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가 처음 만난 건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어. 그때마다 네가 출근할 때면 스쿠터를 디저트 가게 앞에 세워 두고, 돌아올 때 가게에 와서 디저트를 먹었잖아.”“다른 직원들끼리 네 얘기를 하기도 했어. 다들 네가 임구택의 대학생 애인일 거라고 수군댔는데, 난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했어.”“네 눈빛이 너무 맑고 투명했거든. 그런 사람이 남의 애인이 될 리 없다고 믿었어. 내 직감이 맞다고 생각했지.”청아는 커다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회상에 잠겼다.“그때 난 네가 나처럼 청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줄로만 알았어. 한가한 시간에 잠깐씩 일하는 거라고 생각했지. 설마 네가 청원의 주인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소희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땐 나랑 임구택 사이가 좀 복잡했어.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알아.” 청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가가 살짝 촉촉해졌다.“시간이 이렇게 흘렀는데, 우리가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다니, 난 정말 행운아야.”소희는 그때 디저트 가게에서 혼자 구석에 앉아 있는 일이 많았다. 성격이 조용하고 차분해서 누구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지만, 청아는 소희의 진면목을 알고 있었다. 소희는 겉으론 차가워 보여도 실제론 주변을 환히 밝혀주는 작은 행성 같아서, 함께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 빛을 받곤 했다.소희는 청아의 말에 감동하며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얼마나 세월이 지나도 우린 계속 함께할 거야. 나 이제 곧 결혼해. 다음은 너랑 시원 오빠 차례야!”청아는 따뜻한 미소로 답했다.“응, 알았어.”오늘 청아는 단정한 번 헤어스타일에 밝고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예전 그대로였고, 두 사람의 우정 역시 변함이 없었다....앞줄에 앉아 있던 장시원이 살짝 고개를 돌려 소희와 청아를 쳐다본 뒤, 임구택에게 눈짓을 보냈다.“네 아내랑 내 여자가 무슨 얘기 중인 거야? 서로 끌어안고 있네?”구택은 고개를 돌려 보며 약간 찡그렸다.“아마 청아가 소희한테 속상한 일 털어놓는 중일 거
유정은 허겁지겁 도망치다가 발밑의 술병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그녀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지만, 예상했던 아픔은 없었다. 누군가가 강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받쳐 주고 있었다.유정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를 잡아준 사람은 다름 아닌 조백림이었다. 술기운이 도는 백림의 눈동자는 평소보다도 더 깊고 부드러웠고, 그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유정을 품에 끌어당겼다. 백림의 목소리는 마치 최고급 와인처럼 진하고 부드러웠다.“안겨 오고 싶으면 말만 해. 기꺼이 안아 줄게.”유정은 백림을 밀치고 일어나려 했지만, 손에 잔뜩 묻은 케이크 크림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결국 차분하게 되받아쳤다.“취한 척하면서 자만하는 거, 좀 재미없네.”백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그래? 난 꽤 재미있는데.”백림은 눈길을 유정의 크림 묻은 손가락에 두었다. 손목을 가볍게 잡고는 그녀의 손가락 끝으로 다가와, 조용히 입술을 대고 크림을 핥아먹었다.. 이에 유정은 온몸이 굳어졌다.백림은 혀끝으로 크림을 가볍게 훑으며, 술기운에 살짝 물든 눈을 더욱 깊이 있게 반짝였다.“정말 달콤하네.”유정의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윙 소리를 내며 멈췄다. 진짜, 이 남자는 여우가 따로 없었다.“달콤하다고? 더 달콤하게 만들어 줄까?” 유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손에 묻은 크림을 백림의 얼굴에 대고 쓱 문질렀다.백림의 얼굴은 순식간에 크림으로 덮였고, 아까 그 단정하고 품위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고, 어딘가 우스꽝스럽고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유정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백림이 반응하기 전에 유정은 얼른 몸을 일으켜 도망쳤다....소희는 다른 사람들이 신나게 케이크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도 가장 열심히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나중에는 청아까지 케이크 전쟁에 가세했지만, 소희는 요요를 안고 소파에 앉아 조용히 케이크를 맛보고 있었다.“케이크 위에 있는 초콜릿이 제일 맛있어.” 소희가 말하자, 요요는
소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응?”유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쑥스럽게 웃었다.“그게 며칠 전에, 내가 그 사람 일하는 가게에 갔었거든. 그런데 그가 뒷마당에서 자고 있길래,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살짝 입 맞추고 말았어. 그러다 들켰지 뭐야.”유진은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지도 않고, 순진한 얼굴로 사연을 털어놓았다.“내가 잘못했어. 친구로 지내자고 해놓고는 그 순간 살짝 미쳐서 참질 못했네.”그때 하필이면 햇살이 너무 따뜻해서였을까. 그가 해당화 나무 아래 앉아 있는데, 무심한 듯 매력적인 그 얼굴이 빛을 받아 더 깊고 신비롭게 보였다. 유진은 잠시 정신을 잃었고, 이성과 함께 그 순간의 미풍에 휩쓸려 버렸다.소희가 물었다.“그럼, 그 뒤엔 어떻게 됐어?”“바로 그 자리에서 쫓겨났지 뭐.”유진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사실 그때 욕심이 생겼다. 살짝만 하고 멈추기에는 아쉬워서, 이미 키스해 버린 거 한 번 더 해본다고 큰일 나랴 싶어 조금 더 대담하게 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긴장한 나머지 언제 그가 눈을 뜬 건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소희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혹시 그 사람 부끄러워서 그런 거 아닐까?”유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절대 그런 눈치는 아니었어!”그가 계속 피하는 게 너무 얄미워서 유진은 오히려 더 화가 났다.“두고 봐. 내 생각엔 네 결혼식에는 어쩔 수 없이 나타날걸?”소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럼 내 생각엔 그 사람을 너희 삼촌의 들러리로 세우는 건 어때?”유진은 놀란 눈으로 소희를 바라보다가, 이내 깔깔 웃으며 물었다.“그 사람이 과연 받아들일까?”소희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맡을게. 그 사람을 다룰 방법은 내가 알아!”유진도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둘은 그렇게 서인에게 들러리 자리를 맡기는 데 기꺼이 합의했다.그때, 한 직원이 다가와 공손히 말했다.“소희 씨, 밖에서 찾는 분이 계십니다.”
소씨 집안이 파산하면서, 진연은 예전의 사모님 아우라가 사라졌고, 몇 달 사이에 많이 초췌해져, 예전의 오기가 많이 사라졌다.소희가 아무런 감정 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저를 찾으신 이유가 있나요?”소정인은 잠시 진연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네 엄마가 널 보고 싶다고 해서. 그리고 오늘 너와 임구택 사장님이 여기 친구분들과 함께 계신다고 해서 이렇게 찾아왔어.”소희는 냉랭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보셨으니 이제 돌아가셔도 되겠네요.”진연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지며 조용히 소정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소정인은 한층 더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소희야, 네가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나와 네 엄마도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을까? 아무리 뭐라 해도 우린 네 친부모잖니.”“그때 네 엄마가 소동이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사장님께서 지원해 주셔서야 겨우 퇴원할 수 있었어.”“그 뒤로 네 엄마와 나는 많은 걸 깊이 반성했다. 이제야 진짜 깨달았어. 친자식은 정말 다르다는 걸. 아무리 잘해줘도 남은 결국 남이더라.”“소동에게 그토록 마음을 줬건만, 결국 우리를 배신하고 떠난 그 애는 참으로 염치도 없는 아이였어.”진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맞아, 그때 내가 소동의 가식에 속아 넘어갔던 건 내 잘못이었어. 소희야, 엄마를 용서해 줄래?”소희는 예전의 거만함과 여유가 사라진 진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수없이 많은 장면들이 스쳐 갔다.첫 만남에서 보였던 차가운 시선과 가식적으로 감춰진 경멸, 그리고 그 속에서도 분명히 느껴졌던 거부감. 그 태도는 감출 수 없는 것이었다. 이후로도 소씨 집안에서 함께 지내며 겪은 냉담함과 차가움은 그들의 사이에 더 큰 벽을 쌓았다.소희가 소씨 집안을 떠난 뒤 두 사람은 더욱 멀어졌다. 소동과 마찰이 있을 때마다 진연은 언제나 소동의 편에 서며 소희와 마치 적이라도 되는 듯 대립하곤 했다. 진연이
소희가 잠시 웃어 보였다.“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아요.”소정인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말했다.“사장님, 괜한 오해를 하신 것 같아요. 우리가 어찌 우리 친딸을 괴롭히겠어요?”임구택의 시선은 싸늘했다. 그는 소정인 부부를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친딸? 그 친딸은 지금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소정인의 얼굴빛이 일그러지며 말을 잇지 못했다. 구택은 소희의 손을 잡고 소파 쪽으로 안내하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소정인 씨, 이전에 제가 분명히 말씀드린 적이 있죠? 무슨 일이 있으면 저를 찾아오라고요. 괜히 소희를 귀찮게 하지 마세요.”소정인은 당황한 듯 웃으며 말했다.“아, 그게 소희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어서...”그러나 구택은 무심하게 응대했다.“제 귀엔 축하보다도 일종의 압박처럼 들리는데요.”소정인은 얼굴이 화끈거리며 더듬더듬 말했다.“아니, 사장님, 저희는 단지 소희의 결혼식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온 거예요.”그 말에 구택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제 결혼식 준비가 불완전하다는 말씀인가요?”소정인은 입을 다물고 대꾸하지 못하자, 구택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두 분께서는 소희에게 든든한 배경이 없어 걱정하시는 것 같지만, 제 아내의 든든한 지원군은 그 어떤 부모보다도 믿음직스러운 분들이에요.”진연은 그의 말에 얼굴빛이 어두워지며 화를 참지 못하고 비아냥거렸다.“그러게요, 사장님 말씀대로죠. 소희 뒤엔 강씨 집안이 있으니, 우리가 아무리 전성기를 누렸더라도 강씨 집안에 비할 바가 아니죠.”구택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지고는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이제껏 제 아내를 키워주신 강씨 집안에게 감사를 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비꼬고 계시다니 놀랍군요.”진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구택은 그녀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말했다.“결혼식에 부모로서 참석한다고 해도, 두 분이 감히 그 자리에서 소희의 부모라고 당당히 소개할 수 있겠습
임구택은 소희의 옆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조금만 마셔, 밤에는 내가 돌려받을 테니까.”소희는 볼 끝이 살짝 붉어지며 눈웃음을 지었다.“좋아, 콜!”두 사람은 다시 파티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들이 멀어지자마자, 구은서는 다른 복도 쪽에서 나타나 그들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그녀는 곧바로 한 직원에게 다가가 물었다.“임구택 사장님이 예약하신 방이 어디인가요?”직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은서 씨,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죠?”은서는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어둑한 조명 아래서 천천히 다가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심명이었다. 은서는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심명 사장님이시군요.”심명은 잿빛 파란 셔츠에 고급스러운 린넨 바지를 입고, 섬세한 얼굴에 묘한 색기를 띄운 채 서 있었다. 귀에 달린 흑요석 귀걸이가 은은한 빛을 발하며 그를 더욱 신비롭고 차가운 인상으로 돋보이게 했다. 그는 은서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며 차가운 눈빛으로 경고했다.“구은서 씨, 그 잔머리 굴리는 걸 멈추세요. 소희의 결혼식에 어떤 사고라도 생긴다면, 당신은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은서는 어깨를 곧추세우고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심명 사장님도 소희를 좋아하신다면서요? 그럼 우리도 공통의 목표가 있는 셈 아닌가요?”그 말에 심명은 비웃음을 흘렸다.“누가 당신을 친구라고 생각하죠? 제발 착각은 그만하세요.”은서는 표정이 굳어졌고, 조소를 섞어 대꾸했다.“당신과 나는 다르죠. 저는 구택 씨를 좋아하면 제 방식대로 용감하게 다가가요.”“반면에 당신은 겁을 먹고 구택 씨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으면서 감히 대놓고 다가가지도 못하고 있잖아요.”심명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구은서 씨, 당신은 남을 이간질하고 이용하는 데 능한 것 같군요. 혹시 드라마에서 내연녀 역할을 너무 많이 맡아서 그 성격이 몸에 밴 건가요?”은서는 그의 비아냥에 얼굴이 붉어지며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새벽까지 이어진 모임이 끝난 후, 소희와 임구택은 집으로 돌아왔다. 씻고 나서 침대에 누우니 시계는 이미 새벽 두 시를 넘어 있었다.깊은 밤, 임구택의 눈빛은 여전히 맑았다. 소희를 품에 안고 그녀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소희야, 이제 우리 결혼하는 거야.”소희는 그의 품에 파묻힌 채 작게 대답했다.“응.”구택은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짝 만지며 미소 지었다.“예전에 우리 서로의 정체를 모르고 만났을 때가 있었지. 처음으로 널 본 건 강성대에서였던 거 기억해?”소희는 옆으로 살짝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눈동자가 반짝이며 대답했다.“기억나. 그때 당신이 내 편 들어줬었잖아.”구택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참 이상하지. 그때 널 잘 몰랐는데도 누군가가 너를 괴롭히는 걸 보니 이상하게 화가 났어. 그래서 돕고 싶었어.”소희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장난스레 말했다.“설마 외모 보고 덤빈 건 아니지?”따스한 조명 아래에서 구택의 눈빛은 깊어졌다. 소희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대꾸했다.“외모 때문에 행동한 거라면, 네가 우리 집에서 임유민 과외를 봐주러 왔을 때부터였겠지.”소희는 그제야 깨달은 듯 말했다.“아, 그때부터 벌써 나한테 뭔가 꿍꿍이가 있었구나?”구택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그때부터였어. 넌 일부러 나를 유혹하려고 그런 거 아니었어?”그는 잔디밭에서 유민이에게 활쏘기를 가르치던 소희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얀 다리와 날씬한 허리, 그리고 활을 당기던 곡선미까지 눈길을 사로잡았다.“나중에 확신했어.”소희는 그의 손을 쥐며 물었다.“뭘 확신했는데?”구택은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우리가 서로에게 빠져들었다는 거.”소희는 환하게 웃으며 부드럽게 반박했다.“난 아니거든?”“아니라고?” 구택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청아 오빠를 구하러 가던 그날 밤 나한테 일부러 전화 건 거잖아. 계획적이었지?”소희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
“안 울었어.”“그럼 오늘 한번 울어봐.”...밤은 짙게 깔려 세상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정신이 맑아질 즈음엔 이미 하늘이 미약하게 밝아 오르고 있었다.소희가 깊이 잠들자 임구택은 살며시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조용히 닫고 거실 베란다로 나가 명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받자마자, 구택의 목소리는 어둠을 품은 듯 나직하고 깊었다.“다 알아냈나?”[네, 조사 결과를 말씀드리려 했지만, 밤늦게는 방해될까 봐 이 시간까지 기다렸어요.]명우가 설명을 덧붙인 뒤 이어 말했다. [최근 소정인은 해성 쪽 투자자를 만나 회사를 재건하려고 했어요.][그 자리에서 본인이 사장님의 장인이라며, 디자이너 King의 아버지라고 했지만 상대방은 신뢰하지 않는 눈치였죠.]구택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결국 소정인은 소희가 이날 넘버 나인에 있을 걸 알고, 진연과 함께 찾아와 감성에 호소하여 부모 자격으로 결혼식에 참석하려 한 것이다. 임씨 집안의 결혼식에는 기자가 필히 참석할 터, 소정인이 소희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언론에 나오면 그로 인해 투자를 확정적으로 받을 수 있게 될 것이었다.‘평소엔 관심도 없더니, 이제 와서 소원을 빌러 오는 건가...’ 구택은 냉소를 머금었다. 동시에 소정인이 여전히 소희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어째서 아직도 소희의 인생을 착취하려는 걸까?’명우가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장님. 소정인은 한 푼도 손에 쥘 수 없을 거예요.]구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부했다. “이 일은 절대 소희에게 알리지 말고.”[네, 알겠어요!]...다음 날 오전 11시, 운성으로 가는 비행기 시간이 가까워졌다. 소희는 일찍 일어나 사연과 함께 백양의 묘지를 찾았다.봄날의 아침 안개 속, 고요하고 아늑한 공동묘지에는 맑은 소나무와 잣나무가 안개에 둘러싸여 더욱 신비롭고 고요하게 느껴졌다.묘비에는 이름도 없고, 단지 서인이 과거 찍어둔 사진만 남아 있었다. 원래 그들 몇 명의 단체 사진이었지만, 백양의 모습만
“흥성.”흥성은 강성의 옆도시로, 관광 도시였다. 이에 임유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결정을 내렸다.“나도 같이 갈게요!”꽤 발랄하게 말하는 유진에 서인은 코웃음을 쳤다.“내가 뭘 하러 가는지도 모르면서 따라가겠다고?”유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사장님이 뭘 하든 상관없어요. 어쨌든 나도 갈 거니까요!”서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안 돼.”“왜 안 돼요?”“오늘 돌아오지 못할 거야. 거기서 이틀은 머물러야 하는데, 네가 따라오면 불편해.”“그냥 여행 가는 셈 치면 되잖아요!”서인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다음 사거리에서 임씨 저택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이에 유진은 여유롭게 말했다.“그러면 집에 데려다줘요. 집에 가서 짐 챙기고 내 차로 흥성으로 갈게요. 어쩌면 거기서 우연히 만날 수도 있겠는데요?”“임유진.”서인은 얼굴을 굳히자, 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그를 바라봤다.“우리 동료들은 다 놀러 갔는데, 난 너 때문에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사장님은 나를 두고 혼자 나가겠다고요? 그게 맞는 거예요?”서인은 설명했다.“나는 노는 게 아니라, 일이 생겨서 가는 거야.”“몰라요. 어쨌든 따라갈 거예요. 나 어린애 아니니까 방해 안 할게요. 그냥 나 없는 셈 치면 되잖아요!”유진은 애타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사장님은 일 보러 다니고, 난 혼자 놀러 다닐게요. 절대 방해 안 할 거예요. 됐죠?”서인은 시간을 확인했는데, 더 미루면 해 지기 전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다.“그럼 말 잘 들어야 해.”서인이 신신당부했다.“약속할게요!”유진은 신나서 손까지 들며 맹세할 기세였다.서인은 고속도로에 올라탄 뒤 오현빈에게 전화를 걸어 가게를 잘 봐달라고 당부했다. 자신은 이틀 동안 자리를 비울 거라고 했다.유진도 노정순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 설명 없이 친구들과 여행을 가겠다고만 말했다. 노정순은 오전에 여진구가 찾아와 회사 워크숍을 언급했던 걸 기억하고, 그녀가 회사 동료들과 함께 나가는 줄 알고는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당부했다.전화를 끊
강성의 한 묘지.홍복과 표용을 비롯한 전우들의 묘가 모두 이곳으로 옮겨졌다. 전우들은 이제 백랑의 곁에서 다시 함께할 수 있었다.서인은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씩 놓았고, 임유진도 묘지 밖에서 사 온 꽃을 하나하나 올려놓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돌계단에 앉아, 멀리 보이는 산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유진도 서인의 곁에서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이야기 좀 더 해 주세요!”서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다 얘기했잖아.”유진은 묘지를 찾을 때마다 늘 삼각주에서의 과거를 이야기해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서인이 기억하는 건 이미 다 말해 준 상태였다. 그러나 유진은 질세라 다시 말했다.“이번에 전우들 묘지가 새로 생겼잖아요. 분명 더 많은 이야기가 있을 텐데요!”“없어.”서인은 한쪽 다리를 굽힌 채 느슨하게 앉아 있었고, 말투 역시 어딘가 귀찮아 보였다.이에 유진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그러면 다음에 소희한테 물어봐야겠네!”그제야 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유진을 노려봤다.“진짜 듣고 싶어?”“당연하죠!”유진은 활짝 웃으며 턱을 괴고, 이야기 들을 준비를 했다. 유진은 과거가 늘 궁금했다.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맨날 말하는 내 229명의 여자친구들 얘기, 하나씩 다 해 줄까?”유진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곧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고는 곧장 옆에 있던 꽃을 집어 들어 서인에게 던졌다.서인은 피식 웃으며, 거친 목소리 속에 장난기가 묻어났다.“이야기 듣고 싶다며? 229개의 이야기가 있지. 아마 내년까지도 다 못 들을걸.”“아직도 그 말을 해요?”유진은 씩씩거리며 서인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서인은 가볍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별다른 힘을 쓰지도 않았지만, 유진은 아무리 버둥거려도 밀어낼 수 없었다.마치 큰 회색 늑대 앞에 선 어린 토끼처럼,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버둥거릴 뿐이었다.잠시 후, 유진은 숨을 몰아쉬며 결국 포기했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임유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그러면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겠네요!”문신 남자는 점점 짜증이 났다.“겨우 서빙하는 주제에 뭘 그렇게 잘난 척이야? 내가 맞팔 달라는 것도 네 급을 봐준 거라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한층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사장님! 여기서 행패 부리는 사람이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서인이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다부진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운은 주변 공기마저도 서늘하게 만들었다.서인의 싸늘한 눈빛이 문신 남자를 향하자, 그는 마치 얼음장 같은 시선에 찔린 듯 등골이 서늘해져,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유진은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사람이 돈을 내기 전에 제 SNS 맞팔하라고 요구했어요.”그제야 문신 남자의 일행이 이쪽 상황을 알아차리고 하나둘 일어나 힐끗거리며 지켜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험상궂은 인상이었고, 분위기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그때, 오현빈과 이문이 후원에서 걸어 나왔다.현빈은 본래 덩치가 크고 험악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손에 주방칼까지 들고 있었다.문신 남자의 일행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슬그머니 자리에 다시 앉았다.그때, 서인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며 문신 남자를 향해 말했다.“좋아. 내꺼를 추가해요. 나랑 얘기 좀 하자고요.”문신 남자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굴이 창백해지며 허둥지둥 휴대폰을 꺼내 결제를 마쳤다. 그러고는 재빨리 동료들을 불러 가게를 빠져나갔다.사람들이 나가자, 현빈이 비웃으며 말했다.“이런 겁쟁이 녀석들. 다음에 또 이런 쓰레기들이 나타나면 말도 필요 없어. 바로 나를 불러.”유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알겠어요!”서인은 유진을 한 번 쓱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이문은 그를 따라가며 넌지시 물었다.“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임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 찻주전자를 훔쳐 가겠어요? 안심하세요!”서인은 유진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손님이 너 찾으러 왔으면, 할 얘기 끝났으면 나가라. 가게 바쁘다.”유진은 서인의 표정이 더 이상 좋지 않자, 정말로 화를 낼까 봐 서둘러 대답했다.“별거 아니에요. 내가 그냥 먼저 보낼게요!”그렇게 말한 뒤, 유진은 황급히 돌아서서 여진구를 향했다. 그런데 그 순간, 진구가 서인의 찻주전자를 들고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그거 내려놔요!”유진은 깜짝 놀라 뛰어가며 소리쳤다. 놀란 진구는 손을 헛디뎌 찻주전자를 떨어뜨릴 뻔했다.“왜 그래?”유진은 재빨리 찻주전자를 낚아채듯 빼앗았다.“이거 사장님이 2,000만 원 주고 산 거예요. 깨지면 감당할 수 있어요?”“뭐? 2,000만 원?”진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게 2,000만 원짜리 골동품 같지는 않은데?”유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되물었다.“선배 골동품에 대해 알아요?”“아니?”“그럼 됐죠!”유진은 찻주전자를 소중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2,000만 원인데 한 푼도 깎지 않고 샀어요. 그만큼 애착이 있다는 거죠. 깨지면 당연히 화내겠죠!”진구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난 잘 모르지만, 우리 작은아버지는 골동품 전문가야. 가져가서 감정받아 볼까?”그리고 그는 서둘러 덧붙였다.“오해하지 마. 혹시라도 바가지를 썼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이 찻주전자가 아무리 봐도 2,000만 원짜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찻주전자를 내려놓더니, 진구를 밖으로 밀어냈다.“무슨 바가지요? 마음에 들면 2,000만 원이든 2억이든 가치가 있는 거고, 마음에 안들면 2천원도 아까운 거죠.”“그러니까 선배도 선배 할 일 하러 가요! 내 일 방해하지 말고요!”진구는 서인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후, 마지못해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나가기 직전,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유진아, 연애
여진구는 바로 문을 나가려 했다. 임유진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따라붙으며 그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선배 지금 우리 엄마한테 말하러 가는 거예요?”진구는 붉어진 눈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이건 어린애들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안 될 이유가 뭐야?”“안 돼요! 절대 가면 안 돼요!”유진은 온 힘을 다해 진구를 붙잡았다. 그러나 진구는 유진의 손목을 잡고 힘을 줘서 떼어내려 했다.“손 놔!”“안 놔요! 선배, 선배가 뭔데 내 일에 참견죠?”“너희 가족은 전부 내가 너를 회사에서 관리한다고 알고 있어. 그러니 난 너에 대한 책임이 있고!”“뭐요? 지금 미쳤어요? 선배 회사가 무슨 어린이집이에요? 선배는 그냥 내 상사죠, 내가 누구를 좋아하든 상관없잖아요!”“너 내 부서 사람이잖아. 내 책임이야!”“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요!”“넌 너무 철이 없어!”“뭐요? 철이 없다고요?”유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순식간에 진구의 팔을 붙잡고 발을 들어 그의 엉덩이를 차려 했다. 진구는 황급히 몸을 피하면서도, 유진이 중심을 잃고 넘어질까 봐 신경을 썼다....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서인이 커다란 뼈다귀가 담긴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무뚝뚝했고, 목소리에도 차가움이 묻어 있었다.“비키지?”유진은 순간 당황해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서인은 두 사람 사이를 지나쳐 야옹이에게 가서 음식을 내려놓았다. 애옹이는 음식 냄새를 맡고 서인의 어깨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서인은 귀찮다는 듯 손을 들어 살짝 밀어냈다.서인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애옹이는 몸이 가볍고 재빠른 덕분에 부드럽게 착지했다.야옹이는 그 광경을 보고는 마치 동정을 하듯, 입에 물고 있던 뼈 하나를 작은 애옹이 쪽으로 던졌다.그리고 유진은 이 장면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서인이 애옹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한 달이 지나도 여전히 이런 태도일 줄은 몰랐다.그때
가끔 서인이 몇 마디 맞장구를 쳤지만, 대부분은 임유진이 혼자 말하는 시간이었다.“옆 부서에 새로 들어온 인턴이 있는데, 자꾸 우리 사무실에 와요. 꼭 진구 선배가 있을 때 찾아와서, 다들 걔가 짝사랑하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요.”“그런데 문제는 진구 선배가 그 애를 네 번이나 봤는데도 아직 이름을 기억 못 한다는 거죠.”“이번 워크숍에 그 부서도 같이 가는데, 혹시 이번 기회에 좀 더 가까워질지도 모르죠!”“우리 동료 중 한 명이 집에서 페르시안 고양이를 키우는데, 벌써 한 살이 넘었대요. 내가 애옹이 사진 보여줬더니 완전 반하더라고요.”“나중에 둘이 고양이 맞선 한 번 보자더라고요. 물론, 이건 사장님 허락이 필요하죠!”...그렇게 신나게 이야기하던 유진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서인을 바라보았다. 이에 서인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유진은 입술을 앙다물다가, 문득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우리 결혼하면, 매일 이렇게 같이 있는 거잖아요. 꽤 괜찮지 않아요?”서인은 눈썹을 찌푸리고는 무심한 듯 말했다.“도대체 네 머릿속에는 맨날 무슨 생각이 돌아가는 거야?”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사장님 생각이죠!”유진은 서인의 등 뒤에서 장난스럽게 소리쳤다. 서인의 어깨가 살짝 경직되었고, 발걸음이 반 박자 느려졌다. 그러나 서인은 끝내 뒤돌아보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안으로 사라졌다.유진은 애옹이를 어깨 위에 올려놓고 중얼거렸다.“너 말해 봐. 저 사람,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 맞지?”“냐옹.”애옹이는 맑은 크리스탈 같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울었다.잠시 후, 오현빈이 다가와 유진을 불렀다.“유진아, 수박 가져왔어. 먹고 가!”유진은 애옹이를 내려놓고, 마당을 정리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달콤한 수박을 먹으며 쉬던 중, 손님이 들어왔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어서 오세요.”그러나 바로, 유진의 표정이 굳어졌고, 눈앞에
소희는 우청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고, 반짝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이제 시작일 뿐이야. 앞으로 더 좋아질 거야!”금요일, 샤부샤부 가게아침에는 영업하지 않기 때문에, 오현빈과 직원들은 늦게 일어났다. 아침을 먹고 가게 청소하며 테이블을 정리하고, 식재료를 구매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그렇게 바쁘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오전 10시. 막 가게 문을 연 순간, 임유진이 커다란 상자를 안고 들어왔다.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상자 안에는 애옹이를 위한 사료, 간식, 모래 등이 잔뜩 들어 있을 게 분명했다.현빈이 의아한 듯 물었다.“오늘 평일인데, 너 출근 안 했어?”유진은 흰색 티셔츠를 입고 반묶음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회사 단체 워크숍이 있는데 안 갔어요.”이문이 다가와 상자 안을 들여다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워크숍 좋잖아. 맛있는 것도 먹고, 놀기도 하고.”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뭐가 좋아요? 차라리 집에서 푹 쉬는 게 낫죠.”현빈은 이문과 눈을 맞추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주된 이유는 워크숍에 사장님이 없어서겠지?”“사장님이랑 무슨 상관이죠?”유진은 턱을 치켜들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아주 자연스럽게 위층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사장님, 아직 안 일어났어요?”현빈과 이문을 비롯한 직원들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까지 서인이랑 상관없다고 하더니, 바로 그의 일정을 묻다니!유진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상자 안에서 작은 공을 꺼내 현빈에게 던졌다.“뭘 웃어요?”“아직도 웃어요?”오현빈은 재빠르게 몸을 피하며 두 손을 들었다.“알겠어, 알겠어! 내가 잘못했어!”한바탕 장난을 친 후, 유진은 후원으로 가서 애옹이를 보러 갔다.한편, 서인은 아침 운동으로 샌드백을 몇 번 친 뒤, 아래층 주방에서 야옹이의 밥그릇을 챙겼다. 그리고 후원으로 가려고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작은 나무집
도설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붉어졌다.“지금 나를 일부러 모욕하는 거예요?”심명의 얼굴에서는 이미 웃음기가 사라졌다고, 차갑고 무심한 눈빛으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내가 준 거울은 가져가고, 이제 꺼져요. 그 따위로 소희에게 덤비다니, 집에 거울이 부족했나 보군.”설유는 모욕감에 치를 떨었다.“그래서 이 모든 게 일부러였다는 거네요!”설유는 심명의 말을 곱씹으며 빠르게 머리를 굴리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설마, 당신도 임구택을 좋아하는 거예요?”‘그래서 자신이 임구택에게 접근하는 걸 막으려고 일부러 약혼식장에서 데려왔던 거라면?’콜록! 상상을 초월하는 말에 심명은 담배 연기에 기침이 나왔다. 그러고는 차가운 시선으로 설유를 노려보았다.“다시 한번 말하는데, 당장 꺼져요.”‘도대체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거야?’설유는 계속 차에서 내리길 거부하며 버텼다. 그러자 심명은 그대로 차 문을 열어 설유를 밀어냈다.마침 밖에 있던 남자가 설유가 다치지 않게 잡아주려 했지만, 설유는 격분하며 그를 마구 밀쳤다.“건방지게 어디 감히 날 만져?”남자는 설유를 차갑게 쳐다보더니, 곧바로 손을 놓아버렸다.쿵! 그리고 설유는 땅바닥에 세게 내팽개쳐졌다. 그녀는 아파서 이를 악물었지만, 제대로 화를 낼 틈도 없이, 앞에서 스포츠카가 급가속하며 떠났다. 그리고 자동차 배기가스가 설유의 얼굴을 향해 뿜어졌다....연회장에서 소희와 우청아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소희는 심명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소희야, 너 때문에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까지 들었어!]뒤에는 벽에 숨어 우는 이모티콘이 붙어 있었다. 소희는 메시지를 보는 순간,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면서도 어이가 없었다.[그 여자가 나한테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어?]심명은 단호하게 답장을 보냈다.[안 돼, 네가 조금이라도 기분 나쁘면 안 돼.]소희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그래서, 무슨 짓을 했어?]심명은 여전히 장난스러
소희는 임구택의 넓고 단단한 어깨에 몸을 기댔다. 소희의 섬세한 눈매에는 부드러움이 깃들었고, 손가락은 그의 어깨선을 따라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러나 그 순간, 구택의 손이 소희의 손을 단단히 붙잡아 가슴으로 끌어안았고, 따뜻하고 촉촉한 입맞춤이 소희의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도설유는 화원으로 돌아와 자신이 아는 사람들에게 물었다.“아까 장시원 사장 옆에 있던 남자, 키 크고 잘생긴 사람 누구야?”설유의 질문에 몇 명이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짐작했다.“장시원 사장이랑 친한 사람이라면, 임구택, 조백림, 장명원 정도인데, 누구 말하는 거야?”설유는 직감적으로 대답했다.“임구택? 임씨 그룹의 사장?”“맞아, 임구택!”도설유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그 사람, 결혼했어?”그 말을 듣자 상대방은 흥분한 듯 대답했다.“당연하지! 엄청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어. 그때 인터넷에서도 라이브로 방송됐었는데!”설유는 곧바로 호텔 복도에서 마주쳤던 여자를 떠올리고는 비웃듯이 말했다.“그 사람 와이프, 성격 엄청 안 좋아 보이던데? 그런 남자가 왜 그렇게 무서운 와이프를 골랐을까?”그때, 옆에서 부드럽고도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임구택에 대해 알고 싶으면 나한테 물어보지 그래요? 난 그의 모든 걸 알고 있는데요?”도설유가 뒤를 돌아보자, 순간적으로 눈이 커졌다. 베이지 캐주얼 슈트를 입고, 귓가에는 흑요석 귀걸이가 반짝이는 남자.그는 마치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미남이었고, 요염한 매력까지 풍기자, 설유의 눈빛이 흔들렸다.“당신 임구택 사장을 알아요?”그 남자는 능청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당연하죠!”남자는 입꼬리를 날렵하게 올리며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고, 도발적인 눈길은 상대를 본능적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설유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속삭였다.“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나 나눌까요? 궁금한 거, 다 알려줄게요. 심지어 네가 임구택을 쫓아다니게 도와줄 수도 있어요.”설유는 살짝 당황한 듯 입술을 깨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