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뭔가 생각난 듯 유강후와 이권을 다시 한번 쳐다보더니 입을 다물었다.첫머리를 듣고 끝나 버리니 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이권은 급히 일어나서 할머니 아들을 한쪽으로 불러 또 돈을 찔러주었다.아들이 할머니 귀에 대고 뭐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그제야 다시 입을 열었다.“이 일은 그 아이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라 원래는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당신들이 그 모자가 공정한 평가를 받도록 도와주겠다고 하니 말할게요.”그녀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그 아이의 엄마는 둘째 아들을 낳은 후 자기 남편이 밖에 애인이 있고, 게다가 애인이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정신이 나갔어요. 그 바람에 두 아이가 고생이었는데, 그때 큰애는 예닐곱 살, 작은애는 네댓 살에 불과했어요...”“하지만 남편은 아내가 미친 후 더욱 낯가죽이 두꺼워져 동성 애인을 공공연히 집에 데리고 왔어요. 정말 뻔뻔스럽기 짝이 없더군요.”“주한의 아버지는 정말 짐승 같은 놈이었어요.”“한번은 저녁에 그쪽을 지나다가 안에서 아이가 구슬피 우는 소리가 들려 들여다봤더니 그 아이가 아랫도리가 피투성이 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어요...”할머니는 흥분하며 욕설을 퍼부었다.“짐승만도 못한 놈! 그때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것이 평생 후회돼요...”유강후와 이권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람 모두 놀랍고 믿을 수 없는 눈빛이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그때 당시 이 거리에서 그 장면을 본 사람이 많았어요. 하지만 그때의 이웃들이 다 이사를 가서 조사하기 힘들 거예요.”“한번은 애가 심하게 반항하자, 그놈과 애인이 애를 거의 반죽음이 되도록 때리고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공중화장실에 버렸는데, 어떤 여자애가 구했대요.”할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그때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했고, 그 짐승은 질겁해서 도망치더니 감히 돌아오지 못했어요. 그때부터 그 남자애의 생활이 좀 나아졌어요.”“미쳐버린 엄마는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 짐승이 한 짓을 알게 되어 몰래
“비슷한 일을 겪고 가정환경도 비슷해서인지 두 꼬마는 남매처럼 늘 붙어 다녔어요.”“여자애는 1~2년 사라진 적이 있는데, 친척이 데려갔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그 집에서도 잘 지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돌아올 때가 많았어요.”이 말을 들은 이권은 저도 모르게 유강후를 쳐다보았다.어두운 불빛 아래서도 유강후의 하얗게 질린 얼굴과 불끈 쥔 주먹을 볼 수 있었다.“여자애는 머리카락이 잘린 채로 돌아온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남자애는 작은 의자를 가져와 여자애를 문밖에 앉히고 세심하고 다듬어 주었어요.”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듯한 말투로 말했다.“그렇게 착한 아이가 왜 그런 사나운 팔자를 타고났는지, 아껴주는 사람도 없고! 좀 큰 두 아이가 막내를 데리고 서로 의지하며 컸어요.”“막내는 병이 있었고, 병원비가 많이 들었어요. 남자애는 그림도 잘 그리고 피아노도 잘 쳐서 과외를 하러 다녔는데, 항상 깨끗하지 못하고 더러운 병에 걸렸다는 뜬소문이 돌면서 며칠 못 가서 잘렸어요.”여기까지 말한 할머니는 침묵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유강후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 후에는요? 후에는 어떻게 됐어요?”할머니는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그 후 남자애가 괴롭힘을 당해 죽었다고 들었어요. 원래 배상을 받기로 합의됐는데, 어찌 된 일인지 받지 못했대요.”이 말을 들은 유강후는 고개를 들고 이권을 지켜보았다.이권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나지막이 물었다.“그 후에는요?”“그 후에는 여자애가 그 어린아이를 맡았는데, 아직 미성년이라 쉽지 않은 것 같았어요. 가끔 저도 두 아이가 불쌍해서 고기와 채소를 넉넉하게 사서 조금씩 갖다주기도 했어요.”“여자애는 어렸지만 오기가 있어서 남의 물건을 잘 받지 않았어요...”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여자애는 점점 예뻐지고, 집안은 그런 형편이니 잘못된 길로 들어설까 봐 정말 걱정됐어요...”그녀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고, 유강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어르신, 그 부부의 일에 대해 또 아는 것이 있으신가요?”할머니는 잠시 망설이며 유강후를 쳐다보았다.“주한의 일을 조사하러 온 거 아니었어요? 그 여자애 일은 왜 묻는 거죠? 혹시 그 여자애를 본 적이 있어요?”“옷을 잘 차려입은 걸 보니 많이 배운 사람인 것 같은데, 왜 허튼수작을 하려는 거죠? 그 여자애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을 거니까 가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다른 방으로 들어가 매트 위에 무릎을 꿇고 염불하기 시작했다.이권이 아무리 좋을 말을 해도, 아들이 아무리 설득해도, 할머니는 마음을 굳게 먹고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한 시간이 지난 후에도 할머니는 한마디도 하려 하지 않았다.어찌할 도리가 없는 유강후와 이권은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떠나기 전에 유강후는 할머니에게 말했다.“어르신, 예전에 그 여자애에게 베푼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안심하고 이 집에 그냥 사십시오. 이 거리는 철거하지 않을 것이고, 며칠 뒤에 사람을 보내서 수리하고 정비할 것입니다. 이곳을 다시 개조해서 예전 모습으로 되돌려 놓겠습니다.”할머니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유강후를 쳐다보았다.“누구신데, 총각이 말한 대로 되는 거예요?”유강후가 나지막이 말했다.“됩니다. 안심하고 지내세요.”할머니는 잠시 망설이더니 일어섰다. 그녀는 낡은 수납장을 한참 동안 뒤져서 오래된 앨범을 찾아냈고, 그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서 유강후에게 건넸다.“그 두 아이의 어릴 적 사진이니 가져가세요. 사진이 유용하게 쓰여서 하루빨리 그 짐승 같은 놈을 잡았으면 좋겠네요.”유강후는 사진을 받아서 들었다.잘 보관하지 못해 색이 바랜 곳도 있었지만,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찍은 사진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사람이 많았는데, 온다연은 주한의 뒤에 서서 옆으로 깨끗한 얼굴을 내밀고 카메라를 향해 수줍게 웃고 있었다.사진 속의 온다연은 여덟아홉 살 정도 되는 것 같았고, 일자 앞머리를 자른 모습이 유난히 순해 보였다.유강후가 본
어두운 골목.가로등 하나가 깜빡거리고 있었다.온다연은 골목 입구에 막 들어섰을 때 갑자기 누군가에게 잡아당겨져 어두운 구석으로 끌려 들어갔다.벽 앞에는 술 냄새를 풍기는 취한 남자 두 명이 서 있었고 그들은 온다연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그녀의 옷을 찢기 시작했다.코를 찌르는 알콜 냄새와 남자들의 거친 움직임에 온다연은 겁에 질려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도와주세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그들 중 한 남자는 즉시 온다연의 뺨을 세게 때렸다.“감히 소리쳐? 뭘 잘했다고 소리치는 거야!”“오늘 네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신경 안 쓸 거야. 가만히 있어. 이 오빠가 기쁘게 해줄 테니까.”...이때 갑자기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골목을 가로질러 왔고 차창이 천천히 내리자 차갑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드러나 구석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혹 행위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옆에 있는 운전기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나가서 말릴까요?”도련님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가!”이때 온다연은 이미 옷이 찢어진 상태였고 갑자기 나타난 차량 때문에 그녀는 더욱 몸부림쳤다.“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술 취한 남자는 온다연에게 아직도 도움을 청할 힘이 남아있는 것을 보자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두 번 더 때렸다. 또한 온다연의 몸을 잡고 있는 손에도 더욱 힘을 주어 치마를 벗기려고 했다.온다연이 절망하려고 할 때 이미 시동을 걸었던 차가 갑자기 멈췄다.그리고 차 문이 열리더니 키 큰 남자 두 명이 내려왔다.앞에 선 남자는 마른 체격에 브랜드 로고가 없는 흰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차갑고 위엄이 있어 어두운 밤에도 빛나는 것 같았다.그는 구석에서 무자비하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온다연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는 듯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하지만 안타깝게도 불빛이 너무 어두워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낮은 울음소리와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남자의 기억 속 목소리와 다소 비슷했다.남자는 차갑고
그때도 지금과 같은 매미가 울어대는 무더운 여름날이었다.소녀의 수줍은 눈빛과 땀에 젖은 옆머리가 그날 오후와 겹쳐졌다.그 모습이 지난 3년 동안 매일 밤 꿈속으로 들어와 밤마다 유강후를 뒤흔들었다.유강후는 방금 온다연의 손길이 닿은 곳이 화끈거려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이 순간 공기마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러나 유강후는 재빨리 시선을 거두며 여전히 차갑고 고상한 표정으로 말했다.“들어가.”온다연은 즉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치 사면받은 사람처럼 도망치듯 떠났다. 물론 온다연은 차에 탄 유강후의 맹수 같은 약탈적인 눈빛을 보지 못했다.온다연은 유씨 가문 저택에 들어선 후에야 유씨 가문 식구들뿐만 아니라 유강후의 옛 친구들도 모두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그 도련님들은 모두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유강후는 그중에서도 최고였다.온다연은 전에 그들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여러 번 목격했었기 때문에 그들을 피하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하지만 안주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심미진은 온다연을 놓아주지 않았다.“나 시간 없으니까 네가 이 술을 네 작은 삼촌에게 갖다줘.”온다연은 거절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방 안은 화려했고 술 분위기가 무르익었다.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온다연은 가시 장미에 섞인 새하얀 장미처럼 눈길을 사로잡으며 문 앞에 서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어두운 조명 속에서도 온다연의 검은 머리와 붉은 입술, 매력적인 골격,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특히 하늘색 치마 밑의 하얀 피부는 사람을 유혹할 정도로 하얗게 빛났다.잠시 동안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갑자기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도련님, 유씨 가문의 양딸을 몇 년 동안 보지 못했었는데 그새 잘 자랐네요.”유강후 역시 온다연이 들어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손에 든 와인잔을 흔들었다.“몇 년 동안 유씨 집안에서 먹여준 건 맞지만 양딸이라고 할 순
온다연은 고개를 숙였다. 마치 사나운 짐승에게 겨냥당한 듯 숨이 막힐 것 같았다.온다연은 문에 한껏 기대어 최대한 유강후에게서 멀리 떨어지려고 했다.하지만 유강후는 바로 앞에 있고 공간이 좁아서 아무리 노력해도 유강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느꼈다.맑은 솔방울 같은 냄새에 은은한 술 냄새가 섞여 온다연의 피부에 다가왔다. 그러자 온다연은 갑자기 3년 전의 점심에도 이렇게 더웠는데 술에 취한 유강후가 방에 쳐들어와 통제를 잃고 폭력적으로 행동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 기억이 떠오르자 온다연은 혼란스러워서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유강후와의 거리를 벌렸다.하지만 너무 가까운 탓에 유강후의 옆을 지나가려 할 때 온다연의 팔은 유강후의 손에 닿을 수밖에 없었다.닿은 곳은 살짝 화끈거리며 유강후의 기운이 남았다.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유씨 가문 저택은 학교에서 너무 멀어서 기숙사에 살고 있어요.”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온다연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낮아서 유강후는 그녀를 혼내고 싶었다.게다가 이 3년 동안 거짓말하는 것도 배웠다니.하지만 유강후는 아직 온다연을 까발릴 생각이 없었다. 이 정도는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었다.“내 번호 차단했어?”온다연은 눈을 내리깔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번호 바꿨어요. 예전에 쓰던 휴대폰이 고장 나서 모든 번호가 사라졌거든요.”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유씨 가문 사람들 중 이모 심미진의 번호만 저장했다.“휴대폰 줘 봐.”온다연은 순순히 휴대폰을 건넸다.살짝 낡은 휴대폰이었는데 스크린은 손상된 정도가 심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고 자신의 휴대폰으로도 온다연의 카카오톡 QR코드를 스캔해 추가했다.그리고 다시 휴대폰을 돌려주며 담담하게 말했다.“아까는...”“알아요.”온다연은 유강후의 말을 잘랐다.“그분들 다 삼촌 친구들이잖아요. 농담한 거 알아요. 괜찮아요.”온다연은 유씨 가문에 오래 머물지 않기
온다연은 온 힘을 다해 유민준을 밀어냈다.“오빠, 정신 차려요.”유민준은 표정이 변하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온다연, 순진한 척하지 마. 너랑 네 그 빌붙으려는 이모가 뭐가 달라? 지금 이렇게 좋은 기회가 주어졌는데 거절해? 그럼 설마 더 대단한 걸 바라는 거야?”온다연은 표정이 바뀌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유씨 가문이 넘볼 수 없는 대단한 집안이란 거 알아요. 당신들한테 빌붙을 생각도 없었어요.”온다연의 표정이 바뀌자 유민준은 답답한 듯 머리를 쥐어뜯으며 조금 전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나 그런 뜻 아니야. 나랑 만나면 명분 주는 것 외에 다른 건 다 줄 수 있어. 예전에 내가 지나쳤던 거 맞아. 내가 하령이 시켜서 널 괴롭혔던 것도 인정할게. 그런데 다 지난 일이잖아. 앞으로 내가 배로 잘해줄게. 다연아, 너 나 좋아하지...”유민준이 점점 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자 온다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끼어들었다.“오빠 틀렸어요. 나 오빠한테 관심 없어요.”온다연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정확히 말하면 난 유씨 가문 사람들에게 관심 없어요. 조금도 없다고요.”유강후는 그 말을 듣고 창문에 올려놨던 손을 멈칫하며 살기를 내뿜었다. 차 안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가라앉았다.유민준은 그 말에 화가 났다.“나한테 관심 없다고? 그놈 때문이야?”유민준은 주머니에서 사진 여러 장을 꺼내 온다연의 얼굴에 던지며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너 이놈 좋아하지?”사진들이 바닥에 널브러졌다.불빛이 어두웠지만 온다연은 사진 속 남자가 그녀의 동기 진태윤이라는 것을 보아냈다. 요즘 인턴십 때문에 온다연은 진태윤과 가까워졌는데 유민준이 그들의 사진을 찍을 줄은 몰랐다.바닥에 널브러진 사진들을 보고 온다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오빠, 유씨 가문이 대단한 건 아는데요. 제 학교 친구들은 건드리지 마요. 태윤이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저 태윤이 안 좋아해요.”유민준은 손을 뻗어 온다연을 앞으로 끌어당기며 내려다보
그 남자는 바로 유강후였다.유강후는 고급 소재의 흰 셔츠에 긴 다리를 감싸는 검은색 바지를 입고 차갑고 위엄 있는 표정을 지은 채 길에 서서 눈길을 끌었다.그의 옆에 있는 여자는 하얀색 명품 정장을 입었는데 몸매의 볼륨감이 잘 드러났다. 맑고 귀여운 외모에 눈웃음도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두 사람은 무슨 말을 했는지 곧 여자는 유강후의 팔짱을 끼고 앞으로 걸어갔다.두 사람이 멀리 걸어가는 모습을 본 온다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책을 얼굴에서 떼어냈다.하지만 이때 유강후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멀리서부터 안도연을 바라보았다.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온다연은 유강후의 눈빛에서 차가운 기운을 느꼈고 순간 머리가 질끈거리면서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다행히 유강후는 곧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온다연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상현 씨, 미안해요. 저 볼일 있어서 이만 가야 할 것 같아요.”강상현이 말도 하기 전에 온다연은 이미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본 듯한 표정으로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하지만 문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유강후와 그 여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피하기에는 너무 늦은 온다연은 몸을 곧추세우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할 수 없이 외쳤다.“삼촌!”유강후은 시선을 온다연이 입고 있는 무릎까지 오는 하얀색 원피스로 옮겼다가 아픈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쳐다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친구랑 여기서 켜피 마신 거야?”“강후 씨, 누구야? 왜 강후 씨를 삼촌이라고 불러?”여자는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애교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유강후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우리 형수님의 조카야.”여자는 놀란 듯 온다연을 훑으며 말했다.“강후 씨가 말했던 그 조카군요. 언제 이렇게 많이 컸어요?”여자는 손을 내밀어 온다연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반가워요. 저는 강후 씨 친구 나은별이에요.”사실 나은별이 자기 소개하지 않아도 온다연은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전에 유씨 가문에서 나은별을 여러 번 몰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어르신, 그 부부의 일에 대해 또 아는 것이 있으신가요?”할머니는 잠시 망설이며 유강후를 쳐다보았다.“주한의 일을 조사하러 온 거 아니었어요? 그 여자애 일은 왜 묻는 거죠? 혹시 그 여자애를 본 적이 있어요?”“옷을 잘 차려입은 걸 보니 많이 배운 사람인 것 같은데, 왜 허튼수작을 하려는 거죠? 그 여자애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을 거니까 가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다른 방으로 들어가 매트 위에 무릎을 꿇고 염불하기 시작했다.이권이 아무리 좋을 말을 해도, 아들이 아무리 설득해도, 할머니는 마음을 굳게 먹고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한 시간이 지난 후에도 할머니는 한마디도 하려 하지 않았다.어찌할 도리가 없는 유강후와 이권은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떠나기 전에 유강후는 할머니에게 말했다.“어르신, 예전에 그 여자애에게 베푼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안심하고 이 집에 그냥 사십시오. 이 거리는 철거하지 않을 것이고, 며칠 뒤에 사람을 보내서 수리하고 정비할 것입니다. 이곳을 다시 개조해서 예전 모습으로 되돌려 놓겠습니다.”할머니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유강후를 쳐다보았다.“누구신데, 총각이 말한 대로 되는 거예요?”유강후가 나지막이 말했다.“됩니다. 안심하고 지내세요.”할머니는 잠시 망설이더니 일어섰다. 그녀는 낡은 수납장을 한참 동안 뒤져서 오래된 앨범을 찾아냈고, 그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서 유강후에게 건넸다.“그 두 아이의 어릴 적 사진이니 가져가세요. 사진이 유용하게 쓰여서 하루빨리 그 짐승 같은 놈을 잡았으면 좋겠네요.”유강후는 사진을 받아서 들었다.잘 보관하지 못해 색이 바랜 곳도 있었지만,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찍은 사진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사람이 많았는데, 온다연은 주한의 뒤에 서서 옆으로 깨끗한 얼굴을 내밀고 카메라를 향해 수줍게 웃고 있었다.사진 속의 온다연은 여덟아홉 살 정도 되는 것 같았고, 일자 앞머리를 자른 모습이 유난히 순해 보였다.유강후가 본
“비슷한 일을 겪고 가정환경도 비슷해서인지 두 꼬마는 남매처럼 늘 붙어 다녔어요.”“여자애는 1~2년 사라진 적이 있는데, 친척이 데려갔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그 집에서도 잘 지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돌아올 때가 많았어요.”이 말을 들은 이권은 저도 모르게 유강후를 쳐다보았다.어두운 불빛 아래서도 유강후의 하얗게 질린 얼굴과 불끈 쥔 주먹을 볼 수 있었다.“여자애는 머리카락이 잘린 채로 돌아온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남자애는 작은 의자를 가져와 여자애를 문밖에 앉히고 세심하고 다듬어 주었어요.”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듯한 말투로 말했다.“그렇게 착한 아이가 왜 그런 사나운 팔자를 타고났는지, 아껴주는 사람도 없고! 좀 큰 두 아이가 막내를 데리고 서로 의지하며 컸어요.”“막내는 병이 있었고, 병원비가 많이 들었어요. 남자애는 그림도 잘 그리고 피아노도 잘 쳐서 과외를 하러 다녔는데, 항상 깨끗하지 못하고 더러운 병에 걸렸다는 뜬소문이 돌면서 며칠 못 가서 잘렸어요.”여기까지 말한 할머니는 침묵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유강후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 후에는요? 후에는 어떻게 됐어요?”할머니는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그 후 남자애가 괴롭힘을 당해 죽었다고 들었어요. 원래 배상을 받기로 합의됐는데, 어찌 된 일인지 받지 못했대요.”이 말을 들은 유강후는 고개를 들고 이권을 지켜보았다.이권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나지막이 물었다.“그 후에는요?”“그 후에는 여자애가 그 어린아이를 맡았는데, 아직 미성년이라 쉽지 않은 것 같았어요. 가끔 저도 두 아이가 불쌍해서 고기와 채소를 넉넉하게 사서 조금씩 갖다주기도 했어요.”“여자애는 어렸지만 오기가 있어서 남의 물건을 잘 받지 않았어요...”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여자애는 점점 예뻐지고, 집안은 그런 형편이니 잘못된 길로 들어설까 봐 정말 걱정됐어요...”그녀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고, 유강
할머니는 뭔가 생각난 듯 유강후와 이권을 다시 한번 쳐다보더니 입을 다물었다.첫머리를 듣고 끝나 버리니 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이권은 급히 일어나서 할머니 아들을 한쪽으로 불러 또 돈을 찔러주었다.아들이 할머니 귀에 대고 뭐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그제야 다시 입을 열었다.“이 일은 그 아이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라 원래는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당신들이 그 모자가 공정한 평가를 받도록 도와주겠다고 하니 말할게요.”그녀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그 아이의 엄마는 둘째 아들을 낳은 후 자기 남편이 밖에 애인이 있고, 게다가 애인이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정신이 나갔어요. 그 바람에 두 아이가 고생이었는데, 그때 큰애는 예닐곱 살, 작은애는 네댓 살에 불과했어요...”“하지만 남편은 아내가 미친 후 더욱 낯가죽이 두꺼워져 동성 애인을 공공연히 집에 데리고 왔어요. 정말 뻔뻔스럽기 짝이 없더군요.”“주한의 아버지는 정말 짐승 같은 놈이었어요.”“한번은 저녁에 그쪽을 지나다가 안에서 아이가 구슬피 우는 소리가 들려 들여다봤더니 그 아이가 아랫도리가 피투성이 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어요...”할머니는 흥분하며 욕설을 퍼부었다.“짐승만도 못한 놈! 그때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것이 평생 후회돼요...”유강후와 이권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람 모두 놀랍고 믿을 수 없는 눈빛이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그때 당시 이 거리에서 그 장면을 본 사람이 많았어요. 하지만 그때의 이웃들이 다 이사를 가서 조사하기 힘들 거예요.”“한번은 애가 심하게 반항하자, 그놈과 애인이 애를 거의 반죽음이 되도록 때리고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공중화장실에 버렸는데, 어떤 여자애가 구했대요.”할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그때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했고, 그 짐승은 질겁해서 도망치더니 감히 돌아오지 못했어요. 그때부터 그 남자애의 생활이 좀 나아졌어요.”“미쳐버린 엄마는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 짐승이 한 짓을 알게 되어 몰래
이권은 조금 놀랐다.“하지만 지금은 저녁인데요...”유강후는 코트를 들고 일어서며 말했다.“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준비해서 나랑 같이 가.”유강후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성격이기에 이권이 아무리 반대해도 소용이 없다.한 시간 뒤, 유강후와 이권은 온다연이 이전에 살던 옛집 맞은편 골목 어귀에 나타났다.철거 예정이라 이곳의 도로와 담장은 보수되지 않은 상태였고, 비까지 내려 길이 매우 질퍽거렸다.가로등도 없고 근처의 고층 건물에서 나오는 불빛에 의존했다.이권은 한 손에 물건을 가득 들고, 다른 한 손에 방금 매점에서 구매한 손전등을 든 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일 다시 오는 게 어떨까요? 셋째 도련님, 길이 너무 형편없네요.”돌길에는 흙탕물이 넘쳐흘렀고, 양쪽의 집들은 비어 있는지 처마가 사람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허름했다.유강후는 그의 손에서 손전등을 낚아채더니 냉랭하게 말했다.“이 길이 걷기 어려워? 권아, 넌 그동안 너무 편안하게 살았어.”이권은 유강후의 그 비싼 옷이 아까워서 한 말인데, 그가 이렇게 나오니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손전등을 비추며 골목 끝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집 안에 불이 켜져 있었지만, 그들이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열어주는 사람이 없었다.두 사람이 속수무책일 때 옆집에서 누군가 나오더니 그들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이 집 사람을 찾아왔어요?”이권이 급히 담배 한 대를 건넸다.“형씨, 이 집 할머니가 집에 안 계셔요?”그 사람은 담배를 받더니 약간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몰라요. 저는 그냥 물건을 가지러 잠깐 들렀을 뿐이에요.”“이 집은 할머니와 남편분이 수십 년 동안 살아온 집인데, 곧 철거에 들어가요. 아들이 몇 번이나 모셔가려고 왔지만 한사코 버티고 있어 철거팀과 주민위원회도 방법이 없나 봐요. 이 시각에 문을 두드리면 쫓아내려고 그러는 줄 알고 문을 열지 않을 거예요.”이권이 웃으며 말했다.“혹시 할머니 아드님 전화번호를 받
유강후는 몸이 약간 경직되어 있었다. 그녀는 까치발을 하고 고개를 쳐든 후 그의 턱에 뽀뽀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우리가 그 일은 하지 않았다고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는 그녀를 안아 들었고, 몇 걸음 만에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가 자주 묵던 방에 들어선 그는 침대에 앉아 그녀를 자기 다리에 올려놓은 후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온다연은 그의 시선에 머리가 쭈뼛 섰다.그녀는 유강후가 정말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온다연은 어떻게 해야 화를 풀어줄 수 있을지 몰라 가녀린 손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입술을 깨물었다.“아저씨, 저, 저는 정말...”유강후는 굳은 얼굴로 젤리같이 매혹적인 그녀의 입술을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뽀뽀한 적은 있어?”온다연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연인도 아닌데 왜 뽀뽀를 하지?’하지만 이마에 뽀뽀한 적은 있다.그래서 그녀는 성실하게 대답했다.“이마에 뽀뽀한 적이 있어요.”그녀를 껴안은 유강후의 손에 갑자기 힘이 실렸다. 활활 타오르는 질투심 때문에 그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온다연은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잘못을 저지른 초등학생처럼 말랑말랑한 목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비위를 맞추고 용서를 빌려는 의미가 다분했다.하지만 질투심에 불타는 유강후는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응대하지 않았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예전처럼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그의 입술에 갖다 댔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이전에는 이 방법이 가장 잘 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가 뽀뽀해 주면 다 해결됐다.하지만 오늘은 뽀뽀해 줘도 아무 반응이 없다. 그의 차가운 태도는 그녀를 서럽게 했다.온다연은 당황해서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이 말했다.“저를 상대하기 싫어요? 그러면 저는 먼저 돌아갈게요.”유강후는 여전히 말없이 차가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더욱 서러워진 온다연은 천천히 그의 몸에서 내려
온다연이 나지막이 말했다.“주희야, 남하윤 씨는 좋은 사람이고 너한테도 잘하니까 잘 만나 봐. 더 이상 그런 극단적인 짓을 하지 말고. 뭐가 소중한지를 알아야 해.”주희는 눈을 내리깐 채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고 나지막이 말했다.“누나는 그렇게 사는 게 좋아요?”온다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주희야, 내게는 사랑하는 아기가 있어.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너도 앞으로 나아갈래?”조용히 웃는 주희, 웃는 모습이 우는 것 같았다.“누나, 예전에 우리 셋이 약속했잖아요. 누나가 집을 받으면 함께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가서 살기로. 이제 나는 돈이 부족하지 않으니 집을 받지 않아도 돼요. 나랑 함께 떠나는 게 어때요?”온다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유강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옛날 일을 가지고 역겹게 굴지 마. 나와 다연은 아이가 있고 곧 결혼도 할 거야. 죽고 싶으면 혼자 조용히 죽어.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고.”주희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유강후를 가리켰다.“누구나 다 되지만 저 사람은 안 돼요. 유강후는 유씨 집안 사람이잖아요.”“형이 어떻게 죽었는지 잊었어요? 유씨 집안 사람한테 죽임을 당했잖아요. 누나가 다른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반대할 권리가 없지만 유씨 집안 사람은 안 돼요.”온다연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주희야, 그렇게 오랜 세월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너도 알잖아. 이제 아기가 생겼으니 쓸데없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 그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고, 내 아이의 아빠면 돼.”주희는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누나는 우리 형과의 약속을 잊었네요. 스물다섯 살 때...”온다연이 직접 그의 말을 잘랐다.“그건 나와 네 형 사이의 일이니 너와 상관없어.”그녀는 주희 옆에 있는 남하윤을 쳐다보았다. 남하윤은 극히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그 시선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주희야, 나는 앞으로 내 아이와 함께 앞으로 나아갈 거야. 더 이상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을 거니까
이때 밖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이권이 뛰어 들어와 유강후의 손을 붙잡고 조용히 말렸다.“셋째 도련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이 사람이 죽으면 온다연 씨한테 뭐라고 설명하시겠어요?”유강후는 눈이 빨개지며 몸에서 독기를 내뿜더니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체형이 비슷한 사람을 찾아 얼굴이 바꾸면 돼. 어차피 다연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 알아보지 못할 거야.”그가 말하면서 손에 힘을 주자, 주희는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조금 전까지 발버둥 치던 그가 갑자기 조용해졌고 눈도 감았다.온다연이 만나기 싫어한다는 말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했다.이권은 곧 큰일 날 것 같아 필사적으로 유강후의 손을 잡아당기며 다급하게 말했다.“뭔가 하시더라도 여기서 하시면 안 돼요. 도련님, 손을 놓으세요.”이때 남하윤도 들어왔다.그녀도 이 장면을 보고 혼비백산하며 달려와 필사적으로 유강후의 팔을 잡아당겼다.“대표님, 제발 놔주세요. 주희가 성격이 안 좋아서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했을 거예요. 제가 즉시 데려가겠습니다.”하지만 그녀는 유강후를 움직일 수 없었다.엉겁결에 온다연이 생각난 남하윤이 즉시 소리쳤다.“대표님, 온다연 씨와 곧 결혼하실 텐데, 결혼 전에 인명 사고가 발생하는 건 좋지 않아요. 불길하잖아요.”“그리고 이곳은 병원이고, 온다연 씨가 바로 위층에 있어서 소동이 커지면 알게 될 거예요.”이 말을 들은 유강후는 눈에 더욱 독기가 서렸지만 천천히 손을 놓았다.이를 본 남하윤이 급히 주희를 붙들었다.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이건 마지막 경고야. 또 한 번 나와 온다연의 일에 참견하면 그때는 남씨 가문도 너를 지키지 못해.”그는 남하윤을 힐끗 보았다.“데려가요.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해요. 매번 선의를 베풀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다음에는 남하윤 씨 체면도 봐주지 않을 거예요.”말을 마친 그는 넥타이를 잡아당겼다.잠깐 사이에 그는 차분하고 존귀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방금 사람을
“3월 25일까지 한 달 남짓 남았는데, 그날이 정말 기대되네.”“그날이 되면 누나는 빨간색 스카프를 매고 형을 그리워할 거야.”“그 스카프는 누나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형이 생일 선물로 준 것인데, 누나는 정말 좋아했어. 그때는 아까워 매지 않았지만 형이 죽은 후 매년 그날이 되면 그 스카프를 매고 형을 추모했어.”유강후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무척 기분 좋아진 주희는 계속해서 그를 자극했다.“누나가 입은 흰색 옷들은 당신이 골라준 거지? 불쌍하네. 이렇게 오래됐는데 누나가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도 몰라. 누나는 빨간색을 좋아하고, 해바라기색도 좋아해...”유강후는 움직이는 그의 입술을 보면서 속에서 분노가 조금씩 치밀어 올랐다.온다연이 해바라기를 좋아한다는 건 알지만 그녀가 빨간색을 좋아한다는 건 처음 듣는 소리다.하지만 주희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온다연은 확실히 빨간색 스카프를 가지고 있다.버들개지가 흩날리던 어느 날 저녁, 본가의 대문 밖에 온다연이 검은색 옷차림으로 서 있었는데, 평소에 본 적이 없는 빨간색 스카프를 매고 있었다.그때는 봄인데도 날씨가 추워서 스카프를 매는 게 정상이었다.하지만 그녀가 그 스카프를 맸을 때 얼마나 예뻤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그날 저녁, 유강후가 차를 몰고 그녀의 곁을 지나갈 때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이 바람에 휘날렸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유강후는 그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다.석양 아래서 먹물 같은 머리카락과 검은색 옷차림 때문인지, 피부가 눈보다 더 흰 것 같았고 입술은 짙은 붉은색을 띠었다. 버들개지가 눈송이처럼 그녀의 머리 위에 내려앉아 슬픈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그녀는 조금 전에 울었는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얌전히 거기 서서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당시 가슴이 쿵 하는 느낌이었다.바로 그 순간, 유강후는 인내심을 잃고 앞당겨 행동을 개시하기로 했다.그 후 얼마 지나지 않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보더니 말했다.“여기서 아기를 좀 더 보고 있어. 전화 좀 받고 올게.”아기에게 정신이 팔린 온다연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그래요.”방에서 나온 유강후는 직접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남하윤은 주희의 병실에 없었다.주희는 창백한 얼굴로 병상에 기대어 앉아 사람을 갈기갈기 찢으려는 듯이 날이 선 눈빛으로 유강후를 쏘아보았다.유강후도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키가 큰 데다 카리스마가 있어 같은 높이에서 마주 보아도 상대방을 작아지게 한다.그런 그가 이렇게 내려다보면 상대방에게 한없이 비천한 느낌을 준다.주희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강후가 그렇게 보고 있으니, 마음속에서 비천하고 어두운 생각들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그는 지금처럼 자신의 출신과 무능함이 싫었던 적은 없다.하지만 유강후에게 이런 생각을 들키면 안 된다.그는 일부러 경멸의 눈빛을 지었다.“당신은 나를 구한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유강후, 나는 당신을 누나 곁에 두지 않을 거야.”유강후는 개미 한 마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어떻게 막을 건데?”“스타인 너의 인지도로? 아니면 남씨 집안 아가씨의 재력으로?”그는 말하면서 손가락에 낀 반지를 문지르더니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솔직히 말해서, 너를 죽이는 것이 개미 한 마리를 죽이는 것보다 쉬워.”“그리고 남씨 집안은 절대 너를 위해 나와 맞서지 않을 거야.”“주희야, 좀 똑똑하게 굴어. 네 형의 은혜를 잊지 못하는 다연의 마음을 잘 이용하고 나랑 얘기할 때 예의를 갖추면 너한테 많은 득이 될 거야.”“스타가 아니라 엔터 회사를 차리는 것도 문제 되지 않아.”그는 거들먹거리면서 주희를 힐끗 보았다.경멸에 찬 그 모습은 더없이 모욕적이었다.“안타깝군. 온다연의 관심을 끌려고 투신자살할 생각을 하다니.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아무도 너를 존중하지 않아.”주희는 화가 나서 이마에 핏줄이 섰지만 억지로 분노를 참으로 코웃음을 쳤다.“다른 사람의 존중 따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