는 병실로 들어갔다.온다연은 침대 머리에 기대고 있다가 문소리가 들리자 엄마인 줄 알고 부드럽게 말했다.“엄마, 밤새 저 돌보시느라 눈이 빨개지셨잖아요. 얼른 가서 쉬세요. 그러다 예뻐지지 못하면 어쩌려고요.”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다가가 온다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기운이 좋아 보여요. 약 효과가 정말 뛰어난 것 같네요.”유강후는 곽혜진이 준비한 약이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다. 보통 이런 상태에서 6~7일은 회복이 어려울 만도 한데 온다연은 하룻밤 만에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
유강후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안심은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유강후의 대답은 온다연과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과 다름없었다.안심은 자신의 직감이 이렇게 정확할 줄은 몰랐다.안심의 표정은 점점 더 차갑게 굳어졌다.“3년 전, 다연이가 발견됐을 때 온몸에 상처투성이였고 폐 감염이 심각해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어요. 병원에서 한 달을 누워있다 깨어났죠. 하지만 다연이의 몸과 마음은 심하게 망가져 있는 상태였어요. 말을 하지도 않았고 아무도 믿지 않았어요. 특히 밤이 되면 상태가 매우 나빠져 여러 차례 자해를 시도하기도 했죠.”안심은 온다연이 처음 돌아왔던 모습을 떠올리며 울컥했다.“다연이는 우리의 진심에 대해서 여러 번 물으며 의심했어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자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했죠.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해도 대답 대신 눈물만 흘리며 모든 감정은 거짓이라고 되풀이했어요. 염지훈의 설명에 따르면, 양부모의 학대로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해요. 그 집안은 남아선호 사상이 강해서 다연이가 큰 상처를 받았죠. 결국 전문 심리치료사의 도움으로 상담을 진행하고 최면을 통해 과거를 조금씩 잊게 하면서 다연이가 지금처럼 정상적인 상태를 되찾을 수 있었어요.”“강 대표님, 우리는 다연이가 H국에서 겪은 일을 조사해 보려고 했지만 동남아가 아닌 그곳은 우리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라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했어요.”“지금 우리는 그저 다연이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행복하기만을 바라고 있어요. 양부모가 다연이에게 준 상처는 우리가 평생을 바쳐도 다 회복시키지 못할 만큼 크니까요. 그래서 저는 다연이가 과거를 떠올리지 않길 간절히 바라요.”안심은 유강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강 대표님이 정말 다연이의 과거를 알고 있는 연인이나 친구였다면, 다연이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왜 바다에 빠진 겁니까?”“왜 과거를 떠올리기만 해도 그렇게 고통스러워서
그때, 이권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고 손에는 두 병의 약을 들고 있었다.그 약은 며칠 전, 곽혜진이 준 것이었지만 유강후는 온다연에게 줄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유강후는 약을 받아 한 병에서 한 알을 꺼내 직접 입에 넣고 삼켰다.그리고 조용히 말했다.“이 약은 다연이를 위한 겁니다. 다연이의 몸이 회복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일정 기간 복용하면 건강이 많이 좋아질 거고 지금 복용시키면 더 빨리 깨어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진수현은 화를 내며 말했다.“네가 준 물건 받지 않아. 당장 나가!”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진 회장님, 혹시 곽 의사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지금 이 근처 섬에서 비밀 실험을 진행 중인 분입니다.”“이 약은 곽 의사가 직접 준 겁니다. 온다연을 위해 특별히 지은 약이고 매우 귀한 약입니다.”진수현은 잠시 분노를 억누르고 두 병의 약을 노려보며 말했다.“그 약이 진짜라는 걸 누가 증명하지? 다른 사람들은 이 약 한 알을 구하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인데, 어떻게 두 병이나 구했지?”유강후는 사실대로 말했다.“우리 가문의 어르신께서 곽 의사 가문과 오래된 인연이 있으십니다. 저 역시 곽 의사의 남편과 약간의 교분이 있고 마침 이 근처에 머물고 있다고 하셔서 이렇게 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유강후는 약을 안심에게 건네며 말했다.“진 사모님, 이 약을 한 알씩 다연이에게 복용시켜 주시길 바랍니다.”진수현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안심이 그를 막았다.“이 약에는 문제가 없어요. 방금 강 대표님께서도 우리 앞에서 직접 복용하셨잖아요. 곽 의사의 약은 정말 구하기 힘든데, 강 대표님이 이런 약으로 우리를 속일 리는 없다고 생각해요.”안심은 약병에서 두 알을 꺼내 냄새를 맡아보았다.약에서는 은은하고 깊은 향이 풍겼으며 어딘가 신비롭고 오래된 느낌이 담겨 있었다.안심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가 온다연에게 약을 먹였다.유강후는 옆에서 안심이 온다연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