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군성은 밖으로 몇 발짝 뛰어나가다 갑자기 멈춰 섰다.늘 웃음을 잃지 않던 최군성의 얼굴에 드문드문 무거운 기색이 떠올랐다.강소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조용히 물었다.“왜 그래?”“나... 굳이 따라갈 필요 없을 것 같아.”최군성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왜?”“그게… 윤아도 길을 잘 알 테고, 여기가 그렇게 외진 곳도 아니니까 차를 부르겠지. 게다가 배씨 집안이 윤아를 혼자 두진 않을 거야. 차를 부르지 않는다면 경호원이 데리러 올 테니,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지 않아?”최군형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뭔가 짐작한 듯 보였다.최군형은 최군성의 마음을 이해했다. 육연우와의 지난 연애가 최군성에게 큰 상처를 남겼고 그 후로는 사랑을 다시 느끼기조차 힘들어 보였다.하지만 삶은 계속 나아가야 하는 법이다.지난 기억의 그림자 속에 평생 갇혀 살 수는 없었다.“아, 그러니까...”최군성은 둘의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렸다.“자, 공주님은 나한테 맡기고 두 사람은 데이트하든 편히 쉬든 하고 싶은 거 해. 아이는 내가 잘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하하...”최군성은 강소아의 품에서 최가원을 받아들였다. 이때 가원이는 유난히 순둥하게 조용히 있었다. 큰 눈망울을 반짝이며 삼촌을 바라보다가 오동통한 손을 입에 넣고 가만히 있다.최군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당신이 보기엔... 군성이와 배윤아, 잘 될 가능성 있을까요?”강소아가 조용히 물었다.“일단은 지켜보자고.”최군형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군성이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것도 좋은 일이야. 이렇게 성장하는 거지.”...저녁에 강소아는 백인서가 보내온 안부 메시지를 받고 웃음을 터트렸다.“시간을 보니 어제 보낸 메시지 같아요.”강소아는 최군형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에서야 받다니, 저쪽 신호가 영 별로인가 봐요!”“어차피 오래 있지는 않을 텐데.”최군형이 강소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일주일도 못 기다리겠어?”“그러게요. 인서가 없으니까, 생각보다 보고 싶
“아마 꿈을 꾸었나 봐요.”강소아는 진지하게 생각하며 말했다.“한 시간 전에 분유도 먹였고, 기저귀도 깨끗해요. 아마 꿈속에서 나쁜 할머니에게 혼났나 봐요!”“나쁜 할머니도 참... 하필이면 지금 혼낼 게 뭐야.”하려던 것들이 다 수포가 되었으니...하지만 푸념은 푸념일 뿐, 딸이 아직 너무 작아 다른 방에서 따로 재울 수 없어서 작은 침대를 침실에 들인 것도 최군형의 제안이었다.최군형은 다가가 강소아의 품에서 딸을 부드럽게 받아 들고는 속삭이며 달래기 시작했다.“여보, 당신 먼저 자. 내가 가원이를 좀 안고 있을게.”강소아의 눈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사실 딸이 태어나기 전부터 강소아는 여러 사이트에서 출산 후의 고충을 다룬 글들을 많이 봤다.대부분 남편이 전혀 돕지 않아 온갖 일을 아내가 홀로 감당하는가 하면 심지어 남편까지 챙기느라 온몸이 녹초가 된다는 이야기들이었다.그러나 최군형은 달랐다.딸이 태어나자마자 기저귀 갈기, 분유 타기, 젖병 닦기, 마사지까지, 맡겨 둔 보모가 있어도 직접 하고 싶어 했다.딸이 조금 자라자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한 번은 시간을 내서 딸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가원이의 작은 옷과 양말까지 직접 고르며 계약서에 사인할 때보다 더 신중한 모습이었다.그렇다고 딸을 돌보느라 아내를 소홀히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강소아에게는 전보다 더 세심하고 다정하게 대해주었고 밤중에는 절대 강소아를 깨우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집사가 가져온 보양식까지도 최군형이 먼저 맛을 보고 맛이 괜찮으면 그제야 강소아에게 내밀었다.밤에 딸이 울음을 터뜨리면, 최군형은 딸을 안고 방 안을 이리저리 돌며 달래곤 했다. 최군형의 지친 모습을 바라볼 때면, 강소아는 짠하면서도 깊은 행복감을 느꼈다.좋은 사람과 결혼했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여보...”강소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당신은 좀 쉬어요, 내가 가원이를 안을게요.”“이것까지 나한테서 뺏겠다는 거야?”최군형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낮에는 회사에 있어서 딸아
오성 구치소.흐린 회색빛 하늘 아래, 거대한 건물은 음산하고 차가운 기운을 뿜어냈다. 건물을 감싼 철조망은 보는 이를 서늘하게 했다.강소아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짐을 진 듯 한 걸음 한 걸음이 힘들었다.“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돼.”강소아의 어깨를 감싸안은 최군형은 강소아의 불안감을 느끼고는 부드럽게 말했다.“굳이 육연우 같은 사람을...”“그래도 한 번은 만나야죠.”강소아는 고개를 숙였다. 함께했던 수많은 시간과 추억을 하루아침에 내던질 수는 없었다.지금도 강소아는 육연우가 그저 마음이 병든 것이라 믿고 싶었다. 정말로 악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에 있는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리고 한층 더 단단한 걸음으로 강소아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두 사람이 마주한 곳은 투명한 칸막이로 나뉜 면회실이었다. 철문이 열리자 강소아는 그 너머로 나오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여위고 창백했으며 눈빛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런데 입가엔 비웃음 같으면서도 두려움 없는 기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육연우는 거친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고 한때 길었던 머리카락은 귀밑까지 짧게 잘려 있었다. 육연우는 마치 혼이 나간 인형처럼 멍하니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연우야.”오랜 침묵 후, 강소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내가...”강소아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조용히 말했다.“조금이라도 챙겨주고 싶어서 이것저것 가져왔어. 교도관이 검사하고 나서 너한테 전달해 줄 거야. 다 먹고 쓰는 건데, 부족하면...”“당연히 부족하죠.”육연우는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언니, 이제 와서 이런 거 가져다주는 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강소아의 가슴이 순간 아려왔다.육연우는 손을 들어 수갑을 흔들었고 철컥거리는 무거운 소리가 울렸다.“이 소리, 듣기 좋죠?”육연우는 웃으며 말했다.“나에게 이런 멋진 선물을 줬으니 더는 바랄 것도 없네요. 언니의 호의도 이제는 사양할게요!”“육연우
최군형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언니, 내가 이렇게 만나자고 한 이유는 딱 하나에요.”육연우가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딸이 있는 사람이니 무슨 일을 하든 딸을 위해 생각해야죠.”강소아는 눈살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뜻이야?”“아직도 백인서를 곁에 둘 생각이세요?”육연우의 눈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육연우의 표정을 보고 강소아는 속이 불편해졌다.“언니, 나 요즘 자주 악몽을 꿔요... 기억해요? 우리가 배에 갇혔을 때, 거기서 홍이 언니를 만났었죠. 홍이 언니 기억나요? 그 사람은 인신매매범이었잖아요! 하하!”육연우는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그런데 홍이 언니의 또 다른 정체가 백인서의 엄마라는 거 아세요?”“그만해!”강소아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날 여기 부른 게 겨우 이런 소리 하려는 거였어? 이런 말이라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강소아는 일어서서 나가려 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육연우의 절망적이고 악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백인서를 보물처럼 곁에 두면서 생각해 본 적 있어요? 백인서는 인신매매범인 백홍의 딸이라고요! 그 피가 백인서에게도 흐르고 있다고요!”강소아는 걸음을 멈추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교도관이 다가와 육연우의 어깨를 눌러 제지했지만, 육연우는 미친 듯한 기세로 저항했다. 육연우의 눈에는 붉은 기운이 돌았고 입가에는 비웃음이 번졌다.“저의 아버지는 육명진이었어요. 제 몸엔 육명진의 피가 흐르고 있죠. 맞아요, 난 나쁜 사람이에요!”육연우는 목이 쉬어라 외쳤다.“하지만 백인서는요? 백인서의 엄마는 인신매매범이었어요. 그 피가 백인서에게도 흐르고 있다고요!”“언니, 내가 미리 경고하는 거예요. 딸을 잘 지키세요! 언젠가 언니 딸이 백인서의 목표가 될지 모르니까요! 하하하...”강소아의 눈이 크게 떠지며 심장이 마구 뛰었다. 강소아는 주먹을 꽉 쥐고 얼굴이 창백해졌다.그 어떤 엄마도 견디기 힘든 말이었다.“미쳤군!”최군형은 소리치며 교도관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영미는 며칠 동안 산골에서 불편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영미는 최지용과 백인서를 따라 함께 다녔지만, 기차에서 내린 후 최지용은 마치 영미를 잊은 듯했다. 산속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탈 때 영미가 잔돈이 없다 하자, 최지용은 표를 사주었지만, 마치 낯선 이를 돕듯 전혀 친근하지 않은 태도로 대했다.영미가 먼저 말을 걸어도 최지용은 대꾸도 없이 무시했고 오직 백인서에게만 다정하게 대해주었다.영미는 이번 여정에서 얻은 것 하나 없이, 그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지켜보며 속상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산골에 들어온 뒤로도 일부러 매일 최지용과 백인서가 다니는 곳마다 모습을 보였고, 그들이 방문한 학교에도 찾아가 아이들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자청했다.하지만 최지용은 여전히 영미한테 차갑기만 했다.최지용의 눈엔 오직 백인서만이 비칠 뿐이었다.하필 산속이라 신호도 안 터져 하소연할 곳도 없었고 불편한 생활환경까지 겹쳐 영미는 점점 지쳐갔다....최지용과 백인서는 이곳의 유일한 민박집에서 묵고 있었다. 사장님은 따뜻한 인상의 아저씨였는데, 원래는 이곳 사람이 아니었으나 아름다운 자연에 반해 이곳에 터를 잡고 민박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다.이곳 민박집은 일 년 내내 손님이 거의 없었지만 아저씨는 매일 꼼꼼하게 청소해 두고 있었다. 이번에 한꺼번에 무려 세 명의 손님이 찾아와 아저씨는 그야말로 들떠 있었다.아저씨는 틈만 나면 좋은 차를 우려내어 마당에서 최지용과 백인서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두 사람과 친해진 민박집 아저씨는 웃으며 물었다.“두 분이 커플이라는 건 금방 알겠어요. 그런데 저 아가씨는...?”“아, 그쪽은 그냥 이웃집 딸이에요.”최지용은 대충 둘러대며 말했다.“그렇지만 제가 보기에 저 아가씨는 그쪽을 쫓아온 것 같은데요?”최지용은 깜짝 놀라며 아저씨에게 눈짓을 보냈고 백인서 쪽을 흘깃 보았다.백인서는 조용히 차를 음미하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아, 이제 알겠네.”아저씨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 아가씨가 그쪽을
최지용은 잠시 멈칫하며 백인서를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아저씨가 씩 웃으며 따뜻한 물을 좀 더 가져오겠다고 말하고는 눈치 있게 자리를 피했다.산속의 바람엔 이미 한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이런 쓸쓸한 분위기는 백인서가 깊이 묻어둔 좋지 않은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켰다.“저는 커서 도망쳐 나왔어요. 그 뒤로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더라고요.”백인서는 조용히 말했다.“이 산골에 교사로 왔지만, 저 산은 영원히 넘을 수 없는 산 같아요.”“괜찮아.”최지용은 백인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그런 곳은 미련 둘 만한 데가 아니잖아. 게다가 친아버지도 아니고.”“지용 씨.”백인서는 고개를 들어 최지용을 바라보며 말했다.“저 산을 못 넘는 것처럼... 제 과거도 평생 넘을 수 없는 산 같은 거겠죠?”최지용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밝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백인서의 물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인서야, 사실 인생이란 꼭 모든 걸 다 넘어가야 하는 게 아니야. 우리는 여기 더 머물지 않을 거고, 이 산은 오성까지 따라오는 것도 아니잖아. 아마 이번이 평생, 이 산을 보는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그러니 도망치는 것도 마냥 나쁜 건 아니야.”최지용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전쟁 중엔 이탈 병이 있으면 안 되지만, 내 곁에선 네가 언제든 원할 때 도망쳐도 괜찮아. 나도 함께 도망칠 수 있고.”“지용 씨...”“넘지 못하는 산이라도 괜찮아. 내가 늘 곁에 있을 테니까. 넘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못 넘는다면 내가 네 어린 시절의 상처가 다시 떠오르지 않게 평생 지켜줄게.”백인서는 입술을 깨물며 최지용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어쩌면, 어린 시절의 고생이 많았기에 하늘이 최지용을 보내 자신을 구해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리고 과거의 그림자를 정말로 완전히 묻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자, 이제 그만 생각해.”최지용은 가볍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이틀 후면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야 해. 마지막으로 인원을 점검해야겠어.
영미는 더 큰 창피를 당하기 전에 애써 균형을 잡으며 간신히 일어섰다.백인서는 영미를 힐끗 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아무 말 없이 민박집 안으로 들어갔다. 최지용이 따라가려던 순간, 영미가 다가와 최지용을 잡아끌었다.“지용 오빠, 제 말 좀 들어줄 수 있어요?”최지용은 영미의 손을 피하며 일정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말했다.“무슨 일이야?”“오빠... 왜 저한테 그렇게 냉정하게 굴어요?”영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어릴 땐 우리 잘 지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차갑게 대하는 거예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영미야.”최지용은 진지하게 말했다.“어릴 적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도 그때를 생각해서 이 정도로 대하는 거야. 더 차갑게 대하지 않는 걸 다행이라 생각해.”“지용 오빠!”“난 여자 친구가 있어. 내 아내가 될 사람이고 내 아이의 엄마가 될 사람이야.”최지용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다른 여자와는 거리를 두고 싶어. 그건 여자 친구에 대한 충성이기도 하고 너에 대한 배려이기도 해.”영미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영미의 기억 속에서 최지용은 어릴 때부터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나무토막 같은 사람이었다. 영미는 자신이 최씨 집안의 며느리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런데, 최지용에게 이제 백인서가 있었다.영미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떨군 채 간청하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용 오빠, 오빠가 여자 친구를 많이 좋아하는 건 알겠어요. 그렇지만 우리 몇 년간의 우정을 한 번에 없던 일로 할 순 없잖아요?”“나도 적당한 선을 지킬 줄 알아.”“만약 제가 아프면, 돌봐 주실 거예요?”최지용의 눈이 어두워졌다.“무슨 일 있어?”“저... 요 며칠 너무 힘들어요.”영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괴로운 표정으로 최지용을 바라보았다.“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못 해서 그런지 계속 어지럽고 머리가 아파요. 게다가 이런 낡은 숙소에선 잠을 잘 수가 없어요!”그때 마침 민박집 주
“하지만...”영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지용은 이미 성큼성큼 민박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영미는 발을 쾅쾅 구르며 화를 내보았지만, 그저 속만 상할 뿐이었다.아무 소득 없는 대화를 마친 영미는 오후에 학교로 가서 영미에게 자리를 양보할 아이를 찾기로 했다.하교 시간, 학교에는 남아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몇몇 청소 당번 아이들만이 교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낡은 건물과 부족한 교구들이지만, 여자아이들에게는 소중한 장소였다.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하며 다가올 여정을 즐겁게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비행기를 타고 큰 도시로 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 아이들은 여전히 침착해 보였다. 몇몇 여자아이들은 손을 맞잡으며 열심히 공부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인생을 바꾸겠다고 다짐했다.영미는 그런 아이들을 지겨운 듯 흘겨보았다.이 여자아이들은 명단에 올라와 있는 첫 번째 그룹에 속하는 아이들이었는데 학교에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들이었다. 만약 이 아이들을 전용기에 타지 않는다면 최지용과 백인서가 분명히 눈치챌 것이다.누굴 골라야 하지?영미는 작고 울퉁불퉁한 콘크리트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작은 자갈에 걸려 짜증만 쌓였다.그때, 영미는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있는 한 남자아이를 발견했다. 왠지 낯익은 얼굴이었다.영미는 문득 카메라로 이 남자아이를 찍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카메라를 뒤적이니, 아니나 다를까 사진 속에 그 아이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에는 아이답지 않은 싸늘함이 서려 있어 또래 아이들의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었다.아마도 가정형편이 몹시 어려워서 사람들과 어울리기조차 부담스러워하는 아이일 것이다.영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개 이런 환경의 아이들은 자존감이 낮고 값진 것을 본 적이 없어 설득하기가 쉬웠다.영미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남자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운동장 한가운데 있는 나무 그늘에 앉아 막대로 땅 위의 개미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영미는 옆의 돌에 앉아 웃으며 말을 걸었다.“안녕?”남자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