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윤재 씨요.”안지원은 곧이곧대로 대답했다.“전문팀 의사인데 아영 씨랑 부쩍 친해졌어요.”“뭐?”이수호는 왠지 이 대답이 썩 달갑지가 않았다.왜 부쩍 친해진 걸까? 혹시 다른 의도를 품은 건 아닐까?이때 안지원이 그에게 질문했다.“대표님, 앞으로 아영 씨에 관한 일은 듣고 싶지 않다고 하셨잖아요...”“누가 듣고 싶대? 내가 책임지고 돌봐줘야 할 시기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나한테 뒤집어씌울까 봐 그런 거지!”이수호는 마치 그녀와 전혀 얽히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차갑게 쏘아붙였다.그의 대답에 안지원도 더는 아무 말이 없었다.똑똑.이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안지원이 문을 열자 블랙앤화이트 줄무늬 원피스를 입은 임규리가 떡하니 나타났다.그녀는 문 앞을 서성거리면서 선뜻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이를 본 이수호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누가 회사까지 오라고 했어?”“그게... 할머니가 대표님 저녁에 약속이 있으시다면서... 저더러 회사에 나가보라고 하셨어요.”임규리는 몹시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이수호는 순간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오늘 저녁과 같은 장소에는 항상 강이나가 함께해주었고 수년간 여자 파트너가 바뀐 적이 없었다.할머니가 임규리를 보낸 목적은 강이나의 자리를 대체하라는 뜻이었다.“수호 씨.”이때 강이나가 똑같은 옷차림으로 사무실에 들어왔다.본인과 똑같이 블랙앤화이트 줄무늬 원피스를 입은 임규리를 보자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누구?”오늘 초면인 임규리가 본인과 똑같은 옷차림으로 나왔지만 강이나는 아무런 위기감도 느끼지 못했다.전에 도아영이 자신을 따라 할 때도 이수호를 뺏길 거란 두려움이 없었듯이 하찮은 표정만 짓고 있었다.“이쪽은 임규리 씨예요.”안지원이 짤막하게 그녀의 성함만 말했는데 강이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물어챘다.“임 씨라고요? 부동산 쪽으로 임 사장이라고 지인분 한 명 있는데 그 집 따님 이름이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네요. 혹시 그쪽인가요?”“저는...”임규
이수호와 함께 미팅을 나간다고 해야 할까?강이나를 앞에 두고 차마 그 말이 입밖에 떨어지지 않았다.“저는...”임규리는 끝내 아무 말도 못 했다.안방마님 앞에서 어찌 감히 이수호와 함께 미팅하러 간다는 말이 나올까?“할머니가 규리랑 함께 약속 장소에 나가라고 하셨대.”이때 이수호가 느긋하게 말을 내뱉었다.순간 임규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이 말을 들은 강이나는 눈썹을 살짝 치켰다.“그래요?”“저는...”“임규리 씨, 제가 일부러 타격감 주려는 게 아니라... 수호 씨가 참석하는 장소는 죄다 해외 빅 보스들이라 규리 씨가 나타나면 불필요한 오해를 빚을 것 같아요. 게다가 소통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잖아요.”강이나는 일부러 한 템포 쉬고 말을 이어갔다.“규리 씨 아이엘츠랑 토플 몇 점 맞았어요? 이런 거 다 제쳐두고 외국어 실력은 어때요? 원어민 수준으로 교류할 수 있나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함께 소통하려면 전문 용어도 꽤 중요한데 규리 씨도 할 수 있겠죠?”“그게...”임규리는 그녀의 반박에 말문이 턱 막혔다.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이수호와 함께 약속 장소에 나가서 술만 마시고 오면 될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외국어라니?물론 그녀의 성적은 나름 괜찮지만 외국인과 소통하려면 어느 정도 경험이 있어야 한다. 해외에 나가본 적도 없는 그녀가 무슨 수로 유창하게 소통할까?“꽤 어려우신가 보네요?”강이나가 말했다.“수호 씨가 어떤 인물인지는 규리 씨도 잘 알 거예요. 만약 수호 씨 옆에 이런 파트너가 있다는 게 들통나버린다면 수호 씨는 물론 이경 그룹 이미지까지 영향을 받을 겁니다. 규리 씨는 일단 외국어부터 배우고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말을 마친 강이나는 이수호의 옆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가요, 수호 씨.”“그래.”이수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임규리에게 눈길 한번 안 줬다.“대표님...”“돌아가. 두 번 다시 회사 나오지 마!”이수호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순간 임규리는 제자리에 서서 온
이때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안지원은 강이나를 안에 가둬두고 선심 쓰듯 지하주차장 층수의 버튼까지 눌러줬다.“강이나 씨, 저희 차는 1층에 있으니 혼자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이수호에게 거절당한 그녀는 가슴을 쿡 찌르듯 아팠다.예전의 이수호는 그녀에게 한없이 관대했다.이렇게 내쫓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위기감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여자의 직감은 늘 이렇게 무서운 법이다.‘이수호, 너 좋아하는 여자 생겼지? 틀림없어!’한편 이경 그룹 밖에서 이수호가 차에 올라탔다.“강이나 씨는 이미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습니다.”“가서 회사 조사해봐. 대체 누가 이나한테 소식 흘리는지 말이야.”“대표님 일정은 비서팀 사람들만 알고 있어요. 지금 바로 가서 조사하겠습니다.”“범인 끄집어내거든 당장 쫓아내.”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이경 그룹은 이딴 식으로 내통하는 직원 필요 없어.”“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도아영은 서현우의 서재에서 손목을 조금씩 흔들었다. 그녀의 왼손은 이미 뻣뻣해지고 있었다.종일 노력한 끝에 글씨체가 나름 봐줄 만한 정도에 도달했다.하지만 서현우와 비기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오른손, 왼손 글씨체가 어떻게 똑같을 수 있지? 괴물이야 뭐야...”그녀가 나지막이 구시렁댈 때 마침 서현우가 안으로 들어오며 차분하게 말했다.“나 괴물 맞아.”그녀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라서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서현우는 언제부터 문밖에 서 있었는지 한창 안으로 걸어오고 있었다.이제 곧 밤 9시가 다 된 시각, 서현우는 그녀에게 음료수를 한 잔 건넸다.컵 안의 검붉은 액체를 본 그녀는 대뜸 거부감이 들었다.“이거 뭐예요? 나 저녁에 음료 안 마시는데.”“매실즙이야.”“네?”도아영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매실즙을 왜 나한테?”“너 오랫동안 저녁에 밥을 안 먹었잖아. 계속 그러다가 위 다 버려. 갑자기 저녁을 먹는 건 적응하기 힘들 거야. 이제 식전에 매실즙 한 잔씩 마셔. 그러면 저
“이리 줘요!”도아영이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 논문을 뺏어오려고 했지만 서현우가 어느새 와인잔을 들고 몸을 돌리더니 소파로 돌아갔다.그녀는 거동이 불편하다 보니 논문에 손이 닿으려면 서현우의 앞으로 달려가야만 했다.도아영은 끝내 포기하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한편 서현우는 그녀가 쓴 논문을 열심히 읽어보더니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이를 본 도아영은 서현우가 지금 자신의 논문을 비웃는 거라고 여겼다.“대충 한번 써본 것뿐인데 뭘 그렇게까지 비웃어요?”“이런 말은 대체 누가 가르쳐줬어? 선생님이?”서현우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아니요. 혼자 생각나는 대로 적은 거라니까요!”그의 말을 들은 도아영은 얼굴이 화끈거려서 또다시 서현우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제 그만 논문을 가져오고 싶었으니까.서현우도 그런 그녀에게 바로 논문을 내주었다.“나름 잘 썼어. 이대로 바치면 순조롭게 졸업할 수 있을 거야.”“네? 혹시 한성대 다니셨어요?”“아니.”“그런데 어떻게 내가 졸업하는 걸 알았어요?”도아영은 이 남자가 학교에 다닌 적이 없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대충 쓴 논문을 꼬깃꼬깃 접어서 옷 주머니에 넣었다.“한성대 다니는 학생들은 죄다 기업가에 재벌에 정치인 자녀들까지 있어요. 그 사람들 안목이 나보다 훨씬 높을 테니 이까짓 논문은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죠.”“그렇게 생각하고 있구나.”서현우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그럼 아니에요? 내 말 다 사실이잖아요.”‘너는 지금 네가 얼마나 똑똑한지 몰라서 그래.’서현우는 원래 이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자신감을 상실한 그녀를 보더니 문득 미소가 번졌다.“방금 네 논문을 쭉 읽었는데 장황하게 늘여놓는 경향도 있고 전문 용어도 꽤 많았어. 경제학에 대한 본인만의 관점이 뚜렷한 것 같아. 이런 논문은 학계에서 아주 참신한 내용이니 졸업논문으로 써도 되겠다고 한 거야.”“정말요?”도아영은 의아한 눈빛으로 변했다.“지금 저 놀리는 거죠? 대학도 졸업하지 못했으면서
한성대에 입학한 이후로 그녀는 이수호에게 푹 빠져있다 보니 공부는 아예 뒷전이었다.심지어 자신의 전문성이 어느 정도인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강이나의 훌륭한 모습에 이수호가 그녀에게 흠뻑 빠졌다고 여기면서 종일 강이나를 따라 했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서현우는 한창 자신을 비웃고 있는 도아영을 보면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글쓰기는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 나중에 쭉 연습하면 돼. 오늘 밤엔 여기서 지내. 집에 돌아갈 필요 없어.”“잠깐만요!”그녀가 불쑥 질문을 건넸다.“그게 대체 무슨 말이죠? 집에 돌아갈 필요가 없다니요? 지금 저더러 여기서 지내라는 거예요?”그녀는 못 믿겠다는 듯이 서현우에게 되물었다.“뭐 문제 돼?”서현우는 시계를 내려다보며 그녀에게 답했다.“지금 몇 시인 줄은 알아? 이 시간에 널 집까지 바래다줄 사람은 없다고.”“저 혼자 가면 돼요.”“우리 집 앞에서 택시 부르는 건 금지야.”도아영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이건 또 무슨 룰이죠?”“너도 알다시피 내가 해외에서 하도 많은 사람을 죽이다 보니 원수가 많아졌어. 내 주소가 들통나면 꽤 피곤해지겠지? 그러니까 너도 귀찮게 굴지 말라고.”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살인을 저지른 후 얼굴에 띈 싸늘한 한기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도아영은 감히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여긴 워낙 외진 곳이라 매일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서현우가 작심하고 그녀를 해결해버리는 것도 식은 죽 먹기일 듯싶었다.“그럼... 집 밖으로 멀리 나가서 택시 잡으면 되죠.”그녀는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에 서현우가 눈썹을 치켰다.“심야에 2킬로미터 밖으로 걸어갈 수 있다면 마음대로 해봐.”그는 일부러 도아영의 다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이 다리로는 절대 2킬로미터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그럼 이따가 어디서 자면 돼요?”“이 방에서 나가서 좌회전하고 혼자 찾아봐. 빈방이 많지 않으니 알아서 골라.”
어느덧 새벽인데 서재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밤잠을 뒤척이던 변윤재가 방에서 나오더니 서재 문틈 사이로 비치는 불빛에 조심스럽게 노크하고 들어갔다.서현우가 한창 소파에 누워서 종잇장을 들여다보면서 미소를 지었고 바닥에는 A4용지가 한가득 널브러져 있었다.“뭐야? 왜 여기서 자?”변윤재가 가까이 다가오며 위스키 한 잔을 그에게 건네고 다른 한 잔을 한 모금 마셨다.이에 서현우도 가볍게 한 잔 마셨다.“내 방을 내줬거든.”“내주다니? 누구? 한빈이?”그가 아무 말이 없자 변윤재는 슬쩍 떠보듯이 물었다.“설마... 아영이?”“응.”변윤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뭐라고?”그는 의아한 눈길로 서현우에게 되물었다.“너 결벽증 심해서 딴 사람 네 방으로 절대 안 들이잖아. 나도 못 들어간 곳을 아영이한테 줬어?”서현우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사실 그는 결벽증이 심해서 다른 사람이 제 물건을 만지는 걸 엄청 질색하지만 도아영은 왠지... 괜찮을 것 같았다.“그건 그렇고 아영이 꽤 재미있는 것 같아. 내가 해외에서 키우던 고양이 같다고 할까? 툭하면 발톱 드러내고 또 가끔 버럭 화내기도 하잖아. 애가 아주 개성이 넘쳐. 너랑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아.”변윤재는 말하면서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그래서 타깃을 바꾸려고?”“그런 셈이지.”서현우는 강이나를 만나봤지만 딱히 특별한 것도 없고 머리가 너무 똑똑한 편도 아니었다.이수호 또한 그녀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오히려 도아영을 조금 더 특별하게 대하는 듯싶었다.“그렇지만 도씨 일가가 이 지경이라 빈털터리나 다름없잖아. 너 도씨 일가에서 건질 것도 하나 없는데 만에 하나 이수호가 아예 도아영에게 관심조차 없다면 무슨 수로 그 인간 제압하려고?”한 곳에 두 명의 우두머리가 존재할 수 없다.서현우가 강주에 온 목적은 구연준과 이수호, 이 두 양대산맥과 경쟁하려는 게 아니라 둘의 전쟁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그중에서 이득을 얻기 위함이었다.다만 세력이 좀 더 강한 이수호를 견제하려
말을 마친 변윤재는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잘 자, 좋은 꿈 꿔.”그는 서재를 나가면서 잊지 않고 문까지 잠갔다.서현우는 탁자 위에 놓은 위스키 반 잔을 내려다보다가 모조리 삼켰다.자정이 넘은 시간.심정우는 모든 일을 마치고 룸에 있는 이수호가 자꾸 휴대폰만 바라보자 의아한 듯 물었다.“밤새 왜 이렇게 넋 놓고 있는 거야? 무슨 일 있어?”정신을 차린 이수호는 시큰둥한 얼굴로 휴대폰을 거둬들였다.그는 절대 업무에 소홀히 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점을 잘 알고 있는 심정우는 자연스럽게 도아영이 떠올랐다.“또 아영이 때문이지?”이수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이에 심정우는 본인의 추측을 확신했다.‘진짜네!’예전의 이수호는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어디 보자, 아영이한테 종일 문자가 없어서 안달이 난 거야?”그의 표정을 보니 또 한 번 알아맞힌 것 같았다.“그냥 인정해. 넌 이미 아영이 좋아하게 된 거야.”순간 이수호의 안색이 돌변했다.“뭐라는 거야? 헛소리 그만 지껄여!”“헛소리가 아니라 근거 있는 말이야.”심정우는 진지한 눈길로 이수호를 쳐다봤다.“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자꾸만 그 사람이 생각나고 찾아가고 싶고 그런 거야. 아까도 왜 자꾸 휴대폰만 만졌는데? 아영이한테 문자 왔나 확인하고 싶은 거잖아! 너 자존심 세서 먼저 보내지 못하는 거 알아. 근데 쭉 참고만 있으니 속이 재가 되는 거지!”심정우에게 마음을 들켜버린 이수호는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전에 아영이가 너 좋다고 매달릴 땐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이제 외면해버리니까 좋아하게 된 거야? 너도 참... 이런 게 바로 자업자...”그는 감히 더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도아영 걔는 돈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여자야. 내가 어떻게 그런 여자를 좋아할 리 있겠어?”이수호의 말을 들으면서 심정우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아영이가 정말 돈과 명예를 노렸다면 뭣 하러 파혼 소동을 벌였을까? 너희 할머니가 아영이를 그토록 마음에 들어 하
심정우의 말을 들은 이수호는 돌연 침묵했다.“인정해, 수호야. 넌 지금 아영이 좋아하게 된 거야. 그걸 인정하지 못하니까 자꾸 넋 놓고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거잖아.”“됐어, 그만.”이수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갑게 쏘아붙였다.“앞으로 이 얘기는 두 번 다시 꺼내지 마.”이어서 문 앞에 있는 안지원을 불렀다.“안 비서, 차 대기시켜.”“네, 대표님.”안지원은 이수호를 모시고 클럽을 나왔다.한편 심정우는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고개를 내저었다.클럽 밖에서 이수호가 어느덧 차에 올라탔다.“대표님, 집으로 모실까요 아니면?”“아영이네 아파트로 가.”안지원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네? 그렇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그는 차마 불편할 것 같다는 말이 입밖에 떨어지지 않았다.이때 이수호가 한참 머뭇거리더니 그에게 질문했다.“너도 내가 아영이 좋아한다고 생각해?”“그건...”안지원은 아무 말도 못 했다.좋아하는지 아닌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 테니까.“대답해.”이수호가 싸늘하게 말했다.이에 안지원은 마지못해 대답했다.“저는 그저 약혼식 이후로 대표님이 아영 씨에 대한 태도가 전보다 좀 달라진 것 같았어요.”“그건 걔가 자꾸 날 건드려서 그런 거지.”“하지만 누군가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뭣 하러 상대의 말에 그렇게까지 화낼 필요가 있겠어요?”안지원의 말을 들은 이수호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대표님은 강이나 씨한테 항상 자상했어요. 전에 강이나 씨한테 맹세했으니까요. 대표님은 무엇보다 책임감이 우선인지라 강이나 씨를 잘 챙겨주겠다고 그 사람과 약속한 이상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죠. 밖에서 떠도는 소문도 일절 신경 쓰지 않으셨고요. 하지만 도아영 씨는... 대표님이 누군가로 인해서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그토록 신경 쓰는 모습은 아마 아영 씨밖에 없을 것 같아요.”“됐어, 그만해.”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아영이 아파트로 가.”“네...”안지원은 곧장 도아영의 아파트로 출발했다.이수호는 단지
장내에 있는 사람들도 이 광경을 지켜봤다.그는 전에 도아영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인데 오늘은 이토록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부축하다니.도아영은 진작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한 듯 손을 빼냈다.“고마워요.”그제야 이수호는 방금 그녀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알아챘다.전에 이경 그룹에서 도원 그룹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 다들 이 두 집안이 사이가 안 좋은 거로 여기며 선뜻 도원 그룹과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 이수호와 도아영의 사이가 조금은 나아졌으니 도원 그룹에 손 내밀 협력사도 슬슬 많아질 것이다.“감히 날 이용해?”예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이렇게까지 계략이 많은 줄은 몰랐다.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딸로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본인만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대표님이 그러셨잖아요? 서로 이용하는 게 우리 모두에게 좋은 거라면서요?”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전에 이수호가 바로 이런 식으로 그녀를 이용했고 이제 와서 전세가 역전됐을 뿐이다.“오늘 파티에 왜 날 초대했는지 모를까 봐요? 도원 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수작이잖아요. 썩 쉽지만은 않을걸요.”도아영이 완전히 오해하자 이수호의 안색이 확 돌변했다.“뭐라고? 집어삼켜?”생각도 참 야무진 그녀였다.할머니는 확실히 그런 생각을 지녔지만 이수호는 절대 아니다.옆에 있던 안지원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그건 정말 오해예요, 아영 씨. 대표님은...”“대표님은 뭐요? 도원 그룹을 넘본 게 아니라고요? 말도 안 돼!”오늘 이경 그룹에서 초대한 사람들은 죄다 강주의 유명 인사들이다. 게다가 언론사까지 불러왔는데 도아영과 이수호의 관계를 널리 떠벌릴 목적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믿을까?도아영은 그저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이수호까지 남현숙과 같은 생각일 줄이야.“잘 들어! 난 절대 너희 집안까지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 따위 없어!”이수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요즘 그는 줄곧 도아영을 향한 솔직한 감정을 마주했다. 그가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자 도아영이 뒤로
도아영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외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도원 그룹에 유리한 일이니까.“의외네요, 대표님. 할머니 말 한마디에 선뜻 저를 만나주시네요?”도아영이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그녀는 이수호가 마냥 귀찮을 따름이었다.꼭 마치 이전에 이수호가 그녀를 대했던 것처럼 말이다.이제 둘의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할머니가 널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게 좋은 일인 것 같아?”다들 눈치챈 상황을 도아영이 모를 리가 있을까?그는 도아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오늘 그녀는 금빛 롱드레스를 입고 풀메이크업을 장착하여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옆모습을 본 순간 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그녀의 모습과 전에 봤던 제니의 모습이 완전히 똑같으니까.그의 따가운 시선에 도아영이 미간을 구겼다.“다들 지켜보는데 뭐 하는 거예요?”“조용히 해.”이수호는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한시라도 빨리 본인의 추측을 인증받고 싶은 모양이다.제니는 차갑고 도도한 미인상이라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매력을 내뿜는다.외모도 강주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어여쁜 도화안은 강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비쥬얼이었다.제니를 처음 볼 때부터 도아영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제니의 모든 제스처가 도아영과 달랐으니까.이수호도 딱히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성대 졸업시험에서 도아영의 성적 때문에 또다시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반년 가까이 휴학한 학생이 기말고사에서 이토록 높은 성적을 따낼 수 있을까?그녀가 적은 답안은 명확한 사고와 충분한 이론을 지녔다. 이건 비즈니스 베테랑만이 작성할 수 있는 답안이었다.제니의 학력까지 떠올리자 이수호는 눈앞의 도아영을 더더욱 의심하게 됐다. 그녀가 바로 명성이 자자한 위너 그룹 CEO 제니가 아닐까?“다 봤어요?”도아영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반짝이는 눈동자는 차갑고 도도한 제니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내가 괜한 생각을 했나?’이수호는 미간을 구겼다.“왜 그렇게 봐요
...주위에 온통 쉬쉬거리는 소리뿐이었다.도아영이 오늘 왜 이 파티에 참석했는지 다들 너무 궁금했다.로열 호텔 안, 안지원이 2층 휴식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손님들 다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이수호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눈만 감으면 어제 도아영이 했던 말만 떠올랐으니까.할머니가 이 파티를 열지만 않았어도 두 번 다시 도아영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아래층.도아영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화려한 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이제 도원 그룹의 유일한 상속자가 됐기 때문이다. 도아영과 결혼할 사람은 자연스럽게 도원 그룹도 차지하게 된다.그녀에게 불의의 사고라도 생기면 도씨 일가의 전 재산이 남편에게 돌아갈 것이다.장내에 있는 남성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아영아, 얼른 할미 곁으로 와.”남현숙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혐오에 찬 표정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도아영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현숙에게 다가갔다.남현숙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우리 아영이 점점 이뻐지네. 수호랑 오랜만이지? 금방 내려올 테니 함께 얘기도 나누고 오붓한 시간 보내. 젊은 사람들끼리 춤도 추고 와인도 마시고 얼마나 좋아?”남현숙은 지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연기하고 있었다.도아영은 이씨 일가 사람이란 걸 이 자리에서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아무도 감히 도아영을 넘보지 말라는 의도였다.이에 도아영이 가볍게 웃었다.“아니요, 대표님을 어제도 만난 걸요. 왠지 나랑 함께하기 싫은 눈치였어요.”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던 이수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어제 일을 되새기자 그는 또다시 사색이 되었다.“허튼소리! 수호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전에 파혼하려던 건 홧김에 그랬어. 젊은 애들이 그렇지 뭐. 누가 뭐래도 수호는 널 아주 많이 좋아해. 오늘도 너한테 사과하려고 하던데?”남현숙은 웃으면서 이수호를 불러왔다.뭇사람들은 이 광경을 빤히 지켜봤
이수호는 할머니의 말뜻을 너무 잘 이해한다.전에는 단지 도아영의 신분이 적합해서 그녀와 약혼하려던 거라면 지금은 도씨 일가 전체를 거머쥘 기회가 생겼다.그는 또다시 오늘 낮에 도아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할머니는 이번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절대 결혼할 리 없어요.”말을 마친 이수호가 위층으로 올라갔다.남현숙은 손주 녀석의 성격을 잘 알기에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래, 네가 굽히지 못하겠다면 이 할미가 직접 나서야지 어쩌겠어.’다음날, 유정연이 감방에 갇히고 도지호가 집에서 쫓겨난 소식이 이 바닥에 쫙 퍼졌다.도아영은 도씨 일가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이번에 매우 순조롭게 도원 그룹을 이어받았다.학교에 관한 일도 일단락되었으니 그녀는 한창 도원 그룹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아영 씨, 아침에 이씨 일가에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아영 씨더러 로열 호텔 파티에 참석하라고 하시네요.”“이씨 일가에서요?”‘이수호가 또 찾아온 거야?’도아영은 잠시 의심했지만 곧이어 남현숙임을 알아챘다.그 어르신은 능구렁이와도 같은 분이니까.도아영이 도원 그룹을 상속받자마자 파티에 초대하다니, 이건 절대 호의일 리가 없다.“아영 씨는 이제 도원 그룹 오너가 됐으니 이번 파티에 당연히 참석하셔야 해요. 게다가 앞서 이씨 일가와 도씨 일가가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떠돌다 보니 많은 협력사에서 감히 우리와 협력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경 그룹 눈 밖에 날까 봐 두려운 거죠. 이번에 이씨 일가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테고 도원 그룹 상황도 훨씬 나아질 겁니다.”주연우가 하는 말을 도아영도 물론 잘 알고 있다.다만 이경 그룹의 파티에 참석하기에 앞서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남현숙에게 득이 돼선 안 되고, 이씨 일가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게 아니라고 외부에 알려야 하니까.하지만...오늘 밤에 이수호를 만날 걸 생각하면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드레스 한 벌
“가시죠, 규리 씨.”“아니요! 대표님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예전에 쌓아온 정을 봐서 우리 이모 한 번만 구해주세요!”“더는 우리 집에 나타나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이수호가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자 임규리는 등골이 오싹했다.며칠 전에 강이나가 찾아와서 그와 임규리에 관한 스캔들을 일러바쳤는데 고작 여자들의 수작인지라 이수호는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어차피 임규리와 아무 사이도 아니니 똑똑한 사람이라면 둘이 불가능하단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수호와 임규리는 신분 격차가 너무 크니까.그 소문들은 임규리가 지어낸 거로밖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이수호는 이렇게 꼼수가 많은 여자가 딱 질색이다.한편 임규리는 아직 본인이 한 일을 이수호에게 들킨 줄 모르고 계속 유정연을 위해 사정했다.“이모도 도씨 일가 사람인데 대표님 정말 안 도와주실 거예요?”“안 비서! 내 말 안 들려?”“알겠습니다, 대표님.”안지원이 또다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임규리 씨, 계속 이러시면 끌어내는 수밖에 없어요.”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유정연이 감방에 간 일이 한성대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녀의 인생도 끝장이다.한성대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모든 거짓말이 들통나고 더 이상 뒷배가 없다는 게 알려지면 남은 3년은 어떻게 버텨내란 말인가?아마 학자금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대표님, 제발요! 저희 이모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할머니, 제가 요 며칠 시중만 잘 들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제발요! 우리 이모 구해주세요.”임규리는 눈물범벅이 되었다.한편 남현숙은 이수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그녀가 한심할 따름이었다.“네 이모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우리도 할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도씨 일가의 일이니 정 도움을 구하고 싶다면 아영이 찾아가 보거라.”도아영을 언급한 순간 이수호의 두 눈이 반짝였다.그녀가 도와줄 리 있을까?왠지 유정연이 감방에 들어간 것도 도아영과 연관이 있을 듯싶었다.다만 아직도 그녀 생각 중인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수호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넌 도씨 일가의 상속자도 아니고 우리 아빠 아들도 아니야. 법적으로 볼 때 오늘부로 너희 두 모자는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정신 좀 차려, 지호야!”도아영은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전생에 아빠가 그녀에게 회사를 물려주셨는데 마음 약한 도아영이 유정연 모자에게 고스란히 건넸다. 결국 아빠의 회사는 3년도 안 돼서 부도났고 유정연은 도지호를 데리고 안용준과 함께 도망치려 했다.그러니 이번 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정연 모자와 도원 그룹을 떼어놓아야 한다.“이 자식 끌어내.”도아영이 차갑게 분부하자 도씨 일가의 경호원들이 곧장 도지호를 이 집에서 끌어냈다.그는 슬리퍼를 신은 채 반항할 여지도 없이 처참하게 집에서 쫓겨났다.“도지호랑 유정연 물건들 싹 다 정리해서 밖에 내다 버려요!”“네, 아영 씨.”주연우는 곧바로 위층에 사람을 보내서 도지호와 유정연의 물건을 싹 다 처리했다.도아영은 다 정리한 물건들을 도지호에게 내던졌다.옷과 신발, 책까지 버려진 걸 보더니 도지호는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다들 여기서 잘 지켜. 도지호는 이제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만약 얘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소란 피우면 그 즉시 경찰에 신고해.”“네, 알겠습니다.”도아영은 그가 소란을 피울 걸 염두에 두고 일부러 경비소를 차렸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지호는 미친 듯이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도아영! 난 네 동생이야!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당장 문 열어! 나야말로 도씨 집안 아들이잖아!”도아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게 집으로 들어갔다.유정연 모자의 흔적이 없는 이 집안은 그제야 온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선사했다.“아영 씨, 다음 계획은?”“유정연 전 재산을 회사 계좌로 입금했어요. 그동안 모자랐던 금액을 채운 셈이죠. 이제 드디어 도원 그룹 협력 프로젝트를 운행하게 됐으니 당분간은 위기를 벗어났다고 보면 돼요.”‘이수호만 잠자코 있다면...’도아영은 이렇게 생각했다.그녀는 오늘 이수호를 가
저녁 무렵, 도지호는 집에서 줄곧 도아영의 연락만 기다렸다.도원 그룹의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차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더니 도지호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너 뭐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집에 무슨 일 생긴 줄 알아? 당장 나랑 경찰서 가서 엄마 모셔와야지!”도지호가 명령 조로 쏘아붙이며 도아영의 손목을 붙잡고 경찰서로 갈 기세였다.이에 도아영이 그를 힘껏 내팽개쳤다.도지호는 못 믿겠다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너 미쳤어? 감히 날 밀쳐?”이 집에서 줄곧 거만을 떨던 도지호였기에 그녀가 매정하게 밀쳐버릴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이제 막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 주연우가 덥석 막아서더니 가볍게 도지호를 제압했다.“너도 미친 거야? 우리 집안 따까리 주제에! 확 잘리고 싶어?”도지호는 힘으로 안 되니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이에 도아영이 차분하게 말했다.“잘 들어. 넌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야. 회사에서도 아무런 직급이 없으니 주 비서는 제쳐두고 이 집안 가정부도 네 멋대로 자를 순 없어.”“이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 도지호야! 왜 이 집안 사람이 아닌 건데? 엄마가 잡혀간 틈에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꿈 깨! 미친X아!”그는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째려봤다.하지만 도아영은 시큰둥하게 쓴웃음만 지었다.“네가 우리 아빠 아들이야? 쥐뿔도 아닌 게 무슨 자리까지 빼앗는다고 그래? 너희 엄마 안용준이랑 바람피운 건 알지? 안용준은 내가 직접 처리했고 너희 엄만 너그럽게 용서했어. 그런데 여태껏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끊임없이 회사 자산에 손댔더라? 대체 언제까지 우리 집안 재산을 노릴 건데? 너희 두 모자 좀 너무하단 생각은 안 들어?”“개소리 치지 마! 우리 엄마가 어떻게 딴 남자랑 바람을 피워?”도지호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네가 아직 어리니 그동안 나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건 그냥 눈감아줄게. 하지만 너희 엄마는 우리 아빠랑 도원 그룹에 미안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어. 그건
사채업자들은 꽤 모아진 자산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드디어 도씨 저택을 떠났다.유정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채에 딱 한 번 손을 댔더니 아들과 함께 전 재산을 털릴 줄이야.한편 도아영은 도원 그룹에서 사채업자의 전화를 받았다.“아영 씨, 분부하신 일은 다 해결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현금화해서 이체해드리겠습니다.”“알겠어요.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별말씀을요. 서 대표님 분부대로 했을 뿐입니다.”도아영은 가볍게 웃었다. 이 모든 건 서현우의 공로이니까.그의 조언대로 유정연 모자의 전 재산을 손쉽게 챙겼고 이 또한 아빠 도석진이 받아야 할 몫이다.전화를 끊은 후 도아영은 주연우에게 분부했다.“이제 다 됐어요. 시작해볼까요?”“네, 알겠습니다.”주연우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도씨 저택에서 유정연 모자가 멍하니 넋 놓고 있을 때 문밖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랐고 도지호도 어안이 벙벙했다.‘오늘 무슨 날이야? 경찰차는 또 뭔데?’유정연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경찰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다.“신고받고 왔습니다. 유정연 씨, 당신은 금융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니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네? 뭐라고요? 금융범죄라니? 그게 대체 뭔 말인데요?”유정연은 몹시 당황했지만 경찰은 그녀의 변명 따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서로 가서 조사받으시죠! 당장 끌고 가!”“당신들 뭐야? 왜 우리 엄마를 잡아가는 건데?”도지호가 쫓아가려 했지만 경찰은 아예 무시한 채 유정연을 차에 태우고 떠나가 버렸다.오늘 발생한 모든 일이 괴이할 따름이었다.도지호는 곧바로 도아영에게 연락했다.평상시에는 그렇게 연락이 잘 되던 도아영인데 오늘은 도통 받지를 않았다.“전화 좀 받아!”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유정연이 경찰에 잡혀가니 그는 가장 먼저 도아영이 떠올랐다.그녀 말곤 엄마를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까.도원 그룹에서 도아영은 쉴 새 없이
“왜 그래요 갑자기? 무슨 일 있어요?”유정연은 사채에 손을 댄 일을 죽어도 도아영에게 고백할 순 없었다.도씨 일가의 가훈이 바로 사채에 손을 대지 않는 거니까.소문이라도 나면 체면이 바닥나고 도아영에게 쫓겨날지도 모른다.한편 도아영은 그녀가 사채를 빌린 걸 진작 알고 있어 입꼬리를 씩 올렸다.“지금 바로 연락해 계약서 보낼 테니까 거기 사인만 하면 효력이 발생할 거예요. 아줌마랑 지호가 우리 아빠 재산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사인만 하면 재무팀에 바로 연락해서 돈 보낼게요.”기세등등한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더 이상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알았어! 사인할게. 바로 할게!”도아영이 곧장 휴대폰으로 계약서를 보내왔다.유정연은 꼼꼼히 읽어볼 새도 없이 바로 사인했고 계좌에 거액이 들어왔지만 모든 걸 사채업자에게 털렸다. 2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다만 겁에 질린 유정연은 이 과정의 수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봐! 아직도 돈 있잖아! 바로 내놓으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질질 끌었어? 돈 될만한 액세서리들 당장 내놔!”유정연은 허겁지겁 위층에 올라가 보물처럼 아끼던 액세서리를 모조리 꺼냈다.이것들은 전부 도석진이 생전에 그녀에게 선물한 값비싼 액세서리들이다.수년간 아까워서 제대로 착용하지도 못했고 그저 도지호의 생일날 딱 한 번 치장하고 나갔었다.“여기 있어요. 이거면 되나요?”그녀는 액세서리를 사채업자에게 건넸다.“이년이 감히 내 앞에서 꼼수를 부려? 분명 더 있을 거야! 다 내놔! 이까짓 거로 누구 입에 풀칠하겠어?”앞장선 남자가 그녀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라서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숨긴 건 맞지만 이 사람들이 대체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 더는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마지못해 여태껏 보관한 모든 액세서리와 명품 가방, 옷들까지 꺼냈다.“이 새끼도 있잖아! 얘 것도 싹 다 꺼내!”도지호는 평상시에 손이 커서 가격도 안 보고 물건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