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호가 차를 마시며 조용히 앉아 있는 것 외엔, 구은태조차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다만 직접 꾸짖지는 않고, 타협을 구하는 말투였다.“집안일 가지고 경찰까지 부르는 건 좀 과한 거 아니겠니?”“맞아요, 소문나도 좋을 게 없잖아요!”서선영이 급히 덧붙였다. 그러나 임유진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귀엽게 웃었다.“할아버지, 여사님의 드레스 아주 비쌌겠죠? 그 정도면 고가 자산 손실 아닌가요? 어떻게 그게 작은 일이겠어요?”서선영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일도 꽤 지났고, 드레스도 그렇고 고양이 털도 다 버렸어. 설사 경찰을 부른다 해도, 뭘 조사할 수 있겠어.”“아니요, 조사할 수 있어요!”유진은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말했다.“집에 CCTV 정도는 있겠죠? 방 안에는 없다 해도, 복도에는 있을 거예요.”“경찰이 오면 그날 삼촌 고양이가 정말 방에 들어갔는지, 누가 고양이 방에 들어가 털을 가져간 적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만 해도 전부 밝혀지죠?”순간, 거실 안은 고요해졌고, 유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여사님이 옛정을 생각해서 경찰 부르기 싫으시면, 제가 대신 악역 할게요. 제가 직접 신고하죠.”말을 끝내자마자, 유진은 핸드폰을 꺼내 신고 전화를 걸려 했다.“사모님!”조명순 아주머니가 다급히 외쳤고, 서선영도 얼굴이 굳어졌다.“유진아!”유진은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여사님, 드레스 하나 때문에 삼촌은 집을 나가야 했어요. 도대체 도우미 한 명이 중요한가요, 아니면 삼촌이 더 중요한가요?”“정말 이해가 안 가요. 왜 여사님이랑 은서 이모는 항상 외부 사람만 감싸고, 정작 식구는 챙기지 않으세요?”“아니면, 애초에 삼촌을 식구라고 생각도 안 하시는 건가요?”유진의 말투는 한없이 순하지만, 하는 말 하나하나가 급소를 찔렀다. 이에 구은태는 눈빛이 어두워지며, 서선영을 차갑게 바라보았다.서선영은 몸을 움찔하며 손가락을 꽉 움켜쥐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유진이가 너무 과하게 말했네. 당연히 은정
“제가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회장님께도, 사모님께도 죄송해요!”조명순 아주머니는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울먹였다.“아들이 막 졸업했는데, 그동안 모은 돈 다 털어 집 사줬어요. 배상할 돈도 없고, 그래서 거짓말을 했어요.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임유진은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아주머니가 진짜 사과해야 할 대상은, 누명 씌워진 고양이랑, 그 고양이의 주인이죠.”조명순은 자책하듯 자기 뺨을 한 대 때렸다.“맞아요. 제가 도련님께 죄를 지었어요.”“애옹이한테도 미안해요. 제가 죄인이에요!”서선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나무랐다.“아주머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겨우 드레스 하나 때문에 그런 거짓말을 해요? 설마 진짜 배상받으라고 했을 줄 알아요?”“제가 어리석었어요!”조명순은 다시 한번 자기 뺨을 때렸다. 서선영은 곧장 구은태를 향해 말했다.“아주머니도 고의는 아니었잖아요.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는 거니까요.”유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여사님은 참 관대하시네요. 근데 삼촌의 고양이한텐 왜 그 관대함이 없으셨어요?”“이렇게 뚜렷한 차이를 두시니, 제가 삼촌이라도 이 집에 마음 붙이기 어려울 것 같네요.”그동안 서선영이 애써 유지해 오던 자상한 계모 이미지가 유진의 말 한마디에 철저히 무너졌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유진이 임씨 집안의 손녀라는 사실 때문에 감히 티도 못 내고 억지 미소를 지어야 했다.“유진 씨 말이 맞아요. 제가 그땐 너무 성급했어요. 진실을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은정을 오해했네요.”유진은 구은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보시다시피, 대부분의 일은 소문이나 왜곡, 혹은 누군가의 고의적인 조작에서 시작되는 거예요. 삼촌에 대한 외부의 이야기들도 그런 경우가 많지 않을까요?”은태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서선영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사실 확인도 안 하고 은정을 몰아붙이고, 은서까지 나서서 그러더니, 지금 생각해 보면 은정이 얼마나 억울했겠어
이제 저녁에 밥해줄 사람이 없어졌다.‘앞으로는 애옹이도 못 보는 걸까?’구은태는 전화를 두 번이나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아직 손님이 있는 상황이라, 그는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아마 바쁜가 보지. 저녁쯤 다시 걸어보지 뭐.”임시호는 자리를 지키고 앉아 단정한 표정으로 말했다.“가족 간의 정이 제일 중요하네. 조금의 일로 마음을 다치고, 사이가 멀어지면 안 되지.”구은태는 한층 더 미안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은정이한테 잘못했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유진이에게도 고맙다고 해야겠구나. 잘못한 사람은 응당 벌을 받았고, 누명을 쓴 고양이도 명예를 회복했으니.”유진은 깨끗하고 순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은 표현이 서툴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스스로 나서서 해명하는 성격이 아니에요.”“하지만 할아버지는 삼촌의 아버지이자 가장 가까운 분이잖아요. 가장 가까운 사람이 믿어주지 않으면,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요.”구은태는 그 말에 깊이 감동한 듯, 거듭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유진이 말이 맞아. 은정이가 돌아오면, 내가 꼭 사과하겠네.”유진은 환하게 웃었다.“역시 할아버지는 예전처럼 마음이 넓고 따뜻하세요.”한편, 구은서와 서선영은 눈을 마주쳤고, 둘 다 눈빛에 냉기가 돌았다. 특히 서선영은 수십 년을 곁에서 함께해 온 충직한 도우미를 잃은 탓에, 마치 몸의 한 부분을 도려낸 듯한 허전함과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게다가 구은태의 마음도 자신에게서 돌아선 게 느껴져,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 모든 손해가 가슴속에 꾹꾹 쌓이니, 그 울분만으로도 병이 날 것 같았다.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임시호와 구은태는 담소를 나누었고, 그 틈에 임유진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유진은 화면을 확인하고 눈이 약간 커졌다.[뒤뜰로 와. 너 알 만한 곳이야.]보낸 사람은 이웃 삼촌, 구은정이었다.‘집에 있는 거야?’유진은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할아버지, 저
구은정은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방금 돌아왔어.”은정은 미리 준비해 두라고 시켜둔 밀크티를 임유진 앞으로 밀어주며 말했다.“앉아.”햇빛 아래, 유진은 꽃처럼 웃고 있었다. 투명하게 맑은 피부는 닿기만 해도 부서질 듯 부드러웠다.“고마워요.”유진은 컵을 들어 빨대를 물고 한입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잔잔하게 웃었다.은정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는 목을 한 번 꺾은 뒤, 살짝 쉰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고마워, 애옹이 누명 벗겨줘서.”말은 그랬지만, 유진이 따지지 않고 무조건 자신의 편을 들어준 그 순간이 은정에게는 가장 큰 감동이었다.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약간 놀란 듯 말했다.“알고 있었어요?”“응.”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이에 유진은 조금 부끄러워진 듯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뭘요. 애옹이는 워낙 얌전하고 착하잖아요. 물건 망가뜨리는 애가 아닌데, 딱 보면 억울한 거 티 나죠.”은정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실 다들 알고 있어. 근데 그 진실을 끝까지 캐내는 건 꼭 아이 같은 사람이야.”유진은 눈을 굴리며 콧소리를 흘렸다.“지금 나더러 애 같단 말이에요?”은정은 그냥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진은 대꾸하지 않고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럼 회장님도 사실 애옹이가 억울한 거 알았다는 말이에요?”은정은 정원 깊숙한 곳을 바라보았다. 풀이 무성하고 나무들이 겹겹이 덮여 있었지만, 너무 빽빽하고 화려한 그 녹음은 오히려 본래의 생김새를 덮어버려 무질서하고, 중심이 사라진 듯했다.은정은 낮게 말했다.“애옹이가 억울한 건, 아버지한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진짜 갈등은 자기 아들이 자기 아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서선영과 구은서는 아들을 품지 못했고, 구은태는 그 사실을 바꿀 수 없었다.은정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이 아니라 애옹이가 드레스를 망가뜨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문제로
갑자기 옆쪽에서 발소리와 대화 소리가 들려오자, 임유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러서며, 등받이에 기대어 옆을 바라보았다.포도 넝쿨 사이로 몇 미터 떨어진 작은 길에, 임시호와 구은태가 걸어오고 있었다. 이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손에 들고 있던 밀크티 컵을 꼭 쥔 채, 유진은 묘한 긴장과 불안 속에 휩싸였다.방금 구은정이 자신에게 했던 약간 선을 넘은 행동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혹시라도 임시호와 구은태가 둘이 있는 모습을 보면 어찌 반응할까 생각이 복잡해졌다.‘그냥 이야기하고 있었을 뿐이야. 들켜도 상관없어.’그렇게 자신을 다독였지만, 여전히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그녀와 달리, 정작 은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차분했다.방금 유진에게 했던 다소 대담한 행동에 대해서도 전혀 해명하려는 기색이 없었다.다행히 임시호와 구은태는 중간에서 방향을 틀어, 다른 길로 들어섰고, 두 사람의 발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그제야 유진은 모르게 들이쉰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걱정하지 마.”은정이 저음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혹시라도 들켰으면, 내가 네 할아버지한테 내가 너 불러냈다고 말할 거야.”유진은 고개를 들어 물었다.“그러면 왜 절 부른 거예요?”은정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알고 지내는 친구니까. 그냥 이야기 좀 하고 싶었어. 그게 꼭 이유가 필요해?”유진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되물었다.“친구요?”“아니면?”은정은 유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생각하기에 우리 사이가 뭐야?”유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맞아요. 우리 친구죠.”그러면서도 방금 자신이 했던 온갖 상상과 괜한 긴장에 스스로 부끄러워졌다. 친구든 어른이든, 그냥 챙겨준 걸 괜히 혼자 의미 부여했나 싶었다.‘삼촌이 굳이 친구라는 말을 꺼낸 것도, 내가 괜히 오해하지 말라는 뜻이겠지.’은정의 한마디에 긴장이 풀리자, 은정이 무슨 표정일지는 몰라도 유진 스스로는 조금 민망하고 안심이 되었다.“아까 구은태 할아
유진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일요일 저녁이요.”구은정의 선명한 이목구비 위로, 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일 저녁, 맛있는 거 해줄게.”유진은 밝은 미소로 대답했다.“좋아요!”그리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럼 갈게요!”“응.”은정이 낮게 대답하고, 유진은 천천히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바람은 살랑살랑 불고, 한낮의 햇살은 따뜻했다. 공기에는 포도 향기가 은은히 퍼져 있었고, 유진은 알 수 없는 어떤 변화가 생겼음을 어렴풋이 느꼈다.그저 친구 사이가 조금 더 가까워졌을 뿐. 애매함도 없고, 다정함도 넘치지 않는 그런 변화 말이다.거실로 돌아오니, 구은서는 매니저와 통화 중이었다. 유진은 임시호가 보이지 않자 응접실로 가려고 몸을 돌렸다.“유진아!”은서가 유진을 부르자, 유진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이모, 무슨 일이세요?”구은서 언니에서 은서 이모로, 호칭이 바뀔 때마다 둘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은서는 방금 전까지의 실망과 초조함을 감춘 채 다시 온화하고 점잖은 말투로 물었다.“전화 통화가 꽤 길었네?”유진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은정 삼촌을 만나서 잠깐 이야기 나눴어요.”유진의 태도는 떳떳했고, 은서는 딱히 흠잡을 수 없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그랬구나. 오빠가 돌아왔구나.”그러더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우리 오해했던 거네. 은정 오빠의 고양이 때문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았네. 조금 있다가 오빠한테 직접 사과해야겠어.”남매간의 문제는 가족 문제였기에, 유진은 별말 없이 조용히 있었다.“요즘도 은정 오빠 샤부샤부 가게 자주 가?”은서가 묻자, 유진은 잠시 놀라며 되물었다.“네?”유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시호와 구은태가 함께 밖에서 들어왔다. 임시호가 손짓하며 말했다.“유진아, 가자.”유진은 곧장 그쪽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네, 할아버지.”은서는 더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회장님, 저
은정은 비웃음을 머금은 채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일요일.점심을 먹은 뒤, 임유민은 임유진의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응답이 들리자 그제야 문을 열고 들어갔다.“오후에 친구들이랑 축구하기로 했는데, 누나도 같이 갈래?”유진은 소파에 웅크린 채 드라마를 보며 과자를 집어 먹고 있었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 나 축구 못 하잖아.”아직 무리한 운동은 금지된 상황이었기에, 따라간다 해도 그냥 앉아만 있어야 했다. 이에 유민이 말했다.“야외 구장이야. 공기도 좋고, 누나가 집에서 이런 유치한 드라마 보는 것보단 낫잖아.”유진은 여전히 가고 싶지 않았다.“그 뜨거운 햇볕 아래서 너 축구하는 거 구경이나 하라고? 나 그렇게 한가하지 않거든. 그리고 나 좀 있다가 이경 아파트로 돌아갈 거야.”유민은 의외라는 듯 물었다.“오후에 바로 간다고? 내일 출근 아닌가?”유진은 태연하게 답했다.“집에서 자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 이경 아파트에 있으면 아침에 한 시간 더 잘 수 있지.”유민은 축구공을 품에 안은 채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한 시간 일찍 일어나는 게 그렇게 고통스러워?”유진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살짝 자랑했다.“네가 아침 8시에 일어나는 게 익숙해지면, 7시에 일어나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알게 될 거야.”유민은 유진의 뻔한 자랑에 비웃음을 흘렸다.“갈게!”유진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다음 주에 보자. 나 너무 보고 싶어 하지 말고!”유민은 뒤통수로 누나에게 자신의 무관심을 표현하며 떠났다. 한 시간쯤 지나, 노하숙 아주머니가 캐리어를 끌고 왔다.“아가씨, 다음 주에 기온이 조금 떨어진대서 옷은 제가 미리 챙겨뒀어요.”유진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아주머니.”노하숙은 공손히 말했다.“별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노정순 역시 평소처럼 주방에 부탁해 거의 일주일 치 반찬을 준비해 주었고, 유진은 요리사에게 부탁해 치즈를 조금 더 챙겨
유진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눈동자는 허공을 헤매고, 목소리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어, 집에 있으셨네요?”“어제 도착했어.”구은정은 그렇게 말하며 원래는 옷을 갈아입으러 침실로 돌아가려 했지만, 소녀를 바라보는 순간 잠시 걸음을 멈췄다.유진은 낮게 묶은 포니테일에, 하얀 셔츠 위로 연한 하늘색 스트라이프 숄을 걸치고 있었다. 드러난 목선은 마치 백조처럼 우아하고, 전체적으로 맑고 청초한 인상을 풍겼다.그 순간, 유진의 새하얀 귓불이 은은하게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보다도 더 눈부시게 빛나, 보는 이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그 빛은 그대로 구은정의 어두운 눈동자 속까지 파고들어, 깊은 물결을 일으켰다. 은정은 조용히 걸음을 옮겨 테이블 위의 담배를 집으려 몸을 숙였다.단 몇 발자국 거리. 은정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유진의 몸이 뻣뻣하게 긴장한 채, 눈은 애옹이를 향하고 있었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은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임유진.”“네?”유진은 화들짝 고개를 들었고, 목소리가 팽팽하게 조여 있었다. 은정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은 집중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은정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목소리는 허스키하면서도 낮고 부드러웠다.“더워?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은정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유진은 그가 놀리는 줄 알았을 것이다.유진은 아래를 보지 않으려 애써 그의 눈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방금 밖에서 들어와서 조금 덥긴 해요.”“그럼 온도 조금 낮출게.”“네, 좋아요!”은정은 에어컨 리모컨을 들어 온도를 낮추고는 다시 물었다.“저녁엔 뭐 먹고 싶어?”은정이 바로 눈앞에 서 있자, 은은한 샤워 향과 함께 담배 향이 어우러져 이상하게도 숨이 막힐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기조차 묘하게 묵직했다.유진은 시선을 내리고, 침착하게 목소리를 조절하며 말했다.“아까 맛있는 거 해준다더니, 준비 안 했어요?”“
임씨 저택에 도착한 유진은 동생 유민에게 사온 피규어를 건넸다. 유민은 책상 앞에 앉아 숙제하던 중이었고, 피규어를 받아 디테일을 살펴보다가 맑게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유진은 유민의 책상 위에 놓인 갓 채점된 시험지를 보고 다가가서 들춰보았다.“요즘 성적은 어때?”“별로 안 늘었어.”유민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유진이 본 것은 수학 시험지였다. 만점에 추가 점수 10점까지 있는 문제였고, 그 10점은 마지막의 경시 문제였다.확실히, 지난번에도 만점이었고 이번에도 만점이었다. 성적이 늘었다고 보긴 어려웠다.유진은 시험지를 보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구은정에게 마지막으로 수업해준 날, 자신이 농담 삼아 이렇게 말했었다.“이렇게 오래 가르쳤으면 시험 한 번 봐야 하지 않을까?”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넘겼지만, 그게 두 사람의 마지막 수업이 될 줄은 몰랐다.유민은 유진이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시험지에 거울이라도 있어?”유진은 시험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너 공부 열심히 해. 소희 곧 돌아올 거야. 나 거실에서 기다릴게.”유민은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도 오늘 점심쯤 도착하신대.”유진도 알고 있었다. 어제 우정숙에게서 직접 전화가 왔으니까. 우정숙과 임지언은 2주간의 출장 후 집으로 돌아왔고, 소희와 임구택도 함께 돌아왔다.저녁엔 온 가족이 함께 외식하러 나갔다. 장소는 명우가 예약한 호텔. 분위기 있고 조용한 환경이 가족 모임에 안성맞춤이었다.약 30평 정도 되는 룸은 휴게 공간과 식사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고, 모든 시설이 구비되어 고급스럽고 편안했다.넓고 높게 트인 유리창 너머로는 형형색색의 야경이 펼쳐졌고, 유리문을 열고 나가면 룸에 딸린 정원이 이어졌다.정원에는 해당화 향기가 은은히 퍼지고 있었고, 작은 물줄기가 구불구불 흐르며 부드러운 밤바람과 어우러져, 흔들의자에 앉아 야경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우정숙은 정원의 라탄 의자에 앉아 소희와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유진과
은정은 조금도 기죽지 않았고, 오히려 거침없고 대담하게 말했다.“좋지. 오히려 잘됐네. 모두가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게 되고, 나도 당당하게 너 쫓아다닐 수 있잖아.”유진은 눈앞의 이 남자가 예전에 알던 은정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아는 구은정은 차갑고 도도하며, 세상에 무관심한 듯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남자는, 얼굴에 철판을 깐 수준이었다.유진은 은정을 노려보며 마치 화난 아기 표범처럼 들끓었지만, 상대는 덩치 큰 맹수 같았다. 결국 아무것도 못 하고 집으로 도망치듯 돌아왔다. 문을 세게 닫고 들어오자마자, 유진은 소파에 주저앉아 씩씩댔다.다른 여자들은 다들 손에 받들어지며 사랑을 받는다는데, 왜 자신만 이렇게 불에 던져진 기분인 건지. 폭죽처럼 터질 듯한 감정에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저게 어떻게 사랑 고백이야.’상황만 바뀌면 스토커 취급을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절대 안 받아줄 거야. 죽어도 안 돼.’유진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천천히 내쉬며 마음속의 답답함을 함께 토해냈다.다음 날 아침, 유진은 짐을 챙겨 임씨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마침 은정이 나가려다 맞닥뜨렸다. 유진은 은정을 못 본 척하고, 곧장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그리고 은정은 조용히 그녀를 따라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주말이라 조용했고, 둘 사이에는 캐리어 하나가 놓인 채 나란히 섰다.은정이 유진의 캐리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언제 돌아올 거야?”유진은 뾰로통한 얼굴로 대꾸했다.“안 돌아올 건데요?”은정은 유진의 불만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오늘 집에 가서 할아버지한테 나가지 말라고 전해. 곧 우리 아버지가 직접 찾아뵐 거니까.”“왜요?” 유진이 되묻자, 은정의 눈빛이 깊어졌다.“내 아버지가 직접 찾아가서 말씀드릴 거야. 아들이 유진이랑 결혼하고 싶어 한다고.”유진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이를 악물었다.“그럴 용기 있어요?”유진은 전날 구은태한테 찾아간다는 말로 은정을 겁주려 했
모임은 밤 11시가 돼서야 끝났다. 진구는 술을 꽤 많이 마셨지만, 은정이 집에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끝내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방연하는 그의 팔을 붙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왜 이렇게 질질 끄는 거예요? 다들 졸려 죽겠는데 선배를 기다려야 해요?”진구는 싸늘한 눈으로 연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손 놓지?”“싫은데요?”연하는 완강하게 진구의 손목을 움켜잡고, 유진을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우리 갈게. 잘 자!”그러곤 진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현관 밖으로 나갔다. 이에 진구는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방연하, 남녀 간에는 선이 있어야 하는 거야. 제발 손 좀 놓지?”그러자 연하는 비웃듯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선배, 혹시 조선시대에서 오신 거예요? 내가 좀 만졌다, 어쩌라고요. 혹시 내가 결혼이라도 해줘야 해요?”진구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이를 악물었다. 추연설은 연하의 농담에 배를 잡고 웃다가, 장효성에게 말했다.“유진이 말고는, 연하 씨밖에 없죠. 우리 사장님한테 이렇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사람은.”효성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연하가 진구의 손목을 꽉 잡고 있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엔 알 수 없는 어두운 기색이 스쳤다.곧 몇 사람이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떠났고, 은정도 유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는 잠시 머뭇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애옹이 보러 갈래? 애옹이가 엄청나게 그리워하더라고.”유진은 처음엔 거절하려 했지만, 애옹이가 보고 싶은 마음을 도무지 억누를 수 없었다. 한 번만 보고 돌아오자고 자신에게 다짐했다.옆집으로 돌아가자, 이미 잠들어 있던 애옹이는 인기척에 눈을 뜨더니, 유진을 보자마자 졸음을 잊은 듯 반갑게 달려왔다.유진은 허리를 숙여 애옹이를 안아 들었다. 눈웃음을 지으며 안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밝게 빛났다.은정은 유진의 품에서 애옹이가 마음껏 놀며, 그녀의 턱과 목덜미를 핥는 모습을 보며 눈빛이 깊어졌다. 모든 게 그의 것이었다.“애옹이랑 잠깐 놀아줘. 내가 꿀물 좀
도무지 소화가 안되고, 위가 아파왔다.‘예전엔 왜 저 방연하가 이렇게까지 불쾌한지 몰랐던 걸까.’장효성이 끼어들어 말을 꺼내자,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여진구는 아예 몸을 틀어 효성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효성은 평소보다 한결 밝은 모습이었다.사람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직장 이야기나 최근의 시사 뉴스 등을 주제로 담소를 나눴고, 식사도 비교적 편안하고 유쾌하게 마무리되었다.식사 도중, 구은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연하는 화장실에서 나와 베란다에 있는 그를 발견하곤,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은정이 담배를 끄려는 걸 보고, 연하가 서둘러 말했다.“괜찮아요, 저도 담배 피우거든요. 이 냄새 싫어하지 않아요.”은정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어려 보이는데, 담배도 피우는구나?”연하는 두 손으로 난간을 짚고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직장 생활하고 나니까 스트레스도 많고, 담배 피우면 좀 풀리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그렇게 심하게 의존하는 건 아니에요.”은정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더 이상 그 주제로는 이어가지 않았다.연하는 솔직한 표정으로 말했다.“오해하지 마세요. 이제 저는 구은정 씨한테 아무 감정 없어요. 예전엔 유진이랑 무슨 일이 있는지 몰랐거든요. 그래서 좀 미안했어요.”은정은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괜찮아요.”연하가 기억을 떠올리듯 말했다.“사실 예전부터 유진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근데 잘 안됐다고만 하고, 끝까지 누구인지 말해주질 않더라고요.”“그래도 전 알아챘어요. 얼마나 좋아했는지. 가끔 이야기할 때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거든요. 저희는 너무 어렵게 느껴지면 그만두라고도 했었어요.”“유진이는 정말 괜찮은 사람인데, 그 남자가 보는 눈이 없다고...”“미안해요. 그냥 농담한 거예요.” 연하가 웃으며 덧붙이자, 은정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에요. 그땐 제가 보는 눈이 없었죠.”“그러면
그쪽에서 구은정의 짧은 침묵이 흘렀고, 두어 초 뒤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바로 갈게요.]방연하는 기쁜 듯 환하게 말했다.“네, 기다릴게요!”전화를 끊은 연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는 일부러 여진구의 굳어진 표정을 외면한 채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온대. 집에 있었나 봐.”유진은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 문득 긴장된 기분이 밀려왔다. 막상 다시 마주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스쳤다. 역시 어떤 일은 한 번 벌어지고 나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몇 분 뒤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연하가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네가 나가 봐.”유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일어나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일주일 가까이 지나 있었지만, 마주하는 순간 그보다 더 긴 시간이 흘렀던 것만 같았다. 시선이 부딪치는 찰나, 유진은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은정은 막 퇴근한 듯 흰 셔츠에 짙은 색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특유의 차가움은 여전했지만, 어딘가 더 단정하고 안정된 느낌이 감돌았다. 깊은 눈동자엔 이전보다도 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은정은 한 손에 와인 한 병을 들고 있었고, 살짝 웃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들어가도 될까?”유진은 얼굴이 붉어지며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물론이죠.”연하가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어서 오세요!”은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한 말투로 답했다.“안녕하세요.”모두 함께 식탁 쪽으로 이동했다. 70평 남짓한 넓은 집답게 주방은 크고 여유로웠고, 열 명이 넘는 인원이 모이기에도 충분했다.연하는 효성과 추연설에게 은정을 소개했다. 진구는 모르는 척 무시했고, 연하는 일부러 유진과 은정이 나란히 앉게 자리를 배치했다. 진구는 그 의도를 모를 리 없었고, 냉소를 흘렸다.“은정 씨가 가져온 술, 가격이 장난 아니네요. 오늘 유진이 덕분에 억대짜리 술 맛보게 되네요.”연하는 웃으며 주방으로 가서 와인병을 땄다.
유진은 순간 당황한 듯 쇼핑백을 내밀었다.“애옹이 간식이에요. 아주머니께서 대신 좀 먹여주세요.”이성화는 봉투를 받아들며, 유진이 애옹이를 정말 아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조심스레 말했다.“안으로 들어와서 잠깐 쉬었다 가요.”“괜찮아요.”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그때 방 안에서 애옹이가 유진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 나왔다. 두 발로 유진의 다리에 매달리듯 안기며 꼬리를 흔들었다.유진은 코끝이 시큰해졌지만, 그저 허리를 숙여 애옹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을 뿐, 안아 들지는 않았다.“착하지.”그렇게 한마디를 남긴 뒤, 애옹이를 살며시 떼어내고는 이성화 아주머니에게 공손히 미소 지으며 인사하고 돌아섰다.야옹. 애옹이는 이해하지 못한 채 유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마치 왜 떠나는지 알 수 없다는 듯, 작고 슬픈 눈으로.눈 깜짝할 사이에 금요일이 되었다. 이날 저녁, 여진구와 방연하, 장효성 등이 유진의 집에서 모임을 갖기로 했다.가장 먼저 도착한 연하와 효성은 포장해 온 해산물 무침, 매콤한 새우 요리 등 다양한 안주를 식탁 위에 정성스레 올려놓았다.막 세팅을 끝내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내가 열게!”효성이 재빠르게 일어나 문을 열었고, 문이 열리자 그녀가 환하게 인사했다.“선배!”진구는 유진의 직장 동료인 추연설과 함께 들어왔다. 두 사람은 다양한 술과 음료를 들고 있었다. 진구는 고개를 돌려 거실 쪽을 둘러봤다.“유진이는?”“전화 중이에요!”효성이 진구에게 슬리퍼를 건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퇴근했는데도 또 일하고 있어요. 유진이 워커홀릭 되는 거 아니에요? 선배 유진이를 너무 혹사시키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거면 나 가만 안 있을 거예요!”그 말에 연하가 주방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며 현관 쪽을 흘끗 보고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유진이를 괴롭히다니.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퇴근 후에도 일 시키는 사람, 나라도 혼내줄 거야!”진구가 농담처럼 말하며 거실로 향했다. 그러다 마주친 건 방연하였다.지난
은정은 천천히 일어나 말했다.“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이웃이니까,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임유진은 목이 잠긴 듯한 느낌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말투는 여전히 공손하고 거리감이 있었다.“고마워요.”은정은 말없이 발걸음을 돌려 떠났다. 그가 떠난 뒤, 방 안은 여전히 대낮처럼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지만, 유진의 마음은 어둠 속에 남겨진 듯 무거웠다. 오히려 깊은 허탈감과 상실감만 더 짙어졌다.유진은 괜스레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다.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고백해서 모든 걸 이렇게 만들어 버린 걸까?’결국 애옹이도 다시는 못 보게 됐고, 저녁 식사도 같이할 수 없게 됐다.유진은 풀이 죽은 듯 한숨을 쉬며 두 다리를 모아 껴안고 턱을 손에 괴었다. 창밖에서 쉬지 않고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유진의 마음속에도 차가운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다.한편, 은정은 집으로 돌아와 소파 위에서 눈을 비비며 일어난 애옹이를 바라봤다. 잠에서 깬 고양이는 멍한 눈으로 은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은정의 가슴은 바늘로 찌르듯 아려왔다.어쩌면 오늘은 고백할 타이밍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참지 못하고 감정을 터뜨린 건 결국 그 자신이었다.“좋아해요.”“오늘부터 정식으로 좋아한다고 말할게요. 사장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요. 단지, 날 거절하지만 않으면 돼요.”“사장님, 이번 생엔 사장님만 바라볼래요.”아직 자신의 귓가에는 생생히 울리는 유진의 고백이 남아 있었는데, 그 말을 했던 유진은 어디로 간 걸까?유진이 좋아한 건 서인이었고, 지금 그는 구은정이었다. 그렇다면 은정은 다시 서인으로 돌아가 유진을 기다려야 할까?이름을 바꾸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그녀를 향해 있었다. 묵직하고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이 가슴을 짓눌렀다. 은정은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마음은 여전히 그 어두운 밤에 머물러 있었다.며칠이 흘렀지만, 유진은 정말 다시는 은정을 마주치지 못했다. 예전엔 출퇴근길에 가끔 엘리베이
유진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래도 안 돼요.”은정은 마치 인생의 업보라도 돌아온 듯 가슴이 시리게 아팠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흔들림 없이 유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만약 나이니 집안이니 다 빼고 생각하면, 날 좋아하긴 하는 거야?”“아니요.”유진은 거의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답하자, 은정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그는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정말 싫어?”유진이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순간 은정은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고, 은정의 눈빛에는 슬픔이 가득 차올랐다. 그러나 체념할 수 없는 듯 다시 한번 물었다.“조금도 좋아한 적 없어?”유진은 그를 더 상처 입힐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침묵은 때론 더 잔인한 답이 되기도 한다.은정은 검은 눈동자를 내리깔았고, 그 큰 체구는 어둠 속에 외로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결국 유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이제 갈게요.”그리고 은정은 유진을 붙잡지 않았다.유진은 은정의 옆을 천천히 지나갔지만 끝내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곧 그녀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공기 중에는 유진의 향기만 희미하게 남았다.집에 돌아온 유진은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듯 현관문에 기대어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방 안은 짙은 어둠뿐이었다. 창밖에서 흘러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이 오히려 집안의 텅 빈 공허함을 더 깊게 만들었다. 유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발코니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이 조금 더 밝아서였다.넓은 발코니에 서자, 멀리서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자 등 뒤의 어둠이 조금 덜 무섭게 느껴졌다.유진은 은정이 했던 말을 떠올렸고,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다가오는 발소리, 그리고 유진의 뒤에 멈춰 선 은정의 기척이 느껴졌다.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잠시 후, 은정은 유진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와 마찬가지로
임유진은 애옹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간단히 국수를 끓였는데, 닭고기를 넣은 건 애옹이를 위한 것이었다. 바깥의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유진은 소파에 웅크려 애옹이를 안고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지만, 오늘은 마음이 산만했다. 아무리 흥미로운 줄거리도 유진의 주의를 끌지 못했고, 자꾸만 밖을 바라보게 되었다.‘이렇게 비가 심하게 내리고 어두운데, 운전하는 게 위험하지 않을까?’그때 휴대폰에서 뉴스 알림이 울렸다. [폭우로 인해 시야 확보가 어려워 어떤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발생.]이에 유진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은정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운전 중인 그를 방해할까 걱정됐다.10시가 넘자 유진은 아예 은정의 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드라마 한 회가 끝나자 임유진은 깊이 잠든 애옹이를 고양이 침대에 눕혔다. 막 일어나서 물을 가지러 가려는데,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온 집안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밖에선 천둥 번개가 치며 번쩍이는 빛이 집안을 스쳐 지나갔고, 어두운 실내가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유진은 두려움에 꼼짝 못 하고 심장이 마구 뛰었다. 서둘러 문밖으로 나가 복도의 불도 꺼졌는지 확인하려고 했다. 급하게 문을 열자마자 바로 앞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와 마주쳤다.“꺅!” 유진이 크게 비명을 질렀다.“임유진!” 은정의 긴장된 목소리가 들렸고, 곧장 한 발짝 다가와 놀란 그녀를 품에 안고 다독였다. “무서워하지 마, 나야!”“나 돌아왔어!”“괜찮아!”유진은 은정의 품에 기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여전히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삼촌?”“응, 괜찮아. 정전일 뿐이야.” 은정이 낮게 말했다.한 시간 전, 은정은 관리실에서 보낸 메시지를 이미 받았다. 날씨로 인해 한 시간 후 아파트 내에 정전이 있을 예정이며,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릴 거라고 했다.유진이 무서워할까 봐 은정은 속도를 최대한 높여 정전 전에 돌아오려 했지만, 몇 분 늦고 말았다. 하필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