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은정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미 갔는데, 아직도 뭐가 무서워?”유진은 귓불이 새빨개졌지만, 당황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눈을 내리깔고 작게 중얼거렸다.“안 무서운데, 그러면 아까 왜 나를 끌어당긴 거예요?”“네가 무서워하니까 그런 거잖아.”은정이 되묻자, 유진은 눈을 흘겼다. 유진은 다시 바위 위로 올라가 몸을 숙여 두 사람이 정말 멀리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그 송연석 너무하네요. 여자친구가 곧 취업하면 안정적으로 결혼하자고 했는데, 저렇게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우다니!”은정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한쪽은 오랫동안 만나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여자친구고, 다른 한쪽은 새롭고 매력적인 여자, 게다가 더 부유하기까지 하지.”“그런 모든 허영심을 충족시켜 주는 상대라면, 몇 명이나 그 유혹을 견뎌낼 수 있을까?”유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럼 송연석은 나영하를 진짜로 좋아하는 걸까요?”은정은 가볍게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그건 아닐 수도 있지. 그냥 스릴을 즐기는 걸지도.”유진은 여전히 화가 난 듯 말했다.“그럼 여자친구한테 들킬까 봐 걱정되지 않나 봐요?”은정은 비웃듯 낮게 웃었다.“그 순간엔 그런 거 생각할 정신이 있을까?”유진은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삼촌, 아주 잘 아는 것 같은데요?”은정은 단호하게 말했다.“나는 단순히 상황을 분석한 것뿐이야. 나를 그런 상황에 대입하지 마.”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갔다. 곧 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장난친 거예요. 아까 방연하가 삼촌이랑 여진구 칭찬하던데, 이제야 이해가 가네요.”은정은 자신을 여진구와 같은 범주에 넣는 게 싫었는지 별다른 반응 없이 말없이 걸었다. 텐트 앞에 도착한 유진은 하품하며 어깨를 으쓱였다.“이제 자러 갈 거니까 옷 돌려줄게요.”유진은 걸치고 있던 그의 외투를 벗어 은정에게 건넸다.“삼촌, 잘 자요
“잠깐 자리 비운 것뿐인데, 왜 날 찾는 거지?”하명아는 송연석이 괜히 호들갑 떠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남자친구가 신경 써주는 게 기분 좋았다. 그녀는 임유진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그럼 나 먼저 갈게요. 아침 먹고 다 같이 놀러 가요!”유진도 미소 지으며 답했다.“좋아요!”명아가 떠난 뒤, 나영하도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은정과 여진구가 돌아왔다. 은정은 양손에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들고 와 세면대에 물을 붓고는 유진을 불렀다.“유진, 얼굴 씻어!”유진은 세면도구를 챙겨 들고 양치하고 얼굴을 씻었다. 맑고 차가운 샘물이 얼굴을 스치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차가웠지만, 동시에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은정이 물었다.“춥지 않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활짝 웃었다.“완전 상쾌해요!”막 떠오르기 시작한 햇살 아래, 유진의 피부는 깨끗하고 투명하게 빛났다. 선홍빛 입술과 하얀 치아, 그리고 맑고 영롱한 눈동자에 아침 햇살이 비치자, 은정은 순간 무슨 말을 하려다 잊어버렸다.그때, 진구가 손수건을 들고 와 일부러 은정이 듣도록 말했다.“아침에 일어나서 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참 좋네.”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럼, 일어나자마자 상사 얼굴 보는 기분도 어떤지 알아?”진구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은정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는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그사이 연하는 샌드위치 네 개를 준비하고 우유를 데워 모두를 불렀다.“아침 먹어요!”네 사람은 함께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오늘의 일정을 정했다.오전에는 주변 명소를 구경하고, 점심은 유명한 농산 펜션에서 먹은 후, 식사가 끝나면 강성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모두 이 일정에 만족하며 식사를 마친 후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그때, 명아가 뛰어오며 물었다.“벌써 떠나는 거예요?”이에 유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전까진 놀다가 점심 먹고 출발할 거예요!”명아는 고개를
유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설마 송연석이나 나영하가 나한테 앙갚음이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 난 하나도 안 무서운데요?”구은정은 유진을 바라보며, 애정이 담긴 듯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무섭고 안 무섭고의 문제가 아니야. 밖에 나와서는 괜히 문제를 일으킬 만한 사람과는 애초에 엮이지 않는 게 제일 좋아. 알겠어?”유진은 그의 말을 곱씹듯 잠시 눈을 깜빡였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여진구가 성큼성큼 걸어와 두 사람 사이에 일부러 끼어들며 말했다.“유진, 내가 도와줄게. 굳이 남의 도움 받을 필요 없어.”은정은 어금니를 살짝 물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지만, 이번엔 굳이 대응하지 않았다. 모두 함께 텐트를 정리하고 밤새 어질러진 자리도 깨끗하게 원상 복구했다.이제 산을 떠나려는 참에, 하명아가 다시 다가왔다. 그녀는 작은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유진 씨, 이거 두부 간식이랑 다른 과자예요. 어젯밤 보니까 맛있게 먹더라고요. 남은 거 다 챙겨왔어요. 널 만나서 정말 반가웠고요!”아마도 어젯밤 유진이 자신을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준 덕분에 더욱 호감이 생긴 듯했다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참 묘한 법이다. 어떤 사람과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친숙함이 느껴지고, 어떤 사람과는 첫눈에 거리감이 생긴다.유진과 명아는 분명 전자였다. 유진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가 건넨 간식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가져온 간식 중 일부를 건네며 말했다.“나도 만나서 반가웠어요!”명아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다음에 기회 되면 다 같이 여행 가요!”“좋죠!”그때,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던 사이, 연석이 갑자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에는 어딘가 불안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둘이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요?”그러자 명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왜 그래?”연석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그를 더욱 수상하게 만들었다.“넌 왜 자꾸 저 사람들이랑 어울
유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더욱 놀랐다. 처음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그때, 방연하와 여진구가 다가와 둥그렇게 둘러서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만 돌려 말하고 분명하게 말해요.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나영하 씨가 뭔가를 잃어버렸고, 그걸 우리가 훔쳤다고 의심하는 거예요?”연석은 마치 정의의 사도라도 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분노했다.“그래요! 영하 씨가 2천만 원짜리 시계를 잃어버렸어요. 그것도 강가에서! 누가 강가에 갔는지는 본인이 잘 알겠죠?”진구는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러니까, 강가에 갔다 온 사람이라면 무조건 도둑이라는 말인가요?”그때, 오예나까지 거들고 나섰다. 그녀는 턱을 치켜들고 차갑게 진구와 은정을 노려보며 말했다.“영하 언니가 강가에서 세수를 하다가 시계를 바위 위에 올려뒀는데, 텐트에 돌아와서야 생각이 나서 다시 가 보니 없어졌어요.”“그리고 그 시간 동안 강가에 다녀온 건 둘뿐이잖아요. 도대체 누가 가져갔는지 뻔한 거 아닌가요?”유진은 화가 치밀어 즉시 반박했다.“선배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유진이 반사적으로 진구를 두둔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은정이 차갑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그러면 네 말은 내가?”은정의 날카로운 눈빛에 유진은 순간 움찔하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런 뜻이 아니라, 여기 있는 두 사람 절대 그런 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하지만 유진이 맨 처음 진구를 감싸는 모습이 은정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그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은정은 아무 말 없이 유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그러나 오예나는 비웃으며 말했다.“겉으론 부자인 척하면서, 뒤에서는 이런 짓을 하다니. 정말 비열하네요.”방연하는 격분하여 예나에게 달려들 뻔했다.“닥쳐요! 당신 시계가 천만 원이 아니라 억 단위라 해도, 우리에겐 눈길 한 번 줄 가치도 없어요!”“혹시 본인이 어디 두고선 우리한테 누명 씌우는 거 아닌가요? 혹시라도 돈 뜯어내려고 그
송연석의 얼굴에는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오늘 아침에야 없어진 거 아니었어요? 근데 왜 어젯밤부터 조사해야 하죠?”임유진은 이미 구은정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화를 내거나 초조해하지 않고, 마치 흥미로운 구경거리라도 발견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히 어젯밤부터 확인해야죠. 어쩌면 나영하 씨가 어젯밤에 강가에 갔다가 놓고 온 걸 깜빡했을 수도 있잖아요?”방연하는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곧바로 거들었다.“그러고 보니, 영하 씨도 어젯밤에 강가에 갔었나 보네요? 그 늦은 밤에 혼자 간 건 아니겠죠?”연석은 당황한 나머지 화를 내며 소리쳤다.“헛소리하지 마요!”이에 연하는 비웃으며 말했다.“우린 영하 씨 얘기하는 건데, 연석 씨는 왜 그렇게 발끈하는 거예요?”하명아도 의아한 표정으로 송연석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러게,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야?”연석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더듬거리며 변명했다.“그, 그게, 난 그냥 사람이 많은 쪽이 적은 사람을 몰아붙이는 게 보기 싫어서 그래!”유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흥분하는 거 보니까, 모르는 사람들은 본인 여자친구가 억울한 줄 알겠네요?”“무슨 말이에요?”연석은 안절부절못하며 화를 내며 다가오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유진을 밀치려 했다. 그러나 연석보다 먼저 은정이 유진을 보호하듯 뒤로 끌어당기더니, 강한 힘으로 연석을 발로 차버렸다.“네 더러운 손 대지 마요. 얘한테 손대면, 시계랑 함께 이곳에서 사라지게 해줄 테니까.”여진구도 즉시 유진 앞을 막아서며 방어 태세를 취했다. 연석은 배를 맞고 몇 걸음이나 뒤로 밀려나더니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연석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배를 감싸 쥐었다. 명아는 놀란 듯 급히 다가와 그를 부축하며 의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도대체 왜 그래? 뭔가 숨기는 거 있어?”연석은 눈을 피하며 머뭇거렸다.“아, 그냥 배가 아파서.”예나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어떻게 사람을 때릴 수 있어요
방연하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궁금해지네요. 어젯밤 CCTV를 확인하자는 말이 나오자마자 나영하 씨가 갑자기 겁을 먹었잖아요?”영하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그 옆에 있던 하명아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송연석을 향한 의심스러운 시선이 점점 깊어졌다.연석은 영하보다 더 초조해하며 서둘러 말했다.“일단 시계를 찾는 게 우선이잖아요. 시계가 진짜로 없어진 게 아니라면 경찰을 부를 필요도 없잖아요!”영하는 잽싸게 맞장구쳤다.“맞아요! 당장 텐트로 가서 찾아볼게요!”영하는 급히 텐트로 뛰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헐떡이며 다시 돌아왔다. 영하는 손에 시계를 들고 흔들며 말했다.“정말 텐트 안에 있었어요! 내가 착각했나 봐요!”이번엔 연석뿐만 아니라, 그녀를 따라다니며 감싸주던 오예나까지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이에 여진구는 비웃음을 터뜨렸다.“내 인생에서 이렇게 어이없는 일은 처음 봐요. 덕분에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네요.”방연하는 팔짱을 끼고 냉소적으로 말했다.“그러게요. 다행히 구은정 씨가 경찰을 불렀지. 안 그랬으면, 평생 도둑이라는 오명을 쓰고 살아야 했을 거예요. 그리고 2천만 원까지 뜯겼겠죠?”예나는 여전히 뻔뻔한 태도를 유지하며 연하를 향해 손가락질했다.“누구한테 하는 말이에요?”짝! 임유진이 재빠르게 그녀의 손을 쳐내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처음엔 당당하게 우릴 도둑이라고 몰아붙이다가, 증거가 나온 순간 바로 시계를 찾았다고요? 우리가 바보라도 되는 줄 알아요?”“그런 주제에 아직도 뻔뻔하게 구네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죠?”평소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이던 유진이 강한 태도로 나서자, 분위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예나는 당황한 나머지 맞받아치려다가, 은정이 무표정하게 쏘아보는 걸 보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서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됐어요. 그만해요.”그때, 연하가 휴대폰을 꺼내 들며 냉소적으로 말했다.“나영하 씨, 넌
하명아가 떠난 후, 방연하는 임유진의 팔짱을 끼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저 송연석, 진짜 징그럽다. 근데 저 둘이 나영하를 만난 것도 재수 없긴 하지.”여진구는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유혹을 못 이겨서 저지른 건 본인 책임이야. 운이 나빴던 게 아니라 그냥 스스로 자초한 일이지.”“맞는 말이에요!”연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러니까 우리 선배를 칭찬해야 해. 그런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직한 사람!”진구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이제 알겠지?”그러면서도 눈 끝으로는 슬쩍 유진을 바라봤으나, 유진은 곁눈질로 구은정을 바라보았다.은정은 묵묵히 짐을 정리하고 있었고, 평소처럼 유진이 쳐다보면 자연스럽게 눈을 맞춰주던 반응도 없었다.‘화가 난 걸까?’유진은 속으로 의아해하며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다들 산에서 내려갈 즈음, 영하와 예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명아도 차를 몰고 먼저 떠났다. 명아가 차에 타려 하자, 송연석이 차 문을 붙잡고 애원했다.“명아야, 내 말 좀 들어봐!”연석은 급하게 휴대폰을 열어 보여주며 말했다.“봐, 나영하가 먼저 나한테 연락해서 유혹한 거야! 내가 먼저 접근한 게 아니라고! 대화 기록을 보여줄게!”그러더니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애원했다.“명아야, 내가 잘못했어. 우리가 이렇게 오래 만났잖아. 한 번만 용서해 줘, 응?”“다시는 안 그럴게. 정말이야!”사실, 영하는 떠나기 직전 명아에게 일부러 연석과 잠자리를 가졌다고 말했다. 영하는 뻔뻔하게 모든 걸 털어놓고선 가버렸고, 결국 연석만 남아 이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하지만 명아의 반응은 냉정했다. 그녀는 연석이 차에 타려 하자 힘껏 밀쳐내며 단호하게 말했다.“이 차는 내가 산 거야. 우리 이제 헤어졌으니까 알아서 돌아가.”그 말과 함께 명아는 차 문을 닫고 바로 출발했다. 유진은 조수석에 앉아 지나가면서, 길 위에서 분노에 찬 얼굴로 욕설을 퍼붓는 연석을 보게 되었다.“잘했네!”연
유진은 살짝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방연하가 왜요?”구은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영하가 우리 둘이 새벽에 밖에 나갔던 걸 은근히 언급했잖아. 굳이 방연하한테 해명할 필요 없어.”“첫째, 나는 방연하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 내 눈엔 그저 네 친구일 뿐이야.”“둘째, 나는 걔를 좋아하지 않아. 단지 걔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네가 나를 걔의 소유물처럼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은정은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기억해 둬. 너는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걔에게 설명해 줄 의무가 없어.”유진은 순간 멍해졌다가, 곧 그의 말뜻을 깨달았다. 그리고 은정은 계속해서 말했다.“이번 주말은 즐겁게 보내려고 나온 거니까 분위기를 망치고 싶진 않아.”“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방연하한테 분명하게 말할 거야. 더 이상 나한테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유진은 가만히 듣다가 중얼거렸다.“이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은데?”은정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예전에 유진에게 했던 말과 똑같았다. 이제는 그 말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만 같아,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은정은 목소리를 조금 부드럽게 낮추며 물었다.“그런 말을 전에 들어본 적 있어?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나?”유진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은정은 약간 실망한 듯했지만, 유진을 바라보는 눈빛은 한층 깊어졌다.“그냥 내가 한 말만 기억해 두면 돼.”그러자 유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진짜로 연하한테 마음을 줄 생각 없어요?”‘이번 여행에서 연하와 함께 지내면서, 연하의 성격도 어느 정도 알았을 텐데.’은정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그의 목소리는 더욱 낮고 깊어졌다.“그럼 너는? 정말 나랑 걔가 이어지길 바라는 거야?”은정의 깊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유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순간적으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은정은 유진의 부드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손을 들어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지만, 결국 참았다.“그냥 신경 쓰지 마. 난 걔를 좋아하지 않아. 그러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장효성이 출장 갔다가 돌아왔거든요. 오늘 우리 집에 들른다고 했어요.”여진구는 오늘 일정을 확인하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럼 나도 저녁에 갈게. 술이랑 음료, 저녁까지 내가 다 챙길게!”유진은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그럼 연하랑 효성한테 단톡방에서 말할게요.”진구는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그런데 요즘 그 이웃, 또 널 귀찮게 하진 않았어? 남자야, 여자야? 얼굴은 봤어?”“그 사람은...”유진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온 사람은 기획팀 부장이었고, 업무 보고를 하러 온 참이었다.유진은 잡담을 멈추고, 진구에게 먼저 일 보라고 한 뒤, 자리를 나섰다. 사장실에서 나와 걸으면서 유진은 속으로 생각했다.‘이웃이 구은정 삼촌이라는 걸 선배가 알면 어떤 반응일까?’오후.은정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저녁 약속이 생겨서 좀 늦게 들어간다며, 애옹이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은정은 예전부터 애옹이를 돌보던 도우미 아주머니를 그만두게 했고, 그 뒤로는 그가 자리를 비우면 애옹이를 돌보는 일은 자연스럽게 유진의 몫이 되었다.마침 오늘은 집에 친구들이 오기로 되어 있어 은정에게 수업할 시간도 없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유진은 메시지를 보냈다.[퇴근하고 애옹이 우리 집으로 데려갈게요. 집에 올 때 데리러 오세요.]은정이 보냈다.[응. 저녁은 밖에서 먹을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유진은 은정이 보낸 메시지를 보며, 다시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곧 누가 다가와 업무 얘기를 꺼냈고,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은정에게 답장하는 것도 잊어버렸다.퇴근 후, 진구를 포함한 몇 명이 유진의 집에서 모였다. 해외에서 돌아온 효성이 모두에게 선물을 준비해 왔고, 진구까지 빠짐없이 챙겼다.유진은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앉아 있으라 하고, 옆집에서 애옹이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먼저 간식을 먹이며 애옹이를 달랬다.“고양이 너무 귀여워! 어디서 데려온 거야?”고양이를 좋아하는 연하가 애옹이
“열나는 거 아니야?”구은정이 손을 들어 임유진의 이마에 닿으려 했다. 유진은 고개를 저으려다, 따뜻한 손바닥이 이마에 닿는 순간 겁이 나서 몸을 멈췄다.“괜찮아. 열은 없네.”은정은 손을 거두며, 자연스럽게 덧붙였다.“내일이나 모레 비 온대. 날도 추워질 테니까 출근할 땐 따뜻하게 입고.”“네.”유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들어가.”은정은 유진의 얼굴빛이 아직도 어두워 보이자,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재채기라는 건 누군가에게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제어할 수 없는 거니까, 굳이 미안해할 필요 없어.”그는 자기 책을 정리하면서 툭 던지듯 물었다.“내일 아침엔 뭐 먹고 싶어?”은정의 담담한 태도 덕분에 유진도 점차 긴장이 풀렸다. 조금 전의 상황도 잊은 듯 웃으며 말했다.“건너편 가게의 호떡이랑, 만두요! 치즈 들어간 거로!”은정은 잔잔하게 웃었다.“알겠어. 일찍 자. 내일 아침에 내가 사다 줄게.”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 삼촌도 일찍 쉬세요!”애옹이는 눈을 반쯤 뜬 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가 나가는 걸 보고 아쉬운 듯 두어 번 울었다.“착하지, 얼른 자. 내일 보자!”유진은 애옹이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유진의 표정은 생기 있었고, 목소리는 맑고 귀에 감겼다.애옹이를 달랜 후, 유진은 은정에게 미소로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집으로 돌아갔다.이번엔 은정이 현관까지 배웅하지 않았다. 앉아 있을 때야 그나마 괜찮지만, 함께 일어나면 서로 민망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괜히 유진이 다음에 또 오기 꺼려질 수도 있었으니까.문이 닫히고 나서야, 은정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던 얼음물 병을 들어 반쯤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조금 전 유진이 당황하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웃음이 났다. 애옹이가 그의 무릎 위로 올라와 하품하며 몸을 늘어뜨렸다. 그는 애옹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유진의 생각뿐이었다.조금 전 그녀가 나갔을 뿐인데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도 유진의 귀 끝은 여전히 붉었다.마침 은정이 자연산 농어를 쪄서 내왔는데, 아까 유진에게 다가왔던 것도 이걸 간장조림으로 할지, 찜으로 할지 물어보려던 참이었다.유진은 찜으로 조리된 생선을 한 입 먹어보았다. 살점이 부드럽고 신선해서 비린내 하나 없이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생선 냄새 너무 좋아요!”은정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애옹이 간식보다 더 맛있어?”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볼이 부풀 정도로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애옹이 간식이 더 맛있거든요!”은정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다음엔 애옹이 간식 살 때, 두 봉지 사야겠네.”얼굴에 철판 깐 지 오래라고 생각한 유진도 결국 푸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고개를 든 은정은, 조금 전까지 웃음이 어린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진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며,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식사가 끝나고 나자, 은정이 식탁을 치우고, 유진도 자청해서 거들었다. 남은 재료들을 냉장고에 정리한 뒤, 유진은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오는 주방 쪽으로 돌아섰다.유진은 등을 조리대에 기대고 애옹이를 품에 안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은정이 소매를 걷은 채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은은한 회색 셔츠의 소매가 팔꿈치까지 올라가 있었고, 전완근이 드러났다. 그의 동작은 느긋하면서도 단정했고, 어딘가 나른한 멋이 묻어났다.맞춤형 정장 바지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단정하면서도 날렵했다. 은정의 길고 탄탄한 다리와 넓은 어깨, 단단한 상체가 균형을 이룬 체형이 눈에 띄었다.예전에 유진은 방연하에게 왜 그렇게 구은정을 좋아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방연하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거칠고 야성미가 넘치면서도 퇴폐적인 페로몬이 있다며 능글맞게 웃었다.유진은 그 말을 듣고 비웃었었다. 페로몬은 무슨, 그냥 몸이 좋은 거라고 하자 연하는 유진이 잘 몰라서 그렇다며 웃
“그러니까, 넌 왜 받은 거야?”은정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한 번 받으면, 그 뜻을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계속 오해하게 만들겠다는 거지?”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이제 알았어요. 다음에 여진구 선배한테 확실히 말하고, 더는 안 받을게요.”은정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칼을 들어 채소를 썰기 시작했다.“그래. 그럼 이제 나가서 놀아.”유진은 주방을 나가려다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걸음을 멈췄다.“잠깐만요, 삼촌, 그러면 삼촌은요?”은정은 손을 멈추고 천천히 유진을 돌아보았다.“뭐?”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나한테 잘해주는 이유는 뭐예요? 삼촌도 나한테 무슨 목적 있는 거 아니죠?”은정은 잠시 말이 없다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네가 나한테 수업해 주니까.”이에 유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와, 진짜 솔직하네.”은정은 단호하게 말했다.“너한테는 가식 떨 필요 없으니까.”유진은 은정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가슴이 살짝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애써 웃으며 넘겼다.‘아냐, 원래 저 사람 성격이 저런 거야.’그러고는 애옹이를 꼭 안고 거실로 돌아갔다.유진은 퇴근길에 들른 펫숍에서 애옹이의 새 옷과 장난감을 몇 개 사 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애옹이에게 한 벌씩 입혀 보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애옹이는 무척 순순히 유진에게 협조했다.마지막으로 핑크색 레이스 원피스를 입혔을 때, 은정이 부엌에서 접시를 들고 나왔다. 그는 애옹이의 차림을 보고, 한순간 멈칫했다.유진은 애옹이를 들어 올려 은정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어때요? 예쁘죠?”은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좋으면 됐어.”그러자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이건 철저히 삼촌 같은 빠꾸 없는 상남자의 취향에 맞춘 코디예요.” 그러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빠꾸 없는 상남자 취향?”“그렇죠! 핑크색, 반짝이, 공주풍 스타일을 좋아하는 거.”유진이 장난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평소처럼 임진은 부서 동료들과 함께 야근했다. 유진은 자기 일을 사랑했고, 늦게까지 일하는 것에 대해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자꾸만 시간을 확인하게 되었다.창밖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유난히 지루하게 느껴졌다.‘이거 혹시 애옹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걸까?’마침내 모든 업무를 마치고 퇴근할 시간이 되자,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서둘러 짐을 챙겼다.그때, 여진구가 다가와 삼계탕이 담긴 보온 용기를 건넸다.“우리 엄마가 오후에 보내주신 거야. 저녁에 가서 먹어.”그러나 유진은 얼른 손을 저었다.“아니요, 선배 어머니가 주신 건데 제가 어떻게 받아요?”“뭐 이렇게 딱 잘라 거절해?”진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농담이야. 두 개 보내주셨거든. 하나는 너 주려고 한 거야. 오후에 너무 바빠서 이제야 전해주네.”그 말에 유진은 그제야 받아들었다.“그럼, 이모께 꼭 감사하다고 전해줘요!”“무슨 새삼스럽게.”진구는 일할 때 끼는 얇은 금테 안경을 썼는데, 더 똑똑하고 멋있어 보였다.“집에 가서 따뜻하게 먹어.”“알겠어요!”유진은 손을 흔들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진구는 유진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한편, 옆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진소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가방을 챙겨 다가왔다.“사장님, 오늘 차 안 가져왔어요. 혹시 태워다 주실 수 있을까요?”그러자 진구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회사 근처에 집 구한다고 하지 않았나요?”그 말에 소혜는 잠시 당황했지만, 빠르게 대답했다.“어머니가 오늘은 집으로 오라고 하셨어요!”진구의 태도는 이미 냉대하는 태도였다.“난 아직 볼 일이 있어서요. 오늘 택시비 회사에서 처리해 줄 테니까 그렇게 가요.”진구는 말을 끝내고 곧장 사무실로 돌아갔다.소혜는 주변을 지나가는 동료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걸 보며 민망한 듯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유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옆집 문이 열렸
은정은 안으로 들어오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양치 끝내고 와서 아침 먹어.”임유진은 그의 짙은 색 운동복 차림을 보고, 칫솔을 문 채로 웅얼거렸다.“조깅 갔다 왔어요?”“응.”은정은 식탁 쪽으로 걸어가며 무심히 물었다.“내일 같이 갈래? 천천히 걸어도 돼.”그러나 유진은 단호하게 거부했다.“싫어요! 난 더 자야 한단 말이에요.”유진이 이 동네로 이사 온 이유는 출근 시간을 줄이고 아침잠을 더 자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새벽부터 조깅이라니? 그건 차라리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이에 은정이 낮게 웃었다.“게으름뱅이.”은정의 목소리는 어딘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에 유진은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을 받았다.‘이거 뭐야?’유진은 그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돌려 애옹이를 쓰다듬고는 욕실로 향했다. 세면대 앞에서 거울을 보며 양치하다 말고 생각했다.‘뭔가 이상한데?’하지만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는 알 수 없었다. 양치와 세수를 마친 후, 유진은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식탁으로 나왔다.은정은 마치 자기 집에서처럼 자연스럽게 식기를 정리하고 있었고, 유진은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유진이 좋아하는 샌드위치와 군만두였다.“오! 아침 메뉴 마음에 드네요!”애옹이는 테이블 위로 올라와 유진을 바라보자, 유진은 샌드위치에서 햄을 꺼내 애옹이에게 건넸다. 그리고 은정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든 공간에서, 유진이 밝은 얼굴로 애옹이를 쓰다듬으며 웃고 있었다. 그 순간, 은정은 문득 상상했다.‘만약 우리가 가족이 되어 아이가 있었다면?’이런 맑은 아침, 자신이 아침을 사 오면 유진이 똑같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고,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그러다가 유진이 은정을 올려다보며 물었다.“왜요? 애옹이한테 주면 안 돼요?”이에 유진은 정신을 차리고 담담하게 말했다.“아니야. 괜찮아.”유진은 샌드위치를 조금 더 먹인 후,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한 모금 마
은정은 유진의 행동을 지켜보며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면 네가 가끔 애옹이를 돌봐줘. 퇴근하고 일찍 들어오면 밥도 챙겨주고. 이따가 출입문 비밀번호를 네 폰으로 보내줄게.”유진은 애옹이를 너무 좋아해서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좋아요!”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렇게 하자.”사실 은정은 유진과 같은 날 이 집을 계약했다. 원래는 유진이 혹시라도 좋지 않은 이웃을 만나면 곤란할까 봐 옆집을 함께 구매했던 것이다. 애초에 이곳에 살 계획은 없었다.하지만 가족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고, 그 과정에서 구은태와도 이야기를 나눴다. 돌아온 이상, 회사를 제대로 맡고 가족 곁에 머물겠다고.그러나 서선영 모녀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켜 은정의 인내심을 시험했고, 그는 결국 이곳으로 나오는 명분을 얻었다.식사가 끝난 후, 유진은 스스로 식탁을 정리하고는 말했다.“그럼 전 이제 가볼게요.”은정은 시계를 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서 일찍 자.”“알겠어요!”유진은 해맑게 웃으며 애옹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애옹아, 잘 있어!”하지만 애옹이는 유진의 다리를 끌어안으며 놓아주지 않았다. 이에 유진은 웃으며 말했다.“너 정말 애교가 많구나!”은정은 몸을 숙여 애옹이를 들어 올렸다. 그의 깊은 눈빛이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얘는 원래 낯을 많이 가려. 한 번 상처받은 적이 있어서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아. 그런데 너한테만 이렇게 굴어. 넌 예외야.”유진은 기뻐하며 말했다.“봐요, 역시 우리 궁합이 잘 맞는다니까요!”그 말에 은정은 살짝 웃었다.“그래, 너희는 특별한 인연이 있나 봐.”유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문득 애옹이가 혹시 은정의 여자친구가 키우던 고양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성격을 봤을 때, 스스로 고양이를 키울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냥, 어떤 상처도 들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럼 전 진짜 가볼게요!”유진은 노트북과
임유진은 손을 뻗어 저녁을 집어 들었다.“괜찮아요. 집에 가서 데워 먹으면 돼요!”하지만 구은정이 유진의 손을 막아섰다.“차가워진 건 그냥 먹지 마. 내가 뭐 좀 만들어 줄게.”“그럴 필요까지야!”유진은 조심스럽게 거절했지만, 은정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걸어갔다.“괜찮아. 나도 아직 저녁 안 먹었어. 그리고 너 오늘 하루 종일 애옹이를 봐줬잖아. 그 정도는 고맙다고 해야지.”유진은 따라가면서 무심결에 물었다.“구은정 아니, 삼촌! 요리도 할 줄 알아요?”말을 내뱉고 나서야 유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은정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저녁을 가져다줬을 때, 유진은 그걸 별 의심 없이 먹었었다. 이제야 문득 궁금해졌다. 유진은 은정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처음부터 옆집에 내가 이사 온 거 알고 있었던 거예요?”은정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딱 잘라 말했다.“아니.”“그런데 왜 저녁을 챙겨 줬어요?”은정의 냉장고 문을 여는 손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유진을 돌아보며 대답했다.“그날 관리사무소 직원이 와서 새 이웃이 이사 왔다고 하더라고. 이웃 관계 잘 만들어 놓으려고 챙긴 거지.”“아, 그런 거였구나!”유진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가 준 디저트는 봤어요?”“응. 먹었어.”유진은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즉흥적으로 집을 사기로 결심했는데, 옆집이 알고 보니 은정이었다. 그것도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로 음식까지 주고받았다는 게 이상하면서도 묘했다.은정이 냉장고를 뒤지는 모습을 보며 유진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뭐 만들어 줄 건데요?”유진이 처음으로 이사 온 첫날부터, 은정은 유진이 스스로 밥을 해 먹을 줄 모를 거라고 예상하여, 미리 준비해서 보냈다. 그리고서는 은정은 며칠동안 스스로 밥을 해 먹지 않아, 주방에는 계란 몇 개와 토마토 2개 그리고 냉동된 인스턴트 식품들이 있었다.은정은 고개를 돌려 유진에게 물었다.“요 며칠 뭐 먹
애옹이는 밥을 다 먹고도 임유진을 방해하지 않았다. 카펫 위에서 공을 가지고 놀다가, 한참 후에는 유진의 무릎 위에 올라와 셔츠 단추를 장난스럽게 건드렸다.한 시간이 지나, 유진은 작업을 마쳤지만 애옹이의 주인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졸음에 취해 있던 애옹이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크고 동그란 눈망울이 간절한 듯 유진을 올려다보았다.‘이런 눈빛을 보면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잖아.’결국, 유진은 다시 자리에 앉아 애옹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안 가. 네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릴게. 그러니까 얌전히 자.”...한 시간 후, 구은정은 차를 지하 주차장에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엘리베이터가 27층에 멈추자, 그는 걸음을 느리게 했다. 곧 마주할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면서.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현관에 놓인 크림색 하이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이내 그의 짙은 눈빛이 순간 부드러워졌다.은정은 재킷을 벗고, 손을 들어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실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살짝 멈춰 섰다.방 안은 은은한 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소파 한쪽에 기댄 채, 유진이 곤히 잠들어 있었고, 품에는 애옹이를 꼭 안고 있었다.냉방이 잘 되어 있어 그런지, 유진은 몸을 움츠리고 작은 체구로 고양이를 품에 감쌌다.은정은 조용히 다가가 소파 앞에 앉아 유진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얼굴, 살짝 벌어진 연한 핑크빛 입술. 가슴 한편이 묘하게 간질거렸다.‘얘는 대체 얼마나 경계심이 없는 거야? 남의 집에서 이렇게 깊이 잠들다니! 당장 깨워서 한 소리 해야겠네.’그 순간, 아마도 은정의 기운을 감지했는지 유진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떨며 천천히 눈을 떴다. 살짝 흐릿한 눈동자가 천천히 초점을 맞추더니,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은정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났어?”유진은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