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은 본래 거지들이 온 이유가 노인의 병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임원과 관련된 일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임원의 현재 신분을 고려할 때 그녀는 매우 깊숙한 곳에 숨어 있을 터였고, 거지들이 매일 여기저기서 다양한 정보를 얻는다 할지라도 임원의 흔적을 그렇게 빨리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그렇기에 그들이 ‘명희’를 찾았다고 말했을 때, 김단은 다소 실망했다.그녀는 그들이 그렇게 쉽게 찾아낸 것이라면 ‘명희’는 임원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어쩌면 그저 우연의 일치로 이름이 같은 여자일 수도 있다.하지만 이내 거지들이 말했다. “알아보니 그 별장은 진산군 어르신의 큰 도련님, 즉 아씨의 오라버니 되시는 분의 명의였습니다!”“그리고 또 있어요! 아씨, 말도 마세요. 며칠 전 아침 일찍 진산군 댁에서 임씨 부인을 별장으로 보냈다고 합니다!”이 말을 들은 김단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임학이 이유 없이 사람을 별장에 숨기지 않을 것이고, 이유 없이 임씨 부인을 별장으로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유일한 가능성은 별장에 숨어 있는 사람이 임원이라는 것이다!임학이 임씨 부인을 임원에게 보내 모녀간의 정을 나누도록 한 것이다!김단은 심호흡을 하고 표정 관리를 한 뒤 앞에 있는 자들을 보며 웃었다. “어르신은 어떻느냐?”“많이 좋아지셨습니다!”한 사람이 말했다. “아씨 덕분입니다! 어르신께선 오늘 저희와 함께 구걸하러 나가실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셨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더 쉬셔야 한다고 말려서 나오시지 못하게 했습니다!”이 말을 들은 김단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푹 쉬게 해야 한다.”말을 마친 그녀는 은화 하나를 꺼내 앞에 있는 거지에게 건넸다. “이걸로 맛있는 걸 사 먹거라.”“아니요, 아니됩니다!”거지들은 연신 손을 내저었다. “저희는 아씨에게 이미 많은 은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또 받을 수 있겠습니까?”김단은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자네들이 나를 많이 도와주지 않았나! 받거라, 자네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김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함께 자리에 앉았다.“오늘 왜 갑자기 나를 만나려고 한 것이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임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사실 김단의 편지를 받았을 때 그는 약간 걱정하였다.김단이 임원의 일을 알고 갑자기 자신을 찾은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그녀가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그녀가 평양원군과 알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분명 어색할 터였다.잘 모르는 사람과 한 지붕 아래에서 산다는 것은 확실히 불편할 것이다.이에 그는 김단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비록 그 역시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아무리 희박하더라도 그는 이러한 가능성에 한 줄기 희망을 품고 싶었다!김단은 임학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제가 다른 술은 잘 못 마셔서 매실주 한 병만 시켰습니다.”임학은 술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했다. “네가 매실주를 가장 좋아하다는 건 알고 있다. 나중에 사람을 시켜 두어 병 보내주마!”말을 마친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매화당으로 보내줄까?”매화당은 이미 그가 그녀를 위해 되찾아 두었다!김단은 임학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척 창밖을 바라보았다.해는 이미 졌고, 하늘은 밤이 되기 전의 푸르스름한 남색을 띠고 있었다.밝은 별 몇 개가 하늘에 걸려 있었다.김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 풍경이 정말 좋습니다. 한눈에 한양 절반을 볼 수 있는 것 같아요.”“네가 좋다면 이 오라버니는 취향각 전체를 사서 너에게 줄 수도 있다. 매일 와도 좋고, 여기서 살아도 된다!”이어서 그는 다시 화제를 돌렸다. “단아, 평양원군은 결국 남이지 않느냐, 네가 그 자의 집에서 살면 남들이 분명 욕할 것이야!”임학은 그녀를 평양원군 저택에 살게 하는 것보다 취향각을 사서 주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김단은 창밖을 향한 시선을 돌려 임학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임학은 김단이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는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오늘 나를 찾은 것도 결국 그 일 때문이었구나.”말하면서 그는 김단을 바라보며 약간 실망한 말투로 말했다. “어머니가 편찮으신 건 알고 있느냐? 내가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에 대해 단 한마디라도 물은 적이 있느냐? 네가 나를, 우리 집안을, 그리고 어머니가 너를 명정대군에게 소개했던 사실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단아, 그분은 열 달 동안 배 아파하시며 거의 목숨을 걸고 너를 낳아준 어머니 시다! 어떻게 그리 매정하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게냐?”말을 마친 임학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마치 부족하다는 듯 술병을 가져와 크게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했다. “원이는 스스로 돌아온 것이다. 나도 그날 그 아이를 봤을 때도 매우 놀랐다. 거지 차림에 온몸은 더러웠고, 네가 예전에...”임학은 무의식적으로 김단이 세답방에서 나왔을 때보다 훨씬 비참했다고 말할 뻔 했다.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김단의 모습은 임원의 거지 차림보다 확실히 나았다.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궁녀 복장을 하고 궁녀처럼 꾸며졌기 때문이었다.그렇기에 보기에 깨끗하고 단정해 보였던 것이다.하지만 그 단정한 옷 아래에는 수많은 흉터가 뒤섞여 있었다. 이는 3년 간 그녀가 겪었던 모든 고난에 대한 증거였다.김단은 입을 다문 채 임학을 바라보았고, 표정은 매우 평온했다.임학은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돌아오는 길에 많은 수모를 겪었다. 심지어 누군가에 의해 더럽혀져 순결을 잃었다고 하였다! 나는, 나는 도저히 눈뜨고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별장에 데려다 놓은 것이다! 사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날 밤, 그 아이의 사망 소식을 전달받았었단다. 동래 관아에서 도장을 찍어 보낸 서신이었으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어 있었다. 임원은 사망한 것이
“하하” 김단은 웃음을 터뜨렸다.임학은 결국 미간을 찌푸렸다. “왜 웃는 것이냐?”“두 분이 너무 위선적이라 웃는 것입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환자를 낯선 곳으로 보내 낯선 사람들이 돌보게 하였으면서, 뻔뻔하게 부인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시지 않습니까!”김단은 목소리가 싸늘해졌고, 임학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만약 도련님이 어느 날 깨어났는데 주변의 모든 것이 낯설게 변해있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어떨지 생각해본 적 있으십니까? 도련님 같은 남성도 당황할 텐데, 하물며 부인은 환자시지 않습니까!”순간 임학은 비로소 깨달았다.그의 동공이 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김단은 계속 꾸짖었다. “어의는 두 분에 대해 도저히 답이 없다고 생각하여 말을 섞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고도 뻔뻔하게 제 앞에서 효자 흉내를 내시는 겁니까!”임학은 벌떡 일어섰다.그는 두 눈으로 김단을 쏘아보았고, 가슴은 격하게 두근거렸다. 크게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조차 떨려왔다. “지금 당장 어머니를 모셔와야겠다!”말을 마친 그는 밖으로 나갔다.김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도 가겠습니다!”그녀는 임원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임학은 김단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지만, 그러는 것이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하지만 어쨌든 그녀가 나타나 어머니가 그녀를 보게 된다면, 어머니의 상태가 훨씬 좋아질지도 모른다!이에 임학은 고개를 끄덕였고 김단을 데리고 별장으로 갔다.별장은 성동에 위치했다.마차가 별장 앞에 멈춰 섰을 때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별장 대문 앞에는 희미하게 빛을 내는 노란색 등불 두 개가 걸려 있었고, 앞의 계단만을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임학이 앞으로 나서 대문을 두드렸다.곧 하인이 나와 문을 열었다.임학인 것을 확인한 하인은 황급히 허리를 굽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임학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어머니와 원이는 어디 있느냐?”“도련님, 아씨께서는 지금 마님을 목
“임 낭자, 오랜만이군요.”김단의 차디찬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임원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임학 곁으로 다가섰다.“오라버니…”비록 김단에 대한 증오가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지만 지금 이 순간 김단의 등장이 그녀의 목을 죄어왔다.임학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지만 평소처럼 임원을 달래주지 않았다.대신 시선은 다시 김단에게로 향했다.열다섯 해를 남매로 지내오며 쌓인 미묘한 감정들이 한순간에 퍼져나갔다.김단은 망설임 없이 집안으로 들어섰다.병풍 뒤로 들아가자 어린 몸종 하나가 허둥지둥 임씨 부인에게 옷을 입히고 있었다.그 몸종은 김단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화려하고 고귀한 그녀의 옷차림을 보고 평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마님께서 곧 옷을 다 입으십니다.”김단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임씨 부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임씨 부인은 고개를 숙인 채 벌벌 떨고 있었다.그녀의 눈빛은 겁에 질려 있었는데 김단도 그토록 연약하고 무기력한 표정은 처음 보았다.진산군 댁의 뒷문에서 마주쳤을 때도, 임씨 부인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을 때도 이런 표정은 아니었다.김단은 천천히 욕조 안의 물을 손끝으로 만져보았다.차가운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지자 김단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이를 지켜보던 몸종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온몸이 굳어버렸다.혹시라도 화를 입을까 싶어 황급히 임씨 부인을 병풍 밖으로 모셨다.다른 몸종들도 한곳에 모여 조심스럽게 고개를 떨군 채 서 있었다.임씨 부인의 평온한 얼굴을 확인한 임학은 안도하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어머니!”그 다급한 외침에 임씨 부인은 마치 깊은 꿈에서 깨어난 듯 고개를 들었다.“학이?”“어머니! 저예요!”임학는 두 손으로 임씨 부인의 어깨를 잡으며 안타까운 심정을 내비쳤다.“어머니, 괜찮으세요?”임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임학의 손을 꼭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나… 나 집에 가고 싶어… 나 좀 데려가 줘…”“네, 어머니. 제가 곧 모시고 돌아가겠습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임원이
그럴듯한 변명이었다.그러나 임학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그는 차디찬 목소리로 다시 한번 쏘아붙였다.“그렇다면 욕조에 가득한 찬물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오? 어머니께서는 연세도 많으신데 가을이 다가오는 이 시기에 찬물로 목욕을 시킨다고? 어머니를 병들게 하려고 한 것 아니오?”“아닙니다. 아닙니다.”임원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다급히 해명했다.“찬물은 사람의 혈자리를 자극해서 정신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찬물로 목욕하면 어머니 병에 도움이 될 거라고. 보세요 오라버니. 덕분에 오늘 어머니께서 오라버니를 알아보지 않았습니까?”임학은 순간 멈칫하며 어머니를 돌아보았다.임씨 부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학아...”임학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녀의 말이 맞았다.한동안 자신을 비롯한 모든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했던 그녀가 지금은 확실히 자신을 알아보았다.분노로 가득했던 마음이 서서히 풀리며 혼란과 죄책감이 뒤엉켜 버렸다.“그래서… 낭자가 한 짓이 모두 어머니를 위한 것이오? 어머니를 위해 일부러 그렇게 했단 말이오?”더 이상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임원은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당연히 어머니를 위해서지요! 오라버니, 제가 평소에 얼마나 어머니를 신경 쓰고 모셨는지 아시잖아요. 그런데 왜 이런 오해를 하시는 거예요?”임원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얼굴에 남은 선명한 손자국이 그녀의 눈물과 더해져 더욱 불쌍함을 자아냈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임학은 죄책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혹시 내가 막무가내로 몰아 붙인 건 아닐까?그때 임씨 부인은 임원의 울음소리에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그녀는 임원의 어깨를 토닥이며 조용히 말했다.“왜 우느냐? 누가 널 괴롭혔느냐? 울지 말거라.”임원의 흐느낌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김단에게로 돌렸다.어쩐지 이 모든 일이 김단의 잘못 같았다.김단이 욕조의 물이 차갑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김단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임원과 임학 사이의 끈끈한 우애는 그녀에게 이미 익숙한 풍경이었다.그러기에 그들이 앞으로 어떤 연극을 벌이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지금 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하나, 임씨 부인의 목에 남은 상처였다.비록 이제 더 이상 임씨 부인을 ‘어머니’라 부를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15년 동안 낳아 기른 사람이다.임학의 말대로, 임씨 부인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그녀를 낳았다.그렇게 힘들게 자신을 낳아준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한다고 해도 다른 누군가에게 학대당하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 가해자가 3년 동안 자신을 대신했던 가짜라면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김단의 차가운 시선을 따라가 보니 임씨 부인의 옷깃 아래로 드러난 상처 자국이 보였다.순간 임원은 크게 놀라며 몸을 떨었다.임학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급히 다가가 임씨 부인을 일으켰다.그는 조심스럽게 임씨 부인의 옷깃을 당겨 확인해 보았다.선명하게 남아 있는 시퍼런 멍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그 순간 임학의 심장이 마구 뛰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분노가 치밀어 오른 그는 고개를 홱 돌려 임원을 노려보았다.그는 끝까지 이성을 붙잡으려 애쓰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설명해 보시오. 이건 또 무슨 상황인 것이오?”임원은 마치 죄인처럼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녀는 급히 무릎을 꿇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했다.“오라버니… 저도 몰라요! 어머니 목에 그런 상처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어머니가 스스로 그런 거 아닐까요?”그때였다.임씨 부인은 그 말을 듣자마자 다급하게 임학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그런 것이다. 내가 스스로 한 거야. 원이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니 화내지 말거라.”임학은 혼란스러웠다.상처를 감싸고 두둔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그때 임원은 다시 흐느끼며 울먹였다.“오라버니, 제가 얼마나 힘들게 돌아왔는지 알잖아요. 아버지와 어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 울부짖는 목소리가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들려왔다.“오라버니!”임원이 간절하게 불렀지만 임학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만이 공기 중에 울려 퍼졌다.“둘 중 누가 임 씨고 누가 김 씨인지부터 분명히 하시오!”그 한마디가 비수처럼 내리꽂히자 임원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임학은 망설임 없이 임씨 부인을 부축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김단은 무릎 꿇고 땅에 주저앉아 있는 임원을 내려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낭자는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소.”혹독한 추위를 자랑하는 동래는 생활하기 적합한 곳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그런데도 돌아오는 것을 선택하다니...김단은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임원의 몸이 눈에 띄게 들썩였다.이럴 리가 없는데.현실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임학 앞에서 불쌍한 척 연기하면 그가 반드시 자신에게 새로운 신분을 마련해 줄 거라고 믿었었다.진산군 댁의 울타리 안에서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굶주리며 사는 일은 없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비단옷과 진수성찬은 아닐지라도 먹고 입는 것만큼은 걱정할 필요 없을 거라 확신했는데...이 상황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그녀의 생각과 계획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 현실에 절망감만이 감돌았다.임원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에는 두려움과 함께 깊은 원망이 서려 있었다.“왜 그렇게 나를 괴롭히는 것이오? 내가 행복해지는 게 그리도 싫소?”김단은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반문했다.“그럼 낭자는 왜 할머니를 죽였소?”임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내가 할머니를 죽였다고? 무슨 헛소리하는지 모르겠소. 할머니는 어차피 죽을 몸이었소. 내가 아니더라도 이번 여름을 넘기지 못했을 거란 말이오.”하지만 김단의 목소리는 더욱 날카로워졌다.“하지만 할머니는 분명 평온하게 떠나실 수 있었소. 낭자만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