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는 연다인이 배정우 앞에서는 늘 연기하지만 그가 없을 때는 어김없이 본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오늘 그 녹음 파일만으로도 그녀가 점점 미쳐가고 있음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었다.금원 아파트 아래에 도착하자 익숙한 마이바흐가 눈에 들어왔다.임슬기는 차를 힐끗 보기만 했을 뿐 외면했지만 두 걸음도 채 가지 못해 누군가 갑자기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어디 가려고 했어?”그의 어조는 질책이 섞여 있었다.“네가 숨겨둔 여자를 보러 갔다가 우연히 녹음 파일 하나를 얻었어. 너라면 아주 흥미로워할 거야.”배정우
임슬기는 화를 내지도 않고 인형처럼 얌전하게 배정우의 품에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마음대로 다뤄도 된다는 듯 보였다.“임슬기, 네가 숨겨둔 일을 내가 조만간 알아낼 거야.”이 말을 들은 임슬기의 가슴은 아프게 찔렸지만 얼굴에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그래? 그러면 배정우 씨가 빨리 알게 되길 바랄게.”‘내가 죽기 전에.’“너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비꼬는 말투로 말할 거야?”“배정우 씨, 내가 비꼬는 것 같아?”“임슬기.”배정우는 길고 날렵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꽉 움켜쥐었는데 붉어진 눈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제
“네가 미친 거지. 날 납치한 건 연다인이야. 넌 명인시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잖아. 그런데 겨우 여자 하나 제대로 해결 못 해? 연다인을 그렇게 믿는 거야? 연다인의 처음 경험을 누구에게 줬는지나 알고 있어?"“임슬기, 네가 정말 미쳤구나. 또 연다인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거야? 네가 납치당했을 때 연다인은 병원에 있었어.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을 꾸몄겠어?”배정우는 임슬기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고 흔들며 다그쳤다.“연다인은 너무 착해서 매일 네가 위험에 처할까 걱정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런 연다인을 의심하다니? 임슬기
배정우가 문 앞에 서 있을 때 임슬기는 바닥에 앉아 침대 옆 서랍을 뒤적이고 있었다.그녀는 물건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잠시 멈칫하며 아쉬움과 미련이 남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다 손끝이 붉은 비단 상자에 닿자 그녀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반짝이는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차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다.이 반지는 3년 전 배정우가 세계적인 장인에게 맞춤 제작을 의뢰해 프러포즈하려 했던 다이아몬드 반지였고 그녀는 그동안 이 반지를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며 혹여나 흠이라도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권민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배정우였다.권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사모님, 걱정 마세요. 우선 전화부터 받겠습니다.”“네. 볼일 보세요. 조심하세요.”임슬기는 김현정을 방으로 데려갔고 권민은 급히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배정우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재로 와.”서재에 들어선 권민은 배정우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내가 없던 사이에 또 사모님과 대표님이 다투셨던 건가?’“임슬기가 나를 만나기 전에 어떤 남자들을 만났는지 전부 조사
“아가씨?”임슬기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주섬주섬 꺼냈던 주얼리를 다시 집어넣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팔지 않겠습니다.”전당포 주인은 그녀가 가격이 너무 낮다고 생각해 팔지 않으려는 줄 알고 당황하며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아가씨, 가격이 너무 낮다고 생각하시면 다시 협상할 수 있습니다. 60억까지 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이 정도면 충분히 높은 가격이었기에 전당포 주인은 자신 있게 임슬기의 반응을 기다렸다.그러나 임슬기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은 채 주얼리 상자를 단단히 끌어안았다.“얼마를 준다 해도 팔 수 없어
“안 돼요. 그 반지 내놔요.”“그럼 두 번째 선택을 하겠다는 거군요. 우리를 기분 좋게 해주면 반지를 돌려줄 수도 있어요”임슬기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두 손을 가슴께로 모아 움켜쥐며 그들을 노려보았다.“다가오지 마요.”하지만 술에 취한 남자들은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아가씨, 아무리 소리쳐도 여기선 아무도 널 도와줄 사람 없어요.”“반지 내놔요.”“그럼 반지를 선택한 거예요.”첫 번째 남자가 비열한 미소를 짓더니 순식간에 임슬기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녀의 옷깃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찢으려 했다.“움직이지 마
임슬기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다음 날이었다.김현정은 죽을 준비를 하며 방에 들어가자 임슬기가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공포에 질린 얼굴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돌려줘요.”김현정은 죽을 옆에 놓고 말했다.“슬기 언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어제 계속 돌려달라고 반복해서 말했어요."임슬기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피하면서 말했다.“내가 또 뭘 말했어요?”“그냥 반지를 계속 돌려달라고 반복했어요. 그 외엔 아무 말도 안 했고 내가 물어봤을 때도 말하지 않았어요. 그냥 계속 울어서 나 진짜로 놀랐어요.”“미안해
임슬기는 강재호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동생 잘 돌보고,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고마워요, 임슬기 씨.”강재호는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원래 육문주가 두 사람을 배웅하려 했지만, 진승윤이 먼저 임슬기의 짐을 차에 실었다.“육문주, 너는 해야 할 일이나 잘해. 이런 일에 신경 쓰지 말고.”육문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승윤 형, 내가 무슨 원수예요?”“배정우의 간첩이잖아.”“진짜 아니라고요.”육문주는 진승윤의 귀에 속삭였다.“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형
“네.”대답하고 나서야 육문주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바로 말을 바꿨다.“아니에요. 안 좋았어요.”배정우는 한참을 침묵하다 욕을 퍼부었다.“쓸모없는 새끼.”육문주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내가 왜 쓸모없어요?”“육문주, 내 기억 상실 어떻게 치료해야 해?”“최면이요.”육문주는 배정우가 이해하지 못할까 봐 설명하려 했지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한참 뒤 배정우가 물었던‘기분 좋았어?’의 상대가 자신이 아닌 임슬기였음을 알아차린 육문주는 배정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 질 녘, 김현정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육문주가 도시락을 가만히 들고 들어왔다.“슬기 씨, 여기 저녁이요.”도시락을 내려놓은 육문주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덧붙였다.“난 정말 정우 형 편이 아니에요. 그냥 의사로서 환자를 돌봐줄 뿐이라고요.”“환자? 이미 퇴원한 거 아니었어요?”육문주는 복잡한 표정으로 임슬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슬기 씨, 사실 전에 여러 번 말하려다 계속 말 못했던 게 있어요. 정우 형이 2년 전 교통사고로 뇌진탕을 입었었는데, 그때는 한 달 정도 요양하고 다 나았지만, 최근 다시 두통이
그날 밤, 임슬기는 얕은 잠에 빠져 있었다.꿈속에 배정우가 나타났고 두 사람은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다가, 갑자기 배정우가 임종현의 목을 움켜쥐며 그녀를 위협했다. 숨 막히는 공포가 엄습하자,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그때, 갑자기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아기? 내 아기인가?’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임슬기는 그제야 모두 꿈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아이의 울음소리도 마침 복도를 지나가는 누군가의 아이일 뿐이었다.“슬기 언니, 아침 먹어요.”임슬기는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오는 김현정을 보며 물었다.“방금 나가서 사 온 거야
육문주는 배정우를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가 정확히 그날, 임슬기가 추락한 자리로 끌고 가 말했다.“정신이 좀 들어요?”배정우는 어두운 눈빛으로 불쾌한 듯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육문주, 죽고 싶어?”“여길 봐요.”육문주는 자신의 발 아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정우 형, 여기가 슬기 씨가 떨어진 곳이에요. 형 손으로 직접 밀어낸 곳이라고.”“난 그런 적 없어.”“그건 형 생각이죠. 근데 슬기 씨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이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얼마나 절망스러웠을지?”육문주의 말에 흠칫하던 배정우는 옥상 변
임슬기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배정우를 밀어내려 했지만 바위처럼 무거워 꿈쩍도 하지 않았다.“배정우, 너 취했어.”배정우는 갑자기 그녀를 껴안더니 고개를 들어 턱으로 그녀의 이마를 살며시 문질렀다.“나 안 취했어, 슬기야. 지금 정신이 아주 멀쩡해.”“멀쩡하면 지금처럼 부르진 않았겠지.”“슬기야.”배정우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럼 널 뭐라고 불러야 해? 여보?”‘완전히 취했구나.’이 남자는 제대로 취했다. 그런데도 임슬기의 마음속 어딘가에선 묘한 기쁨이 피어올랐다. 지금 이 남
배정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병원까지 도착했다.차에서 내리기 전 임슬기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내일도 종현이 보러 데려가 줄 거야?”“상황 봐서.”‘이 말은 어쩌면 더 이상 종현이를 못 보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인가?’그렇지만 임슬기는 그 물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직 내일이 오지 않았으니, 그전까지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알겠어.”차에서 내린 후, 임슬기는 주머니 속 사진을 슬쩍 만져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 배정우가 눈치채지 못했다. 만약 그가 그 사진을 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임슬기는 배정우가 혹시라도 일기장 안에서 보지 말아야 할 내용을 보게 될까 봐 두려웠다.그러나 배정우는 일기장을 몇 장 넘기다 어느 페이지에서 멈춰 섰다.잠시 후, 그는 일기장을 닫더니 바닥에 툭 내던졌다. 그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너 송재현이랑 잤어?”그 한마디에 임슬기는 완전히 얼이 빠졌다. 그녀의 일기장엔 대부분 십 대 시절의 감정이 담겨 있었고 거의 전부가 배정우에 관한 내용이었다. 송재현이랑 관련된 건 전혀 없었다.“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일기장에
이번 식사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식사를 마치자마자 임종현은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올라갔다.오늘 임종현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임슬기는 그가 문을 닫는 모습을 바라보다 괜히 미간을 찌푸렸다.그때 배정우가 그녀를 힐끗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내가 설거지할게.”임슬기는 조금 놀랐지만 굳이 말릴 생각도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종현아, 누나가 잠깐 들어가도 될까?”“잠시만요.”몇 분 후, 임종현이 문을 열었다.“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