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결혼한 이후, 두 사람은 이렇게 가까웠던 적이 없었다.“욱아, 제발 부탁이야...”조순영이 떨리는 손으로 권욱의 옷깃을 힘겹게 움켜쥐었다.“나 온유를 잃을 순 없어. 어떻게든 살려야 해. 당신이 우리 결혼 생활에 불만이 많았던 것도,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준 것도 다 알아. 하지만 만약 당신이 남동생을 찾아 적합 테스트를 받을 수 있다면 우리 온유에게도 다시 희망이 생기는 거잖아, 안 그래? 단 한 줄기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어. 온유의 엄마로서 부탁할게, 제발 다시 한번만 생각해줘.”조순영의 목소리는 울음에 잠겨 끊겼고 권욱은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권씨 가문이라면 사람 하나 찾는 건 문제도 아니잖아. 필요하다면 우리 아버지도 힘을 보태실 거야.”“순영아.”권욱은 한참을 침묵하다 고개를 숙여 조순영의 눈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 동생... 남동생 아니야.”“뭐라고?”“그 당시 태어난 아이는 남동생이 아니었어. 여자아이였다고. 그러니까, 온유에겐 고모가 있는 셈이지!”...최근, 최군형은 꽤 우울한 상태였다.이제 막 한 살이 되는 딸을 품에 안아본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어린 가원이가 밤새 울며 젖을 찾고 기저귀를 갈 때마다 최군형은 직접 챙기려 애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역할은 집안의 보모들로 자연스레 넘어갔다.가원이를 돌보기 위해 강서연은 최씨 가문의 대저택에 다섯, 여섯 명의 보모를 배치했고 육경섭과 임우정도 육씨 가문의 경험 많은 도우미들을 추가로 보냈다.한 아이를 돌보는 데 열 명이 넘는 사람이 매달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수시로 찾아와 손녀를 챙겼다.최군형뿐만 아니라 엄마인 강소아 역시 육아라는 짐이 한결 덜어진 듯 느껴졌다.게다가 강서연과 최연준은 손녀를 유난히도 아꼈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가원이를 여주 별장으로 데리고 갔다.부모님 댁을 찾은 최군형은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풍경에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최연준이 호랑이 옷을 입고 바닥에 엎드려
권욱과 조순영은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 한때 그렇게 활기차고 밝던 딸이 지금처럼 힘없이 변해버린 모습을 보며 두 사람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에 휩싸였다.의사가 최신 검사 결과지를 들고 다가왔다.조순영은 이미 고개를 들 힘조차 없었고 권욱은 차마 눈을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권욱은 결국 용기를 내어 한 마디 물었다.“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의사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권욱은 입술을 꼭 다물고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몇 달 동안, 그들은 연락 가능한 모든 친척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권욱과 조순영뿐만 아니라 권씨 가문과 조씨 가문의 모든 가족이 적합성 검사를 받았지만, 그 누구의 결과도 일치하지 않았다.최근 검사한 사람은 권씨 가문의 먼 친척이었다.권욱은 고개를 벽에 기대며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고 조순영은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의사는 조심스레 한숨을 쉬며 위로했다.“사실 지금으로서는... 따님의 병세가 꽤 잘 억제되고 있습니다. 골수은행에서 계속 찾을 수 있으니 조금만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아이를 하나 더 낳는다면요?” 권욱은 갑작스레 고개를 들며 말했다.“신생아의 탯줄혈액이 도움이 된다고 들었습니다만...”“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실제로 성공 사례도 있습니다.” 의사는 사실대로 대답했다.“하지만 임신 과정이 너무 길어요. 두 분이 먼저 몸을 준비하는 데만 3개월가량 걸릴 테고, 임신에 성공한다 해도 열 달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다른 변수가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그렇다고 제 딸이 죽어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권욱의 외침은 마치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이처럼 절망에 빠진 목소리였다.바로 그때, 조순영의 눈이 반짝였다.“권욱, 우리에게 한 사람이 더 있잖아...”“누군데요?” 의사가 의아한 듯 물었다.“가족 중에 아직 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있어요!” 조순영은 구명줄을 붙잡은 듯 외쳤다.하지만 조순영이 입을 열려는 찰나, 권욱이 조순영의 손을 붙잡았다.
최군형은 최연준이 젊었을 적 강서연에게 자주 난감한 질문을 받았다고 들려주곤 했다. 그리고 최군형이 결혼한 후에도 강소아는 그런 질문을 자주 한다고 했다.이제는 차례가 최지용에게까지 돌아온 것이다.마치 최씨 가문의 남자들이라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처럼 보였다.“아니야, 아니야! 나는... 나는 절대 영미랑...”최지용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변명했지만, 백인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백인서는 소고기 국수를 유난히 맛있게 먹으며 비로소 과거를 내려놓고 새롭게 걸음을 뗄 수 있었다....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영미와 정대명은 모두 마땅한 벌을 받았고 영미는 가문의 수치가 되었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완전히 버림받았다.표아정은 정대명이 그날 연회장에서 했던 헛소리를 신경 쓰지 않았지만, 세간의 입은 날카로웠다. 이 소문은 이미 사교계 전반에 퍼졌다.하지만 표아정의 성격상,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수록 오히려 그들에게 맞서고자 했다.표아정은 백인서를 데리고 사교 모임에 자주 나섰고, 심지어 고스톱을 치러 갈 때도 그를 데려갔다. 매번 외출할 때마다 백인서를 정성스럽게 치장해 주기도 했다.“내 며느리가 되려면 절대 표씨 가문 얼굴에 먹칠할 수 없어!”표아정은 백인서의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어봐. 표씨 가문의 품격을 보여줘야지!”한쪽에서 최연서는 체념한 표정으로 입을 삐쭉 내밀며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며느리는 최씨 가문 사람인데... 최씨 가문이라고! 하...”최지용과 백인서는 눈을 마주친 뒤 살며시 웃음을 터뜨렸다.정승우는 여전히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했다.산골에서 올라온 이 아이들은 이 소중한 기회를 누구보다도 아꼈고 있는 힘껏 공부에 매달렸다. 그들 중엔 타고난 재능으로 또래를 훨씬 앞서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런 아이들은 여러 가문에게 발탁되어 집중적으로 키워지기도 했다.백인서와의 인연 덕분에 최군형과 강소아는 일찌
백인서는 미소를 머금은 채 한쪽으로 걸음을 옮겨 전화를 받았다.정승우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돌아온 백인서는 최지용이 만든 소고기 국수를 맛있게 먹었다.“정승우한테서 온 전화야? 뭐라고 하던데?”백인서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최지용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요즘 남자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싶어요.”“음...”최지용은 진지하게 잠시 생각하면서 대답했다.“내가 그 나이 땐 하루 종일 공부에만 매달렸던 기억이 나.”“진짜요?”“그럼. 우리 집안은 아이들 교육에 꽤 엄격했거든. 우리 부모님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는데. 군형이와 군성이는 나보다 훨씬 힘들었어!”특히 최군형은 줄곧 최씨 가문을 이어받을 후계자로 키워졌고 집안 어른들의 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조심스럽게 살아야 했고 작은 실수도 범해선 안 됐다.그런 높은 압박 속에서 자란 최군형은 후계자로서 아주 훌륭하게 자랐지만 동시에 어린 시절의 즐거움도 빼앗겼다.“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지.”최지용은 담담하게 말했다.“인생이란 건 모든 게 다 뜻대로 될 수 없는 법이잖아. 그래도 하늘이 최씨 집안 아이들에게는 정말 많은 걸 주었어. 우리가 스스로 길을 잘못 들지 않는 한, 우리 삶은 망가질 일이 없을 거야. 왜냐하면 우리가 서 있는 출발선 자체가 이미 많은 사람이 평생 닿지 못할 종착점이니까.”“정말 만족해하시네요.”백인서가 웃으며 말했다.“그저 어린 남자아이들의 생각이 궁금했을 뿐인데, 벌써 이런 깊은 이야기로 넘어가셨네요.”“아, 그 이야기 계속하자!”최지용도 웃으며 말했다.“정승우가 대체 뭐라고 했어?”“별건 아니에요. 그냥, 왜 요즘 온유가 자기를 안 챙겨주는지 물어보더라고요.”최지용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솔직히, 이번에 정승우가 없었더라면 온유는 정말 큰일 났을 거야.”백인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그러니 정승우는 온유의 구세주인 셈이네.”“아이들의 마음은
백인서의 가슴이 움츠러들고 차가운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그 후 며칠 동안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최지용은 백인서가 잠든 사이에 조용히 집에 들렀고 백인서가 깨어 있는 동안엔 언제나 떠나 있었다. 백인서의 세끼는 항상 정성스레 만들어진 요리로 채워졌고 집은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최지용은 백인서를 묵묵히 돌보았을 뿐,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최지용이 백인서를 위해 직접 소고기 국수를 만들었다. 얇게 저민 소고기 조각은 적당한 불에 부드럽게 익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백인서의 눈물이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 마치 멈출 수 없는 홍수가 방파제를 삼키듯, 단단히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순식간에 무너졌다.백인서는 맹렬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최지용의 뒷모습이었다.최지용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목이 꽉 막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그때, 최지용은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몸을 돌려 백인서와 눈이 마주친 순간, 최지용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백인서는 울면서 최지용의 품으로 달려들었다.“괜찮아, 인서야.”최지용은 백인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다 지나간 일이야. 앞으로는 내가 곁에 있을 테니까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백인서는 울음을 터뜨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최지용은 백인서가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백인서가 평소에 얼마나 많은 것을 억누르고 있었는지 알기에 지금은 터뜨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다.백인서가 울다 지치자, 최지용은 백인서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고 거실로 돌아왔다. 둘은 부드러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백인서는 마치 고양이처럼 그의 품에 몸을 기대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백인서는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할 용기를 냈다.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백인서는 고개를 떨구었다. 방 안은 조용했고 백인서는 자신이 두근대는 심장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그럼...”최지용은 백인서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권욱과 조순영은 숨을 삼키며 얼어붙었다. 의사의 깊게 굳은 표정이 두 사람의 마음에 불길한 예감을 드리웠다.“장 박사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장 박사는 권온유의 건강검진 결과를 두 사람에게 건넸다.“아이가 처음 돌아왔을 때 몸에 난 상처를 확인하며 전신 정밀 검사를 진행했는데, 혈액에서 이상이 발견됐습니다...”권욱과 조순영은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떼지 않고 쳐다보았다.“쉽게 말씀드리면, 백혈병입니다.”“뭐라고요?”조순영은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숨이 막혔다. 다리가 풀려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권욱이 간신히 조순영을 부축했지만, 그의 얼굴 또한 충격으로 빛을 잃고 멍하니 굳어 있었다. 겨우 침착한 척하며 물었다.“확실합니까?”권욱은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장 박사님, 정말 우리 딸의 검사 결과가 맞습니까?”“저도 잘못된 결과이길 바랐습니다.”장 박사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그래서 처음 결과를 확인한 후, 직접 다시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아이는 백혈병 초기 단계이며, 다행히 치료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부탁드립니다. 반드시 우리 딸을 살려주세요!”조순영은 흐느끼며 말했다.“저에게는 딸 하나뿐이에요...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제 모든 것을 다해 키운 아이입니다. 아이는 제 전부예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저도 살고 싶지 않아요...”“진정해!”권욱이 낮은 목소리로 조순영을 다독였다.“의사 선생님도 말씀하셨잖아. 온유는 치료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권 대표님, 권 사모님,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두 분이 침착하셔야 합니다.”장 박사는 두 사람을 차분히 바라보며 말했다.“저희는 곧 상세한 치료 계획을 수립할 것입니다. 다만, 치료 과정에서 사용되는 약물이나 주사제가 아이의 체질에 따라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제 딸을 반드시 살려주세요!”권욱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조순영은 고개를
강소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표아정을 살폈다.“숙모, 괜찮으세요?”“괜찮아.”표아정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창백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숄을 단정히 여몄다.“그런데 아까 그 아이는...”표아정의 눈빛이 번쩍였다. 표아정의 말에 모두가 머리를 돌려 정승우를 바라보았다. 정승우의 이마에서는 아직도 붉은 피가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그때 권온유가 안에서 급히 뛰쳐나오더니, 정승우의 피 흐르는 모습을 보고는 와아 소리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곧 정승우를 꼭 끌어안았다.“안 아파, 정말 안 아파!”정승우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건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특히 품 안에 보들보들하고 사랑스러운 작은 공주님이 있으니 괜히 어색하고 쑥스러워졌다하지만 속으로는 누나 걱정이 떠나지 않았고 머리가 지끈거려 불편하기도 했다. 아까 맞은 충격이 결코 가볍지 않았던 것 같았다.“우선 정승우를 병원으로 데려갑시다!”조순철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내 차로 가요!”“최씨 연합 병원으로 가면 됩니다.”최군형이 덧붙였다.“제가 이미 의사에게 연락했으니, 도착하면 상처를 치료하고 정밀 검사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저도 갈래요!”권온유는 얼굴이 엉망이 되어 울면서 정승우를 붙잡고 흔들었다.“오빠, 오빠! 제가 병원까지 같이 갈 거니까 무서워하지 말아요!”정승우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들어 온유의 땋은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지만, 중간에서 망설이며 멈췄다.지금은 그때의 낡은 공장도 교외의 길가도 아니었다. 온유는 다시 공주님으로 돌아왔고 자기 손은 늘 더럽고 거칠었다. 그런 손으로 온유의 머리를 만질 순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정승우는 연합 병원으로 이송되었다.시장님의 차로 병원에 도착한 데다 최군형이 미리 부탁해 둔 덕분에 간단한 상처지만 최고의 의사가 직접 치료에 나섰다.붕대를 감은 뒤, 정승우는 병실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VIP 병실은 정승우에게 마치
정승우는 몸을 피하지 못했고 머리에 무거운 충격이 가해졌다.정대명이 다시 손을 올리려는 순간, 경찰이 제때 그를 제압하며 상황은 순식간에 진정되었다.그러나 정승우의 이마에는 수갑이 남긴 상처가 선명히 드러났고 그 틈에서 피가 서서히 흘러내렸다. 정승우는 손으로 상처를 감쌌지만, 붉은 피는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흘러내렸다.“정승우!”백인서는 놀란 목소리로 외치며 황급히 달려가 정승우의 상처를 살폈다.“이 나쁜 자식! 네가 아버지를 감히 저주해?”정대명은 경찰에 의해 제압당해 몸부림칠 수 없자 대신 고래고래 소리쳤다.“백인서! 이 빌어먹을 년... 네가 내 아들을 이렇게 만들어 놨어!”“감히 아버지를 저주하다니! 지옥 가서 천벌 받을 거야?”“이 나쁜 놈아! 네 몸엔 내 피가 흐르고 있어! 결국 넌 나처럼 될 거다, 쓰레기 같은 놈아!”“정대명 씨! 헛소리 그만하세요!”정호가 엄격한 목소리로 꾸짖었다.“아니요! 아니요!”정대명은 막무가내로 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발로 차고 몸부림쳤다.“경찰이 아무리 강해도 내가 내 아들을 훈계하는 걸 막을 순 없지! 내가 아들만 훈계하겠냐? 저 계집애도 훈계해야지!”백인서는 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정대명을 응시했다.정대명의 잔혹한 언행은 백인서를 순식간에 어두운 과거로 끌어당겼다.폭풍우가 휘몰아치던 그날 밤, 백인서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깊은 공포가 되살아나는 듯했다.온몸이 떨리며 심장은 쿵쿵거렸고 귓가에는 정대명의 독설이 메아리쳤다.“젠장, 이 빌어먹을 년이. 집에 있을 때도 착하게 굴지 않았어... 그때도 내가 올라타면 얼마나 반항했는지!”그 한마디는 깊은 바닷속에서 폭발한 수류탄처럼 연회장의 공기를 산산이 갈라놓았다. 그 소리는 연회장의 모든 혼란을 멈추게 했다.모두가 알고 있었다. 백인서는 최씨 가문의 미래 며느리라는 사실을.그런데 정대명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최지용은 순간 멍하니 굳어졌다. 최지용은 본능적으로 백인서를 바라보았다. 백인서의 청초한 얼굴은 깊은 먹구름
“여기는 시장님의 연회 자리입니다. 우리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되겠죠.”정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건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곳에 인신매매범이 있다면, 반드시 체포해야겠지요!”“아니에요, 저는 인신매매범이 아니에요!”영미가 격렬히 몸부림치며 외쳤다.“아이를 납치한 건 제가 아니에요! 그건 정대명이 했어요, 모든 게 그의 짓이라고요! 제발 믿어주세요!”하지만 영미의 몸부림은 허공에 흩어졌고 그녀의 비명은 점점 희미해지다 이내 호텔 밖으로 사라졌다.정대명은 이 광경을 보며 무릎이 풀리고 말았다.지금 정대명은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에게 붙잡힌 상태였다. 곧 자신도 영미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정대명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며 간절히 애원했다.“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정말 몰랐어요, 그 여자가 이런 사람이었는지! 저는 그냥 돈 받고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에요... 이런 일인지 몰랐다고요!”“그 말은 경찰서에 가서 하시죠.”정호가 손짓하자, 사람들이 정대명을 데리고 가려 했다.그 순간, 정대명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있던 정승우를 향했다.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승우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고 칼날처럼 날카로웠다.그 눈빛에는 끝없는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고 아버지가 아닌 원수를 바라보는 듯했다.그러나 정승우는 정대명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혈육이었다.정대명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초조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정승우의 그 적대적인 눈빛은 그의 내면 깊숙한 곳을 찔러버렸다. 정대명은 자신이 정승우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분통이 터졌다.몇 대 때리긴 했지만, 아버지한테 감히 원한을 품다니?정대명의 상처받은 자존심과 자격지심이 뒤엉키며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자리 잡았다. 죽더라도 누군가를 끌고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은 다름 아닌 그의 친아들이었다.정대명은 눈빛을 돌리며 표정을 바꾸더니 큰 소리로 울며 말했다.“좋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