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선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요즘 회장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바깥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으세요. 하지만 오늘 컨디션이 좀 나아지시면, 한 번 부탁드려볼게요.”고규선은 감격한 표정으로 말했다.“여사님, 정말 감사해요! 제 아들이 풀려날 수만 있다면, 제가 무릎이라도 꿇겠어요!”“그렇게까지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어요.”서선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우린 이렇게 오래 알고 지냈잖아요.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는 게 당연하죠.”“고마워요!”고규선은 거듭 감사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고규선은 더 오래 머물지 않고 곧장 자리를 떠났다.위층구은정은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임유진이 정리해 준 필기 노트를 보고 있었다. 그는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었지만, 넉넉한 옷 사이로도 완벽한 체형이 드러났다.애옹이는 은정의 다리 위에 둥글게 몸을 말고 있었다. 작고 포근한 생명체가 은정의 차가운 분위기를 약간은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듯했다.갓 인쇄된 책에서 나는 잉크 향이 방 안을 은은하게 감쌌고, 은정은 그 향기에 둘러싸여 점점 마음을 가라앉혔다.노트 속 필체는 단정하고 정갈했다. 한 획, 한 획 정성 들여 쓴 것이 보였고,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훈련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은정은 낮에 책상에 앉아 집중해서 필기하던 유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심지어 유진의 짙고 긴 속눈썹이 피부 위로 드리운 연한 그림자까지도 선명하게 기억났다.‘사랑이란 이런 느낌이구나.’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유진의 작은 움직임조차도 신경 쓰이고, 만나지 못하면 그리워지고, 만나면 더 보고 싶고.문득 은정은 예전에 유진이 매일 아침과 밤마다 인사를 건네던 일이 떠올랐다. 유진은 단지 은정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자신도 같은 이유로 핑곗거리를 만들어 유진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저 짧게라도 유진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야옹!”애옹이가 은정의 가슴에 앞발을 올리고, 투명한 크리스탈처럼 맑은 갈색 눈으로 그를 바라보
서선영은 무심한 듯 말했다.“누가 알아요? 아마도 임씨 가문의 편을 들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겠죠.”고규선은 흐느끼며 말했다.[알겠어요. 어쨌든, 이렇게까지 도와주려 해주셔서 감사해요, 여사님.]“별말씀을요. 결국 아무 도움도 못 줬는데요. 그래도 은정의 기분이 좀 풀리면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볼게요.”[고마워요. 정말 신세 많이 졌어요.]고규선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억울함과 분노가 점점 더 깊어졌다.그 후 그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구씨 가문에 대해 한마디씩 불만을 내뱉기 시작했다. 특히 구은정에 대한 험담은 더욱 심했다.그가 오랫동안 외국에서 온갖 타락한 생활을 즐기고, 유흥과 도박, 방탕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점점 부풀려지면서, 심지어 은정이 마약에 손을 댔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온갖 더러운 소문이 그의 이름과 함께 퍼졌다.처음에는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서만 떠돌던 이야기였는데, 점차 퍼져 나갔다. 서선영도 몇 번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누군가 직접 물어오면 애매하게 말을 흐리며 괜한 소문 퍼뜨리지 말라고만 했다.그렇게 서선영의 그 모호한 태도가 오히려 소문을 더욱 확신하게 만들었다.정작 구은정 본인은 이런 소문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그는 회사 업무로 바빴다. 갓 회사를 맡았기에 매일 새로운 문제가 터졌지만, 은정은 철저하고 냉철한 태도로 하나하나 해결해 나갔다.은정의 강단 있고 결단력 있는 스타일 덕분에, 최소한 이제는 더 이상 함부로 그를 무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예전처럼 대놓고 무시하거나 무례하게 대하는 이들은 완전히 사라졌다.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토요일은 반드시 시간을 비워두었다. 왜냐하면 임유진과의 약속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원래 오후에 만나기로 했지만, 은정은 늘 오전부터 서점에 가서 유진을 기다렸다. 유진을 한 주 동안 기다린다는 사실은 은정으로 하여금 설레게 했다.유진은 시간을 지켜 도착했고, 이번에는 스스로 차에서 내려 걸어왔다. 유진은 작은 디저트를 두 개
여자 화장실 안은 모두 개별 칸으로 되어 있었다. 유진을 찾으러 들어온 여학생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부드럽게 불렀다.“임유진 씨? 혹시 여기 계세요?”마침 손을 씻고 있던 유진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저예요.”여학생은 안심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남자친구분이 밖에서 찾고 있어요. 기다리다가 걱정되신 것 같아요.”‘남자친구?’유진은 눈을 반짝이며 순간적으로 구은정을 떠올렸다. 그러더니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유진은 손을 말끔히 닦은 후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은정을 발견한 그녀는 미안한 듯 웃었다.“오면서 살롱 강연이 열리고 있길래 잠깐 들렀어요. 거기 강사가 예전에 같은 학교 선배더라고요. 그래서 잠시 이야기하다가 늦었어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은정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별일 없으면 됐어.”두 사람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임유진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아까 도와준 애가 삼촌을 내 남자친구라고 하던데, 나 진짜 웃겨서 혼났어요!”“삼촌이랑 나이 차이도 꽤 나는데, 말도 안 되잖아요. 삼촌은 그냥 삼촌이지, 어떻게 남자친구겠어요?”유진은 깔깔 웃으며 걸어갔다. 그러나 정작 옆에 있는 은정의 얼굴은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자리로 돌아와서도 은정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툭 던졌다.“어떤 남자친구를 만날 거야? 또래 남자?”유진은 책을 넘기면서 무심히 말했다.“내가 남자친구가 없다는 거 어떻게 알아요?”은정은 즉시 고개를 들었다.“너 남자친구 있어?”‘여진구와 사귀기로 한 건가?’유진은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은정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없어요!”은정은 한숨을 내쉬었는데, 숨소리는 꽤 묵직했다. 순간적으로 유진을 번쩍 들어 올려 엉덩이를 두 대 정도 찰싹 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겨우 참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유진은 태연하게 책을 다시 펼치며 말했다.“이제 공부하죠.”은정도 따라 책
8월 하순이 되었지만, 여전히 날씨는 무더웠다.임유진은 다시 출근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반면 여진구는 별로 급할 게 없었다. 어차피 진구는 언제든 임씨 저택에 올 수 있었고, 두 사람은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한 주가 금세 지나갔다. 금요일 퇴근 후에도 구은정은 사무실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때 방연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구은정 씨, 퇴근하셨죠? 주말에 일정 있으세요?]은정은 메시지를 무시한 채 휴대폰을 내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곧바로 연하에게서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괜찮은 캠핑장이 있는데, 주말에 가볼래요? 유진이도 같이 가자고 해요!]은정은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연하에게 답장을 보냈다.[어디죠?]연하는 예상치 못한 답장에 흥분한 나머지 손이 떨려서 제대로 타자를 치기도 힘들었다.[남애산이요. 시내에서 세 시간 정도 거리인데, 저번에 한 번 갔었거든요. 풍경이 끝내줘요! 캠핑 장비도 다 준비해 뒀어요.][내일 몇 시 출발하죠?]연하는 막 집에 도착해 소파에 털썩 앉으며 신나게 답장을 보냈다.[아침 7시에 괜찮아요? 시간은 은정 씨가 정하세요. 저는 언제든 좋아요!][좋아요.]연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아아! 드디어 약속 잡았어!”이윽고 연하는 바로 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유진아, 나 구은정 씨랑 약속 잡았어!”유진은 재활 훈련을 마치고 땀을 한가득 흘린 채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녀는 연하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진짜? 첫 데이트는 어디 가는데?]연하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캠핑하러 갈 거야!”유진은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첫 데이트가 캠핑이야? 너무 과감한데?]연하는 한 박자 쉬더니 피식 웃었다.“뭐야, 무슨 생각하는 거야? 난 그냥 같이 있는 시간을 늘리고, 나를 더 잘 알게 하고 싶을 뿐이야.”그러더니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그리고 너도 같이 가야 해!”유진은 갑작스러운 말에 할 말을 잃었고, 곧 황당한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유진이 임씨 저택의 대문을 나서자,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바로 맞은편, 검은색 지프 랭글러가 서 있었다. 구은정은 차에 기대어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담배 끝에서 깜빡이는 불빛이 새벽안개 속에서 마치 희미한 불꽃처럼 빛났다. 이 장면이 왠지 익숙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기시감.유진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생각을 더듬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몇 번인가, 밤에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볼 때, 대문 밖의 차에 기대어 서 있는 실루엣이 보였었다.희미한 안개 속에 가려져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지만, 이 순간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하지만 설마 은정이 일부러 자기 집 앞에 왔을 리가 없었다.유진은 스스로 착각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은정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껐다.새벽안개 속에서도 은정의 깊고 날카로운 눈빛이 더욱 어둡게 빛났다. 은정은 몸을 바로 세우고 입을 열었다.“방연하가 우회해서 오는 길이 멀다고 해서, 내가 먼저 왔어.”유진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삼촌.”은정은 얕게 입꼬리를 올렸다.“뭐 그렇게 정중해? 너 매주 공짜로 나한테 수업해 주고 있는데, 아직 월급도 못 줬잖아.”유진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서로 정중한 건 이제 그만하기로 해요!”“좋아.”은정은 유진의 배낭을 받아 뒷좌석에 넣었다. 휠체어와 보온 도시락도 트렁크에 실은 후,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그때, 누군가 유진을 불렀다.“유진아!”멀리서 다가오는 익숙한 목소리. 유진은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할아버지!”은정도 걸어가 정중하게 인사했다.“회장님.”임시호는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어디 가는 길이냐?”유진이 설명했다.“친구들이랑 놀러 가요. 오늘 야외에서 캠핑하고, 내일 돌아올 거예요. 할머니께 미리 말씀드렸어요!”임시호는 원래 유진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 편이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방연하는 이미 와 있었다. 연하 역시 비포장도로 차량을 몰고 왔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밝게 인사했다.“구은정 씨, 좋은 아침이에요!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라요!”그러나 은정의 표정은 여전히 냉담했다. 그는 곧장 조수석 문을 열고, 옆에서 임유진이 안전하게 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연하는 활짝 웃으며 유진과 가볍게 포옹했다.“은정 씨가 너희 집이 더 가깝다고 해서, 먼저 널 태우고 오겠다고 하더라. 그런데도 내가 먼저 도착했네?”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난스럽게 웃었다.“내가 좀 느려서 그런가 봐!”은정은 손목시계를 보더니 짧게 말했다.“그럼 출발하지.”“잠깐만요!”유진이 막아서며 웃었다.“한 명 더 오기로 했어요. 곧 도착할 거예요!”은정의 검은 눈동자가 가늘어졌고, 은정이 아무 말도 하기 전에, 차 한 대가 다가왔다. 차에서 내린 것은 여진구였다. 진구는 야외 활동에 맞춰 스포티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멀리서부터 활기차게 손을 흔들었다.“유진아!”연하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유진아, 언제 진구 선배한테 같이 가자고 한 거야?”유진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혼자 분위기 깨는 역할을 맡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은정의 표정이 즉각적으로 냉랭해졌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순간적으로 이 캠핑을 가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어졌다.네 사람이 인사를 나눈 후, 진구도 예의 바르게 은정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잘 부탁드려요.”그러나 은정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대신 묵묵히 차로 돌아갔다.그 순간, 진구가 말했다.“그럼 이제 출발할까? 유진아, 내 차 타!”은정의 걸음이 순간적으로 멈췄고, 등을 돌린 채,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곧바로 임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아냐, 난 연하 차 탈래. 같이 가면서 이야기 좀 하려고.”그 말에 은정의 얼굴이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진구가 덧붙인 한마디에 다시 찌푸려졌다.“그럼 우리 차 너무 많아지는 거 아니야? 내 차는 근처에 주차하고,
우정숙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내가 묻고 싶은 건, 너 구은정이랑 같이 놀러 나간 거야?]“맞아요. 왜요?”임유진은 그녀의 말투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우정숙은 갑자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구은정이 이미 집안으로 돌아가 구씨 그룹을 맡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런데 왜 유진이 다시 구은정을 알고 지내는 거지? 분명히 잊었는데!’그러자 유진이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방연하랑 여진구 선배도 같이 가요. 총 네 명이라 위험할 일 없을 거예요.”우정숙은 여진구가 함께 간다는 말에 조금 안심하며 말했다.[조심해!]“알겠어요. 끊을게요!”유진은 전화를 끊고는 아마도 이전 교통사고 일 때문에 우정숙이 유난을 떠는 거라고 생각했다.이에 진구가 물었다.“어머님이었어?”“네!”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어제 이미 말했는데, 왜 또 전화했는지 모르겠네요.”진구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유진은 연하가 은정을 불렀다고 했지만, 은정이 캠핑을 간다고 흔쾌히 승낙한 게 정말 방연하 때문일까?‘대체 무슨 생각이지? 예전엔 유진을 좋아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 유진이 자신을 잊었을 때 다시 찾으려는 건가?’진구는 속으로 차가운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 한 번 잊었으니, 다시 좋아할 일은 없을 거라고 그는 믿고 싶었다.한 시간 반가량 달려 시내를 벗어나자, 동쪽으로 이어진 길에는 점점 고층 빌딩이 줄어들고, 풍경이 점점 아름다워졌다.유진은 오랜만에 여행을 가는 것 같아, 멀리 보이는 산맥을 바라보며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또 한 시간을 더 달린 뒤, 연하는 도로변 주유소에 차를 세우고 주유하러 갔다. 그동안 나머지 사람들도 차에서 내려 몸을 풀며 바람을 쐬었다.은정이 물병을 하나 들고 뚜껑을 연 뒤, 유진에게 건넸다.“피곤해?”그러자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은정이 말했다. “한 시간 정도 남았는데, 내 차로 옮겨서 앉으면 좀 더 편할 수도 있어.”“괜찮아요. 금방 도착할 텐데요.”유진이 정
연하는 입 안에 있던 감자칩을 뿜을 뻔하며, 임유진에게 자신이 구은정의 차를 타고 가려다 거절당한 일을 털어놓았다.“진짜 한 치의 여지도 안 주더라. 완전 매정해!”유진이 연하를 달랬다.“너도 알잖아, 원래 그런 성격이잖아. 진정해.”연하는 감자칩을 와작와작 씹으며 물었다.“원래 계속 저랬어?”“내가 어떻게 알아? 나랑 그 사람 친하지도 않은데.”유진은 방연하의 감자칩 봉지에서 몇 개를 집어먹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곧 떠올랐다.매주 토요일마다 서점에서 같이 수업을 들을 때, 구은정이 그렇게 차갑게 굴었던 적은 없었다.오히려 꽤 말도 잘 통했고, 오늘 아침에도 일부러 아침을 챙겨오지 않았던가? 아마 은정이 원하는 게 있어서 태도를 좋게 한 걸 수도 있다.둘이 계속 먹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산 아래에 도착했고, 캠핑장으로 향했다. 산길에 들어서자마자 공기가 한결 신선하고 서늘해졌다.주변 풍경은 대부분 개발이 끝난 상태였고, 캠핑장이 있는 지역은 안전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연하는 두 손을 입가에 모으고 크게 외쳤다.눈앞에는 광활한 초원이 펼쳐졌고, 주변에는 웅장한 산맥이 둘러싸고 있었다.맑은 공기 속에 산속 개울의 습기가 은은하게 스며들었고, 시원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와 기분이 절로 상쾌해졌다. 이곳은 확실히 완벽한 캠핑 장소였다. 넷은 짐을 내리기 시작하며 텐트를 칠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그때, 은정이 세 사람에게 당부했다.“저 개울물은 유속이 빠르니까 가까이 가지 마요.”연하가 놀라며 물었다.“그걸 어떻게 알아요?”셋은 아직 강이 보이지 않는 거리까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물살이 빠른지 알 수가 없었다.“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어요.”은정은 덤덤하게 말한 뒤, 차에서 휠체어를 꺼내어 잔디 위에 놓았다. 그러고는 유진을 보며 말했다.“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여기 앉아 있어.”유진은 어깨를 으쓱였다.“일은 안 할 건데, 계속 앉아 있기만 하는 건 싫어요. 차 안에서 몇 시간이나 있었더니
연하는 재빨리 따라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효성의 팔을 붙잡았다.“효성아, 너 오해한 거야!”하지만 효성은 연하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 보여. 너 전에 나한테 선배 가까이하지 말라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지? 난 그게 임유진을 위한 줄 알았는데, 결국 너 자신이 가로채려고 그런 거였네!”“연하야, 난 예전부터 네가 마음에 안들었어. 자존심도 없고, 자기 몸도 함부로 굴리고, 남자만 보면 달려드는 꼴, 진짜 더러워!”“근데 설마 유진이 좋아하던 남자까지 너랑 자게 만들 줄은 몰랐네. 정말 역겹다!”효성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차가운 눈빛으로 연하를 마지막으로 쏘아보며 말했다.“앞으로 난 너 같은 친구 없어.”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마지막 틈새에서, 효성의 혐오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연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손끝까지 시린 듯,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여진구가 다가와 인상을 깊이 찌푸렸다.“내가 효성이한테 전화해서 설명할게.”연하는 핏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필요 없으니까 이제 가요. 나도 출근해야 해요.”“이 상태로 무슨 출근이야?”진구는 걱정스럽게 말하자, 연하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나를 너무 얕보지 마요. 하늘이 무너져도 난 일하러 가야 해요. 누가 뭐래도, 돈 버는 건 멈출 수 없으니까요.”진구는 연하 집 안으로 들어가 자기 재킷을 집었다.“혹시라도 얘기하고 싶으면 언제든 전화해. 그리고 정말 미안해.”“말했잖아요, 선배 잘못 아니에요. 아마 우리 사이엔 이미 오래전부터 금이 가 있었을 거예요.”연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효성이 성격 알잖아요. 입은 독하지만 마음은 여려요. 며칠만 지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올 거예요. 우리 예전에도 자주 싸웠거든요.”진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럼 난 간다.”“잘 가요.”연하는 문 앞까지 배웅한 뒤, 힘없이 거실로
앞으로 어떤 더 큰 프로젝트가 나타나든, 더 큰 유혹이 있든, 과연 계약을 따내기 위해 몸까지 내줄 수 있겠는가?그래서, 애초부터 한 발짝도 물러서선 안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기준선은 반드시 지켜야 했다.진구는 연하의 맥주 캔과 자신의 것을 부딪치며 말했다.“그래야지, 그게 맞는 거야.”연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며 물었다.“담배 피워도 돼요?”이에 진구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담배 피우는구나?”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할 때 한 대 피우는 게 습관이에요.”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인 연하는, 연기를 내뿜으며 당당하고도 시원한 기운을 풍겼다.“하루 종일 일 마치고, 이렇게 늦은 밤에 바람 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이 시간이 제일 편안해요.”진구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담배 너무 자주 피우지 마. 특히 여자한텐 더 안 좋아.”“그래요.”연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런 말은 수도 없이 들어온 터라, 더는 마음에 닿지도 않았고, 굳이 반박할 필요도 없었다.맥주를 다 마신 연하는 다시 일어나 술을 가져왔다. 두 사람은 이야기꽃이 피었고, 바닥엔 텅 빈 캔들이 하나둘 늘어갔다.시간은 어느덧 새벽을 넘었고, 방연하는 머리를 짚으며 일어났다.“이제 정말 못 버티겠어요. 선배가 날 구해준 건 고맙지만, 내 목숨까지 줄 수는 없어요. 난 이만 자러 갈 테니까. 나갈 땐 문 좀 잘 닫고 가요. 고마워요.”연하는 휘청이며 안방으로 향했고, 진구는 맥주 캔의 마지막 한 모금을 넘기며 말했다.“잘 자.”“잘 자요.”연하는 흐릿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안방 문을 닫아버렸다.다음 날 아침.연하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숙취로 머리가 아파 지끈지끈했고, 눈도 제대로 안 뜨인 채 아무 옷이나 걸쳐 입고 거실로 나왔다.“누구야?”‘아침부터 문을 두드리다니.’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연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거의 주저앉을 뻔한 그녀는 거실 소파 위에 누워 있는 진구를 보고 소리쳤다.“선배
호텔 직원이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이 도착했을 때 김문혁의 상처를 확인하고 증거를 채집한 뒤 병원으로 이송시켰다.“누가 때린 거죠?”경찰이 묻자, 연하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제가 때렸어요. 그 사람이 저한테 성추행하려고 해서, 저항하다가 술병으로 머리를 쳤어요.”연하는 말을 마치고, 목에 난 멍 자국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여진구가 연하의 팔을 끌어당겨 자신의 등 뒤에 감싸 안으며, 또렷한 얼굴에 냉철한 기색을 띠고 말했다.“제가 때렸어요.”연하는 진구를 말리려 했지만, 진구는 그녀의 팔을 단단히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경찰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들것에 실려 나가는 김문혁도 흘끗 본 뒤, 상황을 대략 파악하고는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일단 경찰서로 같이 가시죠. 진술이 필요해서요.”거의 자정 무렵, 진구와 연하는 함께 경찰서를 나섰다. 김문혁이 연하를 성추행하려다 폭력을 가한 사실과, 진구의 행동이 정당방위였다는 점, 룸 안의 CCTV와 다른 사람들의 진술까지 확인된 덕분에 두 사람 모두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았다.서늘한 밤바람이 부는 거리에서 연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진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정말 고마워요.”진구는 재킷을 어깨에 걸친 채 가볍게 웃었다.“다음에 만나면 모르는 척 말고 오빠라고 한 번 불러. 그걸로 충분해.”연하는 코웃음 쳤다.“분명히 선배가 먼저 삐진 거잖아요.”진구는 비웃었다.“너, 정말 남자 앞에서 의리도 잊는 스타일 아니야?”연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내가 만약 남자에 눈이 멀었으면, 선배랑 임유진을 맺어주고 나는 구은정을 쫓아다녔겠죠. 내가 이런 짓까지 한 건 다 유진이를 위한 거예요.”“선배도 유진이를 위한다면, 유진의 기억을 되찾게 도와주고, 구은정이랑 다시 이어주는 게 맞지 않아?”진구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넌 구은정이 예전에 유진이한테 뭘 했는지 몰라서 그래! 자기 손으로 밀어내 놓고, 지금 와서 되돌리라고? 말도 안 돼
두 달 전, 김문혁의 아내가 그가 애인을 숨겨둔 사실을 들켜, 여자를 찾아가 얼굴을 긁어버린 일이 한동안 시끄럽게 퍼졌었다.방연하는 이 일을 이용해 김문혁을 견제하려 했지만,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우리 마누라가 감히 연하 씨 얼굴을 긁기라도 하면, 바로 쫓아낼게. 오빠가 든든히 지켜줄 건데, 뭐가 무서워?”‘이게 사람이 할 말인가?’짐승보다도 못한 놈이었고, 짐승도 이 사람보단 염치가 있을 거다.연하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을 띠며 말했다.“사장님은 든든하시겠지만, 저는 감히 사모님을 도발할 용기가 없어요. 이렇게 하죠. 진심을 담아 석 잔 마실게요. 그 정도면 괜찮으시죠?”김문혁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가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내 소원은 러브샷 한잔하는 거예요. 연하 씨가 내 소원 들어주면, 나도 연하 씨 소원 들어줄게요.”장연구는 초조하게 상황을 정리하려다 연하에게 말했다.“연하 씨, 그렇게 까탈 부리지 마요. 김문혁 사장님이 연하 씨를 여동생처럼 아끼시는 거 몰라요?”“술 한잔한다고 뭐가 어때서요? 마시기만 하면, 바로 서명하신다잖아요.”연하는 속으로 장연구를 향해 이를 갈았다. 이익에 눈이 멀어 사람 인격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을 직감한 방연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고 말했다.“그러면 사장님, 말한 대로 해주셔야 해요.”김문혁은 흥분한 얼굴로 몸을 기울였고, 한 팔을 연하의 뒤통수 너머로 뻗으며 억지로 그녀를 끌어안으려 했다.진구는 옆 사람과 대화 중이었다가, 그 장면을 보고 고개를 돌려 연하와 김문혁이 러브샷을 하려는 걸 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명확한 혐오가 스쳤다.‘다른 사람들을 훈계할 땐 그토록 당당하더니, 자기 일이 되니 결국 돈 때문에 뭐든 하는구나.’연하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살짝 돌리며 김문혁에게서 멀어지려 했지만, 아무리 피해도 상대가 악의를 품으면 피해 갈 수 없었다.술을 마시는 순간, 김문혁은 고개를 기울이며 연하
연하는 더욱 부드럽고 정중한 미소를 지었다.“사장님, 농담도 참 잘하시네요.”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욕이 나왔다.‘진짜 속 좁아! 그때 그냥 진실 좀 말했다고 아직도 이러는 거야? 유치하게.’하지만 오늘 같은 자리에서는 얌전히 얼굴 세워주기로 했다. 여진구가 아니라, 자리를 위해 참는 거였다.김문혁이 연하를 불렀다.“연하 씨, 여기 옆자리 비워놨어요. 이리 와요.”마침 김문혁 사장 옆자리가 비어 있었고, 마치 일부러 그녀를 위해 비워둔 것 같았다. 연하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가가 느긋하게 앉았다.김문혁은 연하의 쇄골이 드러난 드레스를 힐끔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연하 씨 오늘 정말 예쁘게 입었네요. 평소엔 늘 정장만 입어서 그 아름다움이 다 가려졌던 것 같아요.”연하는 살짝 웃었다.“오늘 김문혁 사장님 뵌다고 해서 특별히 옷 갈아입었죠.”진구는 그연하 얼굴에 떠오른 영업용 미소를 힐끔 보고, 저 미소가 왜 그리 위선적으로 느껴지는지 불쾌했다.김문혁 사장은 계속해서 말했다.“주말에 불러내서 미안하긴 한데, 연하 씨는 괜찮죠?”연하는 웃으며 대답했다.“주말에 사장님을 뵐 수 있다니, 오히려 더 기뻐요.”김문혁은 더욱 흐뭇하게 웃었다.“연하 씨, 정말 기분 좋게 말씀하시네요. 이 한 잔, 연하 씨께 드릴게요.”연하는 깔끔하게 한 잔을 들이켰다. 그녀가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마시는 걸 본 김문혁은, 연하가 체면을 세워준 걸 느끼며 만족해했고 더 이상 부담을 주지 않았다.술자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연하는 대강 상황을 파악했다. 김문혁은 진구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고, 장연구가 진구와 가까운 부사장과 관계가 있다는 걸 알고 그를 통해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장연구는 김문혁을 도와주는 명분으로, 이번 협업 건의 다음 기획 계약을 따내려 했고, 그래서 연하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연하가 이 프로젝트를 계속 맡아왔고, 장연구도 그녀를 꽤 신뢰하고 아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즉, 이 자리에 모
유민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찾으러 왔다고? 근데 왜 하늘만 보고 있었어?”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야경 좀 보면 안 돼?”그러고는 손을 들어 그의 어깨에 툭 얹었다.“가자, 밥 먹으러!”유민은 유진보다 머리 반쯤은 더 컸고, 키도 크고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총명한 소년이었다.“누나,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야? 또 누굴 좋아하게 된 거야?”“또?”유진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자, 유민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연애 한 번 했었잖아. 그러니까 또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유민이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유진은 거의 주민이라는 사람을 잊고 있었다.그녀는 웃으며 말했다.“연애는 무슨 괜한 상상하지 마.”일요일 저녁.연하는 거울 앞에서 화장하며 속으로 투덜거렸다.‘주말에까지 불러내서 접대라니, 이건 너무하잖아.’화장을 마치고 차를 몰고 나설 때쯤, 해는 이미 지고 거리엔 불빛이 하나둘 들어오고 있었다. 저녁노을과 번화한 불빛, 차량 행렬이 교차하는 거리였다.연하는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길이 막혀서 늦을 것 같다고 알렸다. 사장은 일요일에 그녀를 불러낸 게 미안했는지, 별다른 말 없이 조심히 운전하라고 했다.전화를 끊은 연하는 운전석에 기대어 긴 차량 행렬을 바라보며, 오히려 마음이 느긋해졌다.호텔에 도착한 건 이미 8시를 넘긴 뒤였다. 그녀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흡연 구역으로 향해 담배 한 대를 꺼내 피웠다.담배를 물고 벽에 기댄 그녀는, 연기를 내뿜는 자세조차 당당하고 시크했다. 희미한 연기가 그녀의 정교한 메이크업을 감싸 안으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근처에 있던 남자가 한참을 바라보더니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번호 좀 줄 수 있어요?”이에 연하는 완벽하게 웃으며 말했다.“저 피처폰 써요.”그 말에 눈치 있게 물러났다. 담배를 다 피울 즈음,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룸 쪽으로 향했다.문 앞에 도착하자, 연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얼굴에 어색하지
서선영도 유진을 바라보며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유진은 급히 티슈를 꺼내 서선영의 얼굴을 닦기 시작했고, 그 손길은 꽤 거칠었다.“전 정말 여사님인 줄 몰랐어요.”“방금 어떤 사람이 은정 삼촌을 험담하는 걸 듣고, 또 어떤 못된 입방정 떠는 여자라고 생각해서 그랬지, 이모님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서선영은 얼굴에 뜨거운 차를 맞은 데다, 유진이 얼굴을 세게 문질러 닦여서, 화장이 완전히 번져버렸다.얼굴은 그야말로 염색공장을 연 것처럼 오색빛깔이었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에 서선영은 당황해서 뒷걸음질 치며 외쳤다.“괜찮아! 안 닦아도 돼!”유진은 손을 거두며, 복숭아빛 피부에 앙증맞은 얼굴로 얌전하게 웃었다.“여사님, 저 기억하시죠?”“그럼, 유진아!”서선영은 난처한 표정으로 억지 미소를 지었지만 유진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서서히 가셨다.“근데 이상하네요. 여사님은 분명 은정 삼촌의 어머니신데, 왜 뒤에서 은정 삼촌을 그렇게 험담하시죠?”“저번에 저랑 할아버지랑 댁으로 인사 갔을 때, 누가 은정 삼촌을 험담한다고 화내셨잖아요? 근데 그 말들, 다 여사님이 퍼뜨린 거였네요?”“그건.”유진은 또박또박,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까지 악의적이고 혐오스러울 수 있나요?”다른 부인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이쪽저쪽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모든 상황을 파악한 듯한 표정이 되었다.서선영은 그동안 자애로운 계모 이미지를 만들어왔고, 은정을 이야기할 때마다 다들 그 아이가 속 썩인다는 식으로 받아들였지만, 이제야 진실을 알아버린 것이다.다정한 어머니 이미지는 전부 가짜였고, 뒤에서 험담한 것이 진짜였다. 정말 너무 악의적이었다.서선영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졌고, 급하게 해명했다.“나, 나도 들은 얘기일 뿐이야. 괜히 정태영 여사 조카한테 피해 줄까 봐.”“여사님 말씀 들었을 땐 그렇게 확신에 차 계시길래, 직접 본 줄 알았죠. 알고 보니, 들은 얘기였네요?”유진은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호텔 옥상에서 누군가 드론을 날리고 있었다. 이에 유민은 흥미가 생겨 그쪽으로 다가갔다.식사는 하나둘씩 차려지기 시작했지만, 유민은 돌아오지 않았고 핸드폰도 가지고 나가지 않았다.임유진은 결국 그를 찾으러 밖으로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그날따라 손님이 많아 유진은 맨 뒤에 서 있었다.3층에 도착하자 진주 장식으로 치장한 부유한 중년 여성 둘이 올라탔다. 그중 한 명이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식사 끝나고 우리 한 판 칠까요? 오늘은 늦게 가요.”다른 여성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안 해요. 요즘 너무 재수가 없어서요.”그 말을 듣고, 유진은 고개를 들어 여성을 바라보았는데, 역시, 예상대로 서선영이었다.서선영은 연한 하늘빛 고급 맞춤 롱드레스를 입고, 다이아몬드 세트를 풀 착장한 모습이었다. 품위 있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지나치게 과시적인 느낌이 들었다.먼저 말한 여자가 계속 설득했다.“오늘은 또 다를 수도 있잖아요. 운이 트일 수도 있고.”“어제도 그렇게 말했잖아요.”“그랬어요?”여자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오늘도 지시면, 제가 책임질게요.”“그러면 저도 사양 안 할게요.”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10층에서 내렸고, 10층엔 야외 티 라운지가 있었다.유진은 눈을 굴리더니 조용히 그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오늘 외출하면서 그러데이션 렌즈의 안경을 쓰고, 후드티에 모자까지 뒤집어썼기에 웬만큼 가까이 오지 않는 이상 알아보기 어려웠다.유진은 서선영을 따라 티 라운지로 들어갔고, 서선영 뒤편 테이블에 조용히 앉았다. 서선영과 함께 온 사람은 모두 네 명, 다들 사모님 풍의 차림이었다.서로 마주 앉자마자 상투적인 칭찬을 주고받더니, 이내 서선영의 새로 산 한정판 가방이 화제가 되었고, 곧장 명품과 패션 이야기로 대화가 넘어갔다.유진은 점점 지루해졌고, 일어나려던 찰나, 함께 온 정태영이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사모님, 구은정은 여자친구 없어요? 제 조카가 막 유학 끝내고 박사까지 마치
임씨 저택에 도착한 유진은 동생 유민에게 사온 피규어를 건넸다. 유민은 책상 앞에 앉아 숙제하던 중이었고, 피규어를 받아 디테일을 살펴보다가 맑게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유진은 유민의 책상 위에 놓인 갓 채점된 시험지를 보고 다가가서 들춰보았다.“요즘 성적은 어때?”“별로 안 늘었어.”유민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유진이 본 것은 수학 시험지였다. 만점에 추가 점수 10점까지 있는 문제였고, 그 10점은 마지막의 경시 문제였다.확실히, 지난번에도 만점이었고 이번에도 만점이었다. 성적이 늘었다고 보긴 어려웠다.유진은 시험지를 보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구은정에게 마지막으로 수업해준 날, 자신이 농담 삼아 이렇게 말했었다.“이렇게 오래 가르쳤으면 시험 한 번 봐야 하지 않을까?”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넘겼지만, 그게 두 사람의 마지막 수업이 될 줄은 몰랐다.유민은 유진이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시험지에 거울이라도 있어?”유진은 시험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너 공부 열심히 해. 소희 곧 돌아올 거야. 나 거실에서 기다릴게.”유민은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도 오늘 점심쯤 도착하신대.”유진도 알고 있었다. 어제 우정숙에게서 직접 전화가 왔으니까. 우정숙과 임지언은 2주간의 출장 후 집으로 돌아왔고, 소희와 임구택도 함께 돌아왔다.저녁엔 온 가족이 함께 외식하러 나갔다. 장소는 명우가 예약한 호텔. 분위기 있고 조용한 환경이 가족 모임에 안성맞춤이었다.약 30평 정도 되는 룸은 휴게 공간과 식사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고, 모든 시설이 구비되어 고급스럽고 편안했다.넓고 높게 트인 유리창 너머로는 형형색색의 야경이 펼쳐졌고, 유리문을 열고 나가면 룸에 딸린 정원이 이어졌다.정원에는 해당화 향기가 은은히 퍼지고 있었고, 작은 물줄기가 구불구불 흐르며 부드러운 밤바람과 어우러져, 흔들의자에 앉아 야경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우정숙은 정원의 라탄 의자에 앉아 소희와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유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