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도아영은 어이가 없었다. 방금 유하영의 손목을 살짝 세게 잡은 게 다니까.다 큰 어른이 손목 아프다고 비명까지 지를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다른 학생들도 하나둘씩 눈치채고 도아영에게 삿대질을 해댔다.“아영이 너 진짜 너무하네! 하영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조나린 퇴학당한 것 때문에 좀 화나서 그랬을 뿐이잖아. 어떻게 애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그러게 말이야! 도아영 진짜 너무해! 이번 일은 무조건 교장 선생님께 알려야겠어. 기말고사를 앞두고 하영이 손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네가 책임질 수 있어?”주위 사람들이 한마디씩 덧붙였고 이에 도아영은 곧장 강이나의 의도를 알아챘다.그녀는 기말고사 전에 도아영을 한성대에서 내쫓을 생각이었다.다만 이렇게 빨리 손을 쓰는 건 너무 조급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아영이 너 절대 가만 안 둬! 지금 당장 교장실 가서 똑바로 해명해! 아무 말 못 하면 바로 경찰에 신고할 거야.”유하영은 끝까지 가볼 기세로 씩씩거렸다.“좋아. 그럼 다 함께 교장실 가보면 되겠네. 과연 누가 거짓말을 했을지 말이야!”방금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유하영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다. 이 모든 건 유하영의 거짓말뿐이었다.“가자, 하영아.”강이나가 유하영을 부축하여 도서관을 나섰다.다른 학생회 멤버들은 행여나 도아영이 도망칠까 봐 그녀를 둘러쌌다.곧이어 뭇사람들이 교장실 앞에 도착했다.한정민은 가득 몰린 학생들을 보더니 입이 쩍 벌어졌다.“뭐야? 무슨 상황인데?”“선생님!”유하영이 다짜고짜 울면서 앞으로 다가가더니 손목을 쓱 내밀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손목에 시퍼런 멍 자국이 나 있었다.“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아영이가 제 손 이렇게 만들었어요!”한정민은 그녀의 말을 듣더니 도아영에게 시선을 옮겼다.“도아영, 정말 네가 이랬어?”그는 질책하는 투로 쏘아붙였다.전에 도아영이 이수호 약혼녀일 때 한정민은 항상 공손한 태도로 임했지만 어느덧 180도 바뀌어버렸다.도아영
강이나는 앞서 몇 번 공평 정의를 지키려고 방관했지만 이번엔 단호하게 유하영의 편을 들어줬다.그녀는 대놓고 한정민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이에 한정민은 난감한 표정으로 도아영을 쳐다봤다.한때 이수호의 약혼녀이자 현재 구연준이 잘 챙겨주는 여학생인데 만에 하나 혹독한 처벌을 내렸다가 위에서 책임이라도 따져 묻는다면 속수 무책해질 게 뻔했다.그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강이나를 한 번 더 쳐다봤다. 이 여자는 이수호가 가장 좋아하는 여자이기에 감히 건드릴 수가 없었다. 마침내 한정민이 책상을 두드리며 도아영에게 쏘아붙였다.“도아영! 다들 네가 때리는 걸 봤다는데 더 할 말 없어?”그는 미친 듯이 도아영에게 눈치를 줬다. 결백을 증명할 증거를 내놓으라고, 뭇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해도 좋으니 뭐라도 변명하라고 눈치를 주고 있었다.도아영도 바보가 아닌지라 유하영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그녀의 옷소매를 걷었다.유하영이 피하려 했지만 그녀는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았다.결국 유하영은 강제적으로 손목을 드러냈다.“아파! 이거 놔!”그녀는 몸부림치다가 도아영을 밀쳤다.“이게 바로 증거예요.”“뭐?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한정민은 한숨을 내쉬었다.“지금 네게 해명할 기회를 주고 있는데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도서관에 CCTV가 있다면서요? 그럼 내가 유하영 손목을 잡았을 때 엄지손가락이 아래로 향한 것도 다 찍혔겠네요. 근데 지금 얘 손목을 보세요. 엄지손가락에 짓눌린 자국이 위로 향했어요. 이건 당최 말이 안 되잖아요.”순간 유하영의 안색이 일그러졌다.옆에 있던 강이나도 미간을 찌푸렸다.방금 그 혼잡한 분위기에 누가 이렇게 디테일한 것까지 신경 쓸까?“그렇다면 답은 하나, 유하영이 스스로 손목에 멍 자국을 내고 저한테 뒤집어씌운 거죠.”“허튼소리!”유하영이 곧바로 반박했다.“기말고사를 코앞에 두고 누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겠어? 뚫린 입이라고 말 함부로 하지 마!”“헛소리인지 아닌지는 CCTV 보면 알겠지. 선생님, 누가 저를 일부러
강이나도 어느덧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다들 좀 전까지 그녀가 유하영을 지켜주고 싶어 하는 걸 한눈에 알아챘다.도아영은 이 모든 게 일부러 자신을 모함하기 위한 거짓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보나 마나 강이나를 겨냥한 태도였다.“농담이든 진담이든 이미 내뱉은 말이지. 이런 말은 교장 선생님 명성에 누가 된다는 걸 몰라? 오늘 일은 오해이길 바라. 만약 누가 일부러 왕따 놀이를 노린 거라면 조나린과 똑같은 결말을 맞이할 거야. 졸업시험을 앞두고 이런 일을 맞닥뜨리는 건 교장 선생님이나 한성대 모두 득이 될 건 없어. 제 말 맞죠, 선생님?”도아영은 아주 명확하게 입장을 밝혔다. 오늘 그녀들이 물러서지 않으면 유하영은 곧 감방에 갇히게 된다.강이나는 마지못해 한정민에게 말했다.“선생님, 이제 곧 졸업시험인데 이럴 때 갈등을 빚는 것보다 원만하게 합의를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오늘 일은 없던 거로 하죠. 제가 하영이 시켜서 도아영한테 사과하라고 할게요.”그녀는 유하영이 일부러 도아영을 모함했다고 간접적으로 인정한 셈이 됐다.한편 유하영은 입술을 꼭 깨물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손목에 멍 자국을 낸 사람도 강이나, 이 일을 이용하여 도아영을 상대하려던 것도 강이나인데 목적을 이루지 못하니 되레 그녀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우고 있었다.유하영은 이렇게 억울하고 답답한 느낌이 처음이었다.다행히 한정민은 일을 더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아 강이나의 말에 찬성했다.“역시 이나는 학생회 회장답게 주도면밀하게 생각하네. 난 또 볼일 있으니까 이번 일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한정민은 핑계를 둘러대고 교장실을 나섰다.뭇사람들이 자리를 떠날 때 강이나와 도아영은 서로 눈이 마주쳤다.전생에서 강이나는 그녀를 라이벌로 삼은 적이 없다.아마도 자신을 위협할만한 그릇이 안 된다고 여겼나 보다.하지만 이번 생에 강이나는 그녀를 마치 원수처럼 대하고 있다.정말 운명이 바뀌려는 걸까?“하영아...”교장실에서 나온 후 유하영은 자신을 위로해주려는 강이나를
전에 학교에서 한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땐 도아영이 너무 정신없어서 박태오를 힐긋 보고 떠나갔다.그때까지만 해도 이 남자가 우연히 귀국했다가 강이나를 만나러 학교에 온 줄 알았다.곧장 해외에 돌아가 연예 활동을 이어갈 줄 알았더니 국내에 남아서 발전할 계획인 듯싶었다.순정파 서브 남주 박태오는 강이나를 향한 사랑이 그야말로 찐이었다.그가 도아영을 본 순간 강이나를 위해 복수할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을 하도 많이 겪은 도아영이었으니 박태오가 미처 발견하기 전에 도망쳐야만 했다.아쉽게도 두 다리가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겨우 강의동에서 나왔는데 또다시 안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도아영은 마지못해 이 남자가 자신을 쳐다보지 않기만을 바랐다.‘제발, 제발 그냥 가줘.’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강의동에서 나왔다. 다행히 박태오도 강이나를 찾으러 온 모양인지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앗싸, 얼른 도망쳐야지.’도아영이 이제 막 한숨을 돌리려고 할 때 뒤에서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기 학생.”박태오의 목소리는 자성처럼 감미로웠지만 그녀는 그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고개를 돌리자 박태오가 검은색 마스크를 끼고 그녀를 바라봤다.유일하게 드러난 두 눈동자가 매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눈빛에 얼마나 많은 소녀들이 흠뻑 빠졌던가.도아영은 일부러 그를 못 본 척하며 계속 앞으로 걸어갔지만 박태오가 덥석 팔을 잡았다.마침 상처에 손이 닿았고 그녀는 너무 아픈 나머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박태오는 그녀가 이렇게 큰 반응을 일으킬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학생?”“네...”‘괜찮긴 개뿔! 잡긴 왜 잡아.’도아영은 이를 악물었다.전생의 기억대로라면 둘 사이에 아무런 접점이 없어야 한다.강이나를 위해 복수하려면 이수호를 찾아갈 것이지 왜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는 걸까?도아영이 속으로 구시렁댈 때 박태오가 넌지시 말했다.“등에 뭐 있어요.”그는 말하면서 도아영의 등에 붙은 A4용지를 뜯었는데
게다가 도아영은 강이나가 제일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은 장본인이다. 박태오가 과연 그런 도아영을 내버려 둘 리가 있을까?“정말 괜찮아요. 친구들과 장난 좀 친 거예요.”도아영은 한시라도 빨리 그를 벗어나고 싶었다.계속 가던 길을 가려고 할 때 박태오가 또다시 앞길을 막았다.“너 진짜 나 모르겠어? 기억 안 나?”박태오의 진지한 표정에도 도아영은 곧장 머리를 흔들었다.“실례지만 초면인 것 같은데요.”그녀의 말을 들은 박태오는 마스크를 벗고 스크린에서만 보던 황금비율 얼굴을 드러냈다.해외에서 인기리에 있는 흥행 배우 박태오는 조각 같은 외모를 지녔다.다만 전생과 비슷한 얼굴이라 그녀는 딱히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나 박태오잖아. 진짜 못 알아보겠어?”그는 살짝 야유 섞인 말투로 물었다.“...”도아영은 한참 후에야 말을 이었다.“본인이 영화배우 박태오라고요? 장난치지 마세요.”그녀는 아예 무시하고 떠나가려 했지만 박태오가 바짝 따라왔다.“우리 어릴 때 만났잖아. 내가 괴롭힘당할 때 네가 나서서 편들어줬는데 정말 기억 안 나?”도아영은 어이가 없었다.‘친한 척하려고 못하는 말이 없네 아주!’어릴 때 박태오와 함께 놀았던 기억이 왜 없을까?역시 배우는 배우였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내뱉으니까.그와 강이나의 관계를 정확하게 기억한 게 아니었다면 어릴 때 함께 놀았던 이 친구가 유명 배우 박태오였다는 걸 확신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저기 미안한데 그런 농담 하지 말아줄래요?”도아영이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녀는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걷다 보니 아무리 속도를 내도 키 185의 박태오를 초월할 수 없었다.마침내 박태오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요즘은 이런 헌팅이 유행인가 봐요? 그쪽이 잘생긴 건 알겠는데 매너는 좀 지키시죠. 저 좀 그만 따라오라고요.”도아영은 이 말을 내뱉으면서 저도 몰래 얼굴이 빨개졌다. 박태오가 어지간히 잘생겼어야지 웬만한 여자들보다 더 섬세한 피부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외모를 갖추
박태오의 인상 속에서 강이나는 그런 짓을 꾸밀 여자애가 아니다.한편 강이나는 살짝 난감해하더니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럴 리가! 걔 이미 수호 씨랑 파혼했잖아. 설사 파혼을 안 해도 내가 뭣 하러 그런 식으로 괴롭히겠어.”그제야 박태오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나 귀국시킨 거 이수호 마음 확인하려고 그랬던 거 아니야? 이제 수호랑 아영이가 파혼까지 했는데 뭐가 더 걱정이야?”“다 네 덕분이지. 그래도 여전히...”강이나는 여전히 찝찝했지만 말을 꺼낼 수 없었다.여자의 직감이 말해주길 이수호는 그녀를 향한 태도가 전보다 확 달라졌다. 마음이 변했다고 할까?“이나야, 욕심 적당히 부려. 이수호가 너랑 결혼할 일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박태오의 말을 들은 강이나는 안색이 확 돌변했다.도아영이 아니면 이수호는 또 다른 여자와 결혼할 것이다. 상대가 누가 됐든 강이나에게는 그의 신부가 될 기회가 절대 주어지지 않는다. 이점을 강이나도 너무 잘 알고 있다.다만 그럼에도 내키지 않았다.이수호의 아내가 될 수 없어도 그의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 가장 특별한 여자가 되고 싶었다.“됐다, 걔 얘기는 그만하고 우리 밥 먹으러 가자.”강이나는 자연스럽게 박태오의 팔짱을 끼고 한성대 교문을 나섰다.그날 오후 한정민은 구연준과 위너 그룹 CEO 제니가 나란히 손을 잡은 기사, 그리고 또 강이나와 이수호가 파티에 참석한 사진까지 보게 됐다. 순간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이런 기사를 진작 확인했더라면 좀 전에 강이나의 체면을 봐주는 건데...이제 모든 게 끝장났다. 구연준 대표의 여신은 이미 귀국했으니 그도 더는 도아영을 신경 쓸 리가 없다.한편 강이나는 이수호가 제일 아끼는 여자인데 하필 오늘 그녀의 체면을 짓밟고 말았다.한정민은 불안한 마음에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이수호에게 연락했다.안지원이 전화를 받자 그는 아양을 떨면서 말했다.“지원 씨, 다름이 아니라 오늘 아영이랑 이나가 잠깐 마찰이 있었는데 이나는 피해자 학생을 위해
“도아영 학생은 이미 몇 개월 동안 휴학했고 지금 손까지 다쳤으니 수능을 볼 수가 없어요. 우리 학교 졸업률을 위해서라도 퇴학시키는 게 맞아요.”한정민은 명령 조로 쏘아붙이며 교감에게 그 어떤 반박의 여지도 안 주고 통화를 끊었다.교감 선생님은 끊긴 전화기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혼잣말로 구시렁댔다.“나만 나쁜 사람 만드네. 그렇게 원하면 본인이 직접 통보할 것이지!”비록 투덜대긴 해도 교장의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그는 도아영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한편 한정민은 교감 선생님에게 통보한 뒤 곧바로 강이나에게 연락해 아주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이나야, 너는 우리 학교 학생회 회장이잖아. 오늘 아영이가 소란을 피운 일로 도서관 CCTV 영상을 다 확보했는데 아영이가 먼저 손을 댄 거로 나왔어. 교감 선생님한테 말해서 아영이 퇴학시키라고 했으니 너도 한시름 놔.”강이나는 교장의 태도가 변할 걸 진작 예상했던지 딱히 놀라지 않았다.지금 형세로 보아 당연히 강이나 쪽이 유리하니 그녀를 도와줘야 한다.“네, 선생님. 공평하게 처리해줘서 고마워요.”강이나가 전화를 끊자마자 옆에 있던 박태오가 물었다.“뭔데 그렇게 기뻐하는 거야?”“아무튼 엄청 기쁜 소식이지.”강이나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도아영이 한 것 중에 가장 멍청한 짓이 바로 이수호와 파혼한 일이다.배경과 인맥만 따지는 강주에서 이수호의 뒷받침 없이 그녀가 과연 뭘 할 수 있을까?한정민의 담보를 얻은 강이나는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다음날 이른 아침.도아영은 교감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비록 조심스럽게 돌려서 말하긴 했지만 그녀더러 먼저 퇴학 신청을 하라는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이거 선생님 결정이에요, 교장 선생님 결정이에요?”교감 선생님은 가슴이 철렁거렸지만 곧바로 대답했다.“누가 됐든 중요치 않아. 이미 벌어진 일이고 상대는 네가 먼저 손을 댔다고 주장하고 있어. CCTV에도 네가 하영의 손목을 잡아당기는 게 찍혔으니 이 사건이 소문이라도 나면 네 명예에 누
교감 선생님의 끝도 없는 설득에 도아영은 인내심이 고갈되어 차갑게 말했다.“제 생각은 변함없어요. 제가 정말 먼저 소란을 피웠다고 생각하시면 교장 선생님더러 경찰에 신고하라고 하세요. 다만 한성대 졸업률을 위해서라면... 미안한데 그건 학교가 알아서 할 문제이지 왜 저더러 책임지라는 거죠?”“너...”교감 선생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아영은 전화를 꺼버렸다.더는 말할 필요가 없었으니까.한정민은 기껏해야 이수호가 두렵거나 혹은 이수호가 강이나를 위해 그녀를 처리하라고 직접 명령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이미 수없이 겪어온 일이기에 도아영은 아무렇지도 않았다.게다가 요즘 구연준이 위너 그룹 때문에 며칠 동안 학교를 비웠더니 한정민은 더 이상 도아영의 뒤를 봐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이수호에게 파혼을 당했으니 강이나도 거침없이 그녀를 괴롭히는 거겠지.이때 주민서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주민서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영아, 학교 단톡방 봤어? 얼른 봐봐!”도아영이 휴대폰을 열었더니 단톡방에 읽지 않은 메시지가 몇백 개 쌓였다. 게다가 단톡방이 여러 개나 됐고 그녀에게 친구 추가를 보낸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는데 죄다 험담을 퍼붓고 있었다.누구는 그녀를 쌍X이라 하고 누구는 뻔뻔스럽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그녀가 가여운 척하면서 남자 마음을 홀린다고 악담을 해댔다....친구 추가에 달린 내용은 대부분 이런 것들이고 단톡방에는 학생회 멤버가 영상을 하나 올렸는데 마침 도서관 CCTV 영상이었다.도아영이 유하영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지만 블러 처리를 해서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다.[나 어제 도서관에서 직접 봤잖아. 도아영이 먼저 때렸어!][파혼당한 주제에 뭐가 저렇게 당당해? 일부러 강이나 꼽주는 거잖아.][도아영 뭔데? 휴학 신청하고 남자 꼬시러 갔다가 잘 안 풀리니까 다시 학교 돌아와서 으스대는 거야? 역겨워 정말!]...단톡방에 메시지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누군가는 도아영을 멘션 하기도 했다.한편 인스타그램
...주위에 온통 쉬쉬거리는 소리뿐이었다.도아영이 오늘 왜 이 파티에 참석했는지 다들 너무 궁금했다.로열 호텔 안, 안지원이 2층 휴식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손님들 다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이수호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눈만 감으면 어제 도아영이 했던 말만 떠올랐으니까.할머니가 이 파티를 열지만 않았어도 두 번 다시 도아영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아래층.도아영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화려한 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이제 도원 그룹의 유일한 상속자가 됐기 때문이다. 도아영과 결혼할 사람은 자연스럽게 도원 그룹도 차지하게 된다.그녀에게 불의의 사고라도 생기면 도씨 일가의 전 재산이 남편에게 돌아갈 것이다.장내에 있는 남성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아영아, 얼른 할미 곁으로 와.”남현숙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혐오에 찬 표정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도아영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현숙에게 다가갔다.남현숙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우리 아영이 점점 이뻐지네. 수호랑 오랜만이지? 금방 내려올 테니 함께 얘기도 나누고 오붓한 시간 보내. 젊은 사람들끼리 춤도 추고 와인도 마시고 얼마나 좋아?”남현숙은 지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연기하고 있었다.도아영은 이씨 일가 사람이란 걸 이 자리에서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아무도 감히 도아영을 넘보지 말라는 의도였다.이에 도아영이 가볍게 웃었다.“아니요, 대표님을 어제도 만난 걸요. 왠지 나랑 함께하기 싫은 눈치였어요.”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던 이수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어제 일을 되새기자 그는 또다시 사색이 되었다.“허튼소리! 수호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전에 파혼하려던 건 홧김에 그랬어. 젊은 애들이 그렇지 뭐. 누가 뭐래도 수호는 널 아주 많이 좋아해. 오늘도 너한테 사과하려고 하던데?”남현숙은 웃으면서 이수호를 불러왔다.뭇사람들은 이 광경을 빤히 지켜봤
이수호는 할머니의 말뜻을 너무 잘 이해한다.전에는 단지 도아영의 신분이 적합해서 그녀와 약혼하려던 거라면 지금은 도씨 일가 전체를 거머쥘 기회가 생겼다.그는 또다시 오늘 낮에 도아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할머니는 이번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절대 결혼할 리 없어요.”말을 마친 이수호가 위층으로 올라갔다.남현숙은 손주 녀석의 성격을 잘 알기에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래, 네가 굽히지 못하겠다면 이 할미가 직접 나서야지 어쩌겠어.’다음날, 유정연이 감방에 갇히고 도지호가 집에서 쫓겨난 소식이 이 바닥에 쫙 퍼졌다.도아영은 도씨 일가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이번에 매우 순조롭게 도원 그룹을 이어받았다.학교에 관한 일도 일단락되었으니 그녀는 한창 도원 그룹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아영 씨, 아침에 이씨 일가에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아영 씨더러 로열 호텔 파티에 참석하라고 하시네요.”“이씨 일가에서요?”‘이수호가 또 찾아온 거야?’도아영은 잠시 의심했지만 곧이어 남현숙임을 알아챘다.그 어르신은 능구렁이와도 같은 분이니까.도아영이 도원 그룹을 상속받자마자 파티에 초대하다니, 이건 절대 호의일 리가 없다.“아영 씨는 이제 도원 그룹 오너가 됐으니 이번 파티에 당연히 참석하셔야 해요. 게다가 앞서 이씨 일가와 도씨 일가가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떠돌다 보니 많은 협력사에서 감히 우리와 협력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경 그룹 눈 밖에 날까 봐 두려운 거죠. 이번에 이씨 일가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테고 도원 그룹 상황도 훨씬 나아질 겁니다.”주연우가 하는 말을 도아영도 물론 잘 알고 있다.다만 이경 그룹의 파티에 참석하기에 앞서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남현숙에게 득이 돼선 안 되고, 이씨 일가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게 아니라고 외부에 알려야 하니까.하지만...오늘 밤에 이수호를 만날 걸 생각하면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드레스 한 벌
“가시죠, 규리 씨.”“아니요! 대표님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예전에 쌓아온 정을 봐서 우리 이모 한 번만 구해주세요!”“더는 우리 집에 나타나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이수호가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자 임규리는 등골이 오싹했다.며칠 전에 강이나가 찾아와서 그와 임규리에 관한 스캔들을 일러바쳤는데 고작 여자들의 수작인지라 이수호는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어차피 임규리와 아무 사이도 아니니 똑똑한 사람이라면 둘이 불가능하단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수호와 임규리는 신분 격차가 너무 크니까.그 소문들은 임규리가 지어낸 거로밖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이수호는 이렇게 꼼수가 많은 여자가 딱 질색이다.한편 임규리는 아직 본인이 한 일을 이수호에게 들킨 줄 모르고 계속 유정연을 위해 사정했다.“이모도 도씨 일가 사람인데 대표님 정말 안 도와주실 거예요?”“안 비서! 내 말 안 들려?”“알겠습니다, 대표님.”안지원이 또다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임규리 씨, 계속 이러시면 끌어내는 수밖에 없어요.”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유정연이 감방에 간 일이 한성대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녀의 인생도 끝장이다.한성대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모든 거짓말이 들통나고 더 이상 뒷배가 없다는 게 알려지면 남은 3년은 어떻게 버텨내란 말인가?아마 학자금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대표님, 제발요! 저희 이모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할머니, 제가 요 며칠 시중만 잘 들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제발요! 우리 이모 구해주세요.”임규리는 눈물범벅이 되었다.한편 남현숙은 이수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그녀가 한심할 따름이었다.“네 이모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우리도 할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도씨 일가의 일이니 정 도움을 구하고 싶다면 아영이 찾아가 보거라.”도아영을 언급한 순간 이수호의 두 눈이 반짝였다.그녀가 도와줄 리 있을까?왠지 유정연이 감방에 들어간 것도 도아영과 연관이 있을 듯싶었다.다만 아직도 그녀 생각 중인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수호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넌 도씨 일가의 상속자도 아니고 우리 아빠 아들도 아니야. 법적으로 볼 때 오늘부로 너희 두 모자는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정신 좀 차려, 지호야!”도아영은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전생에 아빠가 그녀에게 회사를 물려주셨는데 마음 약한 도아영이 유정연 모자에게 고스란히 건넸다. 결국 아빠의 회사는 3년도 안 돼서 부도났고 유정연은 도지호를 데리고 안용준과 함께 도망치려 했다.그러니 이번 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정연 모자와 도원 그룹을 떼어놓아야 한다.“이 자식 끌어내.”도아영이 차갑게 분부하자 도씨 일가의 경호원들이 곧장 도지호를 이 집에서 끌어냈다.그는 슬리퍼를 신은 채 반항할 여지도 없이 처참하게 집에서 쫓겨났다.“도지호랑 유정연 물건들 싹 다 정리해서 밖에 내다 버려요!”“네, 아영 씨.”주연우는 곧바로 위층에 사람을 보내서 도지호와 유정연의 물건을 싹 다 처리했다.도아영은 다 정리한 물건들을 도지호에게 내던졌다.옷과 신발, 책까지 버려진 걸 보더니 도지호는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다들 여기서 잘 지켜. 도지호는 이제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만약 얘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소란 피우면 그 즉시 경찰에 신고해.”“네, 알겠습니다.”도아영은 그가 소란을 피울 걸 염두에 두고 일부러 경비소를 차렸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지호는 미친 듯이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도아영! 난 네 동생이야!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당장 문 열어! 나야말로 도씨 집안 아들이잖아!”도아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게 집으로 들어갔다.유정연 모자의 흔적이 없는 이 집안은 그제야 온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선사했다.“아영 씨, 다음 계획은?”“유정연 전 재산을 회사 계좌로 입금했어요. 그동안 모자랐던 금액을 채운 셈이죠. 이제 드디어 도원 그룹 협력 프로젝트를 운행하게 됐으니 당분간은 위기를 벗어났다고 보면 돼요.”‘이수호만 잠자코 있다면...’도아영은 이렇게 생각했다.그녀는 오늘 이수호를 가
저녁 무렵, 도지호는 집에서 줄곧 도아영의 연락만 기다렸다.도원 그룹의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차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더니 도지호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너 뭐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집에 무슨 일 생긴 줄 알아? 당장 나랑 경찰서 가서 엄마 모셔와야지!”도지호가 명령 조로 쏘아붙이며 도아영의 손목을 붙잡고 경찰서로 갈 기세였다.이에 도아영이 그를 힘껏 내팽개쳤다.도지호는 못 믿겠다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너 미쳤어? 감히 날 밀쳐?”이 집에서 줄곧 거만을 떨던 도지호였기에 그녀가 매정하게 밀쳐버릴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이제 막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 주연우가 덥석 막아서더니 가볍게 도지호를 제압했다.“너도 미친 거야? 우리 집안 따까리 주제에! 확 잘리고 싶어?”도지호는 힘으로 안 되니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이에 도아영이 차분하게 말했다.“잘 들어. 넌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야. 회사에서도 아무런 직급이 없으니 주 비서는 제쳐두고 이 집안 가정부도 네 멋대로 자를 순 없어.”“이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 도지호야! 왜 이 집안 사람이 아닌 건데? 엄마가 잡혀간 틈에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꿈 깨! 미친X아!”그는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째려봤다.하지만 도아영은 시큰둥하게 쓴웃음만 지었다.“네가 우리 아빠 아들이야? 쥐뿔도 아닌 게 무슨 자리까지 빼앗는다고 그래? 너희 엄마 안용준이랑 바람피운 건 알지? 안용준은 내가 직접 처리했고 너희 엄만 너그럽게 용서했어. 그런데 여태껏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끊임없이 회사 자산에 손댔더라? 대체 언제까지 우리 집안 재산을 노릴 건데? 너희 두 모자 좀 너무하단 생각은 안 들어?”“개소리 치지 마! 우리 엄마가 어떻게 딴 남자랑 바람을 피워?”도지호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네가 아직 어리니 그동안 나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건 그냥 눈감아줄게. 하지만 너희 엄마는 우리 아빠랑 도원 그룹에 미안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어. 그건
사채업자들은 꽤 모아진 자산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드디어 도씨 저택을 떠났다.유정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채에 딱 한 번 손을 댔더니 아들과 함께 전 재산을 털릴 줄이야.한편 도아영은 도원 그룹에서 사채업자의 전화를 받았다.“아영 씨, 분부하신 일은 다 해결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현금화해서 이체해드리겠습니다.”“알겠어요.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별말씀을요. 서 대표님 분부대로 했을 뿐입니다.”도아영은 가볍게 웃었다. 이 모든 건 서현우의 공로이니까.그의 조언대로 유정연 모자의 전 재산을 손쉽게 챙겼고 이 또한 아빠 도석진이 받아야 할 몫이다.전화를 끊은 후 도아영은 주연우에게 분부했다.“이제 다 됐어요. 시작해볼까요?”“네, 알겠습니다.”주연우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도씨 저택에서 유정연 모자가 멍하니 넋 놓고 있을 때 문밖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랐고 도지호도 어안이 벙벙했다.‘오늘 무슨 날이야? 경찰차는 또 뭔데?’유정연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경찰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다.“신고받고 왔습니다. 유정연 씨, 당신은 금융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니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네? 뭐라고요? 금융범죄라니? 그게 대체 뭔 말인데요?”유정연은 몹시 당황했지만 경찰은 그녀의 변명 따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서로 가서 조사받으시죠! 당장 끌고 가!”“당신들 뭐야? 왜 우리 엄마를 잡아가는 건데?”도지호가 쫓아가려 했지만 경찰은 아예 무시한 채 유정연을 차에 태우고 떠나가 버렸다.오늘 발생한 모든 일이 괴이할 따름이었다.도지호는 곧바로 도아영에게 연락했다.평상시에는 그렇게 연락이 잘 되던 도아영인데 오늘은 도통 받지를 않았다.“전화 좀 받아!”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유정연이 경찰에 잡혀가니 그는 가장 먼저 도아영이 떠올랐다.그녀 말곤 엄마를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까.도원 그룹에서 도아영은 쉴 새 없이
“왜 그래요 갑자기? 무슨 일 있어요?”유정연은 사채에 손을 댄 일을 죽어도 도아영에게 고백할 순 없었다.도씨 일가의 가훈이 바로 사채에 손을 대지 않는 거니까.소문이라도 나면 체면이 바닥나고 도아영에게 쫓겨날지도 모른다.한편 도아영은 그녀가 사채를 빌린 걸 진작 알고 있어 입꼬리를 씩 올렸다.“지금 바로 연락해 계약서 보낼 테니까 거기 사인만 하면 효력이 발생할 거예요. 아줌마랑 지호가 우리 아빠 재산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사인만 하면 재무팀에 바로 연락해서 돈 보낼게요.”기세등등한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더 이상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알았어! 사인할게. 바로 할게!”도아영이 곧장 휴대폰으로 계약서를 보내왔다.유정연은 꼼꼼히 읽어볼 새도 없이 바로 사인했고 계좌에 거액이 들어왔지만 모든 걸 사채업자에게 털렸다. 2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다만 겁에 질린 유정연은 이 과정의 수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봐! 아직도 돈 있잖아! 바로 내놓으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질질 끌었어? 돈 될만한 액세서리들 당장 내놔!”유정연은 허겁지겁 위층에 올라가 보물처럼 아끼던 액세서리를 모조리 꺼냈다.이것들은 전부 도석진이 생전에 그녀에게 선물한 값비싼 액세서리들이다.수년간 아까워서 제대로 착용하지도 못했고 그저 도지호의 생일날 딱 한 번 치장하고 나갔었다.“여기 있어요. 이거면 되나요?”그녀는 액세서리를 사채업자에게 건넸다.“이년이 감히 내 앞에서 꼼수를 부려? 분명 더 있을 거야! 다 내놔! 이까짓 거로 누구 입에 풀칠하겠어?”앞장선 남자가 그녀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라서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숨긴 건 맞지만 이 사람들이 대체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 더는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마지못해 여태껏 보관한 모든 액세서리와 명품 가방, 옷들까지 꺼냈다.“이 새끼도 있잖아! 얘 것도 싹 다 꺼내!”도지호는 평상시에 손이 커서 가격도 안 보고 물건을 사
순간 도지호는 표정이 굳어버렸다.“엄마! 이 사람들 대체 뭐라는 거예요? 빚이라니? 180억 원은 다 뭐냐고요?”유정연은 아들에게 빚진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사채업자들이 집까지 찾아오니 하는 수 없이 고백했다.“지호야, 엄마가 결혼비용으로 준 돈 얼른 내놔봐!”“네? 그건 나더러 신혼집 차리라고 준 돈이잖아요?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어요?”도지호가 정색하며 쏘아붙였다.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된 아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가차 없이 뺨을 후려쳤다.“죽을래 돈 갚을래? 얼른 가서 돈 가져와!”유정연이 도석진에게 시집온 이후로 매년 도지호의 명의로 목돈을 마련했는데 어느덧 십여 년이란 시간이 흘러서 60억 가까이 됐을 것이다.빚을 다 갚을 순 없지만 이 돈으로 시간을 좀 더 벌어들일 순 있다.도지호는 기세등등한 사채업자들을 보더니 마지못해 은행카드를 건넸다.카드를 본 우두머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이것 봐. 돈 있잖아. 어디서 불쌍한 척이야! X발 년, 아직 80억 남았어. 못 갚으면 이 녀석 두 다리를 확 잘라버릴 거야!”“이미 60억 드렸고 방금 드린 60억까지 더하면 120억이잖아요! 더는 없으니까 가서 사장님께 전하세요. 3일만 더 시간을 주면 나머지 80억 무조건 갚을게요!”유정연이 간곡하게 부탁했다. 팔아치울 수 있는 건 전부 다 팔아서 온몸을 다 털어도 돈이 나올 구멍이 없었다.아들의 결혼비용까지 다 내놨으니 이제 정말 빈털터리 신세였다.“3일, 3일, 대체 얼마나 더 기한을 늘여줘야 해? 오늘 또 미루면 80억이 아니라 100억으로 불어날 거야!”사채업자가 거만을 떠는 모습에 도지호는 주먹을 휘날리려고 했지만 방망이가 앞섰다.그는 가차 없이 방망이에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자식이, 감히 나한테 덤비려고?”앞장선 사채업자가 도지호에게 비아냥거렸다.아들이 한 방 맞으니 유정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줄게요! 10억 줄게요! 집에 남은 액세서리랑 집문서까지 다 합치면 80억은 될 거예요. 다 드릴게요! 전부 드린
이번엔 아무도 유정연을 지켜줄 수 없다.그 시각, 도씨 일가.도지호가 저녁 무렵 집에 돌아왔을 때 유정연은 초조한 얼굴로 거실을 서성거렸다.“엄마, 왜 그래요?”“지호야? 너 왜 왔어?”“돈 다 떨어졌어요. 문자를 해도 대답이 없으니 돈 가지러 왔죠.”유정연은 울화가 치밀었다.“돈돈돈! 넌 돈밖에 몰라? 우리 이제 다 망했어! 돈 없다고!”“뭐라고요? 장난도 참.”도지호는 집에 돈이 없다는 말이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돈 걱정 없이 살아와서 한 달 용돈 1억 원도 모자랄 지경이니까.도씨 일가가 아무리 망해도 도지호의 용돈이 끊긴 적은 없으니 집에 돈이 없다는 말은 농담과도 같았다.“너 이 자식...”유정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격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사채업자들이 또다시 찾아왔으니까.상황파악이 안 된 도지호가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누구야? 누가 이딴 식으로 문 두드려?”그는 얼른 문을 열고 상대에게 겁줄 기세였지만 유정연이 발 빠르게 가로챘다.“안돼, 지호야!”“왜요? 누군데 그래요?”도지호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도씨 일가 도련님 도지호는 학교에서도 위풍당당한 인물이라 아무도 감히 그를 건드릴 자가 없었다.지금 이토록 무례하게 문을 두드리는데 가만히 지켜볼 도지호가 아니었다.하지만 유정연은 그를 의자에 앉히고 진정시켰다.“여기 가만히 있어! 절대 문 열면 안 돼!”도지호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멍하니 넋을 놓았다.문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거세지고 그중 한 명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X발 년!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당장 문 열어! 집 다 부숴버리기 전에!”“누구야 X발!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네?”도지호가 버럭 화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날 때 상대가 이미 문을 부수고 들어와 버렸다.덩치 큰 체구의 남자들이 방망이를 들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동네 건달이었다.유정연은 그들이 문까지 부수고 쳐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도지호도 상대의 기세에 짓눌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