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새하얀 페르시안 고양이 한 마리가 3층 창문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2층 난간을 밟고 한 번 더 도약한 뒤, 부드럽게 정원으로 내려섰다.오사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세상에! 정말 예쁜 고양이다. 네가 키우는 거야?”구은서는 애옹이를 바라보며 냉소적으로 웃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구은정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 고양이까지 데리고 왔다.은정은 이 고양이를 보물처럼 여기며 전담 관리인을 붙여 돌보게 했고,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인지 은서는 이 고양이가 마치 은정을 떠올리게 해서 더욱 눈에 거슬렸다.하지만 은서가 은정을 싫어하는 진짜 이유는 집안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소희와 연관된 사람들은 모두 싫었다.사라는 애옹이가 너무 마음에 들어먹을 것을 이용해 유인했다. 이윽고 그녀는 가볍게 애옹이를 품에 안았다. 그런데 애옹이는 사람을 경계할 줄도 몰랐다. 항상 은정에게 보호받아 왔기에, 쉽게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얼떨결에 품에 안긴 애옹이는 당황하며 불안한 듯 울어댔다.사라는 원래 고양이를 키우던 사람이었기에, 고양이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애옹이를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그러자 애옹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이 눈 색깔 좀 봐! 맑은 갈색이야. 게다가 완전 새하얀 털이라니, 정말 보기 드문 고양이야!”사라는 감탄하며 애옹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본 은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에 들면 너한테 줄게.”그 말에 사라는 깜짝 놀라며 은서를 바라보았다.“이거 너무 갑작스러운데? 주인이 있는 고양이를 내가 어떻게 데려가?”은서는 냉랭한 시선으로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난 촬영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도 적고, 돌볼 여유도 없어. 사실 예전부터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었어. 네가 키우면 고양이한테도 행운이겠지.”사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정말이야? 농담하는 거 아니지?”“진심이야.”은서는 애옹이를 다
오사라도 거들며 말했다.“이 고양이가 누구 것이든 난 상관없어요. 어쨌든 은서가 나한테 준 거니까, 불만이 있으면 은서한테 가서 따져요.”“아가씨!”도우미는 간절한 표정으로 구은서를 바라보았다.“이 고양이는 도련님이 제게 맡긴 거예요. 아가씨가 함부로 보내버리면 도련님께서 저를 탓하실 거예요!”애옹이는 더욱 애처롭게 울어댔다. 불안한 듯 좁은 철창 안을 이리저리 맴돌며 탈출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은서는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뭐죠? 이 집에서 이제 내가 고작 고양이 한 마리도 마음대로 못 한다는 건가요?”은서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우미를 노려보았다.“당신들 같은 도우미들은 상황을 봐가면서 행동할 줄 안다더니, 결국은 내 오빠한테 붙겠다는 거네요?”“좋아요, 그렇다 쳐도 나한테 대놓고 대들 생각은 하지 마요. 안 그러면 너 후회하게 될 거니까.”도우미는 눈앞의 은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그저 조금 도도한 성격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그녀는 점점 더 극단적이고 날카롭게 변하고 있었다.자신은 단지 맡은 바 책임을 다하려 했을 뿐이었다. 고양이를 돌보는 것은 그저 일일 뿐, 누구에게 붙고, 누구를 거스르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은서의 위협적인 태도를 보고, 도우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사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두어 번 헛기침했다. 그녀는 이 상황이 단순한 고양이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이건 구씨 남매의 힘겨루기다. 사라는 고양이 이동장을 번쩍 들고, 마치 승리자처럼 손을 흔들었다.“그럼 난 간다, 은서야!”은서는 냉정하게 말했다.“가. 누가 감히 막나 보자.”사라는 자신만만하게 걸어 나갔다.한편, 고양이를 돌보던 도우미는 걱정스럽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는 조용히 퇴장한 뒤, 바로 은정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다.‘이건 반드시 알려야 해!’도우미는 조용한 곳으로 가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전화번호를 누르기도 전에,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순식간에 누군가 그녀의 손을 쳐버렸다.탁!
은정은 차가운 분노를 내뿜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곧장 은서의 방 앞에 도착한 그는, 문을 세게 두드렸다.잠시 후, 문이 열렸다. 은서는 실크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열고,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물었다.“이 밤중에 무슨 일이지? 오빠?”마침 도우미가 은서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려다가, 문 앞에 선 은정을 보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몰래 숨을 죽이며 이복남매의 대치를 지켜보았다.두 사람이 사이가 안 좋은 건 집안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심상치 않은데? 싸움이라도 벌어지려나?’은정의 눈빛은 싸늘했고, 낮게 깔린 목소리는 살기를 띠고 있었다.“내 고양이는 어디 있어?”은서는 이미 은정이 왜 온 건지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문틀에 기대며 태연하게 웃었다.“내 친구가 그 고양이를 너무 좋아하길래, 그냥 선물로 줬어요.”은정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그건 내 고양이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멋대로 남한테 줘?”은서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고작 고양이 한 마리잖아요. 내가 결정하면 안 되나? 게다가 이건 오빠를 위해서이기도 해요.”“이제 막 회사를 맡았으면, 일에 집중해야죠. 고양이 키우는 게 뭐 그리 중요해요?”은정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마치 칼날처럼 구은서를 꿰뚫었다.“네가 누구한테 고양이를 줬든 상관없어. 당장 전화해서 무사히 돌려놓으라고 해.”그러나 은서는 시선을 살짝 돌리며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아마 못 돌려줄걸요? 내 친구가 오늘 저녁 8시 비행기로 BL시에 갔어요. 야외 촬영이 있어서 말이죠. 고양이도 같이 데려갔겠지.”은정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다시 한번 말할게. 지금 당장 고양이를 데려와.”“진짜로 못 데려와... 으악!”은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은정이 그녀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은서는 본능적으로 몸부림치며 버둥거렸다.“놔, 놔줘요!”은정의 팔 근육이 단단하게 수축하며, 손가락이 서서히 조여졌다. 그의 목소리는 살기가 서
서선영이 다급하게 물었다.“주사 맞았어? 고양이 몸에도 광견병 바이러스가 있을 수 있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구은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늦었어. 원래는 내일 아침에 맞으러 가려고 했어.”서선영은 안타까운 나머지 목소리가 쉬어버렸다.“여보, 사람을 문 고양이는 절대 키우면 안 돼요! 한 번 사람을 물면 또 물게 돼요. 물어대는 개랑 똑같아요. 재앙이라구요!”구은태가 고개를 끄덕였다.“이 일은 은서가 잘한 거다. 고양이는 그냥 남에게 주면 돼.”은정은 아무 말 없이 은서를 향해 걸어갔다. 은서는 차가운 살기를 내뿜는 남자를 보자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밀려와 한 발짝 물러섰다.“오빠, 어쩌려고요?”구은정은 냉랭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양이, 반드시 되찾아와야 해. 누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어. 내 물건은 다른 사람이 결정할 수 없어.”“오늘 밤 고양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너랑 너희 어머니 둘 다 이 집에서 나가!”은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그녀는 고통스럽게 고개를 돌려 구은태를 바라보았다.“아빠, 저랑 엄마는 이 집안사람이 아니에요? 고작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오빠가 저희를 내쫓겠다고요?”서선영은 더 심하게 흐느껴 울었다.“나는 알고 있었어요. 내가 이 집을 위해 아무리 희생해도 결국은 남이에요. 내가 낳은 딸도 마찬가지죠. 성이 서씨라도 이 집에서 제 자리는 없는 거예요.”“은정아, 은서를 겁주지 마라.”구은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은정의 표정은 냉혹하기만 했다.“겁주는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 봐.”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은정은 은서의 잠옷 깃을 움켜쥐고 그대로 그녀를 질질 끌고 나갔다.은서는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평소의 단정하고 오만한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고, 은정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완전히 무력해졌다.“은서야!” 서선영이 울며 따라붙으며 필사적으로 애원했다.“은정아, 제발 놔줘! 부탁이야!”하지만 은정은 그 말을 생각도 없었다. 서선영은 다
말을 마치고, 은서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곁눈질로 은정을 바라보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됐어요?”은정은 차갑게 대꾸했다.“내 허락도 없이 내 고양이를 함부로 남에게 줘놓고, 이제야 되찾아오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근데 나보고 만족하냐고? 당연히 아니지.”“다음번에도 이런 짓 하면, 넌 짐짝처럼 내다 버릴 거야!”은서의 눈에는 분노와 원망이 서렸다. 그녀는 깊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았다.구은태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딸을 보며 안쓰러워했다.“은정아, 이제 고양이를 돌려받았으니 됐다. 은서는 네 여동생이야. 고작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네 동생한테 이러는 게 말이 되냐?”은정은 비웃으며 말했다.“내 고양이와 이 여자를 같은 선에 놓고 비교하지 마요. 그럴 자격도 없으니까!”구은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한편, 서선영은 옆에서 흐느끼며 울었다.“여보, 보셨죠? 은정이 눈에는 우리 모녀가 고양이만도 못한 존재예요!”구은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일단 은서부터 일으켜 세우고, 손 다친 데는 괜찮은지 확인해 보자.”서선영은 서둘러 은서를 부축했다.“은서야, 그냥 참고 견뎌. 네가 은정의 물건을 건드렸으니 당한 것도 네 잘못이야. 너도 네가 이 집에서 어떤 위치인지 좀 깨달아야지!”은정은 서선영의 그런 가식적인 태도가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는 거대한 창문 너머로 깊어진 밤을 바라보았다.약 반 시간쯤 지나 도우미가 다가와 보고했다.“오사라 씨가 고양이를 데려왔어요!”이때, 구씨 집안사람들은 이미 거실에 모여 기다리고 있었고, 은서는 차분하게 말했다.“들어오게 해요.”사라는 고양이 이동장을 들고 들어오며 불만스럽게 말했다.“은서야, 이렇게까지 서두를 일이야?”그러나 말을 끝맺기도 전에, 방 안의 긴장된 분위기와 모든 구씨 집안 식구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도우미가 고양이가 있는 케이지를 받아 들고 은정에게 건넸다.애옹이는 케이지 안에서 눈을
서선영은 구은태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억울한 듯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구은정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애옹이가 가볍게 은정의 어깨 위로 뛰어 올라가 몸을 웅크렸다.새하얗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고양이는 한껏 나른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지만, 커다란 눈동자는 또르르 굴러가며 서선영과 구은태를 바라보고 있었다.은정은 차가운 시선으로 서선영을 향해 쏘아붙였다.“딸 단속 잘하세요. 이런 일, 두 번 다시 없도록 하시고요.”은정은 말을 마치고 곧장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모습이 계단 끝에서 사라진 후에야, 서선영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여보, 은서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구은태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어찌 됐든, 은정의 물건을 당사자의 허락 없이 남에게 준 건 잘못된 일이야.”서선영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여보 말씀이 맞아요. 은서가 돌아오면 잘 타일러 놓을게요.”“그건 나중에 얘기하지. 오늘은 많이 힘들었을 거야.”구은태는 아들을 아끼면서도 딸도 걱정이 됐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사이가 나쁜 건 골치 아픈 일이었다. 서선영은 고개를 숙였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기운이 스쳤다.“여보, 은정이가 너무 과격한 거 아닌가요? 조금 전에 여보가 말리지 않았으면, 은서를 정말로 목 졸라 죽일 수도 있었어요!”구은태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럴 리 없어. 은정이는 그런 애가 아니야.”“하지만 듣자 하니 바깥에서 은정이가 사람을 죽인 적도 있다고 하던데요!”서선영은 겁에 질린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헛소리!”구은태는 크게 노했다.“도대체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렸어? 감히 우리 은정을 모함하다니!”서선영은 황급히 변명했다.“그냥 사람들이 하는 말이에요. 누가 시작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어요.”“저도 몇 번 들었지만, 그런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한테 단단히 혼내줬어요. 물론 저는 믿지 않아요!”구은태는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가족끼리 믿어주면 그만이야. 은정이는 성격이 거칠긴
유진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래요?]구은정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은저이 다시 입을 열었다.“얼마나 더 해야 해?”[한 시간 정도 남았어요.]유진은 두툼한 서류 뭉치를 휙 넘겨보자, 은정이 물었다.“입찰 회의는 오후야? 아니면 오전?”[오후요.]“그러면 지금 자. 내일 오전에 마저 해.”유진은 나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내일 오전에 다른 일정도 있어요. 그리고 오늘 밤에 다 끝내고, 아침에 늦잠 좀 자고 싶거든요.]은정의 목소리가 조금 단호해졌다.“말 들어.”이에 유진은 한 박자 늦게 반응하며 말했다.[알겠어요. 사실 조금 피곤하긴 하니까 내일 오전에 하게 할게요.”“응, 얼른 자.”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굿나잇.]“굿나잇.”유진이 전화를 끊자, 은정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왠지 모르게 허전했던 마음이 조금은 채워지는 듯했다.예전 같았으면, 누군가 자신이 한 여자 때문에 감정이 휘둘린다고 말하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하지만 막상 그런 감정을 직접 겪고 보니,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마치 오래도록 억눌러 왔던 감정들이 임유진이 교통사고를 당한 그 순간부터 쏟아져 나와, 더 이상 제어할 수 없게 되어버린 듯했다.어쩌면 이건 하늘이 자신에게 내리는 벌이 아니라, 자신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알려주기 위한 기회일지도 모른다.다음 날, 유진과 팀원들은 입찰 회의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왔고, 벌써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여진구는 팀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오후 티타임을 준비했고, 저녁에는 노래방까지 예약해 놓았다.직원들은 다 같이 탁자 주변에 모여 앉아 간식을 먹으며 입찰 회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지만 분위기는 한결 가벼웠다.이번 프로젝트는 철저한 준비 덕분에 경쟁사보다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에, 결과에 대한 불안감도 거의 없었다.“유진 씨!”누군가 유진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진구가 건넨 타로 크림 롤케이크를 받아 들고 떠나려 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진구가 곁에 있던 진소혜를 향해 말했다.“잠깐 비켜줄래요?”소혜는 순간 당황한 듯 뒷걸음질 쳤다. 그런데 진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임유진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자기 옆으로 이끌었다.진구는 직접 유진에게 롤케이크를 건네며 말했다.“도망가지 말고, 먼저 먹어. 너를 위해서 일부러 산 거야.”유진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소혜의 표정이 썩 좋지 않을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보는 시선이 싸늘하고 매서웠다.유진은 조용히 롤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오늘 뭐 잘못했어요? 뭔가 부족했어요?”그러자 진구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아니, 왜 그래?”“그러면 왜 날 곤란하게 하는 건데요? 소혜 씨가 겨우 선배 옆에 서볼 기회를 잡았는데, 또 나를 불러서 데려가 버리잖아요.”“지금 나한테 쏘는 눈빛이 장난이 아닌데.”진구는 옆에서 소혜를 힐끗 보더니,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내가 너한테 잘해주는 게 왜 다른 사람 눈치를 봐야 해? 그리고 너도 알잖아. 난 관심 없어.”“오히려 네가 자꾸 날 소혜 씨한테 밀어 넣는 게 더 이상해. 너라면 당연히 알 줄 알았는데?”유진은 진구의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은정이 떠올랐다. 그도 예전에 비슷한 말을 했었다. 이에 유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결국 욕먹는 건 나잖아요.”진구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보상해 줄게. 저녁에 먹고 싶은 거 말해. 네가 고르면 다 따라줄게.”유진은 무덤덤하게 말했다.“뭐든 상관없으니까, 다른 사람들 의견 들어봐요.”하지만 진구는 단호했다.“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네가 뭘 좋아하는지 난 다 아니까.”유진은 크림 롤케이크를 크게 한입 베어 물며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진구와 함께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한편, 소혜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소혜는 평소에도 여진구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