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군형이 웃음을 참았다.‘방금 말을 녹음해서 아빠한테 들려줄걸!’최연준 말고 또 누가 그렇게 살까?소정애가 웃으며 최군형을 바라보았다.“군형아! 점심으로 뭐 먹고 싶어? 만들어줄게!”“아뇨, 괜찮아요. 아줌마는 집에서 아저씨 간호하고 계세요, 전 가게에 가볼게요.”최군형이 급히 몸을 일으켜 빠르게 집 문을 나섰다. 소정애가 그의 뒤에서 외쳤다.“소아 오후에 공강이라 가게로 가라고 했어. 둘이 같이 일해!”최군형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남아서 밥 먹으라는 소리겠거니 하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최군형이 작게 웃으며 발길을 다그쳤다.......오후의 가게는 별 손님 없이 한산했다. 그도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을 즐겼다. 계산대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아이고, 군형이 혼자 있어?”최군형이 깜짝 놀라 들어온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중년 여성은 조금 살이 오른 몸매에 과하게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었다. 명품 백도 그녀의 손에 들리니 짝퉁 같아 보였다. 그녀는 눈이 휘어지라 웃으며 최군형을 빤히 쳐다보았다.최군형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바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소정애의 파마도 이 사람의 머리 스타일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여자는 최군형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군형아, 멍하니 뭐 해? 나 잊어버린 거야? 나잖아, 미자 아줌마!”최군형은 열심히 머릿속으로 “미자 아줌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생긴 사람을 봤던 것 같기도 한데, 이름이... 우미자?그 집은 이곳에서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소정애와 우미자는 종종 함께 춤을 추러 다녔으나 둘 다 서로를 썩 좋아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껍데기뿐인 관계라는 것이다. 둘은 알게 모르게 서로를 경쟁상대로 의식하고 있었다.우미자에게도 딸이 있었는데, 마침 강소아의 또래였다. 하지만 그 딸은 강소아처럼 학교에 다니는 게 아니라, 평범한 기술을 배워서 평범한 월급을 받으며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그래서 우미자는 종종 소
우미자는 최군형이 흥미를 보이자 더욱 기뻐하며 말을 늘어놓았다.“너한테만 알려주는 건데... 사실 우리 모두 의심하고 있어. 소아는 훔쳐 온 아이가 아닌가 하고.”“네? 아줌마, 근거 없는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요! 장모님, 장인어른이 어떤 분인지는 제가 제일 잘 알아요!”“얘,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난 차마 네가 속는 꼴 못 보겠어, 그 부부, 겉보기엔 착한 사람들 같아도 실제로 어떨지는 몰라! 지내봐야 알 거 아니겠어? 아예 근거 없는 말도 아니야. 20년 전, 그 부부한테 아이가 생기지 않아 오성의 큰 병원에 갔었어. 그런데 돌아올 때 그 아이를 안고 있었다니까! 하, 오성에 가기 전부터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고 어찌나 잡아떼던지.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다가 오성에 가서 낳은 거라고 했어. 속일 게 따로 있지... 그 아이는 적어도 한 살은 돼 보였어, 이미 걸을 줄도 알았다고. 군형아, 몇 개월 만에 걸음마를 떼는 아이를 본 적 있어?”최군형이 인상을 썼다. 저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헤매는 것 같았다. 앞이 출구라는 걸 알면서도 안개에 가려져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군형아, 내 말이 맞는 것 같지 않아?”최군형은 말이 없었다. 우미자는 그의 침묵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이고는 더욱 흥분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군형아, 이 가족을 경계해야 해! 강우재와 소정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소아 같은 자식을 낳겠어? 그게 가능한 일이야? 그러니까, 소아는 절대 그들 친자식이 아니야. 하, 그러면 당연히 대우도 다르겠지. 지금이야 잘해준다고 하지만, 그 집엔 아들 하나가 더 있잖아! 이 가게도, 그들의 재산도 모두 아들 몫이 될 거야. 강소아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우리 집은 달라. 우리 집엔 외동딸 하나밖에 없거든. 나중에 우리 재산은 모두 내 딸이 가져갈 거야.”우미자는 확신했다. 우씨 집안의 이발소들은 최군형에게 엄청난 유혹이 될 거라고.하지만 최군형은 차가운 눈길로 그녀를 쏘아볼 뿐이었다.우미
최군형이 멈칫했다. 등 뒤가 서늘해졌다.여자가 서서히 다가왔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아이참, 군형 씨, 우리 가게에 있기엔 참 아까워요!”“그게... 무슨 말이에요?”최군형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강소아가 최군형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누구는 외동딸이라 재산을 모두 물려받을 건데! 하, 정말 좋겠어요, 그렇죠?”“이...”키가 제 가슴께밖에 안 되는 강소아 앞에서 최군형은 조금도 움직일 염을 하지 않은 채 초등학생처럼 얌전히 꾸중을 들었다. 하지만 질투하는 강소아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질투하는 강소아가 좋았다.최군형이 씩 웃었다. 그 모습이 강소아를 더욱 자극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손에 든 도시락을 꽉 쥐었다. 어찌나 힘껏 쥐었는지 손가락 끝이 하얘졌다.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갔더니 최군형이 혼자 가게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혼자 밥도 잘 챙겨 먹지 못할 최군형이 걱정돼 밥을 싸 들고 가게로 달려왔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강우재도 이 정도의 대우는 해 주지 않았다.그런데 가게 문 앞에서 뭘 봤나?우미자가 제 딸과 최군형을 이어주려고 수작 부리는 모습을 목격하고 만 것이다.어떻게 이럴 수가!강소아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이 일이 최군형 때문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이웃 아줌마들이 최군형을 자기 집으로 들이고 싶어 호시탐탐 그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하지만...그녀는 기분이 나빴다. 짜증이 났다. 어쩔 수 없이 질투하게 됐다.다른 사람은 왜 그녀의 남편을 노리는 걸까?그 아줌마들은 아직 강소아와 최군형이 가짜 결혼인 줄 몰랐기에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만약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녀의 집에 쳐들어와 최군형을 빼앗으려 할 것이다.최군형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짜증이 났다. 잘생기긴 왜 이렇게 잘생겼어? 괜히 이목만 끌잖아!최군형은 잔뜩 토라진 강소아의 얼굴을 서서히 가까이하고는 그녀 손에 든 도시락통을 보고 살짝 웃었다.“밥 갖다주러 온 거에요?”강소아가 눈을
그날 밤 최군형은 평소처럼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갔다. 강소아는 아직 소파에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지만 그녀의 관심은 온통 다른 데 쏠려 있었다.최군형은 평소처럼 집에 들어와 신발을 바꿔 신고는 텅텅 빈 도시락통을 주방으로 가져가 여유롭게 씻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는 사람 같았다. 심지어 도시락도 싹싹 비운 채였다.강소아는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 앉아 최군형이 자신을 달래러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뒤 주방의 물소리가 끊기더니 최군형이 손을 닦으며 걸어 나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강소아는 기분이 조금 풀렸다. 금방 웃음을 지으려는데, 최군형이 불쑥 말했다.“아직도 화났어요?”‘아예 멍청한 건 아니네.’강소아가 볼 부은 소리로 “네”하고 대답하고는 얼굴을 홱 돌렸다. 최군형이 목을 가다듬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얼굴이 순간 따뜻해 보였다. 제법 진지한 모습이었다.“그... 얘기 좀 할까요?”강소아가 멍해졌다. 웃음기를 누르기 어려웠다. 머릿속은 온통 드라마에서 본 장면들뿐이었다. 여자 주인공이 화가 나 있으면 남자 주인공은 자존심 다 버리고 여자 주인공을 달랬다. 달래는 방식들은 조금씩 달랐지만 뭐 그런 건 상관없었다. 최군형은 어떻게 달랠까?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썩 낭만적인 모습은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꿀 발린 소리 몇 마디만 한다면 그걸로 만족이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니, 행동으로 그녀의 화를 풀어줄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강소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귀 끝이 타는 듯 뜨거웠다. 그녀는 애써 자기 생각들을 억누르며 담담하게 말했다.“네, 좋아요. 말해봐요. 듣고 있을 거니까.”“왜 화가 났는지 알고 있어요. 미자 아줌마가 저와 말하는 걸 들었죠?”“네...”“제 판단이 맞다면, 아줌마 외동딸은 모든 재산을 상속받을 거지만 우리 집의 모든 재산은 소준 씨가 갖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겠죠. 아줌마가 저를 설득해 이 집을 떠나게 할 거로 생각했을 거고요. 맞죠?”강소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최군형은 진지한
“뭐? 못 찾았다고?”구봉남이 깜짝 놀라 물었다. 구성 그룹의 CCTV 시스템은 업계 안에서도 알아주는 수준이었다. 그들이 각종 수단을 동원해 직원들을 감시하는 것은 그룹 내부의 비밀이었다.이런 인권침해에 대해서도 많은 직원들은 감히 맞서려 하지 못했다.그런데 이런 수단이 최군형에게는 쓸모가 없어졌다니?구봉남이 진정하고는 계속해 물었다.“왜... 못 찾는 건데?”“먼저 최군형의 입사 날짜를 찾고, 그 날짜에 근거해 모든 CCTV를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구성 그룹에 온 적이 없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가 운전하는 트럭도 조사했는데, 추적기가 고장 난 상태였습니다. 최군형은 그 차 말고는 다른 차를 운전해 본 적도 없어요. 그래서...”구봉남은 더는 못 듣겠다는 듯 낮은 소리로 으르렁댔다.“쓸데없는 놈들!”부하는 제 잘못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푹 떨구고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 더듬거리며 말했다.“저... 사실은...”“사실은 뭐?”구봉남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최군형의 행적은 찾지 못했지만, 다른 사실을 알아냈습니다.”“말해.”“오성 최상 그룹의 큰아들 이름도 최군형입니다!”“그러니까, 이 최군형이 그 최군형이라고?”구봉남이 멈칫하더니 인상을 쓰고 말했다. 부하가 머쓱하게 웃었다.“그런 건 아니지만, 이름이 같으니 정말 아는 사이 아닐까 하고요!”구봉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화가 욱하고 올라온 듯 책상 위의 서류를 집어 부하에게 집어던졌다.“최군형 세 글자를 맡아두기라도 했어? 온 세상에서 한 명만 쓸 수 있는 거야?”“아닙...”“오성에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그깟 동명이인 찾기가 어려워?”부하가 황급히 뛰쳐나갔다. 구봉남은 그제야 의자에 앉아 넥타이를 풀고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이것들 때문에 정말 미치겠다...전과자인 트럭 기사가, 심지어 결혼도 한 사람이, 어떻게 최상 그룹 도련님과 어깨를 나란히 한단 말인가?구봉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냉정히
형님의 계속된 경영 실수로 인해 구성 그룹은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그가 버티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구성도 없을 터였다.하필이면 이때 음료수 문제가 터졌다. 겨우 이를 수습했더니 구자영이 또 사고를 쳤다...구봉남은 더 이상 남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그가 정말 도련님이라면...”혼잣말을 웅얼거리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이어 그는 핸드폰을 들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지난번 그 호텔에 방 좀 잡아줘. 그리고 무슨 수를 쓰든 강소아를 불러나와... 아, 됐다. 내가 직접 부를게.”구자영 일 때문에 강소아는 구씨 가문의 모든 사람을 경계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가는 편이 더 좋을 것이었다.구봉남은 전화를 끊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거울을 보고 머리를 정리하며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오성.최군성은 병원에서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힘겹게 걷고 있었다. 그는 귀와 어깨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채 전화기 저편의 최군형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나 진짜 짜증나... 엄마 아빠는 집에서 서로에게 푹 빠져서 난 안중에도 없어. 지난번에 엄마가 달걀부침 먹고 싶다고 하니까 바로 해준 거 있지. 대여섯 개는 만들어서 골라 먹으라고 했다니까! 내가 하나만 먹자고 해도 안 줬어! 주 씨 아줌마한테 해달라고 하라면서!”최군형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주 씨 아줌마가 한 게 뭐 어때서? 우리 어릴 때부터 주 씨 아줌마가 밥 해주셨잖아.”“그거랑 그거랑 같아?”“그리고... 엄마 아빠가 애정 표현하시는 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그냥 그걸 보기가 싫어. 그래서 아이들이 갖고 노는 망치 풍선으로 한 대 때리려고 했지. 그런데 때리지도 못했어!”최군형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최군성은 망치 풍선으로 둘을 때리려다 아빠에게 반격당한 것이었다.최연준은 오랫동안 무술을 연마한 덕에 기척을 잘 읽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아직 예민했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니 등 뒤의 인기척을 읽었을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최군형의 마음속에 의심이 피어올랐다.입원 병동?육소유는 육씨 가문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모든 게 낯설 텐데, 병원에는 왜 왔을까? 어디 불편한 곳이 있나, 아니면 병문안인가?병문안이라면, 누구 보러 온 건가?그의 친부모인 육경섭과 임우정을 제외하고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이 더 있다는 건가?최군형이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서늘해졌다.최군성은 상처를 입었기에 계속 쫓아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형, 일단 여기까지 말할게. 나, 나 조금만 더 가면 따라잡을 것 같아... 걱정하지 마. 이번엔 꼭 성공하고 말 테니까.”“응, 너도 조심하고.”최군성이 짧게 대답하고는 급히 통화를 종료했다. 발목이 시큰거렸지만 원래 몸이 튼튼했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육소유는 보폭이 작고 걸음이 느렸기에 최군성은 금방 그녀를 따라잡았다.육소유는 조금 무서운 듯한 얼굴로 몇 걸음마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뒤돌아볼 때마다 최군성은 벽 뒤에 숨거나, 다른 환자 뒤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입원 병동 3층까지 걸어갔다. 최군성이 등 뒤에서 서서히 그녀에게 접근했다.“아!”육소유는 창백한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최군성도 깜짝 놀라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땅에 넘어질 뻔했다.육소유는 손을 뻗어 그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최군성이 그 손을 잡기도 전에 육소유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녀의 눈빛이 복잡해졌다.결국 그녀는 한편에 선 채 등을 벽에 붙이고 놀란 마음을 달랬다. 방금 습관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는데 커다란 무언가가 몰래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끌어당기려고 했다!반응이 빨랐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육소유는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헉헉거리며 눈을 크게 뜨고 최군성을 쳐다보았다.“저... 저 미행한 거예요?”“네?”최군성은 지팡이를 꽉 쥐었다. 방금 넘어질 뻔했을 때 발목을 잘못 움직이기라도 한 건지 다친 곳이 욱신거렸다.부축도 해주지 않는
최군성은 병원에서 겪었던 이상한 일을 전부 최군형에게 들려주었다.최군형은 듣자마자 알아채 곤 차갑게 피식 웃었다.“소유는 아마도 아저씨의 통제를 받는 것 같아. 허, 만약 정말로 그런 거라면 소유가 납치됐던 일에 육명진이 분명 연관이 있을 거야!”“만약 사실이 아니라면?”최군성이 계속 말을 이었다.“그럼 이 모든 일의 배후엔 육명진이 있었다는 거잖아!”“일단 이 일에 대해 누구한테도 이야기하지 마.”최군형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우린 아직 명확한 증거가 손에 없을 뿐 아니라 그리고... 경섭 아저씨랑 우정 아주머니의 기분도 고려해야 해. 두 분은 이미 딸을 찾은 거라고 믿고 계시잖아. 명확한 증거를 손에 넣기 전까지 우리는 두 분의 행복에 찬물을 끼얹을 수 없어.”“응, 알겠어... 형, 지금 육명진은 분명 우리를 경계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이 일을 조심히 알아봐야 해!”“흠흠, 우리가 아니라 너만.”최군형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다리가 다 나으면 다시 뒷조사하든 알아보자고. 절룩거리는 모습으로 뭔가를 캐내고 다닌다면 눈에 문제가 있지 않은 한 누구라도 수상하다는 걸 눈치챌 거니까.”최군성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치, 진짜로 요즘에 돌아올 생각 없는 거야? 나 발도 다쳤는데 정말로 나 보러 안 올 거야?”“너 보러... 가서 뭐해?”“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동생을 사랑하기는 하는 거야? 내가 정말로 형 사랑하는 친동생이 맞아?!”동생의 투덜거림에 최군형은 힘겹게 웃음을 참아내고 있었다.그리고 계속 진지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넌 그냥 발 한쪽만 다친 거잖아. 그런데 난 내 운명의 상대를 잃을 뻔했다고.”“와... 진짜! 최군형!!!”최군성은 이를 빠득 갈았다. 온몸에 소름도 오소소 돋았다.이때 타이밍 좋게 강소아가 위층에서 내려왔다.최군형은 더는 동생의 투덜거림을 들어줄 새가 없었다. 바로 전화를 끊고 바로 앉아 미소를 지으며 강소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강소아는 그를 보니 괜스레 그가 자신을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
소피아는 약속한 시간에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창가에 앉아 있는 낚시 모자를 쓴 중년 여성을 발견했다.소피아는 조용히 걸어가 밝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혹시... 허운주 선생님이신가요?”허운주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소피아는 직원에게 뜨거운 우유 한 잔을 주문하고 허운주 앞에 놓인 진한 커피를 치우며 부드럽게 말했다.“허 선생님, 이 나이에 이렇게 진한 커피는 드시면 안 돼요. 건강을 꼭 챙기셔야죠.”“고맙습니다...”허운주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절 찾아오신 이유가 뭘까요?”허운주는 천천히 눈을 들어 소피아를 바라봤다.소문에 따르면, 소피아는 현재 배현진의 연인이며 이혼 후에 아이를 키우면서도 배현진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사람이었다.허운주는 소피아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직감했고 소피아가 도움을 준다면 송윤지 같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쉬운 일이라고 확신했다.“제가...”허운주는 입술을 핥으며 머뭇거렸다.“어떻게 말씀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소피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허 선생님은 현진 씨의 선생님이시잖아요. 그 특별한 인연은 현진 씨도 평생 기억할 거고 저 또한 마찬가지예요. 저희는 모두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그러니 무슨 일이든 편하게 말씀하세요.”“저는 국제 유치원에서 어쩔 수 없이 사직하게 됐어요.”허운주는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깊이 찡그렸다.소피아는 놀란 듯했지만, 최근 일어난 상황을 대략 알고는 있었다. 우수 교사 선발에서 허운주가 송윤지에게 패했다는 소식은 소피아에게도 전해졌다. 자존심 강한 허운주로서는 그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소피라는 눈을 굴리며 허운주를 어떻게 이용할지 계획하고 있었다.“허 선생님,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소피아는 부드럽게 허운주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저를 딸이라고 생각하시고 속상한 일 있으면 다 털어놓으세요. 제가 도울 수 있
회의실은 단숨에 고요 속에 잠겼다. 강렬한 존재감의 인물이 문턱을 넘어서자, 방 안은 서늘하면서도 압도적인 기운으로 가득 찼다.원장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단숨에 그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왜 이제야 온 거야?”임지강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러나 그의 시선이 허운주에게 닿는 순간, 그 미소는 천천히 사라지고 대신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 자리 잡았다.“으흠!”원장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높였다.“오늘 이 자리에서는 투표 결과를 발표하는 것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원장은 한 장의 서류를 꺼내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유치원의 공식 도장과 함께 임지강의 힘찬 서명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임 대표님께서 우리 유치원에 10억을 투자해 주셨고 국제 유치원의 최대 주주가 되셨습니다. 유아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초심을 잃지 않고 임 대표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송윤지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번지자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입가에 번진 미소는 감추기 어려웠다.임지강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제가 이 유치원의 주주가 된 이상, 앞으로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 국제 유치원의 이익을 위해서일 것입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허운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래서 오늘, 교사 팀을 정비하려고 합니다.”허운주는 본능적으로 두 걸음 물러나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이곳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임지강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자신의 가치관조차 바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겠습니까?”허운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여기 있는 사람 중
원장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허 선생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오늘 표 집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투명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조작이라니, 그 말은 제가 개입했다는 뜻인가요?”“원장님, 제가 어떻게 감히 원장님을 의심하겠습니까?”허운주는 억지 미소를 띠며 비꼬듯 말했다.“하지만 표 차이가 이렇게 크게 나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원장님께서 관여하지 않으셨더라도, 누군가 뒤에서 무슨 일을 꾸몄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허 선생님...”원장은 화나 치밀어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막무가내인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허 선생님, 하신 말씀에 대해 책임지셔야 합니다.”송윤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윤지는 허운주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저는 단 한 번도 허 선생님께 폐를 끼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우수 교사 선발 역시 모든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정말 무슨 일을 꾸몄다면, 이렇게 공개적으로 표를 집계했겠습니까?”허운주는 송윤지를 노려보며 속으로 분노를 억눌렀다.평소 조용하고 소극적인 송윤지를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의 송윤지는 논리 정연한 주장으로 상대의 도발에도 굴하지 않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송윤지를 새롭게 보게 되었고 문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임지강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임지강은 회의실 밖에서 모든 상황을 눈여겨보고 있었다.특히 송윤지의 표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임지강은 마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곁에 있던 부하 직원조차 그의 변화를 놀라워하며 말했다.“송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 송윤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저 예전에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너무 조심스러워 본래의 자신을 숨겼을 뿐이었다.“임 대표님, 허 선생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지난번에 내가 해외 시장을 축소하라고 했지만, 당신 아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임수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국 문제는 그 여자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거야... 그 여자는 현진이를 부추겨 또 다른 일을 꾸밀 거고 현진이는 분명히 그 여자의 말을 들을 거야.”“그러니까 그들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임수정은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윤아야, 네가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회사들을 꽉 잡고 있어야 해! 너 혼자 힘들면 군성이랑 의논해도 되고 군형이나 소유의 도움을 받아도 돼. 네가 동의하지 않는 한, 네 오빠는 너한테서 단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어. 이해했지?”“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꼭 잡았다.“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이 모든 재산은 우리 조상들이 쌓아온 거야. 절대 우리 세대에서 무너져선 안 된다!”“네, 저 이해했어요.”배윤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가 하루빨리 제정신을 차려서 우리가 예전처럼 가족으로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임수정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기침하며 숨을 고르는 임수정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소피아가 복도 모퉁이에 숨어 임수정의 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벽을 짚고 있던 소피아는 주먹을 꽉 쥐었고 마치 벽을 뚫을 듯 힘을 주고 있었다.방 안에서 나눈 대화는 모두 소피아의 귀에 생생히 들렸다.오늘 소피아가 임수정을 찾아온 건, 회사 본사에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은행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지금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재산 전부가 이 어린 소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여보세요, 소피아!”그때, 배현진이 전화를 걸어왔다.“지금 엄마 집에 있어? 나 일이 아직 안 끝나서 조금 있다가 가려고. 엄마한테 전해줘.”“그럴 필요 없어.”소피아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임수정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배경원은 막 씻은 딸기를 가져왔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딸기의 끝부분을 잘라 임수정의 입에 넣어주었다.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두 사람의 애정과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그들의 관계는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배윤아는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엄마를 위해 영양제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새로 그린 그림도 품에 안고 있었다.“엄마, 아빠, 저랑 군성이가 이번에 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만화를 하나 출간하려고 해요. 내용은 한 부부가 젊었을 때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거예요... 사실 주인공 부부가 바로 엄마, 아빠예요! 보세요, 이렇게 그렸는데 괜찮죠?”임수정과 배경원은 딸이 그린 그림을 보며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부부는 원래 대부분의 기대를 아들에게 걸고 있었다. 이는 남녀 차별 때문이 아니라 배윤아의 성격이 어릴 적부터 세상일에 무심하고 경쟁을 피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계승자로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딸이 오히려 아들보다 더 믿음직스럽다.“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잡으며 눈빛에 깊은 의미를 담아 말했다.“엄마가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게 있어.”“뭔데요?”배윤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임수정은 베개 밑에서 갈색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핵심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이것뿐만 아니라, 본사의 도장도 있어.”배경원은 도장까지 꺼내 배윤아에게 건넸다. 배윤아는 깜짝 놀라 귀중한 물건들을 손에 들고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아빠, 엄마, 이건 도대체...”“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었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아. 요양원에 머무는 동안은 회사로 돌아가 직접 관리할 수도 없을 거야.”배경원은 평소 장난스러웠던 모습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배윤아를 바라보았다.“윤아야, 엄마, 아빠는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맡기기로 했다. 네가 책임을 져야 해.”배윤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