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금방 씻은 황동혁은 온몸에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풀썩 주저앉으며 말했다.“아가씨, 살려주세요!”보아하니 황동혁도 임슬기를 알아본 모양이었다.옆에서 담요를 가져와 황동혁에게 던진 임슬기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고개 들어.”황동혁은 순순히 고개를 들더니 온몸을 떨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아가씨, 진 변호사님, 살려주세요.”“사람을 알아는 보네? 누가 진 변호사를 들이받으라고 시켰어?”황동혁은 두려운 듯 입술을 깨물며 말하기를 망설였다.“말 안 해?”임슬기가 팔짱을 끼며 침착
차가 충돌하는 순간, 진승윤은 마치 조건 반사처럼 몸을 돌려 임슬기를 끌어안았다.“조심해요!”굉음과 함께 차가 나무에 부딪혀 멈췄다.머리를 부딪친 임슬기는 눈앞이 어지러웠다.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려 그녀의 눈을 가렸다.임슬기가 황동혁의 팔을 잡아당기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황동혁?! 황동혁?!”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황동혁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황동혁이 이대로 죽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것이다!’임슬기는 진승윤이 다쳤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천천히 기어가 황동혁을 흔들며 쉰 목소리로 울부
‘황동혁이 죽었다고?’미처 반응하지 못한 임슬기는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을 들고 김현정을 꽉 잡았다.“다시 한번 말해 봐요. 뭐라고요?”“황동혁은... 죽었어요.”“그럴 리 없어요! 절대 그럴 리 없다고요!”임슬기는 울며 고개를 저었다.“나에게 거짓말하는 거죠?”김현정은 임슬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지만 황동혁이 증인이라는 것, 그리고 황동혁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이제 황동혁 죽었으니 임슬기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김현정은 임슬기를 꼭 끌어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위로했다.“슬기 언니 미안해
진승윤...순간 임슬기의 머릿속에 눈을 감고 있는 진승윤이 얼굴에 피를 흘리면서도 그녀를 보호하던 장면이 스쳐 지나가면서 온몸에 힘이 빠졌다.조금 전 김현정에게 진승윤을 물었을 때 김현정은 대답하지 않았다.설마... 진승윤이 진짜로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임슬기, 네가 화근이야! 바람피우는 건 둘째치고 네 주변 사람들을 하나씩 죽게 만들잖아. 그러고도 얼굴을 들고 다닐 양심이 있어?”“닥쳐!”임슬기는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연다인을 노려보다가 손을 뻗어 연다인을 세게 밀어냈다.그러고는 손등에 꽂혀 있
“교통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고요?”“내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특별히 확인했어요. 누군가 황동혁의 머리를 세게 내리친 것 같아요.”김현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교통사고가 발생한 후, 황동혁은 가슴이 앞 좌석에 눌러서 심한 내출혈이 있긴 했지만 살아날 가능성은 있었어요.”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은 임슬기는 다리에 힘이 풀려 온몸이 축 처졌다.“하, 연다인이에요! 황동혁의 입을 막기 위해 사람을 시켜 일부러 죽인 거예요.”간신히 몸을 일으킨 임슬기는 창백한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죽은 자만이 비밀을 평생 지
임슬기의 말이 떨어지자 방안은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임슬기는 차가운 눈빛으로 배정우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가 과연 그녀를 한 번이라도 믿어줄까, 조금이라도 믿어줄까?임슬기는 너무 궁금했다.“그럼 진승윤 때문에 밤새 원성시로 간 거야?”이 질문에 임슬기는 순간 당황했다.“배정우, 나를 위해서 황동혁을 찾으러 간 거야. 황동혁이 내 결백을 증명할 수 있고 연다인이 범인인 것을 지목할 수 있으니까. 나는 당연히 가야 했어.”“임슬기, 너는 다인이가 그렇게 싫어?”싸늘한 배정우의 목소리에 그 자리에 얼어붙은 임슬기는
김현정은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치운 뒤 침대 위의 임슬기를 바라보았다.가냘픈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걸 보니 또 울고 있는 게 분명했다.김현정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방을 나가려 했다. 임슬기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가에 다다랐을 때 임슬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현정아.”그 한마디에 김현정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둘이 알고 지낸 지 오래됐지만 임슬기가 그녀를 이렇게 친근하게 부른 건 처음이었다.그게 얼마나 가슴을 울렸던지 김현정은 조심스레 몸을 돌려 임슬기를 바라보았다.임슬기는 이
임슬기가 들어오자 진승윤은 바로 전화를 끊고 눈빛을 가라앉히며 부드럽게 말했다.“슬기 씨, 왜 여기까지 왔어요? 푹 쉬어야 할 텐데.”임슬기는 순간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었다.“저보다 승윤 씨가 더 심한데요? 제대로 쉬셔야 하는 건 승윤 씨죠.”진승윤이 원래 온화한 성격이라는 걸 알지만 아까 그토록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라 놀라웠다.김현정은 임슬기를 의자에 앉힌 후 가져 온 국을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전 과일 좀 사 올게요.”“그래, 빨리 와.”김현정은 웃으며 문을 닫았다.“걱정 마세요.”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내가 뭐 도와줄 일 있어?”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미 충분히 도와줬어. 너까지 휘말리면 내가 더 걱정돼.”문득 진성한 쪽 일을 떠올린 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진승윤을 바라보았다.“근데 너야말로 괜찮아? 혹시 김씨 가문 쪽에서...”그 순간 그의 얼굴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너 얼굴 왜 이래?”불현듯 배정우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임슬기는 날카롭게 물었다.“배정우가 그랬지?”진승윤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아냐, 그냥 부딪힌 거야.”“거짓말하지 마.”임슬기는 그의 얼굴을 억
육문주가 아직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응급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다가왔다.“다행히 제때 도착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심각한 출혈이 있어 당분간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임슬기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물었다.“선생님, 현정이 몸에 난 상처들은요?”비록 다리 한쪽밖에 보지 못했지만 온몸이 피투성이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조금 전 이미 전신에 약은 다 발라두었습니다. 다만 계속해서 치료가 필요합니다.”임슬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임슬기는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점점 초조해졌다.급히 거실로 달려가 서랍과 상자를 뒤져 욕실 열쇠를 꺼냈지만, 마음이 급할수록 손이 떨려 열쇠를 제대로 꽂을 수조차 없었다.“현정아, 현정아, 제발 버티고 있어. 안 돼... 제발...”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결국 임슬기는 어깨로 문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두세 번 들이받자 문이 휘청이며 열렸다.문틈 사이로 보인 광경에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김현정은 욕조 안에 쓰러져 있었고 팔에는 붉은 상처가 길게 나 있었으며 욕조 안
미디어의 자극적인 보도 탓에 상황은 점점 더 왜곡되었고 김현정은 마치 스스로 몸가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사람, 방탕하게 구는 사람으로 몰려버렸다.임슬기는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분노에 휩싸였고 당장이라도 연다인을 찾아가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곧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정신을 다잡았다.이 일은 김현정에게 있어 너무나도 큰 상처다. 절대 감정적으로 행동해선 안 된다.반드시 가장 합리적이고 피해가 적은 방법을 택해야 했다. 무엇보다 김현정이 이런 기사나 사진을 보는 건 막아야 했다. 절대로 보면 안 된다.그 순간 그
주방에서 임슬기는 면을 삶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딴 데로 가 있었다.한편으로는 김현정의 상태가 걱정됐고 또 한편으로는 연다인이 다음에 무슨 짓을 벌일지 불안했다.생각이 많아지는 그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임슬기는 불을 약하게 줄이고 도어스코프로 밖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문주 씨,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아침에 전화했는데 왜 계속 안 받았어요?”육문주는 아직도 어제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안색은 좋지 않았으며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어젯밤에 좀 일이 있었어요. 현정 씨는 안에 있어요?”“있어요.”육문주가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말해 봐, 연다인!”“난 말이지 네가 무너지는 꼴을 보는 게 제일 즐거워. 임슬기, 네가 미쳐버릴 정도로 무너지고 나면 정우도 너랑 이혼하겠지. 그때쯤이면 나도 자연스럽게 정우의 아내가 되겠네?”임슬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연다인,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경고하는데, 더는 함부로 굴지 마!”하지만 연다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도 참 한심해, 임슬기. 그렇게 소리만 질러대고 그 외엔 뭘 할 수 있는데?”“이 비겁한 년!”임슬기가 더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욕실 안에서
임슬기는 순간 멈춰 섰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김현정을 바라보며 물었다.“현정아, 무슨 일이야?”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슬기 언니... 제발 오지 마요!”김현정은 몸을 더 안으로 움츠리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간절히 애원했다.“부탁이에요, 오지 마요... 제발...”김현정의 반응이 너무 격해지자 임슬기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알겠어. 안 갈게. 여기 이렇게 있을게. 괜찮지?”김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임슬기는 김현정이 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
‘허, 승윤아? 참 다정하게도 부르네.’임슬기는 취기에 휘청이며 배정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중얼거렸다.“너랑 있으면 마음이 좀 놓여. 고마워, 승윤아.”배정우는 그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상대는 술에 잔뜩 취한 상태라 불러도 소용없고 화를 낸다고 바뀔 것도 없었다.결국 그는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 제대로 한 대 갈겨. 힘 좀 써서.”...다음 날.임슬기는 흐릿한 정신으로 깨어났다. 입안이 텁텁하고 목이 바짝 말랐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중얼거렸다.
그 말을 입에 올리자마자 진승윤은 바로 후회했다.너무 충동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었을까.만약...“좋아.”진승윤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임슬기가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좋아요. 진 변호사님께서 내가 몸 약한 것만 안 싫어한다면 말이죠.”진승윤은 어리둥절한 채 말을 잇지 못했고 임슬기는 그의 얼굴 앞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지금 혹시 후회하는 거 아냐?”“아, 아니...”“나도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몰라. 근데 내가 죽고 나면 내 동생이 정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