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빠르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임유진은 이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유진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화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비 오는 날에 저렇게 빨리 달리다니, 목숨이라도 버리겠다는 건가?”유진이 말을 할 때, 부드러운 숨결이 구은정의 목덜미를 스쳤다. 은정은 휠체어 팔걸이를 잡은 채 팔에 힘을 주었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은정은 유진의 눈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너무 신경 쓰지 마. 자기 목숨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인데, 네가 대신 화낼 필요 없어.”이에 유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맑고 또렷한 눈동자로 말했다.“그 말도 맞네요!”은정은 여전히 몸을 굽힌 채 휠체어 팔걸이에 손을 올린 상태였다. 그의 깊은 눈동자가 어둡게 빛나며 조용히 말했다.“오늘 안 올 줄 알았어.”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유진은 다소 불편함을 느끼며 몸을 휠체어 등받이에 바짝 붙였다. 그러면서도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처음엔 정말 잊고 있었어요. 다행히 나중에 생각났지만요!”유진이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 한다는 걸 알아챈 은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한 손으로 우산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유진의 휠체어를 밀며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서점 안에 자리 잡고 앉은 후, 유진은 주위를 둘러보며 웃었다.“오늘 정말 조용하네요!”이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적으니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은정이 싫어하는 비 오는 날도 오늘은 그다지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유진은 따뜻한 밀크티 한 잔을 주문한 후, 은정을 바라보며 물었다.“언제 왔어요?”그러자 은정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점심 먹고 나서.”유진은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오래 기다린 건 아니네요! 좋아요, 그러면 우리 이렇게 해요. 앞으로 매주 토요일 오후 이곳에서 만나기로 해요. 만약 내가 못 오게 되면 미리 전화할게요.”그 말에 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유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은정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감사해야 할까?”유진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게까지 격식 차릴 필요 없어요. 집안끼리 친한 사람들인데요.”유진의 장난스러운 한마디에 은정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하지만 유진의 입장에서는 오후 내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한층 가까워졌다고 느꼈다. 그랬기에 그저 가벼운 농담을 한 것뿐이었다.그러나 은정의 마음은 달랐다. ‘유진인 나를 친척처럼 생각하고 있네.’유진은 운전기사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이제 집에 가야겠어요. 우리 다음 주에 또 봐요!”은정은 문득 물었다.“집에서 너 오늘 나랑 만나는 거 알고 있어?”유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몰라요.”사실 유진도 왜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할머니가 어디 가냐고 물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은정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숨겼다.은정의 깊은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고,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질였다.“그러면 당분간은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왜요?”유진은 묘한 눈빛을 띠며 장난스럽게 웃었다.“혹시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 선생님 노릇을 하는 게 자존심 상해서 그래요?”이에 은정은 유진의 말에 맞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조금은 그렇지.”유진은 씩 웃으며 말했다.“알겠어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은정은 깊은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다시는 널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유진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의 뜻밖의 말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휴대폰이 울렸다. 운전기사가 도착한 것이었다.은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진을 휠체어에 앉히고, 직접 밖까지 데리고 나갔다. 임씨 집안의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며 다가와, 휠체어를 밀어 그녀를 차에 태웠다.유진은 다시 한번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책 보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요!”그 말에 은정은 냉철한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고규선은 눈물을 훔치며 애원하듯 말했다.“제 아들은 일부러 임유진 양을 친 게 아니에요! 누군가에게 속아서 유인당한 거예요. 그 길로 가게 된 것도, 마침 부딪힌 것도 모두 우연이었어요.”“제가 아무리 변명해도, 결국은 제 아들이 경솔한 행동으로 다치게 한 게 사실이죠.”“하지만 지금 제 아들은 두 다리가 부러진 채 갇혀 있고, 이렇게 오래 갇혀 있었으니 벌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잖아요!”“한 번 만나러 가는 것도 쉽지 않다니.”고규선은 흐느낌을 더 심하게 삼키며 말을 이었다.“건수가 사고를 당한 후, 그의 할머니는 병상에 누운 채로 한 번도 일어나지 못했어요.”“지금 병원에 있는데, 솔직히 얼마 남지 않았어요. 죽기 전에 손주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는데.”“임씨 집안 사람들과는 만날 수도 없고, 그래서 이렇게 사장님께 간청하러 왔어요. 제발 부탁이에요.”“임씨 집안이 한 번만 너그럽게 봐주고, 제 아들을 풀어주도록 도와주세요!”서선영은 휴지 한 장을 건네며 말했다.“건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잖아요. 사고라는 게 늘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법이죠.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일이에요.”“하지만 임씨 가문에서 화가 난 것도 충분히 이해돼요. 유진 양이 완전히 회복되면, 언젠가는 마음을 풀고 건수를 풀어줄 거예요.”고규선은 눈물을 닦으며 흐느꼈다.“이 한 달 넘게 제대로 된 잠도 못 잤어요. 매일 꿈속에서도 제 아들이 안에서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떠올라요.”“다리는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겠어요. 설사 풀려나더라도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요!”서선영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임구택 사장님도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는 것 같아요. 어차피 벌을 받았는데, 좀 봐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고규선은 휴지를 꽉 쥔 채 눈물 속에서도 분노를 숨기며, 다시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은정을 바라보았다.“사장님, 제발 부탁드려요. 임씨 집안과 친분이 두터우시니까, 한 번만 사정 좀 해주세요. 혹시라도 화가 아직 안 풀렸다면, 제가 대신
수요일 저녁 7시 정각 소희는 전위 호텔 앞에 나타났다.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리자 소희는 카카오톡을 확인했다. 아빠 소정인이었다. [소희야, 아빠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차가 좀 막히네. 먼저 들어가있어.]소희는 발걸음을 늦추며 이따 임구택을 만나면 어떻게 인사할까 생각하고 있었다.결혼 3년 동안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임구택이 이 결혼을 동의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거부한다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그렇다고 임구택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과거 소씨 가문의 회사가 위기를 맞자 뻔뻔하게 임씨 가문을 찾아가 혼인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하였고, 당시 임씨 가문의 장남은 이미 결혼을 한 터라 자연스레 그 약속은 차남 임구택이 이행하게 되었다. 그가 내키지 않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임씨 가문은 당연히 소씨 가문에 좌지우지 당하지만은 않았다. 예물로 50억 원을 건네어 소씨 가문이 난관을 이겨내게 도우면서도 조건을 제시했다. 3년 뒤에 이 혼사가 자동 해지되는 것으로.3년 전, 그녀는 아직 법정 결혼 연령이 되지 않아, 두 사람은 라스베가스에 가서 혼인신고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이 아니라 각자의 대리인이 가서 혼인신고를 마쳤다. 결혼하자마자 임구택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결혼 해지를 석 달 앞두고 돌아왔다. 결혼을 거부한다는 태도가 너무나도 뚜렷했다.하필이면 오늘, 그녀의 아버지가 회사 때문에 그녀를 앞세워 다시 한번 그를 찾아가 부탁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소희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생각하였다. “임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 아내에요!”그가 그녀를 거들떠보기나 할까?듣건대 임구택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 강성의 유명한 악질이었다고 한다. 강성의 흑과 백을 모두 통솔하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매섭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지만 며칠 전 TV의 경제 채널에서 임구택을 본 적이 있는데 그녀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명품 양복을 입고, 거만하면서도 우아하고 듬직해 보였다.그녀는
그의 손에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일을 마친 후 돈을 지불하다니. 그녀는 그를 무엇으로 생각하는 걸까?남자가 냉담한 얼굴을 하고 발코니로 성큼성큼 걸어가니 과연 창문이 열려 있었다.여기는 층고가 높아서 3층이 4층 높이일 텐데 그녀는 어떻게 뛰어내렸을까?그가 그렇게 무서웠나?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칠 만큼?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물을 끼얹은 듯 청량한 바람이지만 남자의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화는 식히지 못하였다. 이 여인은 만 원으로 그를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일이 끝난 후에 창문으로 뛰어내려 도망쳤다... 잡히기만 해봐! ......택시에 앉은 소희가 재채기를 하자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보며 물었다. “아가씨, 괜찮아요?”이렇게 예쁘게 생겨서 홀딱 젖어있다니, 딱 봐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소희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기사는 웃으며 말했다. “아직 학생이죠? 밖에 혼자 다닐 때 각별히 조심해야 되요.”“네, 감사합니다. 기사님.”소희는 대답하고 휴대폰을 꺼내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 “천위 호텔의 7시와 9시경에 내가 찍힌 CCTV 기록은 모두 없애!”“ok!” 상대방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지시에 따랐다.남자의 귀에 거슬리는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려 퍼졌다. 소희는 오늘 임구택과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따위 고민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다만 임구택이 그녀가 왔었다는 사실을 모르게만 하고 싶었다.운해로에서 내리면서 소희는 뒷좌석을 적신 대가로 택시비를 두 배로 지불했다.별장으로 돌아오자 하인은 소희의 젖은 옷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작은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일이 좀 있었어요, 일단 올라가서 샤워부터 할게요.”소희는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목욕물 준비해 드릴게요.”하녀는 더 묻지 못한 채 위층으로 올라가 준비했다.몇 분 후 소희는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긴장했던 몸이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머릿속이 복잡해서 머리까지 물속에 파묻고 오늘 밤에 있
소희는 멍해졌다.남자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왜 절 따라오시는 거예요? 강성대 학생이신가요?”그는 오는 길에서부터 이 여자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멈추면 그녀도 무슨 일이 있는 척 멈추더니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왔다.소희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이내 다시 냉정을 되찾고 반문했다. “여기가 당신 집으로 가는 길인가요? 모든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을 왜 제가 따라다닌다고 하는 거죠?”남자의 눈동자의 싸늘한 빛이 스치더니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소희에게 올라오라고 눈짓했다.소희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비꼬듯 말했다. “됐어요, 오해받을 만한 행동 안할게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돌아서서 계단으로 걸어갔다.그녀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며 남자의 가늘게 뜬 눈을 가렸다.소희는 임구택과 다시 마주칠까 봐 아예 계단으로 9층까지 올라갔다.회의실에 도착하니 조교가 학과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교는 그녀를 보자 잠시 기다리라고 눈짓했다.그 옆에는 몇몇 학생들도 자료를 제출하러 왔는데, 그중 한 명은 따가운 눈빛으로 소희를 노려보았다. 소희는 못 본 척 휴대폰을 꺼내 스도쿠를 했다.5분도 안 돼 한 판을 풀고 나니 밖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돌아온 지 얼마 안 됐죠? 출국한지 오래됐으니 돌아올 때 됐구나 싶었는데”교장선생님의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한 사람은 교장선생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소희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임구택도 소희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그녀에게 머물지 않고 바로 지나갔다.학과장은 급히 마중 나가 교장선생님과 인사를 나누었다.방 교장은 그에게 소개하였다. “이 분은 LS그룹의 대표이사님이십니다. 예전에 우리 학교 학생이었지요. 참, 우리 학교 여러 항목의 장학금도 임 회장님이 후원한 것입니다.”그러자 학과장은 냉큼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임구택과 악수를 나누었다. “오늘 마침 학생들에게 장학금 신청 서류를 제출
임구택은 그날 창문에서 뛰어내린 여자를 조사하라고 지시했고, 명우는 제일 먼저 천위 호텔의 CCTV를 조사했다.이상하게도 7시와 9시 두 시간대 모두 공백 상태였고 천위 호텔의 보안요원조차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당시 인터넷이 끊겼을 것이라고 추측만 하고 있었다.그래도 명우는 한 사람을 찾았다. 서이연.서이연은 B급 배우로 청순하고 러블리한 이미지의 노선을 걷고 있으나 줄곧 뜨지 못했다. 어제 저녁 6시 50분쯤 그녀가 천위 호텔에 들어가 연풍관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CCTV에서 볼 수 있었다. 이후 CCTV 기록에는 공백이 있어 그녀가 어느 방으로 갔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다.9시 5분경 서이연의 매니저가 그녀를 부축하고 연풍관 밖에 나타났는데, 그녀는 한쪽 다리를 구부린 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그 뒤로 기록이 사라졌기 때문에 명우는 서이연이 어떤 차를 타고 떠났는지 몰라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알아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어젯밤 그녀는 왼쪽 다리를 수술했다.명우는 이미 차트를 확인했는데 낙상이었다.그날 밤, 강성의대 부속병원.VIP706호. 병상에 누워있는 여인은 두 손을 맞잡고 불안한 표정으로 맞은 켠 소파에 앉은 임구택을 바라보았다. “임 대표님 무슨 일이에요?”“다리 어떻게 다쳤어요?” 임구택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서이연은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반쯤 늘어뜨린 눈꺼풀 아래 눈물을 반짝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임 대표님과 관련이 있나요?”“숨길 필요 없어요, 사람을 시켜 이미 CCTV를 확인했으니까. 어젯밤 9시쯤 매니저가 당신을 부축해서 차를 타고 떠날 때 다리는 이미 부러져 있었죠. 그날 밤 제 방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맞나요?” 임구택의 어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했다.손님의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천위 호텔은 카메라가 객실 창문을 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서이연이 어디서 뛰어내렸는지는 볼 수 없지만,
여인이 달려들며 손에 들고 있던 꽃들은 소희의 몸에 던져졌다. 힘껏 소희를 뒤로 밀치고는 소연을 품에 끌어안았다.진원은 긴장한 채 소연의 몸을 살펴보며 물었다. “다친 거야? 혹시 피났어? 어디 아프니?”이슬을 머금은 꽃잎이 온 바닥에 흩어지고 꽃의 가시가 소희의 목덜미를 찔러 따끔거렸다. 그녀는 여인의 긴장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소정인은 이내 다가와 소희에게 물었다.“안 다쳤니?”진원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무서운 눈빛으로 소희를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야, 소연이를 죽이려는 거니?”소희는 여인의 눈에 비친 혐오와 원한을 보고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소연은 소희를 한 번 쳐다보고는 급히 진원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엄마, 오해예요. 제가 언니한테 머리 좀 잘라달라고 했어요. 언니는 절 다치게 하지 않았어요.”“그렇구나!”소정인은 ‘하하’하고 웃으며 진원을 원망했다. “당신은 항상 너무 급해서 문제야. 무슨 일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화부터 낸단 말이야. 당신 때문에 소희 옷이 다 더러워졌잖아.”진원은 자신이 소희를 오해했다는 것을 깨닫고 무안해하며 변명했다. “들어오자마자 소희가 가위를 소연이의 목에 대고 있길래... 머리를 자르는 건줄도 모르고...”“그만 해!”소정인은 진원에게 눈짓을 하고는 소연에게 말했다. “언니 데려고 가서 옷 좀 갈아입혀. 옷이 다 더러워졌네.”“언니, 이리 와!”소연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희는 어깨의 꽃잎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2층 침실로 들어가자 소연이 사과했다. “언니, 정말 미안해, 엄마가 이 시간에 돌아올 줄 몰랐어. 나 때문에 언니가 다쳤네.”“너 때문이 아니야!”소희의 순수한 얼굴에는 한 줄기 미소를 띠고 있었다.소연은 옷방에 가서 흰색 티셔츠를 가져와 소파에 놓았다. “언니, 이건 새거야, 한 번도 안 입었어. 옷 갈아입어, 난 내려가서 기다릴게.”“응.”소연이 문을 닫자 소희는 소파 위의 옷을 보며 안색이 흐려졌다. 한쪽에서는 머리를 잘라달라
고규선은 눈물을 훔치며 애원하듯 말했다.“제 아들은 일부러 임유진 양을 친 게 아니에요! 누군가에게 속아서 유인당한 거예요. 그 길로 가게 된 것도, 마침 부딪힌 것도 모두 우연이었어요.”“제가 아무리 변명해도, 결국은 제 아들이 경솔한 행동으로 다치게 한 게 사실이죠.”“하지만 지금 제 아들은 두 다리가 부러진 채 갇혀 있고, 이렇게 오래 갇혀 있었으니 벌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잖아요!”“한 번 만나러 가는 것도 쉽지 않다니.”고규선은 흐느낌을 더 심하게 삼키며 말을 이었다.“건수가 사고를 당한 후, 그의 할머니는 병상에 누운 채로 한 번도 일어나지 못했어요.”“지금 병원에 있는데, 솔직히 얼마 남지 않았어요. 죽기 전에 손주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는데.”“임씨 집안 사람들과는 만날 수도 없고, 그래서 이렇게 사장님께 간청하러 왔어요. 제발 부탁이에요.”“임씨 집안이 한 번만 너그럽게 봐주고, 제 아들을 풀어주도록 도와주세요!”서선영은 휴지 한 장을 건네며 말했다.“건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잖아요. 사고라는 게 늘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법이죠.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일이에요.”“하지만 임씨 가문에서 화가 난 것도 충분히 이해돼요. 유진 양이 완전히 회복되면, 언젠가는 마음을 풀고 건수를 풀어줄 거예요.”고규선은 눈물을 닦으며 흐느꼈다.“이 한 달 넘게 제대로 된 잠도 못 잤어요. 매일 꿈속에서도 제 아들이 안에서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떠올라요.”“다리는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겠어요. 설사 풀려나더라도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요!”서선영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임구택 사장님도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는 것 같아요. 어차피 벌을 받았는데, 좀 봐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고규선은 휴지를 꽉 쥔 채 눈물 속에서도 분노를 숨기며, 다시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은정을 바라보았다.“사장님, 제발 부탁드려요. 임씨 집안과 친분이 두터우시니까, 한 번만 사정 좀 해주세요. 혹시라도 화가 아직 안 풀렸다면, 제가 대신
은정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감사해야 할까?”유진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게까지 격식 차릴 필요 없어요. 집안끼리 친한 사람들인데요.”유진의 장난스러운 한마디에 은정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하지만 유진의 입장에서는 오후 내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한층 가까워졌다고 느꼈다. 그랬기에 그저 가벼운 농담을 한 것뿐이었다.그러나 은정의 마음은 달랐다. ‘유진인 나를 친척처럼 생각하고 있네.’유진은 운전기사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이제 집에 가야겠어요. 우리 다음 주에 또 봐요!”은정은 문득 물었다.“집에서 너 오늘 나랑 만나는 거 알고 있어?”유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몰라요.”사실 유진도 왜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할머니가 어디 가냐고 물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은정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숨겼다.은정의 깊은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고,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질였다.“그러면 당분간은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왜요?”유진은 묘한 눈빛을 띠며 장난스럽게 웃었다.“혹시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 선생님 노릇을 하는 게 자존심 상해서 그래요?”이에 은정은 유진의 말에 맞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조금은 그렇지.”유진은 씩 웃으며 말했다.“알겠어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은정은 깊은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다시는 널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유진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의 뜻밖의 말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휴대폰이 울렸다. 운전기사가 도착한 것이었다.은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진을 휠체어에 앉히고, 직접 밖까지 데리고 나갔다. 임씨 집안의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며 다가와, 휠체어를 밀어 그녀를 차에 태웠다.유진은 다시 한번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책 보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요!”그 말에 은정은 냉철한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곧 빠르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임유진은 이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유진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화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비 오는 날에 저렇게 빨리 달리다니, 목숨이라도 버리겠다는 건가?”유진이 말을 할 때, 부드러운 숨결이 구은정의 목덜미를 스쳤다. 은정은 휠체어 팔걸이를 잡은 채 팔에 힘을 주었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은정은 유진의 눈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너무 신경 쓰지 마. 자기 목숨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인데, 네가 대신 화낼 필요 없어.”이에 유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맑고 또렷한 눈동자로 말했다.“그 말도 맞네요!”은정은 여전히 몸을 굽힌 채 휠체어 팔걸이에 손을 올린 상태였다. 그의 깊은 눈동자가 어둡게 빛나며 조용히 말했다.“오늘 안 올 줄 알았어.”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유진은 다소 불편함을 느끼며 몸을 휠체어 등받이에 바짝 붙였다. 그러면서도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처음엔 정말 잊고 있었어요. 다행히 나중에 생각났지만요!”유진이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 한다는 걸 알아챈 은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한 손으로 우산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유진의 휠체어를 밀며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서점 안에 자리 잡고 앉은 후, 유진은 주위를 둘러보며 웃었다.“오늘 정말 조용하네요!”이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적으니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은정이 싫어하는 비 오는 날도 오늘은 그다지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유진은 따뜻한 밀크티 한 잔을 주문한 후, 은정을 바라보며 물었다.“언제 왔어요?”그러자 은정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점심 먹고 나서.”유진은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오래 기다린 건 아니네요! 좋아요, 그러면 우리 이렇게 해요. 앞으로 매주 토요일 오후 이곳에서 만나기로 해요. 만약 내가 못 오게 되면 미리 전화할게요.”그 말에 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유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소희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은 결국 유진이 스스로 결정할 일이었다.다음 날, 토요일.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았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유민은 유진과 함께 게임을 했다. 유진의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빠져들었다.유민과 소희가 유진을 도와 게임을 진행하며 오전 내내 곁에서 지원해 주었고, 마침내 초보자인 유진의 레벨을 20까지 올리는 데 성공했다.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게임 이야기를 나누며 열띤 대화를 이어갔다. 우정숙은 유진과 유민이 티격태격 장난치는 모습을 보며 이 광경이 무척 따뜻하게 느껴졌다.점심을 다 먹고 난 후, 유진은 방으로 돌아가 쉬면서 뭔가 잊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지난주 서점에서 산 책을 보고 나서야 떠올렸다. 토요일에 구은정을 만나기로 했던 약속이었다.당시 완전히 확답을 한 건 아니었지만, 첫 약속부터 가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유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이에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휠체어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위해 움직였다.거실에서는 우정숙과 노정순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외출 준비를 하는 유진을 보고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밖에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어디 가려고?”유진은 머뭇거리며 답했다.“아까, 이제야 생각났어요. 친구랑 만나기로 했어요.”노정순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취소하면 안 돼?”유진은 단호하게 말했다.“이미 오래전에 약속한 거예요!”우정숙은 우산을 들고 유진을 배웅하며 말했다.“일찍 돌아와.”“알겠어요!”운전기사는 이미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우정숙이 건네준 우산을 받아 들고, 유진을 부축해 차로 이동시켰다.우정숙은 유진이 차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제야 거실로 돌아갔다....서점.비가 내려서인지, 오늘 서점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구은정은 소파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
집으로 돌아온 유진은 점심을 먹고 방으로 들어가 새로 산 책을 펼쳤다. 그러다 문득 구은정이 떠올랐다.유진은 휴대폰을 꺼내 그의 번호를 저장한 뒤, 친구 추가를 했다. 몇 초 뒤, 곧바로 친구 추가가 승인되었다.유진은 호기심에 구은정의 프로필을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피드는 텅 빈 상태였다.유진은 카카오톡을 열어 방연하에게 은정의 연락처를 보내며 메시지를 남겼다.[은정 삼촌의 카톡이야. 내가 대신 받아놨으니까 얼른 감사 인사해!]곧 연하에게서 답장이 왔다.[고마워, 전하! 다음에 밥 한 끼 쏠게.]연하의 집은 강성에서 미술품 사업을 하고 있었다. 엄청난 부자는 아니었지만, 경제적으로 충분히 여유 있는 집안이었다.연하의 성격은 유쾌하고 시원시원해서, 유진과도 금세 친해졌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한편, 은정은 헬스장에서 땀을 흘리며 운동하고 있었다. 그는 방금 유진의 친구 요청을 승인한 참이었다.하지만 아직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지 못한 채, 또 하나의 친구 요청을 받았다.이번에는 방연하였고, 은정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요청을 승인했다. 그리고 연하의 프로필 사진을 보다가, 피드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그것은 유진의 생일 파티에서 찍은 사진들이었다. 연하는 그날의 모습을 여러 장 올려두었고, 거의 모든 사진 속에 유진과 여진구가 함께 있었다.진구가 유진에게 차를 선물하는 모습, 꽃으로 가득한 정원에서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 함께 케이크를 자르는 장면까지. 단체 사진에서도 두 사람은 가까이 서 있었다.은정의 가슴 한쪽이 묘하게 답답해졌다. 그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유진이 모든 걸 잊고, 결국 진구를 사랑하게 되는 걸까?유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럼 지금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은정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그 불안감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일주일 후, 유진은 대부분의 시간을 걸음 연습에 집
그러면서도 유진은 이상하다고 느꼈다. 자기 여자친구가 키우던 동물인데, 왜 그런 의미 있는 팔찌를 자신에게 선물한 걸까?은정은 시선을 내리깔고 천천히 커피를 저었다.“하지만, 우린 헤어졌어.”유진은 아하 하고 이해했지만, 조금 어색해졌다. 그러고는 가볍게 위로했다.“괜찮아요. 갈등이 풀리면 다시 잘 될 수도 있어요.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함께할 수 있을 거예요.”은정은 깊은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네 말이 맞다고 생각해. 우리는 다시 함께할 거야.”유진은 밝게 웃었는데, 그 미소는 따뜻하고 생기 넘쳤다. 유진은 커피를 반쯤 마신 후, 책상 위의 휴대폰이 진동하는 걸 보고 화면을 확인했다.그런 다음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집 기사님이 도착했어요. 이제 가야겠어요!”그때, 은정이 갑자기 물었다.“유진아, 전공이 뭐야?”유진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바로 대답했다.“경제학과 금융관리요.”은정은 온화한 눈빛으로 말했다.“그럼 나한테 부탁 하나 해도 될까? 요즘 이쪽 분야의 지식이 필요해서. 매주 토요일마다 여기 올 텐데, 시간 되면 와서 가르쳐 줄 수 있어?”유진은 자신이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도전이 재미있을 것 같았다.그래서 유진은 흔쾌히 대답했다.“좋아요! 그런데 매주 토요일마다 시간이 되는 건 아니에요.”“괜찮아. 시간이 되면 오면 돼.”“좋아요!”유진은 휴대폰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했다.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은정도 동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아까처럼 아무런 예고 없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이번에는 유진도 별로 놀라지 않고, 오히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은정의 이목구비는 뚜렷했고, 턱선이 날카로웠으며 면도가 잘 돼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늘 그렇듯 차분하고 단호했다.농담조차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으나, 이상하게 불쾌한 느낌은 들지 않고, 오히려 더 편안했다.은정은 조심스럽게 유
생일이 지나고 나서, 임유진의 일상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방 안에서 천천히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여진구는 여전히 자주 찾아왔고, 두 사람은 장난치고 티격태격하며 더 가까워졌다.금요일 오후, 서점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임유진 씨, 주문하신 다른 버전의 책이 도착했어요.]지난번 재고가 없어 전화번호를 남겼는데, 마침 입고가 된 것이었다. 유진은 옷을 갈아입고 운전기사에게 서점으로 가자고 했다.평일이라 그런지 서점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잔잔한 커피 향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시간 보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유진은 주문했던 책을 찾고, 책장을 둘러보며 한동안 머물렀다. 그러다가 오랫동안 책을 살펴보다가 목이 마르다는 생각이 들었다.유진은 책을 안은 채 휠체어를 움직여 카페 구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자, 창가 소파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이에 유진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남자는 훤칠한 몸을 소파에 편안하게 기댄 채 앉아 있었다.길게 뻗은 다리 위에는 펼쳐진 책이 놓여 있었고, 한쪽 팔은 소파 팔걸이에 걸쳐 둔 채 손가락 끝을 입가에 살짝 대고 있었다. 창밖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그때 작은 소리가 들리자,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유진을 보자마자,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짙은 눈빛이 더 깊어지며,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유진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삼촌, 또 마주치네요? 정말 우연이에요!”은정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여 다가왔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도와줄까?”카페 구역은 바닥보다 한 단 높은 곳에 있어, 휠체어로는 올라갈 수 없었다.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제 걸을 수 있어요. 다만 오래 서 있지는 못해요.”그러면서 책을 내려놓고 팔걸이를 잡고 천천히 일어섰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탓인지 다리가 저려서 움직임이 더뎠다.은정은 유진의 움직
유진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며, 조용히 소원을 빌었다. 그러고 나서 촛불을 불어 껐다.순간 주위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여진구가 유진과 함께 케이크를 잘랐다. 반대편에 서 있던 우정숙은 온화한 미소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곁에 있던 임지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여진구, 참 괜찮은 아이예요. 유진이한테도 정말 잘하고요.”이에 임지언은 온화한 눈빛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유진이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우정숙의 시선이 유진의 순수한 미소에 머물렀다.“진구는 늘 유진의 곁에 있어 주고, 유진이도 행복해 보여요. 아마 좋아하지 않을까요?”임지언은 담담하게 말했다.“유진이가 행복하면, 난 상관없어.”우정숙은 갑자기 구은정을 떠올렸다. 예전에 유진이가 은정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도, 유진이가 행복하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은정은 유진을 향한 감정을 확신하지 못했고, 그것이 결국 그 사고로 이어졌다.며칠 전, 우정숙은 의사와 상담을 했다. 의사는 유진의 기억 상실이 심리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했다.혹시 유진이 기억을 억지로 지워버림으로써 마음의 상처를 남기지는 않을지, 감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웠다.의사는 유진과 자주 대화하며 현재 상태를 면밀히 살펴보라고 조언했다. 유진은 최근 출장도 줄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에게 집중했다. 그랬기에 온 가족이 평소보다 더 신경을 쓰고 유진을 챙겼다.하지만 유진은 정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기억을 잃은 유진은 전혀 흔들림 없이 평온했고, 은정을 잊은 이후로 아무런 미련도 없어 보였다.어쩌면, 은정은 유진에게 정말로 지나간 사람이 된 걸지도 모른다. 유진은 언젠가 진구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 순간이 오면, 잊힌 기억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오후, 손님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고, 유진도 피곤해져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도우미들은 모든 선물을 그녀의 방으로 옮겨놓았다. 유진은 몇 개를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다시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왔다. 그리고 시간이 거의 다 됨에 따라, 임유진을 위한 깜짝 생일 이벤트 준비를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잔디밭에 일렬로 정렬된 드론들이 차례로 이륙하여 정원 한가운데로 향했다.유민을 포함한 여섯 명의 아이는 각자 두세 개의 리모컨을 조작하며, 한쪽으로는 화면을 확인하고 한쪽으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풋풋하고 앳된 얼굴들이 진지하게 집중하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드론들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공중에서 멈췄고, 이후 서서히 변형되더니 마침내 한 사람의 형상이 완성되었다.특수한 조명 효과 덕분에, 지상에서 올려다보면 패션 감각이 돋보이는 댄서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처럼 보였다.정원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경쾌한 음악이 공중에 울려 퍼졌고, 드론으로 형성된 댄서는 힘차게 몸을 흔들었다.때로는 열정적이고 때로는 익살스럽게, 현대무용과 전통무용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춤을 췄다. 과학기술 느낌이 물씬 나는 로봇이 갑자기 우아한 전통 무용을 추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다.유진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돌려 유민을 찾았다. 멀리서 장시원이 공중에서 펼쳐지는 멋진 공연을 바라보다가 임구택을 향해 말했다.“이거 유민이가 준비한 거지?”구택이 힐끗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게다가 직접 프로그램까지 짜서 만든 거야.”시원이 감탄하며 혀를 찼다.“역시 네 조카답네!”‘이 집안은 대체 얼마나 머리가 좋은 거야? 인정할 수밖에 없네!’춤이 끝나자 드론들은 원래 형태로 돌아왔고, 공중에서 몇 바퀴 회전하더니 색색의 리본과 꽃을 뿌리며 마지막을 장식했다.모든 사람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박수를 보냈다. 이에 유진은 바로 유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디야? 빨리 나와서 칭찬 좀 받아!”유민이 웃으며 말했다.[마음에 들었어?]유진도 웃으며 대답했다.“완전 좋았어! 이거 나를 위해 특별히 만든 거야?”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