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은 아는 사람들을 만나 연달아 다섯, 여섯 잔의 술을 마셨다. 너무 급하게 마셨는지 약간 어지러워져 바람을 쐬기 위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그때 누군가 다가와 차가운 과일 주스를 건네며 말했다.“유정 씨,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들러리도 하시고, 손님도 상대하시느라 힘드셨겠네요.”유정은 주스를 받아들며 가볍게 웃었다.“손님을 상대한다고 하기엔 그렇죠. 다들 좋은 분들이고, 또 우리 사장님의 경사이니 다들 즐겁게 몇 잔씩 하게 되네요.”진우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오늘 일로 실례가 있었다면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유정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에요. 그런 상황에서 우행 씨는 충분히 신사적이었어요.”“처음인가요?”“처음인가요?”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고, 잠시 멈칫한 뒤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유정이 먼저 말했다.“네, 처음이에요!”우행은 난간에 팔을 걸치고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저도 처음이라, 경험이 없네요.”“그래도 진짜 침착하셨던데요!” 유정이 칭찬하자, 우행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유정 씨도 정말 대단했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주위에서 떠들어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침착하고 단아했죠.”유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우리 사장님 곁에 있다 보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우행은 평온한 눈빛으로 말했다.“우리 사장님도 그럭저럭 괜찮죠. 다만 갑자기 일이 생기면 저한테 전화해서 대신 처리하라 하시곤 한 달씩 사라져 버리세요.”유정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을 참으려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공감되나요?”우행이 묻자 유정은 그와 눈을 마주치더니,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유정은 과일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시원한 바람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부드럽게 말했다.“저기 친구가 보여서요. 먼저 가볼게요!”“네.”우행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과일 주스, 고마워요!”유정은 몇 걸음 물러난 뒤, 컵을 들어 보이며 고운 미소를 보였다
수요일 저녁 7시 정각 소희는 전위 호텔 앞에 나타났다.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리자 소희는 카카오톡을 확인했다. 아빠 소정인이었다. [소희야, 아빠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차가 좀 막히네. 먼저 들어가있어.]소희는 발걸음을 늦추며 이따 임구택을 만나면 어떻게 인사할까 생각하고 있었다.결혼 3년 동안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임구택이 이 결혼을 동의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거부한다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그렇다고 임구택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과거 소씨 가문의 회사가 위기를 맞자 뻔뻔하게 임씨 가문을 찾아가 혼인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하였고, 당시 임씨 가문의 장남은 이미 결혼을 한 터라 자연스레 그 약속은 차남 임구택이 이행하게 되었다. 그가 내키지 않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임씨 가문은 당연히 소씨 가문에 좌지우지 당하지만은 않았다. 예물로 50억 원을 건네어 소씨 가문이 난관을 이겨내게 도우면서도 조건을 제시했다. 3년 뒤에 이 혼사가 자동 해지되는 것으로.3년 전, 그녀는 아직 법정 결혼 연령이 되지 않아, 두 사람은 라스베가스에 가서 혼인신고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이 아니라 각자의 대리인이 가서 혼인신고를 마쳤다. 결혼하자마자 임구택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결혼 해지를 석 달 앞두고 돌아왔다. 결혼을 거부한다는 태도가 너무나도 뚜렷했다.하필이면 오늘, 그녀의 아버지가 회사 때문에 그녀를 앞세워 다시 한번 그를 찾아가 부탁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소희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생각하였다. “임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 아내에요!”그가 그녀를 거들떠보기나 할까?듣건대 임구택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 강성의 유명한 악질이었다고 한다. 강성의 흑과 백을 모두 통솔하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매섭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지만 며칠 전 TV의 경제 채널에서 임구택을 본 적이 있는데 그녀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명품 양복을 입고, 거만하면서도 우아하고 듬직해 보였다.그녀는
그의 손에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일을 마친 후 돈을 지불하다니. 그녀는 그를 무엇으로 생각하는 걸까?남자가 냉담한 얼굴을 하고 발코니로 성큼성큼 걸어가니 과연 창문이 열려 있었다.여기는 층고가 높아서 3층이 4층 높이일 텐데 그녀는 어떻게 뛰어내렸을까?그가 그렇게 무서웠나?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칠 만큼?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물을 끼얹은 듯 청량한 바람이지만 남자의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화는 식히지 못하였다. 이 여인은 만 원으로 그를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일이 끝난 후에 창문으로 뛰어내려 도망쳤다... 잡히기만 해봐! ......택시에 앉은 소희가 재채기를 하자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보며 물었다. “아가씨, 괜찮아요?”이렇게 예쁘게 생겨서 홀딱 젖어있다니, 딱 봐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소희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기사는 웃으며 말했다. “아직 학생이죠? 밖에 혼자 다닐 때 각별히 조심해야 되요.”“네, 감사합니다. 기사님.”소희는 대답하고 휴대폰을 꺼내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 “천위 호텔의 7시와 9시경에 내가 찍힌 CCTV 기록은 모두 없애!”“ok!” 상대방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지시에 따랐다.남자의 귀에 거슬리는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려 퍼졌다. 소희는 오늘 임구택과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따위 고민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다만 임구택이 그녀가 왔었다는 사실을 모르게만 하고 싶었다.운해로에서 내리면서 소희는 뒷좌석을 적신 대가로 택시비를 두 배로 지불했다.별장으로 돌아오자 하인은 소희의 젖은 옷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작은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일이 좀 있었어요, 일단 올라가서 샤워부터 할게요.”소희는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목욕물 준비해 드릴게요.”하녀는 더 묻지 못한 채 위층으로 올라가 준비했다.몇 분 후 소희는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긴장했던 몸이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머릿속이 복잡해서 머리까지 물속에 파묻고 오늘 밤에 있
소희는 멍해졌다.남자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왜 절 따라오시는 거예요? 강성대 학생이신가요?”그는 오는 길에서부터 이 여자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멈추면 그녀도 무슨 일이 있는 척 멈추더니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왔다.소희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이내 다시 냉정을 되찾고 반문했다. “여기가 당신 집으로 가는 길인가요? 모든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을 왜 제가 따라다닌다고 하는 거죠?”남자의 눈동자의 싸늘한 빛이 스치더니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소희에게 올라오라고 눈짓했다.소희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비꼬듯 말했다. “됐어요, 오해받을 만한 행동 안할게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돌아서서 계단으로 걸어갔다.그녀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며 남자의 가늘게 뜬 눈을 가렸다.소희는 임구택과 다시 마주칠까 봐 아예 계단으로 9층까지 올라갔다.회의실에 도착하니 조교가 학과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교는 그녀를 보자 잠시 기다리라고 눈짓했다.그 옆에는 몇몇 학생들도 자료를 제출하러 왔는데, 그중 한 명은 따가운 눈빛으로 소희를 노려보았다. 소희는 못 본 척 휴대폰을 꺼내 스도쿠를 했다.5분도 안 돼 한 판을 풀고 나니 밖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돌아온 지 얼마 안 됐죠? 출국한지 오래됐으니 돌아올 때 됐구나 싶었는데”교장선생님의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한 사람은 교장선생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소희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임구택도 소희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그녀에게 머물지 않고 바로 지나갔다.학과장은 급히 마중 나가 교장선생님과 인사를 나누었다.방 교장은 그에게 소개하였다. “이 분은 LS그룹의 대표이사님이십니다. 예전에 우리 학교 학생이었지요. 참, 우리 학교 여러 항목의 장학금도 임 회장님이 후원한 것입니다.”그러자 학과장은 냉큼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임구택과 악수를 나누었다. “오늘 마침 학생들에게 장학금 신청 서류를 제출
임구택은 그날 창문에서 뛰어내린 여자를 조사하라고 지시했고, 명우는 제일 먼저 천위 호텔의 CCTV를 조사했다.이상하게도 7시와 9시 두 시간대 모두 공백 상태였고 천위 호텔의 보안요원조차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당시 인터넷이 끊겼을 것이라고 추측만 하고 있었다.그래도 명우는 한 사람을 찾았다. 서이연.서이연은 B급 배우로 청순하고 러블리한 이미지의 노선을 걷고 있으나 줄곧 뜨지 못했다. 어제 저녁 6시 50분쯤 그녀가 천위 호텔에 들어가 연풍관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CCTV에서 볼 수 있었다. 이후 CCTV 기록에는 공백이 있어 그녀가 어느 방으로 갔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다.9시 5분경 서이연의 매니저가 그녀를 부축하고 연풍관 밖에 나타났는데, 그녀는 한쪽 다리를 구부린 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그 뒤로 기록이 사라졌기 때문에 명우는 서이연이 어떤 차를 타고 떠났는지 몰라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알아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어젯밤 그녀는 왼쪽 다리를 수술했다.명우는 이미 차트를 확인했는데 낙상이었다.그날 밤, 강성의대 부속병원.VIP706호. 병상에 누워있는 여인은 두 손을 맞잡고 불안한 표정으로 맞은 켠 소파에 앉은 임구택을 바라보았다. “임 대표님 무슨 일이에요?”“다리 어떻게 다쳤어요?” 임구택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서이연은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반쯤 늘어뜨린 눈꺼풀 아래 눈물을 반짝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임 대표님과 관련이 있나요?”“숨길 필요 없어요, 사람을 시켜 이미 CCTV를 확인했으니까. 어젯밤 9시쯤 매니저가 당신을 부축해서 차를 타고 떠날 때 다리는 이미 부러져 있었죠. 그날 밤 제 방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맞나요?” 임구택의 어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했다.손님의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천위 호텔은 카메라가 객실 창문을 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서이연이 어디서 뛰어내렸는지는 볼 수 없지만,
여인이 달려들며 손에 들고 있던 꽃들은 소희의 몸에 던져졌다. 힘껏 소희를 뒤로 밀치고는 소연을 품에 끌어안았다.진원은 긴장한 채 소연의 몸을 살펴보며 물었다. “다친 거야? 혹시 피났어? 어디 아프니?”이슬을 머금은 꽃잎이 온 바닥에 흩어지고 꽃의 가시가 소희의 목덜미를 찔러 따끔거렸다. 그녀는 여인의 긴장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소정인은 이내 다가와 소희에게 물었다.“안 다쳤니?”진원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무서운 눈빛으로 소희를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야, 소연이를 죽이려는 거니?”소희는 여인의 눈에 비친 혐오와 원한을 보고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소연은 소희를 한 번 쳐다보고는 급히 진원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엄마, 오해예요. 제가 언니한테 머리 좀 잘라달라고 했어요. 언니는 절 다치게 하지 않았어요.”“그렇구나!”소정인은 ‘하하’하고 웃으며 진원을 원망했다. “당신은 항상 너무 급해서 문제야. 무슨 일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화부터 낸단 말이야. 당신 때문에 소희 옷이 다 더러워졌잖아.”진원은 자신이 소희를 오해했다는 것을 깨닫고 무안해하며 변명했다. “들어오자마자 소희가 가위를 소연이의 목에 대고 있길래... 머리를 자르는 건줄도 모르고...”“그만 해!”소정인은 진원에게 눈짓을 하고는 소연에게 말했다. “언니 데려고 가서 옷 좀 갈아입혀. 옷이 다 더러워졌네.”“언니, 이리 와!”소연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희는 어깨의 꽃잎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2층 침실로 들어가자 소연이 사과했다. “언니, 정말 미안해, 엄마가 이 시간에 돌아올 줄 몰랐어. 나 때문에 언니가 다쳤네.”“너 때문이 아니야!”소희의 순수한 얼굴에는 한 줄기 미소를 띠고 있었다.소연은 옷방에 가서 흰색 티셔츠를 가져와 소파에 놓았다. “언니, 이건 새거야, 한 번도 안 입었어. 옷 갈아입어, 난 내려가서 기다릴게.”“응.”소연이 문을 닫자 소희는 소파 위의 옷을 보며 안색이 흐려졌다. 한쪽에서는 머리를 잘라달라
임구택은 고개도 들지 않고 손에든 서류를 보고 있었다.임유림은 고개를 돌려 웃으며 물었다. “소희야, 과외하러 온 거야?”그녀는 소희의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곳이 부자동네여서 당연히 과외 하려 온 줄 알았다.소희는 웃어 보였다. “널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그녀는 임유림이 임구택 형의 딸, 즉 그의 조카라는 걸 어떻게 잊었단 말인가?거의 3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최근에만 일주일에 3번을 만났다. 그들을 주선해 준 중매쟁이가 드디어 깨어난 건가요?임유림은 돌아보며 소희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분은 내 둘째 삼촌이야!”소희는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임구택은 목소리가 익숙한 것 같아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가 또 있어 눈을 가늘게 떴다.소희는 손에 들고 있는 우산 손잡이를 꽉 쥔 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임유림은 열정적으로 소희와 대화를 나눴다. “주경이가 고석 좋아하는 거 아니야?”소희는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답하였다. “그런 것 같아!”소희는 무의식적으로 임구택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며 답했다. “나와 고석은 그냥 친구야, 그가 누구와 함께 있는 나랑 상관없어.임유림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눈치를 보내니 소희의 마음속이 불안해졌다. 그녀가 결혼을 합의 때문에 하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 그녀는 결혼한 신분이다.시내로 들어서자 앞쪽에 사고가 나 차가 막혔다. 임유림은 고픈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 “길 언제 뚫리지, 배고픈데 먼저 밥 먹으러 갈까?”소희는 답혔다. “나 여기서 내릴게 나 학교 가야 해.”“학교는 무슨, 점심인데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임유림은 이미 스스로 결정을 내린 듯했다.아무 말도 하지 않던 임구택은 시계를 보고 명우에게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세 사람은 프렌치 레스토랑에 들어가 앉았다. 임유림은 소희가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와본 적이 없을까 봐 소희에게 물어본 뒤 대신 주문해 주었다.임유림이 음식을 주문하고 화장실에 가자 자리에는 임구택과 소희 둘만 남았다.소
임구택은 의아한 듯 그녀를 한 번 더 보았다.때마침 임유림이 돌아오자 그녀는 소희 옆에 앉아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고등학교 동창 만나서 잠시 얘기하다 왔어.”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오고 나서 세 사람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임유림은 소희와 함께 학교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었다.식사를 마치고 세 사람이 출발할 때 성연희 일행을 만났다. 성연희도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나오다가 문 앞에서 마주쳤지만 두 사람은 모르는 척하며 스쳐 지나갔다.두 명의 사장님은 임구택을 알아보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밖은 이미 비가 그치고 길도 뚫린 상태였다. 명우가 차를 몰고 세 사람을 태웠다.“소희야, 어디로 가?” 조수석에 앉아 있던 임유림이 물었다.“가는 길이면 강성대 앞에 세워주면 돼.”“가는 길이라 문제없을 거예요.” “우리 삼촌은 말도 참 예쁘게 하네.” 임유림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소희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전에 했던 독설을 듣지 않았다면 아마 단순하게 믿었을 것이다.학교에서 잠시 떨어진 곳에서 임유림과 소희는 잡담을 나누고 임구택은 옆에 앉아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오늘 두 명의 부부는 같은 차에 동승했고 소희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차는 학교 입구 앞에서 멈추었고 소희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유림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유림아.”“뭘, 다음에 밀크티 한잔 사줘.” 임유림은 눈매가 날렵하면서 귀여웠다.소희는 웃으며 동의했고 자신의 우산과 가방을 들고 내렸다. “감사합니다, 임 선생님.”임구택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네.”소희는 차에서 내려 손을 흔들며 임유림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소희는 버스정류장으로 가 버스를 기다렸다.차에서 유림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돌아서며 임구택에게 말했다. “삼촌, 저 소희에게 유민이의 가정교사를 맡기고 싶어요.”그녀의 부모님은 자주 집을 비우셨다. 며칠 전에는 런던 경제 세미나에 참석하러 갔고, 이번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시고 가셨다. 유민이의 가정교사는 핑계를 대고
유정은 아는 사람들을 만나 연달아 다섯, 여섯 잔의 술을 마셨다. 너무 급하게 마셨는지 약간 어지러워져 바람을 쐬기 위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그때 누군가 다가와 차가운 과일 주스를 건네며 말했다.“유정 씨,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들러리도 하시고, 손님도 상대하시느라 힘드셨겠네요.”유정은 주스를 받아들며 가볍게 웃었다.“손님을 상대한다고 하기엔 그렇죠. 다들 좋은 분들이고, 또 우리 사장님의 경사이니 다들 즐겁게 몇 잔씩 하게 되네요.”진우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오늘 일로 실례가 있었다면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유정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에요. 그런 상황에서 우행 씨는 충분히 신사적이었어요.”“처음인가요?”“처음인가요?”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고, 잠시 멈칫한 뒤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유정이 먼저 말했다.“네, 처음이에요!”우행은 난간에 팔을 걸치고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저도 처음이라, 경험이 없네요.”“그래도 진짜 침착하셨던데요!” 유정이 칭찬하자, 우행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유정 씨도 정말 대단했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주위에서 떠들어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침착하고 단아했죠.”유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우리 사장님 곁에 있다 보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우행은 평온한 눈빛으로 말했다.“우리 사장님도 그럭저럭 괜찮죠. 다만 갑자기 일이 생기면 저한테 전화해서 대신 처리하라 하시곤 한 달씩 사라져 버리세요.”유정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을 참으려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공감되나요?”우행이 묻자 유정은 그와 눈을 마주치더니,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유정은 과일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시원한 바람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부드럽게 말했다.“저기 친구가 보여서요. 먼저 가볼게요!”“네.”우행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과일 주스, 고마워요!”유정은 몇 걸음 물러난 뒤, 컵을 들어 보이며 고운 미소를 보였다
소희는 마지막으로 준비한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옅은 금빛의 실크 광택이 흐르는 비대칭 어깨 드레스였다. 겹겹이 화려하게 층을 이룬 치맛자락 덕분에 그녀의 모습은 한층 더 늘씬하고 우아해 보였다. 고귀한 분위기 속에서도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매력을 풍겼다.임구택은 그녀의 드레스가 마음에 쏙 들었다. 높은 하이힐로 인해 걸음이 불편할 것을 알기에, 그는 소희를 아예 들어 올려 계단을 내려왔다.1층에 도착하자 구택은 소희를 내려놓고 그녀의 손을 잡아 춤추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음악이 흘렀고, 두 사람은 음악에 발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주변 사람들은 점점 뒤로 물러서며 중앙의 공간을 온전히 두 사람에게 내주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그들 주변에 모여들었고, 모두 부러움 가득한 눈빛으로 춤추는 신랑과 신부를 바라보았다.갑자기 하늘에서 요란한 굉음이 들려왔다. 몇 대의 비행기가 머리 위를 날아가자, 사람들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비행기가 지나간 하늘에는 커다란 원형 디스크들이 나타났고, 그 디스크가 회전하면서 수많은 불꽃놀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우와!”군중 속에서 감탄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디스크에서 터져 나온 불꽃은 저택의 하늘 전체를 뒤덮었다. 쏟아지는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화려한 불꽃들은 마치 꿈처럼 눈부시고 장엄한 장관을 만들어냈다.그 불꽃 아래서도 구택과 소희는 춤을 멈추지 않았다.은은하고 고운 왈츠 선율 속에서, 남자는 길고 날렵한 실루엣을 자랑했고, 여자는 가벼운 몸짓으로 우아함을 뽐냈다.아름다운 드레스 위에는 하늘의 불꽃이 비치며 마치 은하수를 두른 듯한 환상이 만들어졌다. 그녀의 몸짓에 따라 은하수는 흐르고 춤추는 듯했다.그 화려한 광경은 마치 동화 속 왕자와 공주의 결혼식 같았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꽃 아래 모든 것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황홀했다.춤이 거의 끝나갈 무렵, 하늘에는 한 줄로 늘어선 드론들이 등장했다. 소희는 구택의 어깨에 기대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그 순간, 멀리서 거대한 독수리 한
강재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그럼 시언에게는 아직 말하지 말렴. 그 녀석도 한 번쯤은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껴봐야지!”강아심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할아버지, 저는 할아버지를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말씀드리지만, 저는 아마 시언 씨랑 사귀지 않을 거예요.”아심이 시언에게 자신과 승현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사귀지 않을 관계라면 말하든 말든 별다른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왜 그러니?”강재석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심은 멀리 바라보며 눈빛에 자유에 대한 동경을 띄었다.“그냥,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어요.”아심은 앞으로의 삶을 기다림과 실망 속에 가두고 싶지 않았고, 그에게 얽매이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강재석은 아무런 비난도 하지 않고 단지 말했다.“젊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이 있는 법이지. 너만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해.”“죄송해요, 할아버지.”아심은 이 할아버지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너는 나에게 조금도 미안할 필요가 없다.”강재석은 여전히 따뜻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오히려 우리가 일방적으로 너의 감정을 무시하며 계획을 강요했을 뿐이지.”“아니에요. 할아버지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따뜻함은 언제나 저를 위로했고, 진짜 가족 같은 느낌을 줬어요.”아심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강재석은 그녀가 고아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더욱 마음이 아팠다.그들은 산책을 이어갔고, 강재석은 말했다.“아까 재아가 너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는 것 같던데, 그 아이의 말에는 신경 쓰지 마라.”아심은 이미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신경 쓰지 않을게요.”두 사람은 정원을 한 바퀴 더 돌아서 돌아와서 강재석이 말했다.“가서 놀아라. 소희랑 도도희랑 저녁 만찬도 즐기고, 기분을 좀 풀어봐.”아심은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했다.“네, 그럼 도도희 이모를 먼저 찾아볼게요.”“그래, 즐겁게 놀아. 다
강재석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아심에게 온화한 미소로 말했다.“아심아, 여기 공기가 답답하구나. 나랑 같이 밖에 좀 나가자.”“좋아요!”아심이 즉시 대답하며 그를 따라 일어섰다. 두 사람이 함께 밖으로 나가자, 강시언도 자리에서 일어섰다.“할아버지, 도도희 이모랑 천천히 이야기 나누세요. 전 잠깐 밖에 다녀올게요.”“그래, 다녀오너라.”도경수가 응답했다.시언이 떠난 후, 재아는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혹시 말실수한 건가요?”도경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도도희는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양재아 씨, 좀 급했던 것 같네요.”뼈를 때리는 말에 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말을 더듬었다.“저, 저는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도도희는 차갑게 말했다.“잔꾀는 결국 본인의 어리석음을 드러낼 뿐이에요.”“도도희!”도경수가 그녀의 말을 막았으나 도도희는 아버지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아버지는 여전히 본질을 보지 못하시고, 모든 것을 자신이 옳다고만 생각하시네요.”도경수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재아가 무슨 말을 그렇게 잘못했다는 거냐? 그 강아심이라는 아이는 분명히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강시언과 엮이면서도 다른 남자와 엉뚱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나?”도도희는 얼굴을 붉히며 날카롭게 대꾸했다.“엉뚱한 관계라니요? 그걸 직접 보시기라도 했나요? 아니면 단지 추측으로 한 사람을 판단하시는 건가요?”도경수는 흔들리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직접 보지 않아도 다를 바 없어.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할게. 재아는 네 친딸이야. 너야말로 분별력을 가지고 행동해야 해.”도도희는 재아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내 딸이 만약 저 아이처럼 행동했다면, 차라리 딸로 인정하지 않겠어요.”그 말을 남기고 도도희는 단호히 자리를 떠났다. 이에 도경수는 분노로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거의 내던질 뻔했으나, 재아는 급히 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할아버지, 화내지 마세요. 이 모든 게 제
“아심아!”강재석이 먼저 웃으며 이름을 부르며 반겼다.“할아버지!”강아심이 미소를 띠며 다가갔다.“오랜만이에요. 건강은 어떠세요?”“좋아, 아주 좋아!”강재석은 더욱 인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축하드려요. 소희가 이렇게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정말 부러워요!”강재석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같이 기뻐해야지, 같이!”도경수는 여전히 아심을 멍하니 바라보며 물었다.“당신이 바로 강아심인가?”아심은 도경수를 향해 고개를 돌려 고운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대답했다.“네, 제가 강아심이예요. 도경수 어르신 맞으시죠? 안녕하세요!”도경수는 이전에 아심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으나, 지금 그녀의 밝은 미소를 보자 목이 메고 눈이 뜨거워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모두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에 도경수도 정신을 가다듬고 도도희에게 물었다.“소희는 봤니?”도도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봤어요.”강재석은 바로 물었다.“우리 소희는 지금 뭐 하고 있나?”“친구들과 함께 있어요.”도도희가 웃으며 말했다.“좀 더 일찍 소희와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정말 늦게 만난 게 아쉬울 정도로 대화가 잘 통했어요.”그 말에 강재석은 호탕하게 웃었다.“그렇게 오래 이야기했다면, 정말 서로 마음에 든다는 뜻이지!”그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갑자기 도경수가 질문을 던졌다. “도도희, 너는 아심 양과 어떻게 알게 된 거니?”도도희는 아심을 바라봤고, 아심은 침착하게 대답했다.“꽤 오래전이죠. 한 미술 전시회에서 처음 만났어요.”도경수는 바로 물었다.“미술을 좋아하나?”“네, 좋아해요. 하지만 진지하게 배워본 적은 없어요.”아심이 부드럽게 대답했다.“예전엔 무슨 일을 했나?”도경수가 다시 묻자, 강재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갑자기 조사라도 하려는 거야? 이제 막 알게 된 아이에게 이것저것 묻다 보면 겁을 줄지도 몰라.”이에 강시언이 갑자기 끼어들며 말했다.
“가지 마세요!”양재아가 급히 권수영을 막아서며 말했다.“오늘 강아심도 초대받은 손님이에요. 만약 일을 크게 만들면, 장씨 집안만이 아니라 임씨 집안에서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임씨 집안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권수영의 분노는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장씨 집안도, 임씨 집안도 지씨 집안을 한순간에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그랬기에 권수영은 그 어느 쪽도 감히 건드릴 수 없었다. 그녀는 갈 곳 없는 분노를 강아심에 대한 증오로 바꾸며 이를 갈았다.“강아심,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아심과 강시언은 강재석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이때, 아심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까 그 일, 고마워요.”만약 시언이 아심을 위해 지씨 집안을 봐줬다면, 아심이야말로 큰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언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지씨 집안 같은 사람들과는 애초에 엮이지 말았어야 했어.”아심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지승현은 저 사람들과 달라요. 제가 엮인 건 지씨 집안 때문이 아니고요.”“아니라고?”시언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차가운 시선이 그녀를 스쳤다.“지승현이 지씨 집안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 지씨 집안의 중심인물이고,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은 지씨 집안의 눈길을 끌지. 이게 관계가 없다고?”아심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그래서요? 무슨 일이 생기면 겁을 먹고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건가요?”시언은 아심을 깊게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좋아, 네 진정한 사랑, 참으로 대단해.”시언은 그 말을 남기고 단숨에 앞서 걸어가 버렸다. 아심은 시언의 차가운 뒷모습을 바라보며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후,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강재석의 휴게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시언은 반대쪽 벽에 기대어 아심을 기다리고 있었다.이때, 아심이 조용히 다가가며 말했다.“안 들어가요?”시언은 여전히 화가 난 듯한 얼굴로 아심을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전에 할아
김화연은 상황의 전말을 간략히 설명했고, 강시언은 차가운 눈으로 지수철을 훑어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누구의 체면을 고려할 필요도 없어요. 결혼식장에서 소란을 피운 이들에게는 체면을 논할 자격이 없어요. 당장 지씨 집안을 떠나게 조치하겠어요.”양재아의 얼굴은 순간 창백해졌고, 그녀는 시언을 향해 돌아서며 간절히 말했다.“시언 오빠, 수철이는 정말로 자기 잘못을 인정했어요!”시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히 대답했다.“잘못인 줄 알면서도 저지른 행동은 더 큰 잘못이죠. 그리고 처벌이 두려워서 뒤늦게 잘못을 인정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고요.”재아는 그의 냉혹한 대답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다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곧 시선을 돌려 강아심을 향해 도움을 요청했다.“아심아, 네가 수철이를 위해 한마디만 해주라!”김화연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다들 아는 사이인가요?”재아는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아심이는 수철이 형의 여자친구예요!”그녀의 말이 끝나자 시언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러나 아심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재아를 담담히 바라보며 말했다.“누구의 동생이든 그건 나와 아무 상관없어요. 다만 다행히도 내 친구의 동생일 뿐이지, 내 친동생은 아니네요.”“만약 내 친동생이 이렇게 자라서 고작 세 살짜리 여자아이를 괴롭혔다면, 난 엄하게 혼내서 다시는 그딴 짓 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거예요.”아심의 단호하고 확고한 말에 재아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고, 수철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심을 향해 음험한 시선을 한 번 보냈다.재아는 시언이 김화연의 입장을 지지하고, 아심 역시 끼어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더 이상 지씨 집안을 위해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짧은 판단 끝에 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심의 말이 맞네요. 내가 처음부터 마음 약해져서 지씨 집안을 돕겠다고 나선 게 잘못이었네요.”“제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네요. 수철이를 데리고 가서 바로 돌아갈게요.”재아는 진심 어린 목
지수철은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입을 열지 못하자, 양재아는 곧장 말을 꺼냈다.“제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잘못 말한 거예요. 아까 권수영 여사님께서도 수철이를 혼내셨고, 수철이도 이미 잘못을 인정했어요.”“여사님, 너무 화내지 마세요! 오늘은 소희와 임씨 집안의 경사스러운 날이잖아요. 만약 지씨 집안을 여기서 내쫓는다면 서로 얼굴을 들기 힘들어질 거예요.”재아는 소희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언급하며 자신이 단순히 도씨 집안의 손녀가 아니라, 소희와도 친분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김화연은 재아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도씨 집안과 소희 모두를 떠올리며, 이 상황에서 체면을 지켜줄 필요가 있음을 알았다.김화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씨 집안 때문이든, 소희 때문이든, 이번에는 넘어가야 했다.해가 서쪽으로 기울어가던 오후, 2층 방에서 강아심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강시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휴대폰을 대신 끊어줄까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아심은 이미 눈을 떴다.아심은 창밖 풍경을 바라보다 잠시 멍해졌고, 이내 휴대폰 벨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손을 들어 휴대폰을 집어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도희 이모!”도도희가 웃으며 말했다.[넌 어디 있어? 오후 내내 보이지 않더구나. 지금 강재석 어르신을 뵈러 가려는데, 그분이 너도 이 결혼식에 왔다고 하더라. 같이 갈래?]그 시각, 강재석은 점심 식사 후 도경수와 거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도경수는 끊임없이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다.강재석은 그의 속내를 간파하고 먼저 도도희에게 전화를 걸어 그를 찾아오라고 부탁했다. 도도희는 전화를 끊고 강재석을 찾아가면서, 강재석이 아심의 이름을 듣고 기뻐하던 모습이 떠올라 아심에게도 전화를 걸었다.갓 잠에서 깨어난 강아심은 반쯤 내려앉은 긴 속눈썹으로 잠기운 어린 분위기를 풍기며 느릿하게 대답했다.“알겠어요. 저도 인사드려야죠. 먼저 가 계세요. 곧 따라갈게요.”두 사람은 통화를 마쳤다.아
전화를 받은 양재아는 먼저 권수영의 이야기를 들었다. 권수영은 다소 억울한 어조로 말했다.“재아양, 우리 수철이가 잠깐 장난 좀 친 거예요. 그 어린 여자아이랑 그냥 놀다 그런 거지, 걔도 아직 어린애잖아요. 그 애한테 뭘 어쩌겠어요?”“게다가 우리 수철이도 이미 혼이 났어요. 수철의 얼굴을 보면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지 알 거예요.”“오늘이 임씨 집안의 경사스러운 날이라 내가 참는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 경찰에 신고했을 거라고요!”“그런데 지금 김화연 여사님이 책임을 묻겠다고 하니, 재아 양이 나서서 부탁 좀 해주면 안 될까?”“오늘은 임씨 집안 결혼식이고, 신부도 재아 양 외할아버지의 제자잖아요. 재아 양이 한마디만 해주면 여사님도 체면을 봐서 넘어가 줄 거예요.”권수영은 최대한 간곡하게 부탁하자, 재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사실 재아는 지씨 집안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들과 그렇게 깊은 관계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이 도움을 준다면 지씨 집안도 체면을 세워줄 것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잠시 후, 재아는 결정을 내렸다.[알겠어요. 제가 여사님께 가서 얘기해 볼게요. 그냥 애들이 장난친 일이라고 하면 그렇게 크게 문제 삼지 않으실 거예요.]“정말 고마워요, 재아 양. 정말로 우리 지씨 집안의 은인이에요!”권수영은 과장된 어조로 감사의 말을 전하자, 재아는 말했다.[어디 계신가요? 수철이를 데리고 오세요. 제가 함께 여사님께 가서 말씀드릴게요.]권수영은 재아의 의도를 곧바로 이해하고 말했다.“지금 데리고 갈게요.”재아와 권수영이 만났을 때, 재아는 지수철의 부은 얼굴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이건 너무 심하게 맞았잖아요!”“고작 어린애랑 장난 좀 쳤다고 이렇게까지 때리다니요. 참 권력이 대단한 집안이네요.”권수영은 주위를 살피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임씨 집안과 관련된 일이기에 재아는 특별한 의견을 내지 않았다.“제가 여사님께서 어디 계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