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엄마가 오늘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십몇 년 동안 이 빗자루를 썼는데, 오늘 이렇게 끊어졌어!”강소준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최군형 씨가 엄마한테 손찌검이라도 했어?”“아니! 엄마가 빗자루를 들고 겁주려고 했는데, 말하다가 욱해서 그만 정말 때려버렸어, 그런데 그만 끊어진 거야. ”강소아가 눈을 크게 떴다. 강소준이 문밖을 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누나, 저 사람 아이언맨, 뭐 그런 거 아니야?”강소아는 얼른 강소준을 쫓아버렸다. 그녀는 식탁 위의 볶음밥을 한참 쳐다보다가 문밖의 최군형을 바라보았다.최군형은 옆으로 돌아누운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불은 그의 배 쪽만 겨우 가리고있었다. 팔다리에 탄탄하게 잡힌 근육은 남성적인 매력을 물씬 풍겼다.강소아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순간 피어오른 생각들을 애써 억눌렀다.첫날은 이렇게 무사히 지나갔다. 다음 날 새벽, 강소아가 조용히 계단을 내려왔다.주말이면 가게는 항상 바빴다. 강우재와 소정애는 아침 일찍 나가 상품을 들여오고 오픈 전에 진열대를 정리했다.강소준은 밖에서 영어단어를 외우는 습관이 있었다. 지금도 아마 집 근처의 공원에서 영어단어를 외우고 있을 것이었다.강소아가 문밖에 나가니 최군형도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빈 침대를 쳐다보았다. 이때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강소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인 최군형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금방 운동을 마친 모양이었다. 각진 얼굴이 단단한 인상을 풍겼다. 몸에 달라붙은 티셔츠는 땀에 살짝 젖어 완벽한 역삼각형 몸매를 드러냈다.강소아의 시선은 그의 가슴 앞의 두 점에 고정됐다.“뭘 봐요?”최군형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강소아가 급히 고개를 돌리며 작게 대답했다.“아니에요. 잠은 잘 잤어요?”“네.”최군형이 수건으로 아무렇게나 얼굴을 닦았다.강소아는 최군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언제나 과묵하고 냉정했다.하지만 강소아는 어릴 적부터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왔고, 세상은 원
“월세? 우리 결혼하는 거 아니었어요? 남편한테도 월세를 받아요?”최군형이 강소아를 바라보며 눈썹을 까딱했다. 그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어렸다.“아...”강소아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한 듯 얼굴이 빨개져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최군형은 그녀를 더 놀리지 않고 한손으로 접이식 침대를 들어 한구석에 갖다 놓았다.강소아를 지나칠 때, 최군형은 그녀의 달아오른 귀 끝과 얼굴의 솜털을 똑똑히 보았다. 그녀의 상큼한 향기가 코를 파고들었다. 최군형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발을 멈추고 그녀에게 말했다.“침대... 고마워요.”강소아는 고개를 들어 최군형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깊은 눈빛 속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속을 깊이 파고들었다.강소아가 뭔가 생각난 듯 급히 말했다.“아, 맞다, 얘기할 게 있어서 왔어요! 혼인신고 말인데요...”최군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안에 들어서 물을 한 모금 크게 마셨다. 강소아가 입술을 깨물고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최군형 씨... 제가 당신을 우리 집에 들인 건 더 이상 구자영과 엮이기 싫어서에요.구자영이 그랬잖아요. 혼인신고를 안 하면 또 올 거라고. 물론 그냥 해본 말일수도 있지만, 구자영 성격이라면 정말 올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정말 혼인신고를 하자고요?”“아뇨!”강소아가 급히 부인했다. 최군형이 옅게 웃었다. 이윽고 강소아가 낮은 소리로 입을열었다.“그러니까, 어떻게 할 지 토론해 보자는 거죠. 며칠만 가게에 있어 줄 수 있어요? 구자영이 또 올까봐...”최군형은 그녀의 뜻을 알아챘다. 집 지켜주는 것처럼 가게도 지켜달라는 거였다.최군형은 작게 웃고는 가방에서 깨끗한 옷을 꺼내 화장실로 들어갔다. 곧이어 물소리가 들렸다. 강소아는 밖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문 앞을 맴돌고 있었다.‘정말 이상해! 몇 마디 더 하면 죽기라도 하는 거야?’최군형은 방금 일을 승낙하지 않았다. 어떤 일을 하든 제 맘대로 하는 것 같았다.강소아가 긴 숨을 내뱉었다. 이 일은
소정애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눈을 크게 뜨고 강소아를 쳐다보며 말했다.“이건 어떻게 한 거야? 정말 혼인신고라도 한 거야? 그건 아닌 거지?”“엄마, 무슨 소리예요! 누나는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어요!”강소준이 강소아 대신 해명했다.“맞아, 내가 점심에 돌아왔을 때도 공부하고 있었어.”강우재도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최군형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다들 진정하세요. 이건 가짜입니다.”“가짜?”모두 깜짝 놀랐다.“강소아 씨가 말하길, 구자영이 다시 찾아올까 봐 무섭다고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방법이 가장 확실한 것 같아요. 대책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그래서 만들었습니다.”최군형이 간결하게 설명했다.강소아는 놀라운 심정으로 증명서를 자세히 보았다. 아무런 흠집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게 진짜와 똑같았다.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최군형이 말하지 않는 이상은 가짜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었다.강우재와 소정애는 의문스러운 눈길로 서로를 쳐다보았다.결국 강소준이 모두가 궁금해하는 문제를 물었다.“수호신 형님, 이건 어떻게 한 거예요?”최군형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이는 유찬혁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변호사인 유찬혁의 인맥은 엄청나게 넓었다. 어떤 분야에서든 꼭 그가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중에는 문서 위조 전문가, 블랙 해커도 포함돼 있었다.하지만 그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최군형은 목청을 가다듬고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한 겁니다.”“군형 씨가요?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강소아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아... 네. 전에 문서 위조 전문가였습니다.”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강우재가 사레 들린 듯 기침을 해댔다.최군형이 문서 위조를 했었다고?그 모습을 상상한 강소아가 풉 하고 웃었다.이때 소정애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아이고! 그러니까, 문서 위조를 하다 잡혔다는 거야?”“아... 네.”최군형이 흠칫하고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막노동이라도 하지, 왜 그런 일을 해!”“
최군형이 패싸움 같은 일을 하다 잡혀 감옥살이를 한 줄 알았는데, 문서 위조 때문이었다니. 몸만 쓸 줄 아는 놈인 줄 알았지 이런 기술이 있을 줄은 몰랐다.소정애가 살짝 웃었다. 최군형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걸 안 뒤로 그에게서 후광이 비치는 줄 알았다.“군형아, 그럼 넌 손재주 있는 전과자인 거네! 그거 때문에 감옥살이한 거라면 나도 안심할 수 있어. 패싸움보단 백배 낫잖아. 군형아, 잘못을 저질렀어도 제때 고친다면 괜찮아. 이렇게 진짜 같은 증명서를 만들었다는 건 네 실력이 상당하다는 뜻이잖아! 이 기술을 좋은 쪽에 쓰면 사회에 힘을 보탤 수 있을 거야.”“맞아! 내 생각도 그래! 군형아, 혹시 위조지폐는 만들 줄 알아?”“쿨럭쿨럭...”최군형이 밥을 입에 문 채 어쩔 바를 몰라 했다.강소준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강소아는 엄마, 아빠에게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준 다음 일어나 물 한 잔을 따라 최군형에게 건넸다.최군형은 힘겹게 입안의 음식물을 삼켰다.위조지폐를 만들 줄은 몰랐지만 그릴 줄은 알았다. 그의 외할머니가 그린 반딧불이 그림 한 폭은 400억 원에 낙찰됐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외할머니의 그림 실력을 쏙 빼닮았다.강소아가 증명서를 서랍 안에 집어넣으며 웃는 얼굴로 최군형에게 말했다.“마침 혼인관계증명서가 필요했는데, 너무 잘됐어요. 구자영이 또 올까 봐 오늘 하루 종일 걱정했거든요.”“내가 있는 한 그럴 엄두는 못 낼 거예요.”최군형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강소아가 멍해졌다. 심장이 왜 마구 뛰는지 알 수 없었다.......저녁식사가 끝난 후 그녀는 홀로 집을 나섰다. 여덟 시가 조금 지난 터라 식사 후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그녀는 멀지 않은 해변으로 향했다. 여름의 밤바다는 언제 봐도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어두운 해수면을, 희미한 지평선을 보며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그녀는 사람 적은 곳을 찾아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소아는 그를 한참 보다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복수할 방법이 있긴 있어요? 구성 그룹은 그 세력이 어마어마하잖아요. 저희 같은 사람을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거예요. 다 저 때문이에요. 구성 그룹의 상품에 문제가 있다는 걸 폭로하면 안 됐어요. 그들을 거부하면 더더욱 안 됐고요... 하, 결국 손해 보는 건 나잖아요. 제가 찾아갔던 상호들은 아직도 구성 그룹의 상품을 팔고 있잖아요!”강소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최군형이 담담하게 말했다.“네, 뭐가 잘못된 건지 알면 된 거예요.”강소아는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말이 없었다. 최군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구성 그룹처럼 비도덕적인 기업은 시장의 질서를 어지럽힐 뿐이에요. 정의를 구현한 건 잘했어요. 방법이 조금 잘못됐을 뿐이에요.”강소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과묵한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많이 말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망설이다 물었다.“그럼... 방법이 있어요?”“아뇨.”최군형이 딱 잘라 말했다. 방법이 있어도 얘기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강소아도 그에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는데, 그라고 모든 걸 줄줄 불어버릴 수는 없었다.“아...”강소아가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두 사람 다 어떤 말을 했으면 좋을지 몰랐다.최군형은 어쩔 줄 몰라 하는 강소아의 모습을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눈썹을 까딱거리고는 작게 말했다.“좋은 방법이 생각난다면 함께 노력해 봐요.”“네, 좋아요!”강소아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먼 곳의 불빛이 그녀의 옆모습을 은은하게 비췄다. 그녀 뒤에 펼쳐진 바다는 빛나는 별들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냈다.최군형은 어릴 적부터 매력적인 여자들은 많이 보았지만, 강소아 같이 눈을 뗄 수 없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연예계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출세할 생각으로 최군형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부모님의 보호 아래 단순하게 자라온 최군형은 그들의 속셈을 전혀 몰랐다. 하기에 걸핏하면 사진이 찍혀 실시간 검색
강소아는 진열대 위의 과자들을 정리하고는 엄마를 보며 말했다.“두 분 마음가짐이 참 좋아요!”“몇 마디 말일 뿐이지, 재산은 안 건드렸으니 당연히 상관없지! 재산을 건드린다면 네 엄만 화가 나 쓰러질걸?”“강우재!”소정애는 옆의 물 한 병을 집어던졌다. 하마터면 강우재의 머리를 맞출 뻔했다. 그녀는 밖에서 물건을 나르는 최군형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이건 진심인데, 저 아이가 오고 나서 우리 집이 아주 좋아졌어!”“소준이가 그랬잖아, 소아가 우리에게 수호신을 찾아줬다고.”“이 수호신 얼마나 더 있을 수 있는데? 집에 다른 사람은 있대?”“뭐 하려고 그래?”“어떤 사람인지는 알아야지! 당신 이 일은 상관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기필코 알아내고 말 거야!”강소아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엄마를 보며 작게 웃었다.강우재와 소정애는 정리를 마치고 밥을 먹으러 집으로 갔다. 강소아는 한가했기에 가게에 남아있었다.최군형은 문가의 그늘진 곳에 앉아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이때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음료수 두 잔을 내밀었다.“여기요!”최군형이 고개를 들어 그 반짝이는 눈을 쳐다봤다.“망고 스무디랑 타로 밀크티에요. 어떤 게 좋아요?”“아뇨, 전...”“줄 때 먹어요! 이거 차가운 거예요. 엄청 시원해요!”강소아가 망고 스무디를 최군형에게 밀어주었다. 최군형이 인상을 쓰며 한 모금 마셨다. 그는 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강소아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왜요, 맛없어요?”“...맛있어요.”“그럼 빨리 마셔요!”강소아가 웃으며 타로 밀크티를 들이켰다. 그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퍼졌다.“이런 거 많이 마시면 살쪄요.”최군형이 덤덤하게 말했다. 강소아가 쿨럭거리며 최군형을 흘겨보았다.“내가 살쪘단 뜻이에요?”“마른 편이죠.”최군형이 강소아를 훑어보고는 간결하게 답했다. 강소아는 확실히 마른 편이었다. 몸통은 종잇장같이 얇았고, 아무런 곡선도 보아낼 수 없었다.물론 그녀의 패션도 한몫했다. 그녀는
강소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음속 무언가가 욱하고 올라왔다. 그녀가 입을 떼려는데 최군형이 먼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그녀는 깜짝 놀랐다.최군형의 넓은 등판이 그녀의 시야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그녀는 이제 구자영의 악독한 웃음도, 깡패들의 사악한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최군형은 마치 커다란 벽처럼 강소아를 이 세계의 모든 추악함으로부터 차단했다.강소아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녀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어렸다.“할 말 있으면 저한테 하시죠.”최군형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구자영이 팔짱을 끼고 그를 비웃었다.“너한테 하라고? 네가 뭔데! 신혼 생활이 좋긴 하나 보네, 이렇게 감싸고 도는 걸 보니까! 저 X이 침대 위에서 어떤 모습이기에 이렇게 푹 빠져버린 거야?”“구자영, 말 똑바로 해! 너...”강소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군형이 다시 그녀를 가로막았다. 강소아는 굴하지 않고 다른 쪽으로 머리를 내밀고 말했다.“구자영! 너...”“저리 가요!”최군형이 다시 그녀를 가로막았다. 강소아 혼자서 이 사람들을 상대하게 둬서는 안 됐다.구자영은 손뼉을 치며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비웃은 후 뒤쪽을 향해 눈치를 줬다. 이내 누군가가 봉고차 안에서 음료 몇 박스를 꺼냈다.구자영이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강소아, 좋은 소식이 있어. 구성 그룹의 ‘장미꽃 이슬’이 리뉴얼된 포장으로 새로 출시됐어! 하하하... 실망한 거 아니지? 네가 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였어도 이 돈은 우리가 계속 벌 거야! 네가 찾아갔던 상호 중에 아직 네 편인 상호가 몇이나 돼?”강소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녀 앞의 벽이 너무도 튼튼한 탓에 그녀는 욕할 기회조차 없었다.구자영은 신나 하며 계약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우정슈퍼는 앞으로 20년 동안 구성 그룹의 음료수만을 판매한다.“강소아, 이건 네 아빠, 엄마의 글씨인데, 모른 척 하지는 않겠지? 이 물건들은 특별히 직접 가져왔어. 사흘 안에 모두 팔아버리도록 해!”“양심 없는 년! 이건 노예계약이나
강소아는 순간 멍해졌다. 최군형의 눈빛에는 웃음기가 어려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다는 듯한 눈빛이었다.그 순간 강소아는 안전감과 함께 엄청난 용기를 얻었다. 최군형만 곁에 있으면 아무리 험한 가시밭길이라도 걸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구자영이 고함을 질렀다.“최군형! 네가 뭔데? 감히 이년을 돕고 날 적으로 돌려? 결과가 어떨지는 생각해 봤어?”“결과? 전 가방끈이 짧아 그 글자를 어떻게 쓰는지 모르는데, 아가씨가 가르쳐 주시겠어요?”“너...”“그리고! 다시 한번 강소아 씨를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저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최군형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점점 구자영에게 다가갔다.어릴 적부터 금이야 옥이야 자라온 구자영은 이런 협박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깡패들더러 가게를 부수게 했다.깡패들은 몽둥이 하나씩을 든 채 그녀의 명령을 따랐다.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가게 안으로 떠민 후 밖에 우뚝 섰다. 강소아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는데, 남자의 고함이 들렸다.“감히?!”깡패들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차가운 얼굴을 한 최군형은 엄청난 카리스마를 내뿜고 있었다. 그의 눈빛 하나에 누구도 가까이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치 저승에서 걸어 나온 염라대왕 같았다.구자영도 무서웠다. 이 남자의 어떤 점이 무서운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앞에 서면 말 못 할 압박감이 생겨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다. 그녀가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너희... 너희 다 뭐 해?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 사람도 상대해 내지 못한단 말이야? 당장 이 가게를 부숴버려!”최군형은 굳어진 얼굴과 날카로운 표정으로 매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깡패들은 모두 우물쭈물하며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때 맨 앞에 선 사람이 몽둥이를 들고 소리를 지르며 최군형을 향해 돌진했다.최군형은 날쌔게 피한 뒤 한 손으로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
소피아는 약속한 시간에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창가에 앉아 있는 낚시 모자를 쓴 중년 여성을 발견했다.소피아는 조용히 걸어가 밝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혹시... 허운주 선생님이신가요?”허운주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소피아는 직원에게 뜨거운 우유 한 잔을 주문하고 허운주 앞에 놓인 진한 커피를 치우며 부드럽게 말했다.“허 선생님, 이 나이에 이렇게 진한 커피는 드시면 안 돼요. 건강을 꼭 챙기셔야죠.”“고맙습니다...”허운주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절 찾아오신 이유가 뭘까요?”허운주는 천천히 눈을 들어 소피아를 바라봤다.소문에 따르면, 소피아는 현재 배현진의 연인이며 이혼 후에 아이를 키우면서도 배현진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사람이었다.허운주는 소피아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직감했고 소피아가 도움을 준다면 송윤지 같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쉬운 일이라고 확신했다.“제가...”허운주는 입술을 핥으며 머뭇거렸다.“어떻게 말씀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소피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허 선생님은 현진 씨의 선생님이시잖아요. 그 특별한 인연은 현진 씨도 평생 기억할 거고 저 또한 마찬가지예요. 저희는 모두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그러니 무슨 일이든 편하게 말씀하세요.”“저는 국제 유치원에서 어쩔 수 없이 사직하게 됐어요.”허운주는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깊이 찡그렸다.소피아는 놀란 듯했지만, 최근 일어난 상황을 대략 알고는 있었다. 우수 교사 선발에서 허운주가 송윤지에게 패했다는 소식은 소피아에게도 전해졌다. 자존심 강한 허운주로서는 그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소피라는 눈을 굴리며 허운주를 어떻게 이용할지 계획하고 있었다.“허 선생님,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소피아는 부드럽게 허운주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저를 딸이라고 생각하시고 속상한 일 있으면 다 털어놓으세요. 제가 도울 수 있
회의실은 단숨에 고요 속에 잠겼다. 강렬한 존재감의 인물이 문턱을 넘어서자, 방 안은 서늘하면서도 압도적인 기운으로 가득 찼다.원장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단숨에 그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왜 이제야 온 거야?”임지강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러나 그의 시선이 허운주에게 닿는 순간, 그 미소는 천천히 사라지고 대신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 자리 잡았다.“으흠!”원장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높였다.“오늘 이 자리에서는 투표 결과를 발표하는 것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원장은 한 장의 서류를 꺼내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유치원의 공식 도장과 함께 임지강의 힘찬 서명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임 대표님께서 우리 유치원에 10억을 투자해 주셨고 국제 유치원의 최대 주주가 되셨습니다. 유아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초심을 잃지 않고 임 대표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송윤지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번지자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입가에 번진 미소는 감추기 어려웠다.임지강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제가 이 유치원의 주주가 된 이상, 앞으로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 국제 유치원의 이익을 위해서일 것입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허운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래서 오늘, 교사 팀을 정비하려고 합니다.”허운주는 본능적으로 두 걸음 물러나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이곳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임지강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자신의 가치관조차 바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겠습니까?”허운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여기 있는 사람 중
원장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허 선생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오늘 표 집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투명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조작이라니, 그 말은 제가 개입했다는 뜻인가요?”“원장님, 제가 어떻게 감히 원장님을 의심하겠습니까?”허운주는 억지 미소를 띠며 비꼬듯 말했다.“하지만 표 차이가 이렇게 크게 나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원장님께서 관여하지 않으셨더라도, 누군가 뒤에서 무슨 일을 꾸몄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허 선생님...”원장은 화나 치밀어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막무가내인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허 선생님, 하신 말씀에 대해 책임지셔야 합니다.”송윤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윤지는 허운주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저는 단 한 번도 허 선생님께 폐를 끼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우수 교사 선발 역시 모든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정말 무슨 일을 꾸몄다면, 이렇게 공개적으로 표를 집계했겠습니까?”허운주는 송윤지를 노려보며 속으로 분노를 억눌렀다.평소 조용하고 소극적인 송윤지를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의 송윤지는 논리 정연한 주장으로 상대의 도발에도 굴하지 않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송윤지를 새롭게 보게 되었고 문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임지강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임지강은 회의실 밖에서 모든 상황을 눈여겨보고 있었다.특히 송윤지의 표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임지강은 마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곁에 있던 부하 직원조차 그의 변화를 놀라워하며 말했다.“송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 송윤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저 예전에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너무 조심스러워 본래의 자신을 숨겼을 뿐이었다.“임 대표님, 허 선생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지난번에 내가 해외 시장을 축소하라고 했지만, 당신 아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임수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국 문제는 그 여자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거야... 그 여자는 현진이를 부추겨 또 다른 일을 꾸밀 거고 현진이는 분명히 그 여자의 말을 들을 거야.”“그러니까 그들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임수정은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윤아야, 네가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회사들을 꽉 잡고 있어야 해! 너 혼자 힘들면 군성이랑 의논해도 되고 군형이나 소유의 도움을 받아도 돼. 네가 동의하지 않는 한, 네 오빠는 너한테서 단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어. 이해했지?”“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꼭 잡았다.“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이 모든 재산은 우리 조상들이 쌓아온 거야. 절대 우리 세대에서 무너져선 안 된다!”“네, 저 이해했어요.”배윤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가 하루빨리 제정신을 차려서 우리가 예전처럼 가족으로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임수정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기침하며 숨을 고르는 임수정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소피아가 복도 모퉁이에 숨어 임수정의 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벽을 짚고 있던 소피아는 주먹을 꽉 쥐었고 마치 벽을 뚫을 듯 힘을 주고 있었다.방 안에서 나눈 대화는 모두 소피아의 귀에 생생히 들렸다.오늘 소피아가 임수정을 찾아온 건, 회사 본사에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은행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지금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재산 전부가 이 어린 소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여보세요, 소피아!”그때, 배현진이 전화를 걸어왔다.“지금 엄마 집에 있어? 나 일이 아직 안 끝나서 조금 있다가 가려고. 엄마한테 전해줘.”“그럴 필요 없어.”소피아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임수정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배경원은 막 씻은 딸기를 가져왔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딸기의 끝부분을 잘라 임수정의 입에 넣어주었다.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두 사람의 애정과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그들의 관계는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배윤아는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엄마를 위해 영양제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새로 그린 그림도 품에 안고 있었다.“엄마, 아빠, 저랑 군성이가 이번에 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만화를 하나 출간하려고 해요. 내용은 한 부부가 젊었을 때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거예요... 사실 주인공 부부가 바로 엄마, 아빠예요! 보세요, 이렇게 그렸는데 괜찮죠?”임수정과 배경원은 딸이 그린 그림을 보며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부부는 원래 대부분의 기대를 아들에게 걸고 있었다. 이는 남녀 차별 때문이 아니라 배윤아의 성격이 어릴 적부터 세상일에 무심하고 경쟁을 피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계승자로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딸이 오히려 아들보다 더 믿음직스럽다.“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잡으며 눈빛에 깊은 의미를 담아 말했다.“엄마가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게 있어.”“뭔데요?”배윤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임수정은 베개 밑에서 갈색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핵심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이것뿐만 아니라, 본사의 도장도 있어.”배경원은 도장까지 꺼내 배윤아에게 건넸다. 배윤아는 깜짝 놀라 귀중한 물건들을 손에 들고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아빠, 엄마, 이건 도대체...”“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었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아. 요양원에 머무는 동안은 회사로 돌아가 직접 관리할 수도 없을 거야.”배경원은 평소 장난스러웠던 모습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배윤아를 바라보았다.“윤아야, 엄마, 아빠는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맡기기로 했다. 네가 책임을 져야 해.”배윤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