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단호한 모습을 보니 단순히 성질을 부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지금의 온다연은 예전의 온다연이 아니다. 유강후는 그녀가 정말 기억을 되찾으면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리라 예상했다.그렇다고 놓아줄 리 없는 유강후는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붙잡았다.“어딜 가려고?”온다연은 벗어나려 했지만 몸이 완전히 그의 품속에 갇혀 단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었다. 분노가 폭발한 그녀는 유강후를 향해 소리 질렀다.“유강후 씨, 당장 놓아요. 더 험한 말을 듣기 전에.”사실 그녀도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다. 단지 유강후가 있는 이곳을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괴롭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마주하기 싫었으니까.그녀는 그저 조용한 곳에서 과거를 깨끗이 정리하고, 유강후와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할지 잘 생각해 보고 싶었다.하지만 유강후는 기회조차 주지 않고, 그녀를 들어 올려 침대에 앉혔다.“다연아, 좀 진정해. 정말 임신이야. 우리 아이가 생겼다고. 거짓말이 아니야.”온다연이 코웃음을 쳤다.“당신의 수단을 이길 수 없겠지만 나도 더 이상 예전의 온다연이 아니에요. 이전처럼 괴롭힐 생각은 하지 말라고요. 나를 괴롭히면 그게 누구든 아버지가 가만두지 않으실 거예요.”얼음장같이 차가운 그녀의 얼굴과 증오로 가득 찬 눈빛을 보고, 유강후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는 온다연이 언젠가는 모든 것을 기억해 낼 것임을 알았고, 그녀의 과격한 반응에 대처할 방법도 생각해 뒀다.하지만 온다연이 아이를 가진 시점에 이 일이 터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이는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이고, 셀 수 없이 수많은 밤에 절에서 무릎 꿇고 신명께 빌었던 일이다. 그러니 이 두 아이에게 약간의 문제라도 생기는 것을 절대 허용할 수 없다.그는 억지로 그녀의 손을 잡고 이마에 키스하며 속삭였다.“다연아, 너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어. 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겠어? 기억이 돌아왔다면 네가 나의 아내였다는 것도 알았겠네. 우리는 혼인신고도 했어. 그러니까 얘기 좀 하자. 내가 다 설명할 수
그건 꿈이 아니었던 건가?그녀는 흐릿한 화면 속의 작은 점을 바라보며 가슴이 격하게 요동쳤고, 눈시울을 붉히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화면을 보고 있었다.흥분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임수진이 안경테를 쓸어올리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엄밀히 말하면, 아직 배아 단계지만 심장은 이미 형성되었고 점차 손, 발과 기타 신체 기관들이 형성될 것입니다.”“오늘부터 2주마다 산전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제가 직접 검사를 진행할 것입니다. 검사를 받는 날짜가 아니어도 몸에 이상이 느껴지면 즉시 병원으로 오세요.”“그리고 임신 초기 3개월 동안 술과 부부관계를 금지해야 합니다.”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임신부가 허약한 체질인 데다 쌍둥이를 가졌으니 출산할 때까지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아요.”그녀는 온다연의 목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키스 흔적을 의식한 듯 유강후를 힐끗 보며 헛기침했다.“대표님, 작은 사모님이 정말 미인이셔서 참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절제하셔야 합니다. 초기 3개월이 특히 중요하니 절대 함부로 하시면 안 된다는 걸 명심하세요.”유강후가 나지막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박사님, 제 아내가 몸이 약하다고 하셨는데, 쌍둥이를 임신하면 혹시...”“아니요.”임수진이 단호하게 말했다.“사모님이 허약한 체질이긴 하지만 임신이나 출산이 불가능한 상태는 아닙니다. 영양 관리를 철저히 하고 적절한 운동을 견지한다면 쌍둥이 출산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말을 마친 임수진이 일어서며 말했다.“검사 결과에 이상이 없으니 귀가하셔도 됩니다.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임수진이 나간 후에도 온다연은 초음파 모니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모니터는 이미 바탕화면으로 바뀌었지만, 그 흐릿한 형상은 이미 그녀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유강후가 다가가 안으려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제 정신이 돌아온 듯 그의 옷깃을 잡고 마구 때리며 울부짖었다.
어두운 골목.가로등 하나가 깜빡거리고 있었다.온다연은 골목 입구에 막 들어섰을 때 갑자기 누군가에게 잡아당겨져 어두운 구석으로 끌려 들어갔다.벽 앞에는 술 냄새를 풍기는 취한 남자 두 명이 서 있었고 그들은 온다연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그녀의 옷을 찢기 시작했다.코를 찌르는 알콜 냄새와 남자들의 거친 움직임에 온다연은 겁에 질려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도와주세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그들 중 한 남자는 즉시 온다연의 뺨을 세게 때렸다.“감히 소리쳐? 뭘 잘했다고 소리치는 거야!”“오늘 네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신경 안 쓸 거야. 가만히 있어. 이 오빠가 기쁘게 해줄 테니까.”...이때 갑자기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골목을 가로질러 왔고 차창이 천천히 내리자 차갑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드러나 구석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혹 행위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옆에 있는 운전기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나가서 말릴까요?”도련님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가!”이때 온다연은 이미 옷이 찢어진 상태였고 갑자기 나타난 차량 때문에 그녀는 더욱 몸부림쳤다.“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술 취한 남자는 온다연에게 아직도 도움을 청할 힘이 남아있는 것을 보자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두 번 더 때렸다. 또한 온다연의 몸을 잡고 있는 손에도 더욱 힘을 주어 치마를 벗기려고 했다.온다연이 절망하려고 할 때 이미 시동을 걸었던 차가 갑자기 멈췄다.그리고 차 문이 열리더니 키 큰 남자 두 명이 내려왔다.앞에 선 남자는 마른 체격에 브랜드 로고가 없는 흰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차갑고 위엄이 있어 어두운 밤에도 빛나는 것 같았다.그는 구석에서 무자비하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온다연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는 듯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하지만 안타깝게도 불빛이 너무 어두워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낮은 울음소리와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남자의 기억 속 목소리와 다소 비슷했다.남자는 차갑고
그때도 지금과 같은 매미가 울어대는 무더운 여름날이었다.소녀의 수줍은 눈빛과 땀에 젖은 옆머리가 그날 오후와 겹쳐졌다.그 모습이 지난 3년 동안 매일 밤 꿈속으로 들어와 밤마다 유강후를 뒤흔들었다.유강후는 방금 온다연의 손길이 닿은 곳이 화끈거려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이 순간 공기마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러나 유강후는 재빨리 시선을 거두며 여전히 차갑고 고상한 표정으로 말했다.“들어가.”온다연은 즉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치 사면받은 사람처럼 도망치듯 떠났다. 물론 온다연은 차에 탄 유강후의 맹수 같은 약탈적인 눈빛을 보지 못했다.온다연은 유씨 가문 저택에 들어선 후에야 유씨 가문 식구들뿐만 아니라 유강후의 옛 친구들도 모두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그 도련님들은 모두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유강후는 그중에서도 최고였다.온다연은 전에 그들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여러 번 목격했었기 때문에 그들을 피하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하지만 안주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심미진은 온다연을 놓아주지 않았다.“나 시간 없으니까 네가 이 술을 네 작은 삼촌에게 갖다줘.”온다연은 거절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방 안은 화려했고 술 분위기가 무르익었다.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온다연은 가시 장미에 섞인 새하얀 장미처럼 눈길을 사로잡으며 문 앞에 서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어두운 조명 속에서도 온다연의 검은 머리와 붉은 입술, 매력적인 골격,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특히 하늘색 치마 밑의 하얀 피부는 사람을 유혹할 정도로 하얗게 빛났다.잠시 동안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갑자기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도련님, 유씨 가문의 양딸을 몇 년 동안 보지 못했었는데 그새 잘 자랐네요.”유강후 역시 온다연이 들어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손에 든 와인잔을 흔들었다.“몇 년 동안 유씨 집안에서 먹여준 건 맞지만 양딸이라고 할 순
온다연은 고개를 숙였다. 마치 사나운 짐승에게 겨냥당한 듯 숨이 막힐 것 같았다.온다연은 문에 한껏 기대어 최대한 유강후에게서 멀리 떨어지려고 했다.하지만 유강후는 바로 앞에 있고 공간이 좁아서 아무리 노력해도 유강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느꼈다.맑은 솔방울 같은 냄새에 은은한 술 냄새가 섞여 온다연의 피부에 다가왔다. 그러자 온다연은 갑자기 3년 전의 점심에도 이렇게 더웠는데 술에 취한 유강후가 방에 쳐들어와 통제를 잃고 폭력적으로 행동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 기억이 떠오르자 온다연은 혼란스러워서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유강후와의 거리를 벌렸다.하지만 너무 가까운 탓에 유강후의 옆을 지나가려 할 때 온다연의 팔은 유강후의 손에 닿을 수밖에 없었다.닿은 곳은 살짝 화끈거리며 유강후의 기운이 남았다.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유씨 가문 저택은 학교에서 너무 멀어서 기숙사에 살고 있어요.”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온다연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낮아서 유강후는 그녀를 혼내고 싶었다.게다가 이 3년 동안 거짓말하는 것도 배웠다니.하지만 유강후는 아직 온다연을 까발릴 생각이 없었다. 이 정도는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었다.“내 번호 차단했어?”온다연은 눈을 내리깔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번호 바꿨어요. 예전에 쓰던 휴대폰이 고장 나서 모든 번호가 사라졌거든요.”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유씨 가문 사람들 중 이모 심미진의 번호만 저장했다.“휴대폰 줘 봐.”온다연은 순순히 휴대폰을 건넸다.살짝 낡은 휴대폰이었는데 스크린은 손상된 정도가 심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고 자신의 휴대폰으로도 온다연의 카카오톡 QR코드를 스캔해 추가했다.그리고 다시 휴대폰을 돌려주며 담담하게 말했다.“아까는...”“알아요.”온다연은 유강후의 말을 잘랐다.“그분들 다 삼촌 친구들이잖아요. 농담한 거 알아요. 괜찮아요.”온다연은 유씨 가문에 오래 머물지 않기
온다연은 온 힘을 다해 유민준을 밀어냈다.“오빠, 정신 차려요.”유민준은 표정이 변하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온다연, 순진한 척하지 마. 너랑 네 그 빌붙으려는 이모가 뭐가 달라? 지금 이렇게 좋은 기회가 주어졌는데 거절해? 그럼 설마 더 대단한 걸 바라는 거야?”온다연은 표정이 바뀌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유씨 가문이 넘볼 수 없는 대단한 집안이란 거 알아요. 당신들한테 빌붙을 생각도 없었어요.”온다연의 표정이 바뀌자 유민준은 답답한 듯 머리를 쥐어뜯으며 조금 전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나 그런 뜻 아니야. 나랑 만나면 명분 주는 것 외에 다른 건 다 줄 수 있어. 예전에 내가 지나쳤던 거 맞아. 내가 하령이 시켜서 널 괴롭혔던 것도 인정할게. 그런데 다 지난 일이잖아. 앞으로 내가 배로 잘해줄게. 다연아, 너 나 좋아하지...”유민준이 점점 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자 온다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끼어들었다.“오빠 틀렸어요. 나 오빠한테 관심 없어요.”온다연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정확히 말하면 난 유씨 가문 사람들에게 관심 없어요. 조금도 없다고요.”유강후는 그 말을 듣고 창문에 올려놨던 손을 멈칫하며 살기를 내뿜었다. 차 안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가라앉았다.유민준은 그 말에 화가 났다.“나한테 관심 없다고? 그놈 때문이야?”유민준은 주머니에서 사진 여러 장을 꺼내 온다연의 얼굴에 던지며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너 이놈 좋아하지?”사진들이 바닥에 널브러졌다.불빛이 어두웠지만 온다연은 사진 속 남자가 그녀의 동기 진태윤이라는 것을 보아냈다. 요즘 인턴십 때문에 온다연은 진태윤과 가까워졌는데 유민준이 그들의 사진을 찍을 줄은 몰랐다.바닥에 널브러진 사진들을 보고 온다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오빠, 유씨 가문이 대단한 건 아는데요. 제 학교 친구들은 건드리지 마요. 태윤이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저 태윤이 안 좋아해요.”유민준은 손을 뻗어 온다연을 앞으로 끌어당기며 내려다보
그 남자는 바로 유강후였다.유강후는 고급 소재의 흰 셔츠에 긴 다리를 감싸는 검은색 바지를 입고 차갑고 위엄 있는 표정을 지은 채 길에 서서 눈길을 끌었다.그의 옆에 있는 여자는 하얀색 명품 정장을 입었는데 몸매의 볼륨감이 잘 드러났다. 맑고 귀여운 외모에 눈웃음도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두 사람은 무슨 말을 했는지 곧 여자는 유강후의 팔짱을 끼고 앞으로 걸어갔다.두 사람이 멀리 걸어가는 모습을 본 온다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책을 얼굴에서 떼어냈다.하지만 이때 유강후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멀리서부터 안도연을 바라보았다.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온다연은 유강후의 눈빛에서 차가운 기운을 느꼈고 순간 머리가 질끈거리면서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다행히 유강후는 곧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온다연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상현 씨, 미안해요. 저 볼일 있어서 이만 가야 할 것 같아요.”강상현이 말도 하기 전에 온다연은 이미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본 듯한 표정으로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하지만 문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유강후와 그 여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피하기에는 너무 늦은 온다연은 몸을 곧추세우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할 수 없이 외쳤다.“삼촌!”유강후은 시선을 온다연이 입고 있는 무릎까지 오는 하얀색 원피스로 옮겼다가 아픈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쳐다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친구랑 여기서 켜피 마신 거야?”“강후 씨, 누구야? 왜 강후 씨를 삼촌이라고 불러?”여자는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애교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유강후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우리 형수님의 조카야.”여자는 놀란 듯 온다연을 훑으며 말했다.“강후 씨가 말했던 그 조카군요. 언제 이렇게 많이 컸어요?”여자는 손을 내밀어 온다연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반가워요. 저는 강후 씨 친구 나은별이에요.”사실 나은별이 자기 소개하지 않아도 온다연은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전에 유씨 가문에서 나은별을 여러 번 몰
위험한 분위기가 조금씩 다가오자 온다연은 공기가 질식하는 냄새로 가득 차 있다고 느꼈다.가슴이 답답해서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벽에 등이 닿아 더 이상 후퇴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강후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키 큰 유강후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면서 온다연의 몸에 곧 닿을 것 같았다.온다연은 옆에 있는 녹슨 수도관을 꼭 붙잡고 눈을 내리깐 채 감히 그를 쳐다볼 수 없었다.불빛이 어두워서 얼굴이 비정상적으로 빨개진 것을 가렸고 매혹적인 입술만 보일 뿐이었다.유강후의 시선은 반쯤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그의 어조는 더 차가워졌다.“누구를 피하고 싶어서 이런 곳에 살고 있는 거야?”유강후는 아주 가까이 다가왔고 큰 몸으로 온다연을 가리자 마치 커다란 그물에 걸린 듯 도망칠 수 없게 만들었다.온다연은 유강후가 너무 가까이서 압박을 주는 바람에 온몸에 힘이 풀려 다리를 주체할 수 없이 떨기 시작했고 머리도 너무 어지러웠다.“말해!”온다연은 입을 뻐끔거렸다.“삼촌, 저...”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지더니 몸이 앞쪽으로 쓰러졌다.기절한 건가?유강후는 쓰러진 온다연을 두 팔로 감쌌고 그제야 그녀의 체온이 무서울 정도로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유강후는 얼굴을 찡그리고 허리를 굽혀 온다연을 안아 들었다.온다연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주위가 깜깜하고 빛이 전혀 없었다.당연히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다고 생각한 온다연은 손을 들어 올리자마자 가죽의 부드러운 촉감과 함께 부드럽고 딱딱한 무언가를 만졌다.소파인가? 아니면 의자?갑자기 어두운 불빛이 온다연의 머리 위로 비추면서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일어났어?”온다연은 고개를 번쩍 들어 차가운 눈동자를 바라보았고 그 어둠은 그녀를 휩쓸어버릴 것만 같았다.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온다연은 어리둥절했다.“사, 삼촌...”왜 자신이 어두운 차 안에서 유강후와 단둘이 있는 것일까?그의 부하 이권은 어디 간 걸까?온다연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
그건 꿈이 아니었던 건가?그녀는 흐릿한 화면 속의 작은 점을 바라보며 가슴이 격하게 요동쳤고, 눈시울을 붉히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화면을 보고 있었다.흥분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임수진이 안경테를 쓸어올리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엄밀히 말하면, 아직 배아 단계지만 심장은 이미 형성되었고 점차 손, 발과 기타 신체 기관들이 형성될 것입니다.”“오늘부터 2주마다 산전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제가 직접 검사를 진행할 것입니다. 검사를 받는 날짜가 아니어도 몸에 이상이 느껴지면 즉시 병원으로 오세요.”“그리고 임신 초기 3개월 동안 술과 부부관계를 금지해야 합니다.”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임신부가 허약한 체질인 데다 쌍둥이를 가졌으니 출산할 때까지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아요.”그녀는 온다연의 목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키스 흔적을 의식한 듯 유강후를 힐끗 보며 헛기침했다.“대표님, 작은 사모님이 정말 미인이셔서 참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절제하셔야 합니다. 초기 3개월이 특히 중요하니 절대 함부로 하시면 안 된다는 걸 명심하세요.”유강후가 나지막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박사님, 제 아내가 몸이 약하다고 하셨는데, 쌍둥이를 임신하면 혹시...”“아니요.”임수진이 단호하게 말했다.“사모님이 허약한 체질이긴 하지만 임신이나 출산이 불가능한 상태는 아닙니다. 영양 관리를 철저히 하고 적절한 운동을 견지한다면 쌍둥이 출산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말을 마친 임수진이 일어서며 말했다.“검사 결과에 이상이 없으니 귀가하셔도 됩니다.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임수진이 나간 후에도 온다연은 초음파 모니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모니터는 이미 바탕화면으로 바뀌었지만, 그 흐릿한 형상은 이미 그녀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유강후가 다가가 안으려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제 정신이 돌아온 듯 그의 옷깃을 잡고 마구 때리며 울부짖었다.
그녀의 단호한 모습을 보니 단순히 성질을 부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지금의 온다연은 예전의 온다연이 아니다. 유강후는 그녀가 정말 기억을 되찾으면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리라 예상했다.그렇다고 놓아줄 리 없는 유강후는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붙잡았다.“어딜 가려고?”온다연은 벗어나려 했지만 몸이 완전히 그의 품속에 갇혀 단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었다. 분노가 폭발한 그녀는 유강후를 향해 소리 질렀다.“유강후 씨, 당장 놓아요. 더 험한 말을 듣기 전에.”사실 그녀도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다. 단지 유강후가 있는 이곳을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괴롭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마주하기 싫었으니까.그녀는 그저 조용한 곳에서 과거를 깨끗이 정리하고, 유강후와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할지 잘 생각해 보고 싶었다.하지만 유강후는 기회조차 주지 않고, 그녀를 들어 올려 침대에 앉혔다.“다연아, 좀 진정해. 정말 임신이야. 우리 아이가 생겼다고. 거짓말이 아니야.”온다연이 코웃음을 쳤다.“당신의 수단을 이길 수 없겠지만 나도 더 이상 예전의 온다연이 아니에요. 이전처럼 괴롭힐 생각은 하지 말라고요. 나를 괴롭히면 그게 누구든 아버지가 가만두지 않으실 거예요.”얼음장같이 차가운 그녀의 얼굴과 증오로 가득 찬 눈빛을 보고, 유강후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는 온다연이 언젠가는 모든 것을 기억해 낼 것임을 알았고, 그녀의 과격한 반응에 대처할 방법도 생각해 뒀다.하지만 온다연이 아이를 가진 시점에 이 일이 터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이는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이고, 셀 수 없이 수많은 밤에 절에서 무릎 꿇고 신명께 빌었던 일이다. 그러니 이 두 아이에게 약간의 문제라도 생기는 것을 절대 허용할 수 없다.그는 억지로 그녀의 손을 잡고 이마에 키스하며 속삭였다.“다연아, 너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어. 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겠어? 기억이 돌아왔다면 네가 나의 아내였다는 것도 알았겠네. 우리는 혼인신고도 했어. 그러니까 얘기 좀 하자. 내가 다 설명할 수
유강후의 과거 행각을 생각하면 용서라는 단어조차 입에 올리기 싫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죽었다고 알려진 지 3년 만에 유강후는 그녀를 다시 찾아냈다.게다가 이제 결혼 얘기가 오가는 단계까지 와버렸다.누군가의 농간인지, 하늘의 뜻인지 모르지만 이제 인연을 완전히 끊기는 어려울 것이다.하지만 과거의 상처가 그대로 있고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걸 지워버릴 수 있단 말인가?고통으로 생기를 잃은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마음속에 벌써 답이 있었지만 어떤 일도 그의 기쁜 심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다연아, 우리...”짝!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강후의 얼굴에 따귀가 날아왔다. 방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얼어붙었고 유강후도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기억이 돌아온 거야?”온다연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나가요!”이때 이권이 입을 열었다.“온다연 씨, 밤새 의식이 없으셔서 대표님께서 줄곧 곁을 지키셨습니다. 게다가 임신...”온다연이 이권을 노려보았다.“이권 씨도 공범이니 당장 여기서 나가세요.”이권도 멍해졌다. 그는 온다연이 무언가를 기억해 냈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지만,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유강후가 나지막이 물었다.“다연아, 뭔가 기억났어?”온다연은 눈을 감은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네, 다 생각났어요. 저를 버리고 나은별을 선택했잖아요. 그런데 왜 다시 찾아온 거예요?”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파서 침대보를 꽉 움켜쥐었다. 어찌나 세게 힘이 주었는지 손톱에 피가 돌지 않아 하얗게 변했다.그가 자신을 김원도에게 넘기던 장면이 떠오르자, 그녀는 무슨 이유가 있었든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나가요. 당신 얼굴을 보기 싫어요.”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면서 유강후는 심장이 쿡쿡 찌르듯 아
“부인이 지금 임신 3주차인데, 아직은 배아 상태라 약 1cm에 불과하고 상태가 좀 불안정합니다.”온다연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유강후는 너무 큰 기쁨에 심장이 마구 뛰고 정신이 혼미했다.이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온다연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최소 1~2년은 걸릴 것이라 예상했는데, 고작 3~4개월 만에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그런데 태아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지난번 온다연의 유산 사건이 기억에 생생한 유강후는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태아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건 무슨 뜻이죠?”임수진이 약간 당황하며 설명했다.“대표님,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흔히 발생하는 일입니다. 조금만 상태가 나빠져도 유산 징후가 나타날 수 있어요.”“별문제는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배아 발육 상태가 양호하고 태아 심음도 정상입니다.”“쌍둥이라고요?”유강후는 귀를 의심했다.그는 문득 곽혜진이 준 약이 생각났다. 자기도 쌍둥이였다는 사실과 겹치자, 다시 기분이 황홀해져 입가에 피어오르는 미소를 주체할 수 없었다.그는 임수진의 손목을 꽉 잡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박사님, 그게 정말입니까?”임수진이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손을 좀 놓고 얘기해요.”유강후는 급히 손을 풀어주었다. 흥분해서 목소리까지 떨리기는 평생 처음이다.“죄송합니다, 박사님. 정말 쌍둥이예요?”임수진이 틀림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정말이죠. 제가 30년간 의사로 일하면서 몇 번 실수한 적은 있지만, 쌍둥이를 잘못 판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유강후는 너무 흥분해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애써 진정하고 한참 후에야 나지막이 말했다.“감사합니다, 박사님. 제 아내는 언제쯤 깨어날 수 있을까요?”임수진은 아직도 혼수 상태인 온다연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몸에 특별한 이상은 없어서 지금쯤 깨어나야 하는데...”“제 아내는 이전에 최면 당한 적이 있는데, 그로 인해 과거의 대부분 기
온다연은 얼굴이 창백했고, 몸이 물에서 막 건져낸 것처럼 식은땀에 젖어있었다.강씨 가문의 새 안주인임을 즉각 알아본 그들은 삽시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방금 그들이 한 뒷담화를 온다연이 다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온다연이 극심한 통증을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의사, 의사를 불러주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그녀는 길고 긴 꿈속으로 빠져들었다.경원시에 사는 동안 겪었던 고난들이 오래된 영화처럼 기억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과정은 너무나도 길고 아팠다.최면 당한 이후로 종종 나타나는 신경성 통증보다는 마음속 고통이 훨씬 더 컸다.그녀가 양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모습, 평생 그녀를 지켜주던 소년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수단으로 괴롭힘당하는 모습, 결국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이 영화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그녀가 유하령에게 짓밟히는 모습도 보였다. 수도 없는 모욕을 당하며 찜통 같은 물탱크에 갇히고, 영하 20℃ 이하의 혹한에 밖으로 내쫓기는 날들이 이어졌다. 젖은 옷이 살갗에 얼어붙어 떼려고 하면 피부가 뜯겨 나갔다.광기 어린 유민준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낮이면 유하령을 도와 그녀를 유린하고 밤이면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며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다.그녀는 또다른 자신의 모습도 보았다. 마치 관음증 환자처럼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유강후를 훔쳐보고 노트북에 그의 이름을 가득 쓰고,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유씨 저택의 대나무 숲에 파묻는 모습이었다.너무 춥고 고통스러운 그 기나긴 나날을 그녀는 하수구의 쥐처럼 연명하며 살았다.그러던 어느 날, 유강후가 그녀를 품에 안고 다독이며 아프면 울고 싫으면 거절하고 괴롭히는 자에게는 백배 천배로 갚아주라고 말했다.하지만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이 없었고, 유강후는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는 듯했지만 나은별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했다.그녀가 임신했다가 유산하는 모습, 나은별과 바꾸기 위해 끌려가는 장면도
그녀가 자리에 앉기 바쁘게 한국계 여성 손님 세 명이 들어왔다. 구석진 창가에 앉은 온다연을 발견하지 못한 세 사람은 거침없이 뒷담화를 하기 시작했다.“이상하네. 유강후의 친부가 오지 않았어. 강 대표님이 이혼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장인어른 생신날에 사위가 왜 오지 않았을까? 이건 좀 말이 안 되는데.”“내가 국내에서 생활한 기간이 길어서 그에 관해 들은 바가 있어.”“어떻게 된 건지 어서 말해봐.”“유강후의 부친은 H국에서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쥔 고위급 정계 인사이고 유강후의 친형도 정계에 몸담고 있었는데, 3년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외진 지역으로 발령 났고, 직급이 말단에서 다시 시작한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낮아졌대.”“그리고 그 형에게 딸이 한 명 있는데,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한쪽 다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 갇혀서 지금까지도 출소하지 못하고 있대.”“어떻게 그런 일이... 아버지가 그렇게 큰 권력을 가졌는데, 왜 아들과 손녀를 구하지 않지?”“그건 모르는 소리야. 듣기로는, 유강후가 친형과의 갈등 때문에 뒤에서 훼방을 놓았고, 아주 큰 힘을 들여서 부친의 권력으로도 어찌 할 수 없게 만들었대.”“쯧쯧, 진짜 잔인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뒤에서 유강후를 ‘살아있는 저승사자’라고 부르나 봐. 자기 친형도 봐주지 않을 정도이니.”“또 하나 있어. 유강후는 경원시에 있을 때 약혼녀가 있었어. 나은별이라고, 나씨 가문의 따님이었지. 그때 사람들은 둘이 반드시 결혼할 거라 생각했는데 유강후가 모두의 예상을 깨버렸어. 집에 얹혀살던 여자에게 홀딱 빠져 나은별과 파혼하고 두 가문의 협력 관계마저 무너뜨려 버렸어.”“그 얘기는 나도 들었어. 그 여자는 그 집 양딸이었고 유강후를 아저씨라고 불렀다는데, 어떻게 두 사람이 그런 사이가 됐는지 몰라.”“어머, 대박 사건! 자세히 말해봐...”그들은 최대한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지만 공간이 작다 보니 한 글자도 빠짐없이 온다연의 귀에 들어왔다.그녀는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그 시각 유강후는 로운의 보고 사항을 듣고 있어 그녀를 쫓아가지 못했다.차에 올라서야 온다연의 분노를 알아챈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왜 그래요? 요즘 따라 이상하게 화를 자주 내네요?”온다연은 지난 며칠 동안 감정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툭하면 화가 났고 그럴 때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아니나 다를까 이때도 온다연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나중에 우리의 아이한테도 이렇게 대한다면 정말 화날 것 같아요.”유강후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안아 올려 무릎에 앉히고선 나지막하게 말했다.“딸이라면 애지중지 키우는 게 맞지만, 아들이라면 우림처럼 키울 거예요.”온다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러는 이유를 이해하지만 기분이 썩 풀리지는 않았다.마음속에 남은 찝찝함 때문에 그녀는 유강후에게서 내려와 차 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그러자 유강후가 속삭였다.“생각해 봐요. 우리의 아이는 강씨 가문과 진씨 가문을 책임져야 해요. 어쩌면 유씨 가문까지 물려받을 텐데 현실적으로 밝게 자라는 건 불가능해요. 부모로서 보통 아이처럼 행복하게 자라길 누구보다 바라지만 이런 가문에서 태어나는 순간 사명감을 가져야 해요. 어려서부터 부족할 것 없이 자랐다면 당연히 그에 맞는 대가를 치러야죠.”온다연은 괴로웠다.하지만 유강후의 말은 모두 일리가 있었고 그 역시 똑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봐 걱정되었다.온다연은 나지막이 물었다.“강후 씨도 이렇게 자란 거예요?”그는 무덤덤하게 답했다.“비슷했죠. 엄마랑 함께 있는 시간은 하루에 두 시간밖에 없었어요. 때로는 반년 동안 얼굴을 못 볼 때도 많았어요. 열 살 이후에 특수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고 그때부터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어요. 그런 생활도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진 거죠.”마음이 괴로웠던 온다연은 그의 손을 잡았다.“미안해요. 화를 내면 안 됐던 건데...”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무
실제로 온다연이 서 있는 곳은 에어컨 통풍구 바로 맞은편이었다.온다연이 몸을 돌리는 순간 그 연예인은 갑자기 선글라스를 벗더니 이곳을 멀리서 바라봤다.유강후는 싸늘한 시선으로 출구를 바라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시끄러우니까 커튼 닫아.”곧 커튼이 닫히고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환호성도 밖으로 나가며 점점 사라졌다.환호성이 완전이 사라졌을 때, 이권이 뛰어 들어와서 우림의 비행기가 착륙했다고 말했다.그러자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잡았다.“가요. 우림이가 도착한 것 같네요.”그들이 막 일어났을 때 강양호는 이미 문을 나섰다.“드디어 우리 손자가 왔네. 어찌나 보고 싶던지.”온다연은 나지막이 속삭였다.“할아버지는 아이를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우리가 빨리 아이를 갖길 바랄 거예요. 그래서 우림이를 유독 더 아끼고 친손주처럼 생각하는 거죠.”출구는 바로 휴게실 밖에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보기만 해도 정예로운 일행이 나타났다.선두에 선 사람은 로운이었고 그는 우림의 손을 잡고 있었다.멀리서 유강후를 발견한 우림은 로운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달려왔다.유강후 앞에 오자마자 ‘아빠’라고 부르더니 강양호를 보고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할아버지.”강양호는 기쁨에 겨워 허리를 굽히더니 아이를 껴안으며 미소를 지었다.“우리 손자 왔어? 얼른 할아버지랑 집 가자. 할아버지가 우림이 주려고 선물을 잔뜩 준비했어.”우림은 유강후를 힐끗 쳐다보고선 곧바로 시선을 도려 옆에 있는 온다연에게 머물렀다.“엄마.”온다연은 아이의 얼굴을 꼬집으며 말했다.“얼른 내려와. 할아버지 이제 연세 있으셔서 오래 못 안아.”우림은 온다연을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엄마라고 불렀고 아무리 바로잡고 고치려도 해도 바뀌지 않았다.마치 어려서부터 온다연에게 의존감이 있는 듯 강향호의 품에서 바로 내려와 온다연을 향해 팔을 뻗었다.“엄마. 안아줘요.”온다연이 안아주자 우림은 그녀의
물론 온다연도 예쁜 편이지만 이 세상에는 예쁜 여자가 너무나 많다. 게다가 유강후의 외모, 재산, 권력으로 봤을 때 그가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다.솔직히 말해서 온다연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않은가?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유는 없어요. 그냥 유나 씨면 돼요.”역시나 아무도 온다연을 대체할 수 없었다.운명의 실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엮여 있었고 그들은 평생 얽히게 될 운명이었다.두 사람은 말을 멈추고 조용히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한참 후에야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H국에는 언제쯤 갈 거예요?”“날씨가 좀 시원해지면 갈까요? 경원은 여름보다 가을이 더 예뻐요.”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원을 그리며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혜린의 아이가 너무 귀여워요. 안고 있으면 폭신하고 볼살도 가득해서...”그녀는 어제 아이를 더 오래 껴안지 못한 게 아쉬운 듯 유강후의 아랫배를 쓰다듬더니 낮은 목소리로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우리도 아이가 있으면 좋을텐데...”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생길 거예요.”유강후는 그 꿈을 기억했고 곧 아이가 돌아올 거라는 예감이 생겼다.이때 온다연이 말했다.“꿈에 종종 아이가 나타나는데 왜 자기를 버렸냐며 저한테 물어봐요. 꿈이라서 얼굴조차 선명하게 보지 못하니까 마음이 너무 괴로웠어요.”“그런데 최근에는 꿈속에서 아이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어요. 남자 아이였는데 강후 씨랑 많이 닮았어요.”“예전에 우리에게 아이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예요.”유강후의 눈에는 고통이 스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다연의 손을 꽉 감쌌다.이곳은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서 공항 입구에 도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이 입구에 모여들어 좁은 통로를 막고 있었다.유강후는 표정이 일그러졌다.“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곧 기사가 돌아왔다.“대표님, 잠시 후 연예인 한 명이 도착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