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대표님.”곧이어 구연준은 교실을 나섰다.교실 안의 뭇사람들은 안쓰러운 눈길로 강이나를 쳐다봤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눈빛으로...“이나야...”유하영은 그래도 강이나를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눈시울이 빨개진 채 교실을 뛰쳐나갔다.저녁 무렵, 이씨 일가.도아영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가정부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침대에서 내려온 그녀를 보고 화들짝 놀라서 그릇을 엎을 뻔했다.“아영 씨! 대표님께서 요 며칠은 무조건 침대에 누워계시라고 했잖아요! 왜 혼자 내려왔어요?”가정부는 황급히 달려가 도아영을 부축했다. 한편 도아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꼬박 하루를 누워있었어요. 더 있으면 폐인이 될 것 같단 말이에요.”“하지만 대표님께서...”“집에도 없는데 뭣 하러 신경 써요?”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문밖에서 이수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 근데 나 이제 돌아왔는데?”“...”도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남원 교외의 프로젝트가 끝내 그를 얽매지 못했던 걸까?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거지?이수호가 이제 막 침실로 들어서려 할 때 도아영이 재빨리 지팡이로 그를 가리켰다.“거기 서요!”이수호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봤다.“난 그냥 여기서 병 치료만 받는다고 했어요. 다 큰 남자가 시도 때도 없이 내 방에 드나드는 건 경우가 아니죠! 당장 나가요!”문전박대를 당한 이수호는 쓴웃음을 짓더니 더 당당하게 가까이 다가왔다.“아영아, 여기 내 집이야. 내가 어느 방에 가든 네 허락을 맡을 필요는 없어.”그는 도아영의 손에서 지팡이를 빼냈다.무기력하던 도아영은 그대로 지팡이를 뺏긴 채 몸에 중력을 잃었다.“수호 씨 진짜!”그녀가 휘청거릴 때 이수호는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너무 갑작스러운 제스처에 도아영은 어안이 벙벙해졌다.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소리쳤다.“이거 놔요!”“진짜 놔?”이수호는 그녀에게 현재 위치를 보여줬다.이 타이밍에 손을 놓아버리면 도아영은 2층 계단에서
예전 같으면 남현숙도 이런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봤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표정이 싸늘해졌다.“아줌마들은 대체 뭐 하고 있어? 얼른 가서 도아영 씨 부축해야지!”도아영 씨란 호칭 하나로 둘 사이의 거리가 확 멀어졌다.전에 남현숙은 항상 다정하게 아영이라고 불렀으니까.스캔들이 난 이후로 남현숙도 심기가 불편해진 모양이다.유정희는 황급히 다가가 도아영에게 손을 내밀었다.도아영도 빨리 이수호한테서 빠져나오려고 그 손을 덥석 잡았다.이를 눈치챈 이수호는 바닥에 발을 디딘 그녀를 차갑게 노려봤다.도아영이 눈길 한번 안 주자 이수호는 기분이 더 잡쳤다.‘내게 안기는 게 그렇게 싫어?’한편 도아영은 옆에 서서 어르신께 인사했다.“할머니...”“다쳤다는 소식 들었다.”남현숙은 그녀를 샅샅이 훑어봤는데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돼버렸다.평상시 같으면 엄청 안쓰러워할 텐데 오늘은 유독 쌀쌀맞았다.“어쩌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그럼 그렇지.’도아영은 남현숙의 주안점이 전혀 놀랍지가 않았다.이경 그룹에서 연륜이 가장 높은 분이기에 손주며느리가 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신경 쓰는 건 지극히 정상이었다.이 바닥에서 경찰서에 잡혀갔다는 건 사교성 꽝, 블랙리스트에 들어간 거나 다름없다.누군가가 짐짓 좋은 체해도 가까이 다가올 리는 없다.도아영이 이제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이수호가 먼저 가로챘다.“내가 아영이 오해해서 잠깐 트러블이 생긴 거예요.”“트러블이 생겼다고 경찰서까지 가?”남현숙이 정색하며 쏘아붙였다.“강씨 저택을 짓부순 게 도아영 씨랑 무슨 연관이 있다고 그래?”“맞아요, 저도 이제 잘못을 뉘우치고 일부러 아영이를 병원에서 데려왔어요. 이제부터 제가 직접 돌보려고요.”남현숙은 손자의 진심 어린 태도에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두 사람 이미 파혼했으니 도아영 씨도 계속 여기서 지내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이참에 우리 집으로 가지. 내가 사람 시켜서 정성껏 보살펴줄게.”남현숙은 말끝마다 도아영 씨라고 부르면서 거리감을 두었다
그는 절대 도아영의 뜻대로 해줄 리가 없다.“수호야, 아영 씨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더는 강요하지 말아.”남현숙은 이 두 사람이 얼른 관계를 끝내기만 바랐다.“아영 씨가 공부에 전념했잖아. 그럼 한성대 근처에 집 하나 구해줘.”“할머니, 그건...”“됐다. 그냥 내 말대로 해.”이 집안에서 남현숙의 말이 곧 진리이다. 그녀는 곧이어 유정희를 바라봤다.“아줌마, 가서 도아영 씨 짐 정리 도와드려.”“네, 어르신...”유정희는 살짝 난감한 눈길로 이수호를 쳐다봤다.이때 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할머니,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고 아영이도 몸이 불편하다 보니 내일 해요. 내일 아침에 안 비서 시켜서 일단 집부터 마련하고 아영이 이사시킬게요.”남현숙은 당장이라도 도아영을 내쫓고 싶었지만 다친 몸으로 내쫓는 건 너무 한 것 같아 순순히 손자의 말을 따랐다.“도아영 씨, 할 얘기 있으니까 이리 와.”말을 마친 남현숙은 소파에 앉았다.지팡이가 없는 도아영은 안 그래도 걸음이 불편한데 남현숙은 일부러 그녀와 가장 멀리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유정희는 짐 정리하러 올라갔고 이수호와도 더는 스킨쉽을 하고 싶지 않으니 마지못해 아픈 다리를 끌고 고통을 참으면서 남현숙에게 다가갔다.이를 지켜보는 이수호는 미간이 저절로 구겨졌다.그녀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너무 아파서 식은땀까지 흘리자 이수호는 재빨리 다가가서 팔을 부축했다.도아영은 황급히 팔을 치우려고 했으나 이수호가 그럴 기회를 안 줬다.이 모습이 너무 불만스럽지만 남현숙은 티를 낼 수가 없었다.그녀가 남현숙 앞에 다가가자 이수호는 조심스럽게 의자까지 내주었다.“앉아.”“...”도아영도 무척 앉고 싶었지만 차를 마시는 남현숙의 눈치를 살피더니 끝내 앉지 않았다.남현숙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이수호를 건드리는 것보다 훨씬 끔찍한 일이니까.이수호는 꿈쩍 않는 그녀를 보더니 아예 의자에 꾹 눌러 앉혔다.그의 거친 동작에 도아영은 하마터면 상처를 건드릴 뻔했던지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남
예의 바르고 교양 있는 부잣집 따님이라 남현숙의 마음에 쏙 들었다.‘완전 잘됐네!’이제 이수호가 종일 감시할 일은 없을 것이다.한편 이수호는 몰래 기뻐하는 도아영의 표정을 모조리 캐치했다.그는 마음속 깊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이토록 내가 딴 여자를 만나길 바랐어?’“애초에 너희 두 사람도 좋게 봐왔지만 몇 개월 지내보니 둘이 참 안 어울리더라. 수호는 내조 잘하는 아내가 필요한데... 도아영 씨는 워낙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잖아. 이제 나도 더는 두 사람 강요 안 해.”남현숙은 도아영이 약혼녀로서 자격이 없다는 걸 대놓고 티를 냈다.이에 도아영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남현숙이 원하는 건 예쁜 꽃 같은 손주며느리였다. 밖에서도 실컷 자랑할 수 있고 집에서도 매우 실용적인 그런 여자 말이다.전에 남현숙과 이수호에게 잘 보이려고 집에서 밥하고 빨래만 하던 자신을 되새기노라니, 무슨 일이든 이수호만 배려하던 자신을 되새기노라니 도아영은 제 뺨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나 왜 그렇게 비굴했지? 하라는 공부도 안 하고 고작 남자한테 잘 보이려고 애쓴 거야?’좋은 대학에 가려고 노력했던 학창시절이 아까워질 따름이었다.환생한 후 그녀는 약혼녀로서 자격이 없는 게 아니라 아예 잘해볼 생각조차 없었다.한편 남현숙은 그녀가 순순히 고개만 끄덕이니 속내를 아예 모른 채 야유에 찬 눈길로 째려볼 뿐이었다.도아영은 지금 할머니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안다. 우리 수호 같은 애를 놓치는 건 평생 후회할 일이라고 여길 것이다. 눈앞에서 200억을 놓치는 것만큼이나 아쉬운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다만 그녀는 이수호와 200억이 동시에 눈앞에 놓여있어도 1초의 고민 없이 바로 200억을 택할 것이다.이수호가 남현숙에겐 소중한 보물일지 몰라도 그녀에겐 전혀 아니니까.“난 할 얘기 끝났으니 도아영 씨도 너무 속에 남겨둘 필요는 없어. 강주에 좋은 남자가 많잖아. 아영 씨 아버지가 안 계시니 내가 꼭 책임지고 좋은 신랑감을 골라줄게.”“괜찮아요. 저 당분간 결
이수호가 손에 힘을 꽉 주자 도아영이 나무 아파서 식은땀까지 흘렸다.“아파요, 이거 놔요!”그는 그제야 자신이 추태를 부렸다는 걸 알아채고 도아영의 손등에 난 상처를 보다가 곧장 놓아주었다.도아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와 멀찍이 떨어졌다.“연준 씨든 현우 씨든 대표님 알 바가 아니에요.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사적인 질문은 삼가세요. 전에 분명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잖아요.”도아영이 어떻게든 그에게서 벗어나려 하자 이수호는 쓴웃음을 지었다.“진짜 둘 다 섭렵했나 보네.”“마음대로 생각해요.”그녀는 더 이상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잘 들어. 그 두 사람은 너 따위가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인물이 아니야. 조만간 나한테 찾아와서 애원할 때가 있을걸.”“걱정 마세요. 그런 날은 없을 테니까.”말을 마친 도아영은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지팡이를 줍고 간신히 위층으로 올라갔다.옆에 있던 가정부가 그녀를 부축하고 싶었지만 이수호가 곁눈질하며 제지했다.‘날 멀리하려고? 꿈 깨!’다음날 이른 아침 도아영은 잠에서 깼다. 오늘은 이씨 일가에서 짐을 싸고 나가는 날인데 유정희가 글쎄 그녀의 캐리어를 활짝 열고 어제 싸두었던 물건들을 전부 꺼내놓았다.“아줌마, 이게 뭐예요?”유정희는 그녀의 부름에 곧바로 대답했다.“대표님께서... 한성대 부근에 집 구하기 어려우니 시간이 좀 걸린댔어요. 아영 씨는 일단 여기서 지내다가 집을 구하는 대로 나가시면 돼요.”도아영은 미간을 확 구겼다.‘집을 구하기가 어려워?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강주 바닥에서 이수호가 집 한 채 구하기 어렵다는 건 정말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건축업계 사장님들은 저마다 가장 좋은 집을 이수호에게 팔지 못해 안달일 테니까.‘이수호, 대체 또 무슨 수작인 건데?’“대표님은요? 지금 좀 뵈어야겠어요.”“회사 나가셨어요. 오늘은 늦게 돌아오신대요.”유정희는 말하면서 도아영의 짐을 싹 다 꺼내놓았다. 이에 도아영이 일부러 구시렁댔다.“할머니는 하루빨리 나가라고 하셨는데 이러다가 할머
‘소개팅? 오케이!’“아영 씨?”유정희는 싱글벙글한 그녀를 보더니 어안이 벙벙해졌다.전 약혼자가 소개팅하러 간다는데 이렇게 기뻐할 일일까?“괜찮아요, 아줌마. 고마워요.”도아영은 문득 마음이 홀가분해졌다.‘이제 이 집에서 지낼 날도 얼마 안 남았네? 곧 나갈 준비만 하면 되겠어!’이때 도아영의 휴대폰이 울렸다.구연준한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자 그녀는 재빨리 대화창을 열었다.[점심에 차 보낼 테니 나와.]짤막한 한마디에 도아영은 두 눈이 반짝거렸다.아마도 남원 교외 프로젝트에 관한 소식일 듯싶었다.그녀는 본가에서나 이수호의 집에서나 남원 교외 프로젝트를 의논하기가 불편했는데 구연준이 마침 적절한 타이밍에 메시지를 보냈다.[오케이.]그녀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이경 그룹.점심시간 무렵, 이수호는 피곤한지 의자 등받이에 기대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5분도 쉬지 못하고 안지원이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대표님, 어르신께서 재촉하십니다. 진설아 씨가 이미 출발했으니 여자분 먼저 기다리게 하지 말라네요...”“알았어.”이수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무심코 휴대폰을 챙기면서 화면을 봤지만 업무 외의 내용은 전혀 없었다. 그는 미간을 구기고 안지원에게 물었다.“도아영 오늘 뭐 했지?”“네? 아영 씨는 이제 거동이 불편하니 집에서 쉬고 계실 겁니다.”“그래.”이수호가 담담하게 말했다.“해외 전문 의료진은 찾았어?”“함 원장 측에서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제가 다시 여쭤볼게요.”“얼른 다그쳐.”“네.”안지원은 그가 이토록 도아영을 걱정하는 모습에 참지 못하고 질문을 건넸다.“대표님, 저 사실 대표님께서 강이나 씨 제외하고 이렇게까지 여자분한테 신경 써주시는 거 처음 봤어요. 혹시 아영 씨를...”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수호가 싸늘한 눈길로 째려봤다.“의사를 찾아주는 건 단지 나 때문에 아영이가 피해를 봐서 그런 거야. 일종의 보상이지.”“네... 대표님.”안지원은 곧장 머리를 숙였다.“게다가 누가 걔처럼
이수호가 시즌 호텔에 들어서자 호텔 매니저가 앞으로 다가가 그에게 인사하려 했지만 안지원이 가로막았다.진설아도 오늘 처음 이수호를 보게 됐다. 진씨 일가는 강주에서 지위가 낮아서 이런 인물을 직접 뵐 기회가 거의 없었다.이수호는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멋있었다. 그 모습에 진설아의 두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그의 외모는 정말이지 연예인 뺨치는 수준이었다.“대표님...”진설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하려 했지만 이수호는 아예 그녀 앞에 앉아버렸다.무뚝뚝한 그의 표정에 진설아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나 시간 얼마 없으니 그냥 절차대로 해요.”그는 안지원이 가져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종업원에게 음식을 올리라고 분부했다.딱 봐도 진설아에게 관심 없는 눈치였다. 다만 진설아는 서러움도 꾹 참고 그에게 말했다.“대표님, 다름이 아니라 어르신의 부름을 받고 여기까지 나오게 됐어요. 저는 아직 대표님에 대해서 아는 게 잘 없네요...”“난 딱히 좋아하는 건 없지만 싫어하는 건 꽤 많아요.”이수호가 덤덤하게 말했다.“진설아 씨가 정략결혼이 개의치 않는다면 우리도 계속 대화를 이어가죠.”진설아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죠?”“첫째, 난 그쪽을 좋아할 일이 없어요.”“둘째, 난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셋째, 우린 쇼윈도 부부로 살 겁니다. 진설아 씨는 결혼 뒤에 조신하고 내조 잘하는 아내가 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해요.”이수호가 다짜고짜 본론에 들어갔다.순간 진설아의 안색이 확 일그러지고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서 왜 저랑 소개팅한 거죠?”“정략결혼이 바로 이런 거니까요. 강주에서 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테니 당연히 진설아 씨 같은 분과 결혼할 마음이 없는 것도 잘 알겠네요.”“뭐라고요...”진설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강주에서 이수호와 강이나에 관한 소문을 그녀도 당연히 들었으니까.다만 진설아는 여태껏 그 소문을 마음에 새겨두지 않았다.강이나가 자신보다 예쁜 것도 아니
진설아도 도아영에 대해서 너무 잘 안다.이 바닥에서 도아영이 어떤 식으로 이수호에게 아양을 떨었는지는 거의 모르는 자가 없으니까.전에 도아영이 이수호를 위해 아부했던 얘기를 들으면서 진설아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는데 어느덧 본인이 그 처지가 돼버리다니.진설아는 한심하고 어이없을 따름이었다.도아영처럼 비천하게 아부하는 여자도 파혼당하는 마당에...“못하겠어요? 그렇다면 이만하고 끝내죠.”이수호는 굳이 여기서 그녀와 가식을 떨 여유가 없었다. 자리를 뜨려던 참에 그는 마침 익숙한 실루엣을 보게 되는데...“이쪽입니다.”종업원이 도아영을 부축하며 룸으로 들어갔다.도아영은 거동이 불편하여 종업원의 부축을 받으면서 구연준이 예약한 룸에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구연준이 방금 뭘 먹었는지 입을 닦고 있었다.“지각이야.”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로 변하고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들어오는 도아영을 쳐다봤다.순간 저도 몰래 미간이 구겨지는 구연준이었다.한참 후에야 이 남자가 입을 열었다.“교통사고라도 당한 거니?”“...”도아영은 차분하게 그에게 답했다.“경찰서에 하룻밤 갇혀 있으면서 된통 맞았다면 믿으실래요?”“응. 믿어.”구연준이 대답했다.“이수호랑 파혼하려고 네가 뭔들 못하겠어?”구연준은 전에도 도아영의 수단을 제대로 맛보았다. 특히 최근에 남원 교외의 땅에서 샘물이 나온 이후로 그는 이 여자가 정말 용하다고 느껴졌다.“칭찬 고마워요.”도아영은 힘겹게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구연준은 그녀의 상처를 훑어보면서 말했다.“강이나랑 함께 다니던 조나린 이미 퇴학 조치 당했어.”“그래요. 꽤 효율적이네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너 때문이 아니야. 학교 질서를 위해서 내린 조치야.”“네... 학교를 위해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그래.”이때 구연준이 도장을 찍은 서류를 그녀 앞에 내놓았다.“이건 남원 교외에 관한 모든 계약서야. 네가 원하던 새로운 신분증도 들어있어.”서류를 꺼내고 신분증을 들여다보니 그녀의 사진이 떡하니 찍혀있었
장내에 있는 사람들도 이 광경을 지켜봤다.그는 전에 도아영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인데 오늘은 이토록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부축하다니.도아영은 진작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한 듯 손을 빼냈다.“고마워요.”그제야 이수호는 방금 그녀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알아챘다.전에 이경 그룹에서 도원 그룹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 다들 이 두 집안이 사이가 안 좋은 거로 여기며 선뜻 도원 그룹과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 이수호와 도아영의 사이가 조금은 나아졌으니 도원 그룹에 손 내밀 협력사도 슬슬 많아질 것이다.“감히 날 이용해?”예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이렇게까지 계략이 많은 줄은 몰랐다.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딸로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본인만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대표님이 그러셨잖아요? 서로 이용하는 게 우리 모두에게 좋은 거라면서요?”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전에 이수호가 바로 이런 식으로 그녀를 이용했고 이제 와서 전세가 역전됐을 뿐이다.“오늘 파티에 왜 날 초대했는지 모를까 봐요? 도원 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수작이잖아요. 썩 쉽지만은 않을걸요.”도아영이 완전히 오해하자 이수호의 안색이 확 돌변했다.“뭐라고? 집어삼켜?”생각도 참 야무진 그녀였다.할머니는 확실히 그런 생각을 지녔지만 이수호는 절대 아니다.옆에 있던 안지원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그건 정말 오해예요, 아영 씨. 대표님은...”“대표님은 뭐요? 도원 그룹을 넘본 게 아니라고요? 말도 안 돼!”오늘 이경 그룹에서 초대한 사람들은 죄다 강주의 유명 인사들이다. 게다가 언론사까지 불러왔는데 도아영과 이수호의 관계를 널리 떠벌릴 목적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믿을까?도아영은 그저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이수호까지 남현숙과 같은 생각일 줄이야.“잘 들어! 난 절대 너희 집안까지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 따위 없어!”이수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요즘 그는 줄곧 도아영을 향한 솔직한 감정을 마주했다. 그가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자 도아영이 뒤로
도아영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외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도원 그룹에 유리한 일이니까.“의외네요, 대표님. 할머니 말 한마디에 선뜻 저를 만나주시네요?”도아영이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그녀는 이수호가 마냥 귀찮을 따름이었다.꼭 마치 이전에 이수호가 그녀를 대했던 것처럼 말이다.이제 둘의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할머니가 널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게 좋은 일인 것 같아?”다들 눈치챈 상황을 도아영이 모를 리가 있을까?그는 도아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오늘 그녀는 금빛 롱드레스를 입고 풀메이크업을 장착하여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옆모습을 본 순간 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그녀의 모습과 전에 봤던 제니의 모습이 완전히 똑같으니까.그의 따가운 시선에 도아영이 미간을 구겼다.“다들 지켜보는데 뭐 하는 거예요?”“조용히 해.”이수호는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한시라도 빨리 본인의 추측을 인증받고 싶은 모양이다.제니는 차갑고 도도한 미인상이라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매력을 내뿜는다.외모도 강주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어여쁜 도화안은 강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비쥬얼이었다.제니를 처음 볼 때부터 도아영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제니의 모든 제스처가 도아영과 달랐으니까.이수호도 딱히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성대 졸업시험에서 도아영의 성적 때문에 또다시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반년 가까이 휴학한 학생이 기말고사에서 이토록 높은 성적을 따낼 수 있을까?그녀가 적은 답안은 명확한 사고와 충분한 이론을 지녔다. 이건 비즈니스 베테랑만이 작성할 수 있는 답안이었다.제니의 학력까지 떠올리자 이수호는 눈앞의 도아영을 더더욱 의심하게 됐다. 그녀가 바로 명성이 자자한 위너 그룹 CEO 제니가 아닐까?“다 봤어요?”도아영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반짝이는 눈동자는 차갑고 도도한 제니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내가 괜한 생각을 했나?’이수호는 미간을 구겼다.“왜 그렇게 봐요
...주위에 온통 쉬쉬거리는 소리뿐이었다.도아영이 오늘 왜 이 파티에 참석했는지 다들 너무 궁금했다.로열 호텔 안, 안지원이 2층 휴식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손님들 다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이수호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눈만 감으면 어제 도아영이 했던 말만 떠올랐으니까.할머니가 이 파티를 열지만 않았어도 두 번 다시 도아영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아래층.도아영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화려한 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이제 도원 그룹의 유일한 상속자가 됐기 때문이다. 도아영과 결혼할 사람은 자연스럽게 도원 그룹도 차지하게 된다.그녀에게 불의의 사고라도 생기면 도씨 일가의 전 재산이 남편에게 돌아갈 것이다.장내에 있는 남성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아영아, 얼른 할미 곁으로 와.”남현숙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혐오에 찬 표정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도아영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현숙에게 다가갔다.남현숙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우리 아영이 점점 이뻐지네. 수호랑 오랜만이지? 금방 내려올 테니 함께 얘기도 나누고 오붓한 시간 보내. 젊은 사람들끼리 춤도 추고 와인도 마시고 얼마나 좋아?”남현숙은 지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연기하고 있었다.도아영은 이씨 일가 사람이란 걸 이 자리에서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아무도 감히 도아영을 넘보지 말라는 의도였다.이에 도아영이 가볍게 웃었다.“아니요, 대표님을 어제도 만난 걸요. 왠지 나랑 함께하기 싫은 눈치였어요.”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던 이수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어제 일을 되새기자 그는 또다시 사색이 되었다.“허튼소리! 수호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전에 파혼하려던 건 홧김에 그랬어. 젊은 애들이 그렇지 뭐. 누가 뭐래도 수호는 널 아주 많이 좋아해. 오늘도 너한테 사과하려고 하던데?”남현숙은 웃으면서 이수호를 불러왔다.뭇사람들은 이 광경을 빤히 지켜봤
이수호는 할머니의 말뜻을 너무 잘 이해한다.전에는 단지 도아영의 신분이 적합해서 그녀와 약혼하려던 거라면 지금은 도씨 일가 전체를 거머쥘 기회가 생겼다.그는 또다시 오늘 낮에 도아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할머니는 이번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절대 결혼할 리 없어요.”말을 마친 이수호가 위층으로 올라갔다.남현숙은 손주 녀석의 성격을 잘 알기에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래, 네가 굽히지 못하겠다면 이 할미가 직접 나서야지 어쩌겠어.’다음날, 유정연이 감방에 갇히고 도지호가 집에서 쫓겨난 소식이 이 바닥에 쫙 퍼졌다.도아영은 도씨 일가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이번에 매우 순조롭게 도원 그룹을 이어받았다.학교에 관한 일도 일단락되었으니 그녀는 한창 도원 그룹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아영 씨, 아침에 이씨 일가에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아영 씨더러 로열 호텔 파티에 참석하라고 하시네요.”“이씨 일가에서요?”‘이수호가 또 찾아온 거야?’도아영은 잠시 의심했지만 곧이어 남현숙임을 알아챘다.그 어르신은 능구렁이와도 같은 분이니까.도아영이 도원 그룹을 상속받자마자 파티에 초대하다니, 이건 절대 호의일 리가 없다.“아영 씨는 이제 도원 그룹 오너가 됐으니 이번 파티에 당연히 참석하셔야 해요. 게다가 앞서 이씨 일가와 도씨 일가가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떠돌다 보니 많은 협력사에서 감히 우리와 협력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경 그룹 눈 밖에 날까 봐 두려운 거죠. 이번에 이씨 일가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테고 도원 그룹 상황도 훨씬 나아질 겁니다.”주연우가 하는 말을 도아영도 물론 잘 알고 있다.다만 이경 그룹의 파티에 참석하기에 앞서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남현숙에게 득이 돼선 안 되고, 이씨 일가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게 아니라고 외부에 알려야 하니까.하지만...오늘 밤에 이수호를 만날 걸 생각하면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드레스 한 벌
“가시죠, 규리 씨.”“아니요! 대표님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예전에 쌓아온 정을 봐서 우리 이모 한 번만 구해주세요!”“더는 우리 집에 나타나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이수호가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자 임규리는 등골이 오싹했다.며칠 전에 강이나가 찾아와서 그와 임규리에 관한 스캔들을 일러바쳤는데 고작 여자들의 수작인지라 이수호는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어차피 임규리와 아무 사이도 아니니 똑똑한 사람이라면 둘이 불가능하단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수호와 임규리는 신분 격차가 너무 크니까.그 소문들은 임규리가 지어낸 거로밖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이수호는 이렇게 꼼수가 많은 여자가 딱 질색이다.한편 임규리는 아직 본인이 한 일을 이수호에게 들킨 줄 모르고 계속 유정연을 위해 사정했다.“이모도 도씨 일가 사람인데 대표님 정말 안 도와주실 거예요?”“안 비서! 내 말 안 들려?”“알겠습니다, 대표님.”안지원이 또다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임규리 씨, 계속 이러시면 끌어내는 수밖에 없어요.”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유정연이 감방에 간 일이 한성대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녀의 인생도 끝장이다.한성대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모든 거짓말이 들통나고 더 이상 뒷배가 없다는 게 알려지면 남은 3년은 어떻게 버텨내란 말인가?아마 학자금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대표님, 제발요! 저희 이모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할머니, 제가 요 며칠 시중만 잘 들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제발요! 우리 이모 구해주세요.”임규리는 눈물범벅이 되었다.한편 남현숙은 이수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그녀가 한심할 따름이었다.“네 이모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우리도 할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도씨 일가의 일이니 정 도움을 구하고 싶다면 아영이 찾아가 보거라.”도아영을 언급한 순간 이수호의 두 눈이 반짝였다.그녀가 도와줄 리 있을까?왠지 유정연이 감방에 들어간 것도 도아영과 연관이 있을 듯싶었다.다만 아직도 그녀 생각 중인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수호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넌 도씨 일가의 상속자도 아니고 우리 아빠 아들도 아니야. 법적으로 볼 때 오늘부로 너희 두 모자는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정신 좀 차려, 지호야!”도아영은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전생에 아빠가 그녀에게 회사를 물려주셨는데 마음 약한 도아영이 유정연 모자에게 고스란히 건넸다. 결국 아빠의 회사는 3년도 안 돼서 부도났고 유정연은 도지호를 데리고 안용준과 함께 도망치려 했다.그러니 이번 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정연 모자와 도원 그룹을 떼어놓아야 한다.“이 자식 끌어내.”도아영이 차갑게 분부하자 도씨 일가의 경호원들이 곧장 도지호를 이 집에서 끌어냈다.그는 슬리퍼를 신은 채 반항할 여지도 없이 처참하게 집에서 쫓겨났다.“도지호랑 유정연 물건들 싹 다 정리해서 밖에 내다 버려요!”“네, 아영 씨.”주연우는 곧바로 위층에 사람을 보내서 도지호와 유정연의 물건을 싹 다 처리했다.도아영은 다 정리한 물건들을 도지호에게 내던졌다.옷과 신발, 책까지 버려진 걸 보더니 도지호는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다들 여기서 잘 지켜. 도지호는 이제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만약 얘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소란 피우면 그 즉시 경찰에 신고해.”“네, 알겠습니다.”도아영은 그가 소란을 피울 걸 염두에 두고 일부러 경비소를 차렸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지호는 미친 듯이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도아영! 난 네 동생이야!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당장 문 열어! 나야말로 도씨 집안 아들이잖아!”도아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게 집으로 들어갔다.유정연 모자의 흔적이 없는 이 집안은 그제야 온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선사했다.“아영 씨, 다음 계획은?”“유정연 전 재산을 회사 계좌로 입금했어요. 그동안 모자랐던 금액을 채운 셈이죠. 이제 드디어 도원 그룹 협력 프로젝트를 운행하게 됐으니 당분간은 위기를 벗어났다고 보면 돼요.”‘이수호만 잠자코 있다면...’도아영은 이렇게 생각했다.그녀는 오늘 이수호를 가
저녁 무렵, 도지호는 집에서 줄곧 도아영의 연락만 기다렸다.도원 그룹의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차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더니 도지호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너 뭐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집에 무슨 일 생긴 줄 알아? 당장 나랑 경찰서 가서 엄마 모셔와야지!”도지호가 명령 조로 쏘아붙이며 도아영의 손목을 붙잡고 경찰서로 갈 기세였다.이에 도아영이 그를 힘껏 내팽개쳤다.도지호는 못 믿겠다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너 미쳤어? 감히 날 밀쳐?”이 집에서 줄곧 거만을 떨던 도지호였기에 그녀가 매정하게 밀쳐버릴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이제 막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 주연우가 덥석 막아서더니 가볍게 도지호를 제압했다.“너도 미친 거야? 우리 집안 따까리 주제에! 확 잘리고 싶어?”도지호는 힘으로 안 되니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이에 도아영이 차분하게 말했다.“잘 들어. 넌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야. 회사에서도 아무런 직급이 없으니 주 비서는 제쳐두고 이 집안 가정부도 네 멋대로 자를 순 없어.”“이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 도지호야! 왜 이 집안 사람이 아닌 건데? 엄마가 잡혀간 틈에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꿈 깨! 미친X아!”그는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째려봤다.하지만 도아영은 시큰둥하게 쓴웃음만 지었다.“네가 우리 아빠 아들이야? 쥐뿔도 아닌 게 무슨 자리까지 빼앗는다고 그래? 너희 엄마 안용준이랑 바람피운 건 알지? 안용준은 내가 직접 처리했고 너희 엄만 너그럽게 용서했어. 그런데 여태껏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끊임없이 회사 자산에 손댔더라? 대체 언제까지 우리 집안 재산을 노릴 건데? 너희 두 모자 좀 너무하단 생각은 안 들어?”“개소리 치지 마! 우리 엄마가 어떻게 딴 남자랑 바람을 피워?”도지호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네가 아직 어리니 그동안 나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건 그냥 눈감아줄게. 하지만 너희 엄마는 우리 아빠랑 도원 그룹에 미안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어. 그건
사채업자들은 꽤 모아진 자산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드디어 도씨 저택을 떠났다.유정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채에 딱 한 번 손을 댔더니 아들과 함께 전 재산을 털릴 줄이야.한편 도아영은 도원 그룹에서 사채업자의 전화를 받았다.“아영 씨, 분부하신 일은 다 해결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현금화해서 이체해드리겠습니다.”“알겠어요.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별말씀을요. 서 대표님 분부대로 했을 뿐입니다.”도아영은 가볍게 웃었다. 이 모든 건 서현우의 공로이니까.그의 조언대로 유정연 모자의 전 재산을 손쉽게 챙겼고 이 또한 아빠 도석진이 받아야 할 몫이다.전화를 끊은 후 도아영은 주연우에게 분부했다.“이제 다 됐어요. 시작해볼까요?”“네, 알겠습니다.”주연우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도씨 저택에서 유정연 모자가 멍하니 넋 놓고 있을 때 문밖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랐고 도지호도 어안이 벙벙했다.‘오늘 무슨 날이야? 경찰차는 또 뭔데?’유정연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경찰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다.“신고받고 왔습니다. 유정연 씨, 당신은 금융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니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네? 뭐라고요? 금융범죄라니? 그게 대체 뭔 말인데요?”유정연은 몹시 당황했지만 경찰은 그녀의 변명 따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서로 가서 조사받으시죠! 당장 끌고 가!”“당신들 뭐야? 왜 우리 엄마를 잡아가는 건데?”도지호가 쫓아가려 했지만 경찰은 아예 무시한 채 유정연을 차에 태우고 떠나가 버렸다.오늘 발생한 모든 일이 괴이할 따름이었다.도지호는 곧바로 도아영에게 연락했다.평상시에는 그렇게 연락이 잘 되던 도아영인데 오늘은 도통 받지를 않았다.“전화 좀 받아!”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유정연이 경찰에 잡혀가니 그는 가장 먼저 도아영이 떠올랐다.그녀 말곤 엄마를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까.도원 그룹에서 도아영은 쉴 새 없이
“왜 그래요 갑자기? 무슨 일 있어요?”유정연은 사채에 손을 댄 일을 죽어도 도아영에게 고백할 순 없었다.도씨 일가의 가훈이 바로 사채에 손을 대지 않는 거니까.소문이라도 나면 체면이 바닥나고 도아영에게 쫓겨날지도 모른다.한편 도아영은 그녀가 사채를 빌린 걸 진작 알고 있어 입꼬리를 씩 올렸다.“지금 바로 연락해 계약서 보낼 테니까 거기 사인만 하면 효력이 발생할 거예요. 아줌마랑 지호가 우리 아빠 재산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사인만 하면 재무팀에 바로 연락해서 돈 보낼게요.”기세등등한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더 이상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알았어! 사인할게. 바로 할게!”도아영이 곧장 휴대폰으로 계약서를 보내왔다.유정연은 꼼꼼히 읽어볼 새도 없이 바로 사인했고 계좌에 거액이 들어왔지만 모든 걸 사채업자에게 털렸다. 2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다만 겁에 질린 유정연은 이 과정의 수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봐! 아직도 돈 있잖아! 바로 내놓으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질질 끌었어? 돈 될만한 액세서리들 당장 내놔!”유정연은 허겁지겁 위층에 올라가 보물처럼 아끼던 액세서리를 모조리 꺼냈다.이것들은 전부 도석진이 생전에 그녀에게 선물한 값비싼 액세서리들이다.수년간 아까워서 제대로 착용하지도 못했고 그저 도지호의 생일날 딱 한 번 치장하고 나갔었다.“여기 있어요. 이거면 되나요?”그녀는 액세서리를 사채업자에게 건넸다.“이년이 감히 내 앞에서 꼼수를 부려? 분명 더 있을 거야! 다 내놔! 이까짓 거로 누구 입에 풀칠하겠어?”앞장선 남자가 그녀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라서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숨긴 건 맞지만 이 사람들이 대체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 더는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마지못해 여태껏 보관한 모든 액세서리와 명품 가방, 옷들까지 꺼냈다.“이 새끼도 있잖아! 얘 것도 싹 다 꺼내!”도지호는 평상시에 손이 커서 가격도 안 보고 물건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