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의 또렷한 이목구비에 냉랭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가족이라면, 먼저 이유를 묻고 내 편을 들어야죠. 그런데 은서 이모는 왜 아무 설명도 듣지 않고 먼저 외부 사람 말을 믿으세요?”“삼촌은 이제 막 회사를 맡았어요. 당연히 인정받지 못하고 견제받을 수도 있어요. 삼촌이 때렸다는 그 사람들이 정말 아무 잘못이 없었다면, 벌써 경찰에 신고했겠죠.“그런데도 조용히 뒷말만 하고, 몰래몰래 이의 제기만 한다는 건, 그 사람들이 평소 얼마나 겉과 속이 다른지 보여주는 거 아닌가요? 그런 말을, 믿을 수 있나요?”“만약 제 동생 임유민의 친구가 우리 집에 와서 유민이가 잘못했다고 말한다고 쳐요.”“그리고 전 유민의 누나, 즉 제일 가까운 사람이니, 전 당연히 유민이 말을 먼저 듣고 사실을 확인하려고 하겠죠.”“다짜고짜 친구 말을 믿고 동생부터 의심하진 않아요!”그때, 현관 쪽 꽃나무 사이로 드리운 그림자 너머에 서 있는 구은정의 시선이 거실 한가운데 있는 임유진의 맑고 단단한 얼굴을 향해 닿았다.가슴이 뜨겁게 요동쳤다. 파도처럼 넘실대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요란하게 솟구쳤고, 온몸의 피까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구은태는 구은서를 한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유진이 말도 일리 있어.”은서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가 붉어졌다. 입술을 깨물고 억지로 웃음을 감췄다.“유진이가 오빠를 정말 잘 아는구나?”유진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말했다.“전 그런 상황을 겪어봤어요. 제 사장님도 예전에 같은 방식으로 배척당하고, 억울한 누명을 썼거든요. 입장 바꿔 생각하면, 아주 쉬운 일이에요.”구은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앞으로는 회사 일도 좀 더 꼼꼼히 살펴야겠구먼. 은정이한테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게 말이야.”유진은 환히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정말 가장 합리적이세요!”그 칭찬에 구은태는 기분이 좋아져 임시호를 향해 말했다.“당신 손녀 참 똑똑해. 말도 잘하고, 눈도 밝고. 앞으로 크게 될 아이야.”임시호는 눈가에 잔잔한
서선영은 애써 웃으며 두어 번 헛기침하듯 웃었다.“그건 조명순 아주머니야. 그분도 미안해했어. 원래 아주 세심한 분인데, 그날은 내가 문을 제대로 안 닫아서 생긴 일이라, 내 문제였지.”그러나 임유진은 바로 반박했다.“그 말씀을 드리려는 게 아니에요.”“제 말은요, 어떤 도우미는 실수로 주인의 귀한 물건을 망가뜨리고 나서, 혼날까 봐 책임을 고양이한테 떠넘기는 경우도 있다는 거예요.”“말도 못 하고 해명도 못 하는 고양이야말로, 가장 만만한 희생양이 되기 쉬우니까요.”서선영의 얼굴빛이 살짝 달라졌다.곧장 말을 받았다.“그 아주머니는 그런 사람 아니야.”“그런 사람인지 아닌지는 직접 물어보면 되겠죠?”임유진은 옆에서 차를 따르던 도우미에게 고개를 돌렸다.“조명순 아주머니 좀 모셔 와 주세요.”서선영은 반사적으로 구은태를 바라봤다. 이건 엄연히 집안일인데, 외부인인 임유진이 너무 앞장서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물론 속으로만 생각할 뿐,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임시호는 누구보다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이었기에, 그 역시 상황의 선을 아는 사람이었지만, 이번엔 나서지 않고 오히려 농담을 건넸다.“자네가 아까 손녀 칭찬하더니 말이야. 봐, 이젠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다 나서잖아. 자네가 칭찬했으니, 자네가 책임져야겠군.”구은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칭찬한 거 맞으니, 내가 감싸는 것도 당연하지. 오늘은 우리 집안일, 유진이한테 다 맡겨보지.”그러고는 도우미에게 지시했다.“유진 양이 하라는 대로 해요. 오늘은 다들 유진이 의견 따르도록 해요. 나도 궁금해졌어. 그 드레스, 정말 고양이가 망가뜨린 건지 아닌지.”“네.” 도우미는 머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서선영은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앉은 자세를 더 꼿꼿이 세우고는 유진을 향해 말했다.“그래요. 우리 유진이 기분 맞춰줘야죠.”표면상으론 다정한 말이었지만, 그 안엔 괜히 일을 크게 만든다는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구은태는 조용히 서선영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
임시호가 차를 마시며 조용히 앉아 있는 것 외엔, 구은태조차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다만 직접 꾸짖지는 않고, 타협을 구하는 말투였다.“집안일 가지고 경찰까지 부르는 건 좀 과한 거 아니겠니?”“맞아요, 소문나도 좋을 게 없잖아요!”서선영이 급히 덧붙였다. 그러나 임유진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귀엽게 웃었다.“할아버지, 여사님의 드레스 아주 비쌌겠죠? 그 정도면 고가 자산 손실 아닌가요? 어떻게 그게 작은 일이겠어요?”서선영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일도 꽤 지났고, 드레스도 그렇고 고양이 털도 다 버렸어. 설사 경찰을 부른다 해도, 뭘 조사할 수 있겠어.”“아니요, 조사할 수 있어요!”유진은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말했다.“집에 CCTV 정도는 있겠죠? 방 안에는 없다 해도, 복도에는 있을 거예요.”“경찰이 오면 그날 삼촌 고양이가 정말 방에 들어갔는지, 누가 고양이 방에 들어가 털을 가져간 적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만 해도 전부 밝혀지죠?”순간, 거실 안은 고요해졌고, 유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여사님이 옛정을 생각해서 경찰 부르기 싫으시면, 제가 대신 악역 할게요. 제가 직접 신고하죠.”말을 끝내자마자, 유진은 핸드폰을 꺼내 신고 전화를 걸려 했다.“사모님!”조명순 아주머니가 다급히 외쳤고, 서선영도 얼굴이 굳어졌다.“유진아!”유진은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여사님, 드레스 하나 때문에 삼촌은 집을 나가야 했어요. 도대체 도우미 한 명이 중요한가요, 아니면 삼촌이 더 중요한가요?”“정말 이해가 안 가요. 왜 여사님이랑 은서 이모는 항상 외부 사람만 감싸고, 정작 식구는 챙기지 않으세요?”“아니면, 애초에 삼촌을 식구라고 생각도 안 하시는 건가요?”유진의 말투는 한없이 순하지만, 하는 말 하나하나가 급소를 찔렀다. 이에 구은태는 눈빛이 어두워지며, 서선영을 차갑게 바라보았다.서선영은 몸을 움찔하며 손가락을 꽉 움켜쥐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유진이가 너무 과하게 말했네. 당연히 은정
“제가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회장님께도, 사모님께도 죄송해요!”조명순 아주머니는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울먹였다.“아들이 막 졸업했는데, 그동안 모은 돈 다 털어 집 사줬어요. 배상할 돈도 없고, 그래서 거짓말을 했어요.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임유진은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아주머니가 진짜 사과해야 할 대상은, 누명 씌워진 고양이랑, 그 고양이의 주인이죠.”조명순은 자책하듯 자기 뺨을 한 대 때렸다.“맞아요. 제가 도련님께 죄를 지었어요.”“애옹이한테도 미안해요. 제가 죄인이에요!”서선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나무랐다.“아주머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겨우 드레스 하나 때문에 그런 거짓말을 해요? 설마 진짜 배상받으라고 했을 줄 알아요?”“제가 어리석었어요!”조명순은 다시 한번 자기 뺨을 때렸다. 서선영은 곧장 구은태를 향해 말했다.“아주머니도 고의는 아니었잖아요.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는 거니까요.”유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여사님은 참 관대하시네요. 근데 삼촌의 고양이한텐 왜 그 관대함이 없으셨어요?”“이렇게 뚜렷한 차이를 두시니, 제가 삼촌이라도 이 집에 마음 붙이기 어려울 것 같네요.”그동안 서선영이 애써 유지해 오던 자상한 계모 이미지가 유진의 말 한마디에 철저히 무너졌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유진이 임씨 집안의 손녀라는 사실 때문에 감히 티도 못 내고 억지 미소를 지어야 했다.“유진 씨 말이 맞아요. 제가 그땐 너무 성급했어요. 진실을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은정을 오해했네요.”유진은 구은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보시다시피, 대부분의 일은 소문이나 왜곡, 혹은 누군가의 고의적인 조작에서 시작되는 거예요. 삼촌에 대한 외부의 이야기들도 그런 경우가 많지 않을까요?”은태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서선영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사실 확인도 안 하고 은정을 몰아붙이고, 은서까지 나서서 그러더니, 지금 생각해 보면 은정이 얼마나 억울했겠어
이제 저녁에 밥해줄 사람이 없어졌다.‘앞으로는 애옹이도 못 보는 걸까?’구은태는 전화를 두 번이나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아직 손님이 있는 상황이라, 그는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아마 바쁜가 보지. 저녁쯤 다시 걸어보지 뭐.”임시호는 자리를 지키고 앉아 단정한 표정으로 말했다.“가족 간의 정이 제일 중요하네. 조금의 일로 마음을 다치고, 사이가 멀어지면 안 되지.”구은태는 한층 더 미안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은정이한테 잘못했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유진이에게도 고맙다고 해야겠구나. 잘못한 사람은 응당 벌을 받았고, 누명을 쓴 고양이도 명예를 회복했으니.”유진은 깨끗하고 순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은 표현이 서툴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스스로 나서서 해명하는 성격이 아니에요.”“하지만 할아버지는 삼촌의 아버지이자 가장 가까운 분이잖아요. 가장 가까운 사람이 믿어주지 않으면,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요.”구은태는 그 말에 깊이 감동한 듯, 거듭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유진이 말이 맞아. 은정이가 돌아오면, 내가 꼭 사과하겠네.”유진은 환하게 웃었다.“역시 할아버지는 예전처럼 마음이 넓고 따뜻하세요.”한편, 구은서와 서선영은 눈을 마주쳤고, 둘 다 눈빛에 냉기가 돌았다. 특히 서선영은 수십 년을 곁에서 함께해 온 충직한 도우미를 잃은 탓에, 마치 몸의 한 부분을 도려낸 듯한 허전함과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게다가 구은태의 마음도 자신에게서 돌아선 게 느껴져,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 모든 손해가 가슴속에 꾹꾹 쌓이니, 그 울분만으로도 병이 날 것 같았다.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임시호와 구은태는 담소를 나누었고, 그 틈에 임유진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유진은 화면을 확인하고 눈이 약간 커졌다.[뒤뜰로 와. 너 알 만한 곳이야.]보낸 사람은 이웃 삼촌, 구은정이었다.‘집에 있는 거야?’유진은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할아버지, 저
구은정은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방금 돌아왔어.”은정은 미리 준비해 두라고 시켜둔 밀크티를 임유진 앞으로 밀어주며 말했다.“앉아.”햇빛 아래, 유진은 꽃처럼 웃고 있었다. 투명하게 맑은 피부는 닿기만 해도 부서질 듯 부드러웠다.“고마워요.”유진은 컵을 들어 빨대를 물고 한입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잔잔하게 웃었다.은정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는 목을 한 번 꺾은 뒤, 살짝 쉰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고마워, 애옹이 누명 벗겨줘서.”말은 그랬지만, 유진이 따지지 않고 무조건 자신의 편을 들어준 그 순간이 은정에게는 가장 큰 감동이었다.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약간 놀란 듯 말했다.“알고 있었어요?”“응.”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이에 유진은 조금 부끄러워진 듯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뭘요. 애옹이는 워낙 얌전하고 착하잖아요. 물건 망가뜨리는 애가 아닌데, 딱 보면 억울한 거 티 나죠.”은정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실 다들 알고 있어. 근데 그 진실을 끝까지 캐내는 건 꼭 아이 같은 사람이야.”유진은 눈을 굴리며 콧소리를 흘렸다.“지금 나더러 애 같단 말이에요?”은정은 그냥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진은 대꾸하지 않고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럼 회장님도 사실 애옹이가 억울한 거 알았다는 말이에요?”은정은 정원 깊숙한 곳을 바라보았다. 풀이 무성하고 나무들이 겹겹이 덮여 있었지만, 너무 빽빽하고 화려한 그 녹음은 오히려 본래의 생김새를 덮어버려 무질서하고, 중심이 사라진 듯했다.은정은 낮게 말했다.“애옹이가 억울한 건, 아버지한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진짜 갈등은 자기 아들이 자기 아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서선영과 구은서는 아들을 품지 못했고, 구은태는 그 사실을 바꿀 수 없었다.은정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이 아니라 애옹이가 드레스를 망가뜨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문제로
갑자기 옆쪽에서 발소리와 대화 소리가 들려오자, 임유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러서며, 등받이에 기대어 옆을 바라보았다.포도 넝쿨 사이로 몇 미터 떨어진 작은 길에, 임시호와 구은태가 걸어오고 있었다. 이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손에 들고 있던 밀크티 컵을 꼭 쥔 채, 유진은 묘한 긴장과 불안 속에 휩싸였다.방금 구은정이 자신에게 했던 약간 선을 넘은 행동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혹시라도 임시호와 구은태가 둘이 있는 모습을 보면 어찌 반응할까 생각이 복잡해졌다.‘그냥 이야기하고 있었을 뿐이야. 들켜도 상관없어.’그렇게 자신을 다독였지만, 여전히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그녀와 달리, 정작 은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차분했다.방금 유진에게 했던 다소 대담한 행동에 대해서도 전혀 해명하려는 기색이 없었다.다행히 임시호와 구은태는 중간에서 방향을 틀어, 다른 길로 들어섰고, 두 사람의 발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그제야 유진은 모르게 들이쉰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걱정하지 마.”은정이 저음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혹시라도 들켰으면, 내가 네 할아버지한테 내가 너 불러냈다고 말할 거야.”유진은 고개를 들어 물었다.“그러면 왜 절 부른 거예요?”은정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알고 지내는 친구니까. 그냥 이야기 좀 하고 싶었어. 그게 꼭 이유가 필요해?”유진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되물었다.“친구요?”“아니면?”은정은 유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생각하기에 우리 사이가 뭐야?”유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맞아요. 우리 친구죠.”그러면서도 방금 자신이 했던 온갖 상상과 괜한 긴장에 스스로 부끄러워졌다. 친구든 어른이든, 그냥 챙겨준 걸 괜히 혼자 의미 부여했나 싶었다.‘삼촌이 굳이 친구라는 말을 꺼낸 것도, 내가 괜히 오해하지 말라는 뜻이겠지.’은정의 한마디에 긴장이 풀리자, 은정이 무슨 표정일지는 몰라도 유진 스스로는 조금 민망하고 안심이 되었다.“아까 구은태 할아
유진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일요일 저녁이요.”구은정의 선명한 이목구비 위로, 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일 저녁, 맛있는 거 해줄게.”유진은 밝은 미소로 대답했다.“좋아요!”그리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럼 갈게요!”“응.”은정이 낮게 대답하고, 유진은 천천히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바람은 살랑살랑 불고, 한낮의 햇살은 따뜻했다. 공기에는 포도 향기가 은은히 퍼져 있었고, 유진은 알 수 없는 어떤 변화가 생겼음을 어렴풋이 느꼈다.그저 친구 사이가 조금 더 가까워졌을 뿐. 애매함도 없고, 다정함도 넘치지 않는 그런 변화 말이다.거실로 돌아오니, 구은서는 매니저와 통화 중이었다. 유진은 임시호가 보이지 않자 응접실로 가려고 몸을 돌렸다.“유진아!”은서가 유진을 부르자, 유진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이모, 무슨 일이세요?”구은서 언니에서 은서 이모로, 호칭이 바뀔 때마다 둘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은서는 방금 전까지의 실망과 초조함을 감춘 채 다시 온화하고 점잖은 말투로 물었다.“전화 통화가 꽤 길었네?”유진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은정 삼촌을 만나서 잠깐 이야기 나눴어요.”유진의 태도는 떳떳했고, 은서는 딱히 흠잡을 수 없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그랬구나. 오빠가 돌아왔구나.”그러더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우리 오해했던 거네. 은정 오빠의 고양이 때문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았네. 조금 있다가 오빠한테 직접 사과해야겠어.”남매간의 문제는 가족 문제였기에, 유진은 별말 없이 조용히 있었다.“요즘도 은정 오빠 샤부샤부 가게 자주 가?”은서가 묻자, 유진은 잠시 놀라며 되물었다.“네?”유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시호와 구은태가 함께 밖에서 들어왔다. 임시호가 손짓하며 말했다.“유진아, 가자.”유진은 곧장 그쪽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네, 할아버지.”은서는 더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회장님, 저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