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 구치소.흐린 회색빛 하늘 아래, 거대한 건물은 음산하고 차가운 기운을 뿜어냈다. 건물을 감싼 철조망은 보는 이를 서늘하게 했다.강소아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짐을 진 듯 한 걸음 한 걸음이 힘들었다.“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돼.”강소아의 어깨를 감싸안은 최군형은 강소아의 불안감을 느끼고는 부드럽게 말했다.“굳이 육연우 같은 사람을...”“그래도 한 번은 만나야죠.”강소아는 고개를 숙였다. 함께했던 수많은 시간과 추억을 하루아침에 내던질 수는 없었다.지금도 강소아는 육연우가 그저 마음이 병든 것이라 믿고 싶었다. 정말로 악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에 있는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리고 한층 더 단단한 걸음으로 강소아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두 사람이 마주한 곳은 투명한 칸막이로 나뉜 면회실이었다. 철문이 열리자 강소아는 그 너머로 나오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여위고 창백했으며 눈빛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런데 입가엔 비웃음 같으면서도 두려움 없는 기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육연우는 거친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고 한때 길었던 머리카락은 귀밑까지 짧게 잘려 있었다. 육연우는 마치 혼이 나간 인형처럼 멍하니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연우야.”오랜 침묵 후, 강소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내가...”강소아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조용히 말했다.“조금이라도 챙겨주고 싶어서 이것저것 가져왔어. 교도관이 검사하고 나서 너한테 전달해 줄 거야. 다 먹고 쓰는 건데, 부족하면...”“당연히 부족하죠.”육연우는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언니, 이제 와서 이런 거 가져다주는 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강소아의 가슴이 순간 아려왔다.육연우는 손을 들어 수갑을 흔들었고 철컥거리는 무거운 소리가 울렸다.“이 소리, 듣기 좋죠?”육연우는 웃으며 말했다.“나에게 이런 멋진 선물을 줬으니 더는 바랄 것도 없네요. 언니의 호의도 이제는 사양할게요!”“육연우
최군형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언니, 내가 이렇게 만나자고 한 이유는 딱 하나에요.”육연우가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딸이 있는 사람이니 무슨 일을 하든 딸을 위해 생각해야죠.”강소아는 눈살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뜻이야?”“아직도 백인서를 곁에 둘 생각이세요?”육연우의 눈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육연우의 표정을 보고 강소아는 속이 불편해졌다.“언니, 나 요즘 자주 악몽을 꿔요... 기억해요? 우리가 배에 갇혔을 때, 거기서 홍이 언니를 만났었죠. 홍이 언니 기억나요? 그 사람은 인신매매범이었잖아요! 하하!”육연우는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그런데 홍이 언니의 또 다른 정체가 백인서의 엄마라는 거 아세요?”“그만해!”강소아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날 여기 부른 게 겨우 이런 소리 하려는 거였어? 이런 말이라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강소아는 일어서서 나가려 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육연우의 절망적이고 악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백인서를 보물처럼 곁에 두면서 생각해 본 적 있어요? 백인서는 인신매매범인 백홍의 딸이라고요! 그 피가 백인서에게도 흐르고 있다고요!”강소아는 걸음을 멈추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교도관이 다가와 육연우의 어깨를 눌러 제지했지만, 육연우는 미친 듯한 기세로 저항했다. 육연우의 눈에는 붉은 기운이 돌았고 입가에는 비웃음이 번졌다.“저의 아버지는 육명진이었어요. 제 몸엔 육명진의 피가 흐르고 있죠. 맞아요, 난 나쁜 사람이에요!”육연우는 목이 쉬어라 외쳤다.“하지만 백인서는요? 백인서의 엄마는 인신매매범이었어요. 그 피가 백인서에게도 흐르고 있다고요!”“언니, 내가 미리 경고하는 거예요. 딸을 잘 지키세요! 언젠가 언니 딸이 백인서의 목표가 될지 모르니까요! 하하하...”강소아의 눈이 크게 떠지며 심장이 마구 뛰었다. 강소아는 주먹을 꽉 쥐고 얼굴이 창백해졌다.그 어떤 엄마도 견디기 힘든 말이었다.“미쳤군!”최군형은 소리치며 교도관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영미는 며칠 동안 산골에서 불편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영미는 최지용과 백인서를 따라 함께 다녔지만, 기차에서 내린 후 최지용은 마치 영미를 잊은 듯했다. 산속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탈 때 영미가 잔돈이 없다 하자, 최지용은 표를 사주었지만, 마치 낯선 이를 돕듯 전혀 친근하지 않은 태도로 대했다.영미가 먼저 말을 걸어도 최지용은 대꾸도 없이 무시했고 오직 백인서에게만 다정하게 대해주었다.영미는 이번 여정에서 얻은 것 하나 없이, 그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지켜보며 속상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산골에 들어온 뒤로도 일부러 매일 최지용과 백인서가 다니는 곳마다 모습을 보였고, 그들이 방문한 학교에도 찾아가 아이들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자청했다.하지만 최지용은 여전히 영미한테 차갑기만 했다.최지용의 눈엔 오직 백인서만이 비칠 뿐이었다.하필 산속이라 신호도 안 터져 하소연할 곳도 없었고 불편한 생활환경까지 겹쳐 영미는 점점 지쳐갔다....최지용과 백인서는 이곳의 유일한 민박집에서 묵고 있었다. 사장님은 따뜻한 인상의 아저씨였는데, 원래는 이곳 사람이 아니었으나 아름다운 자연에 반해 이곳에 터를 잡고 민박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다.이곳 민박집은 일 년 내내 손님이 거의 없었지만 아저씨는 매일 꼼꼼하게 청소해 두고 있었다. 이번에 한꺼번에 무려 세 명의 손님이 찾아와 아저씨는 그야말로 들떠 있었다.아저씨는 틈만 나면 좋은 차를 우려내어 마당에서 최지용과 백인서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두 사람과 친해진 민박집 아저씨는 웃으며 물었다.“두 분이 커플이라는 건 금방 알겠어요. 그런데 저 아가씨는...?”“아, 그쪽은 그냥 이웃집 딸이에요.”최지용은 대충 둘러대며 말했다.“그렇지만 제가 보기에 저 아가씨는 그쪽을 쫓아온 것 같은데요?”최지용은 깜짝 놀라며 아저씨에게 눈짓을 보냈고 백인서 쪽을 흘깃 보았다.백인서는 조용히 차를 음미하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아, 이제 알겠네.”아저씨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 아가씨가 그쪽을
최지용은 잠시 멈칫하며 백인서를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아저씨가 씩 웃으며 따뜻한 물을 좀 더 가져오겠다고 말하고는 눈치 있게 자리를 피했다.산속의 바람엔 이미 한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이런 쓸쓸한 분위기는 백인서가 깊이 묻어둔 좋지 않은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켰다.“저는 커서 도망쳐 나왔어요. 그 뒤로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더라고요.”백인서는 조용히 말했다.“이 산골에 교사로 왔지만, 저 산은 영원히 넘을 수 없는 산 같아요.”“괜찮아.”최지용은 백인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그런 곳은 미련 둘 만한 데가 아니잖아. 게다가 친아버지도 아니고.”“지용 씨.”백인서는 고개를 들어 최지용을 바라보며 말했다.“저 산을 못 넘는 것처럼... 제 과거도 평생 넘을 수 없는 산 같은 거겠죠?”최지용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밝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백인서의 물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인서야, 사실 인생이란 꼭 모든 걸 다 넘어가야 하는 게 아니야. 우리는 여기 더 머물지 않을 거고, 이 산은 오성까지 따라오는 것도 아니잖아. 아마 이번이 평생, 이 산을 보는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그러니 도망치는 것도 마냥 나쁜 건 아니야.”최지용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전쟁 중엔 이탈 병이 있으면 안 되지만, 내 곁에선 네가 언제든 원할 때 도망쳐도 괜찮아. 나도 함께 도망칠 수 있고.”“지용 씨...”“넘지 못하는 산이라도 괜찮아. 내가 늘 곁에 있을 테니까. 넘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못 넘는다면 내가 네 어린 시절의 상처가 다시 떠오르지 않게 평생 지켜줄게.”백인서는 입술을 깨물며 최지용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어쩌면, 어린 시절의 고생이 많았기에 하늘이 최지용을 보내 자신을 구해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리고 과거의 그림자를 정말로 완전히 묻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자, 이제 그만 생각해.”최지용은 가볍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이틀 후면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야 해. 마지막으로 인원을 점검해야겠어.
영미는 더 큰 창피를 당하기 전에 애써 균형을 잡으며 간신히 일어섰다.백인서는 영미를 힐끗 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아무 말 없이 민박집 안으로 들어갔다. 최지용이 따라가려던 순간, 영미가 다가와 최지용을 잡아끌었다.“지용 오빠, 제 말 좀 들어줄 수 있어요?”최지용은 영미의 손을 피하며 일정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말했다.“무슨 일이야?”“오빠... 왜 저한테 그렇게 냉정하게 굴어요?”영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어릴 땐 우리 잘 지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차갑게 대하는 거예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영미야.”최지용은 진지하게 말했다.“어릴 적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도 그때를 생각해서 이 정도로 대하는 거야. 더 차갑게 대하지 않는 걸 다행이라 생각해.”“지용 오빠!”“난 여자 친구가 있어. 내 아내가 될 사람이고 내 아이의 엄마가 될 사람이야.”최지용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다른 여자와는 거리를 두고 싶어. 그건 여자 친구에 대한 충성이기도 하고 너에 대한 배려이기도 해.”영미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영미의 기억 속에서 최지용은 어릴 때부터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나무토막 같은 사람이었다. 영미는 자신이 최씨 집안의 며느리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런데, 최지용에게 이제 백인서가 있었다.영미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떨군 채 간청하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용 오빠, 오빠가 여자 친구를 많이 좋아하는 건 알겠어요. 그렇지만 우리 몇 년간의 우정을 한 번에 없던 일로 할 순 없잖아요?”“나도 적당한 선을 지킬 줄 알아.”“만약 제가 아프면, 돌봐 주실 거예요?”최지용의 눈이 어두워졌다.“무슨 일 있어?”“저... 요 며칠 너무 힘들어요.”영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괴로운 표정으로 최지용을 바라보았다.“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못 해서 그런지 계속 어지럽고 머리가 아파요. 게다가 이런 낡은 숙소에선 잠을 잘 수가 없어요!”그때 마침 민박집 주
“하지만...”영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지용은 이미 성큼성큼 민박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영미는 발을 쾅쾅 구르며 화를 내보았지만, 그저 속만 상할 뿐이었다.아무 소득 없는 대화를 마친 영미는 오후에 학교로 가서 영미에게 자리를 양보할 아이를 찾기로 했다.하교 시간, 학교에는 남아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몇몇 청소 당번 아이들만이 교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낡은 건물과 부족한 교구들이지만, 여자아이들에게는 소중한 장소였다.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하며 다가올 여정을 즐겁게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비행기를 타고 큰 도시로 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 아이들은 여전히 침착해 보였다. 몇몇 여자아이들은 손을 맞잡으며 열심히 공부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인생을 바꾸겠다고 다짐했다.영미는 그런 아이들을 지겨운 듯 흘겨보았다.이 여자아이들은 명단에 올라와 있는 첫 번째 그룹에 속하는 아이들이었는데 학교에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들이었다. 만약 이 아이들을 전용기에 타지 않는다면 최지용과 백인서가 분명히 눈치챌 것이다.누굴 골라야 하지?영미는 작고 울퉁불퉁한 콘크리트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작은 자갈에 걸려 짜증만 쌓였다.그때, 영미는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있는 한 남자아이를 발견했다. 왠지 낯익은 얼굴이었다.영미는 문득 카메라로 이 남자아이를 찍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카메라를 뒤적이니, 아니나 다를까 사진 속에 그 아이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에는 아이답지 않은 싸늘함이 서려 있어 또래 아이들의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었다.아마도 가정형편이 몹시 어려워서 사람들과 어울리기조차 부담스러워하는 아이일 것이다.영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개 이런 환경의 아이들은 자존감이 낮고 값진 것을 본 적이 없어 설득하기가 쉬웠다.영미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남자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운동장 한가운데 있는 나무 그늘에 앉아 막대로 땅 위의 개미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영미는 옆의 돌에 앉아 웃으며 말을 걸었다.“안녕?”남자
영미는 이 남자아이의 반응에 한 방 맞은 듯 말을 잃었다.영미는 산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세상 물정을 모르고 순진해서 쉽게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하지만, 이 아이는 마치 깊은 산속에서 자란 여우 같았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영미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기운을 잃지 않고 물었다.“너... 그냥 그 자리를 나한테 양보해 줄 수 없겠니?”“뭐라고요?”남자아이는 눈살을 찌푸렸다.영미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남자아이를 설득했다.“꼬마야, 누나가 무리한 부탁을 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누나 좀 도와줄래? 손해 볼 것도 없잖아. 그리고 오성에 가게 되면 누나가 널 잘 돌봐줄게!”“돌봐준다고요?”남자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어떻게요? 돈을 줄 건가요?”영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역시, 산속의 아이들은 세상을 잘 몰라서 결국 돈에 끌리기 마련이다.“당연하지!”영미는 자신 있게 말했다.“많이 줄 거야! 오성에서도 남 부럽지 않게 살 수 있을 만큼!”“많이라면 얼마나요?”“그건...”“200억은 되나요?”영미는 말문이 막혔다.남자아이는 입꼬리를 올려 비웃듯이 미소를 지었다.“200억쯤이야 당신네 부자들에겐 큰돈도 아니겠죠? 많이 준다면서, 200억도 아깝나요?”영미는 남자아이한테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깊은 산속에 이런 아이가 있을 줄은 더더욱 생각지도 못했다.200억이 영미에게 큰돈은 아니었지만, 이런 아이가 돈의 개념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 아이의 조상들은 대대로 가난하게 살아서, 2억 원만 있어도 대대손손 먹고 살 걱정은 없을 터였다.“누나, 왜 말이 없어요?”남자아이는 영미에게 천진한 목소리로 다가섰다.“자리 바꾸고 싶다면서요? 그 자리가 그 정도 가치도 안 되나요?”“너...”“그렇다면, 안 바꿀래요!”남자아이는 입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꼬마야.”영미는 생각에 잠기며 다시 말했다.“지금 당장 그 돈을
“돈 조금 쥐여주면서 저 속이려고 했어요?”남자아이는 비웃으며 말했다.“내가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몰라도, 얻으려면 크게 얻어야 한다는 건 알아요!”말을 마친 남자아이는 개미집을 발로 짓밟아 무너뜨리고는 뒤돌아 걸어갔다. 수많은 개미가 흙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영미는 그 아이에게 완전히 압도되어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한참 동안 강한 햇빛 아래 서 있던 영미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었다.당직 선생님들이 교실 문을 확인하며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작은 단층집에서 나오며 영미에게 반갑게 인사했다.“혹시... 영미 선생님 맞으시죠? 기억해요, 배 선생님이랑 같이 오셔서 우리 아이들 사진을 많이 찍어 주셨잖아요!”영미는 창백한 얼굴로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영미 선생님,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오셨나요?”산골 사람들은 소박하고 따뜻했다. 교장 선생님은 백인서가 아이들을 오성으로 데려가 공부시킨다는 이야기를 듣고 백인서 일행을 모두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영미의 손을 붙잡고 고마움을 연신 표했다.“여러분이 아니었으면 우리 아이들이 이 산을 벗어나기 어려웠을 거예요. 저는 고등학교까지 나왔지만, 이곳에선 고등학생이 희귀한 인재라죠... 아이들에게 이런 기회가 생기다니, 정말...”“교장 선생님!”영미가 교장 선생님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제가 이 시간에 온 건... 학생 명단을 다시 확인하려고 온 거예요.”“네?”“이제 곧 떠나잖아요.”영미는 핑계를 대며 말했다.“배 선생님이 명단을 확인하라고 하셔서요... 한 번 더 확인해 볼 수 있을까요?”교장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는 교장실 문을 다시 열었다.“명단과 사진이 여기 있습니다.”교장 선생님은 종이 뭉치를 꺼내며 말했다.“영미 선생님, 천천히 확인하세요.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시고요!”영미는 종이를 받아 대충 흉내를 내며 사진과 이름을 맞추던 중, 그 남자아이의 사진을 발견했다.“이 아이 이름
“뭐라고요? 10억 원이요?”백시연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강소아는 슬쩍 백시연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래? 고작 10억 가지고. 게다가 가원이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네가 먼저 약속한 거잖아. 혹시 후회라도 하는 거야?”“그럴 리가!”배윤아가 옆으로 걸어오며 백시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우리 인서는 분명히 선물을 줄 거야,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보석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백시연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10억? 조순영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고작 10억 원뿐이었다.백인서가 이때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걸까?그래서 강소아가 그렇게 말한 것일까?“어머, 저 사람은 육 아가씨와 친하다던 백인서 아니야?”그때, 근처에 있던 여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어?”“예전에... 둘이 약속했나 봐, 백인서가 육 아가씨의 딸에게 선물을 주기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아!”“정말? 풉! 상류층 자매라는 것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봐! 백인서는 육 아가씨와 둘도 없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육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잖아... 이제는 최씨 가문의 아들과 친해지니까, 가식적인 행동도 하기 싫어졌나 봐.”“그 선물이 10억 원짜리라고 하던데... 역시 두 사람 우정은 10억 원도 안 되는 거였어!”백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뒤돌아 그들에게 따지려던 찰나, 강소아가 재빠르게 백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됐어, 인서야.”강소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사람들은 평소에도 입만 살았어. 나중에 제대로 혼내 줄 거야.”“그래야죠, 저 사람들은 정섭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잖아요.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백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소아 언니,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정섭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저렇게 뒤에서
권욱과 조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벅찬 기쁨에 눈물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권 대표님, 사모님, 정말 큰 경사입니다!”의사는 골수 검사 결과를 들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드디어 아가씨를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맞아요, 정말 기쁜 일이네요.”최지용이 권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한심하긴, 그만 울어요!”권욱은 흐느끼면서도 반박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네 딸이 아픈 게 아니니, 넌 당연히... 당연히 이 고통을 알 리가 없지!”최지용은 기가 차 웃으며 권욱의 등을 두 번 세게 두드렸다.백인서는 마음 한편의 큰 짐을 덜어낸 듯 병실 안에 있는 권온유를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그나저나.”조순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백시연의 골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습니다.”의사가 고개를 저었다.“대부분의 지표는 일치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이 맞지 않아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최지용이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쌍둥이라고 해도 신체의 세포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네요.”한 명은 강인하고 선량했고 다른 한 명은 어리석고 악랄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도 서로 다른 개성과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타인의 성격과 운명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그러게 말이야.”권욱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다른 쌍둥이였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모든 진실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네.”...축하 연회 날, 손님들로 붐비는 연회장은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오성에서 유명한 대가문은 물론, 연예계의 반 이상이 모인 듯했다.정섭 엔터테인먼트는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대상 수상 경력이 있는 배우들조차 강소아의 초대를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연회장에 들어선 백시연은 평소 TV에서만 보던 유명 여배우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광경에 기가 죽고 말았다.백시연은
차 안에서 백인서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조금 전 나눈 대화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백인서는 갑작스레 쏟아진 진실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권씨 가문의 사생아라니.“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가 꽤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야.”“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물건이 있었어. 바로 회중시계인데, 그걸 백시연이 가지고 온 거지.”“인서야, 너와 백시연이 쌍둥이 자매란 거 알고 있었어?”백인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인서야?”최지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인서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앞좌석에 있던 권욱이 뒤를 돌아보며 싸늘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쏘아보았다.“놔라!”“뭐요?”권욱은 입을 삐죽이며 최지용이 꼭 잡은 백인서의 손을 가리켰다.참 이상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매형이 된 순간부터 그가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인서는 좀 쉬어야 해!”권욱은 찡그리며 말했다.“손은 왜 자꾸 붙잡고 있는 거야?”최지용은 순간 멍해서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권욱을 쳐다보았다.“무슨 상관이에요?”“난 인서 오빠야! 당연히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이지.”“웃기지 좀 마세요!”“너...”“그만 좀 싸울래요?”백인서가 뒤돌아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머릿속이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한데 이 두 사람은 백인서를 편히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최지용과 권욱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온유는 아직 병원에 있어요?”백인서가 갑자기 물었다.“응...”“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뭐라고?”권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백인서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진짜 동생이라면 온유 고모가 되는 거잖아요.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다면서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권욱은 잠시
종수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백인서에게 내밀었다.“통화해.”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최 도련님의 번호는 분명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굳이 조언을 하나 하자면... 먼저 육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연락하는 게 좋을 거야.”백인서는 종수를 노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왜냐하면 백인서도 강소아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강소아는 위치 추적 장비를 가지고 있었기에 전화를 걸면 곧바로 이곳이 추적될 터였다.그렇게 되면 종수와 백시연은 피해 갈 수 없을 터였다.“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종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어젯밤, 소아 아가씨가 시연이와 통화했는데 평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던 아가씨가 시연이와 한참 동안 통화를 하더군. 내가 생각하기론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어.”백인서의 표정이 점점 풀렸다.백인서는 천천히 손을 옮기고 종수가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려갔다. 종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했다.종수는 그저 가만히 백인서를 바라볼 뿐, 뒤쫓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백시연을 용서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마세요.”백인서는 차갑게 말했다.“아저씨를 용서할 생각도 없어요! 저는 누구를 먼저 해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들이 먼저 나타나 저를 해치려 들고선 이제 와서 자매애를 말하다니, 우습지도 않나요?”백인서는 말을 마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종수는 백인서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종수의 마음은 더욱 복잡했다.백인서는 저택을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조용한 길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지친 몸을 이끌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화려한 시내는 여전히 멀어 보였다.오성은 너무 넓었고 모든 곳을 다 가본 게 아니었기에 대략적인 방향만 추정할 수 있을 뿐, 휴대전화도 없어서 난감하기만 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던 순간, 고요한 길
종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종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백인서는 문밖 풍경을 바라보았다.때마침 오전의 화창한 햇살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작은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백인서는 무의식적으로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종수를 바라보았다.“어서 가.”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인서야, 내가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뭔데요?”“네 남자 친구에게 시연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종수는 한 걸음 다가서며 간절한 눈빛으로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시연이는 내가 키운 아이야. 내겐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약속할게, 시연이를 데리고 이곳 오성을 떠나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결국, 저보고 용서하라는 말이군요?”“인서야, 그 아이는 네 쌍둥이 동생이야. 네가...”종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인서는 빠르게 식탁 위의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부분을 종수의 목에 단숨에 들이댔다.종수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급히 손을 뻗어 백인서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목 깊숙이 차가운 위협이 스며든 후였다.백인서가 누르고 있는 곳은 동맥이 위치한 곳이었다.“백인서, 너...”“아저씨.”백인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가 조금만 힘을 주면, 아저씨는 여기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어요. 방금 확인했는데, 이 저택은 넓지만, 따로 감시카메라는 없더군요. 제가 아저씨를 죽이고 떠나도 아무도 알지 못할 거란 얘기예요.”종수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경찰이 너를 추적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흥!”백인서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역추적 능력에는 꽤 자신 있거든요.”“백인서!”“아저씨, 전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당신들은 왜 저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전부 시연이 잘못이야!”
백인서는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종수가 방에 들어올 때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신의 실력을 지나치게 믿었거나, 아니면 백인서를 단순히 어린 애로 여겨 경계를 늦췄던 게 분명했다.“어서 먹어라.”종수는 백인서를 쳐다보며 말했다.“다 먹고 나서 끝내줄게.”“네, 알겠어요.”“무섭지 않아?”“왜 제가 무서워해야 하죠?”백인서는 미소를 띠며 조용히 말했다.“겁을 내야 할 사람은... 아저씨 아닌가요.”종수는 백인서의 맑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빛의 날카로움은 마치 칼날처럼 심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종수는 다시금 백홍을 떠올렸다. 한평생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는데 지금 은인의 딸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백인서의 말이 맞았다. 겁을 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종수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젯밤 백시연의 말에 화가 나 잠 한숨도 자지 못하다 보니 머릿속이 멍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숨이 가빠오며 가슴이 터질 듯한 답답함이 몰려왔다. 무심코 주머니를 더듬었고 그 순간 전에 앓던 천식이 다시 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약을 가져오지 않았다.종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필사적으로 공기를 삼켰다.“어서... 어서...”종수는 떨리는 손으로 백인서를 가리키며 도움을 청했다.백인서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종수를 주시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처음엔 거짓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판을 발로 차 뒤집었다. 종수는 바닥에 쓰러져 온몸을 고통스럽게 비틀었다.백인서는 종수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어서 닫히지 않은 문을 바라보았다.지금이 탈출할 최고의 기회였다!“약...”종수는 애써 말을 이었다.“내 약이...”“배... 백인서... 부탁이야...”백인서는 이를 악물었다.“제발... 백인서, 날 좀 살려줘!”백인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침착하게 문 쪽으로 달려가 주위를 살
종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다가 TV를 켰다. 화면에는 비밀방에 갇힌 백인서의 모습이 감시 카메라에 담겨 나타났다.백인서는 어두운 방의 구석에 무릎을 감싸안고 웅크려 앉아 있었다.백인서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여기에 갇힌 지 3일째라는 결론을 내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어둡고 답답한 공간 속에서 하루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탈출할 수 있는 틈은 없었다. 혼자 힘으로는 밖을 지키고 있는 사람과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다.백인서는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며칠 동안 종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맛은 없었지만 백인서는 남김없이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백인서는 알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절망하지 말고 조용히 몸을 숨기며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것은 탈출을 위한 준비였다.종수는 화면을 멈추더니 백시연을 향해 돌아섰다.“너... 정말 백인서를 없앨 생각이야?”“왜 이렇게 말이 많으세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종수를 흘겨보았다.“너의 친자매이기 전에.”종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백인서는 절대 간단한 상대가 아니다. 쉽게 없앨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뭐라고요?”“방금 너도 봤잖아. 저런 상황에서도 잘 먹고 잘 쉬는 모습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모르겠니? 지금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우리를 상대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그러니까 더더욱 없애야죠!”백시연은 소리를 질렀다.“아저씨, 설마 백인서한테 마음 약해진 거 아니죠?”종수는 머리속이 하얘진 채 멍하니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어쨌든, 전 백인서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백시연은 종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저의 엄마한테 약속했잖아요. 저를 잘 돌봐주기로. 어릴 때 저와도 약속했잖아요, 제 말이면 뭐든 다 들어두겠다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예요?”“시연아...”“그만해요!”백시연은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아저씨는 우리 엄마가 데려온 떠돌이 개일 뿐이에요. 저를 훈계할 자격
최지용은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그러니까...”최지용이 권욱을 바라보며 말했다.“이틀 동안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이 정말 인서가 아니었단 거네요!”“그게 무슨 말이에요?”권욱도 어리둥절했다.“그 사람은 인서가 아니에요!”최지용은 흥분하며 외쳤다.“인서는 분명 지금 그 여자한테 잡혀 있을 거예요. 그 여자가 인서를 해치려 들 거예요.”“도련님, 진정 좀 하시죠. 지금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최지용은 더는 말을 잇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총을 꺼내 든 채 밖으로 나가려 했다.표아정이 침착하게 최지용의 앞을 가로막았다.“지금 필요한 건 대책을 세우는 거야!”표아정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처럼 감정에 휘둘려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권욱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표아정은 권욱을 향해 물었다.“권 대표, 백시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백시연은 제 아버지의 사생아입니다.”지금은 이 부끄러운 가정사를 숨길 때가 아닌 것 같아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하지만 수년간 찾지 않았어요. 사실 찾을 의지도 없었죠. 제 딸이 병에 걸려 골수 이식수술이 필요하기 전까지는요. 집안의 모든 친척이 골수 검사를 했지만, 적합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제야 동생을 찾게 된 겁니다.”표아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 동생은 어디서 찾았지?”“찾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남긴 단서를 따라 사람을 보내 남양에서 데려왔어요.”권욱은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하지만 돌아온 백시연은 처음부터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얼굴이 망가졌다면서 가면을 쓴 채 진짜 얼굴을 드러내길 거부했어요. 다만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은 확실히 저의 아버지의 것이었죠.”“그다음은?”“백시연의 행동이 너무 이상해서 저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어머니는 누구야?”권욱은 단호하게 말했다.“백홍입니다.”최지용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표아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금세 실마리를 잡은 듯 말했다.
“결과가 바로 나오진 않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권욱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넥타이를 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권욱은 마음 깊은 곳에서 답답함이 밀려오며 짜증이 치솟았다.권욱은 문득 검사실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술대 위에는 마취가 아직 풀리지 않아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 있는 백시연이 있었다.권욱은 갑작스레 백시연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진짜 여동생이라면 적어도 동생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봐야 하지 않을까? 혹여 얼굴에 상처가 있다면 어디가 어떻게 손상되었는지 알아야 적합한 의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결심한 듯 권욱은 발걸음을 재촉해 수술대 앞으로 다가갔다. 권욱은 손을 들어 올리고 잠깐 주저하다가 곧 거칠게 백시연의 얼굴을 덮은 가면을 벗겨냈다.가면이 벗겨지자, 권욱의 눈동자에는 마치 폭발하는 화산처럼 충격과 경악이 번져갔다.“백... 백인서잖아?”...최지용은 초조한 기색으로 거실을 서성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표아정이 아끼는 두 명의 부하, 우일과 우민 남매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전문 훈련을 받은 인물로, 뛰어난 손재주와 상황 판단력 덕분에 표아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상황은 어땠어?”표아정이 급히 물었다.우일과 우민은 보고하기 시작했다.“계속 백 아가씨의 뒤를 밟았는데 아가씨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통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병원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에서 가면을 꺼내 쓰는 걸 보았습니다.”“가면?”최지용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네, 가면이 확실했습니다.”우민이 설명했다.“그 가면은 꽤 독특해 보였는데 금으로 만들어진 데다 보석이 박혀 있어서 꽤 값비싸 보였습니다.”최지용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인서는 가면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런 걸 쓴 적도 없고...”“또 뭘 봤는데?”“누군가 천으로 아가씨의 입을 막은 채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병원 주위를 살펴본 결과, 그들은 권욱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