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는 어린 시절의 서인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삼각주에서 함께 지냈던 그 시절,서인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그렇게 무기력하지도 않았고, 이처럼 부정적인 기운에 휩싸여 있지도 않았다. 말수가 적다는 점은 같았지만, 그때의 서인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그때의 서인이 임유진을 만났다면, 분명 그런 복잡한 집안과 신분 문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유진을 깊이 사랑하고, 망설임 없이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임무가 실패한 순간부터, 서인은 변했다.서인은 과거의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둬 버렸다. 빛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행복을 허락하지도 않았다.모든 것을 밀어내고,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소희는 서인을 이해했기에 그래서 안타까웠다.서인은 말하는 것처럼 유진을 좋아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감정을 직시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구택은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어깨뼈를 감싸 쥔 채, 천천히 얼굴을 숙여 소희의 뺨에 입을 맞췄다.“그만 생각해. 유진이는 서인을 잊을 거야. 그게 운명이야.”소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어쩌면, 어떤 일들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유진이가 정말 영원히 서인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이 바로 둘의 결말일 것이다.구택의 가운이 풀어지면서, 튼튼한 몸이 드러났다. 구택의 피부는 탄탄하고 섹시했으며, 몸을 숙여 소희의 어깨를 입맞출 때, 그의 손은 아래로, 그리고 앞으로 움직였다.소희는 구택의 손을 붙잡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자기야, 아까는 씻고 나면 바로 잘 수 있다고 했잖아.”구택은 낮고 흐린 목소리로 대꾸했다.“아직 열 시야.”“그렇지만 나 졸려.”구택은 소희가 요즘 바쁘고, 유진이 걱정으로 지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구택은 소희를 부드럽게 품에 안고, 침대 머리맡의 조명을 어둡게 조절했다.“같이 자자.”소희는 구택의 품에 기대면서도, 머릿속이 서인과 유진이의 일로 가득 차 있었다. 혼란스러웠지만 구택의
마심호가 앞으로 나서서 설명했다.“의사 말로는, 회장님께서 저녁에 술을 드셨다고 해요. 게다가 두 종류의 술을 함께 마셨고, 이번 심장 발작도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고요.”서선영은 즉시 말했다. “회장님께서 직접 술을 마시겠다고 하셨어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회장님 성격상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아무도 말릴 수 없어요.”“제가 말릴수록 더 화를 내시니까요.”구은서는 서선영의 팔을 붙잡으며 냉정하게 말했다.“엄마, 굳이 변명할 필요 없어요. 매일 아빠를 돌보며 고생하는 건 엄마잖아요. 엄마는 늘 집안을 위해 애쓰고 있고, 그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부모에게 최소한의 효심도 보이지 않으면서, 오히려 아빠를 걱정시키고 속상하게 만들죠.”“지금 죄책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딴청 피우는 사람 아닌가요?”마심호는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아가씨, 그렇게 단정 지을 문제는 아니에요. 도련님께서 집을 떠나 계셨던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죠.”은서는 그의 말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보며 쏘아붙였다.“그게 무슨 뜻이에요? 말씀 속에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차라리 대놓고 말해보시죠. 오빠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게 우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제 어머니가 계모라는 이유로요? 하지만 엄마는 한 번도 오빠를 차별한 적 없어요. 오히려 저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무엇이든 다 맞춰주려 하셨죠.”“그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요? 계모라는 자리가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그렇게 애쓰고도, 결국 오해받아야 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요?”은서의 날카로운 공격에 마심호는 더 이상 말다툼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묵직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아가씨께서 너무 깊이 생각하신 것 같군요.”하지만 은서는 물러서지 않았다.“제가 생각이 많은 건가요? 아니면 당신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한 걸 제가 말한 건가요?”은서
서인은 돌아왔지만,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자지 않았다. 혼자 후원에 머물러 있었고, 도대체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임유진이 사고를 당한 이후, 서인은 점점 더 후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오현빈은 서인에게 다가가 무언가 말을 걸려 했지만, 문득 이 순간만큼은 그가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잠시 머뭇거리던 현빈은, 결국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서인은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 구은태는 의식을 되찾았고, 그는 직접 서인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돌아와 회사를 맡으라고 말했다.병을 앓은 뒤라 기력이 쇠한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절실하고 진심 어린 듯 들렸다.[은정아, 돌아와라. 예전의 일은 내가 잘못했다. 내가 진심으로 사과할게.][네가 아무리 아빠를 미워해도, 네가 구씨 집안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이제 나는 더 이상 그룹을 이끌 힘이 없어. 그러니 네가 이 책임을 맡아야 해!]서인은 미소인지 냉소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서씨 사람들이 좋다면서요? 그럼 그룹도 구은서에게 넘기면 되겠네요. 그럼 그쪽도 더 이상 싸울 필요 없겠죠?”구은태는 숨을 한 번 거칠게 들이쉬었다.[은정아, 정말 나를 그토록 미워해서, 우리 집안 사업까지 함께 외면하려는 거냐? 하지만 잊지 마. 회사에는 네 어머니의 노력과 땀도 스며 있어.]서인의 목소리는 더욱 차가워졌다.“이제서야 그게 기억났나 보죠?”구은태는 목소리를 낮추며, 한층 더 간절한 톤으로 말했다.[난 네 어머니에게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다. 그래서 반드시 회사를 네 손에 넘겨야 해.]그러나 서인은 비웃듯, 차갑게 내뱉었다.“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음의 짐을 덜고 싶어서 그러는 거겠죠?”이에 구은태는 순간 할 말을 잃었고, 서인은 아무런 미련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그는 예상하지 못했다. 구은태가 자신에게 설득당하지 않자, 어디선가 알아낸 정보를 이용해 소희
불과 일주일 만에 다시 본 서인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의 분위기는 한층 더 어두워졌고, 그 무엇도 의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듯한 무기력함이 온몸에 배어 있었다.소희는 가슴 한쪽이 시큰해져,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조용히 옮겼다.서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차갑고 고독했던 눈빛은 이제 빛을 잃어버린 채, 텅 비어 있었다.이윽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왜 왔어?”소희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조용히 말했다.“너 보러 왔어.”서인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소희에게 차를 따라주었다.“내가 뭐 볼 게 있다고. 여전한데.”소희는 서인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진짜 네가 여전하다고 생각해?”서인은 찻잔을 들던 손을 멈췄다. 손가락이 살짝 떨리더니, 컵에 떨어지는 차가 잔 속에서 잔물결을 일으켰다. 그 투명한 소리는 고요한 오후에 묘하게 날카롭게 들려왔다.서인은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얼굴이 더욱 피곤하고 초췌해 보였다.이윽고 서인은 조용히 물었다.“최근에 유진이를 봤어?”유진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서인의 눈빛 속에서 미약하게나마 생기가 피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희미한 빛은 마치 어두운 심연 속으로 가라앉듯, 다시 사라져 버렸다.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잘 회복하고 있어. 오른손도 가벼운 물건은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나아졌고, 정신 상태도 아주 괜찮아.”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잘됐네.”서인의 목소리는 더욱 가벼워졌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나를, 기억해 냈어?”소희는 잠시 머뭇거리다,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서인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입가를 살짝 비틀며, 마치 스스로를 조롱하듯이 중얼거렸다.“기억 못 해도 괜찮아.”소희는 깊은숨을 내쉬었다.“이게 원했던 거 아니야? 근데 왜 스스로를 이렇게까지 망가뜨리는 거야?”서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손을 뻗어 담배를 찾았지만, 막상 담배를 손에 쥐고 나서야, 담배를 끊은 지 오래됐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그대로 담배
유진은 서인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어디에서도 참회할 수 없었고, 자기 잘못을 만회할 수도 없었다.소희는 서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함께 저려왔다.“유진이를 좋아한다면, 다시 찾아가서 붙잡아.”서인은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다시 여기로 오지 않을 거야.”소희는 단호하게 말했다.“여기로 오지 않는다면, 네가 직접 찾아가. 구은정의 신분으로 다시 그녀를 만나봐! 너희는 혈연관계도 아니잖아.”“족보 따위 신경 쓸 필요 없어. 네가 그녀를 좋아한다면, 도덕적인 문제도 없고, 다른 건 전부 중요하지 않아.”서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나보고 구은정으로 돌아가라는 거야?”소희의 시선이 깊어졌다.“그래. 정말로 구씨 가문을 서씨 집안 사람들에게 넘길 생각이야? 네 어머니가 생전에 쏟아부은 정성과 노력이 원수에게 돌아가도 괜찮아?”“네가 말했잖아. 임유진은 샤부샤부 가게의 사장이 될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구씨 집안의 안주인으로 만들어. 네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거야!”“유진이는 이미 충분히 노력했어. 이제 네가 노력할 차례야!”“내가 아는 서인은 혹독한 훈련 끝에 무적의 저격수가 된 사람이야.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할 정도였잖아.”“네가 가졌던 영광은 절망과 패배감 속에서 얻은 게 아니었어! 네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잃어버린 것들은 전부 되찾을 수 있어!”서인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았다.“나한테도 기회가 있을까?”그는 구씨 가문의 운명이 누구 손에 들어가든 상관없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유진뿐이었다.“당연하지!”소희는 따뜻하면서도 힘이 실린 미소를 지었다.“서인은 유진을 잃었지만, 구은정은 그렇지 않아. 다시 사랑하게 만들어. 네가 유진에게 빚졌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돌려줄 기회를 가져!”“임구택이 예전에 이런 말을 했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슬픔도 기쁨도 상대방이 전부라고. 네가 유진이에게 주는 행복이야말로 유진이 진정으로 원하는 거야!”“유진이
구은정이 갑작스럽게 회사로 돌아오자, 그룹 내에서는 환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우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안해하는 이들은 바로 외척인 서씨 집안이었다.한편, 구은서는 서선영을 원망하며 말했다.“엄마가 굳이 진수아를 구은정에게 소개해 줄 필요가 없었어요. 그게 결국 회사로 돌아오게 만든 거잖아요.”하지만 서선영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한 태도로 담담하게 말했다.“구은정은 어차피 언젠가는 돌아올 사람이야. 진수아가 아니었어도, 결국 돌아왔겠지.”은서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외삼촌께서 아직 완전히 회사를 장악한 것도 아니잖아요.”서선영은 거울을 보며 얼굴에 파우더를 두드리면서 비웃듯 말했다.“너희 아버지를 몰라? 왜 그렇게 외삼촌들에게 기회를 준다고 생각해? 그건 결국 구은정을 돌아오게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이야.”“구은태는 모든 걸 철저히 계산하고 있어. 너희 외삼촌들에게 맡긴 일들은 죄다 돈이 되는 자리야. 설령 실수하더라도 쉽게 넘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 줬지.”“그래서 겉으로 보기엔 대단한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룹의 핵심 의사결정에는 단 한 번도 관여하지 못했어.”“구은태가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구은정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거야. 심지어 구은정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죽지도 않을 거야.”“나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구은정만 돌아오면, 구은태도 경계를 늦출 테니까.”서선영의 눈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구은태가 철저한 전략가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구은태가 살아 있는 한, 서씨 집안은 그저 작은 이득을 취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구씨 그룹의 핵심 권한은 절대 건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하지만 은정은 달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반항적이었고, 타고난 기질이 자유분방했다. 오랫동안 밖에서 떠돌며 방탕하게 살아왔고, 배운 것도 없으며, 늘 무기력하고 한심한 태도를 보였다.은정이 회사를 맡는다는 것은, 곧 회사를 한심한 인물의 손에 맡기는 것이나 다
우정숙이 집에 없었기 때문에, 노정순은 도우미를 붙여 임유진을 돌보게 하려 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진은 탐탁지 않아 했다.“할머니, 저를 돌봐 줄 친구들도 있어요. 굳이 도우미까지 따라오면, 친구들이랑 편하게 이야기하기 어려워요.”노정순은 손녀를 아끼는 마음에 그녀가 기분 나빠할까 걱정되었지만, 결국 장효성에게 유진을 잘 돌봐 달라고 신신당부했다.효성과 친구들은 긴장한 듯 조심스럽게 대답했고, 집을 나서자마자 효성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아까 너희 할머니가 나한테 말씀하실 때, 너무 긴장해서 혀가 꼬일 뻔했어.”그러자 유진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할머니 엄청 온화하신데, 뭐가 그렇게 무서워?”효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우, 넌 몰라. 그 분위기라는 게 있어. 아무 말 안 해도, 그냥 위엄이 철철 넘치는 그 느낌 말이야!”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는데, 여진구가 차에서 내렸다. 그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유진아, 어디 가는 거야?”그러자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친구들이랑 좀 돌아다니려고요.”효성이 슬쩍 친구에게 눈짓을 보내자, 진구는 곧바로 말했다.“나도 같이 가도 돼?”유진이 눈썹을 찌푸렸다.“친구들이랑 모임인데, 선배가 왜 따라와요?”진구는 그녀의 다리를 걱정하며 물었다.“다리는 괜찮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걸어 다니는 것도 아닌데요, 뭐.”이에 진구는 할 수 없이 물러났다.“몇 시에 돌아올 거야? 데리러 갈게.”“그걸 지금 내가 어떻게 알아요?”“그러면 집에 들어가기 전에 전화해.”“알았어요!”임씨 저택에서는 휠체어를 올릴 수 있도록 특별히 개조한 차량이 준비되어 있었다.진구는 직접 휠체어를 밀어 그녀를 차에 태운 후, 차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차 안에서 효성이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사람 네 남자친구야? 완전히 잘생긴 데다가 다정하기까지 하네!”유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냥 친구야.
유진은 병원에 있을 때 서인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깊게 파인 눈두덩과 덥수룩한 수염,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로 피폐한 기운이 가득했다.그러나 지금, 눈앞의 남자는 크림색 캐주얼 정장을 입고 깔끔하게 면도를 한 상태였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단단한 인상은 그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해요!”서인은 책을 내려서 유진에게 건네며 반쯤 무릎을 굽혀 마주 앉았고, 깊고 어두운 눈빛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다리는 좀 어때?”유진은 공손하게 미소 지었다.“많이 좋아졌어요.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앞으로 반 달 정도면 걸을 수 있을 거래요.”서인은 유진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지금이 가장 조심해야 할 시기야. 뼈가 아직 약하니까, 부상 조심해야 해.”“감사해요!”유진은 예의 바르게 웃으며 물었다.“그런데, 삼촌은 여기 어쩐 일이세요?”‘삼촌?’유진이 마침내 자신을 삼촌이라고 불렀으나 서인의 가슴 한편이 묘하게 저려왔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나도 책을 사러 왔어.”“정말 우연이네요!”희미하게 붉어진 노을이 책장 사이로 스며들어 유진의 옆얼굴을 감쌌다.살며시 흔들리는 눈동자는 맑고 생기 있었으며, 슬픔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담담함과 거리감만 남아 있었다.유진은 반쯤 무릎을 굽혀 자신과 시선을 맞추는 서인을 보며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린아이를 대하듯 부드러운 목소리와 친절한 태도.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유진은 책을 받아들며 말했다.“제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잘 가.”유진은 가볍게 웃었다.“안녕히 계세요, 삼촌!”유진은 휠체어를 조종해 몸을 돌렸고, 다시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가볍게 스쳐 지나간, 특별할 것 없는 우연한 만남처럼.서인은 천천히 일어섰다. 유진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서인의 눈빛은 점점 더 깊고 어두워졌다. 마치 구름에 삼켜진 석양처럼,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