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빠르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임유진은 이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유진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화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비 오는 날에 저렇게 빨리 달리다니, 목숨이라도 버리겠다는 건가?”유진이 말을 할 때, 부드러운 숨결이 구은정의 목덜미를 스쳤다. 은정은 휠체어 팔걸이를 잡은 채 팔에 힘을 주었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은정은 유진의 눈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너무 신경 쓰지 마. 자기 목숨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인데, 네가 대신 화낼 필요 없어.”이에 유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맑고 또렷한 눈동자로 말했다.“그 말도 맞네요!”은정은 여전히 몸을 굽힌 채 휠체어 팔걸이에 손을 올린 상태였다. 그의 깊은 눈동자가 어둡게 빛나며 조용히 말했다.“오늘 안 올 줄 알았어.”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유진은 다소 불편함을 느끼며 몸을 휠체어 등받이에 바짝 붙였다. 그러면서도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처음엔 정말 잊고 있었어요. 다행히 나중에 생각났지만요!”유진이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 한다는 걸 알아챈 은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한 손으로 우산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유진의 휠체어를 밀며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서점 안에 자리 잡고 앉은 후, 유진은 주위를 둘러보며 웃었다.“오늘 정말 조용하네요!”이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적으니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은정이 싫어하는 비 오는 날도 오늘은 그다지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유진은 따뜻한 밀크티 한 잔을 주문한 후, 은정을 바라보며 물었다.“언제 왔어요?”그러자 은정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점심 먹고 나서.”유진은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오래 기다린 건 아니네요! 좋아요, 그러면 우리 이렇게 해요. 앞으로 매주 토요일 오후 이곳에서 만나기로 해요. 만약 내가 못 오게 되면 미리 전화할게요.”그 말에 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유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은정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감사해야 할까?”유진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게까지 격식 차릴 필요 없어요. 집안끼리 친한 사람들인데요.”유진의 장난스러운 한마디에 은정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하지만 유진의 입장에서는 오후 내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한층 가까워졌다고 느꼈다. 그랬기에 그저 가벼운 농담을 한 것뿐이었다.그러나 은정의 마음은 달랐다. ‘유진인 나를 친척처럼 생각하고 있네.’유진은 운전기사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이제 집에 가야겠어요. 우리 다음 주에 또 봐요!”은정은 문득 물었다.“집에서 너 오늘 나랑 만나는 거 알고 있어?”유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몰라요.”사실 유진도 왜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할머니가 어디 가냐고 물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은정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숨겼다.은정의 깊은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고,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질였다.“그러면 당분간은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왜요?”유진은 묘한 눈빛을 띠며 장난스럽게 웃었다.“혹시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 선생님 노릇을 하는 게 자존심 상해서 그래요?”이에 은정은 유진의 말에 맞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조금은 그렇지.”유진은 씩 웃으며 말했다.“알겠어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은정은 깊은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다시는 널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유진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의 뜻밖의 말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휴대폰이 울렸다. 운전기사가 도착한 것이었다.은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진을 휠체어에 앉히고, 직접 밖까지 데리고 나갔다. 임씨 집안의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며 다가와, 휠체어를 밀어 그녀를 차에 태웠다.유진은 다시 한번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책 보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요!”그 말에 은정은 냉철한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고규선은 눈물을 훔치며 애원하듯 말했다.“제 아들은 일부러 임유진 양을 친 게 아니에요! 누군가에게 속아서 유인당한 거예요. 그 길로 가게 된 것도, 마침 부딪힌 것도 모두 우연이었어요.”“제가 아무리 변명해도, 결국은 제 아들이 경솔한 행동으로 다치게 한 게 사실이죠.”“하지만 지금 제 아들은 두 다리가 부러진 채 갇혀 있고, 이렇게 오래 갇혀 있었으니 벌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잖아요!”“한 번 만나러 가는 것도 쉽지 않다니.”고규선은 흐느낌을 더 심하게 삼키며 말을 이었다.“건수가 사고를 당한 후, 그의 할머니는 병상에 누운 채로 한 번도 일어나지 못했어요.”“지금 병원에 있는데, 솔직히 얼마 남지 않았어요. 죽기 전에 손주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는데.”“임씨 집안 사람들과는 만날 수도 없고, 그래서 이렇게 사장님께 간청하러 왔어요. 제발 부탁이에요.”“임씨 집안이 한 번만 너그럽게 봐주고, 제 아들을 풀어주도록 도와주세요!”서선영은 휴지 한 장을 건네며 말했다.“건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잖아요. 사고라는 게 늘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법이죠.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일이에요.”“하지만 임씨 가문에서 화가 난 것도 충분히 이해돼요. 유진 양이 완전히 회복되면, 언젠가는 마음을 풀고 건수를 풀어줄 거예요.”고규선은 눈물을 닦으며 흐느꼈다.“이 한 달 넘게 제대로 된 잠도 못 잤어요. 매일 꿈속에서도 제 아들이 안에서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떠올라요.”“다리는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겠어요. 설사 풀려나더라도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요!”서선영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임구택 사장님도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는 것 같아요. 어차피 벌을 받았는데, 좀 봐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고규선은 휴지를 꽉 쥔 채 눈물 속에서도 분노를 숨기며, 다시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은정을 바라보았다.“사장님, 제발 부탁드려요. 임씨 집안과 친분이 두터우시니까, 한 번만 사정 좀 해주세요. 혹시라도 화가 아직 안 풀렸다면, 제가 대신
서선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요즘 회장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바깥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으세요. 하지만 오늘 컨디션이 좀 나아지시면, 한 번 부탁드려볼게요.”고규선은 감격한 표정으로 말했다.“여사님, 정말 감사해요! 제 아들이 풀려날 수만 있다면, 제가 무릎이라도 꿇겠어요!”“그렇게까지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어요.”서선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우린 이렇게 오래 알고 지냈잖아요.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는 게 당연하죠.”“고마워요!”고규선은 거듭 감사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고규선은 더 오래 머물지 않고 곧장 자리를 떠났다.위층구은정은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임유진이 정리해 준 필기 노트를 보고 있었다. 그는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었지만, 넉넉한 옷 사이로도 완벽한 체형이 드러났다.애옹이는 은정의 다리 위에 둥글게 몸을 말고 있었다. 작고 포근한 생명체가 은정의 차가운 분위기를 약간은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듯했다.갓 인쇄된 책에서 나는 잉크 향이 방 안을 은은하게 감쌌고, 은정은 그 향기에 둘러싸여 점점 마음을 가라앉혔다.노트 속 필체는 단정하고 정갈했다. 한 획, 한 획 정성 들여 쓴 것이 보였고,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훈련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은정은 낮에 책상에 앉아 집중해서 필기하던 유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심지어 유진의 짙고 긴 속눈썹이 피부 위로 드리운 연한 그림자까지도 선명하게 기억났다.‘사랑이란 이런 느낌이구나.’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유진의 작은 움직임조차도 신경 쓰이고, 만나지 못하면 그리워지고, 만나면 더 보고 싶고.문득 은정은 예전에 유진이 매일 아침과 밤마다 인사를 건네던 일이 떠올랐다. 유진은 단지 은정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자신도 같은 이유로 핑곗거리를 만들어 유진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저 짧게라도 유진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야옹!”애옹이가 은정의 가슴에 앞발을 올리고, 투명한 크리스탈처럼 맑은 갈색 눈으로 그를 바라보
서선영은 무심한 듯 말했다.“누가 알아요? 아마도 임씨 가문의 편을 들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겠죠.”고규선은 흐느끼며 말했다.[알겠어요. 어쨌든, 이렇게까지 도와주려 해주셔서 감사해요, 여사님.]“별말씀을요. 결국 아무 도움도 못 줬는데요. 그래도 은정의 기분이 좀 풀리면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볼게요.”[고마워요. 정말 신세 많이 졌어요.]고규선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억울함과 분노가 점점 더 깊어졌다.그 후 그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구씨 가문에 대해 한마디씩 불만을 내뱉기 시작했다. 특히 구은정에 대한 험담은 더욱 심했다.그가 오랫동안 외국에서 온갖 타락한 생활을 즐기고, 유흥과 도박, 방탕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점점 부풀려지면서, 심지어 은정이 마약에 손을 댔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온갖 더러운 소문이 그의 이름과 함께 퍼졌다.처음에는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서만 떠돌던 이야기였는데, 점차 퍼져 나갔다. 서선영도 몇 번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누군가 직접 물어오면 애매하게 말을 흐리며 괜한 소문 퍼뜨리지 말라고만 했다.그렇게 서선영의 그 모호한 태도가 오히려 소문을 더욱 확신하게 만들었다.정작 구은정 본인은 이런 소문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그는 회사 업무로 바빴다. 갓 회사를 맡았기에 매일 새로운 문제가 터졌지만, 은정은 철저하고 냉철한 태도로 하나하나 해결해 나갔다.은정의 강단 있고 결단력 있는 스타일 덕분에, 최소한 이제는 더 이상 함부로 그를 무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예전처럼 대놓고 무시하거나 무례하게 대하는 이들은 완전히 사라졌다.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토요일은 반드시 시간을 비워두었다. 왜냐하면 임유진과의 약속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원래 오후에 만나기로 했지만, 은정은 늘 오전부터 서점에 가서 유진을 기다렸다. 유진을 한 주 동안 기다린다는 사실은 은정으로 하여금 설레게 했다.유진은 시간을 지켜 도착했고, 이번에는 스스로 차에서 내려 걸어왔다. 유진은 작은 디저트를 두 개
여자 화장실 안은 모두 개별 칸으로 되어 있었다. 유진을 찾으러 들어온 여학생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부드럽게 불렀다.“임유진 씨? 혹시 여기 계세요?”마침 손을 씻고 있던 유진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저예요.”여학생은 안심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남자친구분이 밖에서 찾고 있어요. 기다리다가 걱정되신 것 같아요.”‘남자친구?’유진은 눈을 반짝이며 순간적으로 구은정을 떠올렸다. 그러더니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유진은 손을 말끔히 닦은 후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은정을 발견한 그녀는 미안한 듯 웃었다.“오면서 살롱 강연이 열리고 있길래 잠깐 들렀어요. 거기 강사가 예전에 같은 학교 선배더라고요. 그래서 잠시 이야기하다가 늦었어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은정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별일 없으면 됐어.”두 사람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임유진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아까 도와준 애가 삼촌을 내 남자친구라고 하던데, 나 진짜 웃겨서 혼났어요!”“삼촌이랑 나이 차이도 꽤 나는데, 말도 안 되잖아요. 삼촌은 그냥 삼촌이지, 어떻게 남자친구겠어요?”유진은 깔깔 웃으며 걸어갔다. 그러나 정작 옆에 있는 은정의 얼굴은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자리로 돌아와서도 은정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툭 던졌다.“어떤 남자친구를 만날 거야? 또래 남자?”유진은 책을 넘기면서 무심히 말했다.“내가 남자친구가 없다는 거 어떻게 알아요?”은정은 즉시 고개를 들었다.“너 남자친구 있어?”‘여진구와 사귀기로 한 건가?’유진은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은정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없어요!”은정은 한숨을 내쉬었는데, 숨소리는 꽤 묵직했다. 순간적으로 유진을 번쩍 들어 올려 엉덩이를 두 대 정도 찰싹 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겨우 참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유진은 태연하게 책을 다시 펼치며 말했다.“이제 공부하죠.”은정도 따라 책
8월 하순이 되었지만, 여전히 날씨는 무더웠다.임유진은 다시 출근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반면 여진구는 별로 급할 게 없었다. 어차피 진구는 언제든 임씨 저택에 올 수 있었고, 두 사람은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한 주가 금세 지나갔다. 금요일 퇴근 후에도 구은정은 사무실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때 방연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구은정 씨, 퇴근하셨죠? 주말에 일정 있으세요?]은정은 메시지를 무시한 채 휴대폰을 내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곧바로 연하에게서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괜찮은 캠핑장이 있는데, 주말에 가볼래요? 유진이도 같이 가자고 해요!]은정은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연하에게 답장을 보냈다.[어디죠?]연하는 예상치 못한 답장에 흥분한 나머지 손이 떨려서 제대로 타자를 치기도 힘들었다.[남애산이요. 시내에서 세 시간 정도 거리인데, 저번에 한 번 갔었거든요. 풍경이 끝내줘요! 캠핑 장비도 다 준비해 뒀어요.][내일 몇 시 출발하죠?]연하는 막 집에 도착해 소파에 털썩 앉으며 신나게 답장을 보냈다.[아침 7시에 괜찮아요? 시간은 은정 씨가 정하세요. 저는 언제든 좋아요!][좋아요.]연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아아! 드디어 약속 잡았어!”이윽고 연하는 바로 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유진아, 나 구은정 씨랑 약속 잡았어!”유진은 재활 훈련을 마치고 땀을 한가득 흘린 채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녀는 연하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진짜? 첫 데이트는 어디 가는데?]연하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캠핑하러 갈 거야!”유진은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첫 데이트가 캠핑이야? 너무 과감한데?]연하는 한 박자 쉬더니 피식 웃었다.“뭐야, 무슨 생각하는 거야? 난 그냥 같이 있는 시간을 늘리고, 나를 더 잘 알게 하고 싶을 뿐이야.”그러더니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그리고 너도 같이 가야 해!”유진은 갑작스러운 말에 할 말을 잃었고, 곧 황당한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유진이 임씨 저택의 대문을 나서자,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바로 맞은편, 검은색 지프 랭글러가 서 있었다. 구은정은 차에 기대어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담배 끝에서 깜빡이는 불빛이 새벽안개 속에서 마치 희미한 불꽃처럼 빛났다. 이 장면이 왠지 익숙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기시감.유진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생각을 더듬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몇 번인가, 밤에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볼 때, 대문 밖의 차에 기대어 서 있는 실루엣이 보였었다.희미한 안개 속에 가려져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지만, 이 순간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하지만 설마 은정이 일부러 자기 집 앞에 왔을 리가 없었다.유진은 스스로 착각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은정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껐다.새벽안개 속에서도 은정의 깊고 날카로운 눈빛이 더욱 어둡게 빛났다. 은정은 몸을 바로 세우고 입을 열었다.“방연하가 우회해서 오는 길이 멀다고 해서, 내가 먼저 왔어.”유진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삼촌.”은정은 얕게 입꼬리를 올렸다.“뭐 그렇게 정중해? 너 매주 공짜로 나한테 수업해 주고 있는데, 아직 월급도 못 줬잖아.”유진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서로 정중한 건 이제 그만하기로 해요!”“좋아.”은정은 유진의 배낭을 받아 뒷좌석에 넣었다. 휠체어와 보온 도시락도 트렁크에 실은 후,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그때, 누군가 유진을 불렀다.“유진아!”멀리서 다가오는 익숙한 목소리. 유진은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할아버지!”은정도 걸어가 정중하게 인사했다.“회장님.”임시호는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어디 가는 길이냐?”유진이 설명했다.“친구들이랑 놀러 가요. 오늘 야외에서 캠핑하고, 내일 돌아올 거예요. 할머니께 미리 말씀드렸어요!”임시호는 원래 유진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 편이었다
부신명은 고영해의 표정을 보며 더 화가 치밀었다.“그럼 당신,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고영해는 급히 해명했다.“그렇게 일찍 안 건 아니에요. 최근 이틀 사이에야 겨우 소식을 들었고, 오늘도 최이석한테 전화했는데, 그 사람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어요.”“인정할 리가 있나?”부신명은 분노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인정하면 지금까지 받아 챙긴 돈 다 토해내야 하니까.”그는 냉랭한 눈빛으로 고영해를 쏘아봤다.“회사가 최이석한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들였는지 알아요? 당신은 자신만만하게 꼭 이 프로젝트 따내겠다고 장담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이게 뭐죠?”부신명은 탁자 위를 세게 내리쳤다.“내일 당장 짐 싸서 나가요!”고영해는 면박을 당해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입술을 깨물었고, 속으로는 온통 최이석에 대한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이 지경까지 만든 게 다 최이석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같이 망하자.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다음 날구씨그룹 인사부와 이사회 일부 고문들의 이메일에는 한 통의 실명 고발장이 도착했다.유지그룹 영업팀 본부장 고영해가 보낸 것으로, 그는 최이석이 먼저 뇌물을 요구하며 협상을 조건으로 걸었다고 고발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거액의 이체 기록과 녹취 증거까지 포함되어 있었다.이에 모두가 이 고발장을 받고 충격에 빠졌다.구은정은 증거의 진위를 조사하게 했고, 확인을 마친 뒤 회의석상에서 서성 앞으로 서류를 던지듯 내밀며 차갑게 말했다.“조사해 보니 더 충격이네요. 유지그룹 건만이 아니에요. 최이석이 맡은 프로젝트는 전부 사익을 취했어요.”“이 사람, 당신이 데리고 온 인물이죠? 어떻게 처리하실 건가요?”서성은 눈앞에 놓인 자료들을 보며 얼굴이 일그러졌다.“정말 최이석이 이렇게 대담할 줄은 몰랐어요!”그는 고개를 들고 은정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회사는 최이석을 해고해야 해요. 저는 절대 감싸거나 묵인하지 않을 거예요!”“해고요?”은정은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다.“이미 법무팀에 고소 진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임유진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고, 유진이 멀어지자 그제야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구씨그룹과의 계약은 여전히 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최이석은 최근 구은정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으니 더욱 조심해야 한다며, 여러 단계를 더 거쳐서 확실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었다.사실 잘 알고 있었다. 최이석이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는 속셈이라는 걸. 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양보를 한 상태였다.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양쪽은 암묵적으로 팽팽하게 대치 중이었고 이석의 약점을 쥐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이석이 몰래 여씨그룹과 접촉해 유지그룹과 여씨그룹 사이를 오가며 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가 더 많은 돈을 주느냐에 따라 결국 그쪽과 손을 잡을 셈이었다.고영해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 자신이 최이석에게 준 돈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충동적으로 나설 수 없었다.눈동자를 굴리던 그는 일부러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 4층 버튼이 눌린 걸 확인했다.그 순간, 예약해둔 고객의 전화가 울렸다.“왜 아직 안 오셨어요?”[곧 가요.]고영해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임유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도착했지만 내리지 않고 다시 1층 버튼을 눌렀다. 자리에 돌아온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구은정에게 말했다.“사람이 많아서 조금 기다렸어요.”음식은 이미 하나둘씩 나오고 있었고, 은정은 그녀에게 음식을 덜어주며 말했다.“일단 식사부터 하자.”요리는 꽤 괜찮았다. 재료는 신선했고, 요리사의 솜씨도 뛰어났지만 유진은 많이 먹지 않았다.레스토랑 내부는 품격 있고 세련되게 꾸며져 있었다. 천장에는 중식 스타일의 조각된 펜던트 조명이 달려 있어 분위기를 한층 살려주었고, 그 아래에서 구은정의 이목구비는 더욱 짙어 보였다.은정은 유진을
유진이 요즘 운동을 안 해서 걷고 싶다고 하자, 구은정은 차를 가져오지 않았다.임유진이 중식을 먹고 싶다고 말했고, 마침 한 블록 건너편에 중식 전문점이 있어 두 사람은 걸어서 향했다.하늘은 이미 어둑해졌고, 저녁 시간대라 거리는 번화했다. 네온사인은 반짝이고, 도로 위는 차량과 인파로 북적였다.식당이 거의 다 왔을 무렵, 유진은 길 건너편에서 이벤트 중인 디저트 가게를 발견했다.가게 앞에는 커다란 케이크 조명 간판이 환히 밝혀져 있었고, 예쁘고 유혹적인 분위기였다.유진은 발걸음을 멈추고 맞은편을 바라보며 물었다.“전에 삼촌이 주문해 줬던 타로 크림 롤, 여기 거예요? 맛 괜찮았어요.”은정은 곧장 눈치를 채며 말했다.“내가 다녀올게.”이에 유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고마워요, 삼촌!”은정은 말없이 길을 건너 디저트 가게로 향했고, 유진은 그 자리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5, 6분쯤 지났을까? 은정은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여러 명의 사람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중이었다.키 크고 잘생긴 그는, 냉철한 분위기와 독특한 존재감으로 복잡한 인파 속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이 은정을 향해 자연스레 쏠렸다.번화하고 소란스러운 거리, 은정이 사람들 사이에서 걸어 나와, 손에 디저트를 들고 자신에게 곧장 다가오는 모습은 어딘지 낯익고 익숙했다.유진은 잠깐,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한 착각을 느꼈다. 유진의 앞으로 다가온 은정은 타로 롤케이크를 그녀에게 곧바로 건네지 않았다.“식당 가서 먹자.”그 말에 유진은 기분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좋아요!”식당에 도착해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고, 유진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여기 새로 생긴 식당인가 봐요.”“마음에 들면 자주 오자.”은정의 말에 유진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이번 프로젝트 끝나면 나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할머니께 한 달만 따로 살겠다고 약속했거든요. 그 시간이 거의 다 됐고요.”은정은 순간 멍해졌고, 낮은 목소리로
정현준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가끔은 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구씨그룹 나름대로 고려가 있겠죠.”그의 말은 겉도는 이야기뿐, 전혀 실질적인 조언은 없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런 현준의 말에서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계속 의견을 나눴고, 두 사람은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 꽤 길게 대화를 이어갔다.곽시양의 책상은 유진의 사무실 맞은편에 있어, 현준이 유진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현준은 나올 때, 어딘지 모르게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시양은 직감했다. 현준은 틀림없이 유진에게 소혜를 추천하고 나왔을 것이다.소혜는 부서 신입 중에서도 능력과 학력이 가장 두드러졌고, 현준의 밀어주기가 더해진다면 부팀장 자리는 거의 따놓은 당상일 수 있었다.시양은 생각에 잠긴 듯 눈빛을 번득이며 조용히 자료를 정리했다.유진은 평소처럼 정시에 퇴근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익명의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팀장님, 보고드릴 게 하나 있어요. 구씨 그룹이 우리와 협력하지 않기로 한 건, 담당자인 최이석 부장이 유지그룹 쪽과 친분이 있어서예요.][이미 프로젝트는 유지그룹에 넘기기로 결정됐어요. 진소혜 씨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팀장님께 알리지 않았고요.][팀장님이 실패하게 만들고, 직원들 앞에서 망신 주기 위해서요. 처음부터 이 프로젝트는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팀장님에게 떠넘긴 거예요.][자기는 책임 피하고, 팀장님을 함정에 빠지게 했죠. 이 모든 게 그 사람의 계략이에요.]유진은 메시지를 다 읽고 나서 눈을 반짝이며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받은 쪽은 장난기 어린 여자 목소리였다.“삼촌,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전화를 끊은 유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을 갈아입고는 옆집으로 향했다. 문은 닫히지 않고 반쯤 열려 있었고, 유진은 별다른 예고 없이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구은정은 서재에서 전화를 받는 듯했고, 유진은 소파에 앉아 애옹이를 쓰다듬으며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몇 분 후, 유진의 휴대폰에
정현준이 어색하게 분위기를 풀며 말했다.“소혜 씨는 원래 목표를 정하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스타일이에요. 그런 자세는 우리가 본받을 만하죠.”그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팀장님, 팀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팀장님도 부담스럽다면, 우리 영업팀 쪽이랑 다시 얘기해 볼까요? 그쪽도 이제 이 프로젝트 포기하고 싶어 할 수도 있으니까요.”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자료를 보고 있었다. 소혜의 도발 섞인 말투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감정 기복 없이 차분했다. 속마음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 오히려 상대가 당황할 정도였다.자료를 대략 훑고 나서야, 유진은 마음을 정리한 듯 고개를 들었다.“굳이 물어볼 필요 없어요. 소혜 씨의 기획서 봤는데 문제없더라고요. 이 프로젝트, 제가 직접 구씨그룹과 협의하죠.”소혜의 입가에 알 수 없는 웃음이 번졌다. 소혜는 구씨 그룹에서 이번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부서와 이미 친분을 쌓아두었고, 사실 이 프로젝트는 이미 내부적으로 다른 회사와 협력하기로 내정된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다.결코 우리 쪽으로 넘어올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유진이 이 프로젝트를 맡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그래야 결국 성과를 못 내고 망신을 당하게 되니까.계획이 잘 흘러가자, 소혜는 더욱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역시 팀장님답네요. 저도 열심히 도울게요. 이번 프로젝트 꼭 함께 성공시켜요.”유진은 차분히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그래요, 잘 부탁해요.”이후 이틀 동안, 유진은 구씨그룹 프로젝트 담당자에게 전화를 수차례 걸었다. 하지만 매번 비서가 전화를 받았고, 바쁘다는 이유로 면담은 번번이 거절당했다.유진 측에서 아무런 진전이 없자, 소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조만간 유진이 자진해서 포기할 거라고 믿었고, 그렇게 되면 팀 내에서의 리더십도 자연히 무너지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소혜의 생각은 단 하나였다. 유진은 능력으로 올라온 게 아니라, 인맥으로 자리를 꿰찼다는 걸 모두에게 증명해 보이겠다는 것. 그리고 유진을 꼭
“아니에요, 그냥 오해일 수도 있어요.”유진이 말했다.“만약 방연하가 아직 나를 좋아한다면, 내가 다시 한번 만나서 말할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라고 직접 말할 거야.”구은정의 말에, 유진은 순간 멍해졌다. 눈가가 살짝 붉어졌고, 부드러운 얼굴은 더더욱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그러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누가 말하래요?”그날 서로 솔직하게 얘기한 이후, 며칠 동안 두 사람의 분위기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그런데 은정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좋아한다고 말해버리니, 오히려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몰랐다.은정은 말했다.“솔직히 말해도 안 되는 거야?”유진은 표정을 다잡고, 진지하게 말했다.“나랑은 상관없어요. 연하 안 좋아하면 분명하게 말해요. 괜히 질질 끌지 말고요.”은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가 그런 사람이야?”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효성은 분명 오해하고 있었다. 이 일은 셋이 제대로 마주 앉아 솔직하게 풀어야 할 것 같았다.그때 은정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집에도 안 들르고, 옷도 안 갈아입고 그냥 온 거야? 이거 물어보려고?”“그럼 뭐겠어요?”유진이 코웃음을 치자, 은정은 검은 눈동자를 고정시키며,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난 네가 날 보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유진의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얼굴은 점점 붉어졌고, 마치 연하처럼 화난 척하며 외쳤다.“아니, 삼촌 진짜 안 끝낼 거예요? 계속 이러면, 나 진짜 다시는 안 올 거예요!”은정은 입가를 살짝 풀며, 한발 물러나는 어조로 말했다.“알겠어. 최대한 자제할게.”유진은 그의 웃음소리에 더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애옹이를 내려놓고 벌떡 일어나 말했다.“나 갈래요!”“수업은 안 해?”은정이 묻자, 유진은 어딘가 토라진 말투로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안 해요!”은정은 유진을 배웅하며 문 앞까지 나갔다. 하지만 유진은 등을 돌린 채 문을 닫아버렸고, 단 한 번도 고개를 돌려보지 않았다.은정은 무의식적으로 혀끝으로 어금니
연하는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유진아, 너랑 효성이랑 둘이 쇼핑하러 가. 난 회사에 잠깐 다녀와야 해.”유진은 당황한 듯 물었다.“무슨 일 있어?”“상사가 방금 전화해서 오라고 하셨어.”연하가 말하자, 임유진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그럼 얼른 다녀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우리한테 연락해.”연하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그때 갑자기 장효성이 말을 받았다.“정말 가식적이야. 입만 열면 거짓말이 술술 나오네! 유진아, 그렇게 마음 쓰지 마. 쟤는 애초에 네 도움 필요 없어. 괜히 네 손으로 호랑이 새끼 키우지 마.”연하는 끝까지 참다가, 결국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효성을 노려보았다.“장효성, 너 너무 지나친 거 아니야?”오히려 효성은 침착하게 받아쳤다. “내가 틀린 말 했어? 난 네가 전화 받는 소리 못 들었거든.”연하의 얼굴빛이 굳어졌다. 애초에 임유진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조용히 넘어가려 했는데, 효성이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예의 하나 없이 공격해 온 것이다.유진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조용히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둘 다 왜 이래?”그때 옆자리 손님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것을 본 연하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여기서 싸울 자리는 아니잖아. 나중에 어디 조용한 데서 얘기하자.”“난 딱히 할 말 없어. 그냥 갈래.”효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었고 떠나기 전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남의 남자 훔치는 거에 익숙해진 사람은, 친구 남자친구도 똑같이 건드려. 너도 조심해.”그 말을 끝으로 효성은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유진은 한동안 말이 없었고, 이내 연하를 바라보며 물었다.“효성이, 무슨 말이야?”유진은 효성이 말한 그 사람이 혹시 구은정을 말하는 게 아닐지 생각했다. 그러나 연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효성이가 괜히 오해한 거야. 난 네게 부끄러운 행동한 적 없어.유진아, 나 믿어?”유진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믿지.”“
두 사람이 막 자리에 앉았을 무렵, 연하가 도착했다. 유진에게 전화를 걸어 말하길, 자신은 주차할 곳을 찾는 중이니 먼저 메뉴를 고르라고 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장효성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유진아, 연하까지 부른 거야? 미리 말 좀 해주지.”유진은 웃으며 말했다.“단톡방에 말했는데? 못 봤어?”사실 그날 일 이후, 효성은 연하를 다시는 안 보겠다고 마음먹었고, 셋이 있는 단체 채팅방 알림도 꺼둔 상태였다. 예전에 유진이 왜 채팅방에서 말을 안 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그냥 일이 바쁘다고 둘러댔을 뿐이었다.이에 효성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못 봤네, 정신이 없어서.”곧 연하가 들어왔고,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유진아, 효성아!”효성은 메뉴판을 보는 척하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연하가 다가오는 순간, 옆자리에 자기 가방을 일부러 내려놓았다.연하는 그 행동을 눈치채고 잠시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유진의 옆자리에 앉았다.유진은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길 막혔어?”“아니, 우리 대학 때 자주 가던 케이크 가게 들렀거든. 거기서 디저트 몇 개 샀어.”연하는 말하며 가방에서 디저트 상자를 꺼내 효성의 쪽으로 내밀었다.“효성이, 네가 제일 좋아하던 두리안 파이야.”연하의 화해 제스처는 분명했다. 하지만 효성은 고개조차 들지 않고, 냉담하게 말했다.“괜찮아. 요즘은 그런 냄새 나는 거 싫어해서.”연하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다. 그러나 유진은 아직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서 그저 웃으며 물었다.“예전엔 냄새나도 잘만 먹더니, 입맛 바뀐 거야?”효성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보며 말했다.“그러게. 예전엔 냄새나는 것도 참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보기만 해도 역겨워.”탁. 연하는 파이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입을 열면서는 또다시 화를 억누르고 부드럽게 말했다.“예전에 좋아했다는 건, 그만큼 취향이 맞았다는 뜻이지. 왜 그렇게까지 싫은 티를 내?”효성의 얼굴이
컵 안에는 짙은 갈색의 한약이 담겨 있었고, 향이 진하게 퍼졌다.연하는 소파 위에서 다리를 접고 앉아, 약을 작은 모금씩 천천히 마셨다. 진구는 옆에서 얇은 담요를 가져와 연하의 다리 위에 덮어주며 말했다.“아까 약 달이는 동안 검색해 봤는데, 여자들은 생리 중에 몸이 차가워지면 안 되고, 술 마시는 건 더더욱 안 된대. 너, 진짜 목숨 걸었구나?”연하는 창백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약을 마신 덕분인지 한결 나아졌고, 정신도 조금 돌아온 연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선배, 의외로 따뜻한 남자였네요? 사실 유진이가 선배랑 사귀었어도 꽤 행복했을 것 같아.”진구는 코웃음을 쳤다.“이제야 알아봤어? 지금이라도 후회돼서 도와주고 싶은 거 아냐?”연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사람 마음이라는 게, 내가 유진이랑 아무리 친해도 대신 선택해 줄 순 없어요.”“알아.”진구는 소파에 앉으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서, 나 이번에 유진이한테 고백할 생각이야.”그 말에 연하는 조금 놀랐다.“결심했어?”사실 진구는 그동안 줄곧 망설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유진이가 서인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입도 못 뗐고, 나중에 서인을 잊은 후에는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유진이가 자신을 다시 좋아해 주길 바랐다.요즘 유진이와 구은정이 점점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는 다시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고백하지 않으면, 나중에 정말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연하는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약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물었다.“결과는 생각해 봤어요?”진구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유진이가 받아준다면야 좋겠지만, 거절당한다면 아마 친구 사이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었다.특히나 유진이가 지금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으니, 자신이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면 부담스러워서 사표라도 내는 건 아닐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