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아는 여전히 멍한 상태로 자리에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완전히 얼어붙어 버린 것이다.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래선 급히 택시를 잡아 아심이 타고 간 차량을 따라갔다.병원에 도착하자 재아는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선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다섯 번, 여섯 번 울렸을 때까지 상대가 받지 않아 그녀는 체념하려던 순간, 낮고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재아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둘러 말했다.“시언 오빠, 큰일 났어요. 빨리 병원으로 와 주세요!”시언이 물었다.[무슨 일이지?]재아는 다급히 말했다.“아심 씨랑 지승현 씨가 차에 치였어요. 둘 다 병원에 있어요. 빨리 와 주세요!”재아는 상대방의 숨소리가 잠시 멈춘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곧이어 남자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다급하고 불안했다.[어느 병원이지?]재아는 병원 이름을 말했고, 그녀의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시언은 전화를 끊었다.시언은 최대한 빠르게 차를 몰아 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아심에게 세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끝내 받지 않았다.그의 마음은 점점 더 초조해졌고,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 갔다.20분 후, 시언은 병원에 도착해 바로 프론트로 갔다.“30분 전쯤 교통사고로 남녀 한 쌍이 이 병원에 실려 왔나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프론트 직원은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정리하며 무심하게 대답했다.“잘 모르겠네요. 다른 데 물어보세요.”시언의 목소리가 조금 쉰 듯, 서늘하고 날카로웠다.“그들이 어디 있냐고 물었습니다.”직원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시언의 차가운 눈빛이 그녀를 꽤나 긴장시켰고, 그녀는 얼른 말했다.“바로 확인해 드릴게요!”프론트 직원은 최근 접수 기록을 찾아 시언을 승현과 아심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응급실 안에서, 의사들은 지승현의 출혈을 멈추고 붕대를 감으며 각종 검사를 준비하고 있었다.의사 중 한 명이 물었다.“가족분은 오셨나요?”아심이 급히 대
재아는 시언의 냉랭한 시선을 받자, 등골이 오싹해졌다.자기 말에 허점은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시언이 마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에 불안감이 밀려왔다.검사실 밖시언이 검사실에 도착했을 때, 아심은 문밖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시언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는 뒤늦게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놀란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시언은 아심에게 다가가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크게 다친 곳은 없었지만, 팔에 약간의 긁힌 상처가 있었다.“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아심이 먼저 물었다. 시언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차가운 표정으로 아심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날 나한테 뭐라고 약속했지?”아심은 잠시 멈칫했다. 곧바로 그날 저녁 그의 별장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시언은 그녀에게 다시는 승현과 얽히지 말라고 했었다.아심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일 외에는 사적인 연락은 없었어요.”시언은 아심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너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건 아니겠지?”아심은 그의 질문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시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답하려던 찰나,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검사 끝났어요. 보호자 분, 빨리 오세요!”아심은 시언을 한 번 바라본 뒤, 검사실로 향하는 침대로 먼저 달려갔다. 시언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가운 기운이 마음속 깊이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시언은 재아의 이간질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아심은? 승현이 그녀에게 어떤 존재인지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아심은 간호사들과 함께 승현을 검사실에서 병실로 옮겼다. 병실로 돌아온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복도를 살피며 시언을 찾았지만, 분주한 사람들 틈에서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속에서 차오르는 불안을 애써 누르며, 그녀는 승현을 돌보는 데 집중했다.잠시 후, 의사가 결과를 들고 와 말했다.“다행히 갈비뼈 두 대가 부러진 것 말고는 내장이 다치지 않았어요. 머리 외상으로 출혈이 많고 가벼운 뇌진탕이 있지만,
양재아는 권수영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권수영은 병실에 들어가 지승현의 상태를 확인한 뒤, 곧바로 화가 치밀어 올라 강아심을 향해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강아심 씨, 대체 언제까지 우리 아들을 괴롭힐 거예요? 헤어졌다면서 왜 아직도 우리 승현이를 붙잡고 있는 거냐고요?”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아심을 향해 계속 비난을 퍼부었다.“얼굴 하나 믿고 여기저기 남자를 꾀고 다니고, 부끄럽지도 않아요?”병원이라는 장소에서 시끄럽게 싸우고 싶지 않았던 아심은 권수영과 언쟁을 벌이기보다 돌아서서 병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그러나 권수영은 포기하지 않고 아심을 쫓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한층 더 공격적인 어조로 경고를 쏟아냈다.“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우리 승현이의 여자 친구는 재아예요. 그러니 당신 다시는 치사하게 달라붙지 마요! 그렇지 않으면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당신 같은 여자가 우리 아들을 꾀려고 한다는 걸 온 강성에 소문내서, 여기서 발도 못 붙이게 할 거예요!”권수영 뒤에서 재아는 일부러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경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아주머니, 무슨 일이 있으면 차분히 말하세요. 폭력을 휘두르지 마시고, 이분의 손을 놓으세요!”권수영은 경찰의 말에도 아심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비웃으며 말했다.“이 여자는 천하의 나쁜 여자예요! 쓰레기 같은 여자라고요!”그 말에 아심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권수영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가볍게 힘을 주자 권수영은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내면서 고통스럽게 손을 놓았다.아심은 그녀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이 양재아를 며느리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내가 당신의 모욕을 참고 있는 건 내가 죄책감을 느껴서가 아니에요.”“당신은 정말로 웃음거리일 뿐이니까요. 그리고 말다툼하는 건 제 시간 낭비라고 생각돼서예요.”권수영은 화를 참지 못하고 다시 아심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경찰이 재빨리
강아심은 택시를 타고 레스토랑으로 돌아가 자신의 차를 찾으려 했다. 택시에 앉아 있던 그녀는 문득 오늘 점심 원래는 고객과 미팅이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아심은 급히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 고객은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었기에, 태도가 매우 너그러웠다.[사과할 필요 없어요. 레스토랑 밖에서 교통사고가 난 걸 다 알고 있어요. 전화를 했는데도 안 받으셔서 다들 걱정했어요. 괜찮아요?]“네, 괜찮아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려요.”그녀는 몇 마디 더 예의를 차린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정말로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그중에는 강시언의 전화도 포함되어 있었다....자신의 차를 찾은 뒤 회사로 돌아오자 곧바로 퇴근 시간이 되었다. 사무실에 앉아 오후에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리던 아심은 이 모든 일이 참으로 절묘한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권수영은 분명 지승현과 양재아를 이어주기 위해 그들을 레스토랑으로 불러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과 승현이 우연히 마주쳤다.그 후에 차량이 승현을 향해 돌진해 왔다. 그 차량은 명백히 승현을 노리고 있었고, 그의 동선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승현을 해치려 한 사람은 그와 가까운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승현을 레스토랑으로 부른 사람은 권수영이었다. 그러나 권수영이 자기 아들을 해치려고 했을 리는 없었다. 만약 승현이 목적이라면 재아까지 그 자리에 부를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최근 승현은 회사를 인수하며 내부의 적들을 정리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의 반감을 샀다. 회사의 복잡한 세력 다툼 속에서 그의 동선을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아심은 한참을 고민했지만,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경찰의 조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지금은 다른 문제가 골치를 아프게 했다. 바로 시언이 화가 난 문제였다. 아심은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꺼내 시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전화는 계속 울리다가 끊겼고, 시언은
집에 도착하자 도도희가 직접 부엌에서 음식을 데우고 있었다.도경수는 그녀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반가운 기색을 보이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며 말했다.“왜 맨날 야근이야? 회사에 직원들 많다며. 그 사람들이 일을 안 해?”도도희가 다가오며 말했다.“직원들은 직원들 할 일이 있고, 사장님은 사장님 할 일이 있죠. 아버지는 그만 신경 쓰세요. 우리 재희가 알아서 잘할 거예요.”아심도 따뜻하게 웃으며 설명했다.“오후에 일이 조금 밀려서 늦었어요. 다음엔 조심할게요.”“일단 가서 저녁 먹자.”도도희가 강아심의 손을 잡고 식탁으로 이끌었다. 도경수는 따라가려다 잠시 멈칫하더니, 결국 서재로 돌아가 강재석과 함께 차를 마시러 갔다.식탁에서는 도도희와 강아심이 마주 앉았다. 도우미들이 음식을 차려 놓고는 자리를 비워, 두 사람이 조용히 식사할 수 있도록 했다.아심은 놀라며 물었다.“엄마도 아직 식사 안 하셨어요?”“응, 네가 혼자 먹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아버지랑 다른 분들 먼저 먹으라고 했어. 난 네가 오길 기다렸다 같이 먹으려고.”도도희는 딸에게 음식을 덜어주며 말했다.“이 족발 요리는 내가 한 거야. 한 번 먹어봐!”아심은 가슴이 따뜻해지며 한 입 먹고 미소를 지었다.“정말 부드럽고 맛있어요.”“내가 요리를 자주 하는 건 아니지만, 몇 가지 자신 있는 메뉴는 있지. 앞으로 내가 다 해줄게.”아심이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우리 같이 요리해요. 제가 엄마한테 배울게요.”두 사람은 함께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식사를 이어갔다. 거의 다 먹어갈 무렵, 아심은 무심코 물었다.“오늘 시언 씨는 안 보여요. 안 왔어요?”도도희는 대답했다.“아까 아저씨가 그러시는데, 시언이 오늘 바빠서 집에 안 온다고 하더라.”그녀는 아심을 보며 물었다.“시언이 네게 말 안 했어?”아심은 고개를 저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저도 오늘 너무 바빴어요.”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실로 돌아오자 도도희가 강아심에게 말했다.“예전에 그림 배우고 싶다고
두 사람이 대화 중이던 중, 이반스가 측문으로 들어왔다. 그는 도도희를 보며 놀란 듯 물었다.“도도희, 바둑을 두고 있었어?”강재석이 웃으며 말했다.“도도희는 어릴 적부터 바둑을 잘 뒀지. 학교 다닐 때 상도 받았었다고. 정말 대단했어!”이반스는 눈을 반짝이며 감탄과 부러움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나도 배우고 싶어요!”도도희는 그를 힐끗 보며 말했다.“넌 바둑보단 오목을 배우는 게 나을 것 같아.”이반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도도희는 진지하게 대답했다.“오목이 더 어려워. 너의 높은 지능에 딱 맞을 거야.”이반스는 칭찬을 들었다고 생각하며 기뻐했다.“고마워, 도도희!”강재석은 옆에서 웃음을 터뜨리며 크게 웃었다....양재아는 요즘 매일 늦게 귀가했다. 이날도 밤 10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와, 강재석과 도도희에게 인사를 건넨 뒤 물었다.“할아버지는 어디 계세요?”도도희는 대답했다.“서재에 계셔.”재아는 거실 옆의 작은 서재로 향했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안쪽의 모습을 보았다.도경수와 강아심은 커다란 화판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책상 위에는 크고 작은 붓과 각종 채색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도경수는 가끔 아심의 붓질을 살펴보며 친절하게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그의 눈에는 뿌듯함과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 감정은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재아는 그 모습을 보고 괜히 속이 쓰리고,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다. 결국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발길을 돌려 나와버렸다.잠시 뒤, 도도희는 밤참을 들고 서재 문을 열며 들어왔다.“이제 그만하고 쉬세요. 너무 늦었어요.”도경수는 얼굴 가득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우리 재희는 정말 재능이 있어! 너랑 똑같아!”도도희는 딸을 보며 기쁜 미소를 지었다.“그러게요. 역시 혈연은 속일 수가 없네요.”아심의 얼굴 한쪽에는 물감이 살짝 묻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더욱 생기 있고 사랑스럽게 보였다.“할아버지가 훨씬 대단하세요! 오
지승현의 목소리는 약간 힘이 없었다.[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훨씬 나아졌어. 지금은 약간 어지러운 것 빼고는 큰 문제는 없어.]강아심은 차분히 말했다.“아까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는데, 널 친 운전자는 음주 운전으로 차량을 통제하지 못했다고 해.”“하지만 난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것 같아. 너도 조심하고, 안전에 신경 써.”승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알겠어. 고마워, 아심아. 그리고 어제도 고마워. 병원에 데려다주고, 모든 절차도 네가 대신해 줬다고 간호사가 말해줬어.]아심은 담담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너도 예전에 날 도와준 적 있었잖아. 우린 친구니까, 그런 건 따질 필요 없어.”[어제 우리 엄마가 와서 너한테 무례하게 굴진 않았어?]아심은 짧게 대답했다.“아니.”[그렇다면 다행이야.]“너는 몸 잘 추스르고, 다른 건 너무 신경 쓰지 마.”[그럴게.]...승현이 전화를 끊자마자, 양재아가 꽃다발을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승현 씨, 몸은 좀 괜찮아요?”승현의 비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아를 위해 자리를 비워주었다. 재아는 꽃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꽃은 여기 둘게요.”승현은 냉담한 태도로 말했다.“재아 씨, 일부러 돈 쓸 필요는 없었는데.”재아는 순간 표정이 굳었지만,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승현 씨, 우리 좀 진지하게 얘기해 봐요.”승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나도 재아 씨랑 분명히 말해야 할 게 있어요.”재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귀여운 얼굴에는 진지한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그동안 여사님께서 우리를 이어주려고 하셨지만, 나는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고요.”“그날 밤의 일도 승현 씨만의 잘못은 아니예요. 나 역시 술에 취했고, 내 잘못도 있었으니까요.”승현은 재아의 말을 들으며,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휘말려 이런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재아를 보며 약간의 연민을 느꼈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승현은 양재아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솔직히 말했다.“감정은 결국 느낌의 문제예요. 아마 내가 강아심을 먼저 만나서 선입견이 생겼을 거고요.”재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동작에 따라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재아는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지승현 씨, 푹 쉬세요. 저는 먼저 가볼게요.”“내가 한 말은 꼭 지킬게요. 재아 씨가 필요로 하는 건 무엇이든 내가 최선을 다해 보상할게요.”재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저는 부족한 게 없어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그냥 그날 밤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할게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병실을 떠났다. 병실 밖으로 나온 재아는 눈물을 닦고 표정을 다잡았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어두운 기운이 감돌았다.‘이대로 끝낼 순 없어.’재아는 이를 악물었다....그 후로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심은 강시언을 보지 못했다. 시언은 중간중간 도씨 저택을 방문해 강재석과 점심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 떠나곤 했다. 하지만, 아심과는 마주치지 않았다.아심에게는 그가 오든 가든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시언은 원래 자신의 일정을 굳이 그녀에게 알리지 않았고, 아심도 이미 다시 떠났겠다고 생각하며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승현은 이미 퇴원했다. 아심은 그와 두어 번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았을 뿐, 병원에 다시 가지 않았다.아심은 낮에는 일에 몰두했고, 밤에는 도경수와 그림을 배우며, 자기 전에 도도희와 이야기를 나눈 뒤 방으로 돌아가 잠들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생활은 혼자였던 시절과 완전히 달랐다.이날은 일찍 퇴근해 저녁 무렵에, 집에 도착했다. 아심이 정원을 지나던 중, 도경수가 한 그루의 나무 아래서 잡초를 뽑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그녀는 다가가며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도와드릴게요!”도경수는 기뻐하며 말했다.“오늘은 일찍 끝났구나.”아심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네, 내일이 토요일이라 일찍 퇴근하고 싶었어요.”도경수는 아심을 말리며 말했다.“넌 아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