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기를 가져야 돌도 데워지는 법이야!”임유진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한 뒤, 잠시 마음을 다잡고 그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그럼 빨리 와요. 도착하면 바로 2층으로 올라가세요. 자신이 들러리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탈의실로 안내해 줄 거예요.]메시지를 보내고 몇 초 뒤, 서인에게서 답장이 왔다.[응.]‘아 답장 또 대충 해.’유진은 절망하며 머리를 창문에 기대고, 서인의 뒷모습을 보며 속삭였다.“서인, 내가 전생에 네 집을 불태우고 재산을 털었나 봐. 그래서 이번 생에 이렇게 빚을 갚는 거겠지.”유진은 여전히 서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담배를 다 피우고 일어서서 별채 쪽으로 걸어오자, 유진의 시선이 서인과 잠깐 마주칠 뻔했다. 이에 깜짝 놀란 유진은 재빨리 창문에서 물러나 커튼 뒤에 숨었다....서인은 측면 문을 통해 들어와 복도를 따라 걸었고, 그를 발견한 도우미가 공손히 물었다.“무엇을 도와드릴까요?”서인은 담담하게 말했다.“저는 구은정이고, 임구택 사장님의 들러리로 왔어요.”도우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요, 구은정 씨. 이쪽으로 오세요.”서인은 그녀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고, 탈의실까지 안내받았다.2층 탈의실은 평소 잘 사용되지 않는 방이었다.방 안은 세 면이 옷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중앙에는 정사각형의 물품 테이블이 있었다. 한쪽 벽에는 전신 거울이 자리 잡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어둡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탈의실과 이어진 외부 공간은 작은 휴게실로, 소파와 창가를 따라 놓인 화장대가 있었다. 도우미는 들러리복을 물품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공손히 말했다.“이 옷이에요. 제가 도와드릴까요?”서인은 간단히 말했다.“제가 알아서 입을 테니 나가주세요.”도우미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가려다, 문 앞에 서 있는 유진을 발견했다. 도우미는 인사하려 했지만, 유진이 손가락을 입술에 댄 채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도우미는 눈치를 채고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유진은 방
서인의 목소리는 본래 살짝 허스키했는데, 고요한 방 안에서는 더 낮고 깊게 울렸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임유진의 가슴에 박히는 듯했다.유진의 뺨은 하얗게 빛나던 것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유진은 약간 흔들리는 눈빛으로 서인을 바라보며, 핑크빛 입술을 깨물고 조용히 말했다.“그건 내가 일방적으로 키스한 거니까 키스가 아니죠.”유진은 자신이 잘못 본 건지, 서인의 눈에 어색함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본 듯했다. 유진은 눈을 반쯤 내리며, 긴 속눈썹 아래로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그날은 내가 당신에게 무례했어요. 내 잘못이에요. 사과할게요! 하지만 당신도 알잖아요.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에요.”“친구라며 꾸미는 건 그냥 스스로 속이는 거죠. 평소엔 계속 참다가 그날은 참지 못했을 뿐이에요. 제발 용서해 줘요.”서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걸까? 이게 무슨 돌직구 같은 고백이야...’서인은 저음으로 단호하게 말했다.“만약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겠다면, 안 보는 게 좋겠어.”“안 돼요!”유진은 급히 서인의 말을 막으며, 조심스레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제가 노력할게요. 참아볼게요. 그걸로 안 되나요?”유진의 눈빛을 본 서인은 마치 자신이 약하고 불쌍한 피해자인데, 그녀가 그를 괴롭히는 악당이라도 되는 듯한 이상한 착각에 빠졌다.이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 머릿속에 떠올라 그는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묘한 긴장감이 감돌며, 서인은 더 이상 이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다.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날 일은 더 이상 말하지 말고, 이제 나가. 옷을 갈아입어야 해.”유진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이 얼굴로 삼촌의 들러리를 서겠다고요?”서인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왜, 옷이 통일된 게 아니었나?”“내 말은 얼굴이에요! 지금 이 모습으로는 삼촌보다 나이 들어 보인다고요!”유진은 콧방귀를 뀌며 말하자, 서인은 할 말을 잃었다.유진은 그에게 몇 걸음 다가갔고 손에 들고 있
서인은 미묘하게 고개를 들어 임유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는 맑고 투명하여, 마치 거울처럼 자신의 어두운 과거까지 비춰주는 듯했다.서인은 목울대를 한 번 움직이며 눈빛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방 안은 등이 꺼져 있었고, 옷장에서 은은한 달빛 같은 빛만 흘러나왔다. 그 빛이 그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비추고 있었다.임유진은 어느새 집중력을 잃기 시작했고, 면도기를 움직이는 손도 어색해졌다. 결국 서인의 얼굴이 깨끗하게 정리되자, 유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유진의 눈에는 부드러운 빛이 스쳤고, 그는 고요히 유진의 시선을 받아들였다.서인의 수염이 모두 깎인 후, 서인의 얼굴은 5년은 젊어진 듯했다. 아래 턱선은 더욱 매끄럽고 분명해졌고, 이목구비는 더 선명하고 입체적으로 보였다. 그의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은 유진의 심장을 멈출 듯 뛰게 했다.서인은 어깨를 가볍게 털며, 자신을 바라보는 유진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유진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저었고, 눈빛은 한결 부드러웠다. 그러고는 조용히 말했다.“평소에는 깎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결혼할 때는 꼭 이렇게 깔끔하게 해 주세요. 알겠죠?”서인의 손이 어깨에서 멈추며, 그는 유진을 놀란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결혼? 임유진, 내가 했던 말들이 다 소용없었어?”유진은 서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면도기를 정리하러 갔다. 서인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옷을 갈아입을 거야. 나가.”“알겠어요.”유진은 짧게 대답하며 돌아서려던 찰나, 문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섰고, 긴장한 표정으로 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누가 왔어요!”서인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유진이 재빠르게 옷장 문을 열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서인도 누군가가 들어와 이 상황이 알려지면 유진의 평판에 흠이 갈 것을 우려해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이어 유진이 그의 갈아입은 옷까지 들고
갑자기 서인이 옷장 안에서 실크 스카프를 하나 꺼내더니, 임유진의 팔을 붙잡아 뒤로 묶으려 했다. 유진은 몸을 살짝 비틀며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몇 초간 침묵이 흐른 뒤, 서인이 고개를 숙여 유진의 귀에 낮고 조용히 말했다.“만약 들키게 된다면, 내가 널 묶고 나쁜 짓을 하려 했다고 말해. 넌 강제로 당한 거야.”유진은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이미 가까이 서 있었기에, 그녀의 움직임에 서인의 입술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순간적인 감각이 전류처럼 두 사람의 몸을 스치며, 그들은 동시에 멈춰 섰다. 유진은 숨을 멈추고 다시 그를 껴안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안 돼요. 당신이 나를 묶기만 하면 지금 당장 나가버릴 거예요!”유진은 서인의 의도를 이해했지만, 결코 그를 따라줄 수 없었다.바깥에서는 은서가 이미 옷장을 열고 옷을 찾고 있었다. 첫 번째 옷장에는 남성복만 걸려 있었고, 그녀는 이를 닫고 두 번째 옷장을 열었는데, 거기에는 가방이 있었다.세 번째 옷장은 투명한 갈색 유리로 되어 있어, 안에 있는 보석과 장신구가 한눈에 보였기에, 은서는 이를 건너뛰었다. 그리고 다음 옷장이 바로 임유진과 서인이 숨은 옷장이었다.그 순간, 유진은 갑자기 두려움이 사라졌다.‘들켜도 상관없어. 내가 서인을 좋아해서, 쫓아다니고 있다고, 일부러 여기까지 따라왔다고 솔직히 말하면 되니까.’그리고 그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유진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은서가 문을 열길 기다렸다. 그러나 서인은 손에 든 스카프를 자기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유진은 그의 뜻을 알아채고 당황한 마음에 재빠르게 발돋움을 해 서인의 입술에 키스했다.옷장은 어두워 손을 뻗어도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유진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서인의 입술을 단단히 맞췄고, 이에 서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유진의 조금 전 냉정했던 마음은 다시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고, 유진은 더욱 강하게 발끝을 들어 그에게 다가갔다. 팔을 그의 어깨에 감으며, 입
서인의 숨이 깊어지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임유진의 허리를 잡아 그녀를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유진은 그가 힘을 쓰지 못할 것을 알고 더 뻔뻔해졌다. 단순히 입술을 깨무는 것을 넘어서 더욱 깊게 키스했다.서인은 유진의 키스와 깨물기에 마음이 어지러워졌고, 결국 유진의 팔을 강하게 당기다 팔꿈치로 옷장 문을 치고 말았다.묵직한 소리가 나자, 밖에 있던 구은서가 어깨끈을 올리던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무슨 소리야?”은서는 이마를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소파에 기대어 있던 서선영은 휴대폰을 만지며 고개를 들었다.“뭐라고?”은서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 생각하며 말했다.“아니야, 아무것도.”은서는 다시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옷장 안, 두 사람은 잠시 멈췄다. 하지만 유진은 물러서지 않고 고개를 들어 어둠 속에서 맑은 눈동자로 서인을 바라보았다.고요 속에서 미묘한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좁은 공간에서 그 어떤 감정도 흩어질 곳 없이 점점 팽창하며 두 사람을 압박했다.유진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서인의 입술에 부드러운 키스를 했다. 마치 솜털 같은 간지러움이 서인의 입술을 스치며, 가볍게 그의 마음에 닿았다.서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유진의 팔을 잡은 서인의 손은 힘을 잃었고, 목울대가 계속해서 움직이며 그의 숨은 점점 거칠어졌다. 서인은 억누르려 애썼지만, 결국 눈을 감았다.눈을 감으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감각은 더 예민해졌다.밖에서는 구은서가 옷을 갈아입은 뒤, 거울 앞에서 정리하며 말했다.“엄마, 왜 그런 말을 해서 임씨 집안 어르신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어요? 저까지 민망하게 만들고. 평소에 항상 신중하시더니, 오늘은 정말 이해가 안 돼요.”서선영은 휴대폰을 뒤집어 무릎 위에 놓고, 거울 속 은서를 힐끔 보며 비웃듯 말했다.“네가 나한테 잔뜩 화났을 줄 알았어.”은서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화난 게 아니라, 미친 건 아닌
그러나 서인은 분노를 꾹 눌렀다. 옷장 문을 지탱한 그의 팔에 근육이 솟아올랐고,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몸이 잔뜩 긴장했지만, 더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임유진은 그의 마음을 느끼며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유진은 서인을 안고 있던 팔을 더 꽉 조이며, 얼굴을 서인의 가슴에 바짝 붙였다. 그리고 그의 심장 위를 옷 너머로 조심스럽게 입 맞췄다.어둠 속에서 서인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 서인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품에 꼭 안긴 유진을 바라보았다.비록 유진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유진의 작은 행동 속에서 느껴지는 불안함과 자신 때문에 아파하는 유진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잠시 마음이 흔들린 서인은 팔을 내려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자, 유진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갑작스러운 기쁨이 가슴 깊이 밀려들었지만, 동시에 얽히고설킨 감정들이 그녀의 눈가를 적셨다.유진은 알고 있었다.‘이렇게 참는 이유는 나 때문이야. 내가 없었더라면 절대 구은서를 그냥 두지 않았겠지.’서인은 항상 냉랭하게 유진을 밀어내면서도, 결국에는 유진을 위해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유진은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유진은 서인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모든 부끄러움과 체면을 잊은 채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바깥에서는 은서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엄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거예요?”서선영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무 의미 없어. 걱정하지 마. 내가 뭘 해야 할지는 잘 알고 있어.”서선영은 마치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있다는 듯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기억해 둬. 네가 임구택과 얽히고설킨 관계를 만들어야 해. 비록 널 미워하더라도 말이야. 임구택은 항상 네가 자기 삶에 존재한다는 걸 기억해야 해.”“심지어 네가 임구택과의 싸움에서 진다고 하더라도, 너와 임구택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외부 사람들은 널 임구택 곁에 있는 사람으로 여길 거야.”“그렇게 되면 너
“공개하자고?”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공개해서 뭐? 네가 혼자 좋아서 나를 쫓아다니는 거, 그걸 사람들한테 보여주겠다는 거야?”유진은 순간적으로 멈칫했고,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고요한 호수 위에 돌멩이가 던져져 파문이 일어나듯, 억지로 유지하던 평정이 깨지고 아픔이 조용히 퍼졌다.서인은 이유 모를 불편함에 시달렸지만, 겉으로는 더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래, 그러면 정말 공개할 거야?”“공개하자고요!”유진은 냉소를 띤 채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내가 당신을 쫓아다니는 거, 그게 어때서요? 도덕적으로 문제 되는 것도 없고, 법적으로 어긋나는 일도 아니잖아요. 근데 뭐 어쩌라고요?”“너...”서인은 얼굴이 굳어졌다.서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유진은 팔을 뒤로 짚어 물품대를 받치고, 두 다리를 가볍게 들어 올려 앉으며 그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유진의 맑은 눈동자에는 장난기와 도전적인 불꽃이 반짝였다.“화제를 돌리지 마요. 그리고 나를 그냥 보내려고 하지도 마요.”“뭐라고?”서인은 유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찡그렸다.“나랑 키스했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책임질 건데요?”유진은 단호한 태도로 말하자, 서인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누가 누구를 키스했다고?”유진은 서인의 진지한 태도에 웃음이 터졌다.“그럼 내가 사장님 책임질게요. 사장님을 괴롭히고 그냥 지나칠 순 없잖아!”서인은 더 이상 그녀와 장난칠 기분이 아니었다.“이제 그만하고 나가.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까. 여기서 더 오래 있으면 이상할 거야.”유진은 일부러 무심한 태도를 취하며 말했다.“키스도 하고 안아도 봤는데, 옷 갈아입는 게 뭐 대수라고? 대담하게 굴어요!”서인은 유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 말 없이 뒤돌아 옷을 벗기 시작했다.먼저 조끼를 벗고, 이어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그는 매끄럽고 단호한 동작으로 셔츠를 벗
남궁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깊게 팬 눈매는 차가운 냉기를 띠며 서명을 바라보았다.“심명 씨, 문화 차이를 이용해서 저를 놀리는 건 예의가 아니에요!”“예의?”심명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만약 소희가 당신을 잘 보살피라고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을 산속으로 팔아넘겨서 데릴사위로 만드는 게 진짜 예의일걸요?”남궁민은 심명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치 알아들은 것처럼 분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두 사람은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남궁민은 대문 벽에 새겨진 두 글자를 보고 비로소 깨달았다.“여기가 임구택 씨의 집이에요?”심명은 웃으며 대답하지 않고, 초대장을 꺼내 경비원에게 보여준 뒤 남궁민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임씨 집안의 저택은 약 100에이커의 넓이를 자랑했다.별채와 별채 사이에는 중식 정원이 있고, 서양식 잔디밭과 수영장은 물론 골프장까지 있었다.오늘은 축하를 위해 온 손님들이 많아 정원 곳곳이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남궁민은 심명에게 물었다.“오늘은 결혼식도 아닌데 왜 여기 온 거예요?”심명은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여유로운 태도로 웃으며 말했다.“우리 아버지가 나더러 와서 사람들 접대하라고 해서 왔지. 당신은 덤으로 데리고 온 거고.”남궁민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난 소희의 손님이지, 임씨 집안과는 아무 관련도 없잖아요. 왜 나를 데리고 온 거예요?”심명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소희가 너 잘 챙기라고 했으니까요. 근데 오늘에서야 생각났거든요!”그 말에 남궁민은 할 말을 잃었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스스로를 진정시킨 뒤 다시 심명을 따라갔다.두 사람 모두 외모가 뛰어났기에,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시선을 고정했다.특히 심명은 풍류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했기에, 벌써 여섯, 일곱 명의 여성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심명을 보면서도 남궁민에게로 미묘하게 옮겨갔다.심명은 한적한 장소를 찾아 앉았고, 남궁민은 그를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