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를 무시해?’그녀를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하승민처럼 신분, 지위, 권력을 모두 가진 남자가 여자를 달래려고 자세를 낮추면 깊은 사랑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고 헤어 나오기 어려워진다.하지만 지서현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다. 하승민의 깊은 사랑은 결코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모든 사랑을 지유나에게 주었다.지서현은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다시 일어서려고 했다.“놓으라고요!”하승민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화났어?”지서현은 어이가 없었다.“내가 화낼 자격이라도 있어
지서현은 흰 셔츠를 정돈하고 하승민을 돌아보았다. 휴대폰은 탁자 위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지만 그는 보지도 않고 받지도 않았다.지유나의 전화를 받지 않다니, 아마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하승민은 큰 키에 긴 다리로 우뚝 서서 검은색 정장 재킷을 벗었다.안에는 흰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등 부분에 넓게 피가 배어 나와 있었다. 지서현은 할머니가 그의 등에 내리쳤던 채찍을 떠올렸다.그 채찍질에 살갗이 터졌을 텐데 그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상처를 치료해야 했다. 그대로 두면 염증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지서현은 입을 열었다.
지서현이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주었지만 불행히도 상처가 감염되어 잠자리에 들었을 때 하승민은 고열이 올랐다.몸이 몹시 추웠다. 지서현이 에어컨을 끄고 이불을 여러 겹 덮어주었지만 그래도 그는 춥다고 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입술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지서현은 이것이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지유나를 병원에 데려갔을 때 왜 자기 상처는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거야?’지서현이 주사를 놔주긴 했지만 이 고비는 어쨌든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것이었다.고열만 내리면 하승민은 괜찮을 것이었다.지서현은 이불을 걷고
“여긴 위험해, 어서 가.”그는 그녀에게 떠나라고 했다.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붙잡히면 그녀도 목숨을 잃을 것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소녀는 가지 않았다.오히려 필사적으로 하승민을 질질 끌며 숨을 수 있는 산속 동굴로 데려갔다.“큰오빠, 여긴 안전해요. 저 사람들이 찾지 못할 거예요.”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하승민은 소녀를 바라봤다.그때 소녀는 아직 어린 나이였고 이미 겨울이었는데도 색이 바랜 얇은 원피스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마치 오랫동안 이 숲에서 홀로 지낸 듯했다. 그녀의 유일한 벗은 품에 꼭 껴안고
‘얼마나 아팠을까?’하승민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지서현의 허리를 감싸 쥐었다.부드러운 허리를 손안에 느끼며 그는 인정했다.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갓 깨어난 탓에 목소리는 아직도 나른하게 잠겨 있었다.“지서현, 내가 너무 아프게 한 거 아니야? 미안해.”지서현에게 미안하다고 하승민은 낮게 말했다.하지만 꿈속에 잠긴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규칙적인 숨결만이 고요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녀의 가녀린 머리카락조차 향기롭고 부드러웠다.곧
지서현은 하승민과 지유나를 발견했다.지유나는 이미 퇴원한 상태였고 지금은 화사한 모습으로 하승민 곁에 서 있었다. 그의 팔을 꼭 끼고 있는 두 사람은 마치 금실 좋은 한 쌍처럼 다정했다.소아린이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서현아, 하 대표님이 지유나를 정말 사랑하긴 하나 봐. 지유나가 곽 어르신까지 건드렸는데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같이 있다니.”지서현은 이 클럽에서 하승민과 지유나를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렇게 빠르게 화해한 모습을 보고도 그녀는 놀라운 기색조차 없었다.살짝 붉은 입술
첫 번째 게임에서 하승민이 걸리자 분위기가 한층 뜨거워졌다.지예슬이 붉은 입술 끝을 살짝 올리며 하승민을 바라보았다.“하 대표님, 진실게임 해보죠. 질문할게요. 하 대표님과 사모님은 부부로서 첫날밤을 보내셨나요?”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서 해외에서 돌아온 유정우를 제외하면 모두 알고 있었다. 사모님이 바로 지서현이라는 사실을.지예슬의 의도는 뻔했다. 하승민이 지서현을 한 번이라도 품에 안은 적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테이블에 앉아 있던 재벌가 출신 자제들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며 분위기를 띄웠다.
그러나 하승민은 지유나의 사람이었다.‘이걸 어쩌지?’자리에 있던 재벌 2세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지예슬은 유명한 재벌가 여식이었고 아직까지도 싱글이었다. 하여 그녀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지서현이 웃으며 말했다.“언니, 이제 사람을 선택해야지.”그러면서 지서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지유나를 바라봤다.“지유나, 우리 예슬 언니 눈 높은데 누굴 고를 것 같아?”지유나는 지서현을 째려보았다.“언니가 이렇게 뛰어난데 당연히 많은 남자들이 따라다니겠지. 눈이 높을 만도 하잖아. 그걸 지서현 네가 말할 필요가 있어
잠자는 공주는 거짓이었고 학력이 없다는 것도 거짓이었다.알고 보니 지서현이 바로 그 천재 소녀였던 것이다.하승민의 신비로운 천재 후배가 바로 지서현이었다.“천재 소녀가 이렇게 예쁠 줄이야. 마치 선녀 같아. 재능과 미모를 둘 다 갖췄네.”“큰일 났다.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어.”지유나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도저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늘 무시했던 지서현이 자신을 미치도록 질투하게 만들었던 천재 소녀였다니.이윤희 역시 믿을 수 없었다. 지서현이 어떻게 저 연단 위에 서 있는 걸까? 분명 그녀를
최고 학술 포럼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현장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사회자는 웃으며 말했다.“오늘 이 포럼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하 대표님과 천재 후배님의 첫 만남입니다. 분명 여러분 모두 천재 소녀의 등장을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하승민과 그의 옆자리로 향했다. 누군가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우린 더 이상 못 기다려요! 천재 소녀를 빨리 등장시켜 주세요!”사회자는 웃으며 답했다.“좋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천재 소녀를 모시고 최고 학술 포럼 개막 연설을 시작하겠습니다.”드디어
“그뿐만 아니라, 지서현을 맞이한 사람들은 이번 최고 학술 포럼의 고위 관리자들 같았어.”박경애와 이윤희는 매우 놀랐다. 그때 하은지가 말했다.“지서현은 16살에 학교를 그만뒀잖아요. 원래 꾀가 많은 애니까 우리가 겁먹을 필요 없어요.”“맞아요. 서현이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요. 어서 들어가서 서현의 정체를 밝혀 버리죠.”지유나도 지서현이 허세를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할머니, 엄마, 우리도 들어가서 서현이가 뭘 꾸미는지 봐요!”박경애가 차갑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다행히 내가 미리 지서현과 인연을 끊었지.
고우섭은 당황했다.“지서현, 내 여신이 붉은 장미를 싫어하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박경애가 말했다.“서현의 헛소리에 신경 쓰지 마셔. 내 생각엔 천재 소녀가 우섭 도련님의 호감을 얻은 게 질투 나서 방해하려는 것 같아.”고우섭이 협박했다.“지서현, 내 일을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내 여신에게 정식으로 구애할 거라고!”지서현은 우스웠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끌어올린 채 고우섭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행운을 빌게.”고우섭은 코웃음을 쳤다.사람들의 관심이 천재 소녀에게 너무 집중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지유나는
지유나의 아버지는 지해준이었지만 지유나는 지해준이 제경에서 데려온 아이였다.지유나는 지해준의 친딸이 아니었다.지유나의 친아버지는... 감히 입에 올릴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신분이었다.그녀는 엄청난 배경을 가진 아이였다.물론 이 사실은 박경애와 지해준이 가슴속 깊이 묻어둔 비밀이었고 그들은 이런 자리에서 절대 발설하지 않을 것이었다.박경애는 지서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서현아, 다시는 나를 할머니라고 부르지 마. 너 같은 손녀는 없어!”엄수아는 박경애가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을 보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드디어 오늘, 만인이 기다리던 최고 학술 포럼이 열리는 날이 되었다. 지서현은 일찍 일어나 엄수아에게 말했다.“수아야, 나가자. 재밌는데 데려갈게.”“서현아, 어디 가는데? 오늘 애들 다 최고 학술 포럼 간대. 하 대표님이랑 그 천재 소녀 같이 나온다잖아.”엄수아가 흥미진진하게 말했다.지서현은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말했다.“최고 학술 포럼에 놀러 가는 거야.”엄수아는 깜짝 놀랐다.뭐라고?30분 후, 지서현과 엄수아는 행사장에 도착했다. 오늘은 각계각층의 학술 전문가들이 모여들어 현장은 매우 떠들썩했다.지서현은 멀리
말하면서 지서현은 하승민을 바라보았다.“내 남자 친구는 하 대표님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아요.”그녀가 이 말을 할 때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정말 대단한 남자 친구라도 있는 것 같았다. 순간 하승민의 미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하하하.지씨 가문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박경애가 말했다.“서현아, 허풍 떨지 마. 너한테 그런 남자 친구가 있을 리가 있겠냐.”이윤희도 맞장구쳤다.“서현아, 웃기지 마.”지서현은 가느다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녀는 휴대폰에 저장된 셋째 오빠 소문익이 보낸 문자를 떠올렸던 것이다.[서현아
박경애와 둘째, 셋째네 식구들은 일찌감치 최고 학술 포럼 초대장을 손에 넣었다. 모두 천재 소녀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그들은 천재 소녀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도대체 왜 그렇게 뛰어난 걸까?지유나는 하승민의 팔에 팔짱을 낀 채 천재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질투심에 속이 타들어 갔다.지금 해성의 모든 관심은 천재 소녀에게 쏠려 있었다. 모두가 하승민과 천재 소녀의 첫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고 지유나 역시 모레 직접 그 모습을 확인하려고 했다.지서현은 한쪽에 서서 맑고 투명한 눈으로 주변 사람들을 묘
지서현은 드디어 박경애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오늘 밤 그녀에게 맞선 자리를 마련해 시골로 시집보내려는 것이었다.이우진은 지서현을 쳐다보았다. 지서현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몰랐는지 그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지서현 씨, 안녕하세요.”바로 그때, 지유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할머니, 무슨 얘기 하세요?”지서현이 눈을 들어보니 지유나였다. 지유나는 혼자 온 게 아니라 하승민의 팔짱을 끼고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하승민도 왔다.박경애가 곧바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 대표, 유나야. 마침 잘 왔네. 서현이가 지금 맞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