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고개를 들어 주희를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주희,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속에서 넌 그저 주한의 동생일 뿐이야.”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씩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넌 영원히 네 형을 따라잡을 수 없어. 그리고 나도 너를 절대 좋아하지 않을 거야. 알겠어?”주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손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그러나 온다연은 그를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섰다.주희는 모자를 다시 눌러쓰고 그녀를 따라나섰다.그렇게 둘은 한 사람은 앞서고 다른 한 사람은 뒤따르며 걷고 있었다.익숙한 오래된 거리, 공기 중에는 은은한 아카시아 꽃향기가 퍼져 있었다.하지만 모든 것이 이미 변해버렸고 지나간 일들은 되돌릴 수 없었다.익숙한 구멍가게 앞을 지나던 주희는 그 안을 바라보며 문득 말했다.“누나, 예전에...”온다연은 차갑게 대답했다.“너도 알다시피 그건 예전일 뿐이야. 이제 그만 가자. 아이가 오래 나와 있을 순 없거든.”바람이 불어 낙엽들을 날려 보냈고 그와 함께 기억 속의 사람들과 그림자도 사라져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옛날 거리에 도착했다.예상대로 거리는 잘 정비되어 있었고 길 양쪽에는 붉은 등이 걸려 있었다.예전 명절 때처럼 아름답고도 낡아 보였다.주희는 문을 열며 말했다.“전에 전부 철거한다고 했었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철거를 안 하기로 했대요. 나로선 잘된 일이지만요.”“원래 계약대로라면 이렇게까지 바뀌지 않았겠지만 들리는 소문으로는 개발업체가 꽤 배경이 있는 곳이래요. 아주 손쉽게 뭐든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것 같아요.”나무문을 열자 익숙한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온다연은 문 앞에서 한참 동안 서 있었다.주희는 계속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온다연은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곧 주희가 생필품을 사러 나간 틈을 타 그녀는 주한의 사진 두 장을 챙겨 나가려 했다.그러나 문을 나서기도 전에 누군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들어온 사람
방 안에는 작은 조명 하나만 켜져 있어 조금 어두웠다.온다연은 침대에서 막 일어나려다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에 휘청이며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겨우 실루엣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정말 불행은 늘 약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걸까?‘왜 하필 지금 또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야?’그때, 나무문이 열리며 낮고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연아!”온다연이 고개를 들어 바라봤지만 어두운 조명 아래 남자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다만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키 큰 남자가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모습만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었다.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남자 특유의 강렬한 카리스마와 은은한 삼나무 향이 느껴졌고 그 향이 점점 그녀를 휘감으며 다가왔다.이 불쾌한 냄새에서 벗어나고 싶어 온다연이 뒤로 물러났지만 삼나무 향은 집요하게 그녀를 따라붙었다.속이 메스꺼워져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유강후의 시선은 온다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조명이 어두운 데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긴 머리카락이 앞으로 내려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며칠 못 본 사이 그녀는 더 야위어 있었다. 머리에는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고 뒤쪽에는 피가 조금 스며든 흔적까지 보였다.유강후는 마음이 덜컥 내려앉으며 손에 쥔 반지를 꽉 움켜쥐었다.오는 길 내내 그녀를 벌줄 방법을 수없이 생각했지만 이렇게 초췌해진 모습을 보니 그 모든 생각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남은 건 오직 걱정뿐이었다.곧 그가 손을 뻗어 그녀를 안으려 했지만 온다연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공기 중에 스며든 삼나무 향은 유강후 특유의 냄새였다.그러나 그 삼나무 향 사이로 희미한 꽃향기가 섞여 있었다.무슨 꽃향기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달콤한 여자의 향기가 느껴졌다.가슴 깊이 불쾌함이 치밀어 오르다 못해 온다연의 머리는 더 심하게 아파왔다.“건드리지 마요!”그녀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차갑고 날카로워 거리가 느껴졌다.유강후는 손을
그는 경원시에서 손 하나 까딱하면 모든 걸 좌우할 수 있는 사람이다.‘아이 하나 처리하는 일쯤은 손바닥 뒤집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겠지. 그 여자 때문에 내 아이까지 데려간 사람인데. 만약 내가 거짓말을 폭로해버린다면 아저씨는 체면을 내려놓고 그 아이를 없애버릴지도 몰라.’유강후가 했던 끔찍한 일들은 이미 소문으로 들었고 그의 냉혹함은 이미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다.‘근데 왜 저렇게 반지에 집착하는 거지? 웃기지도 않아. 정말 우스꽝스러울 정도야!’온다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깊게 파고들었지만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아저씨처럼 잔인한 사람은 본 적 없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잠긴 듯했으며 마치 울음을 참는 듯했다.이런 온다연의 모습을 보자 유강후는 심장이 아릿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하여 그는 천천히 그녀 앞까지 걸어와 낮게 말했다.“말 들어. 반지 주워.”온다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시야 아래로는 맞춤 제작된 고급 남성 구두와 한 치의 구김도 없는 바지의 다리만 보였다.조금 고개를 들자 그 긴 다리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순간, 온다연은 그 다리에 얽힌 지난날의 기억이 떠올랐다.물론 그 다리는 다른 사람들과도 얽혔을 것이다.고통과 구역질 나는 감정이 뒤섞이며 그녀의 마음을 한껏 옥죄었다.‘믿지 말았어야 했고 흔들리지도 말았어야 했는데. 내 것이 아닌 것에 손을 댔으니 결국 이렇게 된 거겠지.’진심과 사랑은 너무 값비싸다.온다연은 그 대가를 감당할 수 없었고 집안 배경도 부족했기에 유강후가 그녀를 아무렇지 않게 짓밟을 수 있었던 것이다.유강후는 몸을 숙여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착하게 굴어. 반지 주워.”그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강압적인 느낌과 엄격함이 담겨 있었다.온다연이 여전히 미동조차 없자 그의 눈빛에 살기가 스쳤다.갑자기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거칠게 잡아 반지 위에 얹으며 말했다.“주워.”그리고 덧붙였다.“반지 주울 생각 없으면 앞으로 며칠 동
단순히 반지를 끼우는 것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도대체 왜?’갑자기 그녀는 유강후의 손목을 잡아들고 있는 힘껏 그 손을 깨물었다.이번에는 정말로 사납고 거칠었다. 마치 그의 살점을 떼어내고 싶은 것처럼 강하게 문 것이다.이내 피가 손목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지만 온다연은 멈추지 않았다.이마저도 부족하다고 느끼며 그녀는 더 깊게 물었다.유강후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위에서 회계 조사가 들어와서 못 나갔어. 그래서 아이를 보러 오지 못한 거야.”온다연은 속으로 비웃었다.‘거짓말! 당신 말 중에 진심이란 게 한 번이라도 있었어?’그녀의 분노는 더욱 타올랐고 이로 인해 유강후의 손목을 더 세게 물었다.유강후는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날 피를 보게 해서 화가 풀릴 거면 차라리 날 두 번 찔러. 이렇게 어설프게 굴지 말고.”그러더니 갑자기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칼을 들어 그녀에게 건넸다.“자, 한 번 해봐. 그럴 용기가 있다면 말이야.”순간, 온다연은 칼을 잡아 들더니 망설임 없이 그의 가슴을 향해 찔렀다.그러나 시야가 흐릿했던 탓에 칼은 유강후의 가슴이 아니라 어깨 아래쪽을 꿰뚫고 말았다.비록 작았지만 칼은 날카로웠고 깊숙이 파고들었다.곧바로 피가 쏟아져 나왔다.둘 다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온다연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칼을 놓아버렸다.그리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려 했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야 때문에 두 발짝도 못 가 책상에 부딪혔다.책상 위 물건들이 바닥으로 쏟아졌고 그녀가 가지고 있던 사진 두 장도 함께 떨어졌다.유강후는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찌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하여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보고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천천히 사진을 주워들었다.사진 속에는 주한이 있었다.한 장은 주한의 단독 사진으로 소년의 맑고 깨끗한 모습이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와 함께
“아저씨랑 같이 잤던 걸 생각하면 역겨워요!”유강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온다연, 방금 한 말 당장 취소해.”그러나 온다연은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왜 내가 취소해야 하죠? 그런 짓들 아저씨가 다 해놓고 난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아저씨는 본인이 안 더럽다고 생각해요? 아저씨랑 잤던 걸 떠올리면 토하고 싶어요!”분노로 인해 유강후는 손이 떨릴 정도였다.분명 아이를 챙기지 못한 건 그의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분노를 터뜨리며 막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고 생각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주한의 옛집에 다녀온 뒤로 완전히 달라졌다.‘주희가 무슨 말을 했기에 이렇게 변한 거야?’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더럽다고? 나랑 같이 있었던 기억이 역겹다고?”“며칠 전 내 밑에서 그렇게 열심히 부르짖던 사람이 누군데?”이 말은 칼처럼 온다연의 가슴에 박혔다.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는 순간, 그녀는 치욕감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속이고 가지고 놀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사랑이라 착각했던 것이다.이를 악문 채 온다연은 낮게 외쳤다.“그따위 기술로? 날 즐겁게 했다고요? 역겨워요!”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유강후는 순식간에 그녀를 침대 가장자리로 밀쳐 눕혔다.그러자 깜짝 놀란 온다연이 외쳤다.“뭐 하는 거예요? 미쳤어요? 문밖에 경호원이 있다고요!”하지만 유강후는 온다연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고 거칠게 그녀의 옷을 벗겼다.온다연은 문이 열려 있다고 착각한 채로 계속해서 격렬히 저항했다.그녀의 반항은 그의 독점 욕구를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결국 그녀는 유강후의 거친 욕망에 굴복해야 했다.짧은 폭력적인 순간이 지나고 두 사람은 모두 지쳐 침묵 속에 잠겼다.온다연은 몸을 떨며 침대 구석으로 몸을 웅크린 채 옷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유강후는 피로 물든 어깨에서 통증을 느끼며 옷을 여몄다.곧 바닥에 꽂혀 있는 칼을 보고 그는 문을 열어 경호원에게 명령했다.“
“온준휘 씨가 골든 타임을 놓쳤습니다. 방금 호흡이 갑자기 멈췄고... 아마도 살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유강후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소리야? 인평 병원에서 최고 실력을 가진 의사를 데려오라고 했잖아!”비서는 머뭇거리며 말을 더듬었다.“온준휘 씨가 온준용 씨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이 대표님이 치료를 원치 않는다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조금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아까 대표님께서... 사모님 병실 앞에서 말씀하신 거로 모두들 대표님이 치료를 하지 말라고 한 줄로...”“이 멍청한 놈들!”유강후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내가 언제 치료하지 말라고 했다는 거야!”겁에 질린 비서는 몸을 떨며 대답했다.“아까... 사모님 병실 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들렸습니다...”“말도 안 돼!”유강후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응급실로 향했다.“구해! 만약 살리지 못하면 내가 어떻게 책임을 묻는지 두고 보라고!”그가 응급실 문에 도착했을 때, 의사가 막 나온 참이었다.유강후는 그를 붙잡으며 다그쳤다.“무슨 상황이에요?”그러자 의사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이번에는 겨우 살렸습니다. 하지만 방금 뇌출혈 증상이 추가로 발생했습니다...”유강후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다른 의사들을 추가로 데려와요. 인평 병원에서 최고의 전문가를 당장 모셔 오라고요!”하지만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소용이 없습니다. 이제는... 편안히 보내주는 것이 나을 겁니다.”그 순간, 간호사가 급히 나와 말했다.“교수님, 환자가 누나를 보고 싶어 합니다. 누나분 여기 계신가요? 연락할까요? 제가 보기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안색이 굳어진 채로 유강후는 비서를 향해 냉정하게 말했다.“다연이 데리고 와.”이렇게 말한 뒤, 그는 직접 응급실로 들어갔다.침대에 누운 소년은 이미 숨이 끊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고 마지막 힘을 다해 유강후를 바라보았다.그가 온 것을 확인한 소년의 눈에는 실망감이
“아빠랑 이모가 말하시는 거 몰래 들은 적이 있어요. 누, 누나는 어쩌면 아빠의...”갑자기 그의 입에서 대량의 피가 쏟아지며 숨쉬기조차 어려워졌다.온다연은 온준휘가 이상해진 것을 감지하고 급히 물었다.“많이 힘들어? 괜찮아?”그러고는 문 쪽으로 돌아서며 소리쳤다.“의사! 의사 선생님 빨리 와주세요!”온준휘는 힘겹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누, 누나는... 아마도...”목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졌고 그는 겨우 힘을 짜내며 말했다.“친자식... 이... 아닐 수도... 새...”그러다 마지막으로 모든 힘을 다해 외쳤다.“나를 도와... 우리 엄마를... 구해줘요...”그리고 힘겹게 이어진 그의 마지막 말.“세상은 너무 괴로워요. 누나. 나, 나...”온다연이 말문을 열기도 전에 소년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바로 그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상황을 확인한 의료진은 온준휘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을 알아챘다.하지만 문밖에 살아있는 ‘악마 같은 존재’가 서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손을 댈 수 없었다.혼란스러운 응급처치가 이어졌고 결국 병실은 조용해졌다.의사는 온다연 앞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죄송합니다.”온다연은 의료진의 응급처치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진 못했지만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고 있었다.그녀는 온준휘에게 큰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하지만 그 소년은 온준용이 온다연을 때릴 때 자신의 작은 몸으로 그녀를 보호했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악마 같은 온준용과 몸싸움을 벌였다.‘분명 살릴 수 있었어. 근데 왜?’온다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살리지 못한 건가요? 분명 그렇게 심한 부상은 아니었잖아요...”그러자 의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최적의 응급처치 시간을 놓쳤습니다. 많은 일들이... 저희의 통제를 벗어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그때 유강후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온다연을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사람들은
온다연은 벽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움직였다.몇 명의 간호사가 그녀 곁을 지나가며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어떻게 죽을 수가 있지?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도 않았잖아. 처음 들어왔을 때도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는데.”“위에서 압박이 들어와서 못 살리게 했다더라. 불쌍해. 아마 누군가를 잘못 건드린 거겠지.”“듣자 하니 유 대표님이 그렇게 지시했다던데...”“조심해. 이런 말 하다가 들키면 일자리 잃을 수도 있어.”“정말 끔찍해. 고작 열세네 살 아이가 누나를 지키려다가 자기 친아버지에게 맞아 죽었다니.”“그리고 또 죽은 사람이 친아버지라던데, 혈액에서 대량의 알코올이 나왔대. 술 먹고 폭주했겠지.”“돈 많은 사람들이란... 어린애까지 이렇게 잔인하게 다루다니.”“그만 말하고 빨리 가자.”...간호사들의 대화 소리가 점차 멀어졌고 복도 밖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은 따뜻했지만 온다연의 온몸은 차가워 떨고 있었다.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만큼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었고 등은 금세 식은땀으로 젖었다.‘이게 진실이었던 거야?!’온준휘의 죽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그는 분명 살아날 수 있었다.그러나 유강후가 살리게 두지 않았다.그래서 응급처치의 황금시간을 놓친 것이었다!하지만 소년은 아직 어렸다.제대로 성장할 기회도 없이 생명을 빼앗겨 버렸다.온다연은 자신이 유강후와 다를 바 없는 살인자임을 깨닫고 고통에 몸부림쳤다.그녀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후회와 분노로 가득 차 속으로 외쳤다.‘차라리 그때 유강후의 심장을 찔러버렸어야 했는데! 그 사람이 진정한 악마인데!’바로 그때, 유강후가 전화를 마치고 그녀에게 다가왔다.그는 그녀의 눈물이 가득한 얼굴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닦아주려 했다.그러나 온다연은 갑자기 폭발하듯 소리쳤다.“꺼져, 이 악마야!”“유강후, 죽어야 할 사람은 너야!”유강후는 몸이 굳어 그녀를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다.“뭐라고 했어? 죽어야 할 사람이 누구라고?”
온다연은 체구가 작고 연약해 보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반면 유강후는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에다 차가운 표정까지 더해지니 교통경찰은 두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상황을 믿게 되었다.교통경찰은 곧바로 말했다.“혹시 신분증 좀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유강후는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저희는 부부입니다. 지금 말다툼 중이니 제발 끼어들지 말아 주세요.”그러자 온다연은 바로 외쳤다.“아니에요! 저 이 사람 몰라요. 경찰관님, 저 도와주세요!”이 말을 끝내자마자 온다연은 힘껏 유강후의 손을 뿌리치고 바로 차에서 내려 몇 걸음 만에 계단으로 뛰어올랐다.유강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경찰이 제지했다.“일단 검문에 협조해 주시죠!”이미 육교 위로 올라가고 있는 온다연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더니 유강후는 경찰을 매몰차게 밀치며 말했다.“비켜!”이 말에 경찰들도 얼굴빛이 바뀌며 강경하게 그를 붙잡았다.“신분증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경찰서로 모셔야겠습니다!”이때 뒤따라온 경호원들이 황급히 차에서 내려와 경찰에게 신분증을 건넸다.“죄송합니다. 여기 신분증입니다!”경찰은 신분증을 꼼꼼히 확인한 후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되돌려주며 말했다.“다음부터는 주차나 정차를 신중히 하세요.”하지만 그사이 온다연은 이미 육교 중간에 서 있었다.유강후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따라가. 놓치지 말고!”그러나 이곳은 번화가였고 따라잡기란 쉽지 않았다.경호원이 뒤쫓아 갔을 때, 온다연은 이미 맞은편 쇼핑몰로 들어가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두 시간 후, 온다연은 시 외곽의 한 영상 제작소 대형 세트장에 나타났다.그녀의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은 임정아는 화가 나서 들고 있던 밀크티를 바닥에 던져버렸다.“그 사람, 인간도 아니에요!”“다연 씨 아들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다니... 다연 씨를 뭘로 본 거예요?”“전화했을 때부터 안 좋은 일이 생긴 줄 알았어요. 그래도 이건 너무 지나치잖아요!”
“그만해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으니까.”온다연은 그의 말을 한마디도 더 듣고 싶지 않았다.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피로감이 몰려왔다.‘어떻게 해야 내 아이를 찾고 이 악마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그녀는 자신의 나약함을 이토록 증오했던 적이 없었다.유강후의 강압적인 통제 아래 그녀는 자신의 아이조차 지킬 수 없었다.아이는 이미 그의 손에 넘어갔고 온다연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완전히 맞서 싸울 용기도 없었다.‘무엇을 카드로 삼아야 아이를 되찾을 수 있을까?’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 있을 아이를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때,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무튼 지금 상황은 이런데 넌 원하는 게 뭐야? 어떻게 해야 네 화가 풀릴 수 있을지 말해줘. 계속 이렇게 버티면 나도 힘들어.”온다연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그 얼굴은 그녀가 본 얼굴 중 가장 잘생긴 얼굴이었다.하지만 이 얼굴의 주인은 심장이 없었다.아니, 심장은 있었다.그저 온다연을 위한 심장이 아니었을 뿐이다.‘이 모든 게 내 잘못이야.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내가 멍청하게 믿고 따라갔으니까.’“사람 목숨은 아저씨한테 중요하지 않죠? 왜냐하면 고통받는 건 아저씨 자신이 아니니까!”유강후는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온다연의 영혼까지 꿰뚫으려는 듯 말이다.“온다연,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그런 말 하면 나도 괴로워.”그러나 온다연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말했다.“괴롭다고요? 아저씨는 쉽게 유씨 가문 사람들을 용서하잖아요. 근데 다른 사람에게는 왜 그렇게 무자비해요?”유하령의 다리가 부러지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유강후는 그녀에게 치명타를 가하지 않았고 그녀를 비호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곧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목을 붙잡고 낮게 말했다.“다연아, 유자성의 뒤에는 우리 아버지가 있어. 아버지는 내가 형과 대립하는 거로 몇 번이나 병원에 실려 갔어. 내가 직접 손
차는 장례식장 방향으로 빠르게 달렸다.온다연은 창밖으로 보이는 복잡한 도심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이 공허함으로 물들었다.이 도시에서 21년을 살며 거의 떠나본 적이 없었지만 이곳은 그녀를 키워준 곳이자 동시에 끝없는 고통을 안겨준 곳이었다.이토록 화려한 곳에서 왜 이렇게 많은 악이 생겨나는 걸까?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연약한 이들에게 손을 뻗어 상처를 주는 걸까?그들의 삶과 생명을 조종하며 병적인 만족감을 얻는 걸까?그녀는 어릴 적부터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모든 걸 가지며 시작하고 또 누군가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결국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하지만 설마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악마 중 하나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제 유강후는 그녀가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그녀의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온준휘의 생명을 끊었다.악귀들과 다를 바 없었다.아니, 어쩌면 더 끔찍했다!그 사람들은 온다연에게 직접적인 상처를 주었고 그들의 악은 망설임이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증오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 있었다.그러나 유강후가 준 것은 그녀의 뼛속까지 각인되게 만들 철저히 계획된 고통과 기만이었다.그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온다연은 무심코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입꼬리가 비틀리며 냉소가 흘러나왔다.‘그 사람이 좋아했던 게 이 얼굴이지. 그 여자의 얼굴이 이랬으니 내 얼굴도 비슷해서 끌렸던 거겠지. 취향이 정말 변함없네. 이 얼굴이 망가진다면 그 사람은 어떤 태도를 보일까? 여전히 다정한 척하며 날 기쁘게 하려고 애쓸까?’그때 뒤따라오던 경호원이 전화를 받더니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동교 묘지로 바로 가세요.”묘지에 도착하자 유강후가 검은 정장을 입고 어머니 묘비 앞에 서 있는게 보였다.그의 뒤에는 경호원 두 명이 각각 유골함을 들고 있었다.온다연이 다가오자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기분은 좀 나아졌어? 오늘 눈은 좀 보여?”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머니의
하지만 온다연의 눈에는 흐릿한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몇 걸음 달리자마자 바닥에 넘어졌고 다시 일어나 쫓아가려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쓰러졌다.유강후는 이런 온다연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만해. 준휘는 이미 죽었어!”온다연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외쳤다.“놔! 유강후, 이건 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만든 결과라고!”“당신이 사람들한테 막으라고 했잖아!”“다 당신 때문이야!”“놓으라고!”곧 유강후는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맞아. 내 잘못 있어. 내가 정확히 지시하지 않아서 아래 사람들이 내가 준휘를 싫어한다고 오해했고 그것 때문에 응급처치 타이밍을 놓쳤어.”“하지만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나는 그 애가 죽길 원한 게 아니라고!”“너희 아버지조차도 살릴 의도가 없었던 적은 없어!”“온다연, 정신 좀 차려!”하지만 온다연은 이미 감정이 폭발해 그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유강후, 당신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당신의 말 한마디, 심지어 한 문장부호조차 믿지 않아!”“꺼져, 밖에 당신이 좋아하는 여자들 많잖아. 나한테 집착하지 마. 이제 당신한테 마음 줄 일은 없어!”“비켜!”그녀는 울면서 소리쳤고 목소리는 이미 쉰 상태였다.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계속 울다 보니 유강후는 온다연의 눈이 더 나빠질까 두려워 그녀의 손발을 제압했다.그리고 의사에게 신호를 보내 진정제를 주사하도록 지시했다.차가운 약물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자 온다연은 울면서 비명을 질렀다.“유강후, 또 나한테 뭐 주사했어?”“날 뭐로 보는 거야? 아이 낳는 기계? 아니면 애완동물?”“이렇게 대하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증오할지 알아?”“놓으라고!”“준휘야... 누나가 정말 미안해...”...결국 두 번의 진정제를 맞은 뒤 온다연은 힘을 잃고 깊은 잠에 빠졌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인평 병원의 큰 병실 안이었다.의사가 다른 약물도 주사했는지 눈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온다연은 벽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움직였다.몇 명의 간호사가 그녀 곁을 지나가며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어떻게 죽을 수가 있지?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도 않았잖아. 처음 들어왔을 때도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는데.”“위에서 압박이 들어와서 못 살리게 했다더라. 불쌍해. 아마 누군가를 잘못 건드린 거겠지.”“듣자 하니 유 대표님이 그렇게 지시했다던데...”“조심해. 이런 말 하다가 들키면 일자리 잃을 수도 있어.”“정말 끔찍해. 고작 열세네 살 아이가 누나를 지키려다가 자기 친아버지에게 맞아 죽었다니.”“그리고 또 죽은 사람이 친아버지라던데, 혈액에서 대량의 알코올이 나왔대. 술 먹고 폭주했겠지.”“돈 많은 사람들이란... 어린애까지 이렇게 잔인하게 다루다니.”“그만 말하고 빨리 가자.”...간호사들의 대화 소리가 점차 멀어졌고 복도 밖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은 따뜻했지만 온다연의 온몸은 차가워 떨고 있었다.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만큼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었고 등은 금세 식은땀으로 젖었다.‘이게 진실이었던 거야?!’온준휘의 죽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그는 분명 살아날 수 있었다.그러나 유강후가 살리게 두지 않았다.그래서 응급처치의 황금시간을 놓친 것이었다!하지만 소년은 아직 어렸다.제대로 성장할 기회도 없이 생명을 빼앗겨 버렸다.온다연은 자신이 유강후와 다를 바 없는 살인자임을 깨닫고 고통에 몸부림쳤다.그녀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후회와 분노로 가득 차 속으로 외쳤다.‘차라리 그때 유강후의 심장을 찔러버렸어야 했는데! 그 사람이 진정한 악마인데!’바로 그때, 유강후가 전화를 마치고 그녀에게 다가왔다.그는 그녀의 눈물이 가득한 얼굴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닦아주려 했다.그러나 온다연은 갑자기 폭발하듯 소리쳤다.“꺼져, 이 악마야!”“유강후, 죽어야 할 사람은 너야!”유강후는 몸이 굳어 그녀를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다.“뭐라고 했어? 죽어야 할 사람이 누구라고?”
“아빠랑 이모가 말하시는 거 몰래 들은 적이 있어요. 누, 누나는 어쩌면 아빠의...”갑자기 그의 입에서 대량의 피가 쏟아지며 숨쉬기조차 어려워졌다.온다연은 온준휘가 이상해진 것을 감지하고 급히 물었다.“많이 힘들어? 괜찮아?”그러고는 문 쪽으로 돌아서며 소리쳤다.“의사! 의사 선생님 빨리 와주세요!”온준휘는 힘겹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누, 누나는... 아마도...”목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졌고 그는 겨우 힘을 짜내며 말했다.“친자식... 이... 아닐 수도... 새...”그러다 마지막으로 모든 힘을 다해 외쳤다.“나를 도와... 우리 엄마를... 구해줘요...”그리고 힘겹게 이어진 그의 마지막 말.“세상은 너무 괴로워요. 누나. 나, 나...”온다연이 말문을 열기도 전에 소년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바로 그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상황을 확인한 의료진은 온준휘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을 알아챘다.하지만 문밖에 살아있는 ‘악마 같은 존재’가 서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손을 댈 수 없었다.혼란스러운 응급처치가 이어졌고 결국 병실은 조용해졌다.의사는 온다연 앞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죄송합니다.”온다연은 의료진의 응급처치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진 못했지만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고 있었다.그녀는 온준휘에게 큰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하지만 그 소년은 온준용이 온다연을 때릴 때 자신의 작은 몸으로 그녀를 보호했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악마 같은 온준용과 몸싸움을 벌였다.‘분명 살릴 수 있었어. 근데 왜?’온다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살리지 못한 건가요? 분명 그렇게 심한 부상은 아니었잖아요...”그러자 의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최적의 응급처치 시간을 놓쳤습니다. 많은 일들이... 저희의 통제를 벗어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그때 유강후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온다연을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사람들은
“온준휘 씨가 골든 타임을 놓쳤습니다. 방금 호흡이 갑자기 멈췄고... 아마도 살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유강후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소리야? 인평 병원에서 최고 실력을 가진 의사를 데려오라고 했잖아!”비서는 머뭇거리며 말을 더듬었다.“온준휘 씨가 온준용 씨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이 대표님이 치료를 원치 않는다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조금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아까 대표님께서... 사모님 병실 앞에서 말씀하신 거로 모두들 대표님이 치료를 하지 말라고 한 줄로...”“이 멍청한 놈들!”유강후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내가 언제 치료하지 말라고 했다는 거야!”겁에 질린 비서는 몸을 떨며 대답했다.“아까... 사모님 병실 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들렸습니다...”“말도 안 돼!”유강후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응급실로 향했다.“구해! 만약 살리지 못하면 내가 어떻게 책임을 묻는지 두고 보라고!”그가 응급실 문에 도착했을 때, 의사가 막 나온 참이었다.유강후는 그를 붙잡으며 다그쳤다.“무슨 상황이에요?”그러자 의사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이번에는 겨우 살렸습니다. 하지만 방금 뇌출혈 증상이 추가로 발생했습니다...”유강후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다른 의사들을 추가로 데려와요. 인평 병원에서 최고의 전문가를 당장 모셔 오라고요!”하지만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소용이 없습니다. 이제는... 편안히 보내주는 것이 나을 겁니다.”그 순간, 간호사가 급히 나와 말했다.“교수님, 환자가 누나를 보고 싶어 합니다. 누나분 여기 계신가요? 연락할까요? 제가 보기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안색이 굳어진 채로 유강후는 비서를 향해 냉정하게 말했다.“다연이 데리고 와.”이렇게 말한 뒤, 그는 직접 응급실로 들어갔다.침대에 누운 소년은 이미 숨이 끊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고 마지막 힘을 다해 유강후를 바라보았다.그가 온 것을 확인한 소년의 눈에는 실망감이
“아저씨랑 같이 잤던 걸 생각하면 역겨워요!”유강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온다연, 방금 한 말 당장 취소해.”그러나 온다연은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왜 내가 취소해야 하죠? 그런 짓들 아저씨가 다 해놓고 난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아저씨는 본인이 안 더럽다고 생각해요? 아저씨랑 잤던 걸 떠올리면 토하고 싶어요!”분노로 인해 유강후는 손이 떨릴 정도였다.분명 아이를 챙기지 못한 건 그의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분노를 터뜨리며 막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고 생각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주한의 옛집에 다녀온 뒤로 완전히 달라졌다.‘주희가 무슨 말을 했기에 이렇게 변한 거야?’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더럽다고? 나랑 같이 있었던 기억이 역겹다고?”“며칠 전 내 밑에서 그렇게 열심히 부르짖던 사람이 누군데?”이 말은 칼처럼 온다연의 가슴에 박혔다.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는 순간, 그녀는 치욕감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속이고 가지고 놀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사랑이라 착각했던 것이다.이를 악문 채 온다연은 낮게 외쳤다.“그따위 기술로? 날 즐겁게 했다고요? 역겨워요!”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유강후는 순식간에 그녀를 침대 가장자리로 밀쳐 눕혔다.그러자 깜짝 놀란 온다연이 외쳤다.“뭐 하는 거예요? 미쳤어요? 문밖에 경호원이 있다고요!”하지만 유강후는 온다연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고 거칠게 그녀의 옷을 벗겼다.온다연은 문이 열려 있다고 착각한 채로 계속해서 격렬히 저항했다.그녀의 반항은 그의 독점 욕구를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결국 그녀는 유강후의 거친 욕망에 굴복해야 했다.짧은 폭력적인 순간이 지나고 두 사람은 모두 지쳐 침묵 속에 잠겼다.온다연은 몸을 떨며 침대 구석으로 몸을 웅크린 채 옷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유강후는 피로 물든 어깨에서 통증을 느끼며 옷을 여몄다.곧 바닥에 꽂혀 있는 칼을 보고 그는 문을 열어 경호원에게 명령했다.“
단순히 반지를 끼우는 것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도대체 왜?’갑자기 그녀는 유강후의 손목을 잡아들고 있는 힘껏 그 손을 깨물었다.이번에는 정말로 사납고 거칠었다. 마치 그의 살점을 떼어내고 싶은 것처럼 강하게 문 것이다.이내 피가 손목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지만 온다연은 멈추지 않았다.이마저도 부족하다고 느끼며 그녀는 더 깊게 물었다.유강후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위에서 회계 조사가 들어와서 못 나갔어. 그래서 아이를 보러 오지 못한 거야.”온다연은 속으로 비웃었다.‘거짓말! 당신 말 중에 진심이란 게 한 번이라도 있었어?’그녀의 분노는 더욱 타올랐고 이로 인해 유강후의 손목을 더 세게 물었다.유강후는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날 피를 보게 해서 화가 풀릴 거면 차라리 날 두 번 찔러. 이렇게 어설프게 굴지 말고.”그러더니 갑자기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칼을 들어 그녀에게 건넸다.“자, 한 번 해봐. 그럴 용기가 있다면 말이야.”순간, 온다연은 칼을 잡아 들더니 망설임 없이 그의 가슴을 향해 찔렀다.그러나 시야가 흐릿했던 탓에 칼은 유강후의 가슴이 아니라 어깨 아래쪽을 꿰뚫고 말았다.비록 작았지만 칼은 날카로웠고 깊숙이 파고들었다.곧바로 피가 쏟아져 나왔다.둘 다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온다연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칼을 놓아버렸다.그리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려 했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야 때문에 두 발짝도 못 가 책상에 부딪혔다.책상 위 물건들이 바닥으로 쏟아졌고 그녀가 가지고 있던 사진 두 장도 함께 떨어졌다.유강후는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찌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하여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보고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천천히 사진을 주워들었다.사진 속에는 주한이 있었다.한 장은 주한의 단독 사진으로 소년의 맑고 깨끗한 모습이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