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생각인데 얼굴만 봤을 땐 온다연이 훨씬 예쁜 것 같은데?”“저 남자 지금 우리 쪽 쳐다보는 거 맞지? 왜 하필 오늘이야. 나 화장 안 했는데.”...온다연은 인파를 뚫고 유강후를 향해 달려갔다.어렴풋이 사람들의 의논 소리가 들렸지만 어떤 말을 하든지 더 이상 별 관심이 없었다.빨리 유강후를 만나고 싶었고 그와 뭔가를 상의하고 싶었다.유강후는 온다연이 나타나자마자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단 1초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온다연은 인터넷으로 주문한 연보라색 튜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달리는 동작에 맞춰 망사 소재의 치맛자락이 하늘로 날렸고 높게 묶은 포니테일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발랄하면서도 청순한 매력을 뽐냈다.유강후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바로 조금 전에 그는 온다연의 멘토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온다연은 학습 능력이 뛰어난 데다가 IQ가 높아 숫자에 민감하고 그 덕분에 금융 분야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다고 한다.불과 한 달 만에 온다연은 독학으로 다른 사람들이 6개월 정도 배우는 지식을 습득했다. 게다가 논문에서는 매우 참신하고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했다고 한다.이는 금융 학과에서 극히 높은 권위를 가진 여교수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방금 대화에서 여교수는 온다연은 자신의 후계자로 양성하고 싶다는 욕심을 은근히 내비쳤다.뿐만 아니라 모비크도 온다연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충 툭 던진 말을 캐치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천재나 다름없다.심지어 얼마 전에 그린 유화는 모비크의 전시회에 출시되어 몇만 달러의 고가에 낙찰되었다.온다연은 유강후의 손바닥에서 천천히 피어났다. 처음 그녀를 곁에 데려왔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환골탈태라고 할 수 있다.마치 누에고치에서 깨어난 나비가 눈부신 날개를 펼치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 같았다. 온다연은 점점 더 당당해졌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분명히 기뻐해야 하는 일이지만 유강후는 그닥 기쁘지 않았고 오
유강후는 점점 무질서해지는 장화연에게 전화를 걸어 한바탕 혼을 내고 싶었다.아침에 아주 잠깐 시선을 돌렸을 뿐인데 온다연이 이런 옷을 입고 외출하는 걸 막지 않았으니 이번 달의 보너스를 꿈도 못 꾸는 게 맞다.유강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온다연은 불만을 표시했다.“아저씨, 이 치마 별로예요?”유강후는 바람에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사랑스럽게 바라봤다.“당연히 예쁘지. 우리 다연이는 뭘 입든 다 예뻐.”유강후는 잠시 흠칫하다가 말을 덧붙였다.“아직은 날이 쌀쌀하니까 두껍게 입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얇은 옷을 입으면 금방 감기 걸릴 텐데 컨디션 안 좋아지면 공부도 못하고 우림이랑 같이 있을 수가 없잖아.”아이 얘기를 꺼내자 온다연은 눈빛이 어두워졌다.“아이랑 보내는 시간이 하루에 한 시간밖에 없어요. 아저씨, 난 엄마 될 자격이 부족한 사람이죠?”유강후는 진지하게 답했다.“다들 이렇게 자라는 거야. 특히 명문가 자제들은 태어날 때부터 막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으니까 부모랑 보내는 시간이 별로 없는 게 맞아. 전혀 이상할 것 없어.”한참 동안 생각하던 온다연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2년안에 모든 과정을 마칠 수 있도록 노력할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점심은 집에서 먹을 거야? 아니면 학교 휴게실로 가져다줄까?”온다연은 서둘러 답했다.“괜찮아요. 그냥 식당에서 먹을래요.”기숙사에서 지내는 것도 아닌데 학교에서는 온다연에게 별도의 휴게실을 마련해줬다.방 하나에 작은 부엌과 화장실이 따로 있고 인테리어도 정교하게 되어 있었다.처음에는 점심을 먹고 휴게실에서 잠깐 쉬다가 바로 오후 수업을 들으러 갈 수 있으니 너무 좋았다.그러나 온다연은 점차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유강후는 거의 매일 점심 찾아와 그녀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점심을 먹은 후에는...유강후의 줄어들지 않는 체력과 성욕에 더불어 매번 이상한 걸 제안하는 모습까지 떠올라 저도 모르게 귀가 빨개졌다.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물론 그 말은 반은 진실, 반은 거짓이었다. 감사한 마음도 있었지만 더 큰 감정은 질투였다.온전히 온다연의 신뢰와 의지까지 품에 안은 그가 부러웠다!가끔 그는 생각했다.다행히 주한은 이미 이 세상에 없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가 여전히 살아 있었다면 자신이 온다연을 그의 손에서 빼앗아 올 자신이 있었을까?만약 그런 상황이 됐다면, 자신이 얼마나 미쳐버릴지조차 예측할 수 없었다. 온다연은 약간 놀랐지만, 동시에 기분이 좋았다.“우리 먼저 밥 먹고 꽃 사요. 그리고 제 자취방에 들러 짐을 챙기고 가요!”그녀는 시계를 보며 약간 조급해졌다.“시간이 없어요. 서둘러야 해요.”유강후는 그녀 뒤를 가리켰다.“꽃은 내가 이미 준비해 뒀어.”온다연이 뒤를 돌아보자, 예쁘게 포장된 싱싱한 해바라기와 흰 국화가 한 아름 놓여 있었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어떻게 알았어요?”유강후는 그 질문을 피하며 말했다.“자, 자취방으로 가자. 점심은 미리 보내두었어.”온다연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유강후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얼마나 치밀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해준 것도 이미 그녀의 예상을 넘어섰다.감사한 마음은 있었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스며들었다. 그는 너무 강했고 그의 마음은 너무나도 치밀했다. 모든 일을 빈틈없이 처리해서 가끔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이번 독서 모임도 겉으론 평범해 보이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그래도, 때로는 모른 척하는 편이 낫다며 넘겨버렸다. 그들에겐 이미 아이가 있었고, 온다연은 그와 평생을 함께할 생각이었다. 때로는 적당히 모르는 척 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자취방에 도착해 점심을 먹은 뒤, 온다연은 빨간 스카프를 가지러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유강후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는 이미 모든 옷을 벗고, 검은색 속옷만 입은 상태였다. 어둑한 빛 속에서 드러난 그의 넓고 탄탄한 등은 강인하면서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힘이 느껴지는 두 다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
온몸이 유강후의 키스에 녹아버린 온다연은 거부하고 싶으면서도 참을 수 없는 갈증에 휩싸였다.만족되지 않은 공허감이 그녀의 의식을 완전히 잠식해 버렸다.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가늘고 긴 다리가 그의 단단한 허리를 감쌌다. 손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거의 눈물처럼 흐르는 목소리로 말했다.“강후 씨... 나, 힘들어요...”유강후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그는 그녀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조금만 참아. 오늘은 키스만 할 거야... 더는 안 해.”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손길은 점점 더 대담해졌다. 온다연의 눈은 흐릿해졌고, 입술은 이미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녀의 몸은 그의 단단한 허리와 밀착되어 있었다.겨우 남은 의식이 더는 계속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지만, 그가 고개를 숙여 다시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그녀가 입고 있던 얇은 시폰 드레스는 이미 찢겨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이렇게 매일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순간들을 보내다 보니, 온다연의 몸은 그의 손길에 자연스럽게 반응하기 시작했다.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둘 사이의 호흡이 점점 맞아가면서 이제는 그녀도 그를 갈망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부인할 수 없었다. 그녀도 가끔은 그를 원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단지 키스만으로 끝나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안에서 타오르는 갈증을 느꼈다.“강후 씨...”유강후도 거칠게 숨을 내쉬며 그녀의 몸을 더듬었지만, 여전히 억제하고 있었다.사실 이 집, 그리고 이 아파트 단지는 이미 그의 소유였다. 온다연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이곳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그는 이곳에서 그녀의 기억에 새로운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이곳이 더는 주한만을 떠올리게 하는 슬픈 장소가 아니라, 그와 함께한 달콤한 순간들로 가득 차기를 원했다.그는 이곳이 온전히 둘만의 사랑으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온다연이 이 집을 떠올릴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자신만을 생각하게 되기를.오늘이라는 날이 더는 주한에게 머무는 날이
온다연은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말했다.“안 돼요... 결혼해야 그렇게 부를 수 있어요...”하지만 유강후의 손길이 다시 그녀의 몸을 탐욕스럽게 훑자, 온다연은 몸을 활처럼 구부리며 간절함에 몸을 떨었다.“강후 씨...”그는 그녀의 귓불을 살짝 물며 속삭였다.“착하지, 여보라고 불러. 그러면 보상해 줄게...”온다연의 몸은 제멋대로 반응하며 떨림이 일었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냈다.“여보...”이 두 글자는 유강후의 마음속에 숨겨진 짐승을 자극했다. 그는 거의 제어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아직도 차분하게 그녀를 유도했다.“다연아, 이미 여보라고 불렀으니까, 오늘은 우리 첫날밤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온다연은 참을 수 없는 갈증에 그의 입술을 찾으며 말했다.“맞아요... 오늘이 우리의 첫날밤이에요...”유강후는 이성을 붙잡고 있었지만 더는 참기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녀를 유혹했다.“그럼, 다연아... 오늘이 무슨 날인지 말해봐.”온다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우리의 첫날밤...”그는 그녀의 귓가에 다시 속삭였다.“다시 말해봐. 오늘이 무슨 날이지?”“우리의 첫날밤...”그 순간, 유강후는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녀의 귓불을 세게 깨물며 말했다.“이제 여보라고 불러.”온다연은 순순히 따르며 부드럽게 말했다.“여보...”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그녀의 위로 완전히 몸을 덮으며, 그녀를 완전히 소유했다.전에 없던 짜릿한 쾌감이 그녀를 완전히 휘몰아쳤다. 온다연이 정신을 잃기 직전, 머릿속에는 오직 한 생각만이 맴돌았다.이건 유강후와의 첫날밤이다.오후 네 시가 되어서야 온다연은 깨어났다. 몸에 남아 있는 붉은 자국들을 보며, 방금 전까지 이어졌던 격렬한 순간들이 머리를 스쳤다.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방금 전의 자신이 정말 그녀였다는 것을. 그녀는 대체 왜 그렇게까지 미쳐 있었던 걸까?자신이 유강후 위에서, 가장 부끄러운 자세와 말을 하며 그렇게 오랫동안 그와 얽혀 있었다니.저주라도 걸린 걸
그녀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관계에 대해서는 인식이 매우 제한적이었다.그녀가 경험해 본 유일한 사람은 유강후뿐이었다. 문제는, 유강후가 그 일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강압적이고 독단적이었다는 것이다.그가 심어준 인식은 남자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그녀는 절대 반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모습은 너무 미친 듯이 적극적이었다.단지 적극적인 것을 넘어서, 그를 되려 덮쳤으니 틀림없이 불쾌해했을 것이다!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괴로워졌고, 이불을 꽉 움켜쥔 채 감히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에서 이불을 빼내고, 옷을 가져와 입혀주었다. 그리고 머리를 내려 정돈한 후, 달빛처럼 하얀 머리핀을 꽂아주었다.마지막으로 달빛색의 스카프를 그녀의 목에 둘러주고, 빈티지한 브로치로 스카프를 고정시켰다.그 브로치에는, 그의 넥타이 핀과 같은 Y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강씨 가문의 주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유강후가 그녀에게 신발을 신겨주려던 찰나, 온다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 스카프는 안 할래요. 제 스카프를 하고 싶어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으로 걸어가, 가장 안쪽에 숨겨두었던 붉은색 스카프를 꺼냈다.유강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한걸음에 그녀의 손목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미 내가 매줬으니까, 이걸로 해.”온다연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가 다시 낮게 말했다.“지금 벌써 네 시가 넘었어. 더 늦으면 시간이 촉박해질 거야. 가자.”그는 동의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강제로 안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작은 부츠를 신겨준 뒤, 그녀를 들어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온다연은 그가 데리고 나가는 동안 침대 위에 남겨진 붉은 스카프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묘지에 도착했을 때,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묘지 전체에 심어진 소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바람에 우수수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차에서 내려 안고, 캐시
“그 아이 이름은 우림이야. 아직 너무 어려서 데리고 오지 못했지만, 좀 더 크면 꼭 데리고 와서 보여줄게.”“주한, 나 요즘 꿈에서 네가 잘 안 보여. 혹시 새로운 친구가 생긴 거야?”“지금 난 화양대에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어. 화양대는 정말 너무 멋져! 매일 교실에 앉아서 정말 하늘의 별 같은 사람들이랑 함께 공부하는데, 가끔은 꿈을 꾸는 것 같아.”“맞다! 혹시 모비크 알아? 그 유화 거장, 우리가 엄청 좋아했던 그 사람! 이제 내 교수님이 됐어. 이 모든 게 정말 믿기지 않아.”...바람이 불어와 묘지의 소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뭇잎들이 우수수 소리를 냈다. 마치 온다연의 이야기에 대답이라도 하듯이.온다연은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끝없이 떠들며, 울다가 웃다가, 횡설수설하며 주한에게 이상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유강후는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를 통해 주한과 함께했던 그녀의 과거를 지켜보는 것처럼. 그가 결코 끼어들 수 없는 그녀의 지난날이었다.그는 질투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를 지켜보는 것밖에는.오랜 시간이 지나, 온다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강후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다시 주한의 묘비 앞으로 걸어갔다.온다연의 눈은 이미 빨갛게 물들었고, 말을 너무 많이 한 탓에 목소리마저 쉬어 있었다.“주한아, 이 사람은 유강후야. 너도 알고 있을지도 몰라. 유씨 가문 사람이니까. 네가 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이젠 우리 아이의 아빠야. 그리고 이제 유씨 가문과는 거의 관계가 없어.”그녀는 자신의 손을 들어 반지를 보여주었다.“나, 이 사람과 결혼할 거야. 그래서 우리 스물다섯 살의 약속은 이제 없던 걸로 할게. 주한아, 나를 위해 기뻐해 줄 거지?”온다연은 주한에게 여러 가지를 계속 이야기했다. 유강후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고 말없이 그녀의 모든 말을 듣고 있었다.잠시 후, 온다연이 말을 멈추고 멍하니 주한의 묘비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유강후는
마치 무언가를 느낀 듯, 온다연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시야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남자는 그녀를 보자마자 급히 몸을 돌려 숲속으로 들어가는 척했다.사실 거리가 꽤 멀어서 얼굴을 정확히 볼 수는 없었다.하지만 온다연은 왠지 모르게 그 뒷모습이 낯익다고 느꼈다. 분명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지만, 어디서 봤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남자는 발걸음을 재촉해 금세 사라져 버렸다.그때, 유강후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좀 피곤해서 그래요. 이제 집에 가요.”차에 오르자 유강후는 무심한 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묘비를 닦느라 오래 손을 쓴 탓에 그녀의 손은 군데군데 피부가 벗겨져 있었다.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희고 고운 피부 때문에 더욱 눈에 띄었다.유강후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그는 물티슈를 꺼내 하나하나 그녀의 손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며 물었다.“아프지 않아?”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유강후의 손이 잠시 멈췄다.“아직도 그 사람 생각하고 있어?”온다연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저으며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유강후는 불쾌해졌다.그는 그녀를 강제로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온다연은 피하려 했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그의 입술이 거칠게 내려오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입술이 터져 피가 배어 나왔다.피 맛을 느낀 유강후는 그녀를 놓아주며 터진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온다연은 찡그리며 손가락으로 터진 곳을 만졌다.“아파요... 왜 이래요?”두 사람이 화해한 이후로 그는 오랫동안 이렇게 거칠게 굴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분명히 달랐다.유강후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다른 사람 생각하지 마. 네 마음엔 나만 있어야 해.”그제야 온다연은 그가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생각한 것은 주한이 아니었다.온다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
“다연이가 전에 겪은 고통... 똑같이... 아니 그보다 수천 배로 돌려줘야 해.”“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유하령이 비명을 질렀다.“아빠가 죽었어요! 아빠가 모든 죄를 짊어졌잖아요. 제발...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마요!”하지만 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람이 죄를 씻고 싶어 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때 너희가 법을 피해 가며 사람을 괴롭혔지. 좋아. 지금 잘됐네. 정신병자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여도 법의 심판을 안 받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벌을 받는 것도... 네 업보지.”유하령은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지만 유강후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데리고 가. 하지만 일단 죽이지는 마.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네! 대표님!”그는 더는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사하던 곳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까둔 귤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얼른 먹어요. 입술이 다 터졌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물은 마셔야죠.”그녀는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 그의 손에 건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귤 한 조각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유하령...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온다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거네요. 하지만 제가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아니요. 아저씨가 있으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유강후는 그녀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가슴 가득 퍼지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다연아... 유민준 걔는...”“전 걔랑은 끝났어요.”온다연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유민준이
온다연은 처음부터 유하령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유씨 집안이 다 무너지든 모두가 죽든 솔직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유강후가 저렇게 무너져 있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죄여들 듯 아팠다.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사람이니 상처도 받고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에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조금씩 물러서기로 했다.후회가 되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그 순간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다시는 네가 상처 안 받게 할게. 여기 바람이 좀 세네. 안으로 들어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장 비서가 따뜻한 팥죽과 집밥 느낌의 반찬들을 함께 보냈다. 팥죽이 양이 많지 않아서 온다연은 근처 음식점에 연락해 직접 빚은 만두를 더 주문했고 따뜻한 반찬도 한 상 가득 더 보냈다. 그리고 따라온 경호원들과 비서진도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었다.밥을 먹던 도중 누군가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와 유강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는 온다연을 향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너희끼리 먼저 먹고 있어.”온다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여기 있어. 잠깐이면 돼. 금방 올게.”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를 들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까놔. 돌아와서 같이 먹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 이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대표님, 정말 그냥 놔두실 겁니까? 설마... 진짜 용서해 줄 생각은 아니시죠?”유강후의 목
그때 유하령이 옆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아. 아빠가 죽었어.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요!”그 소리에 유재성이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유강후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유하령 당장 끌어내. 간호사, 의사 불러요. 빨리!”유재성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네 큰형… 가서... 빨리 가서 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서...”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엔 이미 숨이 멎은 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있었다. 의료진이 마지막 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상태였다.유민준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복도와 방 안 바닥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유강후가 다가서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자성 씨는 휴게실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한 상태였고 발견 당시엔 이미 호흡이 없는 상태였습니다.”유강후는 멍하니 굳은 채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강후라고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랴.어찌 됐든 자기 형이었고 어릴 땐 정말 서로 우애가 좋았다.진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유하령을 감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그 뒤로 천천히 멀어졌고 결국엔 남이 되어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해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자성이 이런 방식으로 끝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는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료진이 유자성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유민준이 그의 옷깃을 잡고 울부짖었다.“작은아빠... 이게 진짜예요? 아빠 진짜... 진짜 죽은 거예요? 작은아빠, 아빠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돌렸고 차갑게 말했다.“민준아, 네가 아직 남자로 살고 싶다면... 아버지 장례 제대로 치러. 네가 맡은 회사 두
유재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유자성을 보지 않았다.유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식의 손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유하령과 유민준을 멈춰 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문 앞에 무릎 꿇고 있어. 절대 일어서지 마. 그래야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실 수 있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는 진짜 끝장이야. 예전에 너희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다 너희를 죽도록 밟고도 남을 사람들이야.”유하령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자성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특히 너, 유하령. 또 사고 치면... 바로 해외로 보내버릴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오늘 이 사단... 절반은 네가 만든 거야.”유하령은 울먹이며 애원했다.“아빠...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쫓겨나는 건 싫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자성은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났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다 감췄고... 결국 오늘 이런 꼴이 났네. 다 내 책임이니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하령아, 성질 좀 고쳐. 앞으로 사람 대할 땐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 나쁜 생각 갖지 말고 받은 호의엔 반드시 보답해야 해. 부모 말고는 조건 없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유하령과 유민준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과 절망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의 눈앞에서 유자성은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여기 그대로 있어. 할아버지가 용서 안 하신다고 해도... 일어나지 마라. 난 짐 좀 챙기고 금방 올게.”그는 마지막으로 두 자식을 깊게 바라보고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30분쯤 지났을까.복도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졌다.“사람이 자살했어요!”“피가... 피가 너무 많아!”“빨리 응급실로!”“늦었어요... 이미 숨이...”“유 회장님 장남이라잖아! 큰일 났어!”...유하령과 유
“제발... 제발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재산은 하나도 원하지 않아요. 단 한 푼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그냥 본가에 남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아들로 남게만 해 주세요...”하지만 유재성은 눈을 감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그만 가. 네 자식들 데리고 이 집을 나가. 네 호적은 이미 본가에서 정리하라고 지시했어. 앞으로 넌 유씨 가문의 자손이 아니야. 너희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나 유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유자성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깊이 숙여 유재성을 향해 세 번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평생 아버지의 아들이라 믿어왔습니다. 그게 제 자랑이었어요... 제가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니... 본가에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럴 만큼 제가 큰 죄를 지은 거겠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겠죠.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령이랑 민준이... 애들까지 함께 쫓아내진 말아 주세요. 애들은 아직 젊고 앞길이 먼 아이들이에요. 본가에서 내쳐진다는 건 그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될 겁니다. 사람들 눈에 짓밟히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야 해요.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다 제 책임이에요. 제가 잘못 키웠습니다. 전부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유재성은 싸늘하게 대답했다.“너랑 나... 부자지간 인연은 여기까지야.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만하고 그냥 가.”그제야 유하령의 표정이 무너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거짓말이죠? 우리 속이시는 거죠?”유민준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지만 아무 말 없이 유재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할아버지... 전 그동안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벌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제발...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제대로 살겠습니다.”그는 진심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철도 들었으며 맡은 두 회사 역
유자성은 입술을 달달 떨며 중얼거렸다.“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전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저 재산 같은 거 원하지 않아요. 한 푼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본가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그러나 유재성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젠 됐어. 나는 너한테 줄 것도 빚진 것도 없어. 나도 오래 못 살아. 죽기 전까진... 더 이상 너희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의 얼굴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고 그는 입술을 떨며 되뇌었다.“아버지...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그의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그 친자확인서는 진짜였고 유재성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그는 어릴 적부터 유재성 곁에서 자라났다.젓가락을 처음 쥐는 법, 글씨를 쓰는 법, 첫 출근 날의 마음가짐까지... 모든 것을 유재성이 직접 가르쳐줬다.그는 누구보다 유재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그래서 그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친자확인서는 진짜였어. 아버지가 나를 본가에서 내치려는 것도 진심이네. 그렇다면 나는 진짜... 본가 사람이 아니겠네.’그가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씨와 신처럼 떠받들었던 아버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본가의 명예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모든 것과 그가 수없이 입 밖으로 칭찬했던 동생 유강후조차... 결국 단 한 번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그 모든 건 그의 친부모가 목숨으로 대신한 빚이었고 남이 던져준 은혜에 불과했다.오만하고 자존심 강했던 유자성... 태어나서 한 번도 고개 숙여본 적 없는 본가의 장남이 알고 보니 그저 남의 집에서 얹혀살던 양자에 불과했다.그 진실은 마치 뾰족한 바늘처럼 그의 모든 꿈과 자존심을 찢어버렸다.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세상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고 지금 이 순간조차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두 번이나 사정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호복을 가다듬은 뒤 안으로 들어가 손에 쥔 약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아버님께 이 약을 드려요.”유강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다연아...”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고 싶은 말은 집에 가서 해요. 난 원래 그렇게 대인배 아닌 사람이에요. 날 해쳤던 사람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분은 당신 아버지잖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물러서 줄 수 있어요. 아저씨, 제 마음 저버리지 마요.”그 말에 유강후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까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춘 채 약 하나를 꺼내 유재성의 입에 넣어주었다.약을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재성은 숨이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후야, 이게 무슨 약이냐?”유강후가 답했다.“곽 박사님이 다연이 몸조리하라고 주신 거예요. 다 먹지 않고 열 알 남겨뒀는데 혹시 몰라서요. 솔직히 저도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해가 되진 않으니까요.”유재성의 눈빛이 반짝였다.“곽혜진? 그 여의사 말이야?”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때 유하령은 온다연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너 지금 내 할아버지한테 무슨 약 먹인 거야? 우리 할아버지 몸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따위가 내놓은 천한 약 따위 함부로 먹이면 안 된다고!”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친자확인서를 집어 들었다. 대충 읽어본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너... 너희 아버지가 유 회장님 친아들이 아니야?”유하령이 반박하기도 전에 온다연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와, 오늘 진짜 운수 대통이네.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유하령은 절규하듯 외쳤다.“그건 거짓말이야. 전부 조작이야. 우리 아빠가 본가 사람이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이건 다 네 계략이야. 온다연, 왜 날 이렇게까지 망치려고 해?”온다연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하령, 넌 늘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 무
“네 아들 유민준... 그동안 무슨 사고들을 쳐왔는지 너도 잘 알겠지. 그나마 요 몇 년 좀 나아졌다 싶어서 내가 본가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두 회사를 맡긴 거야. 그 애 실력으로 그 두 회사 꾸려나가는 것도 벅찰 거야.”“그리고 네 딸 유하령은 어떤 인간인지 너 스스로 모르겠어? 예전 그 일들을 진짜 네 능력으로 덮은 줄 알아?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한 사람은 현미와 강후야. 그 은혜 때문에 내 결혼을 망쳤고 내 딸을 희생시켰어. 다른 누구든 나를 원망해도 돼. 다 괜찮아.하지만 너, 유자성. 너만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자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버지, 아버지가 결혼생활 망친 걸 제 탓으로 돌리실 순 없죠. 그리고 제 어머니도 죄 없는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강현미도 그 자리에 있었을 리 없었겠죠.”그 말에 유재성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내가 평생 키워온 놈이 고작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었다니...”그는 분노 섞인 시선으로 유자성, 유민준, 유하령을 차례로 훑어보며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지금 여기서 내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강후야, 책상 위에 있는 다른 서류봉투를 저놈한테 줘라.”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 서류봉투를 유자성에게 던졌다.유자성은 그 안에 또 다른 유언장이 들어 있을 줄 알고 펼쳤지만 그 안엔 뜻밖에도 친자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그는 확인서의 이름과 결과를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옆에 있던 유하령도 깜짝 놀라 확인서를 낚아채더니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니에요. 이건 조작이에요. 전부 다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려고 짠 계략이잖아요!”“분명 온다연이야! 그 여자... 분명 삼촌한테 뭔가 시킨 거야. 나를 망하게 하려고 다 내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 거라고!”“닥쳐!”유강후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